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 (Mitte des Lebens)"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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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원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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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는 전후 독일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가 195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보다 앞선 1948년에 린저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소설 <바르샤바에서 온 장 로벨>로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한 바 있으나, 이 작품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이 작품은 수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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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주인공 니나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여류작가로서, 신념과 행동의 일치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삶의 형성자로서,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대조되는 참신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표현한다. 소설은 전통적이지 않은 니나의 삶을 입체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를 화자로 삼아 틀구조를 형성하고, 언니와 니나의 대화, 언니와 니나의 연인의 대화 등을 틀구조의 현재 시점에 배치한다. 그런 한편 니나를 평생 사랑하고 관찰해온 슈타인의 기록들, 관련된 편지와 일기 등을 통해 니나가 살아온 삶을 시공간적으로 재구성한다. 틀구조와 내부구조의 역동적인 혼합을 통해 여러 개의 서사층을 만들어내고, 슈타인의 기록물을 날짜가 뒤섞이게 전개하여 니나의 과거를 짜 맞추게 하는 이런 짜깁기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삶을 연대기적이거나 단층적으로 서술하는 전통적인 서술기법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의 특유한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삶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창의적인 형식의 실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번역에서는 틀구조의 화자인 언니, 내부구조의 화자 슈타인, 주인공 니나가 모두 일인칭 주어로 나오는 원문의 “다성적인” 특성을 살려 그들의 개성과 목소리를 적절하게 옮기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또한 여러 성장단계에서 표출되는 주인공 니나의 의식상태와 정신적 발달,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사용되는 어휘와 화법들을 적절하게 옮기는 것 역시 번역의 질과 성패를 가름하는 주요인이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편지, 일기, 대화에 사용되는 구어체는 대화 주체들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그 특성을 노출시킨다. 독일어에서는 크게 존칭과 반말로 구분되는 대화의 어법에 함축된 다양한 관계의 특질이 나이, 사회적 계급, 성별에 따라 크게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어의 어법으로 어떻게 옮겨지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다양하게 드러날 것이다. 또한 독일어에서는 인칭대명사로 표현되는 것이 한국어에서는 거의 언제나 호칭으로 표현되는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 지도 주요한 번역의 관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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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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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 소설은 1961년 독문학자 전혜린이 최초로 번역하여 신구문화사의 <세계전후문학전집 5 – 독일전후문제작품집>에 실렸다. 이 번역으로 루이제 린저는 한국 독자들에게 독일 나치 정권에 대항한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알려지게 된다. 게다가 린저 소설의 주인공 니나는 ‘삶의 한가운데에서’로 표방되는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하였으며, 이로써 독일 사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새로운 여성상의 출현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소설은 1965년 역자 전혜린의 예기치 못한 사망 이후 그녀의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실린 에세이 <생의 한가운데서 –니나의 경우>를 통해 60년대 한국 독자층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에 따라 1967년 문예출판사에서 전혜린의 번역이 개별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다음의 문장은 1960년대 린저의 소설과 전혜린의 번역 그리고 한국 내 수용 상황에 관해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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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루이제 린저는 한국에서 나치의 피해자이자 독일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인간을 지도·계발하는 계몽주의적 교육가였다. 그리고 소설 『생의 한가운데』는 당시 성장하는 젊은층의 여권인식과 남녀관계를 재고케 하는 연애소설, 전혜린이라는 현상, 실존주의의 ‘삶에서 스스로의 선택 자유와 책임’ ‘행복론’ 성해방의 욕망이 증가하는 성풍속도 등과 복잡하게 결부되면서 독자에게 읽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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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린저의 니나가 주목받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 소설의 속편 <속 생의 한가운데>가 1969년 강두식의 번역본으로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이로써 소위 “니나소설”이 모두 일찍이 한국에 소개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총 15편의 번역본이 출간되는데, 이 책의 번역이 급증한 것은 바로 한국 독자층의 열렬한 수요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곽복록의 번역이 1975년 문학출판사에서, 홍경호의 번역이 1975년 범우사에서, 차경아의 번역이 1977년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79년에 문예출판사는 강두식의 번역을 출간한다. 이 밖에도 정경석, 심현덕, 전원배, 김경은, 차경아, 김양순, 사공복희, 구충남, 이정태 등이 이 소설의 번역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도 루이제 린저의 작품들은 큰 인기를 끄는데, 이 소설의 번역서 역시 더욱 증가하여 총 20편이 출간된다. 이 시기에 김양순, 이정태, 곽복록, 강두식, 전원배, 홍경호와 같은 기존 번역본의 재판 외에도 윤순호, 정재현, 이민영, 김남환, 강석종, 김진현의 번역본이 새로이 출간되었다. 린저 붐은 1990년대에도 상승선을 그리면서 총 22편의 번역본이 출간된다. 역시 기존의 번역본 외에도 이강빈, 김진욱, 전희직, 최달식, 이영제, 이연태, 김남경 등의 번역본이 새로 선을 보였다. 이 중 1999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로 출간된 박찬일의 새로운 번역본은 2015년까지 총 45쇄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 이 소설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와 인기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지난 세기에 이 작품이 던졌던 실존주의적 질문, 여성해방, 현실참여와 같은 메시지들이 그사이 소위 신여성의 대중화 현상, 새로운 매체환경과 독자층 요구의 변화, 즉 21세기의 새로운 현실 문제에 밀려나면서 점차 영향력을 잃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2000년대에 총 6편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나 새로운 번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강두식, 전혜린 등 기존 번역본의 재판이 주류를 이루었고, 출판사가 “엮음”으로 출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향은 더욱 심화되어 2011년 이후에도 출판사의 “엮음”으로 출간된 번역본, 강두식 및 박찬일 등 기존의 번역이 거듭 인쇄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린저의 소설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이미 번역가와 독자의 관심에서 벗어났음을 시사한다. 이런 차에 2011년 독일에서 루이제 린저 탄생 100주년에 발간된 무릴로의 전기는 기존에 린저라는 작가를 각인했던 저항과 정의의 문학가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었다. 2011년 이후 한국 독자층에서 감지되는 린저의 소설에 대한 무관심 역시 이러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는 더 이상 번역되지 않고 한때 누렸던 호황의 여명 속에서 희미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 무관심의 한가운데서 2021년 3월 전혜린의 번역이 문예출판사에서 다시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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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여류작가의 작품이지만 여성 번역가가 번역한 경우는 많지 않다. 전혜린 외에도 차경아, 김양순을 꼽을 수 있으며, 대부분은 남성 번역가가 맡아 한국어로 옮겼다. “Mitte des Lebens”라는 원제목은 대부분 <생의 한가운데>로 번역되었으며, 1999년 민음사에서 나온 박찬일의 번역본만 <삶의 한가운데>로 변화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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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서는 이 작품의 번역사에서 주류를 형성해온 네 명의 번역자의 번역본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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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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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혜린 역의 <생의 한가운데>(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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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초역본으로 알려진 전혜린의 번역은 먼저 1961년 신구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5>에 실린 8편의 전후 독일작품 중 한 편이자 그중 가장 긴 분량의 작품이다. 이 전집의 편집위원들은 전후 독일문학의 전반적인 경향을 세 분야로 나누어 소개하면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그 중 독일 전위문학의 대표작으로 꼽았다<ref><세계전후문학전집> 5권에 해당하는 <독일전후문제작품집>의 편집위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전후문학을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1) 47 그룹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의 작품 같은 나치 저항문학, 2)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형이상학 문학, 3) 새로운 전위문학으로 편성했다. 이중 전위문학의 대표작으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선정하였다. 이해선, 양아람(2016): 루이제 린저의 수용과 한국사회의 ‘생의 한가운데’ - 신여성, 인생론, 세계여성의 해(1975), 북한바로알기운동(1988). 민족문화연구 73호(2016.11.30),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67-303. 이 중 272.</ref>. 이로써 루이제 린저가 전후 독일 작가로서 한국에 알려지게 되며, 그의 소설이 지닌 문학사적 의미와 위상도 인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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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의 번역은 원문의 충실성을 지키면서도 유려한 한국말로 번역하여 60년대임에도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번역체는 가능하면 독일어의 어순체계를 유지하는데, 그러나 이로 인해 어색한 말투가 발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독일어의 어순 혹은 문장론적 특징이 그대로 느껴지게 옮김으로써 발생하는 낯설음은 한국어의 리듬으로 녹여내지 못한 생경함을 일으키지만 그런데도 뭔가 새로운 사유 또는 새로운 감성을 유발시킨다. 이런 서구적 표현들은 어쩌면 소설이 그려내는 신여성에 대한 한국 독자층의 기대에 더욱더 부합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특히 “그녀”, “그”와 같은 3인칭 인칭대명사를 그대로 옮긴 것은 인물에 호칭을 사용하는 한국어에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각 등장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적절한 어휘와 문체의 선택, 다양한 어법의 구사는 문학적 탁월함을 드러내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효할 만큼 현대적이다. 전혜린이 선택한 언어들은 단번에 이미지를 확정시키는 개성과 고유성을 지녀서 차후 다른 번역들이 이를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 답습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비록 다른 어휘로 대체된다고 할지라도 그런 시도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전혜린의 번역본은 직접화법의 대화문과 서술문장을 구분표시 없이 일렬로 늘어놓는 원문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 대화임을 표시하는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문과 달리 사람이나 호텔명, 지명 등 고유명사는 괄호로 묶어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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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혜린 역의 <생의 한가운데>(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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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저의 소설이 전후 독일사회를 여전히 지배했던 현모양처라는 전통적 여성상에 반기를 들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형성해가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면,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전혜린의 번역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션 역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ref>1960년대 전혜린의 번역과 그 사회적 영향에 관해선 이해선, 양아람(2016)의 논문 중 특히 제2장(272-276)을 참조하시오.</ref> 이 소설이 주목받는 실제의 계기는 1965년 역자 전혜린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출판사는 전혜린 사후에 이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때부터 니나 소설은 대중적으로 인지되고 열렬하게 소비되기 시작했다. 전혜린은 유고집 에세이에서 “생을 사는 하나의 방법. 이렇게 한 여자는 걸어갔다”라는 부제를 넣어 니나라는 “깨어있는 여성”의 특성들을 짚어내고 있다. 작가의 분신으로 이해된 주인공 니나가 한없는 생기와 호기심으로 삶을 여지없이 살아내려는 욕구, 정신의 자유, 인식욕과 자의식,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지성, 의연한 결단력, 삶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같은 특성을 지닌 자라면, 전혜린은 작가가 이를 통해 여성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린저의 분신으로 이해된 주인공 니나의 이야기를 당대 한국의 신여성을 대표하던 여류독문학자 전혜린이 번역함으로써 린저-니나-전혜린이라는 동일화가 이루어졌다. 이같이 최적화된 번역과 수용환경 속에서 소설은 한국 독자들에게 적극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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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상 이 번역본에서 달라진 점은 저자명의 표기다. 1961년도 판에서는 “루이제 린자아”로 옮겼으나 이 판본 겉표지에서는 “루이제 • 린자”로 바꾸고 작품의 원어명인 MITTE DES LEBENS를 아래편에 붙여넣었다. 역자의 유고집으로 출간된 만큼 첫 장에는 “혜린 언니를 그리며”라는 추도문이 실렸고, 이어 “역자의 말”이 두 쪽에 걸쳐 나온다. 그리고 다시 제목을 실은 한 면이 전개된 후에 본문이 11쪽부터 시작한다. 본문은 독일어 원서와 마찬가지로 인명, 지명, 호텔명 등을 부가적 괄호 없이 처리했다는 점이 1961년도 초역본과 다르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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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혜린 역의 <생의 한가운데>(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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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의 번역본은 이후에도 여러 번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다. 2021년 3월에도 새로 인쇄된 것은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번역본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사이 초역의 어투와 표현을 출판사 편집부에서 부분적으로 수정한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이 수정된 번역본은 다양한 연령기에 니나가 쓰는 말투, 혹은 대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등장인물의 어법을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 적응시켰다. 오늘날 성의 평등이란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어법상의 차이가 동등한 부부 및 연인관계에서 나타난다. 원문에서는 존칭과 반말 같은 어법으로나 구별되는 관계성들이 성별, 직업과 계급, 나이에 따라 구별되는 한국적인 관계의 질서로 옮겨진다. 특히 90년대 이후의 번역본에서는 성별에 따른 어법의 차별화가 눈에 띈다. 가령 니나가 (실패한) 자살 전에 남편에게 쓴 마지막 편지는 전혜린의 초판에서는 반말투로 되어 있지만 1998년도 번역본에서는 이미 존칭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 한편 남편 퍼시의 말투는 반말로 옮겨져 있다. 전혜린이 이미 60년대에 자의식에 찬 신여성의 말투로 옮겼던 것을, 젠더 질서가 상당히 극복된 오늘날의 번역본이 그것을 복고적 어투로 옮긴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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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니나의 소통관계는 거의 예외 없이 반말로 옮겨져 있다. 이에 반해 니나의 성장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해온 슈타인 박사와 니나의 오랜 관계에는 어법의 변화가 드러난다. 니나보다 20년 연상인 의사 슈타인은 니나가 19세일 때 환자로서 알게 된다. 초기 몇 년간 두 사람은 서로 존댓말을 쓰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너나 하는 친밀한 사이로 변한다. 한국어 번역본에서 이 친밀관계는 슈타인이 니나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그런 한편 니나는 끝까지 그를 존대하는 표현으로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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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본래의 어투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세의 니나가 슈타인에게 보낸 초창기 편지와 대화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대신에 “나는”, “내가”로 번역한 부분이 그렇다.(18, 45 등) 20년 연상의 슈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버릇없어 보이는 이 주어의 선택은 관계성보다는 젊고 주체적인 주인공 니나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데 더 강조점을 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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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두식 역의 <생의 한가운데>(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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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생의 한가운데> 속편을 번역하여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던 강두식은 1976년에 <생의 한가운데>를 직접 번역하여 범우사에서 초판 1쇄를 찍었다. 범우사는 1985년에 2판을, 1988년, 1991년에 2판 11쇄, 그리고 1996년에 3판, 2011년에 3판 5쇄를 출간한다. 이 번역본은 또한 2001년 대산출판사, 1983년과 2003년도에 문예출판사에서도 출간되었다. 강두식의 번역본은 지속적인 출간을 통해 이 소설의 확산에 기여해 온 주류 번역본 중 하나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러 번 판과 쇄를 거듭하여 출간되었어도 2011년도 번역본에서 초역본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 말은 역자가 그사이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역본에 대한 수정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역은 물론이고 오늘날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문 표기와 고답적인 어휘와 어법은 이 번역본이 매번의 새 출간에 앞서 새로 교정을 받거나 보완되지 않고 인쇄만 거듭해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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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12년의 나이 차이를 가진 언니와 여동생이 오랫동안 소원한 관계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나고, 언니가 여동생의 삶에 갑자기 개입하게 되면서 관찰자로서 또 화자로서 주인공인 여동생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나의 삶을 재구성하고 반추하는 다양한 편지와 일기들 외에도 언니가 니나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소설은 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한 격동의 시대에 니나라는 행동하는 지식인 여성의 치열한 삶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낸다. 두 자매의 대화는 원문에서는 허물없는 관계에 사용되는 반말로 일관되는 데 반하여, 한국어 번역은 때로는 반말투로, 때로는 반존칭으로, 때로는 존댓말로 옮겨져 있다. 가령 최초의 대화에서 “다시 독일로 왔어?”(14)라고 니나가 언니에게 말하는 태도는 “언니, 내 생일날에 올 수 없겠어? 말해봐요”(16), “들어와”, “담배 피우겠어?”(18), “그 커피 좋지, 안 그래요?”(19)에서 보듯이 가끔 반존칭과 섞인다. 여기엔 12년이라는 자매간의 나이 차이를 고려한 번역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주 바뀌는 어법의 변화는 오히려 대화의 흐름을 낯설게 만들면서 방해한다. 그나마 구어 소통에서 가능했던 반말과 반존칭 어법의 혼용은 대화에 큰 장애가 되지 않지만, 결말 부분에서 니나가 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온통 존칭어로 번역되어 있어서 매우 부자연스러우며 부적절하다는 인상을 준다. “저는 여기서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 가을에 제가 독일에 가게 되면 언니한테 시기를 맞춰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356) 언니에게 쓰는 이런 극존칭의 어법은 소설의 초반부와 달리 마지막에는 훨씬 돈독해진 자매간의 상호이해와 관계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매우 부적합하다. 강두식은 19살의 니나가 슈타인에게 보낸 편지나 대화에서 니나가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제가”라고 옮겨 그가 소설 번역에서 사용하는 니나의 존칭 화법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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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곽복록 역의 <생의 한가운데>(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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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문학출판사에서 곽복록의 번역본이 처음 출간된다. 이어 1985, 1990년에도 동일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여기선 1985년도 번역본을 대상으로 한다. 이 번역은 독일 피셔 출판사에서 나온 원본의 표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앞표지의 날개에는 피셔출판사 원본의 사진을 곁들이고 가브리엘 마르셀의 린저에 대한 평을 부분 인용하였다. 소설 본문에 앞서 역자의 작품설명이 주어지고, 본문 뒤에는 간략하게 작가 연보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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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복록 번역본은 정제된 언어와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가독성이 매우 높다. 원문의 문법과 표현에 충실하면서도 도착권의 언어 및 문화적 특성을 살린 화법, 한국어 문장의 리듬으로 매우 성숙하게 녹아들게 한 번역이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빈틈없이 매끈하고 자연스러운 문장은 전혜린의 번역에 비해 훨씬 더 고도의 번역 수준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화의 낯선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효과 면에서 독일어 특유의 문장론적 특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전혜린의 번역본이 그 낯섦과 신선함으로 독자에게 끼친 영향력은 더 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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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복록 번역본은 원문에 없는 대화문과 서술문 간의 시각적 혼용 상태를 지양하고, 격자 괄호로 대화문을 표시하여 시각적으로도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그런 한편 자포자기( ), 우수( )에 찬, 해후( )를, 키 큰 고목( )들이 등 수많은 개념을 한국어로만 쓰는 대신 괄호 속 한문으로 별도 표기를 하여 의미 전달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이런 시도는 강두식의 경우보다 훨씬 더 빈번하다. 이것은 과거 한문 세대들에게는 유익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한문교육을 거의 받지 않는 신세대들에게는 오히려 가독성을 해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 동시에 많은 단어를 영어 명칭 그대로 표기한 점도 곽복록 번역의 특징이다. 가령 “웨이브를 넣은 갈색 머리카락이”,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었다”, “호올의 열려 있는 창 너머로”, “책상보도 안 씌운 테이블”, “노우트”, “슈우트케이스가 세 개”, “글라스 두 개” 등은 미국 유학을 했던 역자의 배경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미국을 통한 서구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외국어 표기에 있어 “코오피”, “파아티”, “몇 타아스의 담배” 등 오늘날과 차이가 나는 발음표시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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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홍경호 역의 <생의 한가운데>(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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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범우사에서 홍경호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후 1986년, 1993년에는 글방문고에서, 1983, 1993년에는 삼중당에서 그의 번역본이 계속 출간되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해적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삼중당과 글방문고의 번역본은 포켓판으로 출간되어 기존의 번역서들과 달리 보다 더 대중성을 목표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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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의 번역본은 외국어 표기법에서 오늘날의 그것과 차이가 크게 난다(예: “니나 붓슈만, 헬름밧하, 휠데를린” 등). 그리고 상황 서술을 사실 묘사로서 직접 하기보다 (“들여다보았다”, “알수가 없다”) 관찰자적 시점에서 묘사하여 그 거리가 더 느껴지도록 한다(예: “...다시 신문을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6),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6)) 또한 직역 문장이 잦아 작품의 문학성을 해치기도 한다.(예: Zwei Kunden waren im Laden, eine alte Frau und ein Junge.(54)를 “손님이 둘 있었다. 늙은 노파 하나와 젊은 처녀 하나였다”(88)로 번역함) 어법 면에서는 슈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소녀 니나가 “나는”, “내가”로 자칭하다가 그와의 대화에서는 “저는”, “제가”(19)로 말하거나, 혹은 그 관계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당신한테만 말하리다”(43) 같은 고답적인 말투를 혼용하여 어법의 일관성이 흐려지는 경우가 잦다. 남편 퍼시의 애인 클레레와 니나의 대화에서, 원문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너”라고 반말을 하지만 번역문은 법적 아내인 니나는 클레레에게 반말을, 클레레는 니나에게 존칭을 쓰게 옮겼다. 여기서 아내와 애인 사이에 신분상의 차별을 두는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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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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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 <생의 한가운데>에 대한 번역사를 개관하고, 선별한 6편의 개별 번역본의 특성을 짚어보았다. 정리하자면, 전혜린의 번역은 독일어 구문을 살리면서 참신하고 직선적인 어법을 구사한다. 독일어 특유의 문장론적 특성을 그대로 가져와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 혹은 개역은 필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으나, 초역임에 비해 오역의 빈도수는 낮은 편이다. 그에 반해 독일어 문체의 직수입을 통해 한국어에는 낯선 새로운 시각과 지각방식, 새로운 사유 방식을 도입한 것은 일종의 기여도라고 볼 수 있다. 곽복록의 번역은 그 어투와 어법에 있어 훨씬 정화되어 있다. 강두식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고답적인 성격을 지니며, 자잘한 오역이 산재한다. 이에 반해 곽복록은 문법을 정확히 따르면서도 의미 전달에도 정확한 번역을 하여 오역의 가능성을 최소화한 번역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전혜린의 번역이 주인공의 강하고 주체적인 의식 세계와 자기주장을 드러내려고 했다면, 곽복록과 강두식의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간관계의 특성에 주의하여 문화적으로 적응시킨 화법을 구사한다. 존칭법이 발달한 한국어와 문화적 차이를 많이 드러내는 것이 어투라면, 여기서 살펴본 모든 번역이 거의 예외 없이 시대의 젠더 질서에 매여 있다고 하겠다. 이 소설은 신여성 상을 제시하고 있지만, 동시에 특별한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서 한 여성의 굴곡에 찬 성장 과정을 서술하는 성장사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니나와 언니, 슈타인, 남편 퍼시, 연인 알렉산더 등과의 관계에서도 다양한 화법이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여권신장과 성평등, 존칭과 반말 간의 위계질서를 지양하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래의 번역은 어떤 새로운 화법으로 원문 어법의 다양한 함의를 살려낼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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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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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1961): 생의 한가운데. 신구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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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1967): 생의 한가운데.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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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2021): 생의 한가운데.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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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두식(2011): 생의 한가운데.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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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복록(1985): 생의 한가운데. 문학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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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1983): 생의 한가운데. 삼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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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김연신</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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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5일 (토) 18:14 판

루이제 린저 (Luise Rinser, 1911-2002)의 장편소설


작품소개

전후 독일 문학의 시기였던 1950년에 발표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는 주인공 니나 붓슈만의 파란만장하고 열정적인 생애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38세의 니나는 홀로 두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이자 성공한 여류작가로서 사회의 시선이나 편견을 초월하여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현대적 여성이다. 소설은 편지, 일기, 노트와 같은 다양한 기록 매체들과 니나의 측근 인물들의 다양한 시각을 통해 독립적이고 해방된 여성으로서 니나의 인간적 특징들을 드러내고, 삶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 긍정을 입체적인 방식으로 서술한다. 자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언니 마르그레트와 여동생 니나가 소원했던 오랜 시간 후 다시 만나며, 언니가 관찰자이자 소설의 화자로서 주인공 니나의 삶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니나를 평생 사랑하고, 그녀의 성장 과정을 관찰하며 기록한 슈타인 박사의 편지와 일기를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 여성으로서 2차 세계 대전 전후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니나의 치열한 삶이 재구성된다. 삶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니나는 신념과 행동의 일치를 추구하는 자이며, 독립적이고 고유한 자기 삶의 주체로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 니나의 깨어있는 삶은 행동이 부족한 지식인 슈타인의 삶과 전통적인 여성 마르그레트의 잘 정돈되고 평안한 시민적 삶에 대립한다. 슈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총체로서 니나를 사랑하고 갈구할 뿐 자신이 추구한 삶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는다. 니나의 삶을 통해 자신의 시민적 삶에 회의하게 된 마르그레트는 비판적인 자아 성찰로 나아간다. 루이제 린저는 이 소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 작품은 독일어 출간 이후 수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 초역은 1961년 독문학자 전혜린에 의해 이루어졌다(신구문화사).


초판 정보

Rinser, Luise(1950): Mitte des Lebens. Frankfurt a. M.: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0. 원작 소개

<생의 한가운데>는 전후 독일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가 195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보다 앞선 1948년에 린저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소설 <바르샤바에서 온 장 로벨>로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한 바 있으나, 이 작품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이 작품은 수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니나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여류작가로서, 신념과 행동의 일치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삶의 형성자로서,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대조되는 참신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표현한다. 소설은 전통적이지 않은 니나의 삶을 입체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를 화자로 삼아 틀구조를 형성하고, 언니와 니나의 대화, 언니와 니나의 연인의 대화 등을 틀구조의 현재 시점에 배치한다. 그런 한편 니나를 평생 사랑하고 관찰해온 슈타인의 기록들, 관련된 편지와 일기 등을 통해 니나가 살아온 삶을 시공간적으로 재구성한다. 틀구조와 내부구조의 역동적인 혼합을 통해 여러 개의 서사층을 만들어내고, 슈타인의 기록물을 날짜가 뒤섞이게 전개하여 니나의 과거를 짜 맞추게 하는 이런 짜깁기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삶을 연대기적이거나 단층적으로 서술하는 전통적인 서술기법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의 특유한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삶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창의적인 형식의 실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번역에서는 틀구조의 화자인 언니, 내부구조의 화자 슈타인, 주인공 니나가 모두 일인칭 주어로 나오는 원문의 “다성적인” 특성을 살려 그들의 개성과 목소리를 적절하게 옮기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또한 여러 성장단계에서 표출되는 주인공 니나의 의식상태와 정신적 발달,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사용되는 어휘와 화법들을 적절하게 옮기는 것 역시 번역의 질과 성패를 가름하는 주요인이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편지, 일기, 대화에 사용되는 구어체는 대화 주체들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그 특성을 노출시킨다. 독일어에서는 크게 존칭과 반말로 구분되는 대화의 어법에 함축된 다양한 관계의 특질이 나이, 사회적 계급, 성별에 따라 크게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어의 어법으로 어떻게 옮겨지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다양하게 드러날 것이다. 또한 독일어에서는 인칭대명사로 표현되는 것이 한국어에서는 거의 언제나 호칭으로 표현되는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 지도 주요한 번역의 관건이 될 것이다.

1. 번역 현황 및 개관

한국에서 이 소설은 1961년 독문학자 전혜린이 최초로 번역하여 신구문화사의 <세계전후문학전집 5 – 독일전후문제작품집>에 실렸다. 이 번역으로 루이제 린저는 한국 독자들에게 독일 나치 정권에 대항한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알려지게 된다. 게다가 린저 소설의 주인공 니나는 ‘삶의 한가운데에서’로 표방되는 적극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하였으며, 이로써 독일 사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새로운 여성상의 출현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소설은 1965년 역자 전혜린의 예기치 못한 사망 이후 그녀의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실린 에세이 <생의 한가운데서 –니나의 경우>를 통해 60년대 한국 독자층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에 따라 1967년 문예출판사에서 전혜린의 번역이 개별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다음의 문장은 1960년대 린저의 소설과 전혜린의 번역 그리고 한국 내 수용 상황에 관해 잘 말해준다.

1960년대 루이제 린저는 한국에서 나치의 피해자이자 독일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인간을 지도·계발하는 계몽주의적 교육가였다. 그리고 소설 『생의 한가운데』는 당시 성장하는 젊은층의 여권인식과 남녀관계를 재고케 하는 연애소설, 전혜린이라는 현상, 실존주의의 ‘삶에서 스스로의 선택 자유와 책임’ ‘행복론’ 성해방의 욕망이 증가하는 성풍속도 등과 복잡하게 결부되면서 독자에게 읽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린저의 니나가 주목받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 소설의 속편 <속 생의 한가운데>가 1969년 강두식의 번역본으로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이로써 소위 “니나소설”이 모두 일찍이 한국에 소개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총 15편의 번역본이 출간되는데, 이 책의 번역이 급증한 것은 바로 한국 독자층의 열렬한 수요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곽복록의 번역이 1975년 문학출판사에서, 홍경호의 번역이 1975년 범우사에서, 차경아의 번역이 1977년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79년에 문예출판사는 강두식의 번역을 출간한다. 이 밖에도 정경석, 심현덕, 전원배, 김경은, 차경아, 김양순, 사공복희, 구충남, 이정태 등이 이 소설의 번역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도 루이제 린저의 작품들은 큰 인기를 끄는데, 이 소설의 번역서 역시 더욱 증가하여 총 20편이 출간된다. 이 시기에 김양순, 이정태, 곽복록, 강두식, 전원배, 홍경호와 같은 기존 번역본의 재판 외에도 윤순호, 정재현, 이민영, 김남환, 강석종, 김진현의 번역본이 새로이 출간되었다. 린저 붐은 1990년대에도 상승선을 그리면서 총 22편의 번역본이 출간된다. 역시 기존의 번역본 외에도 이강빈, 김진욱, 전희직, 최달식, 이영제, 이연태, 김남경 등의 번역본이 새로 선을 보였다. 이 중 1999년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로 출간된 박찬일의 새로운 번역본은 2015년까지 총 45쇄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 이 소설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와 인기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지난 세기에 이 작품이 던졌던 실존주의적 질문, 여성해방, 현실참여와 같은 메시지들이 그사이 소위 신여성의 대중화 현상, 새로운 매체환경과 독자층 요구의 변화, 즉 21세기의 새로운 현실 문제에 밀려나면서 점차 영향력을 잃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2000년대에 총 6편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나 새로운 번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강두식, 전혜린 등 기존 번역본의 재판이 주류를 이루었고, 출판사가 “엮음”으로 출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향은 더욱 심화되어 2011년 이후에도 출판사의 “엮음”으로 출간된 번역본, 강두식 및 박찬일 등 기존의 번역이 거듭 인쇄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린저의 소설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이미 번역가와 독자의 관심에서 벗어났음을 시사한다. 이런 차에 2011년 독일에서 루이제 린저 탄생 100주년에 발간된 무릴로의 전기는 기존에 린저라는 작가를 각인했던 저항과 정의의 문학가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었다. 2011년 이후 한국 독자층에서 감지되는 린저의 소설에 대한 무관심 역시 이러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는 더 이상 번역되지 않고 한때 누렸던 호황의 여명 속에서 희미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 무관심의 한가운데서 2021년 3월 전혜린의 번역이 문예출판사에서 다시 발행되었다.

이 소설은 여류작가의 작품이지만 여성 번역가가 번역한 경우는 많지 않다. 전혜린 외에도 차경아, 김양순을 꼽을 수 있으며, 대부분은 남성 번역가가 맡아 한국어로 옮겼다. “Mitte des Lebens”라는 원제목은 대부분 <생의 한가운데>로 번역되었으며, 1999년 민음사에서 나온 박찬일의 번역본만 <삶의 한가운데>로 변화를 주고 있다.

다음에서는 이 작품의 번역사에서 주류를 형성해온 네 명의 번역자의 번역본을 살펴본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전혜린 역의 <생의 한가운데>(1961)

한국어 초역본으로 알려진 전혜린의 번역은 먼저 1961년 신구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5>에 실린 8편의 전후 독일작품 중 한 편이자 그중 가장 긴 분량의 작품이다. 이 전집의 편집위원들은 전후 독일문학의 전반적인 경향을 세 분야로 나누어 소개하면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그 중 독일 전위문학의 대표작으로 꼽았다[1]. 이로써 루이제 린저가 전후 독일 작가로서 한국에 알려지게 되며, 그의 소설이 지닌 문학사적 의미와 위상도 인정받게 된다.

전혜린의 번역은 원문의 충실성을 지키면서도 유려한 한국말로 번역하여 60년대임에도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번역체는 가능하면 독일어의 어순체계를 유지하는데, 그러나 이로 인해 어색한 말투가 발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독일어의 어순 혹은 문장론적 특징이 그대로 느껴지게 옮김으로써 발생하는 낯설음은 한국어의 리듬으로 녹여내지 못한 생경함을 일으키지만 그런데도 뭔가 새로운 사유 또는 새로운 감성을 유발시킨다. 이런 서구적 표현들은 어쩌면 소설이 그려내는 신여성에 대한 한국 독자층의 기대에 더욱더 부합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특히 “그녀”, “그”와 같은 3인칭 인칭대명사를 그대로 옮긴 것은 인물에 호칭을 사용하는 한국어에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각 등장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적절한 어휘와 문체의 선택, 다양한 어법의 구사는 문학적 탁월함을 드러내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효할 만큼 현대적이다. 전혜린이 선택한 언어들은 단번에 이미지를 확정시키는 개성과 고유성을 지녀서 차후 다른 번역들이 이를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 답습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비록 다른 어휘로 대체된다고 할지라도 그런 시도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전혜린의 번역본은 직접화법의 대화문과 서술문장을 구분표시 없이 일렬로 늘어놓는 원문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 대화임을 표시하는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문과 달리 사람이나 호텔명, 지명 등 고유명사는 괄호로 묶어 표시하였다.


2) 전혜린 역의 <생의 한가운데>(1967)

린저의 소설이 전후 독일사회를 여전히 지배했던 현모양처라는 전통적 여성상에 반기를 들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형성해가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면,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전혜린의 번역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션 역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2] 이 소설이 주목받는 실제의 계기는 1965년 역자 전혜린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출판사는 전혜린 사후에 이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때부터 니나 소설은 대중적으로 인지되고 열렬하게 소비되기 시작했다. 전혜린은 유고집 에세이에서 “생을 사는 하나의 방법. 이렇게 한 여자는 걸어갔다”라는 부제를 넣어 니나라는 “깨어있는 여성”의 특성들을 짚어내고 있다. 작가의 분신으로 이해된 주인공 니나가 한없는 생기와 호기심으로 삶을 여지없이 살아내려는 욕구, 정신의 자유, 인식욕과 자의식,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지성, 의연한 결단력, 삶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같은 특성을 지닌 자라면, 전혜린은 작가가 이를 통해 여성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린저의 분신으로 이해된 주인공 니나의 이야기를 당대 한국의 신여성을 대표하던 여류독문학자 전혜린이 번역함으로써 린저-니나-전혜린이라는 동일화가 이루어졌다. 이같이 최적화된 번역과 수용환경 속에서 소설은 한국 독자들에게 적극 수용되었다.

외관상 이 번역본에서 달라진 점은 저자명의 표기다. 1961년도 판에서는 “루이제 린자아”로 옮겼으나 이 판본 겉표지에서는 “루이제 • 린자”로 바꾸고 작품의 원어명인 MITTE DES LEBENS를 아래편에 붙여넣었다. 역자의 유고집으로 출간된 만큼 첫 장에는 “혜린 언니를 그리며”라는 추도문이 실렸고, 이어 “역자의 말”이 두 쪽에 걸쳐 나온다. 그리고 다시 제목을 실은 한 면이 전개된 후에 본문이 11쪽부터 시작한다. 본문은 독일어 원서와 마찬가지로 인명, 지명, 호텔명 등을 부가적 괄호 없이 처리했다는 점이 1961년도 초역본과 다르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다.


3) 전혜린 역의 <생의 한가운데>(2021)

전혜린의 번역본은 이후에도 여러 번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다. 2021년 3월에도 새로 인쇄된 것은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번역본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사이 초역의 어투와 표현을 출판사 편집부에서 부분적으로 수정한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이 수정된 번역본은 다양한 연령기에 니나가 쓰는 말투, 혹은 대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등장인물의 어법을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 적응시켰다. 오늘날 성의 평등이란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어법상의 차이가 동등한 부부 및 연인관계에서 나타난다. 원문에서는 존칭과 반말 같은 어법으로나 구별되는 관계성들이 성별, 직업과 계급, 나이에 따라 구별되는 한국적인 관계의 질서로 옮겨진다. 특히 90년대 이후의 번역본에서는 성별에 따른 어법의 차별화가 눈에 띈다. 가령 니나가 (실패한) 자살 전에 남편에게 쓴 마지막 편지는 전혜린의 초판에서는 반말투로 되어 있지만 1998년도 번역본에서는 이미 존칭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 한편 남편 퍼시의 말투는 반말로 옮겨져 있다. 전혜린이 이미 60년대에 자의식에 찬 신여성의 말투로 옮겼던 것을, 젠더 질서가 상당히 극복된 오늘날의 번역본이 그것을 복고적 어투로 옮긴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언니와 니나의 소통관계는 거의 예외 없이 반말로 옮겨져 있다. 이에 반해 니나의 성장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해온 슈타인 박사와 니나의 오랜 관계에는 어법의 변화가 드러난다. 니나보다 20년 연상인 의사 슈타인은 니나가 19세일 때 환자로서 알게 된다. 초기 몇 년간 두 사람은 서로 존댓말을 쓰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너나 하는 친밀한 사이로 변한다. 한국어 번역본에서 이 친밀관계는 슈타인이 니나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그런 한편 니나는 끝까지 그를 존대하는 표현으로 옮겨져 있다.

전혜린 본래의 어투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세의 니나가 슈타인에게 보낸 초창기 편지와 대화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대신에 “나는”, “내가”로 번역한 부분이 그렇다.(18, 45 등) 20년 연상의 슈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버릇없어 보이는 이 주어의 선택은 관계성보다는 젊고 주체적인 주인공 니나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데 더 강조점을 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 강두식 역의 <생의 한가운데>(2011)


1969년에 <생의 한가운데> 속편을 번역하여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던 강두식은 1976년에 <생의 한가운데>를 직접 번역하여 범우사에서 초판 1쇄를 찍었다. 범우사는 1985년에 2판을, 1988년, 1991년에 2판 11쇄, 그리고 1996년에 3판, 2011년에 3판 5쇄를 출간한다. 이 번역본은 또한 2001년 대산출판사, 1983년과 2003년도에 문예출판사에서도 출간되었다. 강두식의 번역본은 지속적인 출간을 통해 이 소설의 확산에 기여해 온 주류 번역본 중 하나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러 번 판과 쇄를 거듭하여 출간되었어도 2011년도 번역본에서 초역본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 말은 역자가 그사이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역본에 대한 수정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역은 물론이고 오늘날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문 표기와 고답적인 어휘와 어법은 이 번역본이 매번의 새 출간에 앞서 새로 교정을 받거나 보완되지 않고 인쇄만 거듭해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12년의 나이 차이를 가진 언니와 여동생이 오랫동안 소원한 관계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나고, 언니가 여동생의 삶에 갑자기 개입하게 되면서 관찰자로서 또 화자로서 주인공인 여동생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나의 삶을 재구성하고 반추하는 다양한 편지와 일기들 외에도 언니가 니나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소설은 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한 격동의 시대에 니나라는 행동하는 지식인 여성의 치열한 삶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낸다. 두 자매의 대화는 원문에서는 허물없는 관계에 사용되는 반말로 일관되는 데 반하여, 한국어 번역은 때로는 반말투로, 때로는 반존칭으로, 때로는 존댓말로 옮겨져 있다. 가령 최초의 대화에서 “다시 독일로 왔어?”(14)라고 니나가 언니에게 말하는 태도는 “언니, 내 생일날에 올 수 없겠어? 말해봐요”(16), “들어와”, “담배 피우겠어?”(18), “그 커피 좋지, 안 그래요?”(19)에서 보듯이 가끔 반존칭과 섞인다. 여기엔 12년이라는 자매간의 나이 차이를 고려한 번역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주 바뀌는 어법의 변화는 오히려 대화의 흐름을 낯설게 만들면서 방해한다. 그나마 구어 소통에서 가능했던 반말과 반존칭 어법의 혼용은 대화에 큰 장애가 되지 않지만, 결말 부분에서 니나가 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온통 존칭어로 번역되어 있어서 매우 부자연스러우며 부적절하다는 인상을 준다. “저는 여기서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 가을에 제가 독일에 가게 되면 언니한테 시기를 맞춰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356) 언니에게 쓰는 이런 극존칭의 어법은 소설의 초반부와 달리 마지막에는 훨씬 돈독해진 자매간의 상호이해와 관계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매우 부적합하다. 강두식은 19살의 니나가 슈타인에게 보낸 편지나 대화에서 니나가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제가”라고 옮겨 그가 소설 번역에서 사용하는 니나의 존칭 화법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25)


5) 곽복록 역의 <생의 한가운데>(1985)

1975년 문학출판사에서 곽복록의 번역본이 처음 출간된다. 이어 1985, 1990년에도 동일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여기선 1985년도 번역본을 대상으로 한다. 이 번역은 독일 피셔 출판사에서 나온 원본의 표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앞표지의 날개에는 피셔출판사 원본의 사진을 곁들이고 가브리엘 마르셀의 린저에 대한 평을 부분 인용하였다. 소설 본문에 앞서 역자의 작품설명이 주어지고, 본문 뒤에는 간략하게 작가 연보를 실었다.

곽복록 번역본은 정제된 언어와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가독성이 매우 높다. 원문의 문법과 표현에 충실하면서도 도착권의 언어 및 문화적 특성을 살린 화법, 한국어 문장의 리듬으로 매우 성숙하게 녹아들게 한 번역이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빈틈없이 매끈하고 자연스러운 문장은 전혜린의 번역에 비해 훨씬 더 고도의 번역 수준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화의 낯선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효과 면에서 독일어 특유의 문장론적 특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전혜린의 번역본이 그 낯섦과 신선함으로 독자에게 끼친 영향력은 더 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곽복록 번역본은 원문에 없는 대화문과 서술문 간의 시각적 혼용 상태를 지양하고, 격자 괄호로 대화문을 표시하여 시각적으로도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그런 한편 자포자기( ), 우수( )에 찬, 해후( )를, 키 큰 고목( )들이 등 수많은 개념을 한국어로만 쓰는 대신 괄호 속 한문으로 별도 표기를 하여 의미 전달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이런 시도는 강두식의 경우보다 훨씬 더 빈번하다. 이것은 과거 한문 세대들에게는 유익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한문교육을 거의 받지 않는 신세대들에게는 오히려 가독성을 해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 동시에 많은 단어를 영어 명칭 그대로 표기한 점도 곽복록 번역의 특징이다. 가령 “웨이브를 넣은 갈색 머리카락이”,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었다”, “호올의 열려 있는 창 너머로”, “책상보도 안 씌운 테이블”, “노우트”, “슈우트케이스가 세 개”, “글라스 두 개” 등은 미국 유학을 했던 역자의 배경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미국을 통한 서구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외국어 표기에 있어 “코오피”, “파아티”, “몇 타아스의 담배” 등 오늘날과 차이가 나는 발음표시가 눈에 띈다.


6) 홍경호 역의 <생의 한가운데>(1983)

1975년 범우사에서 홍경호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후 1986년, 1993년에는 글방문고에서, 1983, 1993년에는 삼중당에서 그의 번역본이 계속 출간되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해적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삼중당과 글방문고의 번역본은 포켓판으로 출간되어 기존의 번역서들과 달리 보다 더 대중성을 목표로 하였다.

홍경호의 번역본은 외국어 표기법에서 오늘날의 그것과 차이가 크게 난다(예: “니나 붓슈만, 헬름밧하, 휠데를린” 등). 그리고 상황 서술을 사실 묘사로서 직접 하기보다 (“들여다보았다”, “알수가 없다”) 관찰자적 시점에서 묘사하여 그 거리가 더 느껴지도록 한다(예: “...다시 신문을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6),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6)) 또한 직역 문장이 잦아 작품의 문학성을 해치기도 한다.(예: Zwei Kunden waren im Laden, eine alte Frau und ein Junge.(54)를 “손님이 둘 있었다. 늙은 노파 하나와 젊은 처녀 하나였다”(88)로 번역함) 어법 면에서는 슈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소녀 니나가 “나는”, “내가”로 자칭하다가 그와의 대화에서는 “저는”, “제가”(19)로 말하거나, 혹은 그 관계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당신한테만 말하리다”(43) 같은 고답적인 말투를 혼용하여 어법의 일관성이 흐려지는 경우가 잦다. 남편 퍼시의 애인 클레레와 니나의 대화에서, 원문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너”라고 반말을 하지만 번역문은 법적 아내인 니나는 클레레에게 반말을, 클레레는 니나에게 존칭을 쓰게 옮겼다. 여기서 아내와 애인 사이에 신분상의 차별을 두는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가 드러난다.


3. 평가와 전망

이 글은 소설 <생의 한가운데>에 대한 번역사를 개관하고, 선별한 6편의 개별 번역본의 특성을 짚어보았다. 정리하자면, 전혜린의 번역은 독일어 구문을 살리면서 참신하고 직선적인 어법을 구사한다. 독일어 특유의 문장론적 특성을 그대로 가져와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역 혹은 개역은 필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으나, 초역임에 비해 오역의 빈도수는 낮은 편이다. 그에 반해 독일어 문체의 직수입을 통해 한국어에는 낯선 새로운 시각과 지각방식, 새로운 사유 방식을 도입한 것은 일종의 기여도라고 볼 수 있다. 곽복록의 번역은 그 어투와 어법에 있어 훨씬 정화되어 있다. 강두식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고답적인 성격을 지니며, 자잘한 오역이 산재한다. 이에 반해 곽복록은 문법을 정확히 따르면서도 의미 전달에도 정확한 번역을 하여 오역의 가능성을 최소화한 번역이라고 하겠다. 나아가 전혜린의 번역이 주인공의 강하고 주체적인 의식 세계와 자기주장을 드러내려고 했다면, 곽복록과 강두식의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간관계의 특성에 주의하여 문화적으로 적응시킨 화법을 구사한다. 존칭법이 발달한 한국어와 문화적 차이를 많이 드러내는 것이 어투라면, 여기서 살펴본 모든 번역이 거의 예외 없이 시대의 젠더 질서에 매여 있다고 하겠다. 이 소설은 신여성 상을 제시하고 있지만, 동시에 특별한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서 한 여성의 굴곡에 찬 성장 과정을 서술하는 성장사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니나와 언니, 슈타인, 남편 퍼시, 연인 알렉산더 등과의 관계에서도 다양한 화법이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여권신장과 성평등, 존칭과 반말 간의 위계질서를 지양하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래의 번역은 어떤 새로운 화법으로 원문 어법의 다양한 함의를 살려낼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전혜린(1961): 생의 한가운데. 신구문화사.

전혜린(1967): 생의 한가운데. 문예출판사.

전혜린(2021): 생의 한가운데. 문예출판사.

강두식(2011): 생의 한가운데. 범우사.

곽복록(1985): 생의 한가운데. 문학출판사.

홍경호(1983): 생의 한가운데. 삼중당.

김연신


바깥 링크

  1. <세계전후문학전집> 5권에 해당하는 <독일전후문제작품집>의 편집위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전후문학을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1) 47 그룹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의 작품 같은 나치 저항문학, 2)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형이상학 문학, 3) 새로운 전위문학으로 편성했다. 이중 전위문학의 대표작으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선정하였다. 이해선, 양아람(2016): 루이제 린저의 수용과 한국사회의 ‘생의 한가운데’ - 신여성, 인생론, 세계여성의 해(1975), 북한바로알기운동(1988). 민족문화연구 73호(2016.11.30),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67-303. 이 중 272.
  2. 1960년대 전혜린의 번역과 그 사회적 영향에 관해선 이해선, 양아람(2016)의 논문 중 특히 제2장(272-276)을 참조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