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Das Ende der Welt)"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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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2일 (목) 12:25 판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의 소설


작품소개

1,500편이 넘는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 텍스트 중 편역자가 61편을 직접 선별하여 번역하였다. 역자 임홍배는 주제별로 1부 ‘자연·가족·자화상’, 2부 ‘사랑과 고독’, 3부 ‘세상의 이치’, 4부 ‘삶과 노동’, 5부 ‘문학예술론’이란 총 5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선집의 제목으로 선택된 <세상의 끝>은 세상의 끝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부모도 형제자매도, 집도 없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이는 16년 동안이나 정처 없이 헤맨다. 발저의 유머, 그의 사색과 자연에 대한 애착, 고향에 대한 사변들이 길을 떠난 아이의 이야기에 농축되어 있다. 발저의 산문은 대개 화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지만, 전통적인 이야기 장르의 근간이 되는 특이한 사건이나 플롯은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대부분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전적 성격과 허구적 요소가 결합된 양상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산문은 ‘자전적 허구’(Autofiction)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2017년 임홍배에 의해 편역되었다(문학판).


초판 정보

Walser, Robert(1914): Das Ende der Welt. In: Geschichten. Leipzig: Kurt Wolff.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세상의 끝 세상의 끝 로베르트 발저 임홍배 2017 문학판 299-302 편역 완역
2 세상의 끝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2017 한겨레출판 81-85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2017년에 문학판에서 출판된 <세상의 끝><Das Ende der Welt)은 임홍배가 1,500여 편에 이르는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 중에서 총 61편을 선별하여 번역한 작품들을 담고 있다. 이는 국내에서 나온 발저의 산문집 번역 중 가장 많은 분량에 속한다. 국내 최초의 발저 산문집으로는 2003년 박신자에 의해 번역된 <프리츠 코허의 작문>(Fritz Kochers Aufsätze)(이유)을 들 수 있다. 그 후 박광자의 <산책>(Der Spaziergang)(민음사 2016), 배수아의 번역으로 <산책자>(Der Spaziergänger)(한겨레 2017)가 출판되었으나 이들과 비교해 <세상의 끝>은 보다 많은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 셈이다.

편역자인 임홍배는 수록된 텍스트를 주제별로 크게 5개의 장(1. 자연, 가족, 자화상 2. 사랑과 고독 3. 세상의 이치 4. 삶과 노동 5. 문학예술론)으로 나누고 각각의 텍스트를 이에 맞추어 분류했다. 표제작인 <세상의 끝>은 그중 한 편에 해당한다. 역자가 해설에서 밝히고 있듯이 여러 권의 발저 산문에서 산발적으로 선별한 만큼, 각각의 텍스트들이 들어 있는 원출처를 밝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임홍배 역의 <세상의 끝>(2017)

일찍부터 번역과 문학비평 작업에 몰두해 온 몇 안 되는 독문학자 중 한 사람인 임홍배의 번역은 독자들에게 일단 신뢰감을 준다. 그의 번역은 의미 전달의 차원에서 정확성이 높고, 도착어 글쓰기도 큰 무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번역문에서는 원문의 어순이 달라지기 때문에 의미론적으로도 미세한 변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번역 과정에서 이런 상이한 통사 구조에 따른 미세한 뉘앙스의 변화까지 고려하기란 쉽지 않지만, 역자로서의 임홍배는 이 부분까지 세심하게 염두에 둔 듯이 보인다.

발저 산문 텍스트의 특징으로 일반적 의미에서의 서사(Narration)의 부재 혹은 해체를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텍스트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 하나인 플롯, 혹은 줄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저의 경우 서사를 대신하여 텍스트의 흐름을 끌고 가는 주된 요소를 연상 작용과 리듬이라 불러보자.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휘나 문장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일 수도 있고, 음향적 요소일 수도 있다. 이때 문장의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의 요소나 음향적 요소는 다시 문맥적 차원의 리듬으로 합류된다. 플롯의 측면에서 강력한 연결성이 결여된 산문에서는 언어의 리듬적 요소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번역에서도 세부적인 이미지와 음향을 비롯하여 문장의 언어적, 시각적 리듬을 살려내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 같은 관점에서 <세상의 끝>의 번역을 살펴보자.

이 산문집에 실린 첫 번째 텍스트는 <그라이펜 호수>(Der Greifensee)다.

Der Greifensee
Es ist ein frischer Morgen und ich fange an, von der großen Stadt und dem großen bekannten See aus nach dem kleinen, fast unbekannten See zu marschieren. Auf dem Weg begegnet mir nichts als alles das, was einem gewöhnlichen Menschen auf gewöhnliche Wege begegnen kann. Ich sage ein paar fleißigen Schnittern “guten Tag”, das ist alles; ich betrachte mit Aufmerksamkeit die lieben Blumen, das ist wieder alles: ich fange gemütlich an, mit mir zu plaudern, das ist noch einmal alles. Ich achte auf keine landschaftliche Besonderheit, denn ich gehe und denke, daß es hier nichts Besonderes mehr für mich gibt. Und ich gehe so, und wie ich so gehe, habe ich schon das erste Dorf hinter mir, mit den breiten großen Häusern, mit den Gärten, welche zum Ruhen und Vergessen einladen, mit den Brunnen, welche platschen, mit den schönen Bäumen, Höfen, Wirtschaften und anderem, dessen ich mich in diesem vergeßlichen Augenblick nicht mehr erinnere. Ich gehe immer weiter und werde zuerst wieder aufmerksam, wie der See über grünem Laub und über stillen Tannenspitzen hevorschimmert, ich denke, das ist mein See, zu dem ich gehen muß, zu dem es mich hinzieht. (136f.) 

원문을 읽다 보면 대단히 리듬감 있게 읽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어휘들과(See, gewöhnlich, gehen, mit etc.) 그로 인한 동일한 음소(-en 혹은 nichts als alles das, was)의 반복, 어휘가 하나씩 첨가되기는 하지만 반복적인 문장(das ist alles, das ist wieder alles, das ist noch einmal alles.)이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나아가 <그라이펜 호수>에서는 무엇보다 화자의 걷는 행위가 일종의 내재적 박자처럼 작동해서 각 부분의 리듬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화자의 일상적인 걷는 행위와 연결된 리듬은 기복이 심하거나 극적이라기보다는 부드러운 수평으로 비교적 규칙적이고 단조롭게 이어진다. 여기서 시각적이나 청각적으로 반복적이고 평화로운 리듬을 방해하는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처럼 문장들의 리듬은 그다지 바쁘지 않아 보이는 화자의 걷는 동작이나 호흡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문장들을 임홍배는 어떻게 옮기고 있는가? 다시 말해, 발저 산문의 특징이라 부를 수 있는 리듬적 요소를 임홍배는 어떻게 살리는가? 이 부분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쾌한 아침이다. 나는 유명한 큰 호수가 있는 대도시를 벗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호수를 향해 길을 떠나기 시작한다. 가는 도중에 마주친 것은 죄다 평범한 길에서 평범한 사람이 마주칠 수 있는 것들뿐이다. 더러 부지런히 풀을 베는 농부들과 마주치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전부다. 예쁜 꽃이 눈에 띄면 유심히 살펴보고, 또 그것이 전부다. 그러다가 즐겁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그러면 또 그것이 전부다. 풍경의 특색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 속에서 나에게 특별한 풍경은 더 이상 없으려니 생각하며 걷는다. 나는 계속 걸어간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첫 번째 마을을 지나왔다. 크고 널찍한 집들도, 휴식과 망각을 선사하는 정원들도, 졸졸 흐르는 샘물도, 아름다운 나무들과 농장들과 식당들도 모두 지나치고, 이 망각의 순간에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다른 모든 것들도 그냥 지나친다. 그렇게 마냥 가다가 푸른 나뭇잎과 듬직한 전나무 꼭대기 너머로 반짝거리는 호수의 광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나는 생각한다. 저건 나의 호수라고. 나는 저기로 가야 하고, 저 호수가 나를 끌어 당긴다고.(임홍배 2017, 15) 

역자는 우선 원문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원문에서 반복되는 어휘(호수, 평범한 등)에 변화를 주지 않고 원문처럼 동일한 어휘를 사용한다든지, “그것이 전부다”와 같은 문장도 원문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본래의 리듬을 가급적 그대로 따른다. 다만 “지나왔다”의 경우 갑자기 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지금까지 현재형 어미가 주는 음소적 리듬감 (-ㄴ다)이 다소 깨지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마을 지나온 것은 이미 과거 사실이기 때문에 의미상으로는 과거시제가 더 맞다 하더라도, 리듬의 차원에서 보자면 현재시제가 더 어울릴 것이다.

또한 문장 차원의 리듬에서 보자면, 그는 도착문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이따금 번역문의 길이를 조절한다. 예를 들어 부문장이나 세미콜론과 같은 문장부호로 이어진 문장들을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문장으로 분리시킨다. 첫 문장의 경우, 마침표를 두어 끊음으로써 단문을 선호하는 한국어 리듬을 따르는 듯하다. 이로써 다음 문장과 연결되지 않고 번역문의 리듬은 원문보다 조금 빨라진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 이외에는 대체로 원문의 리듬과 일치시킨다.

다음으로는 표제작에 해당하는 <세상의 끝>을 살펴보자.

Fort und fort lief das Kind, es dachte sich das Ende der Welt zuerst als eine hohe Mauer, dann als einen tiefen Abgrund, dann als eine schöne grüne Wiese, dann als einen See, dann als ein Tuch mit Tüpfelchen, dann einen dicken breiten Brei, dann als bloße reine Luft, dann als eine weiße saubere Ebene, dann als Wonnemeer, worin es immerfort schaukeln könne, dann als einen bräunlichen Weg, dann als gar nichts oder als was es leider Gottes selber nicht recht wußte. 
아이는 계속 갔다. 세상의 끝이 처음에는 높은 성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깊은 낭떠러지, 때로는 아름다운 푸른 초원, 때로는 호수, 때로는 반점이 수놓인 수건, 때로는 냄비에 가득 담은 걸쭉한 죽, 때로는 맑은 허공, 때로는 온통 하얗게 펼쳐진 설원, 때로는 출렁이는 바다처럼 마냥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황홀경, 때로는 우중충한 잿빛의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또는 안타깝게도 하나님도 모르는 그 무엇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임홍배 2017, 300)

일반적으로 번역자의 어려움은 작가 고유의 독특한 연상 혹은 상상과 부딪쳤을 때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이 텍스트의 경우, 작가가 ‘세상의 끝’을 ‘einen dicken breiten Brei’나 혹은 ‘Wonnemeer, worin es immerfort schaukeln könne’로 상상하는 것은 대단히 독특하다. 이처럼 작가 특유의 비관습적인 표상은 번역을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역자의 각별한 역량을 요구한다. ‘einen dicken breiten Brei’를 ‘냄비에 가득 담은 걸쭉한 죽’으로, ‘Wonnemeer, worin es immerfort schaukeln könne’를 ‘출렁이는 바다처럼 마냥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황홀경’이라고 옮긴 것은 역자의 탁월한 공감 능력과 표현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다른 한편 원문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 있다. 걸쭉한 죽이 냄비에 가득 담겨 있을 필요는 없으며, ‘출렁이는 바다처럼 마냥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황홀경’도 원문에서 조금 멀어져 있다. 또한 ‘einen bräunlichen Weg’와 ‘우중충한 잿빛’은 다소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원문에서 사소하게 벗어난 부분을 두고 그의 번역 전체를 탓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것은 번역자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이고 해석이기 때문이다.

임홍배의 번역에서는 풍부한 한국어 어휘 구사가 눈에 띈다. 예컨대 <헤블링의 이야기>(Heblings Geschichte)에는 ‘이골이 났다 talentvoll’(380), ‘중뿔나게 herausplatzend’(378), ‘겁나게 denn ich langweilige mich zum Entsetzen’(384), ‘욕먹어도 싸다는 dass ich eine Rüge verdient habe’(384), ‘미욱하고 ein zu dunkles und wertloses Ding’(385), ‘토를 달 엄두도 못 내고 ich habe nichts dagegen einzuwenden gehabt’(395), ‘뻘쭘해진다 ich stehe wie ein ungelehriger Lehrling’(380) 등의 역어를 사용한다. 이는 역자가 관습적이고 색깔 없는 우리말 사용을 피하고 한국어의 생생한 표현을 살리고자 애쓴 흔적으로 보인다. 이로써 그는 발저의 언어가 가지는 무시간적(zeitlos)으로 떠도는 어휘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고, 생동감 있는 한국어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처럼 관습적이고 몰개성적인 관용어 대신 생생한 도착어를 찾아 구사하는 것은 역자 특유의 장점임이 분명하다. 다만, 발저의 경우 부분적으로는 20세기 초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영향으로 작가 특유의 장식적이고 부유하는 듯한 표현들이 도착어의 고유한 표현으로 확고하게 고정되어 버리는 느낌을 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3. 평가와 전망

임홍배의 <세상의 끝>은 2000년대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발저의 산문 번역에서 일종의 중간 결산에 속한다. 그것이 적지 않은 성과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발저의 산문 텍스트를 고려한다면 여전히 시작 단계에 해당된다. 특히 <마이크로그램>(Mikrogramme)과 같은 발저의 후기 산문들, 즉 발저가 발다우 요양소에 들어간 1929년 이후에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쓰인 숱한 텍스트 등을 고려하면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발저 문학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과 수요가 여전히 한정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더 많은 작품이 번역되어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확산되는 전기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임홍배(2017): 세상의 끝. 문학판.

안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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