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Brief an den Vater)"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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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AU0006}}의 소설 {{A01}} <!--작품소개--> 카프카가 1919년에 쓴 이 편지는 100쪽 가량의 긴 편지로 실제로 아버지에게 보내지지는 않았다. 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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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 || 프란츠 카프카 || 정초일 || 1999 || 푸른숲 || 13-167 || 편역 || 완역 ||
 
| 8 ||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 || 프란츠 카프카 || 정초일 || 1999 || 푸른숲 || 13-167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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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아버지께 이 글을 올립니다 || Kafka :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 || 프란츠 카프카 || 이재황 || 1999 || 문학과지성사 || 9-162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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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이재황(2012)" />[[#이재황(2012)R|9]] || 아버지께 이 글을 올립니다 || Kafka :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 || 프란츠 카프카 || 이재황 || 1999 || 문학과지성사 || 9-162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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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아버지께 || 변신 || Bestsellerworldbook 74 || 프란츠 카프카 || 안영란 || 2002 || 소담출판사 || 193-256 || 편역 || 완역 ||
 
| 10 || 아버지께 || 변신 || Bestsellerworldbook 74 || 프란츠 카프카 || 안영란 || 2002 || 소담출판사 || 193-256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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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4}}<!--번역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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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4+}}<!--번역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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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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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ref>이하 줄여서 <아버지>로 표기함.</ref>는 프란츠 카프카가 36살이던 1919년 11월에 작성한 실제의 서한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내지 않았으며, 작가 사후인 1952년 문학잡지 <Neue Rundschau>에 <Brief an den Vater>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 편지는 나치의 압류 등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막스 브로트가 편집한 카프카 전집에 수록되었다. 1935년 이 전집의 출판권을 인수했던 베를린의 유대계 출판사인 쇼켄(Schocken)이 전쟁으로 인해 뉴욕으로 이전하는데, 1953년에 독일 피셔(Fischer) 출판사가 쇼켄 출판사의 판권을 얻어 이 전집의 라이센스 판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전집 중 <아버지>는 총 457쪽 분량의 작품집 <시골의 결혼준비와 유고집의 다른 산문들>의 162~223쪽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이에 편집자 브로트는 작품집 뒤편에 쪽별로 주석을 달아, <아버지>가 다른 편지들과 함께 수록되는 대신 문학작품집에 수록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브로트에 따르면 결국 수신자에게 발송되지 않은 <아버지>는 편지의 기능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브로트는 이 글을 작가 자신의 전기를 포괄적으로 서술한 시도로 이해했다. <아버지>의 원고에 관해 브로트는 카프카 자신이 타자기로 직접 작성하고 손으로 수정을 가했다고 밝힌다. 그 원고는 타자 종이 약 45쪽의 분량에 해당하며, 각 쪽은 평균 34행으로 이루어지고, 45쪽은 대부분 비어 있다. 이 <아버지> 원고는 1975년부터 오늘날까지 피셔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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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스 브로트 편집의 <아버지> 원고는 오늘날 피셔 출판사에서 카프카 비판본(KKA)이 나오며 그 차이점이 드러났다. 이 비판본에는 <아버지>가 1993년에 발간된 유고집 <Nachgelassene Schriften und Fragmente II>에 수록되어 있다. 비판본의 목차에는 작품 집필 시기별로 번호와 제목이 달려있다. <아버지>의 경우 “[6] Der “Brief an den Vater” (November 1919)”로 표기되어 있다. 게다가 비판본은 <아버지>의 원본이 카프카가 손으로 쓴 103쪽의 편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원본이 타이핑 원고라는 브로트의 주장은 틀렸음이 드러났다. 이 원본은 피셔 출판사 사장 요아힘 운젤트(Joachim Unseld)가 1994년 스캔 복사하여 인쇄체로 출판했고, 또 인터넷 위키 소스에 무료로 제공되고 있어 확인할 수 있다.<ref>https://de.wikisource.org/wiki/Index:Brief_an_den_Vater</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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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편지에서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가족 내의 수많은 일화를 열거하며 자신의 성장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아버지 콤플렉스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여러 대조적인 차이, 카프카의 가족, 성과 결혼, 유대주의, 글쓰기 같은 소주제들로 이루어진다. 글의 말미에서 작가는 이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율리 보리체크와의 파혼임을 밝히는데, 그 원인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초래된 자신의 문제라고 지적함으로써 자기 삶의 지배자로서 아버지의 존재를 고찰과 고발의 중심에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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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카프카 문학의 한 주요주제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버지 콤플렉스에 대한 전기적, 실증적 자료이며, 카프카 문학의 이해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천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과는 달리 <아버지>는 수십 번씩 번역된 카프카의 다른 문학 작품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고, 한국어 번역 현황 역시 저조한 수용상황을 보여준다. 한국어 번역이 저조한 까닭으로는 이 글이 실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게다가 그 번역이 늦게 시작되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지금까지 총 12개가 집계된다. 최초의 한국어 번역은 구 한남대 독문과 교수였던 김윤섭에 의해 1978년도에 이루어졌다. 이어 서울대 교수였던 박환덕의 번역이 1980년대 및 1990년대에 각각 한 차례씩 범우사에서 출판되는데, 이 번역본은 2018년도에 종합출판 범우사로 이름을 바꾼 동일 출판사에서 다시 한번 출간되었다. 1990년대엔 외국어대 교수 정초일과 독문학 전공자 이재황의 번역이 출간되었고, 이 번역본들은 2012년도와 2015년도에 각각 재출간된다. 2000년도에 들어와 총 4편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독문학 전공자 이영희가 2004년 카프카 단편선을 엮어 출간한 <변신>에 이 편지를 번역하여 수록했다, 그리고 같은 해 솔 출판사에서 발행한 카프카 전집의 일환으로서, 서강대 이주동 교수가 카프카의 잠언과 미완성 유고작들을 모두 합쳐 번역한 <꿈 같은 삶의 기록>(전집 2권)에 이 편지가 수록되었다. 이 카프카 전집은 2017년도에 다시 개정판이 나왔다. 2006년도에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는 김창협의 번역본이 은금나라에서 출간된다. 이 번역본의 표지에 나온 영어 제목 “A Letter to Father”와 역자가 독일어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으로 미루어 이것은 영역본을 한국어로 옮긴 중역임을 추측할 수 있다. 2008년도 김보희의 번역본은 직접 영한대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실제로 <아버지>가 독일어 원문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된 경우는 총 6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번역 시기는 주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로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저조한 번역 현황에 더하여 번역본 중 몇몇은 아예 출판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따라서 이 글은 현재 접근이 가능하고 또 번역연구에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는 이주동(2004), 이재황(2012), 정초일(2015), 박환덕(2018)의 번역본을 선별하여 그 전반적 경향과 특성들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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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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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환덕 역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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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범우에서 나온 박환덕의 번역은 개정판이라기보다는 1980년대 및 1990년대 나온 동일 번역본의 재판 인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단행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에 속한다는 암시 하에 원표제, 저자, 역자명을 표기하고, “독일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명시했을 뿐, 실제 어떤 저본을 사용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본문 번역에 뒤따르는 “역자 후기” 대신 본문에 앞서 약 3쪽에 걸쳐 “편집부”의 이름으로 작가 카프카에 대한 소개글을 담았다. 이 소개글은 박환덕의 기존 번역본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출판사가 수정 없이 재판으로 찍었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번역본이 2018년 출판된 점을 고려할 때, “사랑하는 아버님”으로 시작하는 편지의 머리말에 달린 각주가 여전히 1953년 브로트 판에 주석으로 달렸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는 사실에서도 역시 이 번역본이 브로트 판을 저본으로 삼았던 박환덕의 기존 번역본의 재판이라는 추측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따라서 이 번역비평에서는 박환덕의 1980년대 번역본의 재판으로서 이 번역본을 먼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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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덕의 번역은 대체로 가독성은 좋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어 문장들을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향한 편지라는 점에서 주로 한국어의 극존칭 어법을 사용하지만, 이 어법은 아버지의 부당함을 개인적으로 고발하는 아들의 편지 내용과 불협화음을 낳는다. 즉 한편으로는 “아버님”, “어머님”, “당신” 등 극존칭을 통해 부모에게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아들의 존경심과 어려움을 표하지만, 아들이 아버지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이 어조가 급격히 변화될 수밖에 없으므로 글의 정조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다음 예문은 이 번역본을 지배하는 극존칭 어법이 실은 ‘아버지를 향한 비판과 고발’이라는 이 편지의 성격에 부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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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버지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시시한 보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패거리들과 모여 떠들어 대는 일이 저로서는 슬픈 일이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또 제가 발견한 아버님의 취미는 상스런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큰 목소리로 내뱉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특별히 좋은 말이라도 한 것처럼 웃으시는데 그것은 참으로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는 무례함일 뿐이었습니다.(55)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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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행동을 질타하는 위의 통렬한 표현들은 한국의 극존칭 표현이 담고 있는 부모-자식의 위계적 관계에 전적으로 상치된다. 나아가 박환덕 번역본에는 개별 단어의 자잘한 오역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발코니를 “마루”(22)로, 탈의실을 “선실”(25)로, 짐승을 “개새끼”(35)로, 기묘한 존재를 “골동품 같은 존재”(40)로 옮긴 것은 단어의 의미를 도착어권의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의도를 감안하더라도 분명한 오역에 속한다. “교회”(88)와 “율법의 부름”(90) 같은 표현 역시 유대교의 문화적 맥락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이 번역본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독자친화적 전략도 보여준다. 그 하나로서 본문 내용에 부가적 설명이 필요하면 각주를 사용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본문에 사진을 곁들여 편지의 내용 이해를 강화시키는데, 삶의 에피소드를 연대기적으로 열거한 편지의 구성에 맞추어 작가의 전기적 사진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나온다. 나아가 박환덕 번역본은 초창기 번역으로서 <아버지>의 차후 번역에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번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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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주동 역의 <꿈 같은 삶의 기록: 잠언과 미완성 작품집>(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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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공자인 이주동의 <아버지> 번역은 솔 출판사의 카프카 전집 2권 중 525-594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번역본의 구성적 특성과 관련하여, 역자는 후기에서 막스 브로트의 판본에 대한 설명과 문제점, 1990년대에 새로 출판된 비판본과 또 차후 완성본이 나오게 될 비판적-역사적 판본의 진행 과정에 이르기까지 카프카 원본의 출판사를 상세하게 개관하여 문헌학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번역본이 1992년과 1993년에 발간된 피셔 출판사의 카프카 비판본(KKA) <Nachgelassene Schriften und Fragmente> I, II<ref>이 책의 내용은 막스 브로트 판에는 <시골에서의 결혼준비와 유고 속의 다른 산문> 및 <어느 투쟁의 기록>으로 나뉘어 있다.</ref>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밝힌다. 원본 두 권을 하나로 묶어낸 이 번역본은 그 분량만 총 1012쪽에 이른다. 게다가 이 번역본은 독일어 저본과는 달리 수록 작품을 제목 없이 오로지 작품생성연도에 따라 번호를 매겨 목차에 실었다. 가령 <아버지>는 번역본 목차에는 “[31] 1919년 11월”로, 본문에는 “[30]”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이 같은 목차구성은 수록 작품이 본래 제목이 없다는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기 위한 문헌학적 의도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독자가 개별 작품의 생성연도와 날짜를 미리 알고 있어야만 접근 가능하며, 더욱이 이 때문에 번역된 수록 작품이 국립도서관 등의 서지 목록에 등록되지 못한 점들은 이 번역본의 치명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이주동 번역본은 “카프카 전집”의 한국어 번역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어 번역본 중 유일하게 비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문헌학적, 문학사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목 없는 목차’와 같은 레이아웃은 이 번역본의 소통 능력과 사용 가치를 저하하는 역효과를 낳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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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비판본을 바탕으로 한 이 번역본은 다른 한국어 번역본들과 달리 지명표시, 밑줄과 괄호 등의 기호를 삽입했고, 브로트가 자의적으로 뒤집었던 문장의 순서나 각색한 표현들은 모두 원문에 맞게 수정하였다. 예를 들면 카프카가 이 편지를 썼던 장소 셀레젠이 편지의 서두에 표시되거나, 본문에서 아버지가 카프카에게 던지는 조롱에 찬 말들의 순서가 원문과 동일하게 배열된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브로트 판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점은 해명과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가령 비판본에서 편지 초반에 나오는 “남들 Fremde”이라는 단어는 브로트 판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핵심어에 속한다. 브로트 판에는 “während ich für Dich keinen Finger rühre [...] tue ich für <ins>Freunde</ins> alles 아버지를 위해선 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친구들을 위해선 온갖 일을 다 한다고 말씀하시죠.”(Brod, 163)로 나오는 문장의 경우, “Freunde”가 비판본에는 “Fremde”(Schillemeit, 144)로 수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주동 번역은 여전히 “친구들을”(526)이라고 옮겼다. 추측건대 이런 오류는 역자 후기에서 암시되듯이, 브로트판과 비판본을 비교하며 번역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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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유대인 카프카의 편지에 종종 등장하는 유대인 고유의 문화적 현상들은 ‘문화번역’의 대상으로서 주요한 번역과제에 속한다. 이 번역본에서는 이런 문화적 차별성을 해결하려는 역자의 전략을 관찰할 수 있다. 역자는 한국인에게 이국적이고 생소한 체코 유대인의 삶과 직결된 내용을 옮길 때, 유사한 한국어 대응어가 있으면 그것을 한국어로 옮겼다. 가령 프라하 가정집에 딸린 다세대용 발코니는 “낭하”로 번역하고 괄호 속에 원어명과 함께 설명을 곁들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국어 대응어가 없는 경우에는 원어의 발음을 한국어로 옮긴 후 그 옆에 상세한 역자 설명을 곁들였다. 예로서, 유대교 휴일을 알리는 유월절 축제 첫째 날의 저녁 파티인 “제데르 아벤트”, 유대교의 신앙 문답인 “바르미츠바”의 경우, 역자는 주석 대신 본문 안에 직접 괄호를 사용하여 “(... 옮긴이)”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역자가 파라텍스트를 번역문에 편입시키는 이 방식은 편지에서 괄호로 부가 설명을 덧붙인 카프카의 방식과 동일하다. 이로써 역자는 작가의 부가설명 방식과 시각적 통일을 지향한 듯하다. 그러나 때로 동일 대상에 카프카 자신의 부가 설명과 역자의 부가 설명이 겹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쌍겹으로 표시된 괄호는 되려 시각의 혼란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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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차이를 본문에 부가 설명하여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번역전략에 속하는 만큼, 유대교 사원 “Tempel”을 “교회”(565)로 옮겨 기독교 교회와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거나, 사원에서 앞에 불려나가 토라(율법/모세오경)를 읽는 예식인 “Zur Thora aufgerufen”을 통용되는 “모세오경 낭독” 혹은 “율법 낭독”으로 옮기는 대신 “율법의 부름”(566)으로 개념화한 것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번역의 예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예들(비교. 박환덕 2018, 88-90)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이주동의 번역본은 앞선 박환덕의 번역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아버지를 향해 극존칭 어법을 사용한 점에서도 이주동과 박환덕은 기성세대 번역가로서의 공통점을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이주동 번역은 박환덕의 기존 번역본을 적극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체로 고지식하고 고답적인 인상을 풍기는 박환덕 번역에 비해 이주동의 번역은 명료하고 가독성 있는 현대적 어법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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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재황(2012)| 이재황 역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2012)]]<span id="이재황(2012)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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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황의 번역본은 1999년도 동일 번역본의 5쇄에 해당하는 단행본으로 2012년도에 출간되었다. 역자는 박환덕과 마찬가지로 편집자 브로트의 주석을 사용하지만, 훨씬 내용을 축소해 작품 소개글로 앞면에 실었다. 이 번역본도 사용된 저본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 소개글을 통해 브로트판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황 번역본은 편지 서두를 장식하는 “사랑하는 아버지 Liebster Vater”를 그대로 옮기는 대신 본문 내용에 앞서 개별적으로 “아버지께 이 글을 올립니다”라는 서문을 달아 마치 제목처럼 사용했다. 이로써 “사랑하는 아버님!” 혹은 “사랑하는 아버님”으로 편지글의 서두를 장식한 이주동 및 박환덕의 번역본과 차별성을 만든다. 또한 이 단행본은 편지에 언급된 여러 인물, 가족, 가게의 로고, 주택과 건물, 장소와 거리, 도시 프라하와 마을 풍경, 엽서 등 관련 사진들을 풍부하게 곁들여 서술내용에 현장감과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 한편 부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역자 설명은 눈에 띄지 않는 미주로 처리하였다. 본문 뒤에는 역자 후기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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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에 사용된 어법으로 볼 때, 이재황의 번역은 “아버지”와 “..요” 존칭법을 사용하여 이전 세대의 역자들보다 덜 정중하지만 보다 현대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전체적으로 정확한 해석을 지향하고 오역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번역이다. 정제되고 순화된 국어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문장들은 글의 흐름과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앞서 박환덕 번역본에서 예로 들었던 내용은 여기서 훨씬 정제된 표현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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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다른 한편으로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는 점이 제 마음을 또한 아프게 했습니다). 또한 저는 아버지가 점잖지 못한 상투적인 말들을 되도록 큰 소리로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지요. 그런 말을 해놓으시고는 무슨 특별히 뛰어난 말씀이라도 하신 듯이 크게 웃으셨지요, 뭐 그저 천박하고 시시하고 외설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58-59)</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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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내용이지만 박환덕의 번역에는 아버지에 대한 경멸감과 아버지를 평가절하하는 아들의 비난이 격한 언어로 표출되었다면, 이재황의 번역은, 아들이 비록 아버지의 사교 생활에서 표출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낮은 교양 수준을 지적은 하되, 질타보다는 오히려 그런 아버지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존중심을 유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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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차이로서 유대교와 관련된 개념들은 앞서 살펴본 번역본들과 달리 “사원”(101), “토라 독송에 불려나가다”(102)로 옮겨 유대교의 독특한 종교적 특징을 잘 살렸고, 특정 예식은 따로 설명을 부가하는 대신 “외운 것을 줄줄 읊조리기만 하면 되었던 바르-미츠바 행사”, “유월절 축제의 첫째날 저녁 파티”로 풀어서 직접 문장 속에 녹여 쓰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 번역전략은 원문보다 번역문장이 훨씬 길어지며 역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의미를 풀어씀으로써 도착어 권의 독자가 ‘낯선 것의 체험’을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독자 친화적인 효과를 노린다. 전반적으로 보아도 이재황의 번역은 선별된 번역본 중에서 가장 가독성이 뛰어나고 유려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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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초일 역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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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본은 정초일이 1999년 푸른숲 출판사에서 출간했던 기존 번역본을 16년 후에 다시 원문과 대조하며 전면 재검토하고 수정 보완하여 2015년에 은행나무에서 새로 출간한 개정판이다. 이 번역본은 선별된 번역본 중에서 유일한 개정판이기도 하다. 이 번역본에는 <아버지> 외에도 부록으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와 <누이동생 엘리에게 보내는 편지>가 함께 수록되었으며, 역자해설과 작가연보가 담겨있다. 앞서 살펴본 단행본들과 마찬가지로 이 번역본 역시 편지 내용에 상응하는 사진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사진 첨부는 2010년도 이후에 나온 번역본들을 장식하는 하나의 추세로 보인다. 정초일은 본문과 관련된 부가적 역자 설명은 모두 각주로 처리하였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 작품이 카프카라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이고 그의 전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와 동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해 역자 후기는 단순히 카프카에 대한 몇 자의 소개글로 끝나지 않고 본문 편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깊이 있는 해석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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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본은 개정판이라는 위상에 맞게, 주의 깊게 선별된 언어, 정확성을 지향하는 원문 해석,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소송, 즉 “부자간의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소송”(167)으로서 원문의 호소적 목소리를 충실하게 담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문체와 관련하여 정초일의 번역은 주로 문어체적 어법을 구사한다. 이는 구어체와 문어체의 중간에 위치하는 편지의 문어체적 특성을 더욱 강조한 번역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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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그러나 아버지는 제가 저 자신을 구원해보고자 여러모로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어떤 생각들을 거쳐 이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도 역시 전혀 모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정초일,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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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혼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셨겠지요. 따라서 제가 어떤 생각들을 거쳐 이 결혼 계획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아실 리 없겠지요(이재황, 141)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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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비교를 위해 예로 든 이재황 번역을 보면, 같은 내용이라도 구어적 표현법에 가까우며 보다 말하듯이 자연스럽다. 단어의 길이에서나 리듬에서 정초일의 어법은 더 복잡하고 호흡이 긴 반면 이재황의 표현은 짧고 명료하다. 하지만 문어적 표현과 구어적 표현이 정초일이나 이재황에게서 항시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같은 문체의 차이에서 역자들의 세대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정초일의 번역은 유일한 개정판이라는 점, 그리고 대중 독자를 향한 단행본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널리 읽히는 것을 넘어 카프카의 세계를 폭넓게 알리려는 문헌학적 노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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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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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제목 및 존칭법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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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편지는 20세기 초에 이미 부모와 자식 간에 duzen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ref>참조: 18세기 작가 Georg Christoph Lichtenberg는 사람들이 동일인을 상황에 따라 “bald ‘Du’, bald ‘Er’, bald ‘Ihr’, bald ‘Sie’”로 부른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괴테는 편지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Frau Mutter라 부르며 존칭법(Sizen)을 사용했다. 19세기의 시민계급도 여전히 부모에게 존칭법을 사용했다. Herr Vater, Frau Mutter, Sie와 같은 존칭법은 당시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독일문학은 현대 핵가족 중심으로 변한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이 이제 duzen을 쓰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68’세대 이후 비권위적 평등화의 물결 속에 자식이 부모를 이름으로 부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ref> 서구문화권에서 가족 및 친인척 관계에서 사용되는 이 du는 보통 한국어 ‘너’로 번역되듯 관계의 평등함이 아니라 관계의 ‘친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번역본들은 역자의 세대와 출간된 시대별로 다양한 등급의 호칭과 존칭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시대에 가까워질수록 “아버님께 -> 아버지께 -> 아버지에게”, “드리는 -> 보내는”으로 점차 어법이 평등화되어감을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및 개인화라는 시대적 변화와 축을 같이 한다. 한편으로는 원문 텍스트의 어법과 시대적 배경을,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핵가족 사회를 넘어 일인가구 시대로 진입한 한국 사회의 수용자를 고려할 때 번역전략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는 또 오늘날 번역본의 표준제목을 결정할 때도 배려되어야 할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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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번역과 개정판에 대한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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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번역의 개정판 출간은 불완전하거나 오역된 기존 내용을 검토 수정 보완하거나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새로운 연구 현황을 흡수 반영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이 점에서 정초일의 번역은 개정판을 통해 정갈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인 번역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평가된다. 반면 잦은 오역들이 드러난 기존 번역본들의 실질적인 개정판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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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일에서 카프카 비판본이 1990년대부터 출간되어 카프카 연구에 새로운 단계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과 개정판들은 여전히 브로트 판을 저본으로 삼은 것에는 재고가 필요하다. 여기서 이주동 번역이 새 비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번역이 문학 연구와 동행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점에서 차후의 새로운 번역들 역시 최신 카프카 연구 결과들을 충분히 반영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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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집 번역의 전략적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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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집을 번역한 이주동 번역본은 독자를 겨냥한 대중적인 단행본과는 그 출판 의도와 기능에서 큰 차별성을 갖는다. 이 전집 번역과 병행된 문헌학적 연구는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단행본과 달리 전집은 학술상의 인용이 가능한 학술적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이로써 또한 여러 문제가 발생했음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비판본 2권을 하나로 통합한 번역본의 방대한 분량을 두고 볼 때 전집의 역자가 수록된 개별 작품의 번역과 수정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집 번역과 발간에도 번역의 질을 높이고 역자의 수고를 덜어주는 보다 효과적인 전략이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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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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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동(2004): 꿈 같은 삶의 기록: 잠언과 미완성 작품집. 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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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황(2012):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문학과지성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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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일(2015):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은행나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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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덕(2018):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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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김연신</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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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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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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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5}}<!--바깥 링크(원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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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ojekt-Gutenberg [https://www.projekt-gutenberg.org/kafka/vater/vater.html 보기]
 
  
 
[[분류: 독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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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비평된작품]]

2024년 6월 10일 (월) 13:44 판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


작품소개

카프카가 1919년에 쓴 이 편지는 100쪽 가량의 긴 편지로 실제로 아버지에게 보내지지는 않았다. 카프카의 사적 기록으로 보관되다가 1951년에 처음으로 <디 노이에 룬트샤우>에 전문이 발표되었다. 아버지와의 불편하고 굴욕적인 관계를 어린 시절로 소급해서 기록한 이 편지는 카프카에 대한 심리 분석적 연구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이다. 유대인 출신인 카프카의 아버지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고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자수성가해서 프라하 시내에 장신구 가게를 연 어엿한 상인이었다. 카프카는 아버지를 활력적이지만 화를 잘 내고 독선적이며, 남들한테는 엄격한 규칙을 내세우나 자신에게는 관대한 모순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이 편지는, 카프카가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 자신의 기질과는 전혀 다른 아버지에게 느끼는 굴욕감, 불만, 불안,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양가적인 심리를 드러낸다. 편지에서 묘사되는 카프카의 아버지는 카프카의 단편 <선고>의 거인과도 같은 아버지의 모델로 보인다. 이 편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이라는 카프카 문학의 핵심주제를 담고 있고 카프카 자신의 생애 분석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작가 개인의 사적 증언인지 문학작품으로 구상된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국내에서는 1978년에 김윤섭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덕문출판사).


초판 정보

Kafka, Franz(1919): Der Brief an den Vater. In: Schillemeit, Jost(ed.): Nachgelassene Schriften und Fragmente I. Frankfurt a. M.: S. Fischer, 143-217.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火夫 變身 세종문고 39 프란츠 카프카 鄭康錫(정경석) 1975 世宗出版公社 155-202 편역 완역
2 火夫 變身 삼중당문고 344 프란츠 카프카 洪京鎬(홍경호) 1977 三中堂 264-307 편역 완역
3 아버님께 드리는 便紙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프란츠 카프카 金潤涉 1978 德文出版社 177-263 편역 완역
4 화부 관찰 SHORT BOOK 6 프란츠 카프카 洪京鎬(홍경호) 1987 汎潮社 56-96 편역 완역
5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변신, 유형지에서(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6 프란츠 카프카 박환덕 1989 汎友社 291-351 편역 완역
6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변신·유형지에서(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_2 프란츠 카프카 박환덕 1989 범우사 292-351 편역 완역
7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_2 프란츠 카프카 박환덕 1995 범우사 319-385 편역 완역
8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정초일 1999 푸른숲 13-167 편역 완역
아버지께 이 글을 올립니다 Kafka :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1999 문학과지성사 9-162 완역 완역
10 아버지께 변신 Bestsellerworldbook 74 프란츠 카프카 안영란 2002 소담출판사 193-256 편역 완역
11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변신 Positive power of classic 217-219 카프카 이영희 2004 좋은생각 153-240 편역 완역
12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김창협 2006 은금나라 6-159 완역 완역
13 화부 관찰 Mr. know 세계문학 프란츠 카프카 홍성광 2007 열린책들 59-92 편역 완역
14 화부 변신 프란츠 카프카 송소민 2008 책만드는집 159-215 편역 완역
15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김보회 2008 보성 6-141 완역 완역
16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가족 테마명작관 2 프란츠 카프카 국세라 2011 에디터 39-114 편역 완역
17 화부 화부 Bestseller minibook 17 프란츠 카프카 배인섭 2012 태일소담 11-75 편역 완역
18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데미안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2013 을유문화사 9-161 편역 완역
19 화부 변신 프란츠 카프카 송소민 2013 책만드는집 159-213 편역 완역
20 화부 변신 책만드는집 세계 문학, classic 4 프란츠 카프카 송소민 2017 책만드는집 157-216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1]는 프란츠 카프카가 36살이던 1919년 11월에 작성한 실제의 서한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내지 않았으며, 작가 사후인 1952년 문학잡지 <Neue Rundschau>에 <Brief an den Vater>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 편지는 나치의 압류 등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막스 브로트가 편집한 카프카 전집에 수록되었다. 1935년 이 전집의 출판권을 인수했던 베를린의 유대계 출판사인 쇼켄(Schocken)이 전쟁으로 인해 뉴욕으로 이전하는데, 1953년에 독일 피셔(Fischer) 출판사가 쇼켄 출판사의 판권을 얻어 이 전집의 라이센스 판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전집 중 <아버지>는 총 457쪽 분량의 작품집 <시골의 결혼준비와 유고집의 다른 산문들>의 162~223쪽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이에 편집자 브로트는 작품집 뒤편에 쪽별로 주석을 달아, <아버지>가 다른 편지들과 함께 수록되는 대신 문학작품집에 수록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브로트에 따르면 결국 수신자에게 발송되지 않은 <아버지>는 편지의 기능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브로트는 이 글을 작가 자신의 전기를 포괄적으로 서술한 시도로 이해했다. <아버지>의 원고에 관해 브로트는 카프카 자신이 타자기로 직접 작성하고 손으로 수정을 가했다고 밝힌다. 그 원고는 타자 종이 약 45쪽의 분량에 해당하며, 각 쪽은 평균 34행으로 이루어지고, 45쪽은 대부분 비어 있다. 이 <아버지> 원고는 1975년부터 오늘날까지 피셔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어왔다.

그런데 막스 브로트 편집의 <아버지> 원고는 오늘날 피셔 출판사에서 카프카 비판본(KKA)이 나오며 그 차이점이 드러났다. 이 비판본에는 <아버지>가 1993년에 발간된 유고집 <Nachgelassene Schriften und Fragmente II>에 수록되어 있다. 비판본의 목차에는 작품 집필 시기별로 번호와 제목이 달려있다. <아버지>의 경우 “[6] Der “Brief an den Vater” (November 1919)”로 표기되어 있다. 게다가 비판본은 <아버지>의 원본이 카프카가 손으로 쓴 103쪽의 편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원본이 타이핑 원고라는 브로트의 주장은 틀렸음이 드러났다. 이 원본은 피셔 출판사 사장 요아힘 운젤트(Joachim Unseld)가 1994년 스캔 복사하여 인쇄체로 출판했고, 또 인터넷 위키 소스에 무료로 제공되고 있어 확인할 수 있다.[2]

작가는 이 편지에서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가족 내의 수많은 일화를 열거하며 자신의 성장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아버지 콤플렉스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여러 대조적인 차이, 카프카의 가족, 성과 결혼, 유대주의, 글쓰기 같은 소주제들로 이루어진다. 글의 말미에서 작가는 이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율리 보리체크와의 파혼임을 밝히는데, 그 원인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초래된 자신의 문제라고 지적함으로써 자기 삶의 지배자로서 아버지의 존재를 고찰과 고발의 중심에 놓고 있다.

<아버지>는 카프카 문학의 한 주요주제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버지 콤플렉스에 대한 전기적, 실증적 자료이며, 카프카 문학의 이해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천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과는 달리 <아버지>는 수십 번씩 번역된 카프카의 다른 문학 작품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고, 한국어 번역 현황 역시 저조한 수용상황을 보여준다. 한국어 번역이 저조한 까닭으로는 이 글이 실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게다가 그 번역이 늦게 시작되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지금까지 총 12개가 집계된다. 최초의 한국어 번역은 구 한남대 독문과 교수였던 김윤섭에 의해 1978년도에 이루어졌다. 이어 서울대 교수였던 박환덕의 번역이 1980년대 및 1990년대에 각각 한 차례씩 범우사에서 출판되는데, 이 번역본은 2018년도에 종합출판 범우사로 이름을 바꾼 동일 출판사에서 다시 한번 출간되었다. 1990년대엔 외국어대 교수 정초일과 독문학 전공자 이재황의 번역이 출간되었고, 이 번역본들은 2012년도와 2015년도에 각각 재출간된다. 2000년도에 들어와 총 4편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독문학 전공자 이영희가 2004년 카프카 단편선을 엮어 출간한 <변신>에 이 편지를 번역하여 수록했다, 그리고 같은 해 솔 출판사에서 발행한 카프카 전집의 일환으로서, 서강대 이주동 교수가 카프카의 잠언과 미완성 유고작들을 모두 합쳐 번역한 <꿈 같은 삶의 기록>(전집 2권)에 이 편지가 수록되었다. 이 카프카 전집은 2017년도에 다시 개정판이 나왔다. 2006년도에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는 김창협의 번역본이 은금나라에서 출간된다. 이 번역본의 표지에 나온 영어 제목 “A Letter to Father”와 역자가 독일어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으로 미루어 이것은 영역본을 한국어로 옮긴 중역임을 추측할 수 있다. 2008년도 김보희의 번역본은 직접 영한대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실제로 <아버지>가 독일어 원문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된 경우는 총 6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번역 시기는 주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로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저조한 번역 현황에 더하여 번역본 중 몇몇은 아예 출판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따라서 이 글은 현재 접근이 가능하고 또 번역연구에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는 이주동(2004), 이재황(2012), 정초일(2015), 박환덕(2018)의 번역본을 선별하여 그 전반적 경향과 특성들을 살펴본다.


2. 개별 번역 비평

1) 박환덕 역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2018)

2018년 범우에서 나온 박환덕의 번역은 개정판이라기보다는 1980년대 및 1990년대 나온 동일 번역본의 재판 인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단행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에 속한다는 암시 하에 원표제, 저자, 역자명을 표기하고, “독일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명시했을 뿐, 실제 어떤 저본을 사용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본문 번역에 뒤따르는 “역자 후기” 대신 본문에 앞서 약 3쪽에 걸쳐 “편집부”의 이름으로 작가 카프카에 대한 소개글을 담았다. 이 소개글은 박환덕의 기존 번역본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출판사가 수정 없이 재판으로 찍었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번역본이 2018년 출판된 점을 고려할 때, “사랑하는 아버님”으로 시작하는 편지의 머리말에 달린 각주가 여전히 1953년 브로트 판에 주석으로 달렸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는 사실에서도 역시 이 번역본이 브로트 판을 저본으로 삼았던 박환덕의 기존 번역본의 재판이라는 추측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따라서 이 번역비평에서는 박환덕의 1980년대 번역본의 재판으로서 이 번역본을 먼저 소개한다.

박환덕의 번역은 대체로 가독성은 좋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어 문장들을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향한 편지라는 점에서 주로 한국어의 극존칭 어법을 사용하지만, 이 어법은 아버지의 부당함을 개인적으로 고발하는 아들의 편지 내용과 불협화음을 낳는다. 즉 한편으로는 “아버님”, “어머님”, “당신” 등 극존칭을 통해 부모에게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아들의 존경심과 어려움을 표하지만, 아들이 아버지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이 어조가 급격히 변화될 수밖에 없으므로 글의 정조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다음 예문은 이 번역본을 지배하는 극존칭 어법이 실은 ‘아버지를 향한 비판과 고발’이라는 이 편지의 성격에 부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버지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시시한 보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패거리들과 모여 떠들어 대는 일이 저로서는 슬픈 일이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또 제가 발견한 아버님의 취미는 상스런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큰 목소리로 내뱉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특별히 좋은 말이라도 한 것처럼 웃으시는데 그것은 참으로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는 무례함일 뿐이었습니다.(55)

아버지의 행동을 질타하는 위의 통렬한 표현들은 한국의 극존칭 표현이 담고 있는 부모-자식의 위계적 관계에 전적으로 상치된다. 나아가 박환덕 번역본에는 개별 단어의 자잘한 오역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발코니를 “마루”(22)로, 탈의실을 “선실”(25)로, 짐승을 “개새끼”(35)로, 기묘한 존재를 “골동품 같은 존재”(40)로 옮긴 것은 단어의 의미를 도착어권의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의도를 감안하더라도 분명한 오역에 속한다. “교회”(88)와 “율법의 부름”(90) 같은 표현 역시 유대교의 문화적 맥락에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이 번역본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독자친화적 전략도 보여준다. 그 하나로서 본문 내용에 부가적 설명이 필요하면 각주를 사용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본문에 사진을 곁들여 편지의 내용 이해를 강화시키는데, 삶의 에피소드를 연대기적으로 열거한 편지의 구성에 맞추어 작가의 전기적 사진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나온다. 나아가 박환덕 번역본은 초창기 번역으로서 <아버지>의 차후 번역에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번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2) 이주동 역의 <꿈 같은 삶의 기록: 잠언과 미완성 작품집>(2004)

카프카 전공자인 이주동의 <아버지> 번역은 솔 출판사의 카프카 전집 2권 중 525-594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번역본의 구성적 특성과 관련하여, 역자는 후기에서 막스 브로트의 판본에 대한 설명과 문제점, 1990년대에 새로 출판된 비판본과 또 차후 완성본이 나오게 될 비판적-역사적 판본의 진행 과정에 이르기까지 카프카 원본의 출판사를 상세하게 개관하여 문헌학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번역본이 1992년과 1993년에 발간된 피셔 출판사의 카프카 비판본(KKA) <Nachgelassene Schriften und Fragmente> I, II[3]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밝힌다. 원본 두 권을 하나로 묶어낸 이 번역본은 그 분량만 총 1012쪽에 이른다. 게다가 이 번역본은 독일어 저본과는 달리 수록 작품을 제목 없이 오로지 작품생성연도에 따라 번호를 매겨 목차에 실었다. 가령 <아버지>는 번역본 목차에는 “[31] 1919년 11월”로, 본문에는 “[30]”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이 같은 목차구성은 수록 작품이 본래 제목이 없다는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기 위한 문헌학적 의도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독자가 개별 작품의 생성연도와 날짜를 미리 알고 있어야만 접근 가능하며, 더욱이 이 때문에 번역된 수록 작품이 국립도서관 등의 서지 목록에 등록되지 못한 점들은 이 번역본의 치명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이주동 번역본은 “카프카 전집”의 한국어 번역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어 번역본 중 유일하게 비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문헌학적, 문학사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목 없는 목차’와 같은 레이아웃은 이 번역본의 소통 능력과 사용 가치를 저하하는 역효과를 낳고 만 것이다.

유일하게 비판본을 바탕으로 한 이 번역본은 다른 한국어 번역본들과 달리 지명표시, 밑줄과 괄호 등의 기호를 삽입했고, 브로트가 자의적으로 뒤집었던 문장의 순서나 각색한 표현들은 모두 원문에 맞게 수정하였다. 예를 들면 카프카가 이 편지를 썼던 장소 셀레젠이 편지의 서두에 표시되거나, 본문에서 아버지가 카프카에게 던지는 조롱에 찬 말들의 순서가 원문과 동일하게 배열된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브로트 판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점은 해명과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가령 비판본에서 편지 초반에 나오는 “남들 Fremde”이라는 단어는 브로트 판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핵심어에 속한다. 브로트 판에는 “während ich für Dich keinen Finger rühre [...] tue ich für Freunde alles 아버지를 위해선 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친구들을 위해선 온갖 일을 다 한다고 말씀하시죠.”(Brod, 163)로 나오는 문장의 경우, “Freunde”가 비판본에는 “Fremde”(Schillemeit, 144)로 수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주동 번역은 여전히 “친구들을”(526)이라고 옮겼다. 추측건대 이런 오류는 역자 후기에서 암시되듯이, 브로트판과 비판본을 비교하며 번역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체코 유대인 카프카의 편지에 종종 등장하는 유대인 고유의 문화적 현상들은 ‘문화번역’의 대상으로서 주요한 번역과제에 속한다. 이 번역본에서는 이런 문화적 차별성을 해결하려는 역자의 전략을 관찰할 수 있다. 역자는 한국인에게 이국적이고 생소한 체코 유대인의 삶과 직결된 내용을 옮길 때, 유사한 한국어 대응어가 있으면 그것을 한국어로 옮겼다. 가령 프라하 가정집에 딸린 다세대용 발코니는 “낭하”로 번역하고 괄호 속에 원어명과 함께 설명을 곁들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국어 대응어가 없는 경우에는 원어의 발음을 한국어로 옮긴 후 그 옆에 상세한 역자 설명을 곁들였다. 예로서, 유대교 휴일을 알리는 유월절 축제 첫째 날의 저녁 파티인 “제데르 아벤트”, 유대교의 신앙 문답인 “바르미츠바”의 경우, 역자는 주석 대신 본문 안에 직접 괄호를 사용하여 “(... 옮긴이)”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역자가 파라텍스트를 번역문에 편입시키는 이 방식은 편지에서 괄호로 부가 설명을 덧붙인 카프카의 방식과 동일하다. 이로써 역자는 작가의 부가설명 방식과 시각적 통일을 지향한 듯하다. 그러나 때로 동일 대상에 카프카 자신의 부가 설명과 역자의 부가 설명이 겹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쌍겹으로 표시된 괄호는 되려 시각의 혼란을 야기한다.

문화적 차이를 본문에 부가 설명하여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번역전략에 속하는 만큼, 유대교 사원 “Tempel”을 “교회”(565)로 옮겨 기독교 교회와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거나, 사원에서 앞에 불려나가 토라(율법/모세오경)를 읽는 예식인 “Zur Thora aufgerufen”을 통용되는 “모세오경 낭독” 혹은 “율법 낭독”으로 옮기는 대신 “율법의 부름”(566)으로 개념화한 것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번역의 예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예들(비교. 박환덕 2018, 88-90)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이주동의 번역본은 앞선 박환덕의 번역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아버지를 향해 극존칭 어법을 사용한 점에서도 이주동과 박환덕은 기성세대 번역가로서의 공통점을 드러낸다. 전체적으로 이주동 번역은 박환덕의 기존 번역본을 적극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체로 고지식하고 고답적인 인상을 풍기는 박환덕 번역에 비해 이주동의 번역은 명료하고 가독성 있는 현대적 어법을 지향했다.


3) 이재황 역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2012)

이재황의 번역본은 1999년도 동일 번역본의 5쇄에 해당하는 단행본으로 2012년도에 출간되었다. 역자는 박환덕과 마찬가지로 편집자 브로트의 주석을 사용하지만, 훨씬 내용을 축소해 작품 소개글로 앞면에 실었다. 이 번역본도 사용된 저본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 소개글을 통해 브로트판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황 번역본은 편지 서두를 장식하는 “사랑하는 아버지 Liebster Vater”를 그대로 옮기는 대신 본문 내용에 앞서 개별적으로 “아버지께 이 글을 올립니다”라는 서문을 달아 마치 제목처럼 사용했다. 이로써 “사랑하는 아버님!” 혹은 “사랑하는 아버님”으로 편지글의 서두를 장식한 이주동 및 박환덕의 번역본과 차별성을 만든다. 또한 이 단행본은 편지에 언급된 여러 인물, 가족, 가게의 로고, 주택과 건물, 장소와 거리, 도시 프라하와 마을 풍경, 엽서 등 관련 사진들을 풍부하게 곁들여 서술내용에 현장감과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 한편 부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역자 설명은 눈에 띄지 않는 미주로 처리하였다. 본문 뒤에는 역자 후기가 따른다.

서간에 사용된 어법으로 볼 때, 이재황의 번역은 “아버지”와 “..요” 존칭법을 사용하여 이전 세대의 역자들보다 덜 정중하지만 보다 현대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전체적으로 정확한 해석을 지향하고 오역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번역이다. 정제되고 순화된 국어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문장들은 글의 흐름과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앞서 박환덕 번역본에서 예로 들었던 내용은 여기서 훨씬 정제된 표현력을 얻는다.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는 점이 제 마음을 또한 아프게 했습니다). 또한 저는 아버지가 점잖지 못한 상투적인 말들을 되도록 큰 소리로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지요. 그런 말을 해놓으시고는 무슨 특별히 뛰어난 말씀이라도 하신 듯이 크게 웃으셨지요, 뭐 그저 천박하고 시시하고 외설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58-59)

같은 내용이지만 박환덕의 번역에는 아버지에 대한 경멸감과 아버지를 평가절하하는 아들의 비난이 격한 언어로 표출되었다면, 이재황의 번역은, 아들이 비록 아버지의 사교 생활에서 표출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낮은 교양 수준을 지적은 하되, 질타보다는 오히려 그런 아버지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존중심을 유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문화적 차이로서 유대교와 관련된 개념들은 앞서 살펴본 번역본들과 달리 “사원”(101), “토라 독송에 불려나가다”(102)로 옮겨 유대교의 독특한 종교적 특징을 잘 살렸고, 특정 예식은 따로 설명을 부가하는 대신 “외운 것을 줄줄 읊조리기만 하면 되었던 바르-미츠바 행사”, “유월절 축제의 첫째날 저녁 파티”로 풀어서 직접 문장 속에 녹여 쓰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 번역전략은 원문보다 번역문장이 훨씬 길어지며 역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의미를 풀어씀으로써 도착어 권의 독자가 ‘낯선 것의 체험’을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독자 친화적인 효과를 노린다. 전반적으로 보아도 이재황의 번역은 선별된 번역본 중에서 가장 가독성이 뛰어나고 유려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


4) 정초일 역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2015)

이 번역본은 정초일이 1999년 푸른숲 출판사에서 출간했던 기존 번역본을 16년 후에 다시 원문과 대조하며 전면 재검토하고 수정 보완하여 2015년에 은행나무에서 새로 출간한 개정판이다. 이 번역본은 선별된 번역본 중에서 유일한 개정판이기도 하다. 이 번역본에는 <아버지> 외에도 부록으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와 <누이동생 엘리에게 보내는 편지>가 함께 수록되었으며, 역자해설과 작가연보가 담겨있다. 앞서 살펴본 단행본들과 마찬가지로 이 번역본 역시 편지 내용에 상응하는 사진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사진 첨부는 2010년도 이후에 나온 번역본들을 장식하는 하나의 추세로 보인다. 정초일은 본문과 관련된 부가적 역자 설명은 모두 각주로 처리하였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 작품이 카프카라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이고 그의 전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와 동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해 역자 후기는 단순히 카프카에 대한 몇 자의 소개글로 끝나지 않고 본문 편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깊이 있는 해석을 담았다.

이 번역본은 개정판이라는 위상에 맞게, 주의 깊게 선별된 언어, 정확성을 지향하는 원문 해석,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소송, 즉 “부자간의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소송”(167)으로서 원문의 호소적 목소리를 충실하게 담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문체와 관련하여 정초일의 번역은 주로 문어체적 어법을 구사한다. 이는 구어체와 문어체의 중간에 위치하는 편지의 문어체적 특성을 더욱 강조한 번역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가 저 자신을 구원해보고자 여러모로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어떤 생각들을 거쳐 이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도 역시 전혀 모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정초일, 115) 제가 결혼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셨겠지요. 따라서 제가 어떤 생각들을 거쳐 이 결혼 계획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아실 리 없겠지요(이재황, 141)

위에 비교를 위해 예로 든 이재황 번역을 보면, 같은 내용이라도 구어적 표현법에 가까우며 보다 말하듯이 자연스럽다. 단어의 길이에서나 리듬에서 정초일의 어법은 더 복잡하고 호흡이 긴 반면 이재황의 표현은 짧고 명료하다. 하지만 문어적 표현과 구어적 표현이 정초일이나 이재황에게서 항시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같은 문체의 차이에서 역자들의 세대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정초일의 번역은 유일한 개정판이라는 점, 그리고 대중 독자를 향한 단행본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널리 읽히는 것을 넘어 카프카의 세계를 폭넓게 알리려는 문헌학적 노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


3. 평가와 전망

1) 표준제목 및 존칭법의 문제

카프카의 편지는 20세기 초에 이미 부모와 자식 간에 duzen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4] 서구문화권에서 가족 및 친인척 관계에서 사용되는 이 du는 보통 한국어 ‘너’로 번역되듯 관계의 평등함이 아니라 관계의 ‘친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번역본들은 역자의 세대와 출간된 시대별로 다양한 등급의 호칭과 존칭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시대에 가까워질수록 “아버님께 -> 아버지께 -> 아버지에게”, “드리는 -> 보내는”으로 점차 어법이 평등화되어감을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및 개인화라는 시대적 변화와 축을 같이 한다. 한편으로는 원문 텍스트의 어법과 시대적 배경을,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핵가족 사회를 넘어 일인가구 시대로 진입한 한국 사회의 수용자를 고려할 때 번역전략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는 또 오늘날 번역본의 표준제목을 결정할 때도 배려되어야 할 요소다.


2) 새로운 번역과 개정판에 대한 기대

기존 번역의 개정판 출간은 불완전하거나 오역된 기존 내용을 검토 수정 보완하거나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새로운 연구 현황을 흡수 반영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이 점에서 정초일의 번역은 개정판을 통해 정갈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인 번역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평가된다. 반면 잦은 오역들이 드러난 기존 번역본들의 실질적인 개정판이 절실히 요구된다. 또한 독일에서 카프카 비판본이 1990년대부터 출간되어 카프카 연구에 새로운 단계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과 개정판들은 여전히 브로트 판을 저본으로 삼은 것에는 재고가 필요하다. 여기서 이주동 번역이 새 비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번역이 문학 연구와 동행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점에서 차후의 새로운 번역들 역시 최신 카프카 연구 결과들을 충분히 반영하리라 기대한다.


3) 전집 번역의 전략적 차원

카프카 전집을 번역한 이주동 번역본은 독자를 겨냥한 대중적인 단행본과는 그 출판 의도와 기능에서 큰 차별성을 갖는다. 이 전집 번역과 병행된 문헌학적 연구는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단행본과 달리 전집은 학술상의 인용이 가능한 학술적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이로써 또한 여러 문제가 발생했음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비판본 2권을 하나로 통합한 번역본의 방대한 분량을 두고 볼 때 전집의 역자가 수록된 개별 작품의 번역과 수정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집 번역과 발간에도 번역의 질을 높이고 역자의 수고를 덜어주는 보다 효과적인 전략이 요망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주동(2004): 꿈 같은 삶의 기록: 잠언과 미완성 작품집. 솔.
이재황(2012):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문학과지성사.
정초일(2015):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은행나무.
박환덕(2018):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범우.

김연신
  • 각주
  1. 이하 줄여서 <아버지>로 표기함.
  2. https://de.wikisource.org/wiki/Index:Brief_an_den_Vater
  3. 이 책의 내용은 막스 브로트 판에는 <시골에서의 결혼준비와 유고 속의 다른 산문> 및 <어느 투쟁의 기록>으로 나뉘어 있다.
  4. 참조: 18세기 작가 Georg Christoph Lichtenberg는 사람들이 동일인을 상황에 따라 “bald ‘Du’, bald ‘Er’, bald ‘Ihr’, bald ‘Sie’”로 부른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괴테는 편지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Frau Mutter라 부르며 존칭법(Sizen)을 사용했다. 19세기의 시민계급도 여전히 부모에게 존칭법을 사용했다. Herr Vater, Frau Mutter, Sie와 같은 존칭법은 당시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독일문학은 현대 핵가족 중심으로 변한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이 이제 duzen을 쓰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68’세대 이후 비권위적 평등화의 물결 속에 자식이 부모를 이름으로 부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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