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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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소설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
작가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초판 발행1809
장르소설


작품소개

이 작품은 결혼 제도와 법의 테두리를 넘는 사랑의 친화력으로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괴테의 장편소설이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재혼 부부이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신분제적 결혼 관습 때문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 두 사람은 각각 배우자가 사별한 후 다시 합쳐진다. 탄탄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에두아르트가 어려움에 처한 대위 친구를 돕고자 그를 초청하고, 샤를로테가 기숙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조카 오틸리에를 집에 불러들이면서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산과 알카리처럼 결합해서 안정을 이루더라도 더 친화력이 있는 원소를 만나면 새로운 결합을 하게 되듯이,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샤를로테는 이성적이고 유능한 대위 오토에게,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에두아르트는 말없고 내성적이면서 감정이 풍부한 오틸리에에게 끌린다. 그러나 화학반응에서의 친화력과 달리 남녀관계에서의 친화력은 결혼과 같은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위기의 시작이 된다. 샤를로테와 대위는 사회적 관습을 고려하고 의무감에 따라 사랑을 체념하기로 결심한 반면, 에두아르트는 자신의 격정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한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가 각자 다른 상대를 상상하면서 나눈 육체적 결합에서 아이가 생기고, 에두아르트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심정으로 전쟁에 지원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와 결합하고자 하지만, 아기를 정성껏 돌보던 오틸리에의 실수로 아기가 물에 빠져 죽자 오틸리에는 죄책감, 도덕적 의무감, 식지 않는 사랑의 열정 사이에서 번민한 끝에 죽음을 선택한다. 이에 절망한 에두아르트가 오틸리에를 따라가면서 새로운 친화력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다. 이 소설은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요구와 결혼의 도덕적인 사회적인 의무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주면서 도덕적인 가치판단은 유보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68년에 이병찬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휘문출판사).


초판 정보

Goethe, Johann Wolfgang von(1809): Die Wahlverwandtschaften. Tübingen: Cottaische Buchhandlung.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친화력 괴테문학전집 괴테문학전집 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병찬 1968 휘문출판사 편역 완역
친화력 世界文學大全集 世界文學大全集 10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홍경호 1990 금성출판사 편역 완역
친화력 친화력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김황진 1999 충남대학교출판부 편역 완역
친화력 친화력 SNUP 동서양의 고전 20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오순희 201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편역 완역
친화력 선택적 친화 을유세계문학전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장희창 2023 을유문화사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809년 환갑의 나이에 출간한 <친화력>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사회제도 사이의 긴장관계를 잘 보여주는 연애소설이자 불륜소설이며 또한 프랑스혁명 이후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는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이중의 간통’이라는 설정과 그로 인해 태어난 아기가 두 사람이 각각 마음에 품고 있던 상대방의 모습을 닮았다는 묘사는 지금 읽어도 파격적이며 작품이 발간되었을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괴테의 대표작이라 할 <젊은 베르터의 고뇌>와 <파우스트>가 일제강점기에 이미 번역된 데에 비해서 <친화력>은 1968년에 가서야 초역이 나오며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의 숫자도 역자 기준 총 8종으로 이 두 작품에 비하면 훨씬 적다. 이병찬의 초역은 휘문출판사의 <괴에테文學全集> 제6권으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1974년과 1980년 같은 출판사의 다른 시리즈로 두 번 더 재출간되었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을 번역한 역자는 홍경호로 그의 번역본은 금성출판사에서 1981년, 1987년, 1990년 이렇게 세 번 총서번호를 달리 하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나왔다. 이후 1990년대에는 서석연, 김황진이, 2000년대 이후로는 김래현, 오순희, 곽복록이 <친화력>을 번역했으며 가장 최근에 번역한 역자는 장희창이다. <친화력>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들은 모두 독문학 전공자로 대학에 몸을 담았던 학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친화력>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우리가 던져볼 법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이백여 년 전 독일의 귀족계급과 시민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어떤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 19세기 초 독일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어떤 투로 재현해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독일어로 ‘siezen’하던 사이가 ‘duzen’하게 된 변화를 번역에서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텍스트가 집필되던 시기의 언어와 그 텍스트를 번역하는 현재의 언어 사이, 언어의 시대적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 가능하다 해도 그 일이 꼭 필요한가? 달리 말하면, 2024년에 <친화력>을 번역하더라도 이 텍스트가 요즘 나온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문체에서 예스러운 느낌을 줄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요즘 소설처럼 읽히도록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하는 것이 좋은가? 원문 텍스트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역사적 현재’ 또는 ‘극적 현재’는 번역에서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아래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시대의 변화와 역자의 작품 이해에 따른 번역의 차이, 초역의 영향력, 극적 현재, 인물 간의 대화에서 상대 높임법의 활용 등의 논점을 중심으로 개별 번역을 비교, 분석해 보겠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이병찬 역의 <친화력>(1968)

세로쓰기로 편집되어 있는 휘문출판사의 <괴에테文學全集> 제6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詩와 眞實(第四部)>, <伊太利紀行>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이병찬의 <親和力> 번역본은 국내 초역이면서 가독성도 높고 번역도 정확한 편이다. 책 말미에 실린 두 쪽 가량의 역자해설을 보면 역자가 이 작품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괴테 자신이 쓴 책 광고문에서 “도처에 유일한 자연이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을 직접 인용하며 이 소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친화력>은 그에게 특이한 객관적인 필치로써 연애의 친화 관계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는 각자의 운명을 마치 자연율(自然律)과 마찬가지로 초인간적인 불가항력적 결정력이라는 데에 귀일시켜 놓았다. 즉 여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연애에 있어서의 친화력 사상은 말하자면 사랑의 마신(魔神)의 사상으로서 샤를로테나 대위와 같은 이지적인 인간은 간단히 마신적 사랑의 세계에서 탈피될 수 있으나 선택된 인간이라고 할 만한, 천성으로 사랑의 마신의 자식인 옷티일리에는 에드아르트와 마찬가지로 한번 이 마신의 습격을 받으면 완전히 그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이병찬, 490)

인용문에서 이병찬은 이 소설의 문체 또는 서술자의 태도를 “객관적인 필치”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으며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의 “마신적 사랑”의 의미를 자연법칙과 같은 “초인간적인 불가항력적 결정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이 작품의 근저에 가로 놓인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체념의 사상”(490)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각각 실존했던 어떤 인물들을 모델로 했는가 하는 전기적 해석도 소개하고 있다. 짧지만 핵심을 잘 짚고 있는 이 해설은 역자의 번역에도 신뢰를 갖게 한다. 아래에서 이병찬의 정확한 번역이 돋보이는 한 대목을 살펴보자.

Sie wähnten, sie glaubten einander anzugehören (456)[1]
이제 그들은 서로의 것인양 망상하고 믿었다.(이병찬, 299)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은 상대방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홍경호, 427)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믿었다.(김황진, 245)
그들은 서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김래현, 276)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오순희, 309)
그들은 서로를 서로의 것이라 생각하고 또 믿었다.(장희창, 348) [밑줄 강조 필자]

위의 인용문은 2부 13장에서 거의 일 년 만에 재회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처음으로“대담한 자유로운 키쓰 entschiedene, freie Küsse”(이병찬, 299)를 나누는 대목이다. 서술자는 여기서 ‘망상하다, 착각하다, 잘못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wähnen’이라는 동사를 씀으로써 이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앞으로 둘이 결합하는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병찬은 이를 “망상하고”로 옮김으로써 서술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역자들은 모두 그냥 ‘생각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물론 다른 역자들이 이 동사를 이렇게 번역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연애소설에서 주인공 커플이 처음으로 키스하는 대목에서 망상이나 착각 같은 단어를 쓰면 아무래도 이 장면의 낭만성이 감소될 것이며, 비록 그러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그 순간 그렇게 ‘생각’한 것은 맞으므로 이를 두고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망상’은 명사 형태로는 지금도 많이 쓰이지만‘망상하다’라는 동사는 요즘 잘 쓰이지 않는 편이나 50여 년 전에 나온 이병찬의 번역본에서는 자연스럽게 읽힌다. 비슷한 예를 몇 가지 더 들자면, 나머지 모든 번역본이 그냥‘고집’이라고 옮긴 단어“Eigensinn”(460)을 이병찬은 “외고집”(이병찬, 303)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에두아르트의 성격을 적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으로, 비록 요즘 많이 쓰는 단어는 아니지만 잘 살려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ich schlummerte”(462)를 이병찬은 “그저 등걸잠을 자고 있었습니다”(이병찬, 304)로 옮기고 있는데‘등걸잠’의 사전적 의미는“옷을 입은 채 아무것도 덮지 아니하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는 잠”으로 ‘schlummern’의 의미와 완전한 등가는 아니지만 “선잠”(오순희, 317)이나 “가볍게 졸고 있었죠”(장희창, 358)와 의미가 통한다. “그저 자기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져달라는 Geduld mit ihm zu haben(475)”(오순희, 336) 같은 대목을 “그에게 참을 인자를 써달라”(이병찬, 314)로 옮긴 것 역시 언어가 시대에 따라 변해감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한국어 초역이면서도 그 이후에 나온 어느 번역본 못지 않은 정확성을 보여주는 이병찬의 번역은 최초로 번역된 만큼 이후의 번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역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아래에서 살펴보자.

Sollten sie es noch nicht versucht haben, wirkliche, bekannte Gemälde vorzustellen? Eine solche Nachbildung, wenn sie auch manche mühsame Anordnung erfordert, bringt dagegen auch einen unglaublichen Reiz hervor.(392)
여러분들은 아직 실제의 유명한 그림들을 연출해 보려고 시도한 적은 없습니까? 그러한 묘사는 여러 가지 힘드는 준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와 반면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력도 가지고 오는 것이예요.(이병찬, 248)
여러분은 유명한 회화의 장경(場景)을 자신이 직접 연기한 일이 아직 없었던가요? 그와 같은 활인화(活人畫)를 준비하려면 꽤 힘이 들지만, 그 대신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매력이 있지요.(홍경호, 358-359)
그들은 유명한 진짜 그림들을 연출해 보이려는 시도를 아직 한번도 해보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러한 활인화(活人畫)는 여러 가지 힘드는 준비를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반면에 또한 굉장한 매력을 창출해내지요.(김황진, 173)
그런 사람들이라면 지금까지 잘 알려진 그림들을 몸소 연출해 보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을까요? 비록 매우 힘든 장치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모방은 대단히 매력 있는 일이랍니다.(김래현, 198)
진짜 잘 알려진 그림들을 연기로 표현하는 작업은 아직껏 해본 적 없으신가요? 이런 활인화(活人畫)를 수행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작업이긴 합니다만, 그만큼 엄청난 매력을 발산하거든요.(오순희, 220)
그런 분들이 직접 나서서 우리가 잘 아는 실제의 그림을 몸으로 연출해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아주 힘든 규율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러한 모방은 엄청난 매력을 발산할 것입니다.(장희창, 250) [밑줄 및 기울임 강조 필자]

2부 5장에는 샤를로테의 친딸인 루치아네가 주축이 되어 ‘활인화 lebendes Bild/ tableau vivant’를 연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위의 인용문은 백작이 이러한 공연을 제안하는 대목이다. 이병찬의 번역에서 3인칭 복수 sie를 “여러분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 문장이 바로 앞선 문장에서 청중들 중에 그림 속에 나오는 동작이나 자세를 모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한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이므로 대화문의 자연스러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능한 선택이다. 원문과 대조해 보면 이병찬의 번역은 일부 형용사를 빠뜨리거나 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인물과 사물을 그림 속의 장면과 똑같이 ‘배치, 배열,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Anordnung’을 “준비”로 번역한 것이 눈에 띄는데, 물론 ‘준비’라는 단어는 이런 의미를 포괄할 수 있기에 번역문은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병찬의 번역을 잇는 홍경호와 김황진의 번역이 이 단어를 똑같이 ‘준비’로 번역한 점이나 홍경호 역시 삼인칭 복수의 sie를 “여러분은”이라고 옮기고 있는 점은 초역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한편, 홍경호는 원문의 “Nachbildung”을 “활인화”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이병찬의 번역에서 이미 등장한 표현이지만, 홍경호는 이 주제가 처음 등장할 때 제시하고 있고 이병찬은 나중에 “so schön eingerichteten Gemälde”(395)를 “실로 아름답게 준비된 활인화(活人畫)”(이병찬, 250)라 번역하고 있다. 이로써 초역자도 이미 괴테 시대에 유행했던 이 새로운 문화현상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나며 첫 번역에서부터 이 활인화 공연 대목에는 화가와 그림 주제에 대한 설명이 내주로 달려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후 김황진과 오순희도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같은 역어를 선택하고 있으며 오순희는 각주까지 붙여 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2) 홍경호 역의 <친화력>(1990)

총 120권으로 구성된 金星版 <世界文學大全集>의 제10권으로 1990년에 출간된 홍경호의 <親和力>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과 도로테아>와 같이 수록되어 있으며 다른 두 작품과 달리 제목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1981년 판본에 비해 이후의 판본은 전체 분량이 약 60쪽 가량 늘었으며 1987년 판본과 1990년 판본은 수록 페이지까지 동일하다. 이 책에는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 대신 괴테의 일생과 그의 주요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괴테의 생애와 작품세계’라는 해설이 실려 있다. 홍경호의 번역은 이병찬의 초역에 비해 1981년 초판 기준으로 십 년 이상의 시차가 있는 만큼 가로쓰기에다 문체 역시 보다 현대적이다. 이병찬이 정확하게 번역한 부분을 거꾸로 오역한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2] 작품의 시대 배경에 맞춰 적절한 역어를 선택한 부분이 돋보인다. 예컨대 2부 10장에 등장하는 영국 귀족이 가져온 ‘카메라 오브스쿠라 camera obscura’의 원문은 “tragbaren dunklen Kammer”(430)인데 이를 이병찬은 “휴대용 사진기”(이병찬, 278)로 옮기고 있는 데에 반해, 홍경호는 이를 “휴대용 암상(暗箱)”(홍경호, 398)으로 번역하고 있다. 카메라 오브스쿠라가 사진기의 전신이긴 하지만 스케치를 하기 위한 도구인 이 물건을 ‘휴대용 사진기’로 번역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김황진은 “움직이는 암실”(김황진, 215)로 옮기고 각주에 ‘휴대용 사진기’라는 설명을 붙였으며, 오순희는 “휴대용 어둠상자”(오순희, 271)로 번역하고 각주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독일어 번역이라는 부연 설명을 달았다. 반면, 김래현과 장희창은 초역과 마찬가지로 “휴대용 사진기”(김래현, 244; 장희창, 309)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이 물건을 가져온 등장인물은 맨 처음 “영국인 Engländer”(429)으로, 그 이후에는 “Lord”(431)로 지칭되는데, 이를 이병찬은 “귀족”(이병찬, 279)으로 옮기고 있으나 홍경호는 “영국 귀족”(홍경호, 398)으로 옮겨 그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하고 있다. 뒤따르는 역자들 중 김황진과 오순희는 모두 홍경호의 예를 따르고 있으며(김황진, 216; 오순희, 272), 김래현과 장희창은 “후작”(김래현, 245; 장희창, 310)이라 번역하고 있다. ‘Lord’는 영국 귀족 일반에 대한 호칭 또는 통칭이므로 ‘후작’은 정확한 번역이라 하긴 어렵겠다. 아래에서는 홍경호의 번역 중 역자의 작품 해석이 돋보이는 한 군데를 같이 살펴보자.

aus ihrem halben Totenschlaf(460) / in meinem halben Totenschlaf(463)
반 죽음이 된 잠에서(이병찬, 303) / 반쯤 죽은 것같은 상태에서(이병찬, 305)
지금의 반죽음 같은 잠에서(홍경호, 432) / 반죽음과 같은 잠 속에서(홍경호, 434)
죽은 듯한 잠에서(김래현, 282; 장희창 356) / 반쯤 잠든 상태에서(김래현, 284; 장희창, 359)
반쯤 죽은 듯이 잠든 상태에서(오순희, 315) / 반쯤은 죽은 듯이 자고 있었지만(오순희, 318) [밑줄 강조 필자]

위에 인용한 부분은 오틸리에의 실수로 아기 오토가 물에 빠져 죽은 후 2부 14장에서 샤를로테와 소령이 나누는 대화와 이어지는 샤를로테와 오틸리에의 대화 중 각각 샤를로테와 오틸리에가 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오틸리에는 샤를로테의 무릎에 기댄 채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종의 근육마비 상태에서 샤를로테와 소령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또렷이 듣고 있었고, 소령이 떠난 후 샤를로테에게 건네는 오틸리에의 말은 바로 앞서 들은 대화 내용에 비추어 스스로 성찰한 내용이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오틸리에는 직전에 샤를로테가 자신의 상태를 두고 쓴 표현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이렇게 오틸리에가 샤를로테의 말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 바로 홍경호의 번역이다. 두 번째 나올 때 조사 ‘과’까지 없었더라면 더욱 정확한 반복이 되었겠지만, 어쨌든 홍경호는 같은 어구가 반복해서 등장함을 의식하고 이를 똑같이 번역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앞뒤를 각각 다른 표현으로 번역하긴 했으나 ‘반죽음’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쓰고 있는 역자는 이병찬인데, 독일어 원문의 간결한 표현에 상응하게 짧으면서도 정확하게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역어를 찾았다고 생각된다.


3) 김황진 역의 <친화력>(1999)

괴테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열렸던 1999년[3] 충남대학교출판부에서 출간된 김황진의 번역은 번역 저본을 밝힌 최초의 판본이며 이 글에서 다루는 모든 번역본 가운데 역자의 번역 전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거의 유일한 번역본이다.[4] 김황진은 번역본 말미에 실린 세 쪽의 <역자후기> 중 절반가량을 번역 의도와 전략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괴테 문장들을 완전한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옮김을 이상적인 목표로 삼되 우리말화의 방향과 각도는 어디까지나 괴테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문체의 문장들을 독자가 읽을 때 느끼는 리듬과 박자를 깨거나 헝크러뜨리지 않고 가능한 한 유지하는 쪽의 것으로 잡았다. 예를 들어, 같은 작가 괴테의 문장이라 해도 󰡔젊은 베르터의 슬픔󰡕에서 구사된 문체와 󰡔친화력󰡕에서 구사된 문체는 판이한 차이가 있음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체의 리듬과 분위기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다. 또 각 문장이 지니는 문장 개개의 분위기가 독특한 만큼 함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문장구조를 아동 동화 번역에서와 같이 설명식으로 풀어 놓는 일은 가능한 한 피했다. 즉 함축적인 문장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김황진, 286. 밑줄 강조 필자)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면서도 동시에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겠다는 역자의 의도가 가장 뚜렷하고도 충실하게 반영된 부분은 전체적으로 과거시제로 된 서술 한가운데 갑자기 현재시제의 문장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역자가 각주에서 ‘역사적 현재’ 또는 ‘극적 현재’로 규정하며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 현재시제로 된 부분들은 1부 13장과 15장을 비롯하여 2부 13~14장, 16~18장에 걸쳐 종종 나타나며 “작중인물의 속마음과 긴장된 장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한”(김황진, 97) 서술적 장치이다. 김황진은 “우리말 번역에 있어서는 흐름이 어색하지 않도록 그냥 과거 시칭으로 번역해 놓는 것이 관례”(김황진, 98)라는 점을 스스로 언급하면서도 본인은 이러한 관례를 거슬러 모든 현재시제 대목을 정확하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해당 부분을 모두 이탤릭체로 표시함으로써 나머지 부분과 철저히 구분하고 눈에 띄게 했다. 원문에 없는 이탤릭체까지 도입한 것은 다소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각주에서 그 사정을 밝히고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확실하게 독자의 주목을 끄는 효과는 있다. 그렇다면 김황진 이전과 이후의 다른 역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초역자인 이병찬은 2부 14장의 첫 두 단락, 즉 아기 오토가 죽은 이후 별장에서 구급의가 애쓰는 가운데 오틸리에는 쓰러지고 샤를로테가 귀가하는 장면만을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으며, 홍경호는 사실상 이 ‘극적 현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주 제한적으로 현재시제로 번역한 한두 문장이(홍경호, 429) 눈에 띄는 정도이다. 김황진의 번역 이후에 나온 세 번역본의 경우, 오순희는 김황진과 마찬가지로 모두 충실하게 현재시제로 번역했으며 1부 13장에 이런 부분이 처음 등장할 때 각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반면, 김래현과 장희창의 경우는 어떤 대목은 과거 시제로 번역했다가 또 어떤 부분은 현재시제로 번역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예컨대 김래현은 1부 13장 도입부에 오틀리에에 대한 무한한 열정으로 치닫는 에두아르트의 고조된 감정을 묘사하는 세 단락에 걸친 대목에서 두 번째 단락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으며(김래현, 113-115) 1부 15장의 경우는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대목 중의 하나라고 할 2부 13장(김래현, 271-278)의 경우는 더욱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는데, 산 위의 별장을 보고 에두아르트가 느끼는 그리움과 조바심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이후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재회하는 순간은 반영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 에두아르트와 헤어진 후 오틸리에가 아기를 물에 빠뜨리는 사고가 나는 대목 역시, 오틸리에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은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가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은 반영하고 그다음 단락은 또 반영하지 않았다가 오틸리에가 정신을 차리고 구조를 시도하는 대목은 다시 반영하는 등 시제 번역에 전혀 일관성이 없다. 이후 14장에서 18장 사이 부분은 대체로 원문대로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는 편이나 일부 부정확한 곳도 발견된다. 장희창의 경우는 김래현보다는 원문에 가깝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는 편이나 역시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대목이 상당수 존재한다. 1부 13장의 세 단락 중 첫 단락의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김래현과 마찬가지로 1부 15장의 현재시제 역시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2부의 경우는 대체로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편이나 역시 김래현처럼 2부 13장에서 에두아르트가 산장을 보고 그리움과 조바심을 느끼는 대목은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았다. 이 두 번역본은 <친화력>에서 현재시제 서술의 중요성을 이토록 강조한 김황진의 번역보다 나중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제를 일관성 없이 번역하여 이 문제에 대한 역자의 뚜렷한 의식이나 원칙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아쉽다 하겠다.

김황진이 역자 후기에서 번역 시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꼽고 있는 것은 바로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 “경어사용의 문제”이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번역할 때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특히나 <친화력>같이 몇백 년 전의 텍스트를 번역할 때는 더욱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래 오순희의 번역본에 대한 개별번역비평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므로 유일하게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한 번역자 김황진의 입장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그런데 무엇보다 난해했던 점은 경어사용의 문제이다. 18세기 독일 상류사회의 언어를, 시대적으로 그에 알맞는 우리나라 이조시대 상류사회의 언어에다 맞추게 되는 번역도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교양인의 언어를 가미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음을 밝혀둔다. 언어문화의 발전과 사회의 발달은 동서양을 시대적으로만 일치시켜 동일시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녀간, 부부간에 있어 자신의 호칭을 경우에 따라 '나'와 '저'를 혼용함이 필요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대체로 이 번역에서는 소위 문학 작품 번역어의 관점에서의 원어 텍스트 조작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원어 텍스트의 문화적 분위기에 맞추는 방식을 취하였고, 번역(목표)언어인 우리말 쪽은 대체적인 문화적 등가관계만을 참작하여 현재 우리나라 방송매체를 통하여 많이 익혀진 어휘 아니면 거의가 우리 한국 현대 중산층 표준말 사용 가정에서 사용되는 어감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것이 본 번역의 방향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김황진, 286-287, 밑줄 강조 필자)  

위의 인용문에서 역자 김황진은 높임말 사용에 있어서 현재 우리나라의 언어는 물론 작품의 시대 배경도 함께 고려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황진의 번역본은 앞선 두 번역본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총 62개의 역주를 각주로 달아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이때 단순히 한국의 독자에게 낯선 인명이나 주제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번역어 선택에 대한 부연설명이라든가(예컨대 19쪽, 29쪽, 43쪽 등) 관련 주제에 대한 연구서까지 소개하는(예컨대 52, 137쪽) 등 학술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4) 오순희 역의 <친화력>(2011)

오순희의 <친화력>은 2011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발간되었으며 책 끝에 “괴테의 생애와 문학세계” 및 “‘낭만적 사랑’을 둘러싼 담론들: <친화력>의 현대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앞선 두 번역본과 약 십 년의 시차가 있는 오순희의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등장인물들 상호 간의 대화에 나타나는 상대 높임법이다. 오순희는 다른 번역자들과 달리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 이 부부간의 대화를 상호 간에 해체를 쓰는 것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앞서 각주 4번에서 인용한 것처럼 이 소설의 “현대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짐작된다. 부부간의 대화가 처음 등장하는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다 좋은데, 딱 한 가지가 걸리네.” 그가 말했다. “이 정자가 좀 좁은 것 같아.”
“우리 둘한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샤를로테가 대답했다. 
“그야 그렇지.” 에두아르트가 말했다. “한 사람쯤 더 와도 자리는 충분할 거 같아.”
“그럼.” 샤를로테가 대답했다. “네 사람이 돼도 충분할걸. 사람들이 더 많이 오면 다른 장소를 마련하면 되고.”(오순희, 6)
“한가지만 지적할 게 있는데”하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정자안이 좀 좁아 보이오”
“우리 둘한테는 넉넉하잖아요” 샤를로테가 대답했다.
“물론 그렇긴 하지” 에두아르트가 말했다. “한 사람이 더 와도 자리야 있지”
“그렇고 말고요” 샤를로테가 대답했다. “네 사람까지도 돼요. 손님이 더 많을 경우를 위해선 다시 자리를 마련하면 되겠구요”(김황진, 6) [밑줄 강조 필자]

오순희를 제외한 나머지 역자들은 대체로 비슷한 경향을 보이므로 위에서는 경어체 사용의 어려움에 대해 고충을 토로하며 특별히 본인의 입장을 밝힌 김황진의 예만 가져왔다. 인용문을 보면 오순희는 서로 친근한 반말로 얘기하는(duzen) 원문과 마찬가지로 부부 상호 간에 완전히 수평적으로 해체만을 쓰는 것으로 번역한 반면, 김황진의 경우 남편인 에두아르트는 해체와 하오체를 섞어 쓰는 것으로, 아내인 샤를로테는 해요체를 쓰는 것으로 번역했다. 위 인용문 이외의 다른 대목을 보면, 김황진은 에두아르트의 말도 간간이 해요체로 번역하고 있으며, 샤를로테의 말은 해요체와 하십시오체를 섞어서 번역하고 있다. 다른 역자들도 대체로 김황진과 비슷하게 상대 높임법을 활용하고 있다. 이병찬, 홍경호, 김래현 역시 남편의 말은 해체, 해요체, 하오체를 섞어서, 아내의 말은 주로 해요체를 쓰면서 하십시오체를 섞어 쓰는 정도로 번역하고 있으며, 홍경호나 김래현의 번역본에서는 드물게 에두아르트도 하십시오체를(“맙시다”, “좋답니다”) 쓰는 경우가 보인다. 장희창 역시 이와 비슷하나 에두아르트가 주로 하오체와 해요체를 쓰며 해체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대부분의 역자들이 여성인 샤를로테는 해요체를 주로 쓰고 남성인 에두아르트는 하오체를 주로 쓰는 것으로 번역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하오체와 해요체는 각각 격식체와 비격식체라는 점이 다르지만 “상대편을 보통으로 높이는 종결형”이라는 점에서 상대 높임법의 등급으로 보자면 동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병찬, 홍경호, 김황진, 김래현의 번역에서 남편인 에두아르트는 상대편을 높이지 않는 해체를 종종 쓰는 데에 반해, 아내인 샤를로테는 해체를 전혀 쓰지 않고 해요체와 하십시오체를 쓴다. 따라서 상대 높임법에 따른 부부간의 평등성 정도로 보자면, 오순희의 번역에서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가장 동등하고, 그다음으로 장희창의 번역에서도 둘은 상당히 동등하게 나타나며 나머지 번역본들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하대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아내가 남편을 존대하는 모습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려진다. 이처럼 가장 최근의 두 번역본에서 종결형 어미를 통해 부부 관계를 수평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젠더 불평등이 차차 해소되어가는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한다 하겠다. 아울러 부부 관계를 가장 평등하게 번역한 역자가 본 번역비평에서 다루는 번역자들 중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번역자의 젠더가 번역 결과물에 미치는 영향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부부가 서로 비격식체인 해체를 쓰는 오순희의 번역은 요즘 사람들의 대화같이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점에서 역자가 추구한 바대로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한편, 앞서 김황진이 역자후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이 출간된 시기 한국은 조선 후기였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다소 예스러운 어투를 쓰는 것도 분명 한 가지 선택지가 될 수 있어 보인다.

인물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사이의 대화를 어떤 식으로 번역했는가인데, 오순희는 이 둘 사이의 관계 변화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번역하여 이 점을 의식적으로 반영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번역을 살펴보기에 앞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관계를 짚어 보자면, 오틸리에는 샤를로테의 양녀이고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는 부부간이므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양부와 양녀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에는 이런 사회적 규정을 넘어서는 복잡함이 있다. 우선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는 아직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안 되었고, 둘만의 세계를 가꾸어보자는 에두아르트의 고집에 따라 결혼 직후 친딸 루치아네와 양녀 오틸리에를 모두 기숙학교로 보냈으므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사실상 한집에서 같이 생활한 적도 없다. 더욱이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는 젊은 시절에 세인들이 부러워하는 한 쌍이었으나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살다 둘 다 배우자와 사별한 후에야 결합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시류에 비춰 보아 여자로서는 나이가 많다고 느낀 샤를로테는 에두아르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에 처지가 딱한 오틸리에에게 좋은 배필을 짝지어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녀를 에두아르트에게 슬쩍 선보여 그의 마음을 떠보았던 일도 있는 터라 실상 두 사람은 얼마든지 부부로 맺어질 수도 있었던 사이다. 소설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처음으로 묘사되는 대목에서 에두아르트의 말을 살펴보자.

Ich habe eine Bitte, liebe Ottilie; verzeihen Sie mir die, wenn Sie mir sie auch versagen! Sie machen kein Geheimnis daraus, und es braucht es auch nicht, daß Sie unter Ihrem Gewand, auf Ihrer Brust ein Miniaturbild tragen.(292)
옷티일리에!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는데. 설사 거절하더라도 용서해 주어요. 옷티일리에는 비밀로 하지도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옷 속의 가슴에 세밀화를 걸고 있는데.(이병찬, 165)
오틸리에, 나는 당신께 부탁할 일이 있어요. 거절하거나 화내지 말아줘요. 비밀로 할 것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당신은 옷 밑 가슴 언저리에 메달을 달고 있군요.(홍경호, 253) 
오틸리에, 나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요. 설혹 거절하게 된다해도 용서해줘요! 오틸리에, 그대가 비밀로 하는 것이 아니겠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대의 옷 속 가슴에 메달을 달고 다니더군요.(김황진, 60)
사랑하는 오틸리에,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당신께 이런 청을 좀 하고 싶소. 당신은 옷 속의 가슴께에 조그만 사진을 걸고 다닙니다. 당신은 그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요.(김래현, 71)
사랑하는 오틸리에, 부탁이 하나 있어요. 들어주지 않아도 좋으니 이렇게 부탁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지 마요. 아가씨가 전혀 숨기지 않는 일이고, 또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라서 말인데, 아가씨는 옷 안의 가슴에 작은 그림이 든 펜던트를 목걸이에 달고 다니죠.(오순희, 77)
오틸리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네가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너는 옷 아래의 가슴팍에 작은 초상을 걸고 다니잖아. 넌 그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장희창, 89) [밑줄 강조 필자]

위의 인용문은 1부 7장에서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 샤를로테와 대위, 이 네 사람이 물레방앗간으로 산책을 갈 때 험한 바윗길을 선택해 먼저 도착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자리에 앉자마자 에두아르트가 하는 말이다. 그는 오틸리에가 목에 걸고 있는 금속과 유리 재질의 팬던트가 너무 위험해 보이니 제발 집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녀는 기꺼이 그의 말을 따르며 집에 갈 때까지 그 팬던트를 에두아르트에게 맡긴다. 팬던트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 오틸리에 아버지의 초상이라는 점, 이 대화를 나눈 장소가 물레방앗간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며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의 사이가 급진전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된다. 에두아르트가 오틸리에에게 이 말을 건넬 때만 하더라도 그는 존대한다(siezen). 대부분의 역자가 이 대목에서 에두아르트의 말을 해요체 또는 하오체로 번역하고 있으며 ‘당신’ 또는 ‘그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데에 반해, 장희창은 해체를 쓰며 ‘너’로 번역하고 있다. 또 하나 이채로운 점은 ‘Sie’라는 존칭의 인칭대명사를 다르게 번역한 경우인데, 이병찬은 인칭대명사 대신 이름을 쓰고 있으며, 오순희는 “아가씨”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5] 위에 인용한 구절로 시작하는 에두아르트의 말에 대한 오틸리에의 대답에서도 오순희와 장희창은 다른 역자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

Ich vermag Ihnen nicht besser zu bezeugen, wie sehr ich Ihre freundliche Sorgfalt zu schätzen weiß.(292)
제가 얼마나 친절하신 걱정을 소중히 알고 있는가를 이보다는 더 이상으로는 나타내 드릴 수는 없는 걸요.(이병찬, 165)
친절하신 염려를 제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이것은 무엇보다도 잘 전해주리라 믿습니다.(홍경호, 253)
세심하게 걱정해주시는데 제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를 달리 더 잘 증명해 드릴 수가 없네요.(김황진, 60)
제가 당신의 친절한 배려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이렇게밖에는 보여드릴 수가 없네요.(김래현, 72)
아저씨가 저를 위해 걱정해 주신다는 것을 제가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드리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오순희, 77-78)
제가 선생님의 친절한 배려를 얼마나 고맙게 여기는지 이렇게밖에 보여 드릴 수가 없어요.(장희창, 90) [밑줄 및 기울임 강조 필자]

오틸리에가 아버지나 삼촌뻘 되는 에두아르트에게 스스로를 ‘저’로 칭하는 것은 공통적이나 “Ihre” 같은 존칭의 소유대명사를 어떻게 번역하는지는 역자마다 다르다. 이병찬과 홍경호, 김황진은 “친절하신”, “걱정해주시는데”와 같이 동사를 높이면서 소유대명사는 생략하고 있으며 김래현은 있는 그대로 “당신의”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에 반해, 오순희는 “아저씨가”로, 장희창은 “선생님의”로 번역하고 있다. 오순희가 과거에 미혼의 양반집 딸을 높여 부르는 호칭으로 쓰이기도 했고 현대에도 젊은 여성에 대한 호칭으로 쓰이는 ‘아가씨’와 이를테면 오촌 당숙에 대한 호칭으로 쓰이는 ‘아저씨’를 선택한 것은 두 사람의 대화를 보다 구어체로 들리게 하기 위한 선택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다른 한편으로 ‘아저씨’라는 호칭은 두 사람의 나이 차를 강조하는 효과도 있다. 이렇게 서로 경어체를 쓰다 에두아르트가 오틸리에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하는(duzen) 때는 오틸리에가 며칠간 필사한 계약서를 에두아르트에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아래에서 해당 대목을 살펴보자.

Du liebst mich!”rief er aus, “Ottilie, du liebst mich!”und sie hielten einander umfaßt. Wer das andere zuerst ergriffen, wäre nicht zu unterscheiden gewesen. (324)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소리쳤다. “옷티일리에!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포옹했다. 누가 먼저 상대방을 잡았는지 아무도 구별을 지을 수가 없었으리라.(이병찬, 190)
[...] 외쳤다.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오틸리에,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두 사람은 꼭 껴안았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포옹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홍경호, 286)
“그대는 나를 사랑하고 있군!” 그는 소리쳤다. “오틸리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서로 얼싸 안았다. 누가 먼저 상대방을 붙들었는지 가려낼 수 없었으리라.(김황진, 93)
그가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어!”라고 소리쳤고 “오틸리에,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어!”라는 말과 함께,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다. 누가 먼저 누구를 껴안았는지는 구별하기 어려웠다.(김래현, 109)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가 소리쳤다. “오틸리에,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서로 껴안았다. 누가 먼저 껴안았는지는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오순희, 120)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그가 소리쳤다. “오틸리에,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고는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다. 누가 누구를 먼저 껴안았는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장희창, 139) [밑줄 및 기울임 강조 필자]

위의 인용문에서 “du”를 “너”로 옮기고 있는 역자는 홍경호와 오순희, 장희창 이렇게 세 명이다. 그러나 오틸리에를 대하는 에두아르트의 말투가 처음으로 친근하고 편하게 변한 순간이 바로 이 대목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려면, 그 이전의 어투에는 거리감과 존대가 나타나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대목, 즉 에두아르트가 오틸리에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넬 때와 이 부분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포착하여 반영한 것은 오순희의 번역이다. 홍경호의 경우 위에서 인용한 대목에서는 ‘당신’에서 ‘너’로 확실한 변화를 보여주나 이후 에두아르트가 말하는 어투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지는 못하고 있다. 즉 1부에서는 “너는 내것이야!”(홍경호, 301)라고 하다가, 2부에 가면 “이것은 당신이오!”(홍경호, 425),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홍경호, 445)처럼 다시 “당신”을 쓴다. 장희창의 경우는 처음이나 이 순간이나 똑같이 “너”를 쓰고 있는데 1부에서는 일관되게 ‘너’를 쓴 반면, 2부에 가면 두 사람의 재회 장면에서는 “당신”이라고 불렀다가 여관에서 쓴 편지에서는 “그대”로 부르는 등 ‘당신’과 ‘그대’를 섞어서 쓰고 있다. 반면, 나머지 세 역자는 일관되게 같은 대명사로 지칭하는데 이병찬과 김래현은 “당신”, 김황진은 “그대”로 부른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종합해 볼 때, 상당한 나이 차가 있고 양부와 양녀 관계라 할 수 있는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 전과 후의 말투 변화를 원문에 충실하게 가장 잘 반영한 번역자는 오순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살펴본 부부간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200여 년 전에 비록 나이 차가 있다 해도 서로 연모하는 정인 사이의 대화에서 반말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겠다. 즉 오순희의 번역이 텍스트에 충실하면서 그 현대성을 살리려는 시도라면, 일관되게 ‘그대’를 선택한 김황진의 번역은 텍스트의 시대 배경을 고려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인용문에서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부분은 두 사람이 포옹할 때 “누가 상대를 먼저 붙잡았는지 Wer das andere zuerst ergriffen”라는 대목을 어떻게 번역했는가이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포옹하는 동작은 당연히 “포옹했는지”(홍경호) 또는 “껴안았는지”(김래현, 오순희, 장희창)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1부 4장에서 에두아르트와 대위가 샤를로테에게 선택친화성(친화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물질의 결합을 언급할 때 ‘ergreifen’이라는 동사를 여러 번 쓴다는 사실과 그때 물질의 결합과 분리를 설명하며 “누가 상대를 먼저 떠났는지 wer das andere zuerst verlassen”(276)와 같이 표현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물질과 인간 사이의 유비를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매우 의도적인 단어 선택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와 다른 대목과의 연관성까지 고려할 경우 “ergriffen”을 “잡았는지”(이병찬) 또는 “붙들었는지”(김황진)로, “das andere”를 “상대방”(이병찬, 김황진)으로 번역한 이병찬과 김황진이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역자가 이런 점을 의식하고 이렇게 번역한 것이라면 1부 4장의 해당 대목과 이 대목에서 ‘das andere’를 같은 단어로 번역했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는 않다.

ohne daß man sagen kann, wer das andere zuerst verlassen, wer sich mit dem andern zuerst wieder verbunden habe(276)
어느 것이 먼저 떠나서 딴 것과 다시 결합했는지 말할 수 없게 되지요.(이병찬, 152) 
어느 것다른 것을 먼저 떠났는지 어느 것이 다른 것과 먼저 다시 결합했는지 말할 수 없게 됩니다.(김황진, 42)

두 역자 모두 물질의 결합이 문제가 되는 이 대목에서 괴테가 굳이 ‘wer’라는 인칭대명사를 쓴 것에 크게 주목하지 않고 맥락에 맞춰 “어느 것”으로 번역했으며, ‘das andere’는 “딴 것” 또는 “다른 것”으로 번역했다. 즉 이 두 사람이 앞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포옹 장면을 그렇게 번역한 것은 인간과 물질 사이의 유비를 강조하고자 한 괴테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되도록 의역을 피하고 번역에 정확성을 기하고자 하는 번역자의 성향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5) 장희창 역의 <선택적 친화력>(2023)

장희창의 번역본은 을유문화사의 을유세계문학전집 제127번째 권으로 2023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본이면서 유일하게 작품 제목을 ‘친화력’이 아니라 ‘선택적 친화력’으로 옮기고 있다. ‘Wahlverwandtschafen’은 ‘선택 Wahl’과 ‘친화성 Verwandtschaft’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선택(적) 친화성’이라 번역할 수 있으나 작품 제목의 경우 대개는 ‘친화력’이라는 역어가 이미 굳어졌다고 보고 ‘친화력’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연구논문에서는 ‘Wahl’의 의미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선호친화성’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6] 앞선 모든 번역본들이 관례대로 제목을 ‘친화력’으로 번역한 데에 반해, 장희창은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새로운 역어를 선택하여 원문의 뜻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 번역본에서는 역주를 미주로 처리했는데 이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의 원칙인 것으로 보이며 앞선 두 역자, 김황진이나 오순희에 비해 주석의 수는 줄었다. 장희창은 ‘도덕적 편견 저 너머에서 사랑과 용기를 설파하는 괴테의 실험 소설’이라는 제목의 해설에서 이 작품에 나타난 에로스를 쇼펜하우어, 니체 및 리처드 도킨스와 연관지어 설명하며 이 소설을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리나> 등 소위 19세기 ‘불륜소설’의 계보에서 맨 앞자리에 위치시킨다. 이어서 작품 줄거리와 등장인물, 이 소설의 실험적 성격을 개관한 후 마지막으로 발터 벤야민의 비평 <괴테의 친화력>을 소개하고 있다. 장희창의 역자해설은 이전의 번역자들이 다루지 않은 철학적 주제와 벤야민의 비평을 소개하여 작품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 번역본은 단독으로 읽었을 때 가독성이 높은 편이나 위에서 살펴본 여러 예시들에서 나타난 것처럼 역자가 확고한 번역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입각하여 일관성 있게 번역을 진행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앞선 번역본들에서 일부 오역은 그대로 받아들이고[7] 여러 장점은 충분히 수용하지 못한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3. 평가와 전망

지금까지 괴테의 <친화력> 번역본 총 8종 가운데 6종을 비교 검토하고 그중 다섯 권의 번역본을 분석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휘와 표현이 달라지고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 상대 높임법을 활용하는 방식 또한 변화해 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상대 높임법에서 어떤 종결어미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근 들어 대체로 젠더 평등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부부간의 대화를 번역하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그밖에 번역 결과물에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반복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나 시제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도 고려해 볼 수 있었다. 여덟 가지 번역본이 세상에 나오는 동안 번역 자체뿐만 아니라 역주나 작품 해설 등을 통해서도 <친화력>이라는 작품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왔다. 앞으로 새로 나올 번역본은 앞선 번역본에 지배당하지 않으면서도 선행 번역본들의 장점을 모두 흡수하여 원작에 한 발 더 다가간 ‘작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병찬(1968): 친화력. 휘문출판사.

홍경호(1990): 친화력. 금성출판사.

김황진(1999): 친화력. 충남대학교출판부.

오순희(2011): 친화력.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장희창(2023): 선택적 친화력. 을유문화사.

조성희

바깥 링크

  1. 독일어 원문은 저본을 밝힌 역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Goethe, Johann Wolfgang(1996): Die Wahlverwandtschaften. In: Werke. Bd. 6. Textkritisch durchgesehen von Erich Trunz. Kommentiert von Erich Trunz und Benno von Wiese. München. (HA 6 = Hamburger Ausgabe Bd. 6)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2. 예컨대 소설 도입부에 나오는 정원사의 말 중 한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그 교회의 첨탑(尖塔)너머의 경치가 거진 내다 보이죠.”(이병찬, 123) “자칫하면 눈길이 먼 곳으로 이끌려 교회의 뾰족탑은 못 보기가 일쑤지요.”(홍경호, 199)
  3. 김인철, "괴테 탄생 250주년 기념 페스티벌", <연합뉴스>, 1999년 3월 6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521568?sid=103
  4. 오순희의 번역본 머리말에 “번역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도 이러한 현대성을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낼까 하는 문제였다”(오순희, vi)라는 언급이 나오긴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5. 본문에 인용한 부분 이후의 다른 대목에서도 오순희는 에두아르트가 ‘아가씨’라는 호칭과 ‘당신’이라는 대명사를 같이 쓰는 식으로 번역한다. [“그러니까” 에두아르트가 대답했다. “당신이 세상에서 살아온 만큼 오래됐지. 그래요, 귀여운 아가씨, 당신이 아직 요람에 있을 때 나는 이미 이 나무들을 심었던 것이지.”](오순희, 93)
  6. 안삼환(2009): 괴테의 소설 <선호친화성>에 나타난 서술기법적 특징들. 독일문학 111, 5-26.
  7.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er spielt Blindekuh, er ertappts vielleicht;” (256) “그런 사람은 눈먼 소나 마찬가지랍니다. 그는 더듬거리다 뭔가를 붙잡기도 하지만”(장희창, 30) “그런 사람은 눈먼 소와 같아요. 그런 사람은 더듬다가 뭔가를 붙잡기도 하지요.”(김래현, 27) “그것은 장님 놀이나 마찬가지여서 아마 무엇을 잡기는 할테죠.”(이병찬, 135) “그런 사람은 술래잡기하는 셈인데, 혹시 요행히 붙잡을지도 모르니까.”(김황진, 20) ∥“Wie kann es auch wohl anders sein, da Sie mich guter Hoffnung finden.”(357) “보시다시피 제가 이토록 희망을 품고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리는 없겠죠.”(장희창, 195) “보시다시피 제가 이토록 희망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김래현, 152) “또 어찌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저는 아기를 배고 있으니 말예요.”(이병찬, 219-220) “보시다시피 제 몸에 잉태의 소식이 온 마당에 그러지 않으면 어쩌겠어요?”(오순희, 170)∥“Der junge Wirt, der niemals untätig bleiben konnte”(439) “가만히 있을 줄을 모르는 젊은 주빈(主賓)은”(장희창, 322) “항상 그냥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젊은 주빈은”(김래현, 255) “조금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젊은 주인은”(이병찬, 285) “도무지 일을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던 초대자인 젊은 청년은”(김황진,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