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종족 (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
작가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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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924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프란츠 카프카의 마지막 작품으로 1924년에 나온 모음집 <단식광대>에 실린 4편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여가수 요제피네의 노래는 쥐들도 낼 수 있는 나직한 휘파람 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노래는 쥐의 종족에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다. 요제피네의 노래는 안온함과 평온함을 전달해 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쉴 새 없이 일하고 엄청난 번식 충동으로 내몰리는 쥐들이 원하는 감정이다. 희한하게도 요제피네의 노래를 들을 때 쥐들의 귀속감은 강화되고 쥐의 종족은 요제피네의 음악회를 휴식의 기회로 여긴다. 요제피네는 자신의 중요성을 확신하면서 점차로 스타연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고 일체의 노동으로부터 면제되기를 원한다. 쥐들은 그녀의 노래를 감탄해서 듣지만, 요제피네의 노래 실력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요제피네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노래가 갖는 예술성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러나 대중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점점 더 노래를 거부하면서 칩거하고 결국 아무도 그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곳으로 사라진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지지만 매일 매일 삶을 위한 쥐들의 고군분투 속에서 그녀는 결국 잊혀진다. 이 이야기는 예술가와 대중의 관계를 다루고,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카프카의 성찰을 담는다. 괴짜 같고 호감이 안 가는 여가수와 카프카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존재한다. 예술에 전적으로 몰두하기 위해 일체의 노동에서 면제되고 싶다는 요제피네의 소망도 그러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 단편은 카프카의 병이 진전되면서 글쓰기를 할 수 없게 되기 직전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카프카는 자신 및 자신과 동류의 사람들, 즉 변덕스러운 기질을 갖고 있고 정상적인 인간과는 구분되는 예술가들을 성찰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74년 김정진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삼성출판사).
초판 정보
Kafka, Franz(1924): Joseph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 In: Prager Presse, 20. Apr. 1924.
<단행본 초판> Kafka, Franz(1924): Ein Hungerkünstler. Vier Geschichten. Berlin: Die Schmiede.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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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歌姬 요제피네 | 城, 變身 外(성, 변신 외) | (三省版)世界文學全集((삼성판) 세계문학전집) 2 | 프란츠 카프카 | 金晸鎭 | 1974 | 三省出版社 | 440-457 | 편역 | 완역 | |
歌姬 요제피네 | 城 變身 短篇選 | 三省版 世界文學全集 2 | 카프카 | 金晸鎭 | 1974 | 三省出版社 | 440-470 | 편역 | 완역 | ||
가희 요제휘이네 | 굶는 광대 | 프란츠 카프카 | 金昌活 | 1978 | 태창出版部 | 82-108 | 편역 | 완역 | |||
歌姬 요제피네 | 아메리카, 變身, 流刑地에서 外 |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애장판 세계문학대전집) 29 | 프란츠 카프카 | 洪京鎬 | 1981 | 금성출판사 | 349-366 | 편역 | 완역 | ||
5 | 歌姬(가희) 요제피네: 혹은 쥐의 種族 | 아메리카, 變身, 短篇 | 완역판 세계문학 Sunshine Series 44 | 프란츠 카프카 | 洪京鎬 | 1987 | 금성출판사 | 382-412 | 편역 | 완역 | |
6 | 요제피네라는 가수 | 카프카短篇選 (카프카단편선) | 풍림명작신서 시리즈 47 | 카프카 | 崔俊煥 | 1989 | 豊林出版社 | 80-107 | 편역 | 완역 | |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일족(一族) | 변신, 유형지에서(외)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6 | 프란츠 카프카 | 박환덕 | 1989 | 汎友社 | 269-289 | 편역 | 완역 | ||
8 | 歌姬(가희) 요제피네: 혹은 쥐의 種族 | 아메리카, 變身, 短篇 | 금장판 세계문학대전집 88 | 카프카 | 洪京鎬 | 1990 | 金星出版社 | 392-412 | 편역 | 완역 | |
9 | 가희 요제피네 | 변신, 말테의 수기 | Ever books.삼성세계문학 21 | 프란츠 카프카 | 송영택 | 1992 | 삼성출판사 | 149-168 | 편역 | 완역 | |
10 | 가수 요제휘이네 | 변신.유형지에서 | 프란츠 카프카 단편집 6 | 프란츠 카프카 | 안성암 | 1995 | 글벗사 | 205-229 | 편역 | 완역 | |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鼠氏族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1997 | 솔출판사 | 302-330 | 편역 | 완역 | ||
12 |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鼠氏族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2003 | 솔출판사 | 302-330 | 편역 | 완역 | |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 | 변신, 카프카 단편선 | 프란츠 카프카 | 권세훈 | 2006 | 가지않은길 | 131-165 | 편역 | 완역 | |||
14 | 춤추는 요제피네 | 카프카 : 변신, 화부 | Classic together 3 | 프란츠 카프카 | 박철규 | 2007 | 아름다운날 | 339-374 | 편역 | 완역 | |
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들의 종족 | 변신: 프란츠 카프카 중단편집 | 열린책들 세계문학 10 | 프란츠 카프카 | 홍성광 | 2010 | 열린책들 | 285-306 | 편역 | 완역 | ||
16 | 춤추는 요제피네 | 변신.시골의사 | Classic together 3 | 프란츠 카프카 | 박철규 | 2013 | 아름다운날 | 339-374 | 편역 | 완역 | |
17 | 여가수 요세피네 아니면 생쥐 무리 | 칼다 기차의 추억 | 프란츠 카프카 | 이준미 | 2014 | 하늘연못 | 528-565 | 편역 | 완역 | ||
18 | 여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의 종족 | 변신 | 꿈결 클래식 5 | 프란츠 카프카 | 박민수 | 2015 | 꿈결 | 181-212 | 편역 | 완역 | |
19 | 여가수 요제피네, 혹은 생쥐일족 | 카프카 우화집 | 프란츠 카프카 | 김진언 | 2017 | 玄人 | 157-192 | 편역 | 완역 | ||
20 |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鼠氏族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2017 | 솔출판사 | 302-330 | 편역 | 완역 | |
21 | 여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 종족 | 변신 외 | 프란츠 카프카 | 김재희 | 2018 | 서연비람 | 195-228 | 편역 | 완역 | ||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 문득 2 | 프란츠 카프카 | 김해생 | 2019 | 스피리투스 | 54-82 | 편역 | 완역 | ||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종족 | 프란츠 카프카 | 세계문학단편선 37 | 프란츠 카프카 | 박병덕 | 2020 | 현대문학 | 355-386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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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종족>은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마지막 소설로 1924년에 나온 모음집 <단식광대>에 실린 4편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김정진이 1974년에 처음으로 <歌姬 요제피네>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삼성판) 세계문학전집 속에 <城, 變身 外>라는 제목으로 중앙일보사에서 출판하였고, 2020년에 박병덕이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종족>이라는 제목으로 세계문학의 제37권으로 낼 때까지 총 17명의 번역가(김정진, 김창활, 홍경호, 최준환, 박환덕, 송영택, 안성암, 이주동, 권세훈, 박철규, 홍성광, 이준미, 박민수, 김진언, 김재희, 김해생, 박병덕)가 이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카프카의 작품 중 상대적으로 늦게 번역이 시작되었으나 여러 번역가가 번역을 시도했고, 특히 소위 카프카 전문가들이 많이 가세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독자적 단행본보다는 자주 세계문학이나 카프카 문학선집 안에 포함되어 출판되었으며 아동용으로 여러 차례 각색된 것도 특기할만하다. 이 소설은 제목 번역의 변천사가 흥미로운데 이는 작품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 번역 시에 <가희 요제피네>로 번역이 되었는데, 비록 텍스트의 내용과 부합하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여가수”를 뜻하는 용어인 “가희”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특기할만하다. 홍경호에 의해 제목이 <歌姬 요제피네: 혹은 쥐의 種族>으로 부제까지 전부 번역이 되었고, 이때 사용된 부호인 쌍점 “:”은 원본과는 차이가 나며 앞뒤 연결의 의미를 대립으로 변환시킨다. 최준환은 1989년 <요제피네라는 가수>로 번역하여 처음으로 가희 대신 가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주동은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鼠氏族>으로 번역함으로써 문장부호, 순서와 구분 및 젠더 표기까지 원작에 대응해서 살리고 의미들을 모두 옮겼다(2020년의 번역에서는 서씨족을 쥐의 종족으로 수정하였다). 영어로 번역될 때는 보통 <Josephine the Singer, or the Mouse Folk> 혹은 <Josephine the Songstress or The Mouse Folk>로 번역된다. 차이 나는 번역들은 어휘뿐 아니라 주제목과 부제목을 모두 번역하느냐, 일부만 번역하느냐의 문제와 더불어 제목에 있는 쉼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관건이다. 점차 제목 전체를 번역하는 추세이며 쉼표는 초기에는 무시되거나 콜론(:)을 사용하거나 쉼표를 사용할 때도 원문과 다르게 가운데에 위치시켰었으나, 최근의 번역들은 원문과 같은 위치에 쉼표를 위치시켜, 개인 요제피네와 가수라는 직업의 긴장을 살리고 또한 쥐의 무리에 속하지만 동시에 쥐의 족속들과 다름을 강조한다. 뒤늦게 번역이 시작되었지만, 이 난해한 단독 작품에 대한 독립 연구논문이 8편이 나올 정도로 꾸준히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2. 개별 번역 비평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이 소설은 가수 요제피네와 그녀 노래의 독특한 특성에 대한 기술들, 그리고 전체 종족에게 이 노래가 갖는 의미와 역할과 더불어 마지막 부분에서는 요제피네의 노동 면제 요구와 사라짐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다. 앞서 제목 번역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일반화하여 개인과 개인이 속한 종족/민족 혹은 사회와의 문제를 다룬다고도 볼 수 있고, 혹은 특수화하여 특정 종족의 역사 및 운명, 즉 유대인의 운명을 다루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요제피네가 가수이기 때문에 예술(가) 소설의 전형적인 문제를 주제화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카프카의 여타 동물 이야기들과의 장르적 연관성 속에서 읽기도 하며, 최근에는 심층심리학에서의 접근이 돋보인다. 이러한 연구사, 수용사의 궤적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번역에 반영되어있다. 개별 번역 비평에서는 작품의 시작과 말미의 주요 장면들에 대한 번역과 함께 “민족/종족 Volk”, “음악 Musik”, 쥐의 소리인 “Pfeifen” 등의 핵심 어휘의 번역과 문체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이미 17인이 번역하였으나 박철규의 <춤추는 요제피네>(2007)처럼 원작과 거리가 먼 번역들은 제외하고 되도록 많이 읽히는 완역본을 중심으로 비평을 시도한다.
김정진은 1974년에 <歌姬 요제피네>를 <성>, <변신>, <유형지에서>, <어느 개의 회상>,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이 번역하여 세계문학전집 2권에 수록하였는데 이것이 최초 한국어 번역이다. 김정진은 작품 끝에 수록 작품에 대한 간결한 역자 해석을 덧붙였고 요제피네의 노래는 쥐의 울음소리로서 예술가가 처해있는 상징이며 쥐의 족속은 “유태민족”을 상징한다고 본다. 즉 이 간략한 해설 속에서도 작품 해석의 중요한 단초들을 짚어주는데, 한편으로는 예술가 문제를,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집단적 문제를 주제화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김정진은 이 작품의 큰 매력은 “상징하는 뜻이 카프카 자신의 심장에 가까이 밀착”(482)하는데 있다고 설명한다. 즉 많은 다른 역자들처럼 김정진도 작품을 카프카의 자전적 상황을 연계시키고 있다.
미리 전체 사건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카프카적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첫 단락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Unsere Sängerin heißt Josefine. Wer sie nicht gehört hat, kennt nicht die Macht des Gesanges. Es gibt niemanden, den ihr Gesang nicht fortreißt, was umso höher zu bewerten ist, als unser Geschlecht im ganzen Musik nicht liebt. Stiller Frieden ist uns die liebste Musik; unser Leben ist schwer, wir können uns, auch wenn wir einmal alle Tagessorgen abzuschütteln versucht haben, nicht mehr zu solchen, unserem sonstigen Leben so fernen Dingen erheben, wie es die Musik ist.
우리들의 가희는 요제피네라고 부른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은 노래에 깃들어 있는 힘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의 노랫 소리를 들으면 홀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종족이 일반적으로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점을 고려한 경우, 더욱 높이 평가해야 된다. 조용한 평화야말로 우리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다. 우리들의 생활은 괴롭고, 우리들은 날마다 겪는 고생을 한때나마 잊어버리려고 해도, 더욱 음악처럼 우리들의 나날의 생활로부터 인연이 먼 것에까지 마음을 높일 수는 없다.(440)
“우리들의 가희는 요제피네라고 부른다.” 일견 단순해 보이나 다소 어색한 투의 이 문장은 이미 작품 전체의 갈등을 보여준다. 1인칭 단수 화자는 인물, 사건,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첫 어휘부터 “우리들”이라고 집단을 강조한다. 카프카 문학의 전형적 주제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개인의 무소속성, 이방성, 현대사회에서의 소외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 “우리들”이라는 집단 소속성을 나타내는 시작 어휘는 특별하다. 특히 “우리들의 가희”로서 소개하여 그 가수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유일무이하게 가수 개인의 고유한 이름을 언급한다. 우리에게 속하지만 결국 우리와는 다른 개인이자 예술가, 우리에게서 점차 멀어져가는 가수, 그리고 결국 사라지고 잊히는 예술가를 소개하기 때문에 이 첫 문장에서 이미 개인과 집단 간의 긴장이라는 작품 전체의 주제가 노정되고 있다.
다음 문장으로는 원문은 긴 문장으로 이어져서 두 개의 상반되는 서술이 이어지는데 역자는 이를 두 문장으로 바꾸어 번역한다. “노래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은 노래의 힘을 모르는 사람”이며 “노래를 들으면 홀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음악의 일반적 특징인 감성적 영향 관계를 언급하지만, 바로 다음에 자기 종족은 일반적으로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계속 독자의 기대 지평을 역전시킨다. 즉 원래 삶이 고단하여 침묵을 좋아하고 음악과는 거리가 먼 민족인데 그럼에도 그의 노래를 들으면 그 위력을 느끼고 모두 홀린다는 관계를 설정하고는 바로 다음에는 그 음악은 특별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민족/종족/대중, 가수, 음악/노래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의 관계로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러한 일반적 논리적 기대를 넘어서 계속 역전되는 상황을 김정진은 한국어 번역에서 문장들을 짤막하게 끊어서 옮기고 있고 문장 내에서는 각 논리가 성립하도록 전달한다. 김정진의 경우 전체적으로 볼 때 직역에 가까워 읽기 어려운 부분들이 꽤 있고 드물게 오역도 있지만, 이 난해한 텍스트의 국내 초역이 갖는 배가된 어려움을 고려하고 수수께끼들에 대한 많은 적확한 해석을 제시하고 후대에 미친 큰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그 공은 매우 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진은 쥐의 노래와 소리를 설명하는 핵심 어휘인 “Pfeifen”을 “짹짹거리는 울음”(441)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쥐가 짹짹거리고 운다는 해석은 김정진의 독특한 번역으로서 ‘울음’은 원어 텍스트에 없는 의미로 슬프다는 부가적 의미를 더한다. 이러한 번역은 다음 문장에서 보듯 원문에 없는 “울음”과 “기분좋음” 사이의 패러독스가 생겨나게 한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것을 예술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요제피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우리들은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면 우리들은 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 우리들은 절대로 울지 않는다.(443)
김정진은 작품의 첫 문장과 대구를 이루는 마지막 문장을 아래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Vielleicht werden wir also gar nicht sehr viel entbehren, Josefine aber, erlöst von der irdischen Plage, die aber ihrer Meinung nach Auserwählten bereitet ist, wird fröhlich sich verlieren in der zahllosen Menge der Helden unseres Volkes, und bald, da wir keine Geschichte treiben, in gesteigerter Erlösung vergessen sein wie alle ihre Brüder.
그러니까 우리들은 아마도 그녀가 없어졌다고 해서 조금도 곤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지상으로 고난으로부터 구제되어서 – 그렇지만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선발된 자만이 그런 고난을 겪게 되는 거지만 - 그리고 우리들은 역사를 교란시키는 것은 아니니까. 그녀도 마침내 그녀의 모든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구제 속에서 잊혀지게 될 것이다.(457)
이 소설에는 글을 쓰고자 하는 카프카의 소망이 간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고 해석되어 자주 그의 작품 <시골의 결혼준비>와 비교된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사라진 요제피네와 그녀의 운명에 대한 마지막 단락의 서술에서 화자는 다시금 “우리”를 사용하는데 “조금도 ~ 않다”라고 원문보다 단호하게 번역이 되고 있다. 전체적 번역이 그렇듯 이 부분도 원문에 충실한 직역에 가깝고 각 어휘의 기본적인 뜻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 “높은 구제 속에서”처럼 이해하기가 불편한 번역을 하고 있다. 자주 쓰지 않는 표현인 “Geschichte treiben”은 Geschichte betreiben, tun에서 온 것인데 역시 “역사를 교란시키다”라고 원문의 정도보다 강하게 번역되고 있지만, 이 조합은 카프카의 어휘 선택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는 효과가 있다.
김창활은 1978년 <굶는 광대>라는 제목으로 카프카의 단편들을 엮어내었다. 전체적으로 당대의 어휘들과 문체로 번역하여 오늘날 읽으면 상당히 고어체 글같은 인상을 주는데, 주인공 이름도 제목에서 보듯 요제휘이네로 풀어쓰고 있다. 요제피네 소설을 두고 볼 때 김창활 번역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번역자들과 달리 문단의 구성 자체를 자유롭게 짤막짤막하게 끊어 번역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른 역자들은 긴 문장들을 짧게 나누기는 했으나 문단의 구성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전체 주제와 연관된 요제피네의 예술 행위이자 민중들의 삶을 담은 행위인 “Pfeifen”을 김창활은 “지저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지저귄다”에서 보듯 쥐가 지저귄다는 표현은 어색하지만 노래라는 점을 고려하여 선택한 듯 보인다.
이런 지저귐 같으면 우리는 물론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족속의 천부의 특기인 것이다. 아니 특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독특한 생활표현인 것이다.(84)
김창활은 “Lebensäußerung”을 생활 표현이라 옮겨 보다 삶에 밀착하게 근접시키고 있다. 그는 전체적으로 보아 개성이 돋보이는 번역을 하고 있으며 난해한 텍스트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별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홍경호의 번역은 작품의 다른 부분의 많은 수수께끼들을 조금 더 풀면서 그리고 문체에 있어 조금 더 독자 친화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우리들의 가희는 그 이름을 요제피네라고 부른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은 노래가 지닌 위력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의 노래에 매료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392)라고 보다 단문으로 끊어 독자친화적으로 번역되고 있다.
홍경호의 경우 “Pfeifen”을 처음으로 휘파람으로 번역하고 있고 부분적으로는 “피리소리 같은 노래”(401)라 번역하는데, 이후 이 번역어가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영어에서도 whistle이라 번역된다. 화자는 이 “Pfeifen”을 대비되는 개념인 “Kunstfertigkeit”와 “Lebensäußerung“을 사용하여 서술하는데, 홍경호는 이를 “종족 본래의 특기”와 “생명 표출”(393)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Ist es denn überhaupt Gesang? Ist es nicht vielleicht doch nur ein Pfeifen? Und Pfeifen allerdings kennen wir alle, es ist die eigentliche Kunstfertigkeit unseres Volkes, oder vielmehr gar keine Fertigkeit, sondern eine charakteristische Lebensäußerung.
도대체 이것은 노래일까? 차라리 그냥 휘휘부는 휘파람이 아닐까? 물론 우리는 휘파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그것은 우리 종족 본래의 특기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특기라고도 말할 수 없는 단순하고 특징적인 생명 표출(生命 表出)인지도 모른다.(393)
노동의 면제 요구를 내세우고 이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요제피네는 요구가 거절되자 사라지게 된다. 요제피네의 실종과 잊혀짐에 대한 화자의 해석을 담고 있는 마지막 단락을 홍경호는 다음과 같이 상당히 개성적으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역사를 쓰지 않으니까 더한층 해방감을 느끼며 그녀의 모든 동포와 같이 깨끗이 잊혀지고 말 것이다.(412)
앞에 이미 사라짐을 해방/구원이라 묘사했었는데 홍경호는 이러한 비교를 살려 명사구 “in gesteigerter Erlösung”을 “더 한층 해방감을 느끼며”로 옮겨 독특하게 이를 요제피네가 느끼는 감동으로 옮기고 있다. 또한 “Geschichte treiben”을 “역사를 쓰다”라고 옮기는데 schreiben과 treiben의 차이는 이때 사라지고 만다.
4) 박환덕 역의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일족>(1989)
박환덕의 번역은 <변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작가의 생존 시에 출판된 작품들을 모아 번역하였다. 카프카 전문가로서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적으로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가독성이 높은 번역을 하고 있어 번역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박환덕은 형식적으로 볼 때 원문의 문단 구성을 존중하고 있고 중간의 삽입절들은 많은 경우 하이픈을 사용하여 시각적으로도 표시 나게 옮기고 있다. 주제와 관련지어 보더라도 박환덕은 개인과 집단, 예술과 삶, 기억과 망각의 대립과 갈등이 잘 드러나는 번역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절제된 어휘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조용한 평화야말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269)임에도 불구하고 요제피네의 노래가 “마음을 감동시”킨다고 종족의 일반적 성격과 개인 요제피네의 노래와의 대비 및 그 독특함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박환덕은 핵심어인 “Pfeifen”을 처음으로 “찍찍거리는 소리”(270)로 번역함으로써 쥐의 소리를 담은 번역을 통해 동물의 세계가 직접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였다. 또한 “찍찍거리는”이라는 의성어로 번역함으로써 특히 독자에게 이 어휘가 주는 감성적 영향이 배가되었다. 요제피네의 예술과 민중의 삶에서 나오는 소리는 “노래”와 “찍찍거리는 소리”로 대립되고 있으며 이때 요제피네의 현재형 “singen”과 전래되어 오는 “Gesang”은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 “노래”로 통칭된다.
그것이 도대체 노래란 말인가? 그것은 혹시 단순히 찍찍거리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찍찍거리는 소리에 대해 모두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종족 고유의 특기인 것이다. 아니 특기라기보다는 차라리 혈육화된 특성적인 생활 표현 그 자체이다. 우리는 모두가 찍찍거리고 울지만, 물론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자는 아무도 없다.(270)
박환덕은 다른 부분들에서는 다소 완화된 어휘들을 선택하고 있지만 “eine charakteristische Lebensäußerung”을 “혈육화된 특성적인 생활 표현”이라고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여 번역함으로써 이 부분을 강조한다. 더불어 이 찍찍거리는 소리는 생활의 표현수단이면서 쥐 종족들 특유의 것임이 전면에 드러난다.
예술가와 민중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결말 부분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박환덕도 “조금도 ~ 않다”와 “역사를 교란하다”로 원문보다 표현의 강도를 높이고 있고 표현의 낯섦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원문에 충실한 해석을 바탕으로 “구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고양된 구원”으로 구원의 주체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마지막의 긴 문장은 다른 역자들보다는 길게 두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하는데 독자로서 이해하기는 수월하나 상반되는 사실이 한 문장에서 연속적으로 또한 복잡하게 나오는 카프카 독일어 문장의 특징은 덜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의미상으로 문장을 나누는 번역은 원문이 가지는 패러독스의 강도를 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마도 그녀의 부재로 인해 조금도 곤란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그녀의 말을 빌면 선택된 자들만이 겪게되는 지상의 고난에서 구원되어, 기꺼이 우리 종족들의 무수한 영웅의 무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교란시키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그녀도 곧 그녀의 모든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고양된 구원 속에서 잊혀지고 말 것이다.(289)
5) 이주동 역의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鼠氏族>(1997)
솔 출판사는 1997년 총 10권으로 카프카 전집을 내면서 이 작품을 전집 1권 <변신>에 넣었고 번역은 이주동이 맡았다. 이 출판사는 2017년에 개정판 카프카 전집을 10권으로 다시 출판하였으며 이 작품은 개정판에서도 마찬가지로 1권에 수록되었다. 이주동의 경우에 2020년 <카프카 단편선>을 단행본으로 다시 출간하는데, 이때 제목을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라고 옮겨 이전의 “서씨족”을 “쥐의 종족”이라고 현대화하고 있다. 이 현대적 번역에서 이주동의 번역은 원문의 어휘나 문체, 문장 등의 세세한 부분들을 살리되 본인의 자의적 변형을 되도록 최소화하였다. 다른 역자들과 달리 제목부터 여가수로 젠더를 표시하였고 “서씨족”이라는 독특한 어휘를 사용하여 쥐의 종족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어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2020년의 번역본을 대상으로 하는데 1997년의 번역본과 비교해보면 큰 변화는 없으나 이 첫 단락에서 보다시피 더욱더 문체상으로도 원문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즉 문장의 길이를 더욱 원문에 일치시켰다.
우리 여가수의 이름은 요제피네이다.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이는 그녀 노래의 힘을 알지 못한다. 그녀의 노래에 감동받지 않을 이는 없는데, 그것은 우리 종족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만큼 더욱더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조용한 평화가 우리에게는 최상의 음악이다.(298)
이주동은 “singen”과 “Gesang”, “Pfeifen”을 “노래”, “성악”, “휘파람”으로 보다 차이를 강조하여 번역한다. 즉 성악은 현재의 요제피네의 노래가 아니라 쥐종족의 전래된 음악임을 보여준다. 휘파람이 요제피네의 노래라는 차원을 넘어 쥐 종족 전체의 소리로 확장될 때는 때로 “찍찍거리는 휘파람”으로 부가어를 넣어 동물 세계에도 적용이 되도록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이 Pfeifen이 예술과 삶에서 갖는 의미를 다음처럼 “기교”와 “특징적인 삶의 표현”으로 대별시켜 번역하여 이러한 대비를 잘 드러내 준다. “Lebensäußerung”은 “생명표출”, “생활표현”을 거쳐 이제 “삶의 표현”이라 번역되어 개인의 예술과의 대비되는 종족의 삶의 표현임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도대체 성악이라는 것인지? 사실은 단지 휘파람 소리가 아닐는지? 그리고 찍찍거리는 휘파람이야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종족의 원래의 기교, 또는 기교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징적인 삶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299-300)
특히 마지막 단락의 해석이 독특한데 이주동은 바로 앞부분에서 “우리 종족은 요제피네의 노래를 도리어 자신의 지혜 속에서 –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그녀의 노래를 잃지 않을 수 있으니까 –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324)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러므로”라는 인과적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아마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요제피네의 사라짐에 대해 남은 족속들의 반응을 원문의 “nicht sehr viel”보다 정도에 있어 더 단호하게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마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지상적인 괴로움으로부터 – 그녀의 생각으로 이것은 선택된 자에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 구원받아 우리 종족의 수많은 영웅들 속으로 즐겁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하지 않으므로 - 그녀는 모든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더욱 승화된 구원 속에서 잊혀질 것이다.(324-325)
요제피네의 생각과 우리의 특성을 드러내 주는 삽입절 “--”을 일관되게 사용하여 시각적으로도 살리고 있으며 긴 문장은 내용상으로도 두 문장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카프카적 패러독스와 난해함은 “fröhlich”를 이제까지의 “기꺼이”에서 “즐겁게”로 높이고 “더욱 승화된 구원”으로 종교적 색채까지 넣었으며 종족의 영웅이나 형제들처럼 사라지고 잊히는 것의 병렬적 서술이 보다 긍정적으로 의미화되어, 결과적으로는 거꾸로 독자에게 원작이 주는 것과 같은 패러독스와 수수께끼 앞에 서도록 만든다.
6) 권세훈 역의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2006)
권세훈의 번역본은 <변신>이라는 전체 제목을 달고 <변신>, <선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 세 작품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삽화를 많이 넣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카프카 원문의 문단은 그대로 살리고 있으나 거의 모든 문장을 짧은 단문장으로 바꾸고 있다. 이러한 문장들은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해주지만 카프카 특유의 관계대명사나, 접속절, 삽입절 등을 많이 넣은 복잡한 구조는 살리지 못한다.
다른 역자들과 달리 권세훈은 비교적 상세한 역자 후기를 달아 작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 및 해석을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요제피네의 노래가 가진 핵심 갈등과 의미를 “종족의 보편적 언어가 동시에 예술의 언어가 되는 이율배반”이라고 해석하고 음악이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 종족의 삶에 이르게 하는 통로라고 본다. 권세훈은 “Pfeifen”을 “찍찍거림”(135)으로 일관되게 번역한다.
물론 우리 모두는 찍찍거림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종족 고유의 기교를 나타낸다. 아니 오히려 재능이 아니라 삶의 특징적인 표현이다. 우리 모두가 찍찍거린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을 예술로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135)
권세훈에 따르면 이 요제피네 단편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비극적이지 않은, 미해결의 결말, 불확정성의 결말을 보여준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가수 요제피네의 사라짐도 “곧 그녀의 마지막 찍찍거림이 울리고 난 후 침묵하게 되는 시간이 올 것이다. 그녀는 우리 종족의 영원한 역사 속에서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이다.”(164)라고 담담하게 예견되고 해석되며 옮겨진다. 권세훈은 처음으로 “아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의 정도를 원작에 맞게 “별로 않다”로 해석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의 요제피네의 사라짐도 긴 한 문장이 세 문장으로 나뉘어 옮겨지고 원작의 삽입절이나 종속절, 혹은 다섯 번의 쉼표가 가져오는 사유의 단절 등과 2번의 “aber”가 갖는 반전 등이 축약되고, 주인공은 더 높은 힘에 의해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구원을 입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다른 해석들에 비해 주인공을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나타나게 만들며 또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고 논리적이나 패러독스를 덜 느끼는 결말로 이끈다.
아마도 우리는 별로 아쉬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자신의 말마따나 선택받은 자들에게 마련된 지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기쁜 마음으로 우리 종족의 수많은 영웅들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역사를 추구하지 않기에 곧 보다 높은 차원의 구원을 받으며 자신의 모든 형제들처럼 잊혀지게 될 것이다.(165)
7) 권세훈 역의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2006)
홍성광은 <카프카>라는 제명으로 카프카의 작품들을 출판된 단행본에 따라 번역을 하였다. 홍성광은 요제피네 소설의 경우 평소와 달리 매우 강하게 의역을 시도하고 있는데, 때로 문맥이나 의미망을 이탈할 정도이다. 시작 부분의 “Stiller Frieden ist uns die liebste Musik”을 “우리는 잔잔한 평화를 안겨 주는 음악을 가장 좋아한다.“(198)라고 번역한 것이 그 일례이다. 그 외에는 카프카의 문단 나누기를 따르고 있으며 쉼표 사이의 삽입구들은 모두 하이픈으로 일관되게 처리하여 서술내용과 상반되는 인물들의 반응을 한 문장 안에서 나란히 보여준다. 그는 요제피네의 “Pfeifen”은 “찍찍거리는 소리”로 번역하며 노래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것이 과연 노래란 말인가? 그것이 어쩌면 찍찍거리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는 이러한 찍찍거리는 소리에 대해 다들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종족 본래의 숙련된 기술인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숙련된 기술이라기보다는 특색 있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198)
요제피네의 사라짐에 대해서 역자는 보통 번역과는 큰 차이가 나는 번역을 하고 있는데, 즉 요제피네 없이는 절대 살아갈 수 없다는 부정적 판결을 내리고 “Geschichte treiben”은 “허세를 부리다”로 완전히 의역하고 있는데 이 경우 앞뒤의 논리적 연결이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그녀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견해에 의하면 그녀는 선택된 자들만 겪게 되는 지상의 고난에서 구원되어, 우리 종족의 무수한 영웅들 무리 속으로 즐겁게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므로, 얼마 안가 그녀는 더욱 높은 단계로 구원받아 그녀의 모든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잊혀질 것이다.(209)
8) 김해생 역의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2019)
2019년에 나온 김해생의 번역은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을 단행본의 제목으로 앞으로 내세워 이 작품을 표제화하고 있어 이 작품에 대한 큰 관심을 표명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작품집에는 <판결>, <법앞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시골 의사>, <어느 개의 연구>, <굴>이 포함되어 있고 역자 서문이나 후기는 별도로 없다.
김해생은 첫 문장을 “우리의 가수 이름은 요제피네이다.”(54)라고 번역하여 부드럽게 잘 읽히는 번역을 하고 있고, 이러한 독자의 읽기를 고려한 자연스러운 번역의 특징은 작품 끝까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장점은 동시에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카프카 문체의 특징은 보기 드문 어휘들의 결합을 많이 사용하여 낯설고 기이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Pfeifen”을 휘파람으로 번역하면서도 “Kunstferitigkeit”와 “Lebensäußerung” 사이의 단계 이행이나 긴장된 관계를 전달하기보다는 해석의 차이 정도로 축소한다.
그렇다면 그게 노래가 맞는가? 혹시 그냥 휘파람 같은 게 아닐까? 휘파람이라면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휘파람은 우리 민족 고유의 예술이다. 아니, 예술이 아니라 독특한 삶의 표현이다.(56)
요제피네의 요구도 그러하다. “요제피네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마도 예술가의 길로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자신의 노래를 배려해 모든 노동을 면제해달라고 요구해왔다. 그녀의 요구는 일용할 양식을 비롯해 우리의 생존 투쟁에 걸린 모든 것을 자신을 대신해 우리 민족 전체가 도맡아 마련해달라는 얘기였다. 요제피네에게 한눈에 반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요구를 생각해낼 수 있는지, 매우 드문 요구이므로 그 특이한 사고방식에 놀랄 것이고, 그 요구에는 드러나지 않은 타당성이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조용히 그 요구를 거절했다.”(73)
많은 역자가 원문의 어휘나 문체를 고수하여 독자로서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마지막 문장들도 김해생은 잘 읽히는 현대어로 옮기고 있다. 특히 두 번 나오는 “구원”도 살려 같은 용어로 번역하고 그 단계의 상승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수많은 영웅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라든지 “즐거워한다”로 확대해석하고 있고, 요제피네가 “구원을 받는다”와 원래 수동적인 표현을 “우리가 잊을 것이다”라는 능동적 표현으로 바꾸어 상황의 양태를 변경하고 있다.
그러나 지상의 고통에서 해방된 요제피네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고통은 선택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수많은 영웅들과 하나가 되어 즐거워할 것이고, 머지않아 한 단계 더 높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우리는 다른 모든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요제피네 또한 잊고 말 것이다.(42)
여기에서도 김해생 번역의 특징과 한계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Geschichte treiben”이라는 명사구를 역자는 “역사를 기록한다 Geschichte aufschreiben”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를 쓴다”와 “역사를 교란하다” 사이에 위치한 번역이지만, 독일어가 가진 낯섦은 사라진 번역이라 할 수 있다.
9) 박병덕 역의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종족>(2020)
박병덕은 <프란츠 카프카>라는 단편집을 내면서 카프카의 단편 작품들을 저자가 직접 발표했는가의 여부, 발표된 순서와 발표된 작품집에 따라 체계적으로 모두 수록하였다. 그리고 다른 역자들과 달리 1924년에 나온 작품들만을 모아 ‘7. 어느 단식광대’라는 소제목하에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을 수록하였는데, 제목은 원문을 더욱 충실하게 옮긴 이 제목으로 점차 수렴하고 있다. 박병덕은 번역 텍스트로 S. 피셔 출판사의 1979년 판을 사용했다고 저본을 밝히고 있다. 박병덕은 원문의 문단이나 문장의 길이를 충실하게 살리려 애를 쓰고 있으며 더불어 가독성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앞서 비교를 위해 살펴본 예술과 삶에 대한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고 있다.
그것이 도대체 노래란 말인가? 그것은 어쩌면 그냥 찍찍거리는 소리가 아닐까? 그리고 이 찍찍 소리는 물론 우리가 모두 다 알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 종족 본래의 숙련된 기예(技藝) 아니 결코 기능은 아니고 그보다는 오히려 특징적인 삶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찍찍거리지만, 그러나 물론 아무도, 그것을 예술로서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357)
박병덕은 이때 핵심 어휘인 “Pfeifen”을 “찍찍거리는 소리”(357)로 번역하고 있으며 “기예”, “기능”, “특징적인 삶의 표현” 등으로 예술과 삶의 차이와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섬세하게 밝히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 쥐들 세계의 특성을 보다 많이 살리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Volk”라는 단어를 일관되게 “종족”으로 옮겨 일차적으로는 쥐의 세계,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 세계를 중첩되게 가리키고 있으며, 다른 역자들이 “순한 아이” 등으로 의인화하여 번역하는 부분까지도 쥐라는 동물의 특성을 살려 “선입견이 없는 어린 새끼”(377)로 번역한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번역의 어순도 최대한 원문에 따라 맞추고 있고 쉼표 등이나 삽입절 등을 살리려 노력하며 완성도나 가독성이 높은 번역을 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문장은 처음으로 긴 문장을 그대로 살려 한 문장으로 옮기고 있다. 그 안에서 요제피네가 사라지는 데 대한 아쉬움의 정도도 적확하게 옮겨지며, “구원”이 두 번 반복되며 즐거움과 승화됨으로 정도가 상승하는 부분도 잘 살리면서 이를 이해 가능한 명사구 안에서 번역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문장이 가진 형식상의 구원과 실제의 망각 사이의 패러독스를 느끼게 해준다.
아마 우리는 그러니까 그녀가 없다고 해서 아주 많이 아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그녀의 견해에 따르자면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마련되어 있는 그런 지상적인 괴로움에서 구원받아, 우리 종족의 무수히 많은 영웅의 무리 속으로 즐겁게 사라질 것이고, 그리고 머잖아 곧, 우리가 역사 서술을 할 수는 없으므로, 그녀의 모든 형제처럼 한층 더 승화된 구원 속에서 잊히게 될 것이다.(383)
3. 평가와 전망
카프카 작품에 대한 독자나 비평가, 학자들의 관심이 예전에는 <성>이나 <심판>과 같은 장편소설 혹은 <변신>이나 몇몇 대표 단편에 많이 쏠렸었다면 최근에는 다양화되면서 요제피네 소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 소설을 읽을 때 카프카가 직접 쓴 <소수 집단의 문학 Kleine Literatur>의 이론을 바탕으로 개인과 집단 간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최근에는 다양한 해석들이 한국에서도 시도되고 있으며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도 관심을 보인다. 외국에서 여가수라는 젠더 관점이나 유대인의 역사 등의 시각을 투영한 연구들이 나오는 점을 고려해보면, 한국에서도 더욱 다양한 번역과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라 기대된다. 또한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난해한 작품이 가진 많은 수수께끼들이 여러 방식으로 풀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앞으로 더욱 섬세하고 세심한 해석들이 담긴 번역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김정진(1974): 歌姬 요제피네. 삼성출판사.
김창활(1978): 가수 요제휘이네. 태창출판사.
홍경호(1981): 가희 요제피네. 금성출판사.
박환덕(1989):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일족. 범우사.
이주동(1997):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 솔출판사.
권세훈(2006):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 가지않은길.
홍성광(2010): 가수 요제피네, 또는 쥐들의 종족. 열린책들.
김해생(2019):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스피리투스.
박병덕(2020):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종족. 현대문학.
-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