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의 방문 (Der Besuch der alten Dame)"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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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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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은 1955년에 3막 극으로 쓰인 희곡으로 이듬해 1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첫 공연이 열렸다. 그 후 세계 곳곳에서 거듭 공연되면서 뒤렌마트의 대표작으로 유명해졌다. 국내에서는 1968년에 강두식이 처음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번역본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밖에 박종서의 번역(1976, 정음사), 황현수의 번역(1984, 범한출판사), 최병준의 번역(1999, 예니), 김혜숙의 번역(민음사, 2011)이 있다. 황현수의 번역은 범한출판사에서 펴낸 〈현대희곡선〉에 들어있는데 바로 앞에 나오는 다른 작품과 제목이 바뀌어 실려 있다. 2005년에 〈연극과 인간〉에서 편찬한 〈현대 고전 희곡선〉에 실린 정진수의 번역은 영문판을 저본으로 한 중역이다. 박종서는 정음사에서 번역을 발표한 동시에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주석을 단 독일어 원본을 출판했다. 이 원본은 작품의 두 판본 중 초판에 속하는데 1980년에 개정판이 출간된다. 강두식 번역을 제외하고 네 가지 번역본 중 박종서와 황현수의 번역은 초판을, 최병준과 김혜숙의 번역을 개정판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노부인의 방문〉은 국내 공연도 이루어졌다. 1994년에 국립중앙극장에서 클라우스 메츠거가 연출하고 최병준이 대본을 맡은 공연도 열렸고, 2005년에 원영오가 연출한 ‘극단 김금지’의 공연도 있다. 2005년의 공연이 어느 번역본을 각색의 토대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잡지 〈공연과 리뷰〉의 2005년 3월호에 이용은과 김현옥의 평론이 실리는데, 전자는 사회비판적 요소와 병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강조한 연출에 주목하고, 후자는 몸짓, 음악, 오브제, 의상 등 말을 넘어 새로운 언어를 시각화하는 연출기법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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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인의 방문〉의 번역본들은 대체로 무난하게 읽힌다. 소설과 달리 희곡 작품은 구술성의 대화적 언어가 지배적이라 번역본을 읽었을 때 특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텍스트 구역은 소설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러나 번역본들을 비교하고 원문과 대조해보면 몇 가지 관점에서 따져볼 부분이 있다. 먼저 모든 번역본에 ‘비극적 희극’이라는 작품 부제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비극적 희극이라는 부제는 작품에 깔린 작가의 세계관 및 희곡 관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번역 프로젝트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황현수를 제외하고 번역가들은 모두 작품 해설을 간략하게나마 제시한다. 박종서와 김혜숙은 작품의 희비극성에 주목하고, 최병준은 희비극성보다 그로테스크라는 서술기법을 강조하는 편이다. 다음에서는 박종서, 황현수, 최병준, 김혜숙 번역을 중심으로 작품의 특징이 번역본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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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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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종서(1976)|박종서 역의 <노부인의 방문>(1976)]]<span id="박종서(1976)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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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는 해설에서 정의 모티프, 1대 다수의 인물 구성, 언어와 동작을 통한 희극성 등 작품의 특징을 여러모로 소개한다. 작품의 희비극성에 대해서 박종서는, “전반부에서는 빈번한 장면 변화와 아울러 언어와 동작으로써 희극적인 장면이 이중 삼중 무대를 이루며 전개되다가, 후반부에서는 일 씨의 죽음에 대한 초조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비극적인 줄거리의 전개가 비극적인 코로스로 끝을 맺게 된다.”라고 기술한다. 박종서는 다른 번역에 비해 다소 구식으로 들리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올시다.”, “∽하슈”, “∽하다우”와 같은 종결어미를 사용한다거나 재혼한 남편을 “새 영감님”으로 번역한다. “뉴우요오크”, “코오피”, “지이메트 호오퍼”(Siemet Hofer), ‘짜하나시안’ 등 원문의 발음에 더욱 가깝게 가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흥미롭게도 박종서는 ‘간투사 “Hopsi”를 “홉시”라고 옮긴다. 다른 번역가들은 “아이구 맙소사”(최병준 85), “자기”(김혜숙 63) 혹은 “맙소사”(김혜숙 66) 등으로 옮기면서 토착화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게 생소한 간투사를 그대로 옮기는 이국화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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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사의 따라 말하기는 작품에서 종종 등장한다. 한 인물의 대사를 다른 인물들이 자구 그대로 따라 말하는 대사에는 집단적인 획일성, 익명성을 언어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 귈렌 시의 시민들이 일을 살해하면 그 대가로 엄청난 돈을 주겠다는 노부인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돈에 대한 욕망으로 점차로 그 제안에 동조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러한 따라 말하기가 나타난다.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치려는 일 앞에 나타난 시민들은 말로는 잘 가라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그를 막아서면서 시장의 말 “Wir begleiten Sie!”를 복창한다. 그런데 시장의 말은 “모셔다드리죠”로 번역하는 데 반해, 시민들의 복창은 “모셔다드리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73)로 번역한다. 또한 “Am sichtersten.”은 “제일 안전할 텐데요.”, “제일 안전하죠”, “제일 안전해요.”(74) 등으로 변주된다. 같은 대사가 반복할 때 종결어미를 바꾸는 번역 전략은 모든 번역에서 공통으로 확인된다. 여기에는 똑같은 표현의 반복을 피하라는 토착어 문화의 규범이 은연중에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내용 전달 차원뿐 아니라 문장의 독특한 구성, 문체, 시제, 어휘 등 언어의 표현 차원에 주목해야 하는 문학 번역의 특수성에 대한 고려보다 토착어 문화 규범의 준수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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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황현수(1984)| 황현수 역의 <귀부인의 방문>(1984)]]<span id="황현수(1984)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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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수는 작품 제목을 ‘귀부인의 방문’으로 옮기는데 제목의 이러한 의역이 적절한지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 황현수는 ‘레터링’, ‘블론드’, ‘하트’, ‘바이블’, ‘차밍하다’, ‘아베크’ 등 영어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황현수는 본문 안에서 등장인물의 말의 의미를 부연해 설명하거나 언급된 작가를 소개하는 주석을 괄호 안에 넣기도 한다. 간투사 ‘Hopsi’는 “절뚝씨”(241)라고 옮기는데 황현수는 차하나시안이 “의수와 의족으로 절뚝거리기 때문에 붙인 애칭”이라는 주석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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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하나시안과 일의 대화를 옮길 때 황현수는 상호 대칭적으로“∽해요”체를 일관되게 사용한다. 이는 서너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남녀의 대화체를 비대칭적으로 옮기고 있는 다른 번역들과 구분되는 점이다. 황현수의 번역도 전반적으로 매끄럽게 읽히는 편이나 오역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접속사를 다른 의미로 잘못 번역해서 전체 문장의 의미가 잘못 전달되거나(‘wie’를 ‘∽때문에’로 번역. 222), 단어를 바꿔쓰거나(‘어머님’을 ‘아버님’으로 번역. 230), 긍정을 부정으로 번역하거나(‘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를 ‘하느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로 번역. 252), 문장을 부정확하게 번역하는 경우(“Tun gerade, als ob wir die reinsten Mörder wären!”을 “우리들이 정직한 살인자가 되려고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로 번역. 26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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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저본을 사용한 박종서의 번역보다 오역이 많은 편이지만, 개선한 부분들도 있다. 박종서는 “Wir sind keine Heiden.”에서 ‘Heiden을 ‘야만인’으로 의역하고 있는데 반해, 황현수는 이를 ‘이교도’(235)로 직역한다. 또한 과거 귈렌 시 판사였던 집사가 귈렌 시민들 앞에서 노부인을 향해 사용한 ‘Klägerin’이라는 호칭을 박종서처럼 ‘부인’으로 의역하지 않고 ‘원고’로 되돌려놓는다. 원문 텍스트의 의미와 거기에 깔린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의역이 아니라 직역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위 예문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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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병준(1999)| 최병준 역의 <노부인의 방문>(1999)]]<span id="최병준(1999)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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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국립중앙극장 공연 각본을 썼던 최병준은 1999년에 낸 번역본에서 당시 공연이 “그로테스크는 지워버린 공연”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차하나시안은 자신을 배반하고 인생의 나락으로 빠뜨린 옛 애인 일을 죽여 그의 왕릉을 카프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만들어 사랑을 되찾는다는 그로테스크한 생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의족과 의수로 된 그녀의 용모뿐 아니라 자신의 재력을 통해 남자들을 거세하거나 지배하거나 이용하는 비인간적인 그녀의 행동 역시 그로테스크하다. 그런데 그녀가 일과 나누는 대화는 주로 청춘 시절의 사랑을 소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그녀가 지닌 폭력성, 공격성, 기괴성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최병준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를 우리말 종결어미 용법에서 찾는다. 우리말에서 종결어미는 인물 간의 관계나 대화 상황, 대화자의 주관적 심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최병준의 번역에서 일은 대체로 차하나시안에게 격식체로 존대 예사 높임(∽오, ∽소, ∽구려, ∽우)을 사용하고, 차하나시안은 비격식체로 존대 두루높임 ‘∽해요’ 체를 사용한다. 그런데 차하나시안의 어투가 대화 와중에 가끔 비격식체, 즉 비존대 두루낮춤 ‘∽어’, ‘∽군’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다른 번역본들이 차하나시안과 일의 대화를 옮길 때 각자의 어투를 유지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다. 차하나시안이 쓰는 ‘∽해요’ 체는 갑자기 “내가 지옥이 되어버렸군.”(49), “세상이 내거니까.”(50), “푼돈이군.”(51), “날 죽이진 못했어.”(53) 등에서 보듯 권위적인 어감을 지닌 종결어미로 바뀌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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귈렌 시민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의식적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일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처음에는 일의 살해에 동의하지 않던 귈렌 시민들에게 나타난 심상치 않은 조짐을 두고 교장은 “Ungeheuerliche Dinge bereiten sich vor in Guellen.”이라고 실토한다. 최병준은 이를 “귈렌에서 엄청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153)라고 번역하고, 김혜숙도 “귈렌은 끔찍한 짓을 모의하고 있습니다!”(김혜숙 110)라고 옮김으로써 두 사람 모두 원문의 의도와는 다르게 번역한다. 이는 귈렌 시민들이 집단으로,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죄의 특수한 성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번역이다. 귈렌 시민들은 겉으로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각자 이기적인 물욕에 의해 움직인다. 그들이 일을 살해한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는 과정은 음모를 꾸미는 것과는 다르다. 귈렌 시민들이 일에게 가한 불의는 집단 최면처럼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무시무시한 일이 지금 귈렌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야”(박종서 93)라는 박종서의 번역이 원문의 의도에 맞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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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사의 따라하기를 번역할 때 종결어미를 변주하는 현상은 최병준 번역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교사가 “Ein Ehrenmann.”이라고 하자, 시민 1과 시민 2도 똑같이 따라 하는데, 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종결어미를 바꾸거나 감탄사를 첨가한다. “교장: 신사지./ 시민 1: 신사고 말고!/ 시민 2: 그럼, 신사지!”(122) “Aus Liebe”라는 말도 반복될 때마다 변형된다. “일의 아내: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귈렌 사람들: 사랑했기 때문에. 기자 1: 사랑했기 때문이라.”(149) 다만 다른 번역들은 이러한 번역 전략을 일관되게 구사하는 반면, 최병준은 그렇지는 않다. 때에 따라서는 반복 대사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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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혜숙(2011)| 김혜숙 역의 <노부인의 방문>(2011)]]<span id="김혜숙(2011)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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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의 번역은 다른 번역본에는 빠져 있는 작가의 주해를 싣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른 번역과 비교해서 김혜숙의 번역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극의 결말에 나오는 합창단 노래의 번역이다. 다음 합창의 번역에서 시행과 구문의 순서를 자유롭게 바꾼 최병준과 달리 김혜숙은 되도록 시행을 변화시키지 않고 구문도 최대한 살리는 번역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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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eheuer ist viel/ Gewaltig Erdbeben/ Feuerspeiende Berge, Fluten des Meeres/ Kriege auch, Panzer durch Kornfelder rasselnd/ Der sonnenhafte Pilz der Atombo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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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고 두렵구나, 엄청난 지진이여/ 불을 뿜는 산이여, 바다의 물결이여/ 옥토를 짓밟는 전차여, 전쟁이여/ 버섯 꽃을 피우는, 태양 같은 핵무기여.”(최병준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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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끔찍하도다./ 엄청난 지진./ 불을 뿜는 산, 밀려오는 바다 물결./ 전쟁도 마찬가지, 논밭을 질러가는 탱크/ 굉음을 내지른다./ 원자폭탄의 찬연한 버섯구름.”(김혜숙 15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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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된 구문이 나열될 때 명료화를 위해 원문에 없는 요소들을 첨가하는 경향은 다른 번역과 마찬가지로 김혜숙의 번역에도 나타난다. 원문에서 생략된 것을 첨가하게 되면 문체의 효과가 달라지고, 생략 자체가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옮길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다음 원문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차원 아래에서 화자의 만시지탄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귈렌 시민 총회에 가기 전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일은 차창 밖 풍경을 다음과 같이 스타카토 식으로 묘사한다. 번역은 이러한 스타카토 식 표현에 빠진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원문의 문체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문체에 의해 규정되는 의미 차원을 놓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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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nenblumen, Rosen in den Gärten beim Goethestor, Kinderlachen, Liebespaare übe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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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성문 옆 공원에는 해바라기랑 장미가 만발했고, 아이들 웃는 소리도 들리고, 여기저기 쌍쌍이 만나는 연인들도 많구나.”(김혜숙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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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 대명사는 번역에서 종종 어려움을 일으키는 요소에 속한다. 차하나시안과 일의 다음 대화에 나오는 ‘das’도 그렇다. 다음은 차하나시안의 무시무시한 계획을 전혀 모른 채 옛 시절을 회상하며 낭만적 기분에 젖은 일과 차하나시안의 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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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 Wäre doch die Zeit aufgehoben, mein Zauberhexchen. Hätte uns doch das Leben nicht getren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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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ire Zachanassian: Das wünschest 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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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간이 멈췄더라면, 내 귀여운 요술쟁이. 삶이 우리를 갈라놓지 못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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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차하나시안: 그랬길 바라나요?”(김혜숙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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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세월이란 게 없다면 얼마나 좋겠소, 내 귀여운 마녀. 삶이 우리를 갈라놓지만 않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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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하나시안: 그러길 원해요?”(최병준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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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제는 차하나시안의 말에 나오는 ‘das’가 무엇을 지시하는가이다. ‘das’가 일이 표현한 두 가지 원망 중에서 무엇을 가리키든 간에 “그랬길”은 비현실 과거를 가리키는 번역이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을 미리 알고 읽는다면, 차하나시안이 말한 ‘das’가 시간의 멈춤에 대한 일의 소망을 가리키는 동시에 차하나시안이 기획하는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김혜숙의 번역은 이러한 함축을 놓치게 되는데 무엇보다 일의 첫 번째 원망을 비현실 과거로 잘못 번역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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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은 선행 번역의 실수를 바로잡기도 한다. 예를 들어 “Hoffentlich stört Sie meine Fahne nicht”를 최병준은 “지금 내 기분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오.”(최병준 143)로 잘못 번역했는데, 이를 “술 냄새가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오.”(김혜숙 104)로 바로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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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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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를 위한 번역에서는 공연에서와 같은 무대효과나 연출기법을 대체할 표현 수단이 중요하다. 어투나 종결어미 선정이 중요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원문 텍스트를 보면 몇 군데 강조 표시를 한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자살을 권하는 귈렌 시민들을 향해서 자신은 이러한 권유를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서 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Ihr m ü ß t nun meine Richter sein”. 원문 텍스트에서 이 문장은 ‘∽해야 한다’에 해당하는 단어 ‘müßt’의 철자 사이에 간격을 넣어 강조를 표시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번역은 모두 이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 공연에서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천천히 발음함으로써 강조 효과를 반영할 수 있지만 읽기를 위한 번역본에서 이러한 효과는 시각적인 차별화를 통해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앞으로 공연과의 연관성을 보다 의식하는 새로운 번역 시도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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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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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1976): 노부인의 방문. 정음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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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수(1984): 귀부인의 방문. 범한출판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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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준(1999): 노부인의 방문. 예니.<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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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2011): 노부인의 방문. 민음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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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2일 (목) 09:36 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Friedrich Dürrenmatt, 1921-1990)의 희비극


작품소개

스위스 극작가 뒤렌마트의 3막으로 된 희비극이다. 테레제 기제의 주연으로 1956년 1월 29일 취리히에서 초연되었다. 이 극으로 뒤렌마트는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재정적으로도 독립한다. 백만장자가 된 클레어 차하나시안은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가난한 소도시 귈렌을 방문한다. 주민들은 그녀에게서 경제적 도움과 투자를 희망하지만, 클레어는 과거의 애인에 대한 복수를 원한다. 열일곱의 클라라는 열아홉 살 난 알프레트 일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지만, 일은 그 같은 사실을 부정하고 증인을 매수하여 클라라가 제기한 소송에서 승리한다. 클라라는 무일푼으로 마을을 떠났고 아이도 잃고 매춘부가 되지만, 나중에 원전 소유자와 결혼하고 그 후로도 여덟 번의 결혼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얻는다. 마을에서 치욕스럽게 쫓겨난 지 45년 만에 돌아온 그녀는 몰락해 가는 마을 주민들에게 놀라운 제안을 한다. 알프레드 일을 죽이면 귈렌 시를 위해 십억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일은 자기 잘못을 사과하고 클라라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처음에는 클라라의 제안을 거부하던 마을 사람들은 점점 돈에 혈안이 되어 일의 죽음을 원한다. 마을 회의에 모인 주민들은 일을 포위한 채 점차 원을 좁혀가고, 나중에 일은 죽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된다. 의사와 시장은 일이 심장마비 때문에 혹은 기뻐서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클라라는 시장에게 십억짜리 수표를 건네주고는 죽은 애인의 시신을 넣은 관을 싣고 이미 일의 묘가 마련되어 있는 카프리를 향해 떠난다. 국내 초역은 1968년 강두식에 의해 이루어졌다(괴테문화원).


초판 정보

Dürrenmatt, Friedrich(1956): Der Besuch der alten Dame. Eine tragische Komödie. Zürich: Arche.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노부인의 방문 노부인의 방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강두식 1968 괴테문화원 - 편역 확인불가
2 老婦人의 訪問 老婦人의 訪問 外 正音文庫 122 R. 뒤렌마트 朴鍾緖 1976 正音社 5-128 편역 완역
3 귀부인 고향에 돌아오다 現代戱曲選 현대의 세계문학,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32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黃玄守 1984 汎韓出版社 300-373 편역 완역
4 老부인의 방문 老부인의 방문 뒤렌마트 대표희곡선집 1 뒤렌마트 최병준 1999 예니 7-210 완역 완역
5 노부인의 방문 현대 고전 희곡선 = Plays from the modern classics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정진수 2005 연극과 인간 381-461 편역 완역 중역(영문판을 번역)
6 노부인의 방문 뒤렌마트 희곡선 세계문학전집 26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김혜숙 2011 민음사 7-176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은 1955년에 3막 극으로 쓰인 희곡으로 이듬해 1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첫 공연이 열렸다. 그 후 세계 곳곳에서 거듭 공연되면서 뒤렌마트의 대표작으로 유명해졌다. 국내에서는 1968년에 강두식이 처음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번역본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밖에 박종서의 번역(1976, 정음사), 황현수의 번역(1984, 범한출판사), 최병준의 번역(1999, 예니), 김혜숙의 번역(민음사, 2011)이 있다. 황현수의 번역은 범한출판사에서 펴낸 〈현대희곡선〉에 들어있는데 바로 앞에 나오는 다른 작품과 제목이 바뀌어 실려 있다. 2005년에 〈연극과 인간〉에서 편찬한 〈현대 고전 희곡선〉에 실린 정진수의 번역은 영문판을 저본으로 한 중역이다. 박종서는 정음사에서 번역을 발표한 동시에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주석을 단 독일어 원본을 출판했다. 이 원본은 작품의 두 판본 중 초판에 속하는데 1980년에 개정판이 출간된다. 강두식 번역을 제외하고 네 가지 번역본 중 박종서와 황현수의 번역은 초판을, 최병준과 김혜숙의 번역을 개정판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노부인의 방문〉은 국내 공연도 이루어졌다. 1994년에 국립중앙극장에서 클라우스 메츠거가 연출하고 최병준이 대본을 맡은 공연도 열렸고, 2005년에 원영오가 연출한 ‘극단 김금지’의 공연도 있다. 2005년의 공연이 어느 번역본을 각색의 토대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잡지 〈공연과 리뷰〉의 2005년 3월호에 이용은과 김현옥의 평론이 실리는데, 전자는 사회비판적 요소와 병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강조한 연출에 주목하고, 후자는 몸짓, 음악, 오브제, 의상 등 말을 넘어 새로운 언어를 시각화하는 연출기법을 강조한다.

〈노부인의 방문〉의 번역본들은 대체로 무난하게 읽힌다. 소설과 달리 희곡 작품은 구술성의 대화적 언어가 지배적이라 번역본을 읽었을 때 특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텍스트 구역은 소설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러나 번역본들을 비교하고 원문과 대조해보면 몇 가지 관점에서 따져볼 부분이 있다. 먼저 모든 번역본에 ‘비극적 희극’이라는 작품 부제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비극적 희극이라는 부제는 작품에 깔린 작가의 세계관 및 희곡 관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번역 프로젝트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황현수를 제외하고 번역가들은 모두 작품 해설을 간략하게나마 제시한다. 박종서와 김혜숙은 작품의 희비극성에 주목하고, 최병준은 희비극성보다 그로테스크라는 서술기법을 강조하는 편이다. 다음에서는 박종서, 황현수, 최병준, 김혜숙 번역을 중심으로 작품의 특징이 번역본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 박종서 역의 <노부인의 방문>(1976)

박종서는 해설에서 정의 모티프, 1대 다수의 인물 구성, 언어와 동작을 통한 희극성 등 작품의 특징을 여러모로 소개한다. 작품의 희비극성에 대해서 박종서는, “전반부에서는 빈번한 장면 변화와 아울러 언어와 동작으로써 희극적인 장면이 이중 삼중 무대를 이루며 전개되다가, 후반부에서는 일 씨의 죽음에 대한 초조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비극적인 줄거리의 전개가 비극적인 코로스로 끝을 맺게 된다.”라고 기술한다. 박종서는 다른 번역에 비해 다소 구식으로 들리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올시다.”, “∽하슈”, “∽하다우”와 같은 종결어미를 사용한다거나 재혼한 남편을 “새 영감님”으로 번역한다. “뉴우요오크”, “코오피”, “지이메트 호오퍼”(Siemet Hofer), ‘짜하나시안’ 등 원문의 발음에 더욱 가깝게 가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흥미롭게도 박종서는 ‘간투사 “Hopsi”를 “홉시”라고 옮긴다. 다른 번역가들은 “아이구 맙소사”(최병준 85), “자기”(김혜숙 63) 혹은 “맙소사”(김혜숙 66) 등으로 옮기면서 토착화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게 생소한 간투사를 그대로 옮기는 이국화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같은 대사의 따라 말하기는 작품에서 종종 등장한다. 한 인물의 대사를 다른 인물들이 자구 그대로 따라 말하는 대사에는 집단적인 획일성, 익명성을 언어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 귈렌 시의 시민들이 일을 살해하면 그 대가로 엄청난 돈을 주겠다는 노부인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돈에 대한 욕망으로 점차로 그 제안에 동조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러한 따라 말하기가 나타난다.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치려는 일 앞에 나타난 시민들은 말로는 잘 가라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그를 막아서면서 시장의 말 “Wir begleiten Sie!”를 복창한다. 그런데 시장의 말은 “모셔다드리죠”로 번역하는 데 반해, 시민들의 복창은 “모셔다드리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73)로 번역한다. 또한 “Am sichtersten.”은 “제일 안전할 텐데요.”, “제일 안전하죠”, “제일 안전해요.”(74) 등으로 변주된다. 같은 대사가 반복할 때 종결어미를 바꾸는 번역 전략은 모든 번역에서 공통으로 확인된다. 여기에는 똑같은 표현의 반복을 피하라는 토착어 문화의 규범이 은연중에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내용 전달 차원뿐 아니라 문장의 독특한 구성, 문체, 시제, 어휘 등 언어의 표현 차원에 주목해야 하는 문학 번역의 특수성에 대한 고려보다 토착어 문화 규범의 준수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2) 황현수 역의 <귀부인의 방문>(1984)

황현수는 작품 제목을 ‘귀부인의 방문’으로 옮기는데 제목의 이러한 의역이 적절한지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 황현수는 ‘레터링’, ‘블론드’, ‘하트’, ‘바이블’, ‘차밍하다’, ‘아베크’ 등 영어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황현수는 본문 안에서 등장인물의 말의 의미를 부연해 설명하거나 언급된 작가를 소개하는 주석을 괄호 안에 넣기도 한다. 간투사 ‘Hopsi’는 “절뚝씨”(241)라고 옮기는데 황현수는 차하나시안이 “의수와 의족으로 절뚝거리기 때문에 붙인 애칭”이라는 주석도 단다.

차하나시안과 일의 대화를 옮길 때 황현수는 상호 대칭적으로“∽해요”체를 일관되게 사용한다. 이는 서너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남녀의 대화체를 비대칭적으로 옮기고 있는 다른 번역들과 구분되는 점이다. 황현수의 번역도 전반적으로 매끄럽게 읽히는 편이나 오역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접속사를 다른 의미로 잘못 번역해서 전체 문장의 의미가 잘못 전달되거나(‘wie’를 ‘∽때문에’로 번역. 222), 단어를 바꿔쓰거나(‘어머님’을 ‘아버님’으로 번역. 230), 긍정을 부정으로 번역하거나(‘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를 ‘하느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로 번역. 252), 문장을 부정확하게 번역하는 경우(“Tun gerade, als ob wir die reinsten Mörder wären!”을 “우리들이 정직한 살인자가 되려고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로 번역. 264) 등이다.

같은 저본을 사용한 박종서의 번역보다 오역이 많은 편이지만, 개선한 부분들도 있다. 박종서는 “Wir sind keine Heiden.”에서 ‘Heiden을 ‘야만인’으로 의역하고 있는데 반해, 황현수는 이를 ‘이교도’(235)로 직역한다. 또한 과거 귈렌 시 판사였던 집사가 귈렌 시민들 앞에서 노부인을 향해 사용한 ‘Klägerin’이라는 호칭을 박종서처럼 ‘부인’으로 의역하지 않고 ‘원고’로 되돌려놓는다. 원문 텍스트의 의미와 거기에 깔린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의역이 아니라 직역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위 예문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3) 최병준 역의 <노부인의 방문>(1999)

1994년에 국립중앙극장 공연 각본을 썼던 최병준은 1999년에 낸 번역본에서 당시 공연이 “그로테스크는 지워버린 공연”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차하나시안은 자신을 배반하고 인생의 나락으로 빠뜨린 옛 애인 일을 죽여 그의 왕릉을 카프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만들어 사랑을 되찾는다는 그로테스크한 생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의족과 의수로 된 그녀의 용모뿐 아니라 자신의 재력을 통해 남자들을 거세하거나 지배하거나 이용하는 비인간적인 그녀의 행동 역시 그로테스크하다. 그런데 그녀가 일과 나누는 대화는 주로 청춘 시절의 사랑을 소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그녀가 지닌 폭력성, 공격성, 기괴성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최병준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를 우리말 종결어미 용법에서 찾는다. 우리말에서 종결어미는 인물 간의 관계나 대화 상황, 대화자의 주관적 심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최병준의 번역에서 일은 대체로 차하나시안에게 격식체로 존대 예사 높임(∽오, ∽소, ∽구려, ∽우)을 사용하고, 차하나시안은 비격식체로 존대 두루높임 ‘∽해요’ 체를 사용한다. 그런데 차하나시안의 어투가 대화 와중에 가끔 비격식체, 즉 비존대 두루낮춤 ‘∽어’, ‘∽군’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다른 번역본들이 차하나시안과 일의 대화를 옮길 때 각자의 어투를 유지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다. 차하나시안이 쓰는 ‘∽해요’ 체는 갑자기 “내가 지옥이 되어버렸군.”(49), “세상이 내거니까.”(50), “푼돈이군.”(51), “날 죽이진 못했어.”(53) 등에서 보듯 권위적인 어감을 지닌 종결어미로 바뀌곤 한다.

귈렌 시민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의식적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일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처음에는 일의 살해에 동의하지 않던 귈렌 시민들에게 나타난 심상치 않은 조짐을 두고 교장은 “Ungeheuerliche Dinge bereiten sich vor in Guellen.”이라고 실토한다. 최병준은 이를 “귈렌에서 엄청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153)라고 번역하고, 김혜숙도 “귈렌은 끔찍한 짓을 모의하고 있습니다!”(김혜숙 110)라고 옮김으로써 두 사람 모두 원문의 의도와는 다르게 번역한다. 이는 귈렌 시민들이 집단으로,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죄의 특수한 성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번역이다. 귈렌 시민들은 겉으로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각자 이기적인 물욕에 의해 움직인다. 그들이 일을 살해한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는 과정은 음모를 꾸미는 것과는 다르다. 귈렌 시민들이 일에게 가한 불의는 집단 최면처럼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무시무시한 일이 지금 귈렌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야”(박종서 93)라는 박종서의 번역이 원문의 의도에 맞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대사의 따라하기를 번역할 때 종결어미를 변주하는 현상은 최병준 번역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교사가 “Ein Ehrenmann.”이라고 하자, 시민 1과 시민 2도 똑같이 따라 하는데, 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종결어미를 바꾸거나 감탄사를 첨가한다. “교장: 신사지./ 시민 1: 신사고 말고!/ 시민 2: 그럼, 신사지!”(122) “Aus Liebe”라는 말도 반복될 때마다 변형된다. “일의 아내: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귈렌 사람들: 사랑했기 때문에. 기자 1: 사랑했기 때문이라.”(149) 다만 다른 번역들은 이러한 번역 전략을 일관되게 구사하는 반면, 최병준은 그렇지는 않다. 때에 따라서는 반복 대사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4) 김혜숙 역의 <노부인의 방문>(2011)

김혜숙의 번역은 다른 번역본에는 빠져 있는 작가의 주해를 싣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른 번역과 비교해서 김혜숙의 번역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극의 결말에 나오는 합창단 노래의 번역이다. 다음 합창의 번역에서 시행과 구문의 순서를 자유롭게 바꾼 최병준과 달리 김혜숙은 되도록 시행을 변화시키지 않고 구문도 최대한 살리는 번역을 선택한다.

“Ungeheuer ist viel/ Gewaltig Erdbeben/ Feuerspeiende Berge, Fluten des Meeres/ Kriege auch, Panzer durch Kornfelder rasselnd/ Der sonnenhafte Pilz der Atombombe.”

“무섭고 두렵구나, 엄청난 지진이여/ 불을 뿜는 산이여, 바다의 물결이여/ 옥토를 짓밟는 전차여, 전쟁이여/ 버섯 꽃을 피우는, 태양 같은 핵무기여.”(최병준 206) 
“참으로 끔찍하도다./ 엄청난 지진./ 불을 뿜는 산, 밀려오는 바다 물결./ 전쟁도 마찬가지, 논밭을 질러가는 탱크/ 굉음을 내지른다./ 원자폭탄의 찬연한 버섯구름.”(김혜숙 150-151)

생략된 구문이 나열될 때 명료화를 위해 원문에 없는 요소들을 첨가하는 경향은 다른 번역과 마찬가지로 김혜숙의 번역에도 나타난다. 원문에서 생략된 것을 첨가하게 되면 문체의 효과가 달라지고, 생략 자체가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옮길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다음 원문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차원 아래에서 화자의 만시지탄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귈렌 시민 총회에 가기 전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일은 차창 밖 풍경을 다음과 같이 스타카토 식으로 묘사한다. 번역은 이러한 스타카토 식 표현에 빠진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원문의 문체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문체에 의해 규정되는 의미 차원을 놓치고 만다.

“Sonnenblumen, Rosen in den Gärten beim Goethestor, Kinderlachen, Liebespaare überall.” 
“괴테 성문 옆 공원에는 해바라기랑 장미가 만발했고, 아이들 웃는 소리도 들리고, 여기저기 쌍쌍이 만나는 연인들도 많구나.”(김혜숙 124)

지시 대명사는 번역에서 종종 어려움을 일으키는 요소에 속한다. 차하나시안과 일의 다음 대화에 나오는 ‘das’도 그렇다. 다음은 차하나시안의 무시무시한 계획을 전혀 모른 채 옛 시절을 회상하며 낭만적 기분에 젖은 일과 차하나시안의 대화이다.

“Ill: Wäre doch die Zeit aufgehoben, mein Zauberhexchen. Hätte uns doch das Leben nicht getrennt. 
Claire Zachanassian: Das wünschest du?”
“일: 시간이 멈췄더라면, 내 귀여운 요술쟁이. 삶이 우리를 갈라놓지 못했을 텐데.
클레어 차하나시안: 그랬길 바라나요?”(김혜숙 42)
“일: 세월이란 게 없다면 얼마나 좋겠소, 내 귀여운 마녀. 삶이 우리를 갈라놓지만 않았더라도.
차하나시안: 그러길 원해요?”(최병준 52)

여기서 문제는 차하나시안의 말에 나오는 ‘das’가 무엇을 지시하는가이다. ‘das’가 일이 표현한 두 가지 원망 중에서 무엇을 가리키든 간에 “그랬길”은 비현실 과거를 가리키는 번역이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을 미리 알고 읽는다면, 차하나시안이 말한 ‘das’가 시간의 멈춤에 대한 일의 소망을 가리키는 동시에 차하나시안이 기획하는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김혜숙의 번역은 이러한 함축을 놓치게 되는데 무엇보다 일의 첫 번째 원망을 비현실 과거로 잘못 번역하기 때문이다.

김혜숙은 선행 번역의 실수를 바로잡기도 한다. 예를 들어 “Hoffentlich stört Sie meine Fahne nicht”를 최병준은 “지금 내 기분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오.”(최병준 143)로 잘못 번역했는데, 이를 “술 냄새가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오.”(김혜숙 104)로 바로 잡는다.


3. 평가와 전망

읽기를 위한 번역에서는 공연에서와 같은 무대효과나 연출기법을 대체할 표현 수단이 중요하다. 어투나 종결어미 선정이 중요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원문 텍스트를 보면 몇 군데 강조 표시를 한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자살을 권하는 귈렌 시민들을 향해서 자신은 이러한 권유를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서 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Ihr m ü ß t nun meine Richter sein”. 원문 텍스트에서 이 문장은 ‘∽해야 한다’에 해당하는 단어 ‘müßt’의 철자 사이에 간격을 넣어 강조를 표시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번역은 모두 이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 공연에서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천천히 발음함으로써 강조 효과를 반영할 수 있지만 읽기를 위한 번역본에서 이러한 효과는 시각적인 차별화를 통해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앞으로 공연과의 연관성을 보다 의식하는 새로운 번역 시도를 기대해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종서(1976): 노부인의 방문. 정음사.
황현수(1984): 귀부인의 방문. 범한출판사.
최병준(1999): 노부인의 방문. 예니.
김혜숙(2011): 노부인의 방문. 민음사.

윤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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