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의 기사 (Der Schimmelre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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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슈토름(Theodor Storm, 1817-1888)의 소설

백마의 기사 (Der Schimmelreiter)
작가테오도르 슈토름(Theodor Storm)
초판 발행1888
장르소설


작품소개

1888년에 출판된 슈토름의 노벨레다. 슈토름은 오래전 들었던 어느 유령기사의 전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우케 하이엔이라는 인물의 성장과 업적,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영웅담을 북프리슬란트 특유의 거친 자연과 지역민의 삶을 생생하게 하나로 녹여냈다. 일인칭 화자가 여행길에 겪은 체험을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들려준다. 배경은 18세기 중반으로서 하우케는 뛰어난 능력으로 제방감독관으로 출세하지만, 무리한 방제사업으로 주변으로부터 고립되며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그가 건설한 제방은 그러나 몇 세대를 흐른 뒤에도 건재하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큰 해일이 올 때면 감독관의 유령이 나타나 제방 위를 백마를 타고 내달리며 위기를 경고하고 끝내 수호해 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슈토름이 사망 두 달 전 완성한 이 소설은 작가 특유의 북해의 향토색 짙은 낭만성과 공동체 삶의 경제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사실주의적 묘사가 결합된 슈토름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국내에서는 1973년 최초로 오소운에 의해 <백마의 기수>로 번역되었다(광음사).


초판 정보

"Storm, Theodor(1888): Der Schimmelreiter. In: Deutsche Rundschau. Berlin: Paetel. <단행본 초판> Storm, Theodor(1888): Der Schimmelreiter. Novelle. Berlin: Paetel."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세계동화명작전집 스토름 오소운 1973 광음사 - 확인불가 확인불가 리스에 검색되나 실물 책 확인불가
2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을유소년문고 19 시토름 김창활 1975 乙酉文化社 - 확인불가 확인불가 국중도, Riss 해당 권호는 없음
白馬의 騎士 湖畔, 白馬의 驥士 三中堂文庫 225 T. 슈토름 徐順錫; 楊應周 1976 三中堂 158-325 편역 완역
4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계몽사문고 93 시토름 이원수 1977 계몽사 - 확인불가 확인불가 국중도, Riss DB 검색 안됨
5 白馬의 騎手 白馬의 騎手 시토름 송영택 1978 금성출판사 9-205 편역 완역
6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계몽사문고 93 시토름 이원수 1979 계몽사 9-266 완역 완역
7 백마의 기수 계몽사문고 계몽사문고 93 시토름 이원수 1979 계몽사 9-266 완역 완역
8 백마의 騎手 백마의 騎手 World literature for junior, 주니어 世界文學 4 시토름 송영택 1986 금성출판사 7-220 편역 완역 개정신판
9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책 읽는 어린이 46 슈토름 이원수 1996 계몽사 9-260 완역 완역
10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테오도어 슈토름 오용록 2003 솔출판사 7-194 완역 완역 저본으로 밝힌 책과 더불어 구텐베르크를 저본으로 삼았으며 이외에도 1978년에 나온 금성출판사, 구텐베르크, www.storm-gesellschaft.de/schimmelreiter 페이지와 레클람에서 나온 Leküreschlüssel과 Erläuterung und Dokumente 시리즈를 참고했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음.
백마의 기사 백마의 기사 대산세계문학총서 043 - 소설 테오도어 슈토름 박경희 2005 문학과지성사 9-172 편역 완역
12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그랑프리 세계 대표 문학, (초등학교·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논리논술 세계 대표 문학 47 테오도어 슈토름 엮은이: 유선영 2006 삼성비엔씨 9-120 완역 완역
백마의 기사 임멘 호수, 백마의 기사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시리즈 10 테오도어 슈토름 이은희 2008 고려대학교 출판부 71-296 편역 완역
14 백마를 탄 사람 백마를 탄 사람 Boo classics, 부클래식 26 테오도어 슈토름 조영수 2011 부북스 7-174 완역 완역
15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큰글씨책 테오도어 슈토름 오용록 2014 지식을만드는지식 1-214 완역 완역 큰글씨책
16 백마의 기수 백마의 기수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테오도어 슈토름 오용록 2014 지식을만드는지식 3-214 완역 완역
17 백마의 기사 임멘 호수, 백마의 기사, 프시케 세계문학전집 164 테오도어 슈토름 배정희 2018 문학동네 59-213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테오도르 슈토름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백마의 기사>의 국내 번역은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국내 최초의 번역은 1973년 오소운에 의해 광음사 소년소녀 세계동화명작전집 1~50권 중 제24권 <백마의 기수>로 출간되었다. 70년대는 이 작품의 국내 번역의 시작인 동시에 또한 집중적으로 번역된 시기로, 70년대 말까지 1, 2년의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번역이 이루어졌다. 1975년에는 을유문화사(을유소년문고 19)에서 김창활의 <백마의 기수>가, 1976년에는 삼중당에서 서순석, 양응주 공역의 <호반/백마의 기사 외>가 나왔다. 그 뒤를 이어 1977년에 계몽사(계몽사문고 93)에서 이원수의 <백마의 기수>가, 1978년에는 금성출판사(세계문학4)에서 송영택의 <백마의 기수>가 번역되었다.

70년대의 이러한 봇물 같은 움직임은 계속되지 않았다. 송영택의 번역이 1985년에 재출판된 것을 제외하면 1980, 1990년대에는 이 작품의 새로운 번역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강상태는 200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다가, 2005년 이후부터 다시 변화가 감지된다. 200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박경희의 <백마의 기사>를 이어, 2008년 이은희의 <임멘 호수·백마의 기사>가 고려대출판부(고려대학교청소년문학시리즈 010)에서 출판되었다. 2011년에는 박경희의 2005년 번역이 재출판 되었으며, 2014년에는 오용록의 <백마의 기수>가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되었다. 또 78년의 송영택의 <백마의 기수>는 금성출판사에서 재출판 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최근의 번역은 2018년 문학동네에서 나온 배정희의 번역 <백마의 기사>를 들 수 있다.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된 이 작품의 근 반세기 동안의 국내 번역-수용에서 쉽게 눈에 띄는 것은 두 개의 제목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는 원제 Der Schimmelreiter가 대부분의 경우 ‘백마의 기수’로 번역되었는데, 1976년 한 해 동안 1쇄에 이어 2쇄까지 나온 서순석, 양응주 번역본에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기사(騎士)라는 제목이 등장했다. 2000년도 이후의 새로운 번역에서는 두 제목이 비슷한 빈도로 등장하고 있다.

<백마의 기사> 자체가 가진 가장 중요한 소설적 특징으로 액자소설 형식을 들 수 있는데, 복수의 화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복수의 화자들은 번역자가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 그저 복잡하기만 한 서술구조로 머물 수도 있고, 아니면 서술된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을 실감나게 해 주는, 그럼으로써 독서와 해석의 역동성과 개방성을 열어 놓는 문학적 장치로 작동할 수도 있다. 이 소설 속에는 합리적 계산을 통한 자연지배라는 근대세계의 핵심원리와 그와 배리되는 비합리성, 미신, 신비주의가 팽팽하게 마주 서 있다. 이 모순된 세계체험을 때로는 화자들이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도 한다. 따라서 <백마의 기사>의 번역은 단지 일어난 사건의 전달 뿐 아니라, 복수의 화자 구조를 통하여 대비되고 있는 세계이해의 여러 방식에 대해 독자가 느끼도록 해 줄 때 그 번역적 성취가 극대화된다 할 것이다.

본 번역 비평에서는 오늘날 작품의 표준제목으로 자리 잡은 ‘백마의 기사’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던 서순석 등의 공역본과 2000년대 새 두 번역본, 이렇게 3개의 번역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 세 번역을 검토함에 있어서 주로 살펴볼 문제는 복수 화자의 서술구조를 문체적으로 일관되게 재연하는지, 핵심 주제인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문제의식을 섬세하게 포착하는지 등이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서순석, 양응주 역의 <백마의 기사>(1977)

서순석 등이 ‘기수’가 아닌 ‘기사’라는 용어를 시도했던 것은 이 작품의 번역사 전체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우선 ‘기수’와 ‘기사’의 경합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부터 따져 볼 필요가 있다. 70년대 번역자들 사이에서는 ‘기수’가 월등히 우세했는데, 일단 일본어 번역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1] 1937년부터 시작된 일본어 번역의 제목은 白馬の騎手와 白馬の騎者가 경합하다가, 1970년대부터는 白馬の騎手로 굳어졌다. 그것은 Reiter를 일본어로 재현함에 있어서 ‘말타다’라는 의미의 글자 騎에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간단히 者를 붙이는 전통적 방식이 현대 일본 독자의 귀에 거슬렸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순석 등은 어떤 맥락에서 ‘기사騎士’라는 용어를 도입했을까. 독일어 Reiter의 사전적 의미는 ‘기수’, 즉 ‘(직업적으로 혹은 스포츠경기 상황 속에서) 말 타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 탄 무사 혹은 중세 유럽의 무인계급을 가리키는 ‘기사’라는 독일어는 Ritter다. Ritter가 중세고지독일어의 말을 타다 rîten에서 파생된 rîtære, rîter, riter에서 오긴 했지만, Reiter를 ‘기사’로 번역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가는 것이다. 서순석 등은 자신들의 번역본 맨 뒤에 작품해설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따로 남달리 ‘기사’라는 용어를 도입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서순석 등의 번역에서는 복합어 Schimmelreiter는 ‘백마의 기사’로 일관되게 번역되고 있으나, Reiter의 경우에는 ‘기사’(예컨대 161쪽)와 ‘기수’(예컨대 160쪽)를 자유롭게 혼용하고 있어, 두 개념의 적지 않은 의미차이를 숙지 내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번역비교 내지 번역 비평의 또 하나의 관점으로서 이 소설의 서술구조의 핵심인 화자의 복수성, 즉 각 화자가 가진 역할과 관점의 의미가 서순석 등의 번역에서는 어떻게 포착되고 있는가.

우선, 소설의 시작은 제1화자가 어릴 적 증조부 댁에서 읽었던 어느 잡지 속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기억이 작동함과 동시에 제1화자는 독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독자는 제2화자, 즉 잡지 속에 실린 이야기의 화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제2화자는 어느 해안지방을 여행하던 중 악천후 제방 위에서 말 탄 유령과 마주치는 기이한 체험을 한다. 그는 마을의 여관에서 그날 밤을 묵게 되는데, 여관 홀에서 밤을 새며 홍수에 대비하는 현지 사람들 속에 끼여, 전직 학교선생으로부터 그 유령의 전설을 소상하게 듣게 된다. 이 제3화자는 역사적 사실과 미신이 뒤섞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것은 뛰어난 합리적 계산능력, 깊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제방축조와 제방감독이라는 일에 큰 업적을 이루었으나 주변으로부터 고립된 채 죽음을 맞아야 했던 하우케 하이엔의 영웅성과 비극적 삶에 대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범람의 위험이 있을 때면 백마를 탄 하우케의 유령이 나타나 자신들을 경고하고 지켜준다고 믿는다. 마을의 믿음과 전통을 경험한 다음 날 이방인 제2화자가 말을 타고 다시 길을 나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데 제 1화자가 마이크를 제2화자에게 넘기기 전, 자신이 연 소설의 도입부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nur so viel kann ich versichern, dass ich sie seit jener Zeit, obgleich sie durch keinen äußeren Anlass in mir aufs neue belebt wurden, niemals aus dem Gedächtnis verloren habe.[2]

이 원문의 의미는 그야말로 알라이다 아스만이 말하는 문화적 기억이 가진 정체성 각인효과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릴 적 한 번 들은 그 이야기가 별달리 어떤 외부적인 계기를 통해 나에게 한 번 더 상기되었던 적이 없었는데도, 내 무의식 깊숙이 각인되어 머리에서 결코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억 메커니즘에 따르면, 한 번 접한 정보는 재차 상기됨으로써 뚜렷이 각인될 때, 장기적인 기억이 가능해진다. 여기서는 그러한 반복 각인 없이 장기 기억되었으며, 그만큼 의식 깊은 곳을 건드리는 진실성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서송석 등의 번역을 들여다보자.

다만 다음 일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어떤 외부적인 동기에 의해 새삼스럽게 생각되는 적은 없었지만, 이 이야기가 내 머리에서 떠난 일은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다.(158)

“어떤 외부적인 동기에 의해 새삼스럽게 생각되는 적은 없었지만”이라는 문장은 그 뒤의 장기적 기억을 말하는 “내 머리에서 떠난 일은 결코 없었다”와 선명하게 조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문제로서, 이 소설에서 제2화자의 특징은 유령을 목격하고, 이를 통하여 낯선 마을 사람들의 현실과 믿음의 세계 속으로 동화되어 들어간다는 것이다. 제2화자가 제방에서 처음 유령을 만나는 대목은 기이함, 당혹스러움, 의아스러움, 감각인지의 혼란이 특징적이다. 유령은 처음부터 유령이라고 명명되지 않고, es, etwas, eine dunkle Gestalt 등으로 명명된다. 번역문에서는 이를 그것, 무엇인가, 검은 자태로 부르고 있는데, 아쉽게도 Gestalt를 받는 sie를 “그 사람”으로 번역함으로써 낯선 존재의 규명불가성, 그 긴장감을 순간적으로 깨뜨리고 만다.

Jetzt aber kam auf dem Deiche etwas gegen mich heran; ich hörte nichts; aber immer deutlicher, wenn der halbe Mond ein karges Licht herabließ, glaube ich eine dunkle Gestalt zu erkennen, und bald, da sie näher kam, sah ich es, sie saß auf einem Pferde, einem hochbeinigen hageren Schimmel [...](8)


번역은 어떠한가?

그 때 제방 위에서 무엇인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반달이 흐릿한 빛을 내리비쳤을 때 어떤 검은 자태를 점점 더 뚜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자태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 나는 그 사람이 다리가 길고 말라빠진 백마를 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160)

제3화자는 제2화자의 이야기 속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고, 하우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로서의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번역을 살펴보자. 번역에서 제2화자가 간결하고 건조한 어미 ‘-했다’를 쓰는 반면, 제3화자는 (제2화자를 포함하여) 여관의 홀에 모여 앉은 청중 집단에게 구술하는 역할인 만큼 ‘---했습니다’를 쓰고 있다. 기계적으로 들릴 만큼 일관되게 사용되는 이 어미는 갑자기 그리고 극히 짧은 구간에서 ‘-했죠’(예컨대 170쪽)로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번역자가 제3화자가 가진 인물로서의, 혹은 화자로서의 역할을 의식한 결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2) 이은희 역의 <백마의 기사>(2008)

이은희의 번역문에서 Reiter는 단독으로 쓰이거나 복합어 Schimmelreiter로 쓰이거나 상관없이 일관되게 기사로 옮겨진다. 기수라는 표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유령성은 어떨까? 유령이라는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띤다. 예컨대 제2화자가 하우케의 유령과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살펴보자.

그때 둑길에서 어떤 물체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반달이 어슴푸레한 빛을 비추자 점점 또렷해졌다. 어떤 검은 형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차츰 가까워지자 말 위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긴 다리에 야윈 백마를 타고 있었다.(76)

etwas를 ‘물체’로 번역한 것은 그것이 가진 유령적 존재로서의 비물질적 특성을 온전히 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유령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말 위에 앉아 있는 형체를 받는 sie를 - 서순석이 번역본에서 “그 사람”이라고 한 것처럼 - “누군가”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적인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함으로써 원문이 추구하는 모호한 존재에 대한 긴장감, 그 유령적 성격이 감소되어 버린다.

슈토름은 유령성의 표현으로서 시각과 청각 사이의 불연속과 혼란도 언급한다. 보았는데 듣지는 못했다든가, 본 것 같은데 그것의 청각적 전제를 찾을 수 없다든가, 혹은 시각적 현상의 결과를 시각적 혹은 다른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다든가 하는 방식이다.

Und jetzt fiel mir bei, ich hatte keinen Hufschlag, kein Keuchen des Pferdes vernommen” und Ross und Reiter waren doch har an mir vorbeigefahren!(9) 바로 그때 말발굽 소리도, 말의 헐떡거리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말과 기사가 바짝 내 옆으로 지나갔는데도 말이다!(76-77)

제3화자의 이야기 속에서도 이러한 유령 체험은 발견할 수 있다. 하우케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데는 그가 타는 백마를 둘러싼 소문도 큰 몫을 했다. 악마의 말이라는 소문은 하우케의 하인과 어린 급사가 에버스 모래섬에서 겪었던 유령 말 때문에 생긴 것이다.

Das drüben schien unablässig fortzuweiden, kein Wiehern war von dort zu hören gewesen; wie weiße Wasserstreifen schien es mitunter über die Erscheinung hinzuziehen. Der Knecht sah wie gebannt hinüber.(70)

건너편의 그 물체는 끊임없이 풀을 뜯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그 위로 하얀 물안개 같은 것이 붕 떠서 지나가고 있었다. 하인은 넋이 나가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194)

‘건너편의 것 das drüben’이 ‘건너편의 그 물체’로 번역되고 있어, 여기서도 유령성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달빛 속, 물안개, 잠겨 가라앉은 모래섬 등 시각체험 자체가 환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건너편의 그것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풀을 뜯는 것처럼 보였다”라는 시각적 불확실성은 청각성을 통해 보완될 수 있겠지만, 말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인식과 함께, 인물의 시각적 체험은 스스로에게 헛것 보기, 환영으로 머물고 있다. 이은희의 번역본에서는 풀 뜯는 말의 모습의 시각성과 말울음 소리의 청각성을 동시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kein Wiehern war von dort zu hören gewesen”은 말 울음소리는 거기서 들려오지 않았었는데 라는 대과거로서, 이는 풀을 뜯는 말을 보는 듯한 현재의 불확실성, 착시효과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복수 화자의 구조와 관련하여 이은희의 번역에서 제3화자는 제2화자의 인물로서 그려질 때는 ‘-했소’, ‘-오’를 쓰고, 제3화자로서 서술기능에 집중해 있을 때는 ‘~다’라는 어미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3) 박경희 역의 <백마의 기사>(2011)

앞의 두 번역본에서 살펴본 문제들이 박경희의 번역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전체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제1화자의 마지막 문장 번역은 무의식 깊이 뿌리내리는 문화적 기억의 작동방식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 이후, 새삼 돌이켜볼 기회가 없었음에도 이 이야기가 내 기억 한구석에 늘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10)

또한 제2화자가 제방에서 하우케의 유령과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장면은 어떠한가. 제2화자는 어떤 형체의 무엇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그 존재는 etwas, eine Gestalt, es, ein dunkler Mantel, sie, ihre Schultern, zwei brennende Augen aus einem bleichen Antlitz 등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때 제방 저편에서 무엇인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반달이 희미한 빛을 내보내자 거무스름한 형체는 점점 뚜렷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다리가 긴 깡마른 배감 위에 앉아 있었다. 어깨 언저리로 짙은 외투를 펄럭이며 휙 스쳐가는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타는 듯 한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11)

번역문에서는 무엇인가, 거무스름한 형체, 그것, 짙은 외투로 옮겨지고 있는데, 다만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타는 듯 한 두 눈이”에서 ‘그의’라는 인칭대명사의 등장이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만다. 제2화자는 자신이 좀 전에 체험했던 것, 즉 무언가 보이지만, 그에 상응하여 들리지는 않는 어떤 존재와의 마주침- “meine seltsame Begegnung auf dem Deiche”(10) - 을 마을의 제방감독관에게 이야기한다.

박경희는 이 대목을 과감히 “제방에서 이상한 사내를 만났다는 이야기”(14)로 옮긴다. 제2화자가 하우케의 유령을 ‘이상한 사내’, 인간적 존재로서 당연히 인식하는 것으로 번역함으로써 현실과 환영, 역사와 미신이라는 긴장감을 감소시켰다고 볼 수 있다.

복수 화자의 구조와 관련하여서 박경희와 이은희의 번역은 동일한 방향으로 결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3화자가 다른 인물들이나 제2화자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로서 그려질 때는 ‘-했소’, ‘-오’를 쓰고, 제3화자로서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일관되게 ‘~다’로 어미를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다음의 대목처럼 제3화자와 다른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 제3화자를 통한 하우케에 대한 서술로 바로 연결될 때 잘 볼 수 있다. 원문에서는 대화 표시 > <의 부분에 연이어 -- 표시를 한 뒤 하우케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번역문에서는 “ ”가 끝난 뒤, 제3화자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아무런 편집적 신호 없이 이야기가 시작된다.

“[...] 선생도 프리슬란트 사람들이 수화에 능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보셨을 게요. 그리고 농부였지만 나침반과 크로노미터, 망원경에 파이프 오르간까지 만들 줄 알았던 파레토프트의 한스 몸젠 얘기도 물론 아실 테지요.”(16)

몸첸만큼은 아니었겠지만 후에 제방 감독관이 된 그 사람의 부친도 그런 재능이 얼마간 있는 사람이었다...(17)

마지막으로 ‘기사’의 표현을 보자면, 박경희의 번역에서도 이은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Reiter는 단독으로든 복합어 Schimmelreiter에서든, 일관되게 ‘기사’로 옮겨진다. ‘기수’라는 표현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어, ‘기사’와 ‘기수’, Reiter와 Ritter의 기본적인 의미구분이 서순석의 번역과 함께 이 작품의 번역자들 사이에서 아예 망실된 것이 아닌지 매우 유감스럽다.

박경희의 <백마의 기사>에는 동명의 소설 외에도 슈토름이 1874년 청소년 문학으로 기고했던 노벨레 <꼭두각시 폴레>(Pole Poppenspäler)의 번역도 같이 실려 있다. 박경희의 번역본에서는 앞의 다른 역자들에 비하여 좀 더 충실한 안내자이고자 하는 점이 돋보인다. 다른 역자들처럼 해설과 작가 연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박경희는 본문 앞에 해안과 제방, 간척지 등 이 작품의 자연배경의 조감도도 실어 독자들의 공간적 상상력에 한층 날개를 달아주었다. 또한 본문 내 역자각주를 통하여 지금까지의 슈토름 연구서와 관련 논문의 성과를 국내 독자에게도 소개해 주고, 번역의 저본(Der Schimmelreiter Reclam Nr. 6015)도 밝혀 놓음으로써 학술적으로 객관화된 번역이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3. 평가와 전망

1970년대 후반부터 80, 90년대에 걸쳐 국내 학계, 문화계에 서구 리얼리즘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독일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슈토름과 그의 인생작 <백마의 기사>가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왜 70년대에 보인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이후 사반세기 동안 적어도 번역상으로는 아무 진전이 없었던 것일까. 그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독일의 시민적 리얼리즘 문학이 사회변화에 대한 당시 국내 학계와 출판계의 갈망을 채워줄 수 없는 시민적 보수적 문학이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이 시기 동안 독일문학의 사회비판적 역할에 대한 국내 문화계의 관심은 헤겔, 루카치, 벤야민 등 독일의 철학자, 문예이론가와 비평가의 번역소개로 향했다. 이러한 경향에 평행 내지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1980,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까지 국내 독문학계에서는 낭만주의에 대한 관심과 학문적 성과가 집중되었다.
<백마의 기사>는 근대와 전통의 모순, 그리고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역동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다. 2000년대 들어서 문화 수용과 창출에 대한 이해가 한껏 다층화, 미세화 되는 분위기 속에서 본 번역 비평은 제목 선정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미신과 신비주의, 문화적 정체성의 커뮤니케이션 형태에 대한 번역자의 인식을 중심으로 <백마의 기사>의 국내 번역수용을 되돌아보았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서순석, 양응주(1977): 백마의 기사. 을유문화사.
이은희(2008): 백마의 기사. 고려대출판부.
박경희(2011): 백마의 기사. 문학과지성사.

배정희
  • 각주
  1. <백마의 기사>에 대한 일본어 번역은 현재까지 인터넷상으로 6개 번역본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1茅野蕭々訳<白馬の騎手>1937年(<白馬の騎手 他一篇>岩波文庫 ** ) 2関泰祐訳<白馬の騎者>1950/1959年(<シュトルム選集第8巻>清和書院 **)3羽鳥重雄訳<白馬の騎者>1964年(<みずうみ・白馬の騎者>白水社 ** )4塩谷太郎訳<白馬の騎手>1975年(集英社)5高橋文子訳<白馬の騎手>2007年(論創社 ** )6宮内芳明訳<白馬の騎手>2009年(<シュトルム名作 集II>三元社 ** )(https://hiyokonolulu.hatenablog.jp/entry/2019/03/23/191901)
  2. Theodor Storm(2008): Der Schimmelreiter/Immensee. Erzählungen.Frankfurt a. M.: Fischer Taschenbuch Verlag, 7. 이하에서는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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