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Iphigenie auf Tauris)"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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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AU0004}}의 소설 {{A01}} <!--작품소개--> 괴테의 고전주의 시기를 대표하는 5막 희곡이다. 괴테는 에우리피데스의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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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br>(Iphigenie auf Tau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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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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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드라마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터의 고뇌>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거듭 번역되면서 독서 대중의 인식 속에 괴테의 대표작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소개가 되기는 했지만<ref>1932년 괴테 서거 100주년 기념 특집으로 나온 <문예월간> 4호에 실린 조희순의 글에 “이휘게늬-”라는 제목으로 간략한 내용과 함께 “괴-테의 古典主義的藝術의 代表作이라고보는 希臘에서 取材한 韻文劇”이라고 문학사적 위치가 요약되어 있다. 조희순(1932): 괴-테의 生涯와 그 作品. 문예월간 4, 9-10.</ref> 번역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 괴테의 작품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도 인지도가 낮은 편이고 번역도 비교적 적게 되었다.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강두식에 의해 처음 번역되어 1968년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괴에테문학전집>에 수록되었다. 10년 후 백문당에서 출간한 <대세계철학적문학전집>의 4권으로 기획된 괴테의 드라마들 번역 가운데 하나로 정진웅의 두 번째 번역이 잇따랐으며, 그로부터 다시 20여 년이 흐른 1990년대에 윤도중(1996)과 김주연(1999)의 번역이 나왔다. 이하에서는 강두식, 윤도중, 김주연의 번역을 주로 문화적 차이와 성차를 중심으로 비교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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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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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두식(1968)|강두식 역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1968)]]<span id="강두식(1968)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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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두식의 번역이 실린 1968년도의 <괴에테문학전집>(휘문출판사)은 조우호의 지적처럼 실제로는 선집이지만 당시 한국 출판계와 독어독문학 연구의 상황을 볼 때 가히 전집의 의미를 갖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ref>조우호(2010): 근대화 이후 한국의 괴테 수용 연구. 코기토 68, 155.</ref> <괴에테문학전집>의 1권은 시 부분과 희곡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시 부분은 괴테의 몇몇 대표적인 시들과 <로마의 비가>, <서동시집>을, 희곡 부분은 <괴츠>, <에그몬트>, <이피게니에>, <타소오>를 담고 있다. 아쉽게도 번역기획을 드러내거나 저본을 밝히는 역자 후기는 실려 있지 않지만, 책의 말미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 강두식은 이 작품의 내용과 문학사적 위치, 특성을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을 초월한 인류애적 관용의 정신”(541)을 핵심 주제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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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두 번역과 다르게 강두식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중한 어조이다. ‘-(노/이)라’, ‘-여’, ‘-나이다’, ‘-소서’, ‘-인고/일고’, ‘-하누나’, ‘-사이다’, ‘-소이다’ 등의 종결어미와 ‘-옵-’ 등의 높임을 위한 선어말어미의 사용은 종종 결합되기도 하면서 드라마의 대사에 예스럽고 문어체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피게니에>가 본래 운문으로 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품의 특성과 잘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다. 어휘상으로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이피게니에는 디아나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제인데 강두식은 이를 ‘여승’으로 번역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라는 낯선 세계를 독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다소 아쉬운 점은, ‘사제’는 이피게니에의 시녀들과 구분되는 좀 더 높은 지위이며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식을 집전하는 임무를 맡는데 ‘여승’이라는 번역에서는 이런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피게니에와 토아스 사이의 대화에서 둘 사이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으로 나타난다. 분명 원작에서도 이 둘 사이에는 나이와 성별의 차이(젊은 여성과 나이 든 남성 왕)와 권력과 위계의 차이(이방인 피난민과 보호자인 왕)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피게니에는 단지 한 피난민 여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디아나 여신의 보호를 받는 신전의 사제이며, 원래 아가멤논의 딸이자 그리스 미케네의 공주임이 드라마가 진행되며 밝혀진다. 또한 ‘문명국’ 공주로서 ‘야만국’ 타우리스의 왕인 토아스에 비해 당시의 통념상으로는 문화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이들 사이의 위계의 차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런데 강두식의 번역에서 이피게니에는 스스로를 칭할 때 ‘소녀’(小女)라는 1인칭을 사용하며, 심지어 “소녀의 천한 입술로” 같은 표현에서는 극도로 자신을 낮추기도 한다. 이에 비해 그녀가 토아스를 ‘전하’나 ‘대왕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말할 때는 ‘-옵-’ 등을 자주 사용하여 극존칭으로 말을 높인다. 반면 토아스가 자신을 칭할 때는 원래 황제가 사용하는 1인칭 대명사인 ‘짐’(朕)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피게니에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하는 독백에서 3인칭으로 그녀를 가리킬 때는 ‘계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한 <이피게니에>에는 ‘여성의 특성’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 강두식의 번역에서는 ‘가련한’ 또는 ‘연약한’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지거나 번역어로 선택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3막에서 오레스트와 필라데스가 나누는 대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오레스트의 대사가 있다. “Der wilde Sinn des Königs tödtet uns;/Ein Weib wird uns nicht retten, wenn er zürnt.”(V. 784-785) 이 대목의 번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의 사나운 마음씨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걸세./하기는 그가 미친 듯이 성만 내면 가냘픈 여인의 힘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을테지만.”(강두식) 이처럼 강두식의 번역에서는 그냥 “여자 하나 Ein Weib”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가냘픈’이라는 형용사가 추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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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더 핵심적인 예는 작품 시작 부분에서 이피게니에가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며 하는 독백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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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higenie  Der Frauen Zustand ist beklagenswert.(V.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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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게니에  여인의 <u>처지란 가련한 것.</u>(강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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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들의 <u>운명은 한탄스럽다.</u>(윤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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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들의 <u>처지란 가련한 것.</u>(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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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는 ‘Zustand’와 ‘beklagenswert’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데 있어 세 역자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Zustand’를 강두식과 김주연은 ‘처지’로, 윤도중은 ‘운명’으로 번역하였다. ‘처지’는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임에 비해 ‘운명’은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 단지 지금 그러하다고 보는 것인지, 바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보는 것인지 하는 의미상의 차이가 생겨난다. 반면 ‘beklagenswert’를 윤도중은 ‘한탄스럽다’(“한숨 쉬며 탄식할 만한 데가 있다”)라고 중립적으로 번역한 데 비해 다른 두 번역자는 ‘가련하다’(“가엾고 불쌍하다”)라고 번역하여 동정과 연민의 감정과 관련시킨다. 한편 ‘Mann’이 ‘남자/남성’이 아니라 ‘사람/인간’으로 번역되어 유적인 대표성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젠더 번역과 관련된 이런 비대칭성은 이 번역이 나온 시대의 번역 지평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30여 년 후의 번역에도 이런 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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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kas    Ein edler <u>Mann</u> wird durch ein gutes W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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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r Frauen weit geführt.(V. 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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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스  존귀하신 <u>어른들은</u> 여인들의 착한 말씀 한 마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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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짝 마음문을 여시니까요.(강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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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결한 <u>남자는</u> 여자의 좋은 말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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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량이 넓어지는 법입니다.(윤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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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귀한 <u>인간은</u> 여인의 친절한 말 한마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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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끌려가는 법입니다.(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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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문화적 차이와 관련된 번역어들인데, 위에서 예를 든 ‘여승’이나 ‘짐(朕)’이라는 단어에서는 낯선 문화의 다름이 익숙한 문화의 단어들로 바뀌며 의미의 외연이 달라지는 반면, 반대의 예도 존재한다. 필라데스와 오레스트의 관계는 사촌이면서 친구이며, 동성애적인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는 긴밀한 사이이기도 하다. 이 대목을 번역하는 데 있어 강두식의 번역은 문화적 낯섦을 그대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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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lades    Da fing mein Leben an, als ich dich liebte.(V.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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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데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내 생애는 시작된거야.(강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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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을 좋아했을 때 그때 내 인생이 시작되었어요.(윤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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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를 사랑하면서 내 인생은 시작됐어.(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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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윤도중의 번역은 다른 두 번역과 차이를 보인다. 강두식과 김주연은 한국문화에 낯선, 사촌이자 친구라는 관계를 낯선 그대로 옮기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강두식의 번역은 오레스트와 필라데스의 관계를 서로 가장 가까운 것으로 그려낸다. 다른 한편 강두식의 번역에서 이와 상반되는 예는 “야만인이오, 동시에 상스런 스키타이 종족”(433), “(사로잡힌) 그 상민들”(431)이라는 표현들에서 볼 수 있듯이, 낯선 문화의 타자성을 ‘상민’, ‘상스러움’과 연결시키는 지점이다. “상스런”은 ‘roh(거친)’를, “상민들”은 ‘Fremden(이방인들)’을 번역한 것이며, 전자는 타우리스에 사는 스키타이인, 후자는 타우리스에 온 이방인인 그리스인과 관련된다. 이런 번역은 문화적 거리를 한 사회의 신분 질서 내에서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로 치환하여, 타자성을 낯섦 그대로 드러내는 번역 선택과는 반대의 방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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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도중(1996)|윤도중 역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1996)]]<span id="윤도중(1996)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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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윤도중은 괴테의 고전주의 시기의 희곡들(<에그몬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타쏘>)을 묶어서 번역하면서 <머릿말>에 자신의 번역기획을 밝혀 놓았다. “황금만능주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지면서 인간 존재의 바탕이 되는 인간성이 파괴되고 우리는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게 되었다. 황금만능주의에 오염되어 인간성을 잃고 황량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독일 고전주의 문학, 괴테의 문학이 많은 가르침을 줄 것으로 믿어 이 역서를 낸다.”(3) 핵심어는 “고전의 가치”이다. 역자는 집문당에서 펴낸 이 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어떤 점에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독일 문학사상 최고봉인 괴테의 주요 작품이라는 점에서 고전이고 둘째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라는 점에서 고전이다.”(3) <머릿말> 뒤에는 “괴테의 생애”, “독일 고전주의 문학”, “작품해설”이 차례로 실려 있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강두식과 비슷하게 <이피게니에>의 문학사적 위치와 그 핵심을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금자탑”이자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과 인도주의 정신”으로 요약하고 있다. 강두식의 번역(1968)으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나온 윤도중의 번역(1996)은 이처럼 괴테의 고전주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머리말, 작가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문예사조, 작품해설까지 실은 매우 학술적이고 충실한 번역기획을 보이는데, 이는 그동안 독문학 연구의 역량이 계속 축적된 사실과도 관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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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중 번역의 특징이자 가장 큰 장점은 독일어 원문에 충실한 꼼꼼하고 정확한 번역이다. 또한 이피게니에와 토아스 왕 사이의 관계에도 몇 가지 변화가 보인다. 한편으로 토아스 왕은 이피게니에에게 ‘-하오’체 정도의 존대를 하며, 이피게니에도 자신을 극도로 낮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피게니에는 여전히 자신을 ‘소녀’라고 칭하며, ‘-사옵니다’ 등의 문체를 사용한다. 또한 ‘여성의 특성’과 관련된 대목에서는 ‘연약하다’, ‘가련하다’ 등의 번역어가 종종 선택된다. 황제의 1인칭인 ‘짐(朕)’이 아니라 왕의 1인칭인 ‘과인’이 사용되어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윤도중의 번역에서는 오히려 강두식의 번역에 없었던 ‘상감마마’, ‘어수(御手)’, ‘용안(龍顔)’ 등의 궁중 어휘들이 많이 사용된다. 다른 한편 ‘Mann’이 유적 존재로서의 ‘사람/어른’이 아니라 ‘남자/남성’으로 번역된 것은 윤도중의 번역에서이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오레스트와 필라데스의 관계를 사촌 형과 동생 사이의 관계로 옮긴 것이다. 괴테의 작품에는 이 둘이 사촌이자 친구 사이라고만 되어 있지,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특정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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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데스    형을 좋아했을 때 그때 내 인생이 시작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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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트    내 고난이 시작되었어라고 해야 옳은 말이다.(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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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두식이 ‘너를 사랑했을 때’로 옮긴 부분을 윤도중은 ‘형을 좋아했을 때’로 옮겨 어감과 의미의 차이가 생겨난다. 후자에서 오레스트와 필라데스가 각각 반말과 존댓말을 함으로써 위계의 차이가 생기는 것 역시 다른 점이다. 필라데스와 이피게니에의 대화도 사촌 누나와 동생 사이의 어조로 바뀐다. 다른 번역들에서 필라데스와 이피게니에가 대화를 할 때 위계적이지 않으면서도 타인으로서 거리가 있는 관계로 표현되어 있지만, 윤도중의 번역에서는 위계가 생겨나지만 동시에 그들의 관계가 가족 질서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오히려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는 이중적인 변화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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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데스      이분이 어디 계신담? 어서 속히 구원의 희소식을 전해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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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게니에    그대가 저에게 언약하신 위안의 말씀을 분명히 믿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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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이렇게 근심 속에 벌벌 떨고 있는 저를 보세요.(강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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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데스      누님이 어디 있담? 구원의 기쁜 소식을 한시바삐 전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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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게니에    나 여기 근심 걱정 속에서 네가 약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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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한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윤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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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3막에서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트가 서로를 알아본 후 나누는 대화에서 여전히 타인으로서 거리를 두는 말투와 남매 사이에서 하는 말투가 뒤섞인 오레스트의 대사는 그의 정신적 혼란을 보여 주며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윤도중의 번역에서는 이 거리가 위에서와 같은 이유로 빨리 사라짐으로써 긴장감 역시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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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차이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다른 번역어는 “오랑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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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아스        그리스인 아트레우스가 듣지 않았던 진리와 인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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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소리를 거친 오랑캐 스키타이인이 들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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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는 생각하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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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중의 번역에서는 ‘Barbar(야만인)’라는 단어가 동아시아적 맥락이 있는 ‘오랑캐’라는 말로 옮겨짐으로써 낯섦이 제거되는 효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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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주연(1999)|김주연 역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1999)]]<span id="김주연(1999)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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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이 번역한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권에 최승수, 최민숙, 송윤엽, 박찬기가 번역한 괴테의 초창기 희곡들인 <연인의 변덕>, <피장파장>, <스텔라> 및 노년기 작품인 <에피메니데스의 각성>과 함께 실려 있다. 후기로 실린 작품해설은 각각의 역자가 자신이 번역한 텍스트에 관해 쓴 것들이며, 여기에 전체 기획의 의도나 작품 선택의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에필로그는 없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이 작품이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작이라는 일반적인 평가를 넘어 현대 한국의 독자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시의성을 강조한다. 그는 괴테가 수없이 다루어진 소재인 이피게니에라는 인물을 다른 이피게니에 드라마들에서와 다르게 능동적인 주체이자 ‘구원자적 존재’로 그려내고 있지만,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에서는 그녀가 처음부터 “여신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극적인 변모의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형식미나 당시 독일의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독자들 역시 이 작품을 생생하고 동시대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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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 번역에서도 문체적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다. 한자 표현이나 궁중에서 사용하는 어휘들, 예스러운 어미나 단어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며, 문어적이고 장중한 느낌보다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말투와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1인칭 대명사로 이피게니에는 ‘저’를, 토아스 왕은 ‘나’를 사용한다. 둘 중 누가 사용하든 ‘계집’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는 여전히 위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차이는 줄어든 느낌이다. 이피게니에는 ‘-옵-’이나 극존칭 또는 극도의 겸양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입니다’, ‘-이에요/지요’, ‘-십시오’, ‘-세요’ 정도의 일상적인 존댓말을 사용한다. 토아스 왕은 ‘-시오’, ‘-하오/이오?’, ‘-소?’의 말투를 사용하여, 사제이자 공주로서 이피게니에가 갖는 지위를 감안하고 존중하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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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게니에    소녀가 천한 입술을 통해 무슨 말씀을 여쭙든 않든 간에 대왕께서는 소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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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념하고 있는 마음 무엇이온지 아실 것이옵니다.(강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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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가 말을 하건 침묵하건 간에 전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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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변함없는 제 마음을 아실 것이옵니다.(윤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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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하든 침묵하든, 왕께서는 제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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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무슨 생각이 있는지 언제나 아실 수 있습니다.(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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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주연의 번역에서는 여성을 표현할 때 사용되곤 하는 ‘연약한’, ‘가련한’이 다른 단어(예컨대 ‘부드러운’)로 대체된 곳도 있으나, 강두식과 김주연이 이와 다른 번역어를 선택하는 곳에서 이런 단어들이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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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higenie    Verzeih’mir, Bruder; doch mein kindlich He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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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t unser ganz Geschick in seine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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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legt.(V. 200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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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mein kindlich Herz”를 다른 번역자들은 “순진한 마음”(강), “나의 천진한 마음”(윤)으로 번역한 데 비해 김주연은 이를 “내 연약한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Mann’이 ‘남자/남성’으로 번역된 것은 윤도중의 번역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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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트와 필라데스의 관계는 강두식의 번역에서처럼 사촌이자 친구라는 낯섦을 그대로 번역하면서도 강두식의 번역(‘너’)에서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조금 더 격식을 차리는 관계(‘자네’)로 거리를 두었다. 이피게니에와 필라데스 사이의 대화는 이들 사이보다 더 먼 타인 사이의 대화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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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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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는 성차와 문화적 차이를 중심으로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의 세 번역본을 비교해 보았다. 1968년과 1996년, 1999년의 세 번역은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시대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번역자들의 번역 선택의 차이에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인 낯섦과 성차, 위계의 차이를 옮기는 데 있어 각각의 번역자들은 다양한 번역 선택과 전략을 보여 주며, 하나의 번역안에도 서로 이질적이고 때로는 상충되는 듯 보이는 방향들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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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피게니에는 여전히 낯선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러한 사정이 쉽게 변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공연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컨대 2016년에 독일과 한국 합작으로 공연된 <벽 – 이방인 이피게니에 Walls – Iphigenia in Exile>라는 연극은 괴테의 드라마 <이피게니에>가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작이자 최고봉’이라는 수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사성을 가지고 관객과 소통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이피게니에>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바탕을 둔 새로운 번역과 공연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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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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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두식(1968):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휘문출판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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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중(1996):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집문당.<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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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1999):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민음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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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조향</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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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5}}<!--바깥 링크(원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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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독일문학]]
 
[[분류: 독일문학]]
[[분류: 괴테, 요한]]
+
[[분류: 괴테, 요한 볼프강 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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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비평된작품]]

2024년 7월 17일 (수) 10:59 기준 최신판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희곡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Iphigenie auf Tauris)
작가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초판 발행1787
장르희곡


작품소개

괴테의 고전주의 시기를 대표하는 5막 희곡이다. 괴테는 에우리피데스의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를 토대로 이 작품을 1779년에 먼저 산문극으로 완성했다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1786년에 약강격 Jambus의 운문극으로 개작하여 1787년에 출판했다. 타우리스 사람들에게 붙잡힌 이피게니에가 오빠 오레스트에 의해 구출되는 것으로 끝나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과 달리 괴테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영혼’ 이피게니에가 타우리스의 왕 토아스를 감복시켜 그리스로의 귀환을 허락받는 결말로 바뀌었다. ‘순수한 인간성’을 주제로 내세운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국내 초역은 1968년에 강두식에 의해 <괴에테문학전집> 1권에 수록되었다(휘문출판사).


초판 정보

Goethe, Johann Wolfgang von(1787): Iphigenie auf Tauris. Ein Schauspiel. Leipzig: Göschen.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괴에테 文學全集 괴에테文學全集 1 괴에테 姜斗植 1968 徽文出版社 372-440 편역 완역
2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괴에테文學全集. 괴에테文學全集 1 괴에테 姜斗植 1970 徽文出版社 372-440 편역 완역
3 이피게니에 (新譯)괴에테全集 4 괴에테 鄭鎭雄(정진웅) 1974 光學社 121-206 편역 완역
4 이피게니에 (新譯)괴에테全集 4 (新譯)괴에테全集 4 괴에테 鄭鎭雄 1974 光學社 121-206 편역 완역
5 이피게니에 大世界 哲學的文學全集 4 大世界 哲學的文學全集 4 괴에테 鄭鎭雄 1978 白文堂 121-206 편역 완역
6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世界文學大全集 世界文學大全集 13 괴에테 姜斗植 1986 徽文出版社 357-429 편역 완역
7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괴테 고전주의 대표희곡선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윤도중 1996 집문당 143-226 편역 완역
8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이피게니에, 스텔라 세계문학전집 2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김주연 1999 민음사 207-303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괴테의 드라마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터의 고뇌>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거듭 번역되면서 독서 대중의 인식 속에 괴테의 대표작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소개가 되기는 했지만[1] 번역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 괴테의 작품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도 인지도가 낮은 편이고 번역도 비교적 적게 되었다.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강두식에 의해 처음 번역되어 1968년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괴에테문학전집>에 수록되었다. 10년 후 백문당에서 출간한 <대세계철학적문학전집>의 4권으로 기획된 괴테의 드라마들 번역 가운데 하나로 정진웅의 두 번째 번역이 잇따랐으며, 그로부터 다시 20여 년이 흐른 1990년대에 윤도중(1996)과 김주연(1999)의 번역이 나왔다. 이하에서는 강두식, 윤도중, 김주연의 번역을 주로 문화적 차이와 성차를 중심으로 비교하도록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 강두식 역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1968)

강두식의 번역이 실린 1968년도의 <괴에테문학전집>(휘문출판사)은 조우호의 지적처럼 실제로는 선집이지만 당시 한국 출판계와 독어독문학 연구의 상황을 볼 때 가히 전집의 의미를 갖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2] <괴에테문학전집>의 1권은 시 부분과 희곡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시 부분은 괴테의 몇몇 대표적인 시들과 <로마의 비가>, <서동시집>을, 희곡 부분은 <괴츠>, <에그몬트>, <이피게니에>, <타소오>를 담고 있다. 아쉽게도 번역기획을 드러내거나 저본을 밝히는 역자 후기는 실려 있지 않지만, 책의 말미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 강두식은 이 작품의 내용과 문학사적 위치, 특성을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을 초월한 인류애적 관용의 정신”(541)을 핵심 주제로 제시한다.

다른 두 번역과 다르게 강두식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중한 어조이다. ‘-(노/이)라’, ‘-여’, ‘-나이다’, ‘-소서’, ‘-인고/일고’, ‘-하누나’, ‘-사이다’, ‘-소이다’ 등의 종결어미와 ‘-옵-’ 등의 높임을 위한 선어말어미의 사용은 종종 결합되기도 하면서 드라마의 대사에 예스럽고 문어체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피게니에>가 본래 운문으로 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품의 특성과 잘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다. 어휘상으로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이피게니에는 디아나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제인데 강두식은 이를 ‘여승’으로 번역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라는 낯선 세계를 독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다소 아쉬운 점은, ‘사제’는 이피게니에의 시녀들과 구분되는 좀 더 높은 지위이며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식을 집전하는 임무를 맡는데 ‘여승’이라는 번역에서는 이런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피게니에와 토아스 사이의 대화에서 둘 사이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으로 나타난다. 분명 원작에서도 이 둘 사이에는 나이와 성별의 차이(젊은 여성과 나이 든 남성 왕)와 권력과 위계의 차이(이방인 피난민과 보호자인 왕)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피게니에는 단지 한 피난민 여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디아나 여신의 보호를 받는 신전의 사제이며, 원래 아가멤논의 딸이자 그리스 미케네의 공주임이 드라마가 진행되며 밝혀진다. 또한 ‘문명국’ 공주로서 ‘야만국’ 타우리스의 왕인 토아스에 비해 당시의 통념상으로는 문화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이들 사이의 위계의 차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런데 강두식의 번역에서 이피게니에는 스스로를 칭할 때 ‘소녀’(小女)라는 1인칭을 사용하며, 심지어 “소녀의 천한 입술로” 같은 표현에서는 극도로 자신을 낮추기도 한다. 이에 비해 그녀가 토아스를 ‘전하’나 ‘대왕님’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말할 때는 ‘-옵-’ 등을 자주 사용하여 극존칭으로 말을 높인다. 반면 토아스가 자신을 칭할 때는 원래 황제가 사용하는 1인칭 대명사인 ‘짐’(朕)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피게니에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하는 독백에서 3인칭으로 그녀를 가리킬 때는 ‘계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한 <이피게니에>에는 ‘여성의 특성’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 강두식의 번역에서는 ‘가련한’ 또는 ‘연약한’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지거나 번역어로 선택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3막에서 오레스트와 필라데스가 나누는 대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오레스트의 대사가 있다. “Der wilde Sinn des Königs tödtet uns;/Ein Weib wird uns nicht retten, wenn er zürnt.”(V. 784-785) 이 대목의 번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의 사나운 마음씨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걸세./하기는 그가 미친 듯이 성만 내면 가냘픈 여인의 힘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을테지만.”(강두식) 이처럼 강두식의 번역에서는 그냥 “여자 하나 Ein Weib”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가냘픈’이라는 형용사가 추가되어 있다.

또 하나의 더 핵심적인 예는 작품 시작 부분에서 이피게니에가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며 하는 독백에서 볼 수 있다.

Iphigenie   Der Frauen Zustand ist beklagenswert.(V. 24) 
이피게니에  여인의 처지란 가련한 것.(강두식)
             여자들의 운명은 한탄스럽다.(윤도중) 
             여인들의 처지란 가련한 것.(김주연)

이 부분에서는 ‘Zustand’와 ‘beklagenswert’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데 있어 세 역자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Zustand’를 강두식과 김주연은 ‘처지’로, 윤도중은 ‘운명’으로 번역하였다. ‘처지’는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임에 비해 ‘운명’은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 단지 지금 그러하다고 보는 것인지, 바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보는 것인지 하는 의미상의 차이가 생겨난다. 반면 ‘beklagenswert’를 윤도중은 ‘한탄스럽다’(“한숨 쉬며 탄식할 만한 데가 있다”)라고 중립적으로 번역한 데 비해 다른 두 번역자는 ‘가련하다’(“가엾고 불쌍하다”)라고 번역하여 동정과 연민의 감정과 관련시킨다. 한편 ‘Mann’이 ‘남자/남성’이 아니라 ‘사람/인간’으로 번역되어 유적인 대표성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젠더 번역과 관련된 이런 비대칭성은 이 번역이 나온 시대의 번역 지평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30여 년 후의 번역에도 이런 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Arkas    Ein edler Mann wird durch ein gutes Wort
         Der Frauen weit geführt.(V. 212-213)
아르카스  존귀하신 어른들은 여인들의 착한 말씀 한 마디로
          활짝 마음문을 여시니까요.(강두식)
          고결한 남자는 여자의 좋은 말을 통해 
          아량이 넓어지는 법입니다.(윤도중)
          고귀한 인간은 여인의 친절한 말 한마디로 
          이끌려가는 법입니다.(김주연)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문화적 차이와 관련된 번역어들인데, 위에서 예를 든 ‘여승’이나 ‘짐(朕)’이라는 단어에서는 낯선 문화의 다름이 익숙한 문화의 단어들로 바뀌며 의미의 외연이 달라지는 반면, 반대의 예도 존재한다. 필라데스와 오레스트의 관계는 사촌이면서 친구이며, 동성애적인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는 긴밀한 사이이기도 하다. 이 대목을 번역하는 데 있어 강두식의 번역은 문화적 낯섦을 그대로 드러낸다.

Pylades     Da fing mein Leben an, als ich dich liebte.(V. 654)
필라데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내 생애는 시작된거야.(강두식)  
            형을 좋아했을 때 그때 내 인생이 시작되었어요.(윤도중)
            자네를 사랑하면서 내 인생은 시작됐어.(김주연)

여기서 윤도중의 번역은 다른 두 번역과 차이를 보인다. 강두식과 김주연은 한국문화에 낯선, 사촌이자 친구라는 관계를 낯선 그대로 옮기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강두식의 번역은 오레스트와 필라데스의 관계를 서로 가장 가까운 것으로 그려낸다. 다른 한편 강두식의 번역에서 이와 상반되는 예는 “야만인이오, 동시에 상스런 스키타이 종족”(433), “(사로잡힌) 그 상민들”(431)이라는 표현들에서 볼 수 있듯이, 낯선 문화의 타자성을 ‘상민’, ‘상스러움’과 연결시키는 지점이다. “상스런”은 ‘roh(거친)’를, “상민들”은 ‘Fremden(이방인들)’을 번역한 것이며, 전자는 타우리스에 사는 스키타이인, 후자는 타우리스에 온 이방인인 그리스인과 관련된다. 이런 번역은 문화적 거리를 한 사회의 신분 질서 내에서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로 치환하여, 타자성을 낯섦 그대로 드러내는 번역 선택과는 반대의 방향을 보인다.


2) 윤도중 역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1996)

번역자 윤도중은 괴테의 고전주의 시기의 희곡들(<에그몬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타쏘>)을 묶어서 번역하면서 <머릿말>에 자신의 번역기획을 밝혀 놓았다. “황금만능주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지면서 인간 존재의 바탕이 되는 인간성이 파괴되고 우리는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게 되었다. 황금만능주의에 오염되어 인간성을 잃고 황량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독일 고전주의 문학, 괴테의 문학이 많은 가르침을 줄 것으로 믿어 이 역서를 낸다.”(3) 핵심어는 “고전의 가치”이다. 역자는 집문당에서 펴낸 이 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어떤 점에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독일 문학사상 최고봉인 괴테의 주요 작품이라는 점에서 고전이고 둘째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라는 점에서 고전이다.”(3) <머릿말> 뒤에는 “괴테의 생애”, “독일 고전주의 문학”, “작품해설”이 차례로 실려 있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강두식과 비슷하게 <이피게니에>의 문학사적 위치와 그 핵심을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금자탑”이자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과 인도주의 정신”으로 요약하고 있다. 강두식의 번역(1968)으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나온 윤도중의 번역(1996)은 이처럼 괴테의 고전주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머리말, 작가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문예사조, 작품해설까지 실은 매우 학술적이고 충실한 번역기획을 보이는데, 이는 그동안 독문학 연구의 역량이 계속 축적된 사실과도 관련될 것이다.

윤도중 번역의 특징이자 가장 큰 장점은 독일어 원문에 충실한 꼼꼼하고 정확한 번역이다. 또한 이피게니에와 토아스 왕 사이의 관계에도 몇 가지 변화가 보인다. 한편으로 토아스 왕은 이피게니에에게 ‘-하오’체 정도의 존대를 하며, 이피게니에도 자신을 극도로 낮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피게니에는 여전히 자신을 ‘소녀’라고 칭하며, ‘-사옵니다’ 등의 문체를 사용한다. 또한 ‘여성의 특성’과 관련된 대목에서는 ‘연약하다’, ‘가련하다’ 등의 번역어가 종종 선택된다. 황제의 1인칭인 ‘짐(朕)’이 아니라 왕의 1인칭인 ‘과인’이 사용되어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윤도중의 번역에서는 오히려 강두식의 번역에 없었던 ‘상감마마’, ‘어수(御手)’, ‘용안(龍顔)’ 등의 궁중 어휘들이 많이 사용된다. 다른 한편 ‘Mann’이 유적 존재로서의 ‘사람/어른’이 아니라 ‘남자/남성’으로 번역된 것은 윤도중의 번역에서이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번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오레스트와 필라데스의 관계를 사촌 형과 동생 사이의 관계로 옮긴 것이다. 괴테의 작품에는 이 둘이 사촌이자 친구 사이라고만 되어 있지,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특정되어 있지 않다.

필라데스     형을 좋아했을 때 그때 내 인생이 시작되었어요.
오레스트     내 고난이 시작되었어라고 해야 옳은 말이다.(168)

강두식이 ‘너를 사랑했을 때’로 옮긴 부분을 윤도중은 ‘형을 좋아했을 때’로 옮겨 어감과 의미의 차이가 생겨난다. 후자에서 오레스트와 필라데스가 각각 반말과 존댓말을 함으로써 위계의 차이가 생기는 것 역시 다른 점이다. 필라데스와 이피게니에의 대화도 사촌 누나와 동생 사이의 어조로 바뀐다. 다른 번역들에서 필라데스와 이피게니에가 대화를 할 때 위계적이지 않으면서도 타인으로서 거리가 있는 관계로 표현되어 있지만, 윤도중의 번역에서는 위계가 생겨나지만 동시에 그들의 관계가 가족 질서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오히려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는 이중적인 변화가 생겨난다.

필라데스       이분이 어디 계신담? 어서 속히 구원의 희소식을 전해얄텐데.
이피게니에     그대가 저에게 언약하신 위안의 말씀을 분명히 믿으면서도
              여기 이렇게 근심 속에 벌벌 떨고 있는 저를 보세요.(강두식)
필라데스       누님이 어디 있담? 구원의 기쁜 소식을 한시바삐 전해야 하는데.
이피게니에     나 여기 근심 걱정 속에서 네가 약속한 
              확실한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윤도중)

드라마의 3막에서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트가 서로를 알아본 후 나누는 대화에서 여전히 타인으로서 거리를 두는 말투와 남매 사이에서 하는 말투가 뒤섞인 오레스트의 대사는 그의 정신적 혼란을 보여 주며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윤도중의 번역에서는 이 거리가 위에서와 같은 이유로 빨리 사라짐으로써 긴장감 역시 없어진다. 문화적 차이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다른 번역어는 “오랑캐”이다.

토아스        그리스인 아트레우스가 듣지 않았던 진리와 인정의
             목소리를 거친 오랑캐 스키타이인이 들으리라고
             그대는 생각하오?(216)

윤도중의 번역에서는 ‘Barbar(야만인)’라는 단어가 동아시아적 맥락이 있는 ‘오랑캐’라는 말로 옮겨짐으로써 낯섦이 제거되는 효과를 낳는다.


3) 김주연 역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1999)

김주연이 번역한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권에 최승수, 최민숙, 송윤엽, 박찬기가 번역한 괴테의 초창기 희곡들인 <연인의 변덕>, <피장파장>, <스텔라> 및 노년기 작품인 <에피메니데스의 각성>과 함께 실려 있다. 후기로 실린 작품해설은 각각의 역자가 자신이 번역한 텍스트에 관해 쓴 것들이며, 여기에 전체 기획의 의도나 작품 선택의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에필로그는 없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이 작품이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작이라는 일반적인 평가를 넘어 현대 한국의 독자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시의성을 강조한다. 그는 괴테가 수없이 다루어진 소재인 이피게니에라는 인물을 다른 이피게니에 드라마들에서와 다르게 능동적인 주체이자 ‘구원자적 존재’로 그려내고 있지만,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에서는 그녀가 처음부터 “여신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극적인 변모의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형식미나 당시 독일의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독자들 역시 이 작품을 생생하고 동시대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다.

김주연 번역에서도 문체적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다. 한자 표현이나 궁중에서 사용하는 어휘들, 예스러운 어미나 단어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며, 문어적이고 장중한 느낌보다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말투와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1인칭 대명사로 이피게니에는 ‘저’를, 토아스 왕은 ‘나’를 사용한다. 둘 중 누가 사용하든 ‘계집’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는 여전히 위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차이는 줄어든 느낌이다. 이피게니에는 ‘-옵-’이나 극존칭 또는 극도의 겸양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입니다’, ‘-이에요/지요’, ‘-십시오’, ‘-세요’ 정도의 일상적인 존댓말을 사용한다. 토아스 왕은 ‘-시오’, ‘-하오/이오?’, ‘-소?’의 말투를 사용하여, 사제이자 공주로서 이피게니에가 갖는 지위를 감안하고 존중하는 느낌을 준다.

이피게니에    소녀가 천한 입술을 통해 무슨 말씀을 여쭙든 않든 간에 대왕께서는 소녀가                
              유념하고 있는 마음 무엇이온지 아실 것이옵니다.(강두식)
              
              소녀가 말을 하건 침묵하건 간에 전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는 제 마음을 아실 것이옵니다.(윤도중)
              
              말을 하든 침묵하든, 왕께서는 제 마음에
              항상 무슨 생각이 있는지 언제나 아실 수 있습니다.(김주연)

그러나 김주연의 번역에서는 여성을 표현할 때 사용되곤 하는 ‘연약한’, ‘가련한’이 다른 단어(예컨대 ‘부드러운’)로 대체된 곳도 있으나, 강두식과 김주연이 이와 다른 번역어를 선택하는 곳에서 이런 단어들이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Iphigenie     Verzeih’mir, Bruder; doch mein kindlich Herz
              Hat unser ganz Geschick in seine Hand
              Gelegt.(V. 2005-2007)       

여기서 “mein kindlich Herz”를 다른 번역자들은 “순진한 마음”(강), “나의 천진한 마음”(윤)으로 번역한 데 비해 김주연은 이를 “내 연약한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Mann’이 ‘남자/남성’으로 번역된 것은 윤도중의 번역에서이다.

오레스트와 필라데스의 관계는 강두식의 번역에서처럼 사촌이자 친구라는 낯섦을 그대로 번역하면서도 강두식의 번역(‘너’)에서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조금 더 격식을 차리는 관계(‘자네’)로 거리를 두었다. 이피게니에와 필라데스 사이의 대화는 이들 사이보다 더 먼 타인 사이의 대화로 표현된다.


3. 평가와 전망

위에서는 성차와 문화적 차이를 중심으로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의 세 번역본을 비교해 보았다. 1968년과 1996년, 1999년의 세 번역은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시대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번역자들의 번역 선택의 차이에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인 낯섦과 성차, 위계의 차이를 옮기는 데 있어 각각의 번역자들은 다양한 번역 선택과 전략을 보여 주며, 하나의 번역안에도 서로 이질적이고 때로는 상충되는 듯 보이는 방향들이 공존하고 있다.

대다수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피게니에는 여전히 낯선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러한 사정이 쉽게 변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공연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컨대 2016년에 독일과 한국 합작으로 공연된 <벽 – 이방인 이피게니에 Walls – Iphigenia in Exile>라는 연극은 괴테의 드라마 <이피게니에>가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작이자 최고봉’이라는 수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사성을 가지고 관객과 소통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이피게니에>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바탕을 둔 새로운 번역과 공연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강두식(1968):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휘문출판사.
윤도중(1996):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집문당.
김주연(1999):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민음사.

조향


바깥 링크

  1. 1932년 괴테 서거 100주년 기념 특집으로 나온 <문예월간> 4호에 실린 조희순의 글에 “이휘게늬-”라는 제목으로 간략한 내용과 함께 “괴-테의 古典主義的藝術의 代表作이라고보는 希臘에서 取材한 韻文劇”이라고 문학사적 위치가 요약되어 있다. 조희순(1932): 괴-테의 生涯와 그 作品. 문예월간 4, 9-10.
  2. 조우호(2010): 근대화 이후 한국의 괴테 수용 연구. 코기토 68,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