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평생 (Hälfte des Leb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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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의 시

반평생 (Hälfte des Lebens)
작가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초판 발행1804
장르


작품소개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이다. 1804년 8월 말에 <Taschenbuch für das Jahr 1805>에 처음 발표되었다. 횔덜린은 1803년 말에 출판업자 빌만스(F. Wilmans)에게 자신이 “밤의 노래”로 칭했던 9편의 시를 보내는데, 그 가운데 이 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는 2연으로 구성되고 각 연은 7개의 행과 각각 42개 음절과 41개 음절로 되어있다. 1연은 한여름의 풍요로운 풍경을 그리고, 2연은 곧 겨울이 올 것을 비통해 마지않는 내용으로 대조를 이룬다. 첫 반평생의 아름다움과 낙관성을 표현한 1연에는 형용사들이 더 많이 투입되어 삶의 충만함을 그린다. 나아가 노란 (배들)과 야생의 (장미들), 숭고한, 사랑스러운, 맑은 정신의 성스러운heilignuechtern 같은 형용사들은 감각의 강화를 요구하며 종교적 성스러움까지 풍긴다. 아마도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는 삶의 첫 반평생을 노래한 1연에서 “노란 배들”은 성숙함을, 흰 백조와 성스런 분별의 물은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맑은 정신의 성스러운heilignuechtern의 경우, 2개의 대립되는 개념을 하나로 묶어 이성과 감정의 공존을 드러내고 있다. 전반적으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생명력과 역동성이 강조되고 있다. 1연과 2연은 “Weh mir”라는 시적 화자의 비통한 감정표현을 통해 연결된다. Weh, wo, wenn, Winter 등 “W” 단어들로 반복되는 질문은 삶과 따스함, 색채의 결핍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서술이다. 2연을 각인하는 “땅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풍경은 겨울이라는 다가올 시간, 미래에 대한 시각을 암시한다. 시적 자아는 비록 아직 가득 찬 생명력 속에 있으나 이 두 번째 반평생의 등장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불안감을 드러낸다. “말없이 차갑게 서 있는 담”, “달그락거리는 깃발”은 자연 자체가 물리적 법칙에 던져져 있듯 겨울로 가는 이 과정을 멈출 수 없다. 1연의 생동감과 낙관주의는 2연의 서글픈 생각들과 대립된다. 두 연은 청춘과 나이먹음라는 대립뿐 아니라 따스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두움의 대립도 표현하고 있다. 국내 초역은 1980년 황윤석에 의해 이루어졌다(탐구당).


초판 정보

Hölderlin, Friedrich(1804): Hälfte des Lebens. In: Taschenbuch für das Jahr 1805. Frankfurt a. M.: Friedrich Wilmans, 85.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빵과 포도주-하인체에게 인간의 갈채 외 횔덜린 김정환 160-172 편역 완역
2 빵과 포도주 궁핍한 시대의 노래 혜원세계시인선 ; 25 25 횔덜린 장영태 1990 혜원출판사 242-263 완역 완역 비가
3 빵과 포도주 빵과 포도주 세계시인선 52 프리드리히 횔덜린 박설호 1997 민음사 26-53 편역 완역
4 빵과 포도주 횔덜린 시선(詩選), 머무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짓는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장영태 2008 유로서적 298-319 편역 완역 『궁핍한 시대의 노래』 장영태(1990)의 증보판
5 빵과 포도주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프리드리히 횔덜린 장영태 2012 유로서적 318-333 완역 완역 5. 신들과 안티케
6 빵과 포도주-하인제에게 바침 횔덜린 시 전집 2 프리드리히 횔덜린 장영태 2017 책세상 132-142 완역 완역 Ⅵ. 1800-1805 슈바벤, 남프랑스, 뉘르팅겐, 두 번째 홈부르크 체재기
7 빵과 포도주 독일시집 J.Ch.F. 횔덜린 송용구 2019 자음과모음 77-106 편역 완역 제3부 長詩 <빵과 포도주> -하인제 Wilhelm Heinse에게, 제1편 '놀라움을 일깨우는 밤', 제2편 '성스러운 기억', 제3편 '신성(神性)의 불꽃', 제4편 '축복의 요람 그리스', 제5편 '꽃처럼 피어나야 할 말들', 제6편 '인간의 형상을 입고 스스로 강림한 그분', 제7편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제8편 '약속의 증표', 제9편 '횃불을 흔드는 자'


1. 번역 현황 및 개관

<반평생>은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후기 시작품에 속하며, 가장 많이 주목받아온 시 중의 하나다. 이 시는 횔덜린이 1803년 말에 출판업자 빌만스(F. Wilmans)에게 <밤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보낸 9편의 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들은 1804년 8월 말 <Taschenbuch für das Jahr 1805>에 처음 발표되었다.

한국에서 횔덜린과 그의 작품은 1980년대부터 번역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 탐구당 시리즈로 황윤석이 편역한 독일시선집 <獨逸古典主義詩>에 <반평생>이 처음 소개되었다. 이 시선집의 재판이 1981년에, 3판은 1985년 탐구당에서 계속 발간되었다.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며 뜸하던 횔덜린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번역들로 활기를 찾는다. <반평생>은 1990년에 장영태가 혜원출판사에서 출간한 횔덜린의 번역시집 <궁핍한 시대의 노래>에 수록되었다. 이어 1996년 염승섭이 단행본으로 출간한 횔덜린 연구서 <횔덜린. 삶과 문학>에도 번역, 소개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 박설호가 민음사에서 출간한 횔덜린 번역시집 <빵과 포도주>에 또 한 차례 새로 번역되어 실렸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이 시는 몇 차례 새로 번역되거나 반복 출간된다. 독일문학 연구자이자 시인인 송용구가 2004년 횔덜린의 번역시와 해설을 엮어 출간한 <히페리온의 노래: 횔덜린의 자유와 사랑의 시>에 <반평생>이 번역되어 실렸다. 그리고 <반평생>이 수록된 장영태의 번역시집들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여러 출판사에서 이름을 바꾸어 출간되었다. 먼저 2008년 유로서적에서 장영태의 <횔덜린 시선(詩選), 머무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짓는다>, 그리고 장영태가 이미 1990년에 발표했던 번역시집 <궁핍한 시대의 노래>를 보완하여 2012년에 유로서적에서 낸 증보판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또 2017년 출판사 책세상에서 발간된 장영태의 <횔덜린 시 전집 2>에 이 시는 거듭 수록되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2019년 김정환이 편역하고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출간한 <독일시집>에 이 시가 새로 번역되어 실렸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 <반평생>은 총 11번에 걸쳐 횔덜린 시선집과 연구서에서 거의 빠짐없이 소개됐음을 볼 수 있다. 이 중 여러 차례 반복 출간된 황윤석 및 장영태의 번역시집을 제하고 보면, 총 6편의 개별 번역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시기별로 구분하면 1980년대 1편, 1990년대 3편, 2000년대 이후 3편의 새로운 번역본이 선을 보였다.

이제 개별 번역본을 살펴보기에 앞서 횔덜린의 시 <반평생>의 특징과 번역에서 쟁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하자. 자율 운으로 쓰인 이 시는 두 개의 연으로 구성되며, 각 연은 7개의 행과 42개 음절 및 41개 음절로 이루어져 대칭을 이루고 있다. 내용상으로도 첫 연은 여름의 풍요로운 풍경을 그리는 한편, 둘째 연은 앞으로 닥칠 겨울에 대한 걱정과 탄식을 표현함으로써 두 개의 다른 반평생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 반평생의 아름다움과 낙관성을 노래한 1연에는 생동하는 자연묘사에 비례하여 형용사가 많이 등장한다. 노란 (배들)과 야생의 (장미들), 사랑스러운 (백조들), 취한, 성스러이 말짱한 heilignüchtern (물)과 같은 형용사들은 삶의 충만과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꽃이 만발하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역동성은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는 삶의 첫 반평생과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이와 달리 “Weh mir 슬프도다”로 시작되는 제2연은 weh, wo, wenn, Wind, Winter처럼 일련의 “W” 어휘들이 다가올 겨울 앞에서 시적 자아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감을 강조한다. 이 삶의 겨울은 생성과 몰락의 순리를 따르는 자연처럼 피할 수 없는 불가피성으로 인지된다. 그런데 자연은 여름과 겨울의 순환을 반복하지만, 인간의 생애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적 자아에게 나머지 반평생은 오로지 하락과 차가운 겨울의 지속상태로 상상될 뿐이다. 이 때문에 두 연의 상황은 대비될 뿐 아니라 나아가 단절되어 있다. “말없이 차갑게 서 있는 담”과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풍향계”가 이를 암시한다. 두 연은 청춘과 노화의 대립뿐 아니라 따스함과 차가움, 밝음과 어두움의 대립을 통해서도 구분된다.

횔덜린의 <반평생>은 2개 연의 대칭구조 속에 두 개의 다른 반평생을 그리지만, 언어표현에서는 모두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행동과 줄거리를 서사적 과거로 표현하는 소설과 달린 시적 자아의 감정과 인상을 표현하는 장르인 서정시가 일반적으로 현재시제를 본 시제로 삼기 때문이다. 현재시제는 서정시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이라고 하겠다.(Langer, 260) 그러니까 이 시의 현재형은 문법적 시제가 아니라 시적 자아의 시간 의식과 미의식이 결합된 수사학적 형식인 것이다.(김준오, 123) 시적 자아의 주관적 시간 의식으로서 현재시제는 실제로 다양한 시간적 차원을 지시할 수 있으며, 열린 시제로서 독자와 역자에게 창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삶의 시간을 주제로 삼은 <반평생>은 상반된 두 개의 반평생을 여름과 겨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이미지에 따라 좀 더 세분화하여 첫 번째 이미지(땅/호수), 두 번째 이미지(백조와 호수), 세 번째 탄식, 네 번째 이미지(벽과 풍향계)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시적 자아의 발화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각 이미지를 품은 시행들은 더 여러 층위의 시간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 번역비평은 현재시제의 해석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3개의 번역본을 선별하였다. 여기엔 최초의 번역본이기도 한 황윤석의 <반평생>, 송용구의 <반평생>, 김정환의 <생의 중간>이 속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 황윤석 역의 <반평생>(1980)

황윤석은 시선집 <獨逸古典主義詩>에서 ‘고대 희랍의 완전성과 총체성을 모범으로 삼은’ 독일 고전주의 두 대표 시인 괴테와 쉴러, 그리고 고전주의적 성향과 동시에 낭만주의적 무한에의 동경을 통합하여 문학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한 횔덜린의 주요 시들을 편역해 엮었다. 역자는 “희랍정신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괴테, 쉴러, 횔덜린의 생애와 문학적 특징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특히 “휄덜린에 이르면 희랍정신의 재발견은 종교적인 것에 이를 만큼 심화된 의미를 얻게 된다”(황윤석, 8)고 강조한다. 역자는 이 시집에 선별된 시들의 출처를 모두 밝히고 있다. 시집의 본문은 한쪽엔 번역, 다른 한쪽엔 원문으로 편성하여 독자가 이들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하였다.

황윤석은 “Hälfte des Lebens”를 <반평생>으로 옮기고, 각주를 붙여 시의 형성 배경과 구성상의 특징을 부가 설명하였다. 그는 “이미 반평생을 살고 난 시절에서 詩人은 자신의 나머지 인생이 >겨울<과 같은 인생이 될 것임을 예감한 듯싶다”라고 하며 이 시의 자전적 맥락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1800년 횔덜린이 누이에게 보낸 편지를 부분 인용하여 첨가했다. 이제 번역 전문을 읽고 황윤석 번역의 특징을 살펴보자.

Hälfte des Lebens 반평생*
Mit gelben Birnen hänget

Und voll mit wilden Rosen Das Land in den See, Ihr holden Schwäne,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Ins heilignüchterne Wasser.

누렇게 익은 배 더불어

야생의 장미 가득히 안은 뭍이 호수 속으로 드리워져 있구나, 그대들 사랑스런 백조들이여 하며 그대들은 키스에 취해 머리를 담구는구나, 맑은 정신의 성스러운 물 속으로.

Weh mir, wo nehm’ ich, wenn

Es Winter ist, die Blumen, und wo Den Sonnenschein, Und Schatten der Erde? Die Mauern stehn Sprachlos und kalt, im Winde Klirren die Fahnen.

오호라, 겨울이 되면, 내 어디서

꽃을 얻을꼬, 하며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늘을 얻을꼬? 담벼락은 말을 잃은 채 차갑게 서 있고, 바람 맞은 풍향계만 덜거덕거리는구나.(밑줄 필자 강조)

황윤석의 번역은 자유율로 이루어진 원문과 달리, “누렇게 익은”, “가득히 안은”/ “호수 속으로”, “물 속으로”/ “어디서”, “어디서”/ “얻을꼬”, “얻을꼬”/ “있구나”, “담구는구나”, “덜거덕거리는구나”와 같이 각운을 맞추려고 애쓴 점이 눈에 띈다. 특히 1연의 “있구나, 담구는구나”가 2연 종결어인 “덜거덕거리는구나”와 연결되면서 운율은 대조적인 두 연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시에 형식적 통일성을 부여하며 전체를 하나로 묶어준다. 특히 1연에선 ‘호수 속으로 드리우는 뭍’에 ‘물 속으로 머리를 담그는 백조들’을 병행시켜 지상의 감각적 세계와 물의 정신적 세계의 조화로운 합일을 운율적으로 잘 그려내었다. 이때 역자는 흐드러진 지상의 풍요 및 키스로 도취된 백조의 디오니소스적 상태와 대비하여 호수의 물에 사용된 조어 heilignüchtern을 “맑은 정신의 성스러운”으로 옮겨 그 아폴론적 특성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역자는 시해설에서 밝혔듯이 이 시의 자전적 성격을 강조하여 시적 자아가 느끼는 주관적 삶의 감정을 드러내는 번역전략을 여러모로 사용하고 있다. 역자는 시적 자아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는 “그대들 사랑스런 백조들이여”, “오호라 [...] 내 어디서 [...] 얻을꼬?”와 같은 시행 외에도, 1연의 도입부 “Mit gelben Birnen hänget”, 2연의 “im Winde klirren die Fahnen” 같이 비교적 객관적인 풍경묘사에서도 조사 “...구나”를 덧붙여 시적 자아의 시각과 감정이입을 부각시킨다.

특히 1행의 경우 “hänget [...] das Land in den See”의 동사를 “있구나”로 옮긴 것은 “hänget”처럼 “e”를 삽입하여 시적 뉘앙스를 살린 원문 동사에 더욱 부응할 뿐 아니라 원문의 문법적 표현이 지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적 자아의 주관적 감정과 인상을 강조하는 “있구나”는 이 문장의 문법적 특징에 대한 역자의 이해와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das Land hängt in den See’라는 문법적 표현은 매우 드문 것으로, 시적 자아의 시선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시구에서 “hänget”는 분명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로 사용되었지만, 이를 받는 전치사 “in”은 정지상태를 드러내는 3격 목적어가 아니라, 움직임의 방향을 표시하는 4격 목적어 “in den See”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hänget über dem See 뭍이 호수 위에 드리워져 있는’ 장면의 공간적 연결과는 분명 다른 성격의 것이다. “뭍”은 “호수”와 대립되는 이미지이긴 하지만, 바로 “hänget das Land in den See”를 통해 두 이미지는 서로 연결된다. [1]이 문장은 마치 뭍이 호수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느끼는, 혹은 그렇게 보는 시적 화자의 감각과 시선’을 전제해야 이해 가능한 문장인 것이다. 황윤석은 “뭍이 호수 속으로 드리워져 있구나”로 옮김으로써 원문의 문법적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즉 장면 자체보다는 그 장면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시선을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구나” 외에도 시적 자아의 심정을 직접 표현하는 “하며”, “오호라”, “얻을꼬?” 같은 조사와 감탄사들을 곳곳에 장치하여 시 전반에 걸쳐있는 주관적 정조를 보다 호소력 있게 전달한 것은 이 번역의 특징에 속한다. “오호라”로 시작되는 2연은 이 합일의 풍경 한가운데로 엄습하는 상실의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역자는 원문에서 Weh- wo – wenn의 W 어휘로 구성된 1행을 의미론적으로 뒤집어 2행에 나오는 “겨울”을 1행으로 끌어올렸다. “오호라, 이제 겨울이 되면”에서 상실의 겨울은 1연의 풍요로운 여름과 직접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러니까 여기서 시적 자아는 1연의 합일의 시간에, 풍요로운 여름의 한 가운데서 그 현실의 아름다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삭막한 겨울을, 또 다른 반평생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때 탄식하는 시적 자아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첫 반평생과 앞으로 올 두 번째 반평생의 중간 지점에 있다기보다는 여전히 1연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자이며, 그 풍요 속에서 다가올 몰락의 겨울을 예감하고 불안해진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인상은 1연에 사용된 시제가 모두 “드리워져 있구나,” “머리를 적시는구나” 같이 현재진행형으로 옮겨져 있기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2연의 마지막 행에 나오는 “담벼락은 말을 잃은 채, 차갑게 서 있고, 바람 맞은, 풍향계만 덜거덕거리는구나”가 앞서 나온 미래에 관한 탄식의 연장선에서 미래의 풍경을 가리킨다는 단서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이 장면은 시적 자아의 탄식과 ‘논리적으로’ 이어지며, 앞서 제시된 화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내 어디서 ....얻을꼬?”라는 실의에 찬 시적 자아의 질문에 대하여 “담벼락은 말을 잃은 채 차갑게 서 있고, 바람 맞은 풍향계만 덜거덕거리는구나”가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시행은 미래의 풍경이 아니라 미래의 불안에 아무런 응답도 주어지지 않는 상태를 표현한다.


2) 송용구 역의 <반평생>(2004)

시인이자 독일문학 연구자인 송용구는 횔덜린의 대표 시를 중심으로 그의 시 세계를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여 엮은 <히페리온의 노래>를 2004년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하였다. “횔덜린의 자유와 사랑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집은 3개의 표제어로 –독일인의 노래, 사랑, 장시 <빵과 포도주>- 장을 구분하여 시인의 대표 시들을 실었고, 제4부는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해제를 담았다. 여기에 작가 연보까지 덧붙여 횔덜린 시에 대한 수월한 접근을 목표로 했다.

<반평생>은 이 중 “사랑”을 표제어로 삼은 제2부에 수록되어 있다. 송용구는 이 시의 형성 배경으로 특히 횔덜린의 시적 뮤즈이자 그의 절대적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던 ‘디오티마’의 죽음이 끼친 영향을 강조한다. 1803년 33세의 나이에 고향에서 디오티마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진공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현실과 이상의 간극은 그의 의식 세계 속에서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송용구 2004, 74). 횔덜린의 삶에 가해진 결정적인 타격이라고 할 수 있는 디오티마의 죽음은 그를 “신, 자연, 인간이 ‘성스러운 도취’ 속에서 혼연일체가 되는 절대미의 세계”(송용구 2004, 74)로부터 영구히 떼어놓았으며, 살아온 반평생의 길을 돌아보던 시인의 귓가에는 풍향계의 녹슨 쇳소리만이 울려댄다고 해석한다.

노오란 배들 영글어 있고

야생의 장미꽃들 만발한 땅이 호수 속에 깃든다. 그대들 사랑스런 백조들이여 서로의 입맞춤에 취해 맑게 깨어 있는 거룩한 물 속에 머리를 적시는가.

아, 겨울이 오면 나는 어디에서

꽃을 얻어야 하나? 또 어디에서 태양의 빛살과 대지의 그림자를 가져야 하나? 싸늘히 식은 성벽 말없이 서 있고, 바람에 부딪혀 풍향계만 녹슨 소리 울려댄다.

송용구의 작품해석처럼 그의 번역 <반평생>에 서술된 삶은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으로 구분되며, 시적 자아는 두 개의 성격이 판이한 반평생의 접점에 서 있는 자로 상정된다. 그런데 이 접점은 연결이 아니라 단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1연의 내용이 비록 “깃든다”라고 현재시제를 견지한다고 할지라도 그 실제 시점은 지나간 반평생에 대한 회고에 해당한다. 또한 백조들이 머리를 물에 담그는 장면을 옮긴 “적시는가”는 중립적인 서술 차원을 넘어 남다른 애수의 여운을 남기는 수사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물음을 간직한 종결어미인 “...는가”에는 시적 자아의 감정이입이 반영되어 있으며, 회상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이 회상과 의미상으로 직접 연결되는 부분은 그다음에 나오는 탄식의 시행이 아니라 2연의 마지막 시행이다. 여기서 성벽을 꾸미는 형용사 kalt는 차후 맞을 겨울의 추위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는 “싸늘히 식은 성벽”으로 번역되어 한때 여름의 태양빛을 받아 따뜻했던 기억을 전제로 한다. 풍향계의 동사 klirren은 “녹슨 소리”로 번역되어 역시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기억을 전제로 한다. 이 빛바랜 퇴색의 풍경은 조화로웠던 과거에 대한 회고와 대비를 이루며 1연의 회상적 성격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낸다. 즉 역자는 ‘식은 성벽’과 ‘녹슨 쇠소리’로 사물의 퇴색을 강조하며, 이로써 이 사물들의 시간을 현재시제로 끌어온다. 이렇게 보자면 송용구의 번역에서 시적 자아의 발화시점은 1연의 과거에 대한 회상과 2연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예감 사이에 위치하며, 그것은 퇴색의 풍경이 상징하고 있는 ‘현재’라고 하겠다.

송용구 번역은 이 밖에도 1연에 나오는 조어 “heilignüchtern”의 번역에서도 황윤석의 그것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heilignüchtern”은 산정호수의 물이 지닌 차갑고도 명징한 성격을 표현하는 형용사로서, 신성과 명징한 정신성을 혼합한 어휘다. 입맞춤으로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에 빠져 있는 백조들이 이 물속에 머리를 담금으로써 아폴론적인 것과 조화롭게 합일된다는 의미에서 황윤석이 “맑은 정신의 성스러운 물”로 옮겼다면 물과 맑은 정신성은 동일하며 서로 교환 가능한 개념들이다. 이때 물은 도취에서 깨어나게 하는 힘과 동일하다. 그에 반해 송용구의 “맑게 깨어 있는 거룩한 물”에서는 ‘깨어 있음’이 물의 한 특성으로 옮겨져 있다.

2연의 탄식 문장에서도 송용구는 감탄문 “Weh mir”를 “아”라는 감탄사로만 지나치게 축소 번역하여 “Weh mir”가 도입부에서 갖는 시그널적 성격을 약화시켰다. 그에 반해 “아”에 이어지는 시행은 지극히 온전한 서술문으로 옮겨, 탄식 소리와 탄식의 내용 간에 양적 불균형이 발생하면서 시적 효과는 감소된다. 무엇보다도 ‘빛살과 그림자를 가진다’는 표현에는 분명 논리적 어폐가 있으며, 일보 양보하여 논리적 이탈을 허락하는 시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해도 그 미학적 효과는 미미하다고 하겠다.


3) 김정환 역의 <생의 중간>(2019)

2019년 자음과모음에서 김정환이 684편의 독일시를 편역한 <독일시집>이 출간되었다. 17세기 독일의 시인 베케를린부터 20세기의 베르펠, 릴케, 게오르게에 이르기까지 독일 서정시의 진수들을 선별하여 엮은 이 시집에 횔덜린의 시가 “생의 중간”으로 번역되어 수록되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독학으로 독일어를 배운 역자는 또한 시인으로서 이 시의 번역에서 선례들과는 다른 전략과 차이를 보여준다.

먼저 김정환은 시의 제목을 “생의 중간”으로 옮겨, 삶의 전환점에 서 있는 시적 자아의 위치에 역점을 두었다. 형식적 측면에서도 이 번역은 독일어 원문의 문장론적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 점에서 의미번역을 추구한 선례들과 차별성을 지닌다. 앞서 살펴본 역자들은 독일어 문장을 효과적으로 한국어 문장으로 옮기는 데 주력하였다. 이들은 독일어 문법에 맞게 각 단어 및 단어군을 해석하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의미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한국어 문장론에 맞추어 옮기는 의미번역을 목표로 했다. 이와 달리 김정환은 독일어 원문구조에 충실한 번역을 보여주는데, 그 목표가 원문 충실성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독일어 문장구조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색다른 미학적 효과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강하게 일으킨다. 즉 역자는 원문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옮겼는데, 이로써 그의 번역시는 각 행이 지닌 독립성, 각 단어군이 야기하는 개별 이미지에 더욱 주목하게 한다. 이 ‘구조번역’이 역자의 본 의도였는지 아닌지 하는 사실과 상관없이 그 결과만 놓고 보면, 이를 통해 김정환의 번역은 각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연상작용을 시적 효과로서 창출한다.

노란 배들 달려 있다

그리고 가득 찼다 들장미들 땅, 호수 속의. 너희 귀여운 백조들, 그리고 입맞춤에 취하여 담그는구나 너희가 머리를 거룩 말짱한 물에

슬프다 나, 어디서 찾을까 내가,

겨울오면, 꽃들을, 그리고 어디서 햇빛과 그늘, 대지의 그것을? 벽이 서 있을 것 말없이 그리고 차갑게, 바람 속에 덜컹대는 깃발들.

가령 1연을 시작하는 전치사구 “mit [...]”는 3행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주어 das Land를 수식하는 형용사 기능을 갖지만, 역자는 이 의미론적 구조를 무시하고 각 행을 제각기 독립성을 지닌 하나의 이미지들로 처리하였다. 첫 시행에 나오는 “노란 배들 달려 있다”, “그리고 가득 찼다 들장미들”은 더 이상 주어인 “땅”과 의미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주어로 작용한다. 반면 “땅, 호수 속의”는 “das Land in den See”에서처럼 “땅”과 “호수”를 공간적으로 나란히 위치시켜 그 근접성을 시각적으로 강화시킨다.

이 밖에도 원문의 구조번역을 통해 이 시는 다양한 미학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중 하나가 도치법이다. 1연의 “가득 찼다 들장미들”, “담그는구나 너희가 머리를”, 2연의 “슬프다 나, 어디서 찾을까 내가”에서 보듯이 원문의 행을 단어의 배치순서 그대로 옮김으로써 의미번역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내재율이 살아나는 효과를 창출한다. 구조번역을 통해 각 행은 더 이상 완전한 문장으로 제시되지 않고, 그 구성 요소들이 개별적 존재로, 쉼표를 통해 분절된 단어들로 나열된다. “겨울오면/ 꽃들을/ 그리고 어디서/ 햇빛과/ 그늘/ 대지의 그것을?”에서 보듯이 나열된 단어들은 마치 시적 자아의 입에서 불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탄식의 한 마디 한 마디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이것을 원문과 비교하면 비탄의 감정은 오로지 감탄문 “Weh mir”를 통해서만 표출되며, “wo nehme ich...”로 이루어진 문장은 오히려 의식 현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김정환의 번역에서 탄식의 내용은 단어와 쉼표, 개별화와 분절의 전략을 통해 오히려 시적 자아가 힘들게 뱉어내는 숨과 말로서 느껴진다. 이때 나열된 개별 단어들은 감각적 체험으로서의 질을 획득한다.

독일어 문장구조의 특성을 그대로 옮기는 번역전략을 통해 이미지의 환기와 연상작용을 강조하는 김정환의 번역시에서 내적 시제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제목 “생의 중간”은 시적 자아의 위치를 과거와 미래 사이에 두고 있다. 1연이 현재 혹은 현재완료에 해당한다면, 2연의 장면은 모두 미래의 반평생을 향해 있다. 실제로 김정환은 2연 마지막 시행에 나오는 동사 steht를 “벽이 서 있을 것”으로 옮겨 이 사물들을 미래의 풍경 속에 배치시킨 유일한 역자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 창의적인 번역의 시도 때문에 김정환 번역에는 원문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종종 간과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령 횔덜린에게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 조어 heilignüchtern을 역자는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서 “거룩 말짱한 물에”로 옮겨 원어의 의미론적 깊이를 온전히 상실하였다. 또한 원문에 암시된 교회탑의 철로 만든 풍향계는 천으로 만든 깃발들로 잘못 옮겼고, 게다가 이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덜컹대는”으로 풀어내어 언어 간의 연결에서 심한 부조화를 느끼게 한다.


3. 평가와 전망

이상에서 횔덜린의 시 <반평생>에 관한 3개의 번역본을 대상으로 그 특징과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이 번역본들을 구별 짓는 차이점이자 번역의 한 쟁점으로서 원문의 현재시제가 지시하는 실제적 시간 층위가 각각 어떻게 옮겨졌는지를 집중 고찰하였다.

황윤석은 첫 번째 반평생을 표현한 1연의 동사들을 현재진행형으로 옮기고, 2연의 내용은 그 현재 속으로 파고들어 온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질문, 그 질문에 대한 속절없는 무응답으로 옮겼다. 여기서 2연의 마지막 시행에 쓰인 현재시제는 시제 표현이라기보다는 상태진술로 보는 것이 맞다. 그렇게 보면 1연-2연-2연 마지막 행의 관계는 ‘현재-미래-상태진술’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송용구의 번역에서 1연의 내용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반평생으로서 시적 자아의 회고에 속하지만, 그 현장성을 표현하기 위해 현재시제를 살렸다(“깃든다”, “적시는가”). 1연의 조화로운 과거 회상은 2연의 녹슬고 식어버린 퇴색의 풍경과 대립하며, 후자는 시적 화자가 발화하는 내재적 현재 시점을 이룬다. 따라서 이 번역시의 시간적 구도는 ‘과거-미래-현재’로 드러난다. 김정환의 번역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는 “생의 중간”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1연의 시제는 현재로 옮겨져 있으나, 2연의 시제들은 모두 미래시제로 처리되어있다. 그러므로 시간적 구도를 ‘과거/현재–미래-미래’로 해석할 수 있다.

짧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시 <반평생>의 번역들에서 시제는 시적 자아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결정될 수 있는 열린 장치임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앞의 번역본 분석을 통해 각 역자의 시제 번역은 역자 자신의 작품해석과 깊은 관계에 놓여 있음도 볼 수 있었다. 최근엔 주로 자전적 맥락에서 해석되어 온 이 시에서 혁명과 정치적인 함의를 끄집어내려는 시도들이 간간이 일고 있다(참조, Kuhn 2021). 그렇다면 횔덜린의 역사철학관에 기초하여 이 시의 시간 층위에 대한 다른 해석이 또 가능할 것이며, 열린 시제로서 시의 현재시제에 대한 접근 역시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황윤석(1980): 반평생. 탐구당.

송용구(2004): 반평생. 고려대학교출판부.

김정환(2019): 생의 중간. 자음과모음.


5. 참고문헌

Kuhn, Axel(2021): Hölderlins „Hälfte des Lebens“ – ein Schwanengesang auf die Revolution? [1]

Langer, Susanne K.(1954): Feeling and Form. [2] 김준오(2019): 시론. 삼지원.


김연신
  • 각주
  1. Kuhn, Axel(2021): Hölderlins „Hälfte des Lebens“ – ein Schwanengesang auf die Revolution? https://www.christian-wagner-gesellschaft.de/aktuelles/vortrag-von-axel-kuhn-am-21-2-2021-text-als-pdf-datei/ “Indem das Land buchstäblich „in den See“ hängt, und nicht etwa die Bäume und Sträucher über dem See hängen oder sich in ihm spiegeln, wird eine Vermählung zwischen Erde und Wasser angedeutet. Eine Vermählung, die durch die sinnlich-erotische Qualität der vollreifen gelben Birnen, der widerspenstigen wilden Rosen und der trunken machenden Küsse durchaus orgiastische Züge tr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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