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Die Niemandsrose)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의 시집
작가 | 파울 첼란(Paul Cel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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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963 |
장르 | 시집 |
작품소개
파울 첼란이 1963년에 출판한 시집이다. <양귀비와 기억>(1952),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1955), <언어창살>(1959)에 이어서 나온 네 번째 시집으로 1963년 피셔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1959년부터 1963년 사이에 쓰인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는 4부로 이루어진 연작시의 성격을 띠고 총 53편의 시를 수록하였다. 이 시집의 제목에 나오는 ‘아무도 아닌 자’는 <찬미가>에서 표현된 것으로, 유대인들처럼 역사상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으며 고통받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성찰에서 나왔다. 삶은 위대한 사람들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아닌 자’에게도 속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속의 시들은 다양한 시 형식을 취하고 주제 상으로도 서로 비밀스러운 조응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속에는 유대적-성경적 세계가 계속해서 유지되는가 하면, 구약성서의 창조사에 대한 회의가 드러나기도 하고, 동시에 전적으로 현재성으로 가득한 세계도 존재한다. 설명을 거부하는 듯한 엄격한 어법, 절제된 이미지들은 첼란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연작시는 인간이 파시즘 시대의 엄청난 파괴에 대한 기억을 내몰거나 잊어버리지 않은 채 극복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 실린 몇 편의 시들은 김영옥, 고위공 등에 의해 선별적으로 번역되었으나 국내 완역은 2010년 제여매에 의해 이루어졌다(시와진실).
초판 정보
Celan, Paul(1963): Die Niemandsrose. Frankfurt a. M.: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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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가 | 20世紀 獨逸詩 2 | 탐구신서 178 | 파울 첼란 | 이동승 | 1981 | 探求堂 | 319 | 편역 | 완역 | ||
찬미가 | 現代詩選 | 현대의 세계문학 31 | 파울 첼란 | 김주연 | 1984 | 범한출판사 | 418 | 편역 | 완역 | ||
찬미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첼란 | 惠園世界詩人選 6 | 파울 첼란 | 고위공 | 1986 | 혜원출판사 | 190-191 | 편역 | 완역 | ||
찬미가, 죽음의 푸가 | 죽음의 푸가 | 세계문제시인선집 2 | 파울 첼란 | 김영옥 | 1986 | 청하 | 73-74 | 편역 | 완역 | ||
찬미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시와진실 시선집 | 파울 첼란 | 제여매 | 2010 | 시와진실 | 25 | 완역 | 완역 | ||
찬미가, 죽음의 푸가 | 죽음의 푸가-파울 첼란 시선 | 파울 첼란 | 전영애 | 2011 | 민음사 | 30 | 완역 | 완역 | |||
시편 | 파울 첼란 전집 1 | 파울 첼란 전집 1 | 파울 첼란 | 허수경 | 2020 | 문학동네 | 287 | 완역 | 완역 | ||
시편 | 첼란의 시 <시편 Psalm>의 장미 연구 | 독일어문학 103 | 파울 첼란 | 안철택 | 2023 | 한국독일어문학회 | 193-219 | 완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파울 첼란의 시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는 <양귀비와 기억>(1952),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1955), <언어창살>(1959>에 이어 1963년에 발표된 첼란의 네 번째 시집으로, 1959년부터 1963년 사이에 쓰인 총 53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첼란은 이 시집을 누구보다 가까이 느꼈던 러시아 유대 시인 오십 만델슈탐에게 헌정했는데 (“Dem Andenken Ossip Mandelstamms”), 그가 1962년까지 만델슈탐의 시들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형식상으로나 문체상으로 대단히 다양하다. 운율을 가진 단가 형식의 시들, 러시아풍의 장시들, 그리고 성서의 <시편 Psalm> 전통과 연결되는 형식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첼란의 4번째 시집의 제목이지만, 실제로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Niemandsrose’라는 시구가 등장하는 시는 이 시집에 실려, 우리말로는 ‘찬미가’ 혹은 ‘시편’으로 번역된 <Psalm>이란 개별시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초에 이 시뿐 아니라 첼란 시 전반에 대한 번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개별시의 경우 이동승이 <찬미가>로 옮겨 <20세기 독일시 2>(1981)에 수록한 것을 국내 최초의 번역으로 꼽을 수 있다. 김주연도 1984년에 <현대시선>에 첼란의 시 19편을 선별하여 번역했는데, 그중에 <찬미가>를 포함시켰다. 이 두 역자의 경우 여러 나라의 현대 시인들을 다루는 시선집에 첼란 시 몇 편을 수록한 것으로, 이른바 ‘현대시’의 다양한 경향들을 소개하는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첼란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번역과 연구는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는데, 고위공, 김영옥, 전영애 등을 들 수 있다. 고위공은 1985년에 <열음세계시>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온 <죽음의 푸가>를 보완해서 1986년에 새로 펴낸 번역 시집에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라는 제목을 붙였다. 전영애는 1986년에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 첼란의 시>(문학과지성사)라는 첼란 연구서를, 김영옥은 원 시집의 구분 없이 총 61편의 시를 번역하여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처럼 개별시들을 선별하여 옮긴 다른 역자와는 달리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시집 전체를 옮긴 역자는 제여매와 허수경 두 사람이다. 제여매는 이 시집 전체를 번역하여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출판했고(2010), 첼란 전집을 완역한 기념비적인 작업을 행한 허수경은 전집 1권에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53편 전부를 포함시켰다(2020). 이 글에서는 완역된 시집 전체를 포함하여 실제로 ‘Niemandsrose’라는 시어가 등장하는 <찬미가>를 주된 고려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찬미가 Psalm>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Psalm Niemand knetet uns wieder aus Erde und Lehm, niemand bespricht unseren Staub. Niemand. Gelobt seist du, Niemand. Dir zulieb wollen wir blühn. Dir entgegen. Ein Nichts waren wir, sind wir, werden wir bleiben, blühend: die Nichts-, die Niemandsrose. Mit dem Griffel seelenhell, dem Staubfaden himmelswüst, der Krone rot vom Purpurwort, das wir sangen über, o über dem Dorn.
구문론적 차원에서만 보자면 1-3연은 비교적 분명한데 비해, 마지막 4연은 첼란 특유의 대단히 파격적인 구조를 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번역에서도 많은 편차를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의미론적 차원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Niemand와 Nichts를 비롯하여 seelenhell, himmelswüst와 같은 첼란의 시어를 중심으로, 그리고 구문론적 차원에서는 첼란 시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4연을 중심으로 개별 번역 비평을 시도하고자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讚美歌 누구도 우리를 다시 흙과 진흙으로 빚지는 않으리라, 누구도 우리의 먼지를 論議하지 않으리라 누구도. 누구도 아닌 자여, 찬미받으라. 당신을 사랑하여 우리는 꽃 피고자 한다. 당신을 향하여. 우리는 無였으며, 무이며, 무로 남으리라. 꽃 피어나며 : 무의 장미꽃, 누구의 것도 아닌 장미. 영혼의 해맑은 줄기를 지닌 하늘처럼 거칠은 실먼지를 지닌, 붉은 왕관과 우리가 아, 가시에 대해 노래하는 眞紅의 말을 지닌.
번역문과 원문을 같이 수록한 이 시집에서 이동승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 시를 번역했다. 초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동승의 번역은 각각의 의미소들을 살리면서 대단히 충실하게 원문에 다가가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Niemand를 ‘누구도 ~~ 않다’라는 부정구문으로 옮겼고, Niemandsrose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장미’로 옮겼다. 그러나 ‘누구의 것도 아닌 장미’의 경우 장미의 소유주가 없다는 뜻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또한 2연에서 “찬미받으라 Gelobt seist du”나 “우리는 꽃 피고자 한다 wir blühen”에서 높임말이 아닌 일반적인 명령어나 평서문을 사용하여 이 시가 가지는 성서의 찬미가적인 전통과의 연결성은 조금 떨어져 보인다. 4연에서도 그가 무척 고심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데, 원문의 전치사 mit의 대응어로 ‘지닌’을 선택하여 세 번이나 각운처럼 사용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그러나 über dem Dorn을 가시 ‘위’라는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가시에 ‘대해’ 노래한다로 옮긴 부분은 원문의 전체적인 의도에서 다소 비켜선 인상을 준다.
누구도 아닌 자가 우리를 또다시 흙과 점토로 이겨 만든다 누구도 아닌 자가 보잘것없는 우리들 먼지에 대고 주문을 외운다 누구도 아닌 자가 칭찬해 주라 누구도 아닌 자여 당신을 위해 우리는 꽃피기를 원한다 당신을 보고 우리는 일찍이 무였으며 지금은 더욱 무이며 장래도 오직 무일 것이다 꽃이 피면서 무의 누구도 아닌 자의 장미 밝은 영혼의 꽃대궁 하늘로 날아가는 꽃가루 분홍빛 말에 빛을 빼앗긴 화관을 쓴 장미 우리는 그 말을 노래했다 노래했다 오오 떡갈나무의 침 위로 높이
김주연의 경우는 이동승과는 달리 Niemand를 ‘누구도 아닌 자’라는 부정의 주어로 옮기고 이어지는 술어를 긍정문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이후에 대부분의 역자에 의해 일반적으로 채택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4연의 “하늘로 날아가는 꽃가루 / 분홍빛 말에 빛을 빼앗긴 화관을 쓴 장미”나 “떡갈나무의 침” 등은 원문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김주연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원문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엄밀한 텍스트 번역보다는 의(미)역을 선호하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그는 ‘의(미)역’의 폭을 거의 오역에 가깝도록 상당히 넓게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 같은 번역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시 번역의 한 유형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역자는 원저자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는 데 주력하기보다 역자 자신의 이해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역자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인 약력에서 김주연은 “<아무 것도 아닌 장미>(1963) <실(紗)의 태양>(1968)과 후기의 시집으로 옮겨감에 따라서 시어의 긴장은 점점 ‘비극적으로 높아져’ 거의 언어표현의 극한까지 이르는 경향이 엿보인다”라고 평하는데, 시어의 긴장을 ‘비극적’으로 보는 관점은 이후 역자들의 평가에서는 다소 달라진다.
첼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번역을 시도한 고위공은 첼란의 시집 8편(1. 양귀비와 기억 2.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 3. 언어 창살 4. 누구도 아닌 자의 장미 5. 숨결 돌림 6. 실낱 태양 7. 빛의 강제 8. 눈 구역)에서 각각 몇 편을 선별하여 번역하여 전체를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1] 이중 <찬미가>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누구도 다시금 아닌 자 흙과 점토로 우리를 빚으리. 누구도 아닌 자 우리 티끌을 말하리. 누구도 아닌 자. 누구도 아닌 자여, 당신은 찬양받을지어다. 당신을 위해 우리는 피어나려 하나이다. 당신을 향해. 우리는 무(無)였고, 무(無)이며, 무(無)로 남을 것입니다. 꽃을 피우며, 무(無)의 장미, 누구도 아닌 자의 장미. 영혼의 해맑은 줄기, 하늘의 황량한 꽃실, 빨간 화관(花冠)을 지닌. 그 위에서 오, 가시 위에서 노래 부른 자색어(紫色語)의.
고위공은 Niemand의 역어로 ‘아무도 아닌 자’(시집 제목)와 ‘누구도 아닌 자’(개별시)를 혼용한다. 그는 ‘찬양받을지어다’, ‘피어나려 하나이다’와 같은 종결어미들을 사용하여 시편 혹은 찬미가의 분위기를 강조한다. 또한 4연이 식물학적으로 장미꽃의 수정과정을 보여준다고 지적하면서, 그 과정의 완성에서 ‘자색어’가 출현한다는 설명을 각주에 덧붙인다. 하지만 vom Purpurwort, das wir sangen을 ‘우리가 노래 부른 자색어(紫色語)의’로 옮겨 전치사 vom를 살렸지만, 그것의 연결관계는 열어둔 채 남겨놓는다. 그는 또 각주에서 이 시가 성서적 내용을 패러디하면서도 부정을 통한 새로운 ‘찬미로의 전환’을 촉구한다고 덧붙이는 점이 눈에 띄는데, 이는 김주연의 관점과는 분명 차이가 난다.
김영옥은 시집 1986년에 출판된 <죽음의 푸가>에서 Niemand를 ‘아무도안’으로, Nichts를 ‘아무것도안’으로 번역하였다. 역자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Niemand가 이 시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에 한 단어로 옮기려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신을 ‘아무도안’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 신으로부터 아무런 활동성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역어는 나름대로 고심을 거듭한 독자적인 결과물이지만, 이후 다른 역자나 연구자들에 의해 많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4연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다.
영혼 밝은 암술대를, 하늘 황량한 꽃실을, 가시 너머, 오 너머 우리 노래 부르던, 진홍빛말의 붉은 화관을 가진
김영옥은 여기서 원문의 어순을 전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의 명확성에 도달한다. 또한 이를 통해 그녀가 택한 ‘진홍빛말의 붉은 화관’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읽히고 의미도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김영옥은 다른 역자들이 생략했거나 누락시킨 전치사 vom의 의미를 살려내어, ‘진홍빛말의 (붉은) 화관’이란 하나의 새로운 메타퍼로 읽어낸 것이다.
2010년에 시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를 완역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한 제여매는 첼란 시로 학위를 받은 첼란 전공자이다. 이 시에 대한 그녀의 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다른 역자들이 별도의 해설을 붙이지 않은 데 비해, 제여매는 번역과 더불어 이 시를 집중적으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제여매는 여러 글에서 첼란의 문학 전반을 (신의) 없음이나 부재를 강조하는 부정의 문학으로 보는 기존의 해석에서 벗어나 무한한 긍정의 힘으로 역전시키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이 시의 첫 행 ‘Niemand knetet uns wieder aus Erde und Lehm,’에 대한 해석에서 드러나는데, 성서의 창조설화에서 취해온 이 모티프가 이미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세계로 환원”(127) 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Niemand와 Nichts가 초월적 존재와 관련되기보다는 역사 속 무명의 존재들이며, 작은 희망을 잃지 않고 아직 현존하지는 않으나 미래의 어느 대상을 지칭하는 대명사”(128)로 해석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Niemand를 부재하는 신, 혹은 무신(無神)으로 파악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해석이다.
Mit dem Griffel seelenhell, dem Staubfaden himmelswüst, der Krone rot vom Purpurwort, das wir sangen über, o über dem Dorn.
꽃술과 함께 영혼 환하게 황량한 하늘에 꽃실을 가지고 우리가 노래했던 심홍색 말의 꽃관으로 붉게 가시 위로, 오 그 위로.
다른 역자들이 Nichts를 ‘무(無)’로 옮긴 것과는 달리, 제여매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옮긴 것은 Niemand를 ‘아무도 아닌 자’로 옮긴 것과 동일한 리듬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보다 나은 선택임이 분명하다. 이때 그녀는 1연의 niemand, 2연의 Niemand를 구분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다른 한편, 유대인들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아무도 아닌 자’였다는 해석은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에서 밝힌 바대로 Niemand와 Nichts를 구분 없이 동일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부재하긴 하지만 Niemand는 여전히 주체에 해당하고, Nichts는 그 객체이자 대상이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남기 때문이다.
1986년에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 첼란의 시>(문학과지성사)라는 저서로 펴낸 바 있는 전영애는 2011년에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으로 첼란의 번역 시선집을 펴내었다. 그녀는 여기서 첼란의 시집별로 몇 편씩을 선별하여 번역했는데, 그 중 대표시들을 추려 앞에 비치한 첫 장 <죽음의 푸가>에 <찬미가>를 포함시켰다. 첼란 전공자답게 그녀는 의미상으로뿐 아니라 구문상으로도 원문의 문장 구조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려는 절제된 번역 방식을 고수한다. Niemand를 ‘아무도’(1연) 또는 ‘그 누구도 아닌 이’(2연)라고 상황에 따라 달리 옮기는 방식을 취하는 전영애는 Niemand에 대해 “독신(瀆神)과 경건이 교차된 신의 이미지”라는 각주를 붙인다. 또한 장미에 대해서는 “사랑, 신과의 신비적 합일, 유대 민족 등 다양한 표상”(31)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그 암술대, 혼처럼 밝고 꽃실, 하늘처럼 황폐하고 그 화관 붉어라 가시 너머, 오 너머로 우리가 노래 불렀던 그 자색의 말로
전영애는 4연을 “그 화관 붉어라 / 가시 / 너머, 오 너머로 / 우리가 노래 불렀던 그 자색의 말로”라고 옮기면서 원문의 각각의 어휘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살려낸다. 이때 의미상으로는 자칫 자색의 말로 화관이 붉어진다는 뜻으로도 읽히는데, 이것은 또 다시 김영옥이나 제여매의 번역과는 다른 선택이라 하겠다.
첼란 시집을 완역한 허수경은 이 시의 제목 Psalm을 <시편>으로 옮겼다. 이는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기독교적 전통에서 Psalm을 시편으로 부르는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허수경은 각각의 시들에 대해 어떤 해석도 덧붙이지 않아 시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보를 주지 않는다. 유일하게 독문학자가 아닌 그녀는 자신을 번역연구자라기보다 번역시인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 암술대로 영혼처럼 환하게, 그 꽃실로 하늘처럼 거칠게 우리가 노래했던, 진보랏빛 말의 그 꽃부리로 붉게 너머, 오 가시 너머.
이때 허수경은 4연의 앞부분 ‘Mit / dem Griffel seelenhell, / dem Staubfaden himmelswüst’를 mit에 따라오는 전치사구로 보는 대신 ‘영혼처럼 환하게’, ‘하늘처럼 거칠게’라고 부사적으로 풀어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진보라빛 말의 / 그 꽃부리로 붉게’라는 부분은 제여매가 보여주는 어휘 간 연결구조와 유사하다.
이 시의 제목을 <시편>으로 옮긴 또 다른 역자는 안철택이다. 자신의 논문에서 이 시의 전문을 번역한 안철택에게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Niemand를 음차역하여 ‘니만트’로 옮긴 것이다.[2] 그에 따라 시의 제목은 <니만트의 장미>가 되고, 이 시의 첫 연을 “니만트가 우리를 또 다시 흙과 점토로 빚으리. / 니만트가 우리의 먼지에 대해 말하리. / 니만트.”로 옮긴다. 이처럼 Niemand를 음차역한 것은 그가 처음은 아니고, 이에 대해 그는 다른 문헌들을 제시하면서 “기독교에서 섬기는 신에게는 원래 이름이 없다. 그가 만물의 궁극적 원인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안철택은 첼란의 시에서 현실의 구체적 사건을 찾아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에 따라 himmelswüst를 ‘하늘을 사막으로 만든’, seelenhell은 ‘영혼의 지옥’으로 이끈 원폭 사건과 연결시켜 읽어내려는 이색적인 시도를 한다. 나아가 이 시에 나오는 장미를 뮌헨의 백장미단 사건과 연결짓고자 한다. 또한 그는 4연에서 나오는 Krone와 Dorn을 연결시켜 예수의 머리에 올려진 ‘가시 면류관’과 연결시키는 발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안철택이 시의 내재적 해석보다는 역사적, 문학 외적 사실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흥미롭고 참신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과감한 해석처럼 보이게 한다. 안철택 역시 이 시를 궁극적으로 ‘신 없는 세상에서 구원의 가능성’으로 읽어낸다.
3. 평가와 전망
<Die Niemandsrose>는 첼란의 시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은 시임에 틀림이 없고, 아직도 많은 논의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예컨대 Psalm 제목이나 ‘Niemand’와 ‘Nichts’에 대한 해석은 물론이고, seelenhell, himmelswüst, Purpurwort와 같은 첼란 특유의 독특한 시어들 각각을 어떻게 옮기고, 어휘들 간의 분명치 않은 연결성을 어떻게 우리말로 구조화하느냐라는 점에서 역자들마다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각 구절의 이해에 있어 오랫동안 완전히 합의된 이해에 이르지 못한 채 남아있었으나. 여러 역자의 노력으로 점차 윤곽이 드러나는 듯하다. 첼란 시 전반적인 해석과 관련해서는 이전의 첼란 해석에서 두드러졌던 부정의 미학 대신 최근 들어서는 부정을 극복하려는 긍정의 미학으로 읽어내는 추세로 옮겨가는 점도 눈에 띈다. 다시 말해, 비교적 최근에 나온 해석일수록 시인의 비극적 체험에 근거해서 읽어내던 기존의 해석보다는 ‘신 없는 세상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본적인 해석 방향의 변화와 더불어 앞으로도 이 시의 세부적인 번역은 여전히 열려 있다 하겠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동승(1981): 찬미가. 20세기독일시 II. 탐구신서 178.
김주연(1984): 찬미가. 범한출판사, 418.
고위공(1986): 찬미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혜원출판사, 190-191.
김영옥(1986): 찬미가. 죽음의 푸가, 청하, 파울 첼란 시선, 73-74.
전영애(2011): 찬미가. 죽음의 푸가, 민음사, 30.
제여매(2010): 찬미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시와진실, 25.
허수경(2020): 시편. 파울 첼란 전집 1. 문학동네, 287.
안철택(2023): 첼란의 시 <시편 Psalm>의 장미 연구, 독일어문학 103, 193-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