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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7일 (토) 06:18 기준 최신판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소설

청춘은 아름다워
(Schön ist die Jugend)
작가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초판 발행1916
장르소설


작품소개

헤르만 헤세가 1916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부모님의 근심거리였던 소설의 화자 ‘나’는 수년간 객지에 머물다가 이제는 의젓한 청년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가을부터 외국에서 일할 직장을 구한 상태에서 여름 몇 달을 가족과 함께 보낸다. 친척들을 방문하여 인사하고 고향 도시와 산천을 둘러보는 등 행복한 가정에서 즐겁게 지낸다. 여동생 로테의 친구이자 어린 시절 사랑했던 헬레네 쿠르츠에게 사랑 고백을 하려 했으나 그녀가 다른 남자와 약혼한다는 소식에 슬퍼한다. 하지만 로테의 또 다른 친구 안나 암베르크와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내며 삶과 문학에 관해 대화하면서 그녀에 대해 사랑을 느낀다. 안나에게 사랑 고백을 시도하는데, 그녀는 자연스럽고 정다운 태도로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한다. ‘나’는 가족과 작별하고 로테와 안나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난다. 아름다운 청춘의 추억을 매우 정감있게 묘사한 이 소설은 헤세의 다른 소설들처럼 자전적 요소가 짙어 그의 청소년 시절의 자화상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소설의 이런 행복한 분위기와 달리 이 소설을 발표할 당시 헤세의 상황은 가정적, 개인적인 일들로 인해 매우 불행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하겠다. 국내에서는 1955년 한영기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한일문화사).


초판 정보

Hesse, Hermann(1916): Schön ist die Jugend. In: Schön ist die Jugend. Zwei Erzählungen. Berlin: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1) 1950-60년대

<청춘은 아름다워>의 국내 최초 번역은 신동집에 의한 것으로, 1954년 영웅출판사에서 나온 <헬만 헤세 선집>에 포함되었다. 원작이 1916년에 출판된 것에 비하면 국내 번역은 상당히 늦은 편이다. 또한 ‘헬만 헷세’의 <실달라>가 이미 1926년 양건식에 의해 잡지 <불교> 제26호(1926년 7월 1일-)에 연재되었고, 헤세의 시 <Im Nebel>이 서항석에 의해 번역되어 1935년 <카토릭청년>(1935. 1. 25)에 <안개속을걸음의이상야릇함이여>란 제목으로 실린 것을 감안하면(김병철 1975, 449), 이 작품의 번역은 의외로 늦은 감이 있다.

신동집에 의한 초역 이후 1950년대에 이미 여러 역자의 번역본이 앞다투어 출판되었다. 한영기(한성도서 1955, 1956, 동진문화사 1962), 강윤상(동아출판사 1959, 락원출판사 1960), 구기성(양문사 1959), 김준섭(정음사 1959), 김요섭(영웅출판사 1959), 박찬기(장문사 1959, 청림사 1974), 박목월(성봉각 1960), 이종진(삼중당 1962), 이영구(민조사 1967, 범조사 1983), 전호(새글사 1967), 송영택(신구문화사 1968)의 역서가 그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의 번역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것은 헤세의 주요 소설이나 시가 이미 다수 번역, 출판된 상태에서 새로운 작품의 발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이 작품이 우리 출판계나 일반 독자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무엇보다 고향, 향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 첫사랑의 추억 등 헤세 초기 문학 특유의 모티프가 새로운 서구적 감수성과 정서를 추구하던 1950-60년대 전후 한국 독자들의 취향에 부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누구에게라도 순수한 이상으로 표상되는 청춘 시절에 대한 추억, 고향과 부모 형제 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전쟁 이후 여전히 궁핍한 시절을 보내야 했던 우리 독자들의 감성에 큰 공감과 위로를 주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헤세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1946년)라는 명성도 큰 몫을 했던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이 작품이 <헬만 헤세의 선집>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1968년에는 <헤르만 헷세 전집>이 이영구 외 역으로 예문관(1968)에서, 이영구, 최현, 송영택에 의해 문원각(1968)에서 각각 발간되었다.[1] 헤세의 작품들이 ‘선집’이나 ‘전집’의 형태로 출판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이나 수요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말해주지만, ‘전집’이라 하더라도 모든 작품을 다 수록한 것이 아니라 주요 작품의 단행본들을 한데 묶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의 작품들을 묶어서 출판하는 당시 출판계의 관행에 따른 것으로, 해당 작가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특정 작가의 선집이나 전집은 세계문학전집의 발간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번역 및 출판시장의 역량이 축적되고, 서구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상징자본이 형성되어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독일문학 전공자들이 당대의 문학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에 더하여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비교적 평이한 문체나 길지 않은 분량 등을 이유로 이 작품이 독일어 독해 연습을 위해 대학 교재로도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이다.[2]이 경우 원문을 수록하고 난이도가 높은 단어나 숙어적 표현에 대해서는 각주에서 간단히 그 뜻을 밝힌다.


2) 1970-80년대

1970년에는 기존의 판본에 송영택(동서문화사 1970, 삼성출판사 1974, 중앙일보 1975), 이영호(문학출판사 1973, 1981), 최현(대양서적 1972, 예원사 1973, 보문각 1974), 홍경호(범우사 1976, 1987), 김인섭(정음사 1979), 조영범(문해출판사 1975), 류정(신진출판사 1976, 중앙문화사 1978, 중앙미디어 1995), 박환덕(삼중당 1977, 범우사 1982, 1985), 김창활(문음사 1977), 정영호(금성출판사 1978, 1979, 1994) 등의 번역이 더해진다. 1980년대에는 이가형(양지사 1980), 이수광(한림출판사 1982, 1983), 이온화(원음사 1987), 홍석연(문지사 1987), 백문주(덕우출판사 1987), 한수동(율곡문화사 1987), 김희보(종로서적 1989) 등이 가세하면서 번역본 종수는 급격히 늘어난다. 무엇보다 특정 역자의 역서가 출판사를 바꾸어가며 여러 차례 다시 출판됨으로써 정확한 번역본의 종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중에는 비전공자들이나 출판사 편집부에 의한 이른바 ‘해적판’도 적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장르상 중편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단독으로 출판되기보다는 다른 대표작들과 함께 묶여 단행본으로 나오거나, 정음사, 을유문화사, 동서출판사 등의 각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내놓았던 세계문학전집 혹은 세계문학단편전집 속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송영택 등에 의해 1960년대에 나왔던 <헤르만 헤세 전집>(문원각 1968년)이 한영출판사(1976, 전 4권), 형문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고, 1989년에는 <선영헤세전집>으로 나왔다(선영사 1989). 이처럼 이 시기에는 대동소이한 번역들이 일종의 공유재처럼 각기 다른 역자의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걷잡을 수 없는 난맥상을 보여준다.


3) 1990년대

1990년대는 우리나라 번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이다. 1996년 베른협약에 가입함으로써 지금까지 저작권이나 인세에 대한 고려 없이 무단으로 이루어졌던 번역의 관행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탓인지 1990년대에 이르러 이 작품의 번역 종수는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이전 역자들의 번역본이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되는 경우가 지배적이고, 새로운 역자가 등장한 경우는 눈에 띄게 줄지만, 김기태(선영사 1989, 1993), 유한근(상지사 1993), 홍성철(세진출판사 1994)의 번역이 베른협약 가입 직전에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이 시기의 <청춘은 아름다워>는 새로운 번역이라기보다 이전 번역을 새로 편집하고 새 옷을 입혀 다시 출판한 것들이다. 또 다른 짧은 작품들과 함께 중단편집이 새로 구성될 때 인지도가 높은 이 작품은 거의 빠지지 않고 함께 수록되었다.

1994년 이병찬이 신원문화사에서 다시 펴낸 판본의 ‘역자의 말’에서 “헤세의 이름만은 웬만한 수준의 문학적 관심을 가진 독자의 경우 한국에서조차 진부하게 느껴질 만큼 잘 알려져 있다”(이병찬 1994, 3)고 언급한 것은 이미 국내에 과도할 정도로 유통, 소비되어 온 헤세 작품에 90년대의 독자들은 다소간의 식상함을 느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에 더하여 이병찬은 “섬세하고 연약해 보이는 감수성, 서구 문명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합리주의나 과학정신과 거리가 먼 정신주의적 방황 혹은 독일말을 모국어로 하는 예리한 젊은 지식인이 읽기에도 그다지 훌륭한 독일말이 아니라고 하는 언어구사”(같은 곳)라고 헤세의 문체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 같은 이병찬의 평가는 헤세에 대한 과거의 열광적인 찬사와 수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4) 2000년 이후

베른협약을 통해 변화된 국내 번역문학을 둘러싼 환경은 2005년에 우리나라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의 주빈국으로 참여함으로써 또 한 번의 전기를 경험한다. 물론 2005년의 이 사건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이슈를 부각시키고, 한국문학의 독일어 번역에 주안점을 두지만, 그 과정을 통해 외국 문학의 우리말 번역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우리 출판계가 세계시장에 개방되고, 세계시장과 직접 교류함으로써 번역 대상 작품을 선정하는 시각이나 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추세와 더불어 몇몇 출판사들은 대형화되면서 출판사 간의 격차가 더 심화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에 민음사(1998), 문학과지성사(대산세계문학총서 2001), 을유문화사(2008), 펭귄클래식(2008), 열린책들(2009), 문학동네(2009), 창작과비평사(2012) 등 대형출판사들은 기존에 나와 있던 세계문학의 고전들을 새롭게 발간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여러 신생 출판사들도 출판목록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고전 작품들을 끼워 넣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해당 번역본이 절판되어 더 이상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기존의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의 변화, 그사이 변화된 맞춤법 등을 감안할 때, 새로운 세대에 맞도록 고전을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는 이 출판사들의 기획은 타당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타이틀을 발굴하여 독일문학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대신, 동일한 작품을 큰 변화 없이 재출판하는 폐단을 낳은 측면 또한 없지 않다. 다시 말해, 새로운 작품이나 작가를 발굴하고 그에 상응하는 독자층을 확보하기 위한 각고한 노력 대신, 이미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하는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하는 출판사들의 경영전략도 일정 부분 작동하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청춘은 아름다워>의 번역으로는 설연심(삼성비앤씨 2003), 정영호(금성출판사 2008), 이혜진 & 안희숙(삼성비앤씨 2010)의 번역, 홍석연의 번역을 새로운 장정으로 내놓은 문지사 판본(2012)이 확인된다. 나아가 문학동네에서 나온 박경희의 <청춘은 아름다워>(2014), 임호일(종문화사 2015),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홍성광의 <청춘은 아름다워>(을유문화사 2021)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청소년용이나 e북, 오디오북(신혜선) 등 다양한 매체로 변신하는 것은 비단 이 작품에만 해당되지 않는 오늘날의 전반적인 추세임은 말할 것도 없다.[3]


2. 개별 번역 비평

개별 번역 비평에 앞서 고려해야 할 점은 헤세의 <Schön ist die Jugend>의 원본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두 가지 판본이 확인되는데, 하나는 1928년 S. 피셔 출판사 판으로 Fraktur로 인쇄된 판본이고, 다른 하나는 볼커 미하엘(Volker Michael)이 편집한 베를린 주어캄프 타쉔부흐 출판사의 판본이다. 두 판본은 대동소이하지만, 피셔 출판사 판이 보다 길고 상세하며, 이에 비해 주어캄프 판은 많은 단락이나 중간중간의 어휘가 생략되어 훨씬 간결해졌다. 아마도 판권이 피셔에서 주어캄프 출판사로 넘어오면서 편집자에 의해 다소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역자들은 이 두 판본 중 제각기 다른 저본을 사용하였지만, 원본 정보를 밝힌 역자는 거의 없다. 아래에서 살펴볼 역자 중 일본어 판을 저본으로 한 신동집을 예외로 하고, 송영택은 피셔 판을, 그 외 다른 역자들은 주어캄프 판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1) 신동집 역의 <청춘은 아름다워라>(1954)

이 소설을 처음 옮긴 것으로 기록되는 신동집(1924-2003)이 중학교 시절부터 일본에서(1938-1944) 유학한 사실을 고려한다면[4] 그가 일본어판을 바탕으로 삼았으리라는 추측은 십분 가능하다. 이에 당시 일본에서 헤세의 인기가 지대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수 있다. 그의 번역은 옛날 표기법(하로, 아즉도, 바이요린, 채럼쌔, 카아브...)을 제외하고는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의 문체에 가깝다.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이 산문 작품이 가지는 정서적, 서정적 특징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 애쓴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헷세의 작품 속에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그리움과 친근성은 그가 성장해가는 자기의 심혼을 바라보며 육성하려는 따뜻한 사상과 자연감입의 깊이에 기초하고 있으며”(1956, 215)라는 작품 후기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다음은 화자가 고향에 돌아온 이튿날 마을을 둘러보는 장면이다.

Am Morgen legte ich meinen besten Anzug an, [...] Mein erster Gang war über die alte steinerne Brücke, das älteste Bauwerk des Städtleins. Ich betrachtete die kleine gotische Brückenkapelle, an der ich früher tausendmal vorbeigelaufen war, dann lehnte ich mich auf die Brüstung und schaute den grünen, raschen Fluß hinauf und hinauf. Die behagliche alte Mühle, an deren Giebelwand ein weißes Rad gemalt gewesen war, die war verschwunden, und an ihrem Platze stand ein neuer großer Bau aus Backsteinen, im übrigen war nichts verändert, und wie früher trieben sich unzählige Gänse und Enten auf dem Wasser und an den Ufern herum.(20)

아침에 나는 단불 신사가 되었다. [...] 나는 맨 먼저 이 거리에서 가장 오랜 돌다리를 나갔다. 그리고 그 다리 어구에 서 있는 옛날에 몇번이나 그 앞을 지나처 본 일이 있는 조구만 「코틱크」씩인 예배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방학동안에 한번 그 안에 들어가서 구경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난간에 기대어서 푸른 강물을 바라보았다. 한가한 오랜 물방아 집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벽돌로 맨든 새로운 크다란 집이 서 있었다. 그 외에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오리들이 옛날과 다름없이 강물에서 또 강변에서 놀고 있었다.(20)

여기서 그는 어휘 하나하나에 치중하기보다는 원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옮기는 데 주력한다. 이때 원문처럼 접속사나 부사, 관계대명사 등으로 연결되는 연속적인 리듬이 아니라, 짧게 끊어지는 단문을 선호하면서 간결하고 경쾌한 리듬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원문에서 대상들을 바라보는 연속적이고 회상적인 시선의 느린 움직임이 하나씩 개별적으로 관찰하는 단절적 시선으로 바뀐다. 이로써 산문의 리듬이란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는 산문에서의 리듬의 단위를 문장의 길이로 파악한 듯하다. 또한 원문의 긴 문장을 여러 개의 독립적인 문장으로 만드는 오늘날에도 흔히 통용되는 방식이 이 시기에 이미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종 원문의 요소들을 생략하기도 한다(an deren Giebelwand ein weißes Rad gemalt gewesen war,). 문장의 첨가와는 달리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생략 혹은 누락시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일어나는 대표적인 ‘오류’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오류’에 해당하는 자유로운 혹은 자의적인 첨가나 삭제는 신동집 뿐 아니라 이 시기 번역에서 두루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지만, 이 경우 일본어 저본에서 누락된 것인지, 신동집에 의해 누락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최초의 번역이 이후에 뒤따르는 번역에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초역이 지니는 중요성과 의의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예컨대 ‘als schüchternes Sorgenkind’(8)를 “한때는 연약하여 양친에게 걱정을 남겨둔체 떠나온”에서처럼 건강에 대한 염려로 본다든가, 명사구가 아니라 동사형으로 풀어쓴 것은 이후의 많은 번역에도 그대로 수용된다. 예컨대 송영택의 판에서도 “몸이 연약하여 양친에게 걱정을 남겨두고 떠났던”(송영택 1975, 306)이라고 의미론적으로나 구문론적으로 유사하게 옮겨진다.

신동집은 후기에서 작품에 대해 상당히 긴 해설을 덧붙인다. 그는 “일즉 자연만으로써 구성되는 소설을 쓰보겠다고 소망한 한때의 헷세이었다. 그는 자연을 그린다기보다 차라리 자연 속에 몰입하여 자연과 융합해 있다”며, “자연은 그와 더부러 살아있는 존재”(1956, 215)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훗날의 역자들이 헤세를 자연예찬가보다는 “기술세계와 배반된 정신세계”(이병찬 1994, 역자의 말)를 추구하는 ‘휴머니스트’로 파악하는 것이나 선과 악의 이율배반적 세계에서 고뇌하는 실존적 작가의 모습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자연예찬가로서의 헤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데 기여한다.

또한 신동집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 막 고향을 떠나는 기차에 올라앉은 화자를 위해 동생 프리츠가 언덕 위에서 보여주는 불꽃놀이, 즉 ‘꽃불’의 장면이 “일체의 아름다운 것의 무상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칭한 것은 이후에도 이 작품을 읽는 핵심 코드로 작동한다.

계곡의 읍내 위의 푸른 하늘과 과수원을 불어가는 미풍과 아우가 올리는 꽃불이 얼마나 아름답게 스토오리 속에 융합하여 덧없는 낭만을 이루고 있으며 또 滿天에 꽃피자 이내 사라져버리는 꽃불이 얼마나 일체의 아름다운 것의 무상한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가(1956, 217). 

이처럼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이 초역의 영향력은 이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청춘과 아름다움의 속성을 ‘덧없음’과 ‘무상함’으로 각인시킨다.


2) 송영택 역의 <청춘은 아름다워라>(1968)

1968년에 처음 이루어진 송영택[5]의 번역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출판사에서 거듭 인쇄되었다. 동서문화사 판본(1975)에서 “‘이 이야기는 [...] 도이치적인 신교도의 생활 분위기를 잘 전해주고 있다. 이것은 청춘의 찬가임과 동시에, 동생이 사르는 불꽃놀이에 상징되어 있듯이 아름다운 것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는 애가(哀歌)이기도 하다.”(604f.)라고 평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 송영택 역시 신동집과 유사하게 ‘청춘의 찬가’ 혹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이 작품의 주요 메시지로 파악한다.

송영택은 이 작품 외에도 헤세 시집을 비롯하여 1960년대부터 헤세 ‘전집’ 발간을 주도함으로써 주요 작품들을 거의 다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6]그런 만큼 그는 헤세 전문 번역가로서의 위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의 번역은 큰 변화 없이 여러 출판사에서 거듭 인쇄되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이 유통되었고, 이로써 헤세 작품의 대중적 확산을 넘어 ‘진부한’(이병찬 1994, 3) 이미지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번역은 다른 역자들에 비해 더 낫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다. 다음은 화자가 고향에 돌아온 며칠 후, 어린 시절에 모종의 연애 감정을 느꼈던 여동생의 친구 헬레네와 재회하는 대목이다.

Als sie kam, brannten gerade noch die Klavierkerzen, und sie sang bei einem zweistimmigen Lieder mit. [...], und dachte, daß es köstlich sein müßte, mit der Hand ein wenig über ihr Haar zu streichen. Ungerechtfertigterweise hatte ich das Gefühl, mit ihr von früher her durch gewisse Erinnerungen in einer Art von Verbindung zu sein, weil ich schon im Konfirmationsalter in sie verliebt gewesen war, und ihre gleichgültige Freundlichkeit war mir eine kleine Enttäuschung. Denn ich dachte nicht daran, daß jenes Verhältnis nur von meiner Seite bestanden hatte und ihr durchaus unbekannt geblieben war.(36f.) 
그녀가 왔을 때까지도 피아노를 치고 있었으며 그녀와 나는 함께 피아노에 맞추어 2중창을 불렀다. [...] 내가 만약 저 머리카락에 손끝만이라도 대어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대담한 행동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조차도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명랑한 기분과 신뢰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으며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도 않는 듯 했다.(1988, 32 이하)

이 부분에서 송영택은 거의 창작에 가까운 ‘다시쓰기’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원문과 일일이 대조하지 않고서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 부분은 피셔 판이나 주어캄프 판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면 원문의 각 요소들을 살려낸 번역이라기보다는 독서의 유연성을 최우선에 둔 매끄러운 번역의 결과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이 번역본의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원문에 충실한 번역’보다는 ‘자유로운 번역’의 패러다임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더하여 시인으로도 활동했던 송영택의 상상력이나 언어구사력이 두드러지는 번역이라 할 수 있다.


3) 박환덕 역의 <아름다워라 청춘이여>(1977)

송영택의 번역이 헤세 작품에 대거 집중되어 있다면, 같은 연배의 박환덕의 번역목록은 훨씬 다양해 보인다.[7] 박환덕은 제목을 <아름다워라 청춘이여>(삼중당 1977)라고 옮겨 <Schön ist die Jugend>의 독일어 어순을 그대로 살린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굳이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부르기 힘든, 역자의 주관적 판단이 허용되는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환덕은 ‘이 책을 읽는 분에게’라는 옮긴이의 말에서 “그는 떠나고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세대를 거듭해도 끊임없이 내면의 성찰에 의해 자기를 탐구하고 또 탐구해 가려는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릴 것이다.”(10)라고 쓴다. 이처럼 박환덕은 자연과의 합일을 강조했던 앞의 두 역자에 비해 이 작품의 비중을 ‘내면의 성찰’에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물질적으로 병든 유럽’에 대한 비판의식이나 전쟁에 반대해서 평화를 지키는 실천 등을 강조하며 휴머니스트로서의 헤세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헤세 작품세계의 의의를 확대하고 다양성을 강조한다.

세부적인 면에서 보자면 송영택에 비해 박환덕의 번역은 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 가깝지만, 그의 번역 역시 ‘자유로운 번역’, 또는 부분적인 오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다. 앞에서 언급된 “als schüchternes Sorgenkind”를 박환덕이 “천진난만한 홍안의 소년”(14)으로 옮긴 것은 “몸이 연약하여 양친에게 걱정을 남겨두고 떠났던”(송영택 306)보다 원문과의 거리가 조금 더 멀고 오역에 가깝다. “Er fängt doch an, aus den Kindereien herauszukommen. Ja, nun habe ich lauter erwachsene Kinder.”(29)라는 아버지의 말을 “그 녀석, 어린 티는 완전히 가시고 제법 어른 티가 난단 말이야.”(33)나, 집안에서 키우는 앵무새와 관련하여 “Polly flötete im Käfig und weigerte sich, zu Bett zu gehen. 한편 폴리가 새장 안에서 계속 재잘거리는 바람에 좀처럼 잠들 수 없는 지경이었다.”(38)에서도 오역에 해당되지만 전체의 흐름을 훼손시킬 정도는 아니다. 다만, 1 Taler를 1달러로 옮긴 것은 오역이라기보다는 독자들의 이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문화의 번역’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판본에서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사소하지만 새로운 오역은 오히려 박환덕이 기존의 번역본을 참조하기보다는 스스로 옮긴 것을 입증해주는 표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에도 상당한 판매 부수를 올리고 있는 범우사 2012년 판에서도 이 같은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말에서 호칭이나 존칭이 사용되기 마련인 직접 대화 장면은 인물 간의 위계를 드러냄으로써 서로 다른 언어권의 문화 간 차이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표식에 해당한다. 연령, 성별, 혹은 인물 간의 관계도에서 문화심리적인 간극이 명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전의 번역본에서 그러했듯이, 박환덕의 번역에서도 주인공과 여동생 로테의 대화에서 로테는 오빠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 친구 안나가 자신들의 집을 방문해도 좋은지를 묻는 장면에서 로테는 “저 오빠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Jetzt muß ich dich noch was fragen.”(30) 라든가, “Kindskopf! Was kommt auf dich an.”(31)을 “순박한 양반! 그건 오빠에게 달려 있어요.”(34)에서처럼 여동생이 오빠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문화적, 언어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번역이 이미 반세기 전에 이루어진 것을 감안한다면 굳이 탓하기는 어렵지만, ‘Kindskopf’를 ‘순박한 양반’으로 부른 것은 다소 고어적 선택이라 해야 할 것이다.


4) 홍석연 역의 <청춘은 아름다워라>(1984/2012)

1984년에 나왔던 홍석연의 <청춘은 아름다워라>는 2012년에 문지사에서 새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처음 나온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표지와 장정만 바뀌었을 뿐 많은 크고 작은 오역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어 개선된 판본이라 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So, von woher denn?” “Von Ulm.”이라는 대목에서 “어디에 사는 친군데?” “누릅에.”(195)라고 인쇄되어 있다. 또는 <Willhelm Meister 빌헤름 바이스터>와 같은 터무니없는 음차역은 편집 과정에서 일어난 단순 실수라 해도 자못 민망할 정도이다.

이런 대목들은 불충분한 번역이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에 해당한다. 이것은 역자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해당 출판사에도 비전문적이고 상업적인 출판윤리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문지사 2012년 판은 편집술에서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5) 박경희 역의 <청춘은 아름다워>(2014)

박경희는 한국문학을 독일어로 옮긴 것 외에도[8]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 헤르타 뮬러의 <숨그네>를 한국어로 옮기는 등, 국내외에서 상당히 알려진 역자에 해당한다. 2014년 문학동네에서 나온 <청춘은 아름다워>는 헤세의 수채화를 표지 디자인으로 사용하여 오늘날 독자들의 시각적, 정서적 취향에 적극적으로 다가선다. “최고의 단편만을 엄선”(문학동네 2014, 표지)했다는 이 모음집의 표제작이 <청춘은 아름다워>인 것을 보면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 작품의 비중을 새삼 알 수 있게 한다.

박경희의 번역은 이전의 크고 작은 오역에서 훨씬 자유로운 판본이다. 이 번역본은 이 작품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감성적 측면이나 시적인 부분들을 비롯하여 의미론적으로나 통사론적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투명하고 간결해졌다. 이로써 박경희의 번역은 1900년대 초반의 독일 중소 도시적 분위기보다 오늘날과 거의 동시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또한 작품 전체가 신선함과 생동감을 얻고, 동시대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같은 현대화가 반드시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의 세태에 맞춘 사례는 위에서도 언급한 주인공과 여동생 로테와의 대화에서 로테가 오빠에게 더 이상 존칭을 쓰지 않는 것도 해당한다. (“나도 물어볼 게 있는데.” 로테가 말을 꺼냈다. “내 친구를 우리집에 초대해 몇 주 같이 지낼 생각이거든.” “그래, 어디서 오는데?” “울름에서. 나보다 두 살 많아. 오빠 생각은 어때? 오빠가 집에 와 있으니 당분간은 오빠가 우선이잖아. 누가 오는 게 성가시면 얘기해줘.”(박경희 2014, 107) 연령과 젠더에 따른 인물들 간의 수직적 관계는 박경희의 번역에서 마침내 수평적 관계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박경희는 원문에 없는 수식어를 첨가하거나 원문보다 길게 풀어쓰는 이전 역자들의 관행에서 벗어나, 각각의 의미소를 가급적 상응하게 옮기고자 한다. 그러나 박경희의 번역문 또한 원문과는 비교적 독립적인 문장의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특히 그녀가 도치문을 선호하는 경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als schüchternes Sorgenkind.”(8)
떠날 때는 숫기 없는 문제아였던 내가.(89) 
daß sie ihr letztes Geschenk an mich waren.(71)
그것이 내게 주는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 되리란 것을.(139) 
Hinauslehnend sah ich sie steigen und innehalten, einen weichen Bogen beschreiben und in einem roten Funkenregen vergehen.(79)
나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지켜보았다. 솟아오른 불꽃이 공중에 한참 머물다가 다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붉은 불꽃비로 사라지는 모습을.(146) 

이 같은 불완전 (도치)문장을 통해 역자는 산문의 통상적인 흐름에 변화를 시도하면서 생동감을 부여하고, 이로써 산문의 시적 효과를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일반적인 통사 구조를 변형시켜 시제가 부재하는 명사구문을 만듦으로써 초시간적인 동시에 순간적이며, 추상성이 강조되는 시적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6) 홍성광 역의 <청춘은 아름다워라>(2021)


이 작품의 가장 최근 번역은 2021년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홍성광의 것이다. 그러나 홍성광의 번역은 몇 가지 측면에서 박경희의 방향보다는 오히려 이전 번역본에 더 가까운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섬세하고 감성적인 요소가 많은 이 텍스트의 미세한 뉘앙스를 살려내기보다는 약간 투박한 인상을 불러낸다. 화자가 로테와 프리츠와 함께 산책하는 도중 들길의 꽃들로 꽃다발을 만드는 장면에서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더 이상 만들어 보지 못한 예술품이었다.”(홍성광 2021, 183) (“eine Kunst, die ich lange Zeit nicht mehr geübt hatte.”)(33)라고 옮긴 것이나 “Da fielen mir vergangene Jahre ein.(43)”를 “그때 지나간 일들이 불현듯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190)에서처럼 젊은 날 주인공의 신선한 감수성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고어적 언어사용을 보여준다.

다음은 휴가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을 표현하는 부분이다.

Die Hälfte meiner Ferienzeit – und bei Ferien ist immer die erste Hälfte die längere – war längst vorüber, und der Sommer fing nach einer heftigen Gewitterwoche schon langsam an, älter und nachdenklicher zu werden.(66)
내 휴가의 절반은 – 휴가는 항시 앞쪽 절반이 좀 더 긴 법이다 – 진작 지나가 버렸다. 사나운 뇌우가 일주일 동안 계속되고 나자 여름은 어느새 더 깊어지고 서서히 사색의 계절이 시작되었다.(208)  

이 부분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여름을 의인화하여 시적 요소를 부가한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 장면에서 홍성광의 번역은(“서서히 사색의 계절이 시작되었다”)는 다소간 길고 설명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텍스트중심적’이기보다는 ‘독자지향적 번역’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시적이고 이지적 긴장감을 촉발하기보다는 독자들의 편안한 독서를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홍성광의 ‘독자 우호적’ 태도는 이 선집에 수록된 각각의 작품들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설명해 주는 긴 해설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과 관련해서 “헤세가 풍기는 고향으로 가는 길의 분위기는 추상적인 향수가 아니라 현실적이며 강력한 인간 복귀의 자세”(386)라는 말로 지금껏 감상어린 향수에 머물렀던 고향의 의미를 “인간 복귀의 자세”로 확장시킨다는 점이 돋보인다.


3.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신동집(1956): 청춘은 아름다워라. 영웅출판사.
송영택(1988): 청춘은 아름다워라. 우석.
이병찬(1994): 청춘은 아름다워. 신원문화사.
홍석연(2012): 청춘은 아름다워라. 문지사.
박환덕(2013): 아름다워라 청춘이여. 범우사.
박경희(2021): 청춘은 아름다워. 문학동네.
홍성광(2022): 청춘은 아름다워. 을유문화사.

안미현
  • 각주
  1. 헤르만 헤세 ‘전집’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헤르만 헤세 전집(예문각 1968), (문원각 1968), 헤르만 헤세 전집 (芝苑社 1971), (범조사 1975), (선경출판사 1976), (대양서적 1972, 1974, 1977), (한영출판사 1977, 1978), (양지당 1980), (성창출판사 1986), (현대소설사 1992), 예하출판(1993)이 있다. 2000년대 이후에 나온 것 중 하나가 민음사(2013)에서 나온 총 9권으로 구성된 선집이다. 그 외에도 같은 해 2013년 현대문학에서 나온 헤르만 헤세 선집 (홍성광, 안장혁, 황종민, 윤순식, 권혁준, 김화경, 박계수 역) (총 12권)도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전집이라 하기는 어렵고, 당시에 나온 대부분의 작품을 모은 선집에 해당된다.
  2. Hesse, Herman(1960): Schön ist die Jugend. 郁文堂 참조.
  3. 위에 열거된 번역본이 전부가 아님을 밝힌다.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는 출판사 편집부나 비전공자들에 의한 역본들도 일부 존재한다. 확인된 종수로만 밝히면 1950년대 5종, 1960년대 10종, 1970년대 24종, 1980년대 13종, 1990년대 14종, 2000년대 14종이다.
  4. 1938년에 출생한 신동집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938년 다다라 중학교에 입학하여 1944년 졸업했다. 1945년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평양에서 5개월간 군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 후 경성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에 편입하여 1958년 수료하고, 그해 서울대학교 본과 정치학과에 편입했다. 한국전쟁에 통역장교로 입대했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청구대학(현 영남대)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1970년까지 영미현대시와 문학개론 등을 강의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동집(申瞳集) 참고)
  5. 시인이자 번역가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56년 <현대문학>에 시 <소녀상>이 추천되어 데뷔한 후 여러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그는 시작 활동을 하는 한편, 독일문학으로는 <헤세 시집>, <릴케시집>,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등의 번역서를 펴내었다(인터넷 교보문고 참고).
  6. 1980년 형문출판사에서 나온 헤세전집에는 다음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v.1, 데미안, 크눌프, 게르트루우트, v.2, 지와 사랑, 싯다르타, v.3, 황야의 이리, 로스할데, v.4, 청춘은 아름다워라 헤세 초기산문집, v.5, 수레바퀴 밑에서, 페에트 카아멘친트, 헤세시선. 이처럼 송영택은 헤세의 주요작품 외에도 시, 동화, 단편 등을 두루 옮겼다.
  7. 박환덕은 <유리알 유희>, <페터 카멘친트>, <게르트루트>, <크눌프>와 같은 헤세의 작품 이외에도 카프카, 괴테, 그라스, 릴케, 한스 카로사, 볼프강 보르헤르트, 안데르센 등의 작품을 옮겼다.
  8. 박경희는 Mattias Augustin과 함께 박태원의 <천변풍경 Am Fluss>(OSTASIEN Verlag)을, Kurt Drawert와 함께 최승호의 시집 <얼음의 자서전 Autobiographie aus Eis>(Wallenstein 2011)을 독일어로 옮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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