어느 건달의 방랑기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Joseph von Eichendorff, 1788-1857)의 노벨레
작가 |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Joseph von Eichendorf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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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826 |
장르 | 노벨레 |
작품소개
독일 낭만주의 작가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가 1826년에 발표한 노벨레이다. 방앗간 아들로 태어나 방앗간 일을 돕지도 않고 빈둥대다가 아버지에게 집에서 쫓겨난 ‘게으름뱅이’는 바이올린 한 대를 들고 길을 떠난다. 천성이 명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는 곧 길에서 만난 귀부인들의 귀여움을 받고 성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인 아우렐리에가 애인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방랑길에 오른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에서 ‘게으름뱅이’는 방랑을 그만두고 정착을 권하는 여러 유혹을 받으나 아우렐리에의 편지를 받고 다시 그녀가 있는 성으로 돌아가려 한다. 중간의 여러 오해와 소동 끝에 먼 길을 돌아 성에 다시 도착한 ‘게으름뱅이’는 결국 그간의 오해를 풀고 아우렐리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아우렐리에는 귀족이 아니라 백작부인의 양녀였고 결혼선물로 포도밭이 딸린 작은 성을 하사받는다. 이 작품은 독일 후기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자연과의 합일, 자유로운 삶을 향한 동경, 시와 음악에 대한 사랑 등 낭만주의의 이상을 보여준다. 주인공을 부르는 별칭 ‘게으름뱅이’(Taugenichts)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뜻으로 노동 윤리를 강조하는 시민적 삶과 대립하는 인물 유형이다.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삶의 예술을 억압하는 시민적 노동 윤리를 비판하는 성격을 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게으름뱅이’의 반발이 귀족 사회로의 ‘운 좋은’ 편입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아이헨도르프는 소설적 서사에 많은 시와 노래를 삽입하는 열린 형식을 선보인다. 국내에서는 1959년 <방랑아>라는 제목으로 이영구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양문사).
초판 정보
Eichendorff, Joseph von(1826):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 In: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 und das Marmorbild. Zwei Novellen nebst einem Anhange von Liedern und Romanzen. Berlin: Vereinsbuchhandlung, 1-136.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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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이 소설은 독일 후기 낭만주의 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국내에서는 1959년에 초역된 이래 2025년 현재까지 총 다섯 차례 번역되었다. 일찍이 1959년 고려대 교수 이영구에 의해 <방랑아 放浪兒>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됐고, 1974년에는 김주원 역으로 <방랑자 放浪者>라는 제목하에 지성출판사에서 출판됐다. 이후 오랫동안 새 번역이 없다가 2000년대에 세 종의 번역이 새롭게 출간된다. 2001년 숙명여대 교수 정서웅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방랑아 이야기>가 나왔고, 2005년에는 김보회에 의해 <어느 건달의 삶>(보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으며, 2008년에 서울여대 교수 구정철의 번역으로 <어느 건달의 방랑기>가 출판됐다. 번역본의 제각기 다른 제목에서 제목 번역이 까다로운 문제임을 엿볼 수 있다. 원제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는 직역하면 “어느 쓸모없는 자의 삶에서”라는 뜻으로, 여기서 “Taugenichts”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번역의 관건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 “Taugenichts”는 보통 게으름뱅이, 무위도식자, 건달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로, 이영구와 정서웅은 방랑아, 김주원은 방랑자, 김보회와 구정철은 건달이라고 번역했다. 정서웅은 역자해설에서 이 단어를 “무위도식자”라고 옮기기도 했지만 제목에는 쓰지 않았다. ‘무위도식자’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운 느낌과 비난조의 느낌이 소설의 해맑은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대신 그는 초역자 이영구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여기저기 떠돌며 세상 구경을 하고 모험을 한다는 내용에 근거하여 ‘방랑아’를 제목으로 내걸었는데 김주원의 ‘방랑자’와 달리 소설 주인공의 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인 듯하다.[1] 한편, 김보회와 구정철은 문제의 단어를 ‘건달’로 옮겼다. ‘건달’의 어원이 본래 힌두교와 불교에서 가무에 능한 아름다운 음악의 신 ‘간다르바’에 있으므로 바이올린을 켜고 다니는 곱상한 얼굴의 주인공을 지칭하기에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독자들에게 ‘건달’이 ‘백수건달’의 뜻보다는 ‘폭력배’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어 소설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심어줄 위험도 있다.
이제 개별 번역본을 비교·고찰하여 각 번역본의 특징을 확인해보겠다. 여기서는 총 세 종의 번역본(이영구, 정서웅, 구정철)만을 다루고자 한다. 그 이유는 먼저 김주원 역이 이영구 역에 지나치게 의존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출판사에서 기존에 나와 있는 초역을 다듬어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역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고, 제목에도 “A Wanderer”라고 수상쩍은 영어 제목이 병기되어 있을 뿐이다.[2] 다음으로 김보회 역본은 놀랍게도 국립중앙도서관에만 소장되어 있고 이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다. 역시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므로 개별 고찰에서는 제외했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이영구 역의 <방랑아>(1959)
국내 초역인 이영구의 번역은 1959년에 탐문당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방랑아”라고 제목을 처음 붙임으로써 이후의 번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정서웅과 구정철 역의 제목에 모두 ‘방랑’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된다. 1950년대 말에 이루어진 번역이라 외래어 표기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작가 이름은 “요셉 폰 아이헨돌프”로,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윈”(17), 프라하는 “뿌라그”(113)로 표기되어 있다. 또 바이올린은 “봐이오린”(15), 케이크는 “케키”(68), 아우렐리에는 “아우레”(76), 치터는 “체텔(三絃琴)(61)이라고 옮기고 있어 일역에서 중역했거나 참고한 흔적도 보인다. 그밖에도 정원사는 “원정사”(19)로, 라틴어는 “나전어”(113)로 지칭되는 등, 이제는 구식이 된 단어들이 빈번히 사용된다. 이영구 역은 원문 구조에 충실하기보다는 역자의 부연 설명과 개입이 많은 번역이다. 독자가 머릿속에서 상상하기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역자가 말을 집어넣고 구문을 달리했다. 가령 주인공 ‘나’가 길에서 만난 귀부인들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성에 들어온 순간을 묘사한 대목을 보자.
In diesem Schlosse ging es mir wunderlich.[3](12) 이 으리으리하도록 훌륭한 이 집에서 나는 여러 가지 시골뜨기 꼴을 당하고 말았다.(이영구, 18) 성 안에 들어서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정서웅, 18) 성안의 분위기는 나에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구정철, 12)
위 예문은 문단의 시작 부분으로, 그 의미는 정서웅 역이 제일 정확하다. 구정철 역의 ‘이상하다’라는 단어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므로 원문과 약간 거리가 있다. 반면 이영구 역은 원문에 없는 말을 잔뜩 집어넣었다. “으리으리하도록 훌륭한”이라는 말을 넣어 ‘나’가 이 성을 보고 주눅이 들었음을 전달하고, “시골뜨기 꼴”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성에서 ‘나’가 겪은 “놀라운 wunderbar”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내용을 잘 아는 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극 개입한 것이다. 이영구 역은 역자의 말맛이 좋고 문체가 유려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Als sie hernach in der Nacht einmal aufwachte, hörte sie draußen Pferdegetrappel. Sie guckte durch das kleine Kammerfenster und sah den buckligen Signor, der gestern so viel mit mir gesprochen hatte, auf einem Schimmel im Mondschein quer übers Feld galoppieren, daß er immer ellenhoch überm Sattel in die Höhe flog und die Magd sich bekreuzte, weil es aussah wie ein Gespenst, das auf einem dreibeinigen Pferde reitet.(51)
그런 일이 일어난 뒤 그 여자는 두 번이나 밤중에 잠이 깨어 일어나 있으려니 바깥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침실의 작은 창문으로부터 주의하면서 내다보았더니 어제 나와 주책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던 예의 난장이 신사가 백마를 타고 밝은 달빛 속을 꿰뚫어 쏜살같이 몰아갔기 때문에 연달아 말 안장에서 두서너 척(尺)도 더 높이 뛰어오르는 것을 먼발치로도 확실히 볼 수 있었다고 말하고 그 주력(走力)은 정말 번개같이 빠른 솜씨라는 것을 덧붙여 말하였다. 그 모양은 흡사 세 발을 가진 말을 타고 달리는 유령(幽靈)과도 같이 보였으므로 그 여자는 자기가 혹시 마귀에라도 흘린 것이 아닌가 하여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다 십자가(十字架)를 그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영구, 63, 밑줄 필자 강조) 그후 그녀는 밤에 자다가 깨어나서 밖에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작은 방의 창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다가 어제 나와 이야기 했던 그 꼽추허리의 영감이 달빛 속에 백마를 타고 들판을 가로 질러 달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말안장에서 몇 자 정도 높이 공중에 뜬 채 말을 몰아서 그 모습이 마치 세 발 달린 말을 타고 가는 도깨비 같이 보여 그것을 보고 그 처녀는 성호를 그었다는 것이다.(구정철, 72-73)
간밤에 일어난 해괴한 일의 유일한 목격자인 여관 하녀에게 들은 말을 ‘나’가 전하는 대목이다. 다른 번역본과 비교해 보면 이영구 역의 길이가 유난히 긴 것을 알 수 있다. 밑줄 친 부분처럼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도록 부사나 수식어를 집어넣어 이야기에 양념을 가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탤릭으로 강조한 부분처럼 목격자의 시점을 구체화한 것도 독자가 이야기를 직접 듣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에 비해 구정철 역은 원문에 충실한 덕분에 이영구 역보다는 밋밋한 결과가 나왔다. 소설에는 중간중간 시와 노래가 여러 편 나온다. 이영구 역은 이러한 시를 가장 노래답게 번역한 역본이다.
Die Bächlein von den Bergen springen,/Die Lerchen schwirren hoch vor Lust,/Was sollt ich nicht mit ihnen singen/Aus voller Kehl und frischer Brust?(10)
시냇물 맑은 소리 산에서 솟고/종달새 노래 소리 하늘 더 높이/즐거움을 손짓하여 부르는구나/소리 높여 부르자 나의 노래를.(이영구, 16)
위 번역을 읽어보면 마치 우리에게 친숙한 동요 가사를 읽는 느낌이 든다. 원문의 각운을 맞추는 대신, 음절 수를 일정하게 하여(3-4-3-2/3-4-3-2/4-4-3-2/4-3-3-2) 시적 리듬을 살려냈다.
Wer in die Fremde will wandern,/Der muß mit der Liebsten gehn,/Es jubeln und lassen die andern/Den Fremden alleine stehn.(61)
낯선 나라로 가야 할 나그네/사랑하는 여인을 붙여 가거라/끼리 끼리 짝 지어 노래부르며/외로운 나그네 돌아나 보랴.(이영구, 75)
Am liebsten betracht ich die Sterne,/Die schienen, wenn ich ging zu ihr,/Die Nachtigall hör ich so gerne,/Sie sang vor der Liebsten Tür.(62)
별을 쳐다보는 나의 즐거움/네가 빤짝거려 나는야 가면/소쩍새 기꺼운 노래 소리/창 가의 네 노래 기꺼웁구나(이영구, 75)
위의 시 번역에서도 역시 음절 수를 일정하게 맞춰 정형시적 리듬을 살려낸다. 특히 첫 번째 예시의 4행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느라 “이방인을 혼자 세워둔다”라는 뜻의 시구를 “외로운 나그네 돌아나 보랴”로 번역한 것은 역자의 절묘한 작사 감각을 방증한다. 두 번째 예시에서도 “별”과 “소쩍새”를 너라고 호칭함으로써 보다 정감을 강조하고, 원시의 나이팅게일을 소쩍새로 치환하여 한국 독자에게 친숙한 가요나 동요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해당 시가 고향 독일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이러한 치환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영구 역은 번역보다는 번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윤문과 번안을 선보여도 특정 부분에서는 오히려 다른 두 번역본보다 더 정확히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가령 백작부인의 딸과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귀족 청년이 주인공에게 노래를 청하며 하는 말을 보자.
“Ich danke Ihnen für den sinnigen Einfall! ein Volkslied, gesungen vom Volk in freiem Feld und Wald, ist ein Alpenröslein auf der Alpe selbst – die Wunderhörner sind nur Herbarien –, ist die Seele der Nationalseele.”(17)
“총명한 착안에 감사합니다. 넓디 넓은 들에나 숲에 나가서 민중이 부르는 민요는 알프스 목장에 피는 알프스 산의 장미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지요. 말하자면 국민정신의 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민요집이라고 하는 것은 필경 채집한 꽃묶음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이영구, 25) “멋진 아이디어를 내주시어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민요 한 곡을 부탁합니다. 들과 숲에서 민중이 노래하는 민요는 알프스 산에 피는 알프스 장미와 같지요. 민족 정신의 정화라고나 할까요?”(정서웅, 26)
“야외에서 민중이 부르는 민요에 대한 당신의 기발한 생각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바로 제대로 된 고원에서 부르는 고원의 장미와 같은 것이지요. 소년의 마적에 나오는 노래들은 모두 표본식물과 같은 것이고요. 야외에서의 민요가 진짜 민족의 얼이 들어 있는 노래지요.”(구정철, 20)
위에서 귀족 청년은 아르님과 브렌타노가 편집한 <소년의 마적>과 같은 민요집과 실제 민요를 대비시킨다. 민요가 싱싱하게 피어 있는 야생의 꽃이라면, 민요집은 꽃을 채집해 만든 죽은 표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은 – 비록 <소년의 마적>이라는 제목은 누락했지만 - 이영구 역이다. 정서웅은 이 부분을 아예 누락했고, 구정철은 번역하기는 했으나 알프스를 고원으로 번역해 의아함을 자아낸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리고 만사가 좋았다 – und es war alles, alles gut!”(111)이다. 이 문장은 소설의 순진한 낙관주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평단에서 평가절하되기도 했는데, 흥미롭게도 이 문장을 유일하게 번역한 판본이 이영구 역이다. 다른 두 판본은 아예 번역하지 않고 끝을 맺었다. 물론 이영구 역은 여기서도 역자가 크게 개입하여 다음과 같이 의역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즐거움과 행복에 잠겨 갔다.”(143)
2) 정서웅 역의 <방랑아 이야기>(2001)
정서웅 역은 2001년에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됐다. 검토한 번역서 가운데 역자 해설이 가장 충실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소설의 해학적인 매력을 한국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손색이 없다.
정서웅 역은 풍부한 어휘력과 유려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하는 감각적인 번역이 특징이다. 가령 주인공이 백작의 성에서 정원사 보조로 일하게 되어 넉넉한 돈을 받게 되었을 때, 정서웅은 “술추렴을 하고도 남을 만큼 용돈도 생겼다 mehr Geld, als ich zum Weine brauchte”(정서웅, 19; 원문 13)라고 번역했다. 이는 가령 다른 번역, “돈도 술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구정철, 14)와 비교했을 때 보다 읽는 재미를 준다고 하겠다.
소설에는 주인공 Taugenichts를 부르는 그와 유사한 뜻의 수많은 별칭이 등장한다. 이것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번역하는가가 소설을 읽는 재미를 좌우할 수 있는데, 정서웅 역의 번역은 이런 점에서 강점을 보인다. 마차에 탄 두 귀부인이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는 ‘나’를 보고 “Ei, lustiger Gesell”(10)이라고 부르는데, 정서웅은 “이봐요 멋쟁이 도련님”(16)이라고 번역한다. “참 멋쟁이시군요”(이영구, 17), “아이고 재미있는 분이시네”(구정철, 10)보다 좀 더 재미나게 느껴진다.
정서웅 역은 원문의 문장 구조나 문단 형태에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문단을 잘게 나누는 것은 물론, 독자들이 읽기 좋게, 또 한국어의 리듬에 맞게 문장을 쪼개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Ich sprang aber auf die Seite, und so stolperte er weiter, und ich hörte ihn noch lange, bald grob, bald fein, durch die Finsternis mit sich diskurrieren.(40)
[...] 나는 껑충 뛰면서 몸을 피했다. 그는 계속해서 비틀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혼자만의 논설을 늘어놓았다.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부드럽게.(정서웅, 57, 밑줄 필자 강조)
위 예문에서 역자가 문장을 얼마나 쪼개어 놓았는지 볼 수 있다. 등렬접속사로 연결된 구를 독립적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은 물론, 마지막 문장에서 보듯이 부사까지도 문장으로 독립시켰다. 이로써 문체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강조 효과를 냈다.
또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목사가 반농담으로 주인공을 “아주 유쾌한 방랑아 ein luftiger Vogel”(정 142; 원문 98)이라고 부르자 주인공이 이를 부연하는 말도 보자.
“ein Vogel, der aus jedem Käfig ausreißt, sobald er nur kann, und lustig singt, wenn er wieder in der Freiheit ist.”(98)
“될 수 있으면 새 장을 벗어나려는 새, 자유 천지에 다시 놓여지면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새 – 그런 방랑아 말이지요?”(정서웅, 142) “그는 가능한 한 어떤 새장에도 갇혀 있지 않고 그것을 뛰쳐나와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신나게 노래 부르는 새와 같은 사람이죠.”(구정철, 141)
원문과 비교해 보면 정서웅 역은 ‘새’를 반복하여 원문에 없는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이는 구정철 역과 비교해 보면 그 리듬감이 더욱 잘 느껴진다.
Ich hatte recht meine heimliche Freude, als ich da alle meine alten Bekannten und Kameraden rechts und links, wie gestern und vorgestern und immerdar, zur Arbeit hinausziehen, graben und pflügen sah, während ich so in die freie Welt hinausstrich.
나는 여기 저기서 아는 사람이나 친구들이 어제도 그제도 언제나 한결같이 일에 쫓기며 땅을 파고 밭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서 내가 지금 자유스러운 세상으로 훨훨 떠나가는 것이 나는 못내 기꺼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이영구, 16) 가슴속은 은밀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서 일하러 나가는 친지나 친구들을 만났다. 이들은 어제나 그제처럼 또 땅을 파고 쟁기질을 해야겠지. 나는 이렇게 자유 천지로 활보해 나가는데 말이다.(정서웅, 14, 밑줄 필자 강조) 나는 내가 이렇게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때에 길 옆 좌우에 내가 오래동안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이 엊그제와 똑같이 일터로 나가 땅을 파고 갈면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혼자 즐거워했다.(구정철, 8)
역시 원문에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정서웅은 네 문장으로 쪼갰다. 이는 전체를 한 문장으로 번역한 다른 두 번역본과 대비된다. 정서웅은 이렇게 쪼갠 문장의 하나를 “~해야겠지”라는 내적 독백투로 만들어 독자에게 1인칭 주인공의 심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문어투를 구어투로 바꾼 것이기도 하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자연을 벗 삼아 방랑하기 때문에 자연 묘사가 즐겨 나온다. 정서웅 역은 이러한 자연 묘사에 담긴 정서를 탁월하게 전달해낸다.
Weit von den Weinbergen herüber hörte man noch zuweilen einen Winzer singen, dazwischen blitzte es manchmal von ferne, und die ganze Gegend zitterte und säuselte im Mondschein.(49)
멀리 포도밭 언덕에선 간간이 포도 따는 사람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 번갯불이 번쩍 하면, 달빛 괴괴한 온 산간이 흔들리면서 수런거리는 소리를 냈다.(정서웅, 71)
직역하면 “사방이 달빛 속에서 흔들리면서 쏴솨 쏘리를 냈다”라는 문장을 “달빛 괴괴한 온 산간”으로 바꾸어 한국어 독자에게 문학적인 즐거움을 십분 제공한다. 어떤 면에서는 번역이 원문보다 더 수려하게 느껴질 정도다.
또 주인공이 마차를 타고 어느 이탈리아 성으로 납치되는 장면도 보자. 이때 마차 밖 풍경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정서웅 역은 이러한 느낌을 역시 잘 살려낸다.
Je weiter wir fuhren, je wilder und einsamer wurde die Gegend. Endlich kam der Mond hinter den Wolken hervor und schien auf einmal so hell zwischen die Bäume und Felsen herein, daß es ordentlich grauslich anzusehen war. Wir konnten nur langsam fahren in den engen, steinigen Schluchten, und das einförmige, ewige Gerassel des Wagens schallte an den Steinwänden weit in die stille Nacht, als führen wir in ein großes Grabgewölbe hinein. Nur von vielen Wasserfällen, die man aber nicht sehen konnte, war ein unaufhörliches Rauschen tiefer im Walde, und die Käuzchen riefen aus der Ferne immerfort: «Komm mit, komm mit!» – Dabei kam es mir vor, als wenn der Kutscher, der, wie ich jetzt erst sah, gar keine Uniform hatte und kein Postillon war, sich einigemal unruhig umsähe und schneller zu fahren anfing[.](53-54)
우리가 더 나아갈수록 풍광은 더 거칠어지고 더 적막해갔다. 마침내 달님이 구름 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갑자기 수목과 암벽들 사이를 비추었다. 그것을 바라보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돌투성이의 좁은 골짜기를 천천히 통과해야 했다. 단조로운 말발굽 소리가 암벽에 부딪혀서는 밤의 적막 속으로 울려 퍼졌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무덤의 아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많은 폭포수가 숲속 깊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올빼미들이 멀리에서 줄곧 외쳐대고 있었다./“같이 가! 같이 가!”/이제야 안 것이지만, 마부는 정식 직원이 아닌 듯 제복도 입고 있지 않았다.(정서웅, 78)
정서웅은 이렇게 한국 작가가 쓴 것처럼 읽기 좋은 번역을 지향하다 보니, 특정한 문화적 내용이나 표현 등은 누락하거나 완전히 자국화하여 번역하는 경향도 보인다. 가령 ‘나’를 감시하는 이탈리아 성의 가정부의 눈초리가 “마치 바실리스크 뱀과 같았다wie ein Basilisk”(64)는 부분을 정서웅은 그냥 “뱀의 눈초리를 하고”(93)라고 번역하는 식이다. 이는 “마치 바실리스크 뱀처럼”(구정철, 91)이라고 원문대로 번역한 구정철 역이나, 심지어 “바지리꾸(각사(恪蛇))와 같은 모양으로”(이영구, 78)라고 옮기고 설명까지 덧붙인 이영구 역과 대조된다. 바실리스크가 서양 전설에 나오는 뱀과 비슷한 무시무시한 괴수라는 문화적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별반 중요치 않으므로 생략한 것이다. 또한 로마에서 독일 출신의 화가가 주인공에게 훈계를 늘어놓을 때 운을 떼면서 하는 말, “Geliebter Zuhörer und Landsmann!”(84)도 직역하면 구정철의 역처럼 “친애하는 나의 방청객이며 나의 동포인 그대여”(구정철, 120)와 비슷하게 될 텐데, 한국어에서는 듣는 상대방을 굳이 청자라고 언급하는 것이 어색하므로 정서웅은 그 부분은 빼고 “친애하는 동향인 친구!”(121)라고 번역했다.
자국화 번역의 사례도 살펴보자. 주인공이 방랑길에서 만난 레오나르도가 뭔가 언짢은 일이 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대목에서 “zwei zornige Falten auf der Stirn”(45)을 정서웅은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리면서”(66)라는 한국 독자에게 친숙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의미를 직관적으로 쉽게 전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번역 “미간에 노한 듯이 굵은 주름살을 두 개 곤두세워서는”(이영구, 57)과 비교해 보면, 이마를 찌푸린 것이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같은 문단 마지막에 주인공이 이제 산을 내려와 “멋진 곳으로 in die prächtige Gegend”(46) 떠난다고 한 부분을 정서웅은 “아름다운 도원경 속으로”(66)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자국화는 해당 소설이 도교나 동양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므로 이질감을 줄뿐더러, “멋진 곳”이 맥락상 이탈리아를 의미하므로 세속과 떨어진 이상향을 의미하는 ‘도원경’과 의미상 거리도 멀다.
3) 구정철 역의 <어느 건달의 방랑기>(2008)
구정철의 번역은 2008년에 황금알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특기할 점은 책 표지가 노란색 바탕에 커다란 삽화가 알록달록하게 들어가 있어 아동 청소년 도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소설이 워낙 동화적이므로 이러한 표지가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역자의 작품 소개를 보면 이 번역이 대학생들이 참고할 만한 교재로 활용되기를 희망한다고 쓰여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제목 <어느 건달의 방랑기> 아래에는 “요셉 프라이헤어 폰 아이헨도르프의 로맨틱 러브 스토리”라는 부제도 붙어 있고, 작품 소개나 낭만주의에 대한 소개는 빈약한 편이다. 검토한 세 역본 중에서 유일하게 번역 저본을 밝힌 책으로, 1976년도 레클람판을 참고했다.
구정철의 번역에서 특기할 점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문제의 “Taugenichts”를 과감하게 ‘건달’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Du Taugenichts! da sonnst du dich schon wieder und dehnst und reckst dir die Knochen müde und läßt mich alle Arbeit allein tun. Ich kann dich hier nicht länger füttern. Der Frühling ist vor der Tür, geh auch einmal hinaus in die Welt und erwirb dir selber dein Brot.» – «Nun», sagte ich, «wenn ich ein Taugenichts bin, so ists gut, so will ich in die Welt gehen und mein Glück machen.»(9)
“이 빌어먹을 놈아! 또 볕 받고 앉았구나. 피곤이 뼈 속까지 박힌 듯이 길게 기지개를 하고, 그래 일은 나만 해야 옳으냐? 인제 이상 더 앉혀 놓고 밥 먹일 수가 없다. 봄도 창 밖까지 닥쳤으니 잘 생각하도록 하지. 어디 너도 한 번 넓은 세상에 나가서 네 힘으로 생계를 잡아 보도록 해라.”/“좋도록 하지요.”라고 나는 서슴치 않고 답하였다. 빌어먹을 놈이라 별수 없지요. 아버지 말씀대로 저도 넓은 세상에 뛰쳐나가서 나의 앞 길을 열어 보겠어요.”(이영구, 15) “이 게으름뱅이 녀석! 또 해바라기를 하고 앉았구나. 기지개를 켜는 걸 보니 뼛속까지 녹작지근한 모양이지. 일은 모두 나 혼자 도맡으란 말이냐? 여기선 네 녀석을 더 이상 먹여줄 수가 없다. 봄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으니 너도 한번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아라. 네 힘으로 빵을 벌 줄도 알아야지.”/“알았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저 같은 건달에게는 그 편이 낫겠네요. 넓은 세상에 나가 행운을 잡아보도록 하겠어요.”(정서웅, 13-14) “이 건달 놈아, 너는 또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면서 모든 일은 애비에게나 맡기는구나. 나는 더 이상 너를 집에서 먹여 살릴 수 없다. 이제 봄이 왔으니 집을 나가 네 밥벌이를 찾아봐라.”/그때 나는 말했다./“제가 건달이라고요. 좋습니다. 저는 집을 나가 저의 행복을 찾아보겠습니다.”(구정철, 7)
위는 소설의 중요한 서두를 인용한 것이다. 밑줄로 강조한 바와 같이 여기서 “Taugenichts”라는 말은 두 번 나온다. 그런데 정서웅은 이것을 한 번은 “게으름뱅이 녀석”, 다른 한 번은 “건달”, 이렇게 다르게 번역했다. 이영구는 두 번 다 “빌어먹을 놈”이라고 똑같이 번역하기는 했으나 작품 제목에 나오는 “Taugenichts”는 “방랑아”라고 번역했기에 이 “빌어먹을 놈”과 “방랑아”가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반면 구정철 역은 모두 다 “건달”이라고 일관되게 번역했기에 제목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되는 장점이 있다. 비록 ‘건달’이 소설에 대한 잘못된 첫인상을 줄 수 있지만, 소설 서두에서 곧바로 그 의미가 설명된 셈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후 구정철은 Taugenichts와 유사한 단어가 나올 때에도 일관되게 ‘건달’이라 번역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령 “Landstreicher”(84)도 “건달”(구정철, 121), “ein rechter Lump”(16)도 “영락없는 건달”(구정철, 16)이라 옮겼다.
구정철 역은 세 번역본 가운데 가장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선보인다. 가령 주인공이 점차 친분을 쌓게 되는 성 문지기의 코를 “몹시 길고 휘어진 선제후다운 코 einer außerordentlich langen, gebogenen kurfürstlichen Nase”(12)라고 묘사하는 대목에서 “선제후답다 kurfürstlich”라는 수식어가 한국 독자에게는 낯설 뿐만 아니라 코가 대체 어떻다는 것인지 혼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역자들은 모두 그냥 “뾰족코”(이영구, 19), “매부리코”(정서웅, 18) 이렇게 번역했는데 구정철만이 “대단히 기다란 선제후의 코를 하고”라고 번역했다. 비록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코가 높아 거만하고 귀족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또 ‘나’가 건실한 기술 하나 배운 것이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청색의 월요일 einen blauen Montag”(16)을 누리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에서, 구정철만이 “노동자들의 휴일인 월요일”(18)이라고 최대한 직역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색의 월요일”은 수공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월요일에 반일만 일하던 관습에서 연원한 말로, 현재는 일을 쉬는 날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월요일에 쉰다는 것이 문화적으로 낯선 내용이므로 이영구와 정서웅은 직역을 포기하고 모두 일요일로 옮겼다. 이영구는 “적어도 휴일로 되어 있는 일요일”(24), 정서웅은 “내일의 희망찬 일요일”(24) 이렇게 옮겼다. 정서웅은 ‘청색’을 “희망찬”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구정철은 “노동자들의 휴일인 월요일”이라고 번역하여 문화적 특이성을 보존하려 했다. 다만 기왕 이렇게 번역하기로 했다면 노동자보다는 수공업자들의 휴일인 월요일이라고 옮기는 편이 좀더 이해가 쉬울 듯하다.
이러한 문화적 특수성과 관련되어 번역하기 까다로운 부분 외에도 시적 비유를 번역할 때에도 구정철이 원문에 가장 충실한 편이다. 가령 주인공이 자신의 신세를 새에 비유하는 대목도 구정철만이 직역하여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한다.
[D]enn mir war wie einem Vogel, dem die Flügel begossen worden sind.(13)
나라는 것은 지붕 위를 지나가는 새와 같은 것이라고나 할가[.](이영구, 20) 나는 날갯죽지 떨어진 새 꼴이 되고 말았다.(정서웅, 19) 나는 나 자신이 날개에 물벼락을 맞은 새처럼 얼떨떨 했기 때문이다.(구정철, 13)
다른 번역들 모두 그럴듯하지만 원문과 거리가 있다. 특히 여기서의 맥락은 ‘나’가 이제 성에 고용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의 신세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이므로 이영구 역은 완전히 정반대로 해석한 셈이다.
Ich aber saß wie eine Rohrdommel im Schilfe eines einsamen Weihers im Garten(16)
그러나 나만이 새장에 갇힌 새모양 [...](이영구, 24) 나만 짝 읽은 외기러기 신세였다.(정서웅, 24) 그러나 나는 외로운 연못가 갈대숲의 왜가리처럼 [...](구정철, 19)
역시 구정철의 번역만 원문에 충실하다. 정서웅은 완전히 자국화해서 번역했고, 이영구 역은 자유를 빼앗긴 새라는 뜻이므로 원문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의 심정과 거리가 있다.
이렇게 구정철은 다른 번역들이 얼렁설렁 의역하기도 하고 자국화한 부분에 비해서 좀더 정확하게 원문을 따라가지만, 직역투가 심해 다른 번역들에 비해 밋밋하거나 딱딱하고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아래 예문에서 밑줄 친 부분을 보자.
[E]r hatte schon seit Tagesanbruch in der Mühle rumort und die Schlafmütze schief auf dem Kopfe, der sagte zu mir:(9, 밑줄 필자 강조)
아버지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그의 물방앗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느 때 모양 잠모자를 머리에 비껴 쓰고 못마땅한 듯 나에게 벼락을 내렸다.(이영구, 15) 날이 밝기가 무섭게 물방앗간을 분주히 오가며 일하는 분이었다. 머리에는 잠모자가 비스듬히 얹혀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정서웅, 13) 그분은 벌써 날이 새기 무섭게 물레방아에서 일하시느라 소란을 피우셨는데 머리에는 아직도 나이트캡을 비스듬히 쓰신 채 말씀하셨다.(구정철, 7)
원문에서 밑줄 친 부분은 “나에게 말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맥락상 아버지가 게으름 피우는 ‘나’를 혼내는 장면이므로 이영구나 정서웅처럼 “벼락을 내렸다”나 “소리를 질렀다”라고 번역해야 자연스럽다. 이에 비해 정직하게 “말씀하셨다”라고 옮긴 구정철 역은 오히려 소설 읽는 재미 면에서는 떨어진다고 하겠다. 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귀족 아가씨를 드디어 발견하고 “바로 그 여자야!”(구 100)하고 외치는 장면도 어색하다. 주인공이 신분 차를 무시하고 이렇게 막 부르는 것이 캐릭터나 소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의 사전적 뜻보다는 소설의 전후 맥락상 정해지는 의미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소설에는 독일어 외에도 여러 외국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나’가 이탈리아로 가면 이탈리아어가, 성직자나 신학생들을 만나면 라틴어가 나온다. 구정철은 부분적으로 이런 외국어를 “펠리찌시마 노테!”(81), “브라보, 브라비씨모, 그것 참 훌륭한 착상이야!”(116), “빨레 부 프랑쏴”(69) 등 이렇게 음차 표기하여 코믹한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이(異)언어성(heterolinguality)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 아쉬움을 준다.
[D]er Kerl sagte immer bloß: «Si, Si, Signore!»(53)
마부 녀석은 “네, 네, 나리님”이라고 혼자 대답할 뿐이었다.(이영구, 65) 그는 다만 “시, 시, 시뇨레!(예, 예, 선생님!)” 소리를 연발할 뿐이었다.(정서웅, 77) 그 녀석은 계속해서 다만 “알겠네, 이 사람아!”라고 말하기만 하고 [...](구정철, 75)
1인칭 서술자에게 이탈리아 마부가 하는 말이다. 구정철 역에서 우선 마부가 손님에게 “이 사람아”라고 말하는 것도 정황상 어색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 주인공이 오스트리아 초입의 숲에서 우연히 세 악사를 사귀는데, 그들은 알고 보니 가난한 프라하 신학생으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불어와 라틴어가 섞여 있어 주인공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아니 승려는 승려에게 세금을 지우지 말라(lericvs clerivm non decimct)고 하긴 한다만 [...](이영구, 113) Clericus clericum non decimat (승려는 승려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던가.(정서웅, 133) 아니 성직자들은 같은 성직자를 골탕 먹이지는 않을 걸세.(구정철, 132)
위에서 보듯 구정철 역은 그들이 유식한 말을 쓰고 있음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 이는 그가 주로 직역의 경향을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다소 놀라운 일이다.
구정철은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에 담긴 기독교적인 색채를 지우는 경향도 보인다. 그는 예컨대 아래 시에서 기독교의 신을 하늘로 옮겼다.
Wem Gott will rechte Gunst erweisen,/Den schickt er in die weite Welt,/Dem will er seine Wunder weisen/In Berg und Wald und Strom und Feld.// [...] Den lieben Gott laß ich nur walten;/Der Bächlein, Lerchen, Wald und Feld/Und Erd und Himmel will erhalten,/Hat auch mein Sach aufs best bestellt!(10)
하늘은 당신이 아끼는 자를,/먼 세상으로 보내,/당신의 기적을 보여주시네/산과 숲, 강과 들에서.//[...] 세상만사 하늘에 맡기세,/시냇물, 종달새, 숲과 들,/천지 만물 주관하는 당신,/내 인생도 돌보아 주시니.(구정철, 9)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은/넓디 넓은 나라로 떠나게 하여/산이며 숲, 냇가 또 들판에 나서/신비의 은혜를 보이려 하네.//[...] 내 몸 하나님께 맡겨 두고서/냇가에 들이며 숲, 종달새/삼라만상 하느님의 것/내 몸마저도 하느님의 뜻.(이영구, 16)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는 자/넓은 세상으로 나서라./산과 숲, 강과 들에/그분의 기적 넘쳐난다네.//[...] 사랑하는 하느님께 모두 맡기자./시냇물, 종달새, 숲과 들까지./하늘과 땅 모두 주관하시니/이 몸도 잘 보살펴주소서.(정서웅, 15)
고향을 떠나 방랑을 시작하면서 ‘나’는 자신의 방랑을 하느님의 깊은 뜻으로 정당화하고 찬미한다. 이영구는 신을 하느님과 하나님으로 번역했고, 불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던 “wem”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옮겨 기독교적 색채를 더했다. 정서웅은 비단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방랑자가 세상으로 내보내진 것만이 아니라 방랑자 스스로가 은총을 구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라며 방랑의 적극성을 강조한다. 하느님께 이 몸을 돌보아 달라고 적극적으로 호소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구정철은 “당신”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하나 하늘의 의인화로 들리며, 맥락상 ‘당신’이 기독교적 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초월적인 존재 일반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주인공이 자기 신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인간은 생각하고 하느님이 이끌어 주신다 der Mensch denkt und Gott lenkt”(14)라는 격언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는 장면에서도 구정철은 이를 “‘진인사 대천명’”(16)이라는 유교적인 격언을 사용해 번역한다. 자국화하는 번역이며, 기독교적인 색채를 지우는 것이기도 하다.
또 ‘나’가 정원사에게 꾸중을 듣고 속이 상해 혼잣말하는 대목도 보자.
Der Gärtner schalt mich einen faulen Bengel, ich war verdrießlich, meine eigne Nasenspitze war mir im Wege, wenn ich in Gottes freie Welt hinaussah.(16, 밑줄 필자 강조)
설상가상으로 원정사는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꾸중하고 핀잔 주었다. 나는 모두가 다 귀찮아지고 말았다. 하느님의 넓으나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자신의 콧잔등까지 귀찮아지고 공연히 심술만 부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이영구, 24) 정원사는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윽박질렀다. 나에겐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자신의 콧잔등조차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정서웅, 24) 정원사는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욕하고 그래서 나는 기분이 언짢았으며 또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바깥 세상에 얼씬거리고 싶지도 않게 되었다.(구정철, 18)
이 부분에서는 구정철 역이 원문과 가장 거리가 멀다. 원문의 표현에 충실하지 않아 “하느님의 드넓은 세상으로 고개를 빼고 내다보려 하면 내 콧잔등마저 시야에 방해가 되었다”라는 부분을 “바깥 세상에 얼씬거리고 싶지도 않게 되었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역자는 “Gottes freie Welt”라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분을 그냥 “바깥 세상”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일견 사소한 부분으로 보이나 작가가 방랑에 부여하는 신학적 정당성, 또 후기 낭만주의의 가톨릭적 성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정서웅은 역자 해설에서 이 소설에 “명랑함과 경건함”(정서웅, 165)이 함께 담겨 있다면서 이 소설에 실린 시들은 “세계, 자연, 인간에 대한 친밀감, 그리고 신을 경배하는 노래가 대부분”(정서웅, 167-168)이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는 당대 하이네 등의 시인의 작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인간과 세계의 불화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구정철 역에서는 후기낭만주의의 이러한 가톨릭 복고적 경향의 뉘앙스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3. 평가와 전망
이영구의 번역은 국내 초역이지만 소설적 재미를 안겨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번안과 윤문에 가까운 번역이다. 반면 구정철 역은 원문에 충실한 편이지만 오역도 은근히 많고 어색하거나 딱딱하게 번역된 부분도 많다. 무엇보다 편집이 좋지 않아 띄어쓰기 오류가 흔하게 발견되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이에 비해 정서웅 역은 읽는 재미를 주는 유려한 문체에 원작의 유머를 잘 전달하나 원문의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존중은 아쉬운 면이 있다. 따라서 좀더 원문에 충실하고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 보다 학술적인 성격의 번역본도 필요해 보인다.
가령 이 소설에서는 옛 하대법 ‘Erzen’이 자주 쓰이는데, 기존 번역본에서는 이 어법이 일관되게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은 방앗간의 아들로 태어난 ‘나’가 마지막에는 백작의 수양딸과 혼인, ‘준(準)백작’이 되어 백작이 하사한 성에서 살게 되는 신분 상승 이야기이므로 존대법과 하대법은 소설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령 주인공 ‘나’는 자신을 ‘er’라고 부르지 말아달라, 즉 나를 하대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는데(39), 세 번역 모두 이것을 존대법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존대하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오역했다(Erzen은 과거 존대법이었으나 18세기 이후 하대법으로 전도되었다). 당시의 역사적 · 사회적 배경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원문의 역사성과 문화적 특수성을 보다 충실히 전달하는 번역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영구(1959): 방랑아. 탐문당.
정서웅(2001): 방랑아 이야기. 문학과지성사.
구정철(2008): 어느 건달의 방랑기. 황금알.
바깥 링크
- ↑ 1952년에 나온 일역판 <즐거운 방랑아 愉しき放浪児> (関泰祐/訳) (岩波文庫)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 ↑ 김주원: 역자 해설. In: 한스 카롯사/아이헨도르프: 성년의 비밀, 지성출판사 1982, 441.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해설에서는 “방랑아의 생활에서”라는 원제에 더 가까운 제목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 ↑ 원문은 다음 판본을 따랐다. Joseph von Eichendorff: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 Mit einem Kommentar von Peter Höfle. Frankfurt a. M.: Suhrkamp 2007. 인용 시에는 본문에 쪽수만 병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