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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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us)
작가토마스 만(Thomas Mann)
초판 발행1947
장르소설


작품소개

토마스 만이 1947년에 망명지 미국에서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주인공 파우스트를 음악가로 만들었다. 음악가 아드리안 레버퀸은 독일적 순수성을 지닌 예술가로서, 그의 생애는 니체의 삶과 비슷하다. 쾰른의 사창가에서 매독에 걸린 후에 많은 생산적 저술을 낸 니체와 마찬가지로, 레버퀸도 라이프치히의 사창가에서 매독에 감염된 후, 마치 악마와 계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미친 듯이 수많은 작품을 쓰는데, 이것은 그의 순수성이 야만성과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의 친구 제레누스 차이트블롬은 이것을 순진한 독일국민이 야만적 히틀러의 유혹에 빠진 것과 끊임없이 대비시킨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내 친구여, 내 조국이여! 그대들의 가련한 영혼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시기를!”이라고 말하며 두 손을 모으는 차이트블롬의 기도에서 ‘친구’와 ‘독일’은 마침내 동일시된다. 토마스 만이 나치로 인한 독일과 독일인의 죄과에 대해 세계인의 용서와 은총을 구한 망명문학 및 전후문학으로 평가된다. 국내 초역은 1984에 김철자가 번역한 <파우스트 박사>이다(학원사).


초판 정보

Mann, Thomas(1947): Doktor Faustus. Das Leben des deutschen Tonsetzers Adrian Leverkühn, erzählt von einem Freunde. Stockholm: Bermann-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上 主友세계문학 89 토마스 만 김철자 1984 學園社 13-335 편역 완역 초판
2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下 主友세계문학 90 토마스 만 김철자 1984 學園社 13-294 편역 완역 초판
3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1 토마스 만 김해생 2007 필맥 5-414 편역 완역
4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2 토마스 만 김해생 2007 필맥 5-381 편역 완역
5 파우스트 박사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토마스 만 윤순식 2009 누멘 95-97 편역 편역
6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1 세계문학전집 244 토마스 만 임홍배; 박병덕 2010 민음사 9-484 편역 완역
7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2 세계문학전집 245 토마스 만 임홍배; 박병덕 2010 민음사 9-507 편역 완역 1951년판부터 삽입된 토마스 만의 '저자의 말' 실림
8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1 대산세계문학총서, 소설 152 토마스 만 김륜옥 2019 문학과지성사 9-482 편역 완역
9 파우스트 박사 파우스트 박사 2 대산세계문학총서, 소설 153 토마스 만 김륜옥 2019 문학과지성사 7-504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토마스 만의 만년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는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작품이다. 음악가의 삶을 다룬 작품이라 음악 전문용어도 많이 나오고, 또한,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독일과 독일인의 죄업을 상징적으로 다룬 작품이기도 해서, 독일의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초역자 김철자(학원사, 1984)를 비롯하여, 김해생(필맥, 2007), 임홍배/박병덕(민음사, 2010), 김륜옥(문학과지성사, 2019) 등 도합 4편이나 출간되었으니,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2. 개별 번역 비평

1) 4종 번역의 특징

이 작품의 초입에 서술자 차이트블롬이 독일 국내에서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정치적 상황과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지금 내 두 아들은 – 한 아들은 민간 부서에서, 다른 아들은 전투 부대에서 – 그들의 총통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 조국의 강력한 권력 행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떨떠름하게 여기는  나의 입장 때문에 내 주위에 그 어떤 공허감이 감돌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적막한 부모 집에 대한 이들 청년의 관계 역시 다만 느슨할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Meine beiden Söhne dienen heute, der eine auf zivilem Posten, der andere in der bewaffneten Macht, ihrem Führer, und wie überhaupt meine befremdete Stellung zu den vaterländischen Gewalten eine gewisse Leere um mich geschaffen hat, so ist auch der Zusammenhang dieser jungen Männer mit dem stillen Elternhaus nur locker zu nennen. [1]

일단, 위 4종 번역판에서 이 대목의 번역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① 김철자 역의 <파우스트 박사>(1984)

지금 나의 두 아들 중 한 아이는 민간 우체국에서, 다른 한 아이는 군대에서 그들의 총통에게 봉사하고 있으며, 조국의 폭력에 대한 나의 소원한 태도 때문에 내 주위에 어떤 허전한 외로움이 휩쌌듯, 적막한 부모집에 대한 이 젊은 아들들의 관계 역시 껍데기만 남아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상권, 26)

김해생 역의 <파우스트 박사>(2007)

내 두 아들은 현재 하나는 사무직 공무원으로, 다른 하나는 군인으로 총통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내가 조국이 휘두르는 권력을 못마땅하게 여기다 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졌듯이 젊은 두 아들과 한적한 부모 사이의 관계 또한 느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1권, 19)

임홍배/박병덕 역의 <파우스트 박사>(2010)

지금 두 아들 가운데 하나는 민간 우체국에서, 다른 하나는 군대에서 그들의 총통에게 봉사하고 있다. 조국의 폭력에 대한 나의 서먹서먹한 태도 때문에 내 주위에 어떤 공허감이 감돌았듯이, 이 젊은 아들들 역시 적막한 부모 집과 그저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1권, 23)

김륜옥 역의 <파우스트 박사>(2019)

나의 두 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인데, 한 아들은 민간 부서에서, 다른 아들은 무장한 군대에서 그들이 따르는 총통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그리고 조국의 권력 집단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 내 입장이 전반적으로 내 주변에 모종의 적막함을 초래했듯이, 이 젊은 사내들이 적막한 부모의 집과 맺고 있는 관계 역시 그저 느슨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1권, 23-24)

서술의 편의상, 역서의 출간 순서에 따라 김철자의 역서를 ①로, 김해생의 역서를 ②로, 임홍배/박병덕의 역서를 ③으로, 김륜옥의 역서를 ④로 약기(略記)해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위에서 ‘민간 부서’를 ①과 ③에서 둘 다 ‘민간 우체국’으로 오역한 것만 보더라도 ①과 ③의 근친관계가 눈에 띈다. 이 현상은 ①과 ③의 다른 많은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②에서 ‘민간 부서’를 ‘사무직 공무원’으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거니와, ‘총통’ 앞에 ‘그들의’를 생략한 것은 원문의 컨텍스트를 놓친 번역이다. 토마스 만의 원문에서는 차이트블롬의 두 아들이 ‘그들의’ 총통을 위해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은근히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④에서는 “그들이 따르는” 총통이라고 약간 지나치게 강조된 번역까지 나오는 것이다.

또한, ②에서 차이트블롬 “주변에 사람이 없어졌”다는 번역은 너무 지나친 의역이다. “내 주변에 모종의 적막함”을 초래했다는 ④의 번역이 원문에도 더 가깝고 차이트블롬의 처신이나 어투에도 더 맞는 표현이라 하겠다.

2) 4종 번역의 비교 고찰

위의 예에서 보건대, 그리고 여기서 일일이 매거할 수 없는 다른 많은 대목을 근거로, 필자는 ③이 초역인 ①을 많이 개선한 번역으로 보았으며, ④가 ①과 ③을 참고하되, 보다 전문적인 지식과 안목을 갖고 종합적으로 새로이 번역한 작품으로 보았다. ②는 ①을 참고하지 않은 듯하며, 오역이 너무 잦다. 예컨대, 제6장에서 차이트블롬이 카이저스아셰른과 현대 독일의 ‘민중(Volk)’에 대해 성찰하는 대목에서 ‘민중’을 ‘국민’(1권, 60)으로 오역함으로써 중세의 ‘마녀사냥’에 관한 ‘상호텍스트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차이트블롬과 힌터푀르트너 학장 사이의 ‘한잔 저녁 술자리(Abendschoppen)’가 ‘저녁 쇼핑’(1권, 277)으로 옮겨져 있는 것은 실소를 자아내는 오역이다. 대체 이 번역 작업을 할 때 역자의 정신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차이트블롬과 힌터푀르트너 학장이 저녁에 대체 무슨 쇼핑을 함께 한단 말인가!

4종의 작품을 서로 비교, 논의한다는 것은 난삽한 작업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필자는 이제부터는 ③과 ④를 주로 비교해 가면서 그 장점과 단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드리안 레버퀸이 악마를 만났다는 고백의 첫머리에 “Weistu was, so schweig.”란 말이 나온다. 이것을 ③에서는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옮긴 다음, “중세본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로, 위험한 비밀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뜻.”(1권, 431)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④에서는 “절대 침묵하라.”라고 옮긴 다음, “『파우스트』 중세 민중본에 나오는 말로 위험한 비밀의 발설을 금하는 말.”(1권, 427)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하지만, 꼭 이렇게 번역해야만 할까? 이것은 실은 “Weisst du was, so schweig!”라는 문장의 옛 줄임말이며, 현대 독어로 풀이해서 쓰자면, “Wenn du auch etwas weisst, so schweig!”로서, “네가 무엇을 알더라도 침묵하라!”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된다”라는 ③의 번역과 “절대 침묵하라!”라는 ④의 번역, 그리고 “입을 다물자!”라는 ②의 번역이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문(呪文) 비슷한 문장을 그 내용만 옮긴 것이 된다. 이 점에서는 차라리 초역인 ①의 번역, 즉 “무언인지 알지, 그러면 입을 다물어야 해.”(상권, 275)가 더 낫다. 물론, “무엇인지 알지”는 “무엇인가 안다면”으로 고치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또한, ③의 각주에서의 “중세본 『파우스트』”나 ④의 각주에서의 “『파우스트』 중세 민중본”은 “1587년의 민중본 『파우스트』”로 쓰는 것이 정확하다. 파우스트가 중세 말기의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민중본 <파우스트>는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인 1587년에 나온 민중 보급판이니 말이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라는 작품은 그 마지막 대목의 번역이 참으로 어렵고, 그 대목의 번역을 살펴보는 것이 번역 작품의 수준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일단 그 대목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 당시 독일은 일찍이 자신의 피로써 서명했으므로 그 내용을 지키고자 했던 한 계약서의 힘으로 바야흐로 온 세계를 정복할 듯이 열에 들떠 두 뺨에 홍조를 띤 채 오만방자한 연전연승의 고지 위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지금 독일은 악귀들에 의해 몸이 휘감긴 채 한쪽 눈은 손으로 가리고 다른 눈으로는 공포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절망에서 절망으로 추락하고 있다. 독일이 언제 이 심연의 밑바닥에 다다를까? 최후의 희망조차 사라진 상태로부터 언제 믿음을 초월하는 어떤 기적이, 희망의 빛이 희미하게나마 비칠까? 한 외로운 남자가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한다 – 내 친구여, 내 조국이여, 그대들의 불쌍한 영혼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기를! 
Deutschland, die Wangen hektisch gerötet, taumelte dazumal auf der Höhe wüster Triumphe, im Begriffe, die Welt zu gewinnen kraft des einen Vertrages, den es zu halten gesonnen war, und den es mit seinem Blute gezeichnet hatte. Heute stürzt es, von Dämonen umschlungen, über einem Auge die Hand und mit dem andern ins Grauen starrend, hinab von Verzweiflung zu Verzweiflung. Wann wird es des Schlundes Grund erreichen? Wann wir aus letzter Hoffnungslosigkeit, ein Wunder, das über den Glauben geht, das Licht der Hoffnung tagen? Ein einsamer Mann faltet seine Hände und spricht: Gott sei euerer armen Seele gnädig, mein Freund, mein Vaterland.(676)

우선, 이 대목이 ③에서는 어떻게 옮겨졌는지 살펴보자.

그 무렵 독일은 일찍이 피로써 서약한 조약을 등에 업고 세계를 손에 넣을 작정으로 오만방자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지금 독일은 악귀들에게 칭칭 감긴 채 한쪽 눈은 손으로 가리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소름 끼치는 광경을 응시하면서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과연 언제나 이 심연의 밑바닥에 다다를 것인가? 과연 언제나 이 극한의 절망에서부터 믿음을 초월한 기적, 즉 희망의 빛이 떠오를 수 있을 것인가? 어느 고독한 인간이 두 손 모아 이렇게 빈다. 내 친구, 내 조국, 이들의 불쌍한 영혼에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를!(2권, 504-505)

③에서 ‘Vertrag’를 ‘계약’ 또는 ‘계약서’로 옮기지 않고 ‘조약’으로 옮긴 까닭은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 직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일견, 수긍이 가는 듯한 번역이지만, 원래 작가 토마스 만이 생각한 ‘Vertrag’는 예술가 아드리안 레버퀸이 피로써 악마와 맺은 계약을 독일 또는 독일인이 독재자 히틀러와 맺은 계약과 병행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그것은 아래에서 차이트블롬이 ‘내 친구’와 ‘내 조국’을 동격으로 병치시키면서 둘에게 다 하느님의 ‘은총(Gnade)’을 구하고 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악마와의 계약’을 소련과의 ‘조약’으로 옮긴 것은 지나치게 시사적인 해석이 되며, 독소조약이 독일의 ‘악마와의 계약’을 대신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그래서, ‘조약’은 ①보다 더 깊이 생각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①의 개악이 되고 말았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듯하지만, 전체 작품의 해석 문제로 보자면, ‘선(善)한 독일’이 ‘악마 히틀러’와 “피로써” 맺은 ‘계약’이지 독소 ‘조약’이 될 수 없다.

그럼, ④를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에 독일은 오만방자하게 밀어붙인 끝에 얻은 대승리에 취해 두 뺨을 흥분으로 붉게 물들인 채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들떠 있었다. 일찍이 자신의 피로써 서명했던 계약서 하나의 힘을 빌려 그 내용을 지키며 세계를 얻어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독일은 무너지고 있다. 악령들에게 잡힌 채, 한쪽 눈 위에는 손을 얹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무서운 사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절망에서 절망으로 빠져들고 있다. 언제 이 나라가 그 절망의 심연에서 끝에 도달하게 될 것인가? 언제 마지막 절망의 상태에서 믿음을 초월한 기적이 희망의 빛을 열어주게 될 것인가? 외로운 한 남자는 손을 포개고 말한다. 신께서 부디 너희 불쌍한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나의 친구여, 나의 조국이여.(2권, 503)      

위에서 이제는 독일이 “한쪽 눈 위에는 손을 얹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무서운 사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절망에서 절망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옮기고 있는데, “무서운 사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가 아니라 “무서운 심연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추락한다(hinabstürzen)’로 옮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언제 마지막 절망의 상태에서 믿음을 초월한 기적이 희망의 빛을 열어주게 될 것인가?”라는 번역은 - ‘tagen(해 따위가 뜨다, 밝아오다)’이 자동사이므로, 그리고 부정관사(ein Wunder) 다음에 정관사(das Licht)가 왔으므로 - “믿음을 초월한 기적”과 “희망의 빛”이 동어반복이다. 즉, “믿음을 초월한 기적, 즉 희망의 빛이 비칠 것인가?”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


3. 평가와 전망

위에서 이 작품의 마지막 대목과 ③과 ④의 번역을 기왕에 예시해 놓은 김에 한 가지 더 덧붙여 말하자면, 차이트블롬이 마지막에 기도하는 말, 즉 “Gott sei euerer armen Seele gnädig, mein Freund, mein Vaterland.”를 ①, ②, ③, ④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 또는 ‘긍휼히 여기심’을 구하는 것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 기도는 “극한의 절망으로부터 믿음을 초월한 기적”을 염원하는 것이므로 ‘자비(Barmherzigkeit)’보다는 ‘은총(Gnade)’을 구하는 것으로 옮겨야 한다. 이 소설 안에서 여러 번 ‘은총의 모티프(Gnadenmotiv)’가 나오고 원문에도 명백하게 ‘Gnade’의 형용사인 ‘gnädig’가 나와 있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에서 갑자기 ‘은총’을 ‘자비’로 옮긴다는 것은 제법 큰 부주의의 소산이라 하겠다.

③과 ④를 전반적으로 비교해 보자면, ③은 우리말이 유려한 장점이 돋보이고, ④는 작가 토마스 만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번역에 많이 적용한 경우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④는 번역이 때로는 지나치게 친절하여 과잉 해석의 위험성을 낳기도 한다. 예컨대, “나의 두 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인데, 한 아들은 민간 부서에서, 다른 아들은 무장한 군대에서 그들이 따르는 총통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라는 위의 번역에서, “그들의 총통”으로 족할 것인데, “그들이 따르는 총통”이라고 옮김으로써 차이트블롬의 두 아들이 ‘총통을 추종한다’는 사실을 더욱 명백히 설명하고 있는데, 원문을 잘 살펴보자면, 차이트블롬은 아들들의 추종 사실을 그저 짐작만 할 뿐, 그 추종의 적극성 여부는 아직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또한, 차이트블롬의 두 아들이 ‘군복무’ 중이라는 것도 원문의 의미를 친절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민간 부서에서” 총통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그 당시 독일에서는 ‘군복무’의 일종으로 대체되는 ‘복무’였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그저 ‘복무(服務)’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한마디 덧붙인다면, 1947년에 나온 망명객 토마스 만의 난해한 예술가소설 겸 ‘독일 소설’(독일과 독일인의 정치적 과오와 그 원인을 해명하고 세계인들의 용서와 하느님의 은총을 빈 소설)이 우리말로 벌써 4번째나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한국독문학계의 큰 성과이다. 여기에는 초역자인 고 김철자 교수의 공적을 높이 사야 할 것이고, ③의 번역자인 임홍배/박병덕 교수와 ④의 번역자인 김륜옥 교수도 동학들과 독자들의 감사와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앞으로 ③과 ④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보다 훌륭한 번역이 새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런 대작 및 문제작의 번역을 제대로 잘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자신감(예: ②는 ①을 존중·참고하지 않았음이 도처에서 확인된다!)은 금물이고 반드시 앞선 업적들을 곰곰이 참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김철자(1984): 파우스트 박사. 학원사. 김해생(2007): 파우스트 박사. 필맥. 임홍배/박병덕(2010): 파우스트 박사. 민음사. 김륜옥(2019): 파우스트 박사. 문학과지성사.

안삼환
  • 각주
  1. Thomas Mann(1960): Doktor Faustus. Das Leben des deutschen Tonsetzers Adrian Leverkühn erzählt von einem Freunde. In: Gesammelte Werke in dreizehn Bänden. Vol. VI. Frankfurt a. M.: S. Fischer, 18-19. 이하에서는 본문에 쪽수만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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