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에서 - 시와 진실 (Aus meinem Leben - Dichtung und Wahrheit)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자서전
작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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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811 - 1814 |
장르 | 자서전 |
작품소개
괴테의 자서전이다. 1808년 환갑을 앞두고 자신의 삶이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가치가 있으며 그 형성과정에 무언가 보편적이고 숭고한 것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한 괴테는 자서전을 집필하기로 결심했다. 자서전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2부는 대학시절을, 3부는 젊은 작가 시절과 질풍노도기 시인들과의 교류를, 4부는 1772년에서 1775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1부에서 3부까지는 1811년부터 1814년까지 거의 매년 차례대로 출판되었지만, 4부는 3부가 출판되고 무려 20여 년이 지나서 나왔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논평과 기록을 남기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괴테는 이 저작에서 비록 26살까지의 생애를 다루는 데 그쳤지만 자신의 일생을 유기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총체적인 예술가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한 시대를 이끌고 풍미했던 대작가의 자서전은 한 개인의 생애사를 넘어 독일 정신사와 문화사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국내에서는 1959년 정경석에 의해 처음 번역 출판되었다(박영사).
초판 정보
Goethe, Johann Wolfgang von(1811-1814): Aus meinem Leben. Dichtung und Wahrheit. Vol 1-3. Stuttgart/Tübingen: Cotta.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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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詩的 才能과 自然; 사랑과 時; 사랑과 自然 | 괴테 短篇集 | 世界短篇文學全集 1 | 괴테 | 朴煥德(박환덕) | 1974 | 汎潮社 | 313-420 | 편역 | 편역 | 역자가 미주에서 <시와 진실> 4부 16, 17, 18장의 발췌역임을 밝힘. 각 장의 제목은 역자가 임의로 표기함 |
2 | 時와 眞實 | (新譯)괴에테全集 3 | 괴에테 | 鄭鎭雄(정진웅) | 1974 | 光學社 | 9-470 | 편역 | 편역 | 1, 2, 3부만 번역 | |
詩와 眞實 | 詩와 眞實 | 世界文學全集 91 | 괴테 | 姜斗植(강두식) | 1975 | 乙酉文化社 | 15-637 | 완역 | 완역 | ||
4 | 사랑과 自然; 시적 才能과 自然; 사랑과 時 | 世界短篇文學全集 4 | 世界短篇文學全集 4 | 괴에테 | 洪京鎬(홍경호) | 1976 | 金字堂 | 87-192 | 편역 | 편역 | <시와 진실> 4부 18, 16, 17장의 발췌역. 각 장의 순서와 제목은 역자가 임의로 정함 |
5 | 대관식 무렵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주니어世界文學 5 | 괴테 | 金均喜(김균희) | 1978 | 中央文化社 | 255-333 | 편역 | 편역; 개작 | 역자가 문장을 생략하진 않았지만 아동청소년 도서임을 고려하여 보다 쉽게 바꿔 번역했음을 밝힘,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의 5장으로 제목은 역자가 붙였음을 밝힘 |
6 | 戴冠式이 있을 무렵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세계문학 31 | 괴테 | 李榮久(이영구) | 1978 | 金星出版社 | 203-257 | 편역 | 편역 | |
나의 生涯 - 詩와 眞實(上) | 나의 生涯 - 詩와 眞實 (上) | 偉大한 人生觀 12 | 괴테 | 朴煥德(박환덕) | 1979 | 汎潮社 | 9-502 | 편역 | 완역 | 같은 연도의 下권은 확인불가, 이후 1983년도에 같은 출판사에서 상,하권이 같이 출간됨 | |
8 | 詩와 眞實 | 詩와 眞實 | 世界文學全集 16 | 괴테 | 姜斗植(강두식) | 1979 | 乙酉文化社 | 15-637 | 완역 | 완역 | |
9 | 사랑과 自然; 시적 才能과 自然; 사랑과 時 | 世界短篇文學全集 4 | (三省堂版)世界短篇文學全集 4 | 괴에테 | 洪京鎬(홍경호) | 1984 | 三省堂 | 87-192 | 편역 | 편역 | |
10 | 사랑과 詩 | 世界代表短篇選 | 괴테 | 확인불가 | 1985 | 金字堂 | 11-39 | 편역 | 편역 | ||
11 | 대관식이 있을 무렵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주니어 世界文學 31 | 괴테 | 이영구 | 1986 | 금성출판사 | 232-296 | 편역 | 편역 | |
12 | 시(詩)와 진실 |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 괴테 | 이충진 | 1986 | 하나 | 209-218 | 편역 | 편역 | 역자가 괴테를 비롯한 여러 작가의 작품들에서 임의로 발췌역하여 엮음 | |
13 | 시와 진실 | 시와 진실 | 혜원교양신서 10 | 괴테 | 김훈 | 1991 | 혜원출판사 | 11-423 | 편역 | 편역 | 1, 2부만 번역 |
14 | 괴테의 문학기행 | 괴테의 문학기행 | 괴테 | 김영수 | 1998 | 하늘빛 | 8-647 | 편역 | 편역 | 1, 2부만 번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은 독일 자서전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완역본만 여덟 종 이상 나왔을 정도로 풍부한 한국어 번역의 역사를 자랑한다. 1959년-1962년에 정경석에 의해 초역이 나온 뒤에 1970년대에 여러 역자가 번역에 도전했으나 완역본을 내놓는 데 성공한 역자는 박환덕, 강두식뿐이다. 한동안 발췌역만 간헐적으로 출간되다가 2000년대 중후반에 무려 네 종의 새 번역이 쏟아져나왔다. 2006년 초 윤용호의 번역을 시작으로, 같은 해 이관우 역이 출간됐고, 2007년에는 최은희의 번역이, 2009년에는 전영애/최민숙의 공역본이 출판됐다. 출간 시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두 거의 동시에 번역 작업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기존 번역본의 절판과 한글세대의 등장 등 독서 환경의 변화로 인해 새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한 독문학자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가히 열풍이라 할 만한 이러한 새 번역 출판은 2014년에 박광자 역까지 나오면서 일단락된다. 이상 언급한 완역본 외에도 1990년대까지는 부분 번역이나 발췌역도 다수 발표됐다. 일부 짜깁기나 베끼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괴테 자서전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시와 진실>의 원제는 “Aus meinem Leben. Dichtung und Wahrheit”(나의 삶에서. 시와 진실”)이다. 독자에게 잘 알려진 제목이 부제에 해당하나 초역부터 대부분의 역서가 부제를 제목으로 채택했다. 다만 박환덕 역이 <나의 생애: 시와 진실>이라는 제목을 택한 적이 있고, 이관우 역이 2006년 초판에서 <괴테 자서전>으로, 2013년 재판에서는 <괴테 자서전. 나의 인생, 시와 진실>로 독자를 만난 바 있다. 또 전영애/최민숙 역도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이 정식 제목이다. 이제부터 완역본을 중심으로 주요 번역본의 역사와 특징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겠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정경석 역의 <시와 진실>(1962)
국내 초역인 정경석 역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박영문고 총서에서 상중하로 나뉘어 출간됐다. 이후 이 번역은 1968년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괴에테문학전집>의 5권과 6권에 재수록됐다. 1-3부는 5권에, 4부는 6권에 실렸다. 정경석 역은 그 뒤로도 여러 곳에서 재판됐는데, 1974년에는 <대세계철학적문학>(백문당) 3권에, 1978년에는 또다시 박영문고 총서에서 이번에는 4권으로 분권 출판됐으며, 1982년에는 <뜨거운 진실의 그늘>이라는 새 제목으로 1부와 2부만 출판됐다. 모두 초역과 큰 차이는 없다.
정경석 역은 1950년대 말에 이루어진 번역이라 판형이 세로쓰기이며,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도 많이 사용되어 확실히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가령 “후일에 완전히 변작(變作)했고”(<괴에테문학전집>, 5권, 14), “이 기록은 가장 수납(修納)될 것이고”(5권, 15)(이관우 역에서는 “가장 즐겨 읽히고”(이관우 2006, 79)라 번역됨), “기독교도냐 불연이면 무신론자냐”(5권, 473) 등이 그렇다. 또 가발을 “다리”(5권, 289)라고 옮긴다거나, 대부분 어릿광대로 번역하는 “Clown”을 “도화역자”(5권, 386)로, “Erhängen”[1](목매달아 죽는 것)을 “액사”(5권, 455)로 번역한 부분은 요즘 독자들에게는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또 독일어 원음대로 독일을 도이치로, 네덜란드는 니더란트(6권, 408)로 표기한 것도 낯설게 느껴진다. 이외에도 당연하다는 듯 한자병기를 하지 않아 혼동을 주는 부분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그 외에 무슨 특히 반시적이고 반역사적인 취급에 관해서 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 이야기 속에서 수차 기회가 있을 것이다”(5권, 15)라는 머리말의 문장에서 밑줄 친 부분이 반(反)인지 반(半)인지 분명치 않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한자식 표현이나 구식이 된 표현들은 <시와 진실> 자체가 이미 이백 년 전 저작이다 보니 텍스트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경우가 많다. 가령 남들보다 먼저 도착하려 한다는 뜻인 “als der erste zu erscheinen”(486)을 “선객이 되려고”(5권, 352) 걸음을 재촉했다라고 번역한 부분이 그렇다. 또한 정경석 역은 한자에 기댄 풍부한 조어력을 바탕으로 문장에 리듬감을 부여하여 읽는 맛을 더한다. 역자는 아래 밑줄 친 “Abwegen und Umwegen”에서 ‘Wegen’의 반복이 생성하는 리듬을 옮기기 위해 적절한 한자어를 찾아내는 뛰어난 번역 감각을 보여준다.
Wir treiben uns auf mancherlei Abwegen und Umwegen herum(522)
우리들은 많은 사로(邪路), 우로(迂路)를 방황했다.(정경석, 5권, 381) 우리들은 많은 사로邪路와 우로迂路를 방황했다.(박환덕, 하, 55) 우리는 많은 샛길과 우회로를 방황했고 [...](이관우, 709) 우리는 여러 번 길을 잘못 들거나 우회로를 택하는 등 방황했고 [...](전/최, 619)
역자의 리듬 감각은 비단 한자어 사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령 “durch Bitten und Andringen”(409)과 같은 표현을 정경석은 “구걸 애걸하며”(5권, 296)라 옮겼는데, 이는 다른 역자들의 번역들(“치근대는 구걸 때문에”(이관우, 564), “치근거리며 동냥을 하여”(전/최, 475))에 비해 리듬이 도드라진다. 따라서 정경석의 재기 넘치는 번역은 이후의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최근의 번역에까지 그 영향은 지속되고 있다.
[...] 머리가 너무 뒤쪽으로 깊이 깎여 있고 이래서야 사람 앞에 나설 수 있게 조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안되는 짧은 고스러진 앞머리는 고사하더라도 딴 머리는 모두 머리끝에서 변발이나 속발로 묶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다리로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허물 없는 위장을 결코 타인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 언제나 나는 조발이 멋있고 훌륭한 두발을 가진 청년으로 통하고 있었다.(정경석, 5권, 289)
[...] 머리가 너무 뒤쪽으로 깊이 깎여 있고 이래서야 사람 앞에 나설 수 있게 조발(調髮)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안되는 짧고 곱슬곱슬한 앞머리는 괜찮다 하더라도, 다른 머리털은 모두 머리 끝에서 편발(編髮)이나 속발(俗髮)로 묶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가발로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 허물 없는 기만수단을 결코 타인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 그래서 나는 언제나 조발이 멋있고 훌륭하나 두발을 가진 청년으로 통하고 있었다.(박환덕, 상 437)
[...] 머리가 너무 뒤쪽으로 깊이 깎여 있고 이래서야 사람 앞에 나설 수 있게 조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안되는 짧고 곱슬곱슬한 앞머리는 고사하더라도 다른 머리는 모두 가르마 탄 곳에서부터 땋거나 묶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가발로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허물없는 위장을 결코 타인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 나는 조발이 멋있고 훌륭한 두발을 가진 청년으로 통하고 있었다.(윤용호, 388)
[...] 내 머리가 뒤쪽으로 너무 깊게 깎여 있어 사람들에게 나서도 될 만하게 깎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확인해주었다. 얼마 안 되는 곱슬곱슬한 짧은 앞머리만 그대로 두고 뒷머리는 정수리에서 땋아 내리거나 주머니에 넣어 묶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가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 허물없는 위장을 당장 하기로 결심을 한다면 [...] 나는 늘 머리손질이 가장 잘 되고 가장 멋진 머리칼을 지닌 젊은이로 인정받았다.(이관우, 551-552)
[...] 내 머리카락이 너무 깊게 뒤쪽까지 잘려서 남들 앞에 떳떳하게 나갈 수 있는 헤어스타일로 손질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앞의 짧은 곱슬머리는 어떻게든 모양을 만들 수 있어도 다른 머리는 모두 머리 꼭대기에서 늘어진 머리로 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 가발로 가릴 수밖에 [...] 죄 없는 속임수를, 결코 남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는 항상 잘 손질된 헤어스타일을 가진 청년으로 통했다.(최은희, 382-383)
[...]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한 이발사가 내 머리를 대뜸 뒤쪽으로 너무 깊게 잘라버려서, 그 상태로는 나를 돋보이게 할 머리 모양새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짧고 곱슬곱슬한 앞머리를 조금만 세우려 해도 나머지 머리카락을 모두 정수리에서부터 머리망으로 묶어야만 했다. [...] 앞머리용 부분 가발을 쓸 수밖에 [...] 이런 순진무구한 사기를 [...] 나는 늘 최고의 머리 매무새를 한 아주 머리숱 많은 젊은이로 인정받았다.(전/최, 463)
[...] 슈트라스부르크의 이발사가 머리를 뒤쪽으로 너무 깊게 깎아서, 그럴듯한 머리 모양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 안 되는 짧고 고슬고슬한 앞머리를 세우려면 나머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부터 땋거나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 가발로 참을 수밖에 [...] 허물없는 위장을 이발사는 내가 결심만 한다면 [...] 나는 손질이 잘 된 숱이 많은 머리를 가진 청년으로 통하고 있었다.(박광자, 1권 426-427)
확실히 정경석 역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이 들어가 이해하기 어렵다. “다리”, “조발”, “변발”, “속발”, 이보다는 덜하나 역시 예스러운 느낌을 주는 ‘두발’이라는 어휘가 보인다. 이러한 어휘 일부는 박환덕 역을 거쳐 심지어 2000년대에 나온 윤용호 역에서도 일부 살아남았다. 이에 비해 같은 해에 출간된 이관우 역에서는 이런 한자어 표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으며 21세기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번역했다. 이러한 흐름은 “Frisur”를 아마도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일 “헤어스타일”로 옮겨놓은 최은희 역에서 절정에 달한다. 전영애/최민숙 역에서는 원전이 18세기 생활상을 다룬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좀더 보수적으로 “머리 모양새”, “머리 매무새”라고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정경석 역의 영향이 보이는 또 다른 예로 “허물없는 위장”이라는 표현이 있다. 스트라스부르 이발사가 괴테에게 가발 착용을 권하며 이것을 “무해한 사기 unschuldigen Betrug”(399)라고 하는데, 정경석이 이를 “허물 없는 위장”이라고 번역한 이래 최근의 박광자 역에까지 이 번역이 남아 있다. 사실 가발을 진짜 머리라고 속이는 것이므로 이것을 두고 ‘허물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 면이 있다. 그보다는 가발이라는 물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기나 속임수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최은희 역본은 “죄 없는 속임수”라고 옮겼고, 전영애/최민숙 역은 “순진무구한 사기”라고 옮겼다. 이렇게 기존 번역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최은희 역은 머리를 땋거나 망에 넣어야 한다는 표현을 “늘어진 머리”라고 잘못 번역했고, 전영애/최민숙 역은 괴테의 머리가 현재로서는 구제불능이 된 이유를 스트라스부르의 이발사가 머리를 그렇게 깎았기 때문인 것으로 잘못 읽었다. 그러나 그 이발사는 괴테의 머리가 이미 그렇게 깎여 있어서 이 상태로는 도저히 머리 손질을 해줄 수 없기에 가발을 권한 것이다. 이 번역 역시 박광자 역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젊은 남녀들이 모임에서 제비를 뽑아 일주일간 부부로 지내는 게임을 하는 에피소드에서 그렇게 짝지어진 남녀가 일종의 ‘벌칙’으로 서로에게 ‘너 du’라고 일종의 반말을 쓰기로 할 때 정경석은 이것을 “여보”(5권, 514)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번역했다. 이 번역이 원문의 의도를 잘 살리면서 한국어에서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이 이 선례를 따랐다. 박광자만 “당신”(2권, 275)이라 부르는 것으로 새롭게 옮겨보았으나 낯간지러운 게임의 장난스러움이 ‘여보’보다는 덜하다.
정경석 역은 국내 초역인데다 독문학의 국역사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온 번역이므로 오역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역주의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클롭슈토크 Klopstock를 “도이치의 계몽사상가”(5권, 69)라고 설명한 부분이 그런 예다. 그러나 때로는 이후에 나온 역서보다 더 의미 있는 역주가 달려있기도 하다. 괴테가 1760-70년대 독일 문학의 척박한 상황을 회고하며 당시 시인에게 허락된 몇 가지 좋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를 “귄터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대다수 역본에서는 귄터가 중세 독일의 서정시인이라고만 설명되어 있어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경석 역은 “귄터의 길(귄터는 조롱적으로 세상을 대했고 일체를 백안시했다)을 택하지 않으면 시인은 이 세상에서 유우머리스트나 식객처럼 가장 비참하고 천한 입장에 놓이게 되며”(5권, 310)라고 번역하여 이해를 돕는다. 이러한 많은 장점 덕분에 정경석 역은 국내 초역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떠나 그 자체로도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번역이라 하겠다.
강두식의 번역은 1975년에 을지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제91권으로 출간됐다. 해설에서 역자는 이 책이 한 사람의 자서전을 넘어서 독일과 유럽의 정신사이자 사회사 및 문화사적 성격을 지님을 강조하고 자서전의 탄생과정과 그 목표를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다. 역자는 괴테의 자서전이 그의 문학적 삶을 총괄하는 전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보통은 불완전하다고 평가되는 자서전의 결말도 미완이라 보지 않고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강두식, 1975, 8). 그러나 강두식의 번역은 역자 해설의 탁월함에 미치지 못하는데, 정경석 역을 많은 부분에서 답습하기 때문이다. 정경석 역에서 지나치게 구식이 된 어휘는 현대적으로 수정하고 오역을 바로잡은 부분도 많으나, 많은 부분에서, 특히 뒤로 갈수록 그 의존도가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3) 박환덕 역의 <나의 생애: 시와 진실>(1979)
박환덕 역은 발췌역에서 시작했다. 1974년 범조사에서 나온 <괴테 단편집>의 <그 외 단편>이라는 항목 아래 <시와 진실> 4부의 16, 17, 18장이 각각 <시적 재능과 자연>, <사랑과 시>, <사랑과 자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발표되었다. 각 장의 제목은 역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왜 하필 4부만 먼저 번역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역자 해설을 보면, <시와 진실>이 “Bildung의 교양 이념”(박환덕 1974, 431)이 일관되게 흐르는 작품이라고 설명되는데, 4부는 이러한 이념에 가장 덜 부합하는 부분이므로 더욱 의아하게 여겨진다.
이후 역자는 1979년에 <나의 생애: 시와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범조사에서 완역서를 내놓았다. 이 책은 상하로 분권되어 있으며, 상권은 1부와 2부를, 하권은 3부와 4부를 싣고 있다. 이 번역은 1983년에 재간됐으며 2006년에는 출판사를 옮겨 범우사에서 재출판됐다. 2006년도 판본은 2024년 현재도 여전히 구매 가능하며, 이하의 번역 검토도 이 판본을 기준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2006년도 판 해설에서 역자는 함부르크판 괴테전집을 번역 저본으로 삼았으며 인젤출판사 전집도 함께 참조해 역주를 달았음을 밝힌다. 또 같은 해설에서 번역서의 출판 과정도 간략히 설명한다. 이 번역은 1970년에 시작됐는데 “그때는 출판사측에서 쫓기듯 출판하여 역자의 해설이나 발문도 싣지 않은 채 세상에 책을 내놓”(박환덕, 2006, 하 411)아 못내 아쉬웠으나 책이 절판되어 별 도리가 없었다가 다행히도 범우사에서 다시 번역서를 손질해서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2006년도 판을 이전 판본과 비교해 보면 수정된 바가 거의 없다. 오히려 원래 번역에는 없던 오타나 오기가 출판사 편집상의 부주의로 늘어나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활동을 원조했다”(1974, 373)가 “활동을 위조했다”(2006, 하 315)로, “수위의 호의로”(1979, 40)가 “수위의 회의로”(2006, 상 23)로 바뀌어 가독성을 심각히 해친다. 일부는 전후 맥락을 통해 원래 의미를 추측해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뚱맞은 오기도 많다. “조피 라로슈가 이 고생한 형제의 인품을”(하 209)에서 ‘고생한’은 ‘고귀한’의 오기이며, “시인적 지위”(하 253)는 ‘시민적 지위’의 오기다. 심지어는 1974년도 판의 외래어 표기가 독일어 발음에 더 가까운 것도 있다. “쉬틸링 Stilling”(1974, 329)이 2006년도 범우사 판에서는 “시덜링”(하 277)으로, “한스부르스트”(1974, 384)가 “한스부르크”(2006, 하 325)로 개악되어 있다. 이렇게 2006년도 판이 이전의 세로쓰기형 판본보다 편집이 더 열악해진 것은 대단히 아쉬운 점이다.
박환덕 역 역시 정경석 역 못지않게 한자식 표현을 많이 사용해 현대 독자는 읽기 어려운 면이 있다. 가령 전영애/최민숙 역이 “작고한 시장의 세 아들”(16)이라 옮긴 부분을 “시장의 세 유아遺兒”(상 12)라고 번역한다든가, 대부분의 역자가 “방향”이라고 번역한 “Richtung”을 “침로”라고 번역한 부분이 그렇다. “자네의 노력, 빗나가게 할 수 없는 자네의 침로(針路)는 현실에 시의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하 332) 그러나 이러한 번역문의 고색창연한 느낌이 괴테의 자서전을 아마도 일종의 성현이나 위인의 자서전으로 읽을 한국의 교양 독자층의 기대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다.
박환덕 역도 한자의 조어력에 기대어 문장의 리듬을 살려내던 정경석 역과 유사한 미덕을 보인다. 예컨대 괴테가 벨 Bayle의 사전을 “Werk[e], das wegen Gelehrsamkeit und Scharfsinn eben so schätzbar und nützlich als wegen Klätscherei und Salbaderei lächerlich und schädlich ist”(712)라 평가하는 대목의 번역을 보자. 박환덕 역 역시 두 음절의 한자어를 사용해 원문의 “-rei”의 반복이 낳는 운율을 비슷하게 재현하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전은 비방과 요설로 인하여 어리석고 해로운 사전임과 동시에, 박식(博識)과 형안(炯眼)으로 인해서 또한 귀중하고 유익한 책이기도 했다.(박환덕, 하 264) 이 사전은 잡담과 횡설수설로 인해서 형편없고 해로운 동시에, 박식과 명민한 지혜로 인해 귀중하고 유익한 책이기도 했다.(전/최 878) 이 사전은 박학다식하고 날카로운 면에서는 값어치 있고 유용하지만, 험담과 장광설 때문에 우스꽝스럽고 해롭기까지 한 책이었다.(박광자 2권, 286)
박환덕 역은 전체적으로 정경석 역 못지않게 풍부한 어휘력과 좋은 우리말 감각을 발휘하는데, 특히 격언이나 대구 번역에서 뛰어나다.
Eines Mannes Rede/Ist keines Mannes Rede:/Man soll sie billig hören Beede.(22)
한 사람의 의견은/ 어느 누구의 의견도 아니다./모름지기 공평하게 양편의 말을 들을지어다.(박환덕, 상 22) 한 사람의 연설은/어느 사람의 연설도 아니다./양자의 말을 공평히 들어야 한다.(정경석, 5권, 23) 한 사람의 의견은/그 누구의 의견도 아니다./둘의 의견을 공평히 들어야 한다.(최은희, 25) 한 사람의 연설은/어느 사람의 연설도 아니다./합당하게 들어야 한다.(전/최, 27)
번역을 비교해 보면 우선 “Rede”를 “연설”보다는 “의견”이라고 옮기는 쪽이 의미를 좀 더 쉽게 전달한다. 이 점을 제외하면 모든 번역이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박환덕은 “모름지기”라는 말을 집어넣고 “~지어다”라는 어미를 사용하여 한국식 격언의 느낌을 살린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das oculis non manibus”(179-180)라는 라틴어 격언을 박환덕은 “손이 아니라 눈으로”(상 188)라고 옮기는데, 이는 “눈으로만 보고 만지지는 말라고”(전/최 201)나 “눈으로 보시고 손은 대지 마시오”(정경석, 5권, 130)보다 더 격언답게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heute rot, morgen tot!”의 번역을 보자. 연극을 구경하던 어린 날의 괴테가 잘난 척을 하느라 남자아이 배우를 두고 저 아이가 지금 저리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어도 내일은 누더기를 입고 잘지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가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배우의 어머니에게 욕을 듣게 된다. 그러자 괴테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일갈하여 그 어머니를 일순간 어안 벙벙하게 만드는데,
Nun, wozu der Lärm? heute rot, morgen tot!(107)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합니까? 오늘의 홍안(紅顔)은 내일의 백골(白骨)!(박환덕, 상 112) 왜 이렇게 떠드십니까? 오늘의 영화는 내일의 멸망!(정경석, 5권 82)
정경석 역도 상당히 창의적이나, 박환덕 역은 ‘홍안’과 ‘백골’이라는 이미지의 대비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원문에 더 가까운 장점도 있다. 박환덕 역은 이보다 절묘한 번역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준이 높기에 이후에 나온 많은 번역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괴테가 궁정생활의 장단에 대해 아버지와 벌이던 입씨름을 풍자시로 발전시킨 대목을 보자. 박환덕은 정경석 역의 좋은 점을 취하면서 결정적인 부분에서 새롭게 번역하는데, 가령 박환덕은 시의 첫 행 “Lang' bei Hofe, lang' bei Höll!”(689)을 “오랜 벼슬은 오랜 지옥!”(하 237)으로 옮긴다. 이는 비록 자국화 경향이 있기는 하나 정경석의 “오랜 사관(士官)은 오랜 지옥”(502)보다 훨씬 가깝게 와닿는다. 또한 정경석의 절묘한 번역인 “사관의 고충이란 긁고 싶은 곳을 긁지 못하는 격 Willst du die Not des Hofes schauen:/Da, wo dich's juckt, darfst du nicht krauen!”(689)에서 박환덕은 사관을 벼슬로만 바꿔 그대로 활용하되, 바로 다음 연 “Da, wo er kraut, da juckt's ihn nicht”(689)에서 정경석이 “가렵지도 않은 것을 긁는 것이다”라고 번역한 것을 “가렵지도 않은 것을 긁는 격”이라고 이전 행 번역에 맞춰 바꾸는 재치를 보인다. 마지막 연에서 궁정을 벗어난다고 자유롭게 살 줄 아느냐며 네 집에서도 어차피 너는 부인과 자식들을 떠받들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의 말(“Denn es beherrscht dich deine Frau,/Und die beherrscht ihr dummer Bube,/So bist du Knecht in deiner Stube.”(690))을 정경석이 “어차피 너는 마누라 세상에다/바보 자식이 마누라를 누르면/그대는 집안의 노예인 것이다.”(503)라고 옮겼다면, 박환덕은 “어차피 너는 엄처시하. 그리고 어리석은 자식이 그대 마누라를 쥐고 흔드니, 그대는 집안의 노예다.”(하 238)라고 옮겼다. ‘엄처시하’라는 사자성어를 활용해 좀 더 친숙하게 번역해놓은 것이다.
이상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환덕의 번역은 자국화 경향도 보인다. 예컨대 괴테가 어릴 적 자기 집에 숙영하던 프랑스군들이 떠나자 “허전했다 vermissen”고 하는 부분을 역자는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고”(상 133)라고 하여 한국식의 관습적 표현을 집어넣어 의미를 실감나게 전달한다. 또 박환덕 역에서는 정경석 역과 비슷하게 기독교적인 표현을 불교적인 표현으로 옮긴 경우가 많은데(가령 “승적”, “매승 Pfaffe”, “달관 Apercu” 등), 때로는 한발 더 나아가, “einen heitern ja seligen Blick”(691)을 “그 명랑하고 법열에 빛나는 시선”(하 239)이라 옮기기도 했다. 대부분 “경건한” 시선이라 옮기고 말 것을 불교적인 표현으로 옮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원문의 문체적 특징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옮겨낸 부분도 눈에 띈다. 18장에서 괴테는 젊은 날의 스위스 여행을 서술할 때 일부 속기문(速記文)적인 스타일을 보인다. 4부로 갈수록 자서전의 서술은 파편적으로 바뀌며, 반세기 전에 남겨둔 메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당시의 기억을 불러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서술자는 스위스 여행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당시 썼던 짤막한 기록을 그냥 삽입해놓는 듯하다.
Den 18. Sonntags früh die Kapelle vom Ichsen aus gezeichnet(784) 18일 일요일 새벽, 여관에서 예배당을 스케치함.(하 352)
Um 3. Uhr in Flüelle, wo er eingeschifft ward um 4. Uhr in Altorf, wo er den Apfel abschoß.(785) 3시, 그가 배에 탄 프뤼에렌으로 가다. 4시, 그가 능금을 쏘아서 떨어뜨린 알트도르프에 도착.(하 352-3)
Den 21. halb 7. Uhr aufwärts.(786) 21일 6시 반 등산.(하 354)
원문을 보면 본동사가 생략되어 중요한 내용만 간략히 적는 일종의 속기체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유일하게 박환덕 역만 이러한 문체를 살려낸다. 역자의 절묘한 언어 감각을 보여주는 예는 이외에도 숱하게 많다.
Er hatte mich verzogen, indem er mich bildete(329)
그는 나를 교육시킴으로써 도리어 나를 그르쳤다.(박환덕, 상 364) 그는 교육시키면서 한편 나를 나쁘게 만들었다.(정경석, 5권, 242) 그는 나를 육성시키면서 또 나를 일그러뜨렸다.(전/최, 384)
괴테가 베리쉬라는 친구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말할 때 쓴 아이러니한 표현이다. 박환덕 역이 “그르치다”라는 기발한 역어를 사용하여 역설을 강화한다. 또 “자유란 말은 설령 어떤 미망(迷妄)을 나타내고 있다 하더라도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아름답게 울려 펴진다”(하 56)에서도 보통은 “오류”(이관우, 710; 박광자, 2권 59)라고 옮기는 “Irrtum”(523)을 박환덕은 “미망”이라고 옮겨 원문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문학적인 향취를 불어넣는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발군의 번역 감각 덕분에 박환덕 역도 정경석 역과 함께 이후의 번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령 이관우 역에서 “그런 불완전한 상황에서 발생하곤 하는 온갖 삶의 불쾌감”(837)이라 되어 있는 부분인 “aller Lebensverdruss der aus solchen Halbverhältnissen hervorzugehn pflegt”(620)에서 번역하기 까다로운 “Halbverhältnissen”을 박환덕은 “이 같은 엉거주춤한 상태”(하 167)라고 보다 맛깔스럽게 옮겨 이후 번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스피노자를 괴테가 “ein ruhiger Particulier”(713)라고 부른 것을 박환덕은 “조용한 야인(野人)”(하 264)이라고 번역했는데, “조용한 성품의 개인”(이관우, 946), “온후한 사람”(최은희, 709)보다 그 의미가 더 잘 전달된다. 스피노자의 조용한 성격을 말한다기보다는 그가 칩거해서 살았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역시 전영애/최민숙 역(878)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그 가시돋친 설 seinen feindseligen Lieblingsgedanken”(박환덕, 상 448)에서 ‘적대적인’이라는 의미의 “feindselig”를 “가시돋친”이라고 감각적으로 번역하여 이관우, 윤용호 역에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박환덕 역은 <시와 진실>에 삽입된 수많은 시 번역에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그의 번역은 정경석 역을 차용하면서도, 산문처럼 번역한 정경석의 일부 시 번역을 완전히 갱신하면서 <시와 진실> 속 시 번역의 새로운 기준이자 척도를 제시했다.
4) 윤용호 역의 <시와 진실>(2006)
2000년대 중반에 불어닥친 <시와 진실> 새 번역 열풍의 첫 시작은 윤용호 역이다. 기존 한자투 번역과는 달리 읽기 쉬운 번역을 지향하여, 문단을 쪼개고 대화 부분은 줄바꿈을 했으며, 전체적으로 문장이 비교적 간결하고 유려한 편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장을 다듬다 보니 아무래도 원문 특유의 표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아예 생략하는 예도 더러 발견된다. 예컨대 당시 어린 괴테를 손자처럼 예뻐하던 폰 라이넥은 그를 초대한 주인과 서로 감정이 상한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화제 전환을 시도한 것을 괴테는 “한 마리의 토끼를 다른 토끼에 이어서 달리게 했다”라는 관용구로 표현하고 이것이 무슨 뜻인지 괄호로 설명해주는데, 윤용호는 이러한 관용구가 독서 흐름만 방해할 뿐이라 생각했는지 아예 생략했다.
Sie ließen einen Hasen nach dem anderen laufen (dies war unsere sprichtwörtliche Redensart, wenn ein Gespräch sollte unterbrochen und auf einen anderen Gegenstand gelenkt werden);(180) 친구들이 잇따라 중간에 끼어들어 상황을 전향시키려 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윤용호, 172) 그들은 토끼를 한 마리씩 계속 풀어주었다(이 표현은 대화를 중단시켜야 할 때나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자 할 때 우리가 흔히 써온 격언적 어법이었다).(이관우, 282) 그들은 토끼 한 마리로 하여금 다른 토끼를 쫓게 했다.(이것은 대화를 끊고 다른 대상으로 유도해야 할 때면 우리들이 쓰는 잘 알려진 관용구였다.)(전/최 204)
비슷한 맥락에서 윤용호 역은 서술자가 중간에 독자에게 하는 말, 가령 이관우 역에서는 “이제 독자를 슬프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지루하게 할 수 있는 비슷한 경우들 대신 그 이야기를 하겠다”(이관우 564)와 같은 말도 생략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략해도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윤용호 역은 번역이 까다로운 부분에서는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기보다는 기존의 번역본을 따른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번역 저본은 밝히고 있지 않다.
5) 이관우 역의 <괴테 자서전>(2006)
이관우 역은 윤용호 역보다 고작 몇 달 뒤에 나왔다. 약 30년 만에 이루어진 ‘새로운 완역’이라는 타이틀로 책을 준비해온 출판사 입장에서는 한발 늦은 셈이라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2] 그래서인지 이 번역서의 초판은 가죽 장정을 연상시키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표지를 자랑하며, 내용 이해를 돕는 흑백 및 컬러 도판 자료를 다수 싣고 있다. <시와 진실>이 교양인을 위한 양서라는 점이 역자 해설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소장할 만한 도서를 만들기 위해, 또 번역서의 차별화를 위해서 출판사에서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방대한 책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세부 내용 색인도 넣었다. <시와 진실>을 추천하는 토머스 칼라일의 글을 맨 앞에 ‘해설’ 격으로 수록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이 번역은 처음에는 <괴테 자서전>이라는 제목이었으나, 2013년 2판부터 <괴테 자서전. 나의 인생, 시와 진실>로 제목이 바뀌었다. 2021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에서는 번역이 크게 수정된 것은 없고 대신 화보가 빠져 있다. 번역의 저본은 함부르크판 괴테전집이다.
이관우 역도 윤용호 역과 유사하게 전체적으로 가독성을 고려하여 문단을 쪼개고 대화가 나오는 부분은 모두 줄바꿈을 했으며 문장도 비교적 간결한 편이다. 가령 <시와 진실>의 유명한 서두 번역을 보자.
1749년 8월 28일에 나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 하늘의 별자리는 매우 좋았다. 태양은 처녀자리에 떠서 한낮의 정점을 이루고 있었다. 목성과 금성은 정겹게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고, 수성도 싫어하지 않았다. 토성과 화성은 무심히 움직였다. 막 만월이 된 달만이 태양에 맞선 미광의 위력을 더욱 더 발휘하면서 동시에 행성으로의 시간을 마감했다.(이관우, 81)
1749년 8월 28일, 정오 12시의 종소리와 함께, 나는 마인 강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별자리는 서상을 나타내고 있었고, 태양은 처녀궁에 자리하고서 그 날의 최고점에 달해 있었다. 목성과 금성은 호의를 갖고, 수성도 반감은 품지 않은 채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성과 화성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방금 둥글게 차오른 달만은 동시에 그 행성시에 들어섰기 때문에 한층 그 충위를 작용시키고 있었다.(박환덕, 상 11)
1749년 8월 28일, 정오 12시를 치는 종소리와 함께, 나는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별자리는 상서로웠다. 태양은 처녀 자리에서 그날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목성과 금성은 태양에게 다정스러운 눈길을 보냈고 수성도 싫은 기색이 아니었으며, 토성과 화성은 관계하지 않았다. 다만 방금 만월이 된 달만은 보름달이 됨과 동시에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지구를 사이에 두고 태양과 일직선상에 마주 선 대일조의 힘을 그만큼 더 많이 행사했다.(전영애/최민숙 15)
위 밑줄 친 부분들처럼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천문학이나 점성술에서 쓰는 전문 용어가 다수 등장한다. 박환덕 역에서는 “서상”, “충위”가, 이관우 역보다 늦게 나온 전영애/최민숙 역에서도 “대일조”라는 용어가 쓰인다. 이와는 달리 이관우는 전문 용어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번역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시 번역에서도 드러난다. 다음은 헤르더가 괴테에게 보낸 시다.
그대의 키케로 서한집 속에 부르투수의 서한이 있다면,/잘 만들어진 서가의 고서들이 화려하게 장정되어/내용보다 외관으로 그대를 즐겁게 한다면,/그대 신의 혈통을 받은, 고트족 혹은 고테 출신의/괴테여, 그것을 나에게 보내다오.(이관우, 601)
깨끗이 단장된 서가에 화려하게 장정된 서적, 그 학교의 위안자에게서 내용보다 외관으로 위로를 받는 그대, 혹시 그대의 시세로 서한집 속에 부르투스의 서한이 있거든 그대 신의 후계여, 고오트족 혹은 고드(汚物)의 후계여, 그것을 나에게 보내 다오, 괴에테여.(정경석, 5권, 317)
브루투스의 편지가 그대의 키케로 서한 중에 있거든,/대패질 매끈한 책꽂이 칸칸이 학교의 위로자들, 화려하게 무장한 책들이 위로하는, 하지만 내적이기보다는 외적으로 위로하는 그대/신들로부터 유래한, 고트족으로부터 혹은 코트로부터 유래한 괴테여, 나에게 그걸 보내다오.(전/최, 510-11)
대패질 잘 된 책꽂이라는 학교에서 위로를 받고,/화려한 장정의 내면이 아니라 외면에서 위로를 받는 그대여,/신들의, 고트족의 아니 코트(오물)의 후손인 그대에게/키케로 서한집 속에 혹시 브루투스의 서한이 있다면 괴테여, 그것을 나에게 보내주라.(박광자 1권, 496-497)
원래 원문은 전영애/최민숙 역처럼 도치문이나, 이관우 역은 문장을 재구조화하여 읽기 쉽게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이 때로는 밋밋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가령 앞에서 인용한 궁정 풍자시의 한 대목 “인생의 나머지 반도 형리에게 바치는 꼴 Die andere Hälft' geht auch zum Henker”(688)을 단순하게 “나머지 반평생도 사라질 것임을”(이관우, 917)이라고 옮겨놓은 것이 그러한 예다.
그밖에도 ‘속임수 Mystifikation’라는 5장의 주제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번역이다. 이 장은 소년 괴테가 연애편지 대필에 휘말리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레트헨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아 넘어가는 내용을 다룬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원문을 읽은 독자가 더 눈치채기 쉬운데, 눈에 띄는 단어 “Mystifikation”이 여러 번 사용되어 이 관계가 암시되기 때문이다. 이관우는 이 단어를 일관되게 번역해 괴테의 가짜 연애편지와 첫 연애가 실은 속임수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가장 잘 드러낸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Mystifkation”이 다양한 어휘로 번역되어 있다. 어떤 곳에서는 조롱한다고 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현혹, 또 다른 곳에서는 기만으로 번역하여 이들 사이의 관계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특히 괴테가 연애편지 대필로 누군가를 속이고 현혹하는 데에는 참여하지만, 조롱하거나 골려주려는 의도에는 나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조롱’이 적확한 역어인지 의문스럽다. 또한 이 ‘속임수 Mysitifkation’가 이후에 나오는 대관식과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즉 대관식이 독일제국이 여전히 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화려한 눈속임이라는 점을 괴테가 암시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우롱’이라는 번역은 지나친 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관우 역은 괴테가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 대해 갖는 거리감을 가장 충실하게 전달한 번역이다. <시와 진실>에서 서술자는 주로 1인칭 ‘나’로 이야기하다가 과거의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자신을 3인칭 ‘그’로 지칭하며 서술하곤 하는데, 이러한 태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젊은 베르터의 고뇌>의 창작 배경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괴테는 자신이 일명 ‘로테’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독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자, 자신을 3인칭으로 전환하고, 자기 자신과 ‘로테’, 그리고 로테의 약혼자를 복수 3인칭 ‘그들’로 지칭한다.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이러한 인칭 전환을 다시 1인칭으로 되돌려놓았고, 그래서 원문 서술자의 완곡하고 거리를 두는 태도가 1인칭 고백조로 바뀌어버렸다. 반면 이관우는 원문대로 3인칭으로 번역하여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서술자의 태도를 잘 전달한다.
6) 최은희 역의 <시와 진실>(2007)
최은희 역은 2007년 동서문화사에서 출판되었고, 2016년에 새 장정으로 다시 나왔다. 작품 해설이 단순한 해설을 넘어서 한 편의 탁월한 비평처럼 읽힐 정도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시와 진실>의 탄생 배경과 성립 과정을 소상히 소개하고, 괴테가 염두에 두고 고민한 점만이 아니라 전체 구성상의 불일치나 결함도 지적한다. “일관된 기술 뒤의 제 4부는 글쓰기의 괴로움, 변명 등이 뒤섞이고 서술 대신 인용이 자리를 차지한다. 중도에서 끊어짐을 사과하고 계속해서 기술할 것을 보증하듯이 괴테는 자기 작품의 한 구절을 이용하여 마무리했다.”(최은희, 798) <시와 진실>이 종교적 모티프를 다수 담고 있음을 지적하는 유일한 해설이기도 하다. 최은희 역은 전반적으로 독자친화적인 번역을 지향한다. 가독성을 위해 문단을 잘게 나누었으며, 대화가 나오면 줄바꿈을 하는 것은 물론, 장마다 원문에 없는 제목을 새로 붙여, 가령 1장은 “나의 고향 프랑크푸르트”, 2장은 “유년의 기억”, 20장은 “잃어버린 사랑 – 릴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러한 소제목은 방대한 책의 내용을 대강이라도 파악하게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전반적으로 원문에 구애받지 않고 의역하고 윤문했으며 자국화하는 경향도 보인다. 예컨대 머리말에서 괴테가 자서전 집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한 친구의 편지’를 소개하는데, 여기서 그 친구가 괴테를 부르는 호칭인 “소중한 친구 teuerer Freund”(9)를 “형”으로 옮겼다. “이번에 우리는 12권으로 정리된 형의 문학 작품을 모두 입수하였습니다.”(최은희, 7) 박환덕은 “귀하”, 강두식 및 박광자는 “당신”이라고 옮긴 단어를 최은희는 자국화하여 ‘형’으로 옮긴 것이다. 또한 괴테의 아버지와 토랑 백작의 갈등을 중간에서 완화시켜준 통역사 “Der Dolmetsch”, “Der Gevatter Dolmetsch”(111)를 “통역 아저씨”(109)라고 옮겼다. 대부분은 “통역”, “통역관”, “통역 씨”, “우리 대부인 통역관”(전/최, 128)으로 옮기고 있는데, 최은희는 어린 괴테의 시선에서 호칭을 번역한 것이다.
기존 번역에서 가장 자유로운 번역이기에 기 번역에서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 가령 괴테가 베츨라에서 막 일을 시작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der neue Ankömmling”이라는 표현은 “신래자인 나는“(정경석, 5권 423), “새 손님인 나는”(박환덕, 하 117; 전/최, 697), “새 손님”(이관우, 777; 윤용호, 570)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최은희는 이것을 “신참자인 나는”(570)이라고 번역하여 그 뜻을 적확하게 살린다.
그러나 이 판본은 번역 저본도 명시되어 있지 않고, 독일 지명이나 외래어의 상당수가 독일어 발음과 거리가 멀게 표기되어 있어 일역이나 영역의 중역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가령 프랑크푸르트의 중심 뢰머베르크를 “레마베르크”(23)로, 괴테가 젊은 시절 법원의 시보로 일하던 “베츨라”(Wetzlar)를 “베츠랄”(555), 괴테와 친교를 나눈 라바터는 “라봐타”(193), 괴테가 여행한 스위스의 “칼텐바트”(Kaltenbad)는 “카르텐 버트”(779)로 표기되어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7) 전영애/최민숙 역의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2009)
전영애와 최민숙의 공역은 2009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한국괴테학회에서는 1996년 한국어 괴테전집을 민음사에서 발간하는 대사업을 계획했다. 이 사업은 비록 완수되지는 못했지만, 이 일환으로 학회원들에 의해 상당한 번역이 이루어졌고, 전영애/최민숙 역도 그러한 결실 중 하나다. 1부와 2부는 전영애, 3부와 4부는 최민숙이 옮겼다. 다른 역본과 마찬가지로 함부르크판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그밖의 괴테 전집 및 <괴테 사전>, <킨들러 문학사전>을 참고하여 역주를 달았다. 작품 해설은 특이하게도 두 역자가 각각 따로 썼다. 해설은 괴테의 자서전을 교양도서로 소개하고 추천하는 성격을 넘어서 이 저작이 제기하는 여러 학술상의 문제들을 소개한다. 이로써 이 번역서가 일반 독자보다는 전공자나 연구자를 겨냥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취지에서 이 번역은 원문의 문장 구조에 충실한 직역을 지향한다. 괴테가 젊은 시절 오틸리엔베르크를 순례했다가 그곳에 사는 한 여성의 친절에 감동을 받아 이후 <친화력>의 여성 인물을 오틸리에라 이름 지었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자.
[...] eine meiner zwar spätern, aber darum nicht minder geliebten Tochter damit [mit Ottillie] ausstattete(530)
내 만년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덜 사랑한 것은 아닌 딸들 중의 하나에게 그 이름을 부여했는데 [...](전/최, 631) 만년의 작품 속에 만년이었기 때문에 더욱 사랑했던 어느 아가씨(「친화력」 속의 여성 오티일리에를 말함.)에게 주어 버렸다.(정경석, 상 387) 만년에 쓴 작품 속의 한 처녀에게 주었다. 그것은 내가 늙어서의 아가씨였지만 나의 사랑은 젊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박환덕, 하 64) 내가 만년에 젊은 시절 못지않게 사랑했던 어떤 아가씨에게 부여했는데 [...] (이관우, 719) 만년에, 그러나 젊었을 때 못지않게 사랑했던 어느 아가씨에게 전달했다.(윤용호, 521) 그 이름을 마침내 나의 만년 작품 중의 한 아가씨에게 주었다.(최은희, 516)
위 대목에서 괴테는 자신이 창조한 여성 인물을 ‘딸’이라고 부르는데 전후 맥락 없이 ‘딸’이라고 하면 작가의 실제 딸을 말하는 것으로 혼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아가씨’라고 옮겼다. 그러나 전영애/최민숙 역은 그런 오해를 무릅쓰고 ‘딸’이라고 번역해 원문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다. 또한 딸을 수식하는 “늘그막에 낳았지만 그렇다고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닌”이라는 표현이 복잡하기 때문에 일부 번역에서는 심지어 단순화되거나(최은희 역), 수식 부분을 따로 떼어내 새 문장으로 만들었는데(박환덕 역), 이와는 달리 전영애/최민숙 역은 원문의 문장 구조를 최대한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위 예시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런 식의 직역이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 예문을 보자.
[A]llein statt derselben[der Magd] trat ein Mädchen herein, von ungemeiner, und wenn man sie in ihrer Umgebung sah, von unglaublicher Schönheit.(186)
그러나 하녀 대신 아가씨 한 명이 들어왔는데, 보통이 아닌 아름다움을, 또 그런 환경에서 마주치니 더욱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가씨였다.(전/최, 209) 그러나 하녀 대신에 들어온 것은 이러한 환경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여쁜 처녀였다.(정경석, 5권, 135)
소년 괴테가 술집에서 그레트헨을 처음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이다. 전영애/최민숙 역은 원문의 문장 구조를 최대한 그대로 옮겨내려고 노력하여 원문의 쉼표까지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있으나 아래 정경석 역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그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이하의 사례에서도 다른 번역과 비교해 보면 직역은 그 의미가 확실히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이따금씩 한번 자신의 내적인 인간적 내용이 그만큼 더 순수하게 작용하게끔 외적인 장점들을 숨기려는 것은 중요한 인물들의 용서할 수 있는 변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후들의 미복 차림과 거기서 비롯되는 모험에는 늘 통쾌함이 있다. 변장한 신성들이 나타나는 것이다.(전/최, 539)
지체 높은 사람이 본래의 내면적인 인간적 본질을 좀 더 순수하게 내보이기 위해 이따금 외적인 우월함을 숨기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행동이다. 군주가 신분을 숨기고 하는 미행과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모험은 언제나 최고의 즐거움을 준다. [...] 변장한 신들처럼 보인다.(이관우, 629)
그러나 이런 직역의 기조 덕분에 전영애/최민숙 역은 괴테가 자서전에서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부분을 가장 충실히 번역해냈다. 앞서 말했듯 괴테는 <시와 진실>에서 ‘나’ 대신에 ‘그’나 ‘소년’ 등의 3인칭, 혹은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을 자주 사용하여 자전적 서술을 객관화하려 한다. 이는 여러 목적을 갖는바, 한편으로는 자서전이 자신의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 시대와 세대의 기록임을 보여주고자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낯설어진 젊은 날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현재의 자서전적 작가가 거리를 두고 있음도 표현하려 한다. 이러한 자서전적 인칭의 번역에 <시와 진실>의 역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밑줄 친 부분을 보자.
Eine gewisse Neigung zum Altertümlichen setzte sich bei dem Knaben fest(21)
오래된 것에 대한 기호가 소년의 마음에 뿌리내렸는데 [...](전/최, 26) 고전성을 향한 일종의 애호심이 나의 동심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며 [...](정경석, 5권 24) 고전물에 대한 일종의 애호심이 동심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고 [...](강두식, 22) 예스러운 것에 대한 일종의 애착감이 나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박환덕, 상 21) 옛것에 대한 애착이 나의 동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윤용호, 28) 소년인 나는 고대적인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이관우, 92) 내 마음 속에 옛 것에 대한 일종의 애착심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최은희, 23) 당시 내 마음에는 오래된 것에 대한 애호심이 뿌리내렸는데 [...](박광자, 1권, 23)
위 예문에서 서술자는 자기 자신을 3인칭화하여 “소년”이라고 부르므로 “소년의 마음”이라고 옮긴 전영애/최민숙 역이 원문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에 정경석, 박환덕, 최은희, 박광자 역은 그냥 “나의 마음에”처럼 아예 1인칭화하였고, 아니면 이관우 역처럼 “소년인 나는”이라고 1인칭이되 소년이라는 표현을 살리는 절충을 택했다. 또 다른 예로, 1장 마지막에서 어린 괴테는 제단을 만들어 신을 모시려 했다가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악보대를 태우는 불상사를 일으키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서술자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소년’ 혹은 ‘그’로 3인칭화하여 서술한다.
소년인 나는 [...] 그 비슷한 것이 아마도 소년에게 인상적인 느낌을 주었고 그에게 비슷한 사상을 갖도록 [...] 소년은 요컨대 신조 첫 항에 의지하고 있었다. [...] 그분이야말로 소년에게 진짜 신으로 보였다. [...] 그런 존재에게 소년이 하나의 모습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 다만 어린 사제는 [...] 소년이 새집에서 [...] 그는 그 의식을 반복하기를 바랐다. [...] 이로 인해 젊은 사제는 극도로 당황스러워했다. [...] 그는 이 우연을 거의, 신에게 그 같은 길로 해서 다가가려 하는 것 자체가 도무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하나의 암시이자 경고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전/최, 57-59)
밑줄 친 부분이 보여주듯이 역자는 거의 3인칭만을 사용하여 두 쪽이 넘는 분량의 긴 대목을 번역했다. 처음에 3인칭이 도입될 때에만 독자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소년인 나는”이라고 옮기고 그 뒤부터는 3인칭(“그”, “어린 사제”, “젊은 사제”)으로 일관되게 옮겼다. 이와는 달리 대다수의 역자들은 3인칭과 1인칭을 혼란스럽게 오간다. 가령 정경석은 처음에는 아예 1인칭으로 번역하다가 “젊은 사제”가 나오자 3인칭으로 옮겨갔다가 몇 문장 뒤에 다시 1인칭으로 돌아온다. 박환덕은 “소년인 나는”(상, 49)이라고 시작하여 1인칭으로 죽 옮기다가 “젊은 사제”가 나올 때만 따옴표를 쳐서 이것이 일종의 별칭임을 환기시키는 방법을 쓴다. 이관우와 최은희는 아예 처음부터 모두 1인칭으로 옮겼다. 전영애/최민숙 역은 소년 시절의 자신과 거리를 두는 괴테의 서술자적 태도를 살리기 위해서 3인칭을 고수했고 마지막 문장도 ‘것 같다’라는 추측으로 옮김으로써 서술자의 조심스럽고 불확실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직역의 기조는 독일어에서 누군가를 이름 대신 별칭으로 지칭하는 방식까지 충실히 옮긴 데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1부 마지막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휩싸인 괴테를 도와주러 온 집안의 친구인 시의원 슈나이더 씨가 “[d]er alte messianische Freund”(230)라 불리는 대목을 보자. 우선 이는 초역부터 계속 오역되어 온 부분이다(“나이 많고 메시아를 예찬하는 쉬나이더씨”(정경석, 167), “<메시아스> 예찬론자 노인”(최은희, 216)). 전영애/최민숙은 “구세주 같은 늙은 친구”(전/최 260)라고 정확히 옮긴다. 사실 슈나이더 씨는 집안의 친구이긴 하나 10대 중반의 소년 괴테에게는 할아버지 연배여서 이 사람을 ‘친구’라 지칭하는 것이 한국 문화에서는 상당히 어색한 일이며, 심지어 맥락이 잘 주어져 있지 않으면 그 ‘친구’가 슈나이더 씨를 가리키는 것인지 독자가 알아채지 못할 위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역자가 “집안 친구 der Hausfreund”(234)라는 호칭을 그냥 슈나이더 씨라고 옮겼다. 그러나 전영애/최민숙 역본은 어색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런 호칭을 대부분 살리려 했다.
전영애/최민숙 역본이 원문의 구조와 표현에 충실하려다 보니 대체로 번역문이 일반 독자에게 직관적으로 와닿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나, 이와는 반대의 번역을 선보인 경우도 발견된다. 괴테가 어린 시절 운지법과 음계에 재미난 이름을 붙여서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한 선생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역자는 “die Däumerlinge”, “Die Deuterlinge”, “die Krabler”, “Zabler” “die Fakchen” “Gakchen”(127)과 같은 표현을 “엄지 씨”, “가리킴 씨”, “꼬물락꼬물락 씨”, “바들바들 씨”, “꼬마 파”, “꼬마 올림 파”(전/최, 149)라고 재미있게 잘 번역하였다. 이전에는 대부분 “도이머링”, “도이터링” 이런 식으로 음차하거나 아니면 “엄지손가락”, “검지손가락”으로 뜻만 겨우 전달하는 식이었는데 이 번역은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귀여운 표현을 잘 살려냈다.
또 다른 특기할 점으로는 제1부 앞의 모토, 보통 “매질 없는 가르침은 없다”(이관우)라고 옮길 수 있을 그리스어 제사를 유일하게 다르게 번역했다는 것이다. “한꺼풀 벗겨지지 않은 인간은 교육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제사의 독일어 번역 “Der Mensch, der nicht geschunden wird, wird auch nicht erzogen”에서 보통 매질이나 학대로 번역될 수 있을 ‘schinden’의 옛 뜻에 ‘껍질을 벗기다’가 있어서 이렇게 옮긴 듯하다. 추측건대 역자들은 ‘한꺼풀 벗겨진다’가 곤충의 변태 과정처럼 한 단계 성장하거나 성숙해진다는 뜻이라고 보고, <시와 진실>의 구성 모델인 식물변형론과의 연관성을 암시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밖에 4부 서두에서 괴테가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entsagen”(713)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는데, 대부분의 역자가 ‘체념’ 혹은 ‘단념’이라고 번역한 이 개념을 전영애/최민숙은 ‘절제’라 번역하고 역주를 붙여 이 개념이 “포기의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가 강해 ‘절제’로 번역해 보았다”(879)고 설명한다. 그러나 해당 표현이 나오는 문단에서 “entsagen”은 인생이란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며 우리는 자신의 개성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됨을 말하고 있으므로 ‘절제’라는 역어가 이 맥락에서는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뒤에 같은 개념이 다시 등장할 때에는 기존대로 “체념”(전/최, 880)이라 옮겨져 있고, 이후에 릴리와 작별하게 되었을 때 괴테가 사용한 “entsagen”도 “체념”(전/최 1013)이라 옮겨져 있어 번역의 일관성을 저해한다.
8) 박광자 역의 <시와 진실>(2014)
박광자 역은 2014년에 부북스 출판사에서 1권과 2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대부분 함부르크판을 저본으로 삼았던 기존 번역본들과 달리 박광자 역은 뮌헨판 전집을 저본으로 삼았다. 마지막에는 무슨 내용이 어느 권에 있는지 찾을 수 있게 각 권의 소주제들을 정리해놓았다. 역자는 해설에서 2000년대 중후반에 <시와 진실> 번역본이 쏟아져 나온 상황을 의식하면서 번역본이 이미 많이 나와있음에도 번역서를 새로 내게 된 동기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번역은 1992년에 시작되었으나 2010년에야 완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후발주자가 되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역자는 “정확성과 함께 읽기 쉽도록 번역하고자 노력”(2, 436)했으며, “앞서 모든 번역본에서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2, 436)고 썼다. 이 두 가지 말은 실제로 이 번역의 특징을 집약해 보여준다. 우선 역자는 많은 부분에서 기존 번역의 장단점을 판단하여 취사선택하는 경향을 보이며, 특히 아래의 예시가 보여주듯 전영애/최민숙 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드러난다.
Mir war jedoch durch diese hämische Worte eine Art von sittlicher Krankheit eingeimpft, die im Stillen fortschlich.(76)
그렇지만 이 심술궂은 말 때문에 내게는 은연중에 사라져가던 윤리적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이 이루어졌다.(박광자, 1권 82) 그렇지만 이 심술궂은 말들을 통하여, 은연중에 사라져가던 윤리적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이 이루어졌다.(전/최, 90) 그러나 이러한 악의적인 말로 내게서는 일종의 도덕적인 병이 싹텄으며, 그것은 조용히 커져갔다.(이관우, 164) 그렇기는 하나 악의에 찬 이 말은 나의 내심에 일종의 정신적 병으로서 심어져 그것은 어느새 만성이 되었다.(박환덕, 상 81)
어릴 적에 동네 아이들에게 자신의 조부가 따로 있다는 질시 어린 험담을 듣게 된 괴테는 이 험담에 마음이 상하기보다는 자신이 실은 어느 귀족의 손자가 아닐까 은근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자신에게 “일종의 도덕적 병”이 주입되어 은밀히 퍼지게 되었다고 서술자는 말하는데, 전영애/최민숙 역과 여기에 영향을 받은 박광자 역에서는 이런 험담이 윤리적 병을 막는 예방접종 역할을 했다고 거꾸로 번역되어 있다. 또 그 병은 사라져가던 것이 아니라 험담으로 인해 몸속에 퍼지게 되었다고 봐야 문맥상 맞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역자의 말처럼 기존 번역에서 가독성이 좋지 않던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어 읽기 쉽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제 글쓰기 작업이 이 단계까지 진행되어 오니 처음으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제부터가 이번 장의 본래 내용인 까닭이다. 이 장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박광자, 2권 125) 자, 이제 저자가 자기의 기도를 이 단계에까지 도달시키면 비로소 처음으로 용이하게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도 이제부터 그 본래의 의도했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립된 것으로 예고되지 않았다.(정경석, 5권 422) 그리고 이제 저자의 의도가 이 단계에 이르니, 저자는 이 일에서 처음으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 책이 이제서부터야 본래 의도했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립된 것으로 예고되지 않았다.(전/최, 694)
이는 괴테가 자서전의 당대 독자들이 아마도 가장 궁금해할 <젊은 베르터의 고뇌>의 창작 배경을 밝히기 전에 운을 띄우며 하는 말이다. 실제 내용보다 다소 난해하게 번역된 경우가 많은데, 박광자 역이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읽기 쉬운 번역을 지향하다 보니, 문체의 품격이나 멋스러움이 다소 떨어지는 경우도 발견된다. 가령 1부를 여는 모토 “맞아야 교육이 된다”(박광자, 1권 7)는 무슨 뜻인지는 곧바로 전달되나 “징계 없는 교육은 없다”(정경석), “매질 없는 가르침은 없다”(이관우)보다 금언으로서의 품격은 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시 번역에서도 이런 특징이 발견되는데, 앞서 인용한 궁정 풍자시의 한 대목을 보자.
Hat einer Knechtschaft sich erkoren,/Ist gleich die Hälfte des Lebens verloren;/Ergeb' sich, was da will, so denk' er:/Die andere Hälft' geht auch zum Henker.(688) 시종의 신분을 택하는 것/그건 인생의 반을 잃는 것./어떤 일에도 기억하라./나머지 반생도 개판임을.(박광자, 2권 255)
마지막 행 “인생의 나머지 반도 형리에게 바치는 꼴”이라는 구절은 정경석이 “남은 반생은 악마의 것이라는 것을”(5권 502)이라고 옮긴 이래, “형리 Henker”는 계속 ‘악마’로 옮겨져 전영애/최민숙 역까지도 유지되어왔다(물론 이관우는 “사라질 것”(917), 최은희는 “지옥행”(684)이라고 달리 옮겼다). 그러나 박광자는 “나머지 반생도 개판”이라는 상당히 과감한 번역을 시도했다. 확실히 “악마의 것”이나 “사라질 것”보다는 그 의미가 직관적으로 와닿으나, 시어로서는 상당히 거칠다. 또 다음 연 번역 “군주에게 순종할 줄 아는 자는/오늘이든 내일이든 운수 대통./하층민들과 어울리는 자는/평생 두고두고 고생길뿐”(박광자, 2권 255) 역시 “운수 대통”, “고생길” 등 한국적인 관습적 표현을 많이 사용해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3음보로 번역하여 운율을 살리고 원시의 유머와 풍자도 전달하려 했음이 느껴진다. 7연에서는 “네 마음대로 살려면/오막살이 짓고/처자와 어울려/막걸리 마시면서”라는 구절에서 “값싼 포도주”로 번역되곤 하는 “Rebenmost”(아직 거르지 않은 포도주라는 뜻)를 “막걸리”라고 번역했다. 서민들이 마시는 거친 술이라는 어감을 전달하기 위해 한국 독자들에게 친숙한 술로 치환한 것이다.
그밖에도 네덜란드 인명을 독일식으로 옮기지 않고 원음을 살려주려고 했다. 가령 Grave를 “그라베”가 아니라 “흐라버”(1권, 23)로 표기했다.
3. 평가와 전망
이상 총 8종의 번역을 살펴보았다. <시와 진실>이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방대한 작품이기에 이것을 매끄럽고 균질적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애당초 직역이든 의역이든 역자의 의도를 방대한 작업 내내 일관되게 관철시킨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작품의 다양한 성격에 맞춰 번역 전략이 달라지는 것도 역자의 의도일 수 있다. 그 결과, 작품이 지닌 특정한 면모는 A라는 번역이 보다 잘 보여준다면, 다른 면모는 다른 번역본, B나 C가 더 잘 보여주기도 하여 절대적인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이다. 따라서 위에서 고찰한 내용은 번역본의 총체적인 특징을 종합한 결론이라기보다는 특정 측면을 부각시킨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고찰이 특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간 번역 작업을 단순화하고 축소하는 측면이 있음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다소 거칠게 종합해 보자면, 원작 자체의 문체가 고풍스럽고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현 독자에게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6,70년대 번역이 오히려 문학적 향취를 잘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면, 2000년대 이후에 나온 번역서는 비교적 가독성이 좋거나 원문에 보다 충실한 장점이 있다. 이미 과분할 정도로 수 차례 완역이 이루어진 작품이라 새로운 번역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만, 또 한 세대가 지나 원작의 특징(특히 인칭의 다양한 변주)을 잘 재현하면서도 문학적으로 읽는 즐거움도 주는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정경석(1959-1962): 시와 진실. 박영사.
정경석(1968): 시와 진실. 휘문출판사.
강두식(1974): 시와 진실. 을지문화사.
박환덕(1979): 나의 생애: 시와 진실. 범조사.
박환덕(2006): 시와 진실. 범우사.
윤용호(2006): 시와 진실. 종문화사.
이관우(2006): 괴테 자서전. 우물이있는집.
최은희(2007): 시와 진실. 동서문화사.
전영애/최민숙(2009):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 민음사.
박광자(2014): 시와 진실. 부북스.
바깥 링크
- ↑ J. W. Goethe(2006): Sämtliche Werke. Bd. 16. Dichtung und Wahrheit. Hg. v. Peter Sprengel. München: Carl Hanser Verlag, 617. 이하 원문 인용 시 원문 옆에 쪽수만 병기한다.
- ↑ https://blog.naver.com/cherard/150018035935(최종검색일: 2024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