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Der blinde Geronimo und sein Bruder)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의 노벨레
작가 |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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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900/01 |
장르 | 노벨레 |
작품소개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중편으로 1900년 12월부터 4차례에 걸쳐 빈에서 간행되는 잡지 <디 차이트>에 연재되었다. 슈니츨러는 이 노벨레에서 형제애와 그와 관련된 신뢰와 불신 등의 주제를 다룬다. 카를로는 자신의 실수로 장님이 된 다섯 살 아래 동생 제로니모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여행자 숙소에서 구걸하며 살아간다. 제로니모가 노래하면 카를로는 모자를 들고 구경꾼들에게서 돈을 걷는 것이다. 어느 날, 낯선 여행자가 모자에 1프랑 동전을 넣고는 제로니모에게 20프랑짜리 금화를 넣었다고 거짓말을 하자, 오랫동안 품고 있던 제로니모의 의심이 표면화된다. 제로니모가 원래 1프랑이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자 카를로는 동생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자기에게는 동생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위해 잠든 여행자의 지갑에서 20프랑 금화를 훔친다. 형이 도둑질한 죄명으로 체포되자 제로니모는 자신이 오랫동안 부당하게 형을 의심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제는 서로 화해한다. 1969년 초역되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종합월간잡지 <어깨동무>에 수록되었다. 책의 형태로는 장남준에 의해 1977년 범조사에서 나온 세계단편문학전집 30에 실렸다(범조사).
초판 정보
Schnitzler, Arthur(1900/1901): Der blinde Geronimo und sein Bruder. In: Die Zeit, 325(22. Dec. 1900) - 328(12. Jan. 1901). <단행본 초판> Schnitzler, Arthur(1905): Der blinde Geronimo und sein Bruder. In: Die griechische Tänzerin und andere Novellen. Wien: Wiener Verlag.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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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제로니모와 그의 兄 | 제로니모와 그의 兄 | [新女性] | 슈니첼 | 확인불가 | 1931 | 開闢社 | - | 확인불가 | 확인불가 | |
2 | 눈먼 同生 | 눈먼 同生 | 슈닛츠라 | 柳致眞 | 1938 | 확인불가 | - | 확인불가 | 확인불가 | ||
3 | 눈먼 同生 | 눈먼 同生 | 슈닛츠라 | 柳致眞 | 1939 | 확인불가 | - | 확인불가 | 확인불가 | ||
4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獨逸明作對譯叢書 2 | 아르투어 슈니츨러 | 金晸鎭 | 1959 | 江湖社 | 6-107 | 편역 | 완역 | 한독대역본 |
5 | 盲人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 | 未練 | 博英文庫 2-3 | A. 슈니쭐러 | 朴鍾緖 | 1959 | 博英社 | 137-174 | 편역 | 완역 | |
6 | 눈 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金髮의 엣크벨트 | 노오벨클럽 9 | 슈닛쓸러 | 李榮九 | 1959 | 大東堂 | 153-188 | 편역 | 완역 | |
7 | 눈 먼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 | 近代獨逸短篇集 | 世界文學全集 20 | 아르투어 슈니쓸러 | 丘冀星 | 1960 | 乙酉文化社 | 326-347 | 편역 | 완역 | |
8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A. 시니쯜러 | 金晸鎭 | 1962 | 壯文社 | - | 확인불가 | 확인불가 | ||
9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카스펠르와 어여쁜 안넬르 外 6篇 | 슈닛쓸러 | 확인불가 | 1967 | 文正出版社 | - | 편역 | 확인불가 | ||
10 | 눈 먼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 | 近代獨逸短篇集 | 世界文學全集 20 | 아르투어 슈니쓸러 | 丘冀星 | 1974 | 乙酉文化社 | 326-347 | 편역 | 완역 | |
11 | 제로니이모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外 | 正音文庫 6 | A. 슈니츨러 | 鄭庚錫 | 1974 | 正音社 | 41-88 | 편역 | 완역 | |
12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슈니쯜러 短篇集, 릴케 短篇集 | 世界短篇文學全集 30 | 슈니쯜러 | 張南駿 | 1976 | 汎朝社 | 11-57 | 편역 | 완역 | |
13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兄)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SHORT BOOK 18 | 슈니쯜러 | 朴煥德 | 1977 | 汎朝社 | 11-57 | 편역 | 완역 | |
14 | 맹인 제로닌모와 그의 형 | 바람둥이 고향에 돌아오다 | 아르트루 슈니츨러 | 洪京鎬 | 1978 | 태창出版部 | 159-199 | 편역 | 완역 | ||
15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世界短篇文學選集 2 | 아투르 슈니츨러 | 羅忠荷 | 1980 | 啓民出版社 | - | 편역 | 확인불가 | ||
16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자이언트문고 90 | 아더 시니츨러 | 洪京鎬 | 1982 | 文公社 | 7-47 | 편역 | 완역 | |
17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兄 | 獨語學習文庫 4 | A. 스니츨럴 | 許昌雲 | 1982 | 多樂園 | - | 확인불가 | 확인불가 | 독한대역 |
18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 | 독일 短篇選과 독문학 散考 | 쉬닛쯜러 | 郭福祿 外 | 1982 | 한밭출판사 | 131-163 | 편역 | 완역 | ||
19 | 눈 먼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 | 카프카 篇, 슈니츨러 篇 | World great short stories, (三省堂版)世界短篇文學全集 15 | 아르투어 슈니츨러 | 洪京鎬 | 1984 | 三省堂 | 222-265 | 편역 | 완역 | |
20 |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 | 크눌프 : 그 생애의 세 가지 이야기 | 쉬니쯜러 | 조경원 | 1987 | 대우출판공사 | 227-259 | 편역 | 완역 | ||
21 |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 어느 사랑의 실험 | 창비세계문학(독일)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임홍배 | 2010 | 창비 | 143-176 | 편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이 소설은 1931년 4월 開闢社에서 발간한 여성잡지 <新女性>(제5권 제4호)에 요약본으로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제로니모와 그의 兄>이란 제목 다음에는 원작자와 역자가 표기되어 있다(슈니첼 原作, 蛾眉 譯述). 아미라는 필명의 역자는 이 작품을 완역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생략하고 요약하면서 이 작품의 핵심적인 내용을 매끄러운 문체로 7쪽 분량에 전하고 있다. 극단 조선연극사의 대표이자 대본작가 및 연출가로 활동했던 천한수는 1929년 이 작품을 단막극으로 각색하였다. 1959년에는 이 작품의 완역본이 4편이나 출간되었다. 이영구의 번역이 <독일단편선. 금발의 엣크벨트 외 6편>에 실렸고(대동당), 박종서의 번역이 슈니츨러 단편집 <미련>에 실렸으며(박영사), 장남준의 번역은 <슈니쓸러 단편집>에 실렸고(여원사; 1976년 범조사 <세계단편문학전집 30>으로 재출간), 김정진은 <눈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를 독한 대역본으로 출간하였다(강호사. 1962년 장문사에서 재출간). 1960년에는 구기성의 번역이 <근대독일단편집>에 실렸고(을유문화사. 1974년 을유문화사에서 재출간), 1974년에는 정경석의 번역이 슈니츨러 단편집 <죽은 자는 말이 없다...>에 실렸다(정음사). 1976년에는 홍경호의 번역이 <세계단편문학전집 15>에 실렸다(금자당. 1978년 미도문화사, 1979년 동서문화사, 1981년 삼덕출판사, 1982년 문공사, 1984년 삼성당에서 재출간). 그 이후 이 작품은 한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010년에 임홍배의 독일 단편선 <어느 사랑의 실험>에 포함되었으며(창비), 2021년에는 이관우의 슈니츨러 단편선 <어떤 이별.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작가와비평)에 포함되었다.
이 작품은 번역이 10여 회 이상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서 연대순으로 6편의 번역을 비평 대상으로 삼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4편의 초역 중 임의로 박종서의 번역, 그 이듬해 출간된 구기성의 번역, 70년대 번역된 정경석의 번역과 홍경호의 번역, 2010년 임홍배의 번역, 그리고 최근 2021년 이관우의 번역 등이 검토 대상이다.
2. 개별 번역 비평
1) 박종서 역의 <맹인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1959)
박종서의 번역은 1959년 출간된 4종의 국내 초역 중의 하나이다. 사소한 오류가 가끔 눈에 띄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원문을 비교적 충실히 그리고 정확하게 옮기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때로는 정확한 번역에 대한 열정이 강박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이라는 시기를 놓고 보면 상당히 훌륭한 번역이라 생각된다.
박종서의 번역은 원문 문장과 번역 문장이 대개 일대일 대응하고 있다. 다음 인용문은 이 작품의 첫 단락이다. 상황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소는 알프스 고산지대의 어느 식당이고 때는 비도 자주 내리고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가을 무렵이다. 식당의 긴 의자에 장님 제로니모가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포도주 잔 곁에는 기타가 있다. 손님을 태운 마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대기하고 있던 장님 제로니모가 식탁에 준비해둔 기타를 집어 들고 더듬더듬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간다. 그 뒤를 형이 따라간다. 식당을 드나드는 손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돈을 벌기 위해서다. 비가 온 탓에 길은 질척이고 가을이 되어 고산지대의 습기 머금은 바람은 매우 차다. 그래서 찬바람을 피하려고 계단을 내려온 다음 벽을 등을 바짝 붙이고 서 있다.
맹인 제로니이모는 걸상에서 일어나서 식탁 위에 있는 술잔 옆에 놓여 있던 기이타를 손에 들었다. 그는 멀리서 덜컹거리며 처음으로 굴러오는 마차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열려져 있는 문까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을 더듬어 가더니 포장이 덮인 아래뜰로 쭉 내리뻗친 좁다란 나무 계단을 나려갔다. 그의 형은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축축하고 더러운 땅을 스치며 열린 문으로 불어오는 비에 젖은 차거운 바람을 막으려고 벽을 등지고 바로 계단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박종서, 138. 강조 필자)
장님 제로니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 포도주 잔 옆에 놓여 있던 기타를 집어들었다. 첫 마차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제 그는 익히 아는 통로를 따라 열려 있는 출입문 쪽으로 가서, 식탁들이 늘어서 있는 앞마당으로 통하는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형이 뛰따라왔고, 두 형제는 습하고 차가운 바람을 피할 요량으로 등을 벽 쪽으로 대고 계단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은 열려 있는 대문을 통해 축축하고 지저분한 땅바닥을 훑으며 들이쳤다. (임홍배, 143. 강조 필자)
Der blinde Geronimo stand von der Bank auf und nahm die Gitarre zur Hand, die auf dem Tisch neben dem Weinglase bereit gelegen war. Er hatte das ferne Rollen der ersten Wagen vernommen. Nun tastete er sich den wohlbekannten Weg bis zur offenen Türe hin, und dann ging er die schmalen Holzstufen hinab, die frei in den gedeckten Hofraum hinunterliefen. Sein Bruder folgte ihm, und beide stellten sich gleich neben der Treppe auf, den Rücken zur Wand gekehrt, um gegen den naßkalten Wind geschützt zu sein, der über den feuchtschmutzigen Boden durch die offenen Tore strich. (강조 필자)
번역된 문장을 통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소한 오역을 언급하자면 ‘stellten sich(섰다)’를 ‘앉았다’로 옮긴 점이다. 검토한 6종의 번역 가운데 정경석의 번역도 ‘앉았다’로 옮기고 있다(정경석 42). 그리고 ‘feuchtschmutzig’가 비 온 땅에 사람과 마차가 지나다니니 길바닥이 지저분해진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라고 본다면, “축축하고 더러운”보다는 “축축하고 지저분한”이 어감상 더 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59년 당시 한국어에서 두 단어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국어사전에는 ‘더럽다’와 ‘지저분하다’가 아직 유사어로 표기되어 있지만, 오늘날 일반적인 어감으로 ‘더럽다’에는 위생적으로 불결하다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
임홍배의 번역 문장은 유려하다. 하지만 사소한 오역도 있다. 제로니모는 장님이다. 따라서 길을 갈 때는 더듬을 수밖에 없다. sich tasten은 ‘더듬으면서 나아가다’라는 뜻임에도 ‘더듬으며’가 생략되어 장님의 행동거지를 나타내는 속성 하나가 생략되고 말았다. 그리고 여관의 나무 계단은 ‘좁다’(die schmalen Holzstufen). 계단이 좁은 것로 미루어보아 여관 건물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고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작은 형용사이지만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그리고 in den gedeckten Hofraum이 “식탁들이 늘어서 있는 앞마당으로”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서 ‘덮힌gedeckt’은 식탁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박종서의 번역처럼 ‘천막 등으로 마당의 일부에 덮개를 씌우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여관의 구조는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또는 뜰이 있고, 거기서 계단을 올라가면 식당이 있고, 거기서 올라가면 숙소가 있는 구조이다. 첫 문장에서 장님 제로니모가 앉아있던 곳이 식당이다. 그는 형과 함께 추운 날씨이니 따뜻한 식당에서 포도주로 몸을 녹이며 앉아서 대기하다가, 여행객이 오는 소리가 들리자 계단을 내려가 손님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적선을 받으려는 것이다.
독일어와 한국어는 문장을 구성하는 원리가 다르다. 이론적으로 독일어는 관계대명사나 종속접속사 등을 이용하여 문장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그렇지 못하다. 다음에서 보다시피 번역자는 작가의 문학적 독창성과 문체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번역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듯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문체는 비슷하게 옮겼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이관우의 번역은 하나의 문장으로 구성된 원문을 3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긴 하지만 내용이 매끄럽게 전달되진 못하고 있다. 반면, 임홍배의 번역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에서 깨는 동생의 모습을 가슴이 저려 차마 볼 수 없어 정원으로 뛰쳐나가는 형의 심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가 이른 아침에 자기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을 유심히 바라볼 때 가끔 그는 동생이 잠을 깨게 되는 것을 보게될 그러한 불안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동생의 어두운 두 눈이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된 햇빛을 매일같이 다시금 찾는 것같이 보일 때 그저 그 이상 그와 같이 있을 수가 없어서 그는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박종서, 141)
그리고 때때로 이른 아침에 옆에서 잠자고 있는 동생을 지켜볼 때면 동생이 잠에서 깨는 것을 볼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래서 동생 옆에 있지 않으려고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그에게는 동생의 죽어버린 눈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빛을 다시금 새로이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이관우, 186)
그리고 이따금 아침 일찍 잠이 깨 옆에 누워 자고 있는 동생을 바라볼 때면 동생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기가 너무 괴로워서 뜰로 뛰쳐나갔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죽은 눈으로 영영 꺼져버린 빛을 찾는 듯한 동생의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임홍배, 147)
Und manchmal, wenn er am frühen Morgen den Bruder betrachtete, der neben ihm ruhte, ward er von einer solchen Angst erfaßt, ihn erwachen zu sehen, daß er in den Garten hinauslief, nur um nicht dabei sein zu müssen, wie die toten Augen jeden Tag von neuem das Licht zu suchen schienen, das ihnen für immer erloschen war.
2) 구기성 역의 <눈 먼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1960)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20번째 도서로 <근대독일단편집>을 번역한 구기성은 이 번역서에서 슈니츨러를 포함한 9명의 독일 작가의 단편소설 13편을 싣고 있다. 구기성의 번역은 박종서의 번역 못지않게 원문을 충실하게 한국어로 옮기려고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부분적인 오류도 또한 눈에 띈다.
어떤 여행객이 형에게 1프랑짜리 동전 하나를 주었으면서 20프랑짜리 금화를 주었으니 형에게 속지 말라고 제로니모에게 거짓말을 했다. 금화를 만져보겠다는 동생에게 형이 금화를 받은 일이 없다고 하자 동생은 형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심통이 나 있다. 새로운 여행객이 도착하자 동생은 노래를 부르고 형은 적선을 받는다. 형은 동생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이고자 여행객이 적선한 돈의 액수를 혼잣말하듯이 동생에게 알려주지만, 동생은 굳은 표정으로 여전히 심술을 부리는 장면이다.
막 도착한 마차에는 두 사람의 영국인이 앉아 있었다. 까를로는 그의 앞에서 모자에 손을 대며 인사를 하고 장님은 노래를 불렀다. 한 영국 사람이 내려와서 까를로의 모자에 몇 장의 화폐를 던져 넣어주었다. 까를로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나서 혼잣말처럼 “二十센티시모로군.”하고 말했다. 제로니이모의 얼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새 노래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영국인을 태운 마차는 떠나갔다. (구기성, 332. 강조 필자)
In dem eben angekommenen Wagen saßen zwei Engländer; Carlo lüftete den Hut vor ihnen, und der Blinde sang. Der eine Engländer war ausgestiegen und warf einige Münzen in Carlos Hut. Carlo sagte: »Danke« und dann, wie vor sich hin: »Zwanzig Zentisimi.« Das Gesicht Geronimos blieb unbewegt; er begann ein neues Lied. Der Wagen mit den zwei Engländern fuhr davon.
lüften은 바람이 통하게 하다 또는 무언가를 원래 위치에서 위쪽으로 약간 들어 올리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den Hut lüften은 모자를 잡아 살짝 들어 올려 인사하다 라는 뜻이다. 검토 대상으로 삼은 번역본들 가운데 구기성의 번역만 유일하게 “모자에 손을 대며 인사를 하고”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고, 다른 번역들은 (적선 받기 위해) 모자를 “내밀고”(박종서, 147; 정경석, 54), “들고 섰고”(임홍배, 152), “내밀었고”(이관우, 192)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형은 손님에게 다가가서 우선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인사를 한 다음 손님의 자비를 바라며 거기에 돈을 넣어 달라고 모자를 앞으로 내밀었을 것이다. 문맥에 따라 적선을 받기 위해 ‘모자를 내밀다’로 번역해도 크게 거슬리는 것은 아니지만, 구기성의 번역은 원문을 정확하게 옮기려고 노력했다는 방증이 된다.
하지만 그의 번역에는 어색한 점도 자주 눈에 띈다. einige Münzen는 몇 개의 동전이란 의미인데 구기성의 번역에는 “몇 장의 화폐”라고 표기하고 있다. “장”은 종이처럼 얇고 넓적한 것을 세는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지폐는 동전보다 액수가 큰 화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폐의 의미로 사용된 ‘화폐’는 형제간 갈등의 발단이 금화의 의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다. 다른 곳에서도 Geldstück geben을 ‘금화를 주다’(구기성, 327)로 오역하고 있다. 이처럼 동전을 금화로 옮긴다면 형제 사이에 갈등의 계기가 된 사건의 무의미해진다.
형은 유년 시절 자신의 실수로 동생 제로니모의 눈을 멀게 했다. 죄책감과 연민으로 그는 거리의 악사가 된 동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한다. 그는 항상 동생이 세상을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고 죄스러워한다. 다음은 형의 이런 심정을 표현한 구절이다. 구기성의 번역은 박종서의 번역과 유사하게 원문의 자구를 정확하게 옮기려는 의도에 집착한 나머지 내용의 전달이 소홀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와는 달리 내용의 전달을 중시하는 임홍배의 번역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서 독자들이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곧 걱정스러운 듯 다시 시선을 옮겨 동생과 같이 허공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흡사, 그의 두 눈이, 저들에게만 주어지고 그것의 한 줄기도 눈먼 동생에게는 나누어 줄 수 없는 빛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구기성, 326. 강조 필자)
하지만 그러다가도 금방 거의 울상을 지으며 시선을 돌려 동생처럼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장님인 동생한테는 비치지 않는 빛이 자기 눈에는 비친다는 걸 미안해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홍배 144. 강조 필자)
Aber gleich, beinahe ängstlich, wandte er den Blick wieder fort und starrte gleich dem Bruder ins Leere. Es war, als schämten sich seine Augen des Lichts, das ihnen gewährt war, und von dem sie dem blinden Bruder keinen Strahl schenken konnten.
3) 정경석 역의 <제로니이모>(1974)
정경석의 번역은 1974년 정음사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外>라는 제목의 슈니츨러 단편 3편을 모은 단편집에 포함되어 <정음문고>시리즈 제6권으로 출간되었다. 정경석의 번역은 앞서 언급한 두 번역에 비해 장점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의 번역은 박종서의 번역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단편집에 포함된 작품도 동일하다. 다만 게재 순서만 다를 뿐이다.
아래 인용한 대목에서 정경석의 번역은 15년 전에 출간된 박종서의 번역과 거의 유사하다. 다른 점이라고는 정서법에 맞게 수정하거나(가지려 ➔ 가지러), 접속사를 생략하거나(그러자 ➔ 생략), 유사 표현으로 바꾸어 표기한 것 등이다(들렸다 ➔ 들려 왔다). 어색한 부분이 개선되지 않았으며 박종서의 번역과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정경석은 ein junger Mann und eine junge Frau를 “어떤 청년과 젊은 부인”으로, 바로 다음에서는 “젊은 부부”로 옮기고 있다. 어감상 청년은 부인에 비해 더 어리다는 느낌을 준다. 당시에 부부라면 남성이 여성보다 연상인 경우가 일반적인 사실임을 감안한다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에 반해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젊은 남녀”로 옮긴 임홍배의 번역은 자연스럽다. 이 대목은 장님 제로니모가 노래를 부르면서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귀 기울이면서 나름대로 추측하는 장면이다. 정경석의 번역은 마지막 문장을 “(...)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라고 직설법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장님인 제로니모가 젊은 남녀가 속삭이는 소리를 잠시 듣고, 그것도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그 사람을 언제 만났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지막 문장은 직설법이 아니라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체험화법Erlebte Rede이다. 그는 젊은 남녀를 오다가다 만난 적이 있겠거니, 그래서 아는 사람이겠거니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임홍배의 번역처럼 “(...) 오래전부터 익히 알던 사람들로 생각되었다.”라고 생각 또는 추측의 의미로 옮겨야 앞 문장과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술 좀 줘” 하고 제로니이모는 말했다. 그러자 카를로는 전과 같이 순순히 술을 가지러 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동안 제로니이모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듣지도 않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였다. 그때 매우 가까이에서 어떤 청년과 젊은 부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 그래서 그는 이 젊은 부부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정경석, 43 이하. 강조 필자)
“술 좀 줘” 하고 제로니이모는 말했다. 그러자 카를로는 전과 같이 순순히 술을 가지려 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동안 제로니이모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듣지도 않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때 매우 가까이에서 어떤 청년과 젊은 부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서 그는 이 젊은 부부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박종서, 139. 강조 필자)
“포도주 한 잔만 갖다줘.” 제로니모가 그렇게 말하면 형은 언제나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 형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제로니모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는데, 그렇게 해야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은 아주 가까운 데서 두 사람이 귀엣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 그래서 이 젊은 남녀 역시 오래전부터 익히 알던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임홍배, 144 이하. 강조 필자)
»Bring mir Wein,« sagte Geronimo, und Carlo ging, gehorsam wie immer. Während er die Stufen aufwärts schritt, begann Geronimo wieder zu singen. Er hörte längst nicht mehr auf seine eigene Stimme, und so konnte er auf das merken, was in seiner Nähe vorging. Jetzt vernahm er ganz nahe zwei flüsternde Stimmen, die eines jungen Mannes und einer jungen Frau. (...) Und so kannte er auch dieses junge Paar seit langer Zeit.
4) 홍경호 역의 <눈 먼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1976)
1976년 금자당에서 <세계단편문학전집 15>가 출간되었는데, 여기에는 카프카의 단편 5편과 <제로니모>를 포한한 슈니츨러의 단편 4편이 홍경호의 번역으로 실렸다. 금자당의 <세계단편문학접집>은 1978년 미도문화사, 1979년 동서문화사, 1981년 삼덕출판사, 1982년 문공사, 1984년 삼성당에서 표지만 바뀐 채 쪽수 그대로 재출간되었다. 추측건대 다른 출판사에서 이전 출판사의 기획시리즈 전체를 인수하기로 합의한 듯하다. 어쨌든 이렇듯 여러 번 재출간되었으니 홍경호 번역이 이 작품을 국내 널리 알리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홍경호의 번역은 우선 형식 측면에서 여타의 번역과 대비된다. 다음의 인용은 이 작품의 첫 단락이다. 원문에는 하나의 단락으로 구성된 부분을 홍경호의 번역은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하고 있다. 번역 작품 전체에 걸쳐 이러한 자유로운 단락 구성이 관찰되고 있으나 그 까닭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앞을 못보는 제로니이모는 벤치에서 일어나 식탁 위의 술 잔 옆에 준비된 기타를 손에 들었다. // 그는 첫 마차가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익숙해진 문까지의 길을 더듬어 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지붕이 있는 가운데 뜰로 통하는 가는 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 그의 형이 뒤를 따랐다. // 둘은 바로 계단 옆에서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을 피해 등을 벽에 대고 섰다. 바람은 대문을 통해 질퍽질퍽하고 더러운 땅을 스쳐 불어 왔다. (홍경호, 222. // = 단락 구분 표시) Der blinde Geronimo stand von der Bank auf und nahm die Gitarre zur Hand, die auf dem Tisch neben dem Weinglase bereit gelegen war. Er hatte das ferne Rollen der ersten Wagen vernommen. Nun tastete er sieh den wohlbekannten Weg bis zur offenen Türe hin, und dann ging er die schmalen Holzstufen hinab, die frei in den gedeckten Hofraum hinunterliefen. Sein Bruder folgte ihm, und beide stellten sich gleich neben der Treppe auf, den Rücken zur Wand gekehrt, um gegen den naßkalten Wind geschützt zu sein, der über den feuchtschmutzigen Boden durch die offenen Tore strich.
홍경호 번역은 작품 전체에 걸쳐 구기성의 번역과 매우 흡사하다. 예를 들자면 다음의 인용에서 홍경호의 번역을 구기성의 번역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단락 나누기를 임의대로 한 점, 세로쓰기에서 오늘날의 작은따옴표 대신 사용되었던 낫표를 삽입한 점이 다르다. 그리고 내용의 측면에서는 “관찰하였다”가 “관찰했다”로 바뀐 점, 그리고 밑줄 친 마지막 문장이 생략된 점을 제외하고는 동일하다.
제로니이모는 노래를 불렀다. 까를로는 낭패한채 그 옆에 서 있었다. // ‘어떻게 해야 할까? 동생은 나를 신용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 그리고 그는 깨어진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는 제로니이모를 걱정스럽게 옆에서 관찰했다. // 마차는 벌써 떠났다. (홍경호, 236. 강조 필자. // = 단락 구분 표시. 낫표를 작은따옴표로 표기)
제로니이모는 노래를 불렀다. 까를로는 낭패한채 그 옆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동생은 나를 신용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는 깨어진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는 제로니이모를 걱정스럽게 옆에서 관찰하였다. 이 전엔 한번도 그곳에서 볼 수 없었던 사색이 동생의 이마 위를 스쳐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같았다.
마차는 벌써 떠났다. (구기성, 332. 강조 필자)
Geronimo sang; Carlo stand neben ihm, fassungslos. Was sollte er nur tun? Der Bruder glaubte ihm nicht! Wie war das nur möglich? – Und er betrachtete Geronimo, der mit zerbrochener Stimme seine Lieder sang, angstvoll von der Seite. Es war ihm, als sähe er über diese Stirne Gedanken fliehen, die er früher dort niemals gewahrt hatte.
Die Wagen waren schon fort, aber Geronimo sang weiter.
Die Wagen waren schon fort, aber Geronimo sang weiter.
다른 예를 들어보자. 아래 인용문의 경우 “개구아연하여”라는 한자어를 더 평이한 단어인 “아연하여”로, “헤쭉헤쭉”이 “헤죽헤죽”으로 변경되긴 했지만 동일한 번역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모두 까를로를 보았다. 그는 개구아연(開口啞然)하여 난로에 기대고 이제는 정말로 자기 동생의 거짓말을 책망할 수 없다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헤쭉헤쭉 웃었다. (구기성, 335. 강조 필자)
모두 까를로를 보았다. 그는 아연 하여 난로에 기대고 이제는 정말로 자기 동생의 거짓말을 책망할 수 없다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헤죽헤죽 웃었다. (홍경호, 243. 강조 필자)
Alle schauten auf Carlo, der mit offenem Munde am Ofen lehnte und nun wirklich das Gesicht zu einem Grinsen verzog, als dürfte er seinen Bruder nicht Lügen strafen.
구기성의 번역에서 마부가 “운전수”(구기성, 335)로 잘못 번역된 경우가 있는데, 홍경호의 번역도 마찬가지로 “운전수”(홍경호, 242)로 표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홍경호의 번역은 세부적으로 미미한 변화가 있긴 하지만 15년 전에 출간된 구기성의 번역과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5) 임홍배 역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2010)
2010년 임홍배의 번역으로 독일 단편을 선별한 모음집 <어느 사랑의 실험>이 출간되었다. 앞서 이미 거론되었듯이 그의 번역은 다른 번역에 비해 원문의 내용을 매우 정확하게 옮기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임홍배 번역의 또 다른 장점은 한국어 표현이 자연스러워 가독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특히 대화 부분을 다른 번역과 비교해 보면 임홍배 번역의 장점이 두드러진다. 박종서와 구기성의 번역이 번역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구어체였을 수 있으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문어체 느낌을 상당히 풍긴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좋은 번역이라도 일정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재번역될 여지가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제로니모는 말이 없었다. 그의 죽은 눈은 창밖으로 희뿌연 안개를 내다보는 것 같았다. 까를로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래, 그 사람이 미치지는 않았다 해도, 뭔가 착각했는지도 모르잖아…… 그래, 그 사람이 착각한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임홍배, 154)
제로니이모는 아무 달도 없고 그의 어두운 두 시선은 창문을 지나서 회색 안개 속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카를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정신이 나가기까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착각을 했어……… 정말 그는 착각이었어………”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말을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박종서, 149)
제로니이모는 말이 없었다. 그의 죽은 눈은 창을 통해 잿빛 안갯 속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까를로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자, 물론 그가 미쳤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는 잘못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그는 잘못 생각한 거야.”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바를 자기 자신 믿고 있지 않음을 잘 느끼고 있었다. (구기성, 333)
Geronimo schwieg, seine toten Augen schienen durch das Fenster in den grauen Nebel hinauszublicken. Carlo redete weiter: »Nun, er braucht ja nicht wahnsinnig gewesen zu sein, er wird sich geirrt haben ... ja, er hat sich geirrt ...« Aber er fühlte wohl, daß er selbst nicht glaubte, was er sagte.
임홍배의 번역은 대화체뿐 아니라 서술문에서도 한국어의 리듬감을 잘 살려 번역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이고 내용의 이해를 용이하게 한다. 다른 번역들과 비교해 보면 임홍배 번역의 이런 장점이 쉽게 부각된다.
피로가 몰려왔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어제, 그저께, 그리고 동생과 함께 지내온 모든 날들이 하나씩 떠올랐고, 특히 따사로운 여름날 동생과 함께 걸었던 하얀 시골길이 자꾸만 생각났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들이 까닭 없이 너무나 아득히 멀어져서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임홍배 158 이하)
그는 무척 피곤했다. 마치 엄청난 꿈에 사로잡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온갖 것을 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와 그제께와 과거의 모든 날들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스한 여름날들과 동생과 함께 거닐곤 했던 하얀 국도를. 그런데 모든 것은 다시는 그때와 같을 수 없다는 듯 아주 아득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관우, 200)
Er war sehr müde. Es schien ihm, als wäre er in einem schweren Traum befangen. Er mußte an allerlei denken, an gestern, vorgestern und alle Tage, die früher waren, und besonders an warme Sommertage und an weiße Landstraßen, über die er mit seinem Bruder zu wandern pflegte, und alles war so weit und unbegreiflich, als wenn es nie wieder so sein könnte.
다음은 동생 제로니모로부터 구걸한 돈을 꿍쳤다는 오해를 받은 형 카를로가 쓰러져 잠든 동생을 바라보며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히는 상황을 서술한 대목이다. 여기에 두 번째 문장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카를로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체험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관우의 번역은 체험화법을 단정적인 직설법으로 옮기고 있으나, 임홍배의 번역은 체험화법의 뉘앙스를 살려 서술되는 내용이 현실이 아니라 상상임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체험화법의 어감을 살리지 않는다면 첫 문장과 둘째 문장의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까를로는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동생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불현 듯 동생이 혼자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햇볕이 내리쬐는 길가 바위에 혼자 앉아서 허연 눈을 치뜨고 하늘을 바라보겠지만, 아무리 햇살이 쨍쨍해도 눈이 부시지 않고, 언제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깜깜한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어야만 할 것이다. (임홍배 162)
그러나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여전히 동생에게 머물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동생이 햇살이 빛나는 어떤 도로변에서 돌덩이 위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동생은 눈부셔하지도 않으면서 하얀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고, 양손은 계속하여 그를 에워싸고 있는 깜깜한 밤 속으로 뻗치려 하고 있었다. (이관우, 204)
Aber während diese Gedanken durch seinen Kopf zogen, blieben seine Augen immer auf den Bruder geheftet. Und er sah ihn plötzlich vor sich, allein am Rande einer sonnbeglänzten Straße auf einem Stein sitzen, mit den weit offenen, weißen Augen zum Himmel starrend, der ihn nicht blenden konnte, und mit den Händen in die Nacht greifend, die immer um ihn war.
임홍배의 번역이 전반적으로 원문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그것을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한국어로 옮긴 훌륭한 번역이지만, 간간이 사소한 오역도 보인다. 가령 임홍배의 번역에서 Stilfserjoch가 “스텔비오 협곡(이딸리아 북단의 티롤 지방으로 이어지는 협곡 ― 옮긴이)”(임홍배, 143)으로 표기되어 있다. Stilfser를 스텔비오로 표기한 번역은 검토 대상이 된 번역본들 가운데 임홍배의 번역이 유일하다. 다른 번역본은 모두 독일식 발음을 따라 스틸프저, 슈틸후저, 슈틸프저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Venezia를 예로 들자면, 이 도시는 베니스(영미권), 베니제(프랑스), 베네디히(독일) 등으로 언어마다 다르게 표기되고 발음된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국어로는 이탈리아어 발음에 가까운 ‘베네치아’로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주를 추가하여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점도 독자로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다.
다음은 Joch의 번역이다. Pass와 Joch는 모두 두 봉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곳을 의미하며, 동의어로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Pass는 고개를 포함한 길 전체, 즉 저지대(대개 계곡)에서 고개를 넘어 다음 저지대까지 이르는 길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더 자주 사용되고, Joch는 이 길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된다. Joch가 두 봉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곳을 가리킨다 해도 물이 흐르는 골짜기라는 뜻의 계곡과는 다르다. Stilfser Joch(이탈리아 명칭 Passo dello Stelvio)는 남부 티롤의 베노스타 계곡과 손드리오 지방의 발텔리나를 잇는 길 또는 이 길에서 가장 높은 곳인 해발 2,757미터 지점을 가리킨다. 이 길은 계곡만을 지나는 길이 아니라 산허리를 감아 돈 다음 고갯마루를 통과한다. 임홍배의 번역에서 Joch가 모두 협곡으로 표기되어 있지만(임홍배, 144, 156), 문맥에 따라 고개, 고갯길, 고갯마루 등으로 표기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구절은 형 카를로가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꼬마를 보고 어린 시절 동생을 실명시켰던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그날 까를로는 노상 하던 대로 담장 옆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를 향해 입으로 불어서 쏘는 총으로 볼트를 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동생 제로니모의 비명을 듣는 순간, 옆을 지나가던 동생이 볼트를 맞아 다쳤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총을 힘없이 떨어뜨리고 창문을 타넘어 정원으로 달려갔다. (임홍배, 145. 강조 필자) Er hatte wie oftmals mit dem Bolzen nach der Esche an der Mauer geschossen, und als er den Schrei hörte dachte er gleich, daß er den kleinen Bruder verletzt haben mußte, der eben vorbeigelaufen war. Er ließ das Blasrohr aus den Händen gleiten, sprang durchs Fenster in den Garten und stürzte zu dem kleinen Bruder hin, der auf dem Grase lag, die Hände vors Gesicht geschlagen, und jammerte.
임홍배의 번역에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유일한 부분이다. ‘볼트’가 무엇인지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입으로 불어서 쏘는 총”으로 볼트를 쏜다고 했으니 전혀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볼트를 쏜다’는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우리말에 ‘대통이나 나무통 속에 화살 등을 넣고 입으로 불어서 쏘는 총’이란 의미의 ‘바람총’이란 단어가 있으니 ‘바람총으로 화살을 쏘다’로 옮긴다면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다른 번역에서는 바람총을 “장난감 소총”(박종서, 140), “화살총”(구기성, 327), “공기총”(이관우, 185) 등으로 옮기고 있다.
6) 이관우 역의 <눈먼 제로니모와 형>(2021)
임홍배의 번역 이후 십여 년이 지난 2021년 이 작품이 슈니츨러의 14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단편 모음집 <어떤 이별.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표현의 이질감을 완화”하고 “독자들이 보다 분명하고 쉽게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히고 있다(이관우, 9).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좋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가독성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탓인지 세부적으로 작은 요소들을 간과한 점이 더러 발견된다. 우선 앞서 박종서의 번역에서 언급했던 첫 단락을 살펴보자.
눈먼 제로니모는 벤치에서 일어나 식탁 위 포도주 단 옆에 놓여 있던 기타를 손에 들었다. 그는 멀리서 첫 마차가 굴러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눈에 익은 통로를 따라 열려 있는 문까지 더듬거리며 걸어간 다음 좁은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갔는데, 그 계단은 지붕이 있는 한쪽 마당으로 곧바로 이어져 있었다. 그의 형도 그를 따라갔고, 둘은 축축한 찬바람을 막기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등을 돌린 채 계단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바람은 축축하고 지저분한 땅을 지나 열린 출입문을 뚫고 불어왔다. (이관우, 182. 강조 필자)
번역문이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정독을 해보면 사소하지만 어색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벤치’는 긴 의자를 의미한다. 하지만 국어사전의 용례를 찾아보더라도 이 단어는 ‘공원의 벤치’처럼 대개 야외에 있는 장의자를 가리키는 어휘로 주로 사용되며, 실내의 의자, 번역문에서처럼 식당의 의자를 벤치로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긴 의자’나 ‘장의자’로, 아니면 그냥 ‘의자’나 ‘자리’로 옮긴다면 더 자연스러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후자의 경우 문화 번역에 중점을 두는 역자라면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박종서의 번역은 “걸상”(138), 구기성의 번역은 “벤취”(326), 임홍배의 번역은 “자리”(143)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의 첫 문장은 ‘눈먼 제로니모’로 시작된다. 장님이 “눈에 익은 통로를 따라” 더듬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는 표현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다른 번역에서는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을 더듬어”(박종서, 138), “잘 아는 길을”(구기성, 326), “익히 아는 통로를 따라”(임홍배, 143)로 옮기고 있다.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카를로는 여관의 식당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손님이 도착하면 재빨리 뜰로 내려가 기타를 연주하고 적선을 받는다. 뜰에서는 마차가 도착하는 즉시 그 앞으로 가 여행객을 상대로 연주를 하려면 마차를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바람이 “열린 출입문을 뚫고” 불어오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서 있으면 도착하는 여행객을 볼 수가 없다. 원문은 den Rücken zur Wand gekehrt이며 ‘벽을 등지고’라는 뜻이다. 다른 번역에서는 모두 ‘바람을 등지다’라는 의미로 옮기고 있다.
다음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가독성은 좋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다. 거리의 악사 생활을 하는 장님 동생과 그 동생을 보살피는 형이 20년 동안 지내온 생활 공간은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티롤”, 즉 알프스 산악지대이다. 평소 인적도 드물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겨울이면 폭설로 인해 고갯길이 막히는 고산지대인데, 이곳에 ‘골목’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Pass(복수형 Pässe)는 ‘고갯길’이란 의미이니 그대로 살려 번역하는 편이 덜 어색할 듯하다.
그들이 거리와 골목을 떠돌며 살아온 지 이제 20년이 되었다. 그들은 줄곧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티롤에서 지냈다. 그 지역은 많은 여행객들의 행렬이 몰려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관우, 187. 강조 필자) Zwanzig Jahre war es nun, daß sie auf Straßen und Pässen herumzogen, im nördlichen Italien und im südlichen Tirol, immer dort, wo eben der dichtere Zug der Reisenden vorüberströmte.
다음 대목에서 체험화법을 작은따옴표를 이용하여 옮김으로써 서술되는 내용이 카를로의 생각임을 잘 전달하고 있다. 작은따옴표는 체험화법을 번역하는 한 가지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대화체로 구성된 둘째 단락은 도대체 누구의 말인지 짐작할 길이 없다. 밑줄 친 원문 부분이 번역되지 않고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편집상의 오류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실수는 역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제로니모는 노래를 불렀고, 카를로는 넋이 나간 채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동생이 나를 믿지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리고 그는 귀청을 찢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제로니모를 옆에서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것에서 지내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얼토당토않은 생각들이 자신의 이마 위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 “무슨 노래를 그렇게 쉬지 않고 불러요? 나한테서는 동전 한 푼 받지 못할 텐데!” (이관우, 194. // = 단락 구분. 강조 필자) Geronimo sang; Carlo stand neben ihm, fassungslos. Was sollte er nur tun? Der Bruder glaubte ihm nicht! Wie war das nur möglich? – Und er betrachtete Geronimo, der mit zerbrochener Stimme seine Lieder sang, angstvoll von der Seite. Es war ihm, als sähe er über diese Stirne Gedanken fliehen, die er früher dort niemals gewahrt hatte.
Die Wagen waren schon fort, aber Geronimo sang weiter. Carlo wagte nicht, ihn zu unterbrechen. Er wußte nicht, was er sagen sollte, er fürchtete, daß seine Stimme wieder zittern würde. Da tönte Lachen von oben, und Maria rief: »Was singst denn noch immer? Von mir kriegst du ja doch nichts!«
3. 평가와 전망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이 소설은 10여 회 이상 번역되었는데, 시기를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의 초역이 이루어진 1960년 전후 시기에는 5회나 번역되었다. 이 가운데 초역인 박종서의 번역과 이듬해 출간된 구기성의 번역을 검토해보았다. 박종서와 구기성은 공히 일본 유학생 출신이긴 하지만 이들의 번역은 일본어를 중역한 것이 아니라 독일어 원전을 한국어로 충실히 번역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엿보였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어색한 표현들도 보이고 오역한 부분들도 간혹 눈에 띈다. 하지만 무대가 된 이탈리아 알프스의 지형이나 문화, 유럽인들의 생활과 풍습에 대한 자료나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번역은 초기 번역임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197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문학전집 또는 선집에 포함된 형태로 자주 출판되었는데, 대부분 초기의 번역들이 큰 수정 없이 재출간되었다. 검토 대상이 되었던 강경석과 홍경호의 번역은 각각 박종서와 구기성의 번역을 정서법만 수정하여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초기 번역보다 질적으로 더 향상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두 번역 중에서, 특히 홍경호의 번역은 수정 없이 1970년대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오랫동안 대중에게 멀어졌다가 2000년 이후의 시기에는 임홍배의 번역(2010)과 이관우의 번역(2021)이 나왔다. 이관우의 번역은 쉽게 읽히기는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어색한 부분이 적지 않다. 박종서와 구기성의 번역이 충실성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관우의 번역은 가독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오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임홍배의 번역은 충실성과 가독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번역이라 평할 수 있다. 그는 원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독일어를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옮겼다. 독일어의 체험화법도 한국어로 무리 없이 표현되었다. 그뿐 아니라 대화체에서는 한국어 입말투를 자연스럽게 살렸고, 서술문에서도 산문 나름의 리듬을 살려 가독성을 높혔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종서(1959):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박영사. 구기성(1960): 눈 먼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 을유문화사. 정경석(1974): 제로니이모. 정음사. 홍경호(1976): 눈 먼 제로니이모와 그의 兄. 금자당. 임홍배(2010):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창비. 이관우(2021): 눈먼 제로니모와 형. 작가와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