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칼과 아랍인 (Schakale und Araber)"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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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자칼과 아랍인<br>(Schakale und Ara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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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쟈컬과 아라비아人 || 變身 || || 카프카 || 이규영 || 1977 || 豊林出版社 || 231-272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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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이규영(1977)" />[[#이규영(1977)R|1]] || 쟈컬과 아라비아人 || 變身 || || 카프카 || 이규영 || 1977 || 豊林出版社 || 231-272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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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재칼과 아랍人 ||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 || 프란츠 카프카 || 金潤涉 || 1978 || 德文出版社 || 9-16 || 편역 || 완역 ||
 
| 2 || 재칼과 아랍人 ||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 || 프란츠 카프카 || 金潤涉 || 1978 || 德文出版社 || 9-16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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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쟈컬과 아라비아인 || 고독과 죽음의 美學 || 카프카 수상집 || 프란츠 카프카 || 崔俊煥 || 1985 || 豊林出版社 || 267-273 || 편역 || 완역 ||
 
| 4 || 쟈컬과 아라비아인 || 고독과 죽음의 美學 || 카프카 수상집 || 프란츠 카프카 || 崔俊煥 || 1985 || 豊林出版社 || 267-273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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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승냥이와 아랍인 || 변신 외 || 어문각 세계문학문고 119 || 카프카 || 박환덕 || 1986 || 어문각 || 119-126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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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박환덕(1986)" />[[#박환덕(1986)R|5]] || 승냥이와 아랍인 || 변신 외 || 어문각 세계문학문고 119 || 카프카 || 박환덕 || 1986 || 어문각 || 119-126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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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재칼과 아라비아인 || 동생.변신, 집, 시골의사 || 현대의 세계문학 =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15 || 프란츠 카프카 || 지명렬 || 1988 || 汎韓出版社 || 351-354 || 편역 || 완역 ||
 
| 6 || 재칼과 아라비아인 || 동생.변신, 집, 시골의사 || 현대의 세계문학 =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15 || 프란츠 카프카 || 지명렬 || 1988 || 汎韓出版社 || 351-354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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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쟈컬과 아라비아인 || 변신 || 풍림명작신서 시리즈 15 || 카프카 || 李圭韺 || 1993 || 豊林出版社 || 155-162 || 편역 || 완역 ||
 
| 8 || 쟈컬과 아라비아인 || 변신 || 풍림명작신서 시리즈 15 || 카프카 || 李圭韺 || 1993 || 豊林出版社 || 155-162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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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1997 || 솔출판사 || 228-233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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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이주동(1997)" />[[#이주동(1997)R|9]]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1997 || 솔출판사 || 228-233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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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2003 || 솔출판사 || 228-233 || 편역 || 완역 ||
 
| 10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2003 || 솔출판사 || 228-233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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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자칼과 아랍 인 || 변신 외 || || 프란츠 카프카 || 송명희 || 2009 || 교원 || 143-151 || 편역 || 완역 ||
 
| 12 || 자칼과 아랍 인 || 변신 외 || || 프란츠 카프카 || 송명희 || 2009 || 교원 || 143-151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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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프란츠 카프카 중단편집 || 열린책들 세계문학 10 || 프란츠 카프카 || 홍성광 || 2010 || 열린책들 || 218-223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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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홍성광(2010)" />[[#홍성광(2010)R|13]]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프란츠 카프카 중단편집 || 열린책들 세계문학 10 || 프란츠 카프카 || 홍성광 || 2010 || 열린책들 || 218-223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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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자칼과 아랍인 || 독수리 ||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15 || 프란츠 카프카 || 조원규, 이승수 || 2011 || 바다출판사 || 67-76 || 편역 || 완역 ||
 
| 14 || 자칼과 아랍인 || 독수리 ||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15 || 프란츠 카프카 || 조원규, 이승수 || 2011 || 바다출판사 || 67-76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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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재컬과 아라비아인 || 칼다 기차의 추억 || || 프란츠 카프카 || 이준미 || 2014 || 하늘연못 || 17-25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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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이준미(2014)" />[[#이준미(2014)R|15]] || 재컬과 아라비아인 || 칼다 기차의 추억 || || 프란츠 카프카 || 이준미 || 2014 || 하늘연못 || 17-25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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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자칼과 아랍인 || 선고 || 을유세계문학전집 72 || 프란츠 카프카 || 김태환 || 2015 || 을유출판사 || 168-174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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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김태환(2015)" />[[#김태환(2015)R|16]] || 자칼과 아랍인 || 선고 || 을유세계문학전집 72 || 프란츠 카프카 || 김태환 || 2015 || 을유출판사 || 168-174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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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재칼과 아랍인 || 소송, 변신, 시골의사 외 || || 프란츠 카프카 || 홍성광 || 2016 || 열린책들 || 455-462 || 편역 || 완역 ||
 
| 17 || 재칼과 아랍인 || 소송, 변신, 시골의사 외 || || 프란츠 카프카 || 홍성광 || 2016 || 열린책들 || 455-462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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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2017 || 솔출판사 || 228-233 || 편역 || 완역 ||
 
| 19 || 재칼과 아랍인 || 변신 : 단편전집 || 카프카 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 이주동 || 2017 || 솔출판사 || 228-233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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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자칼과 아랍인 || 프란츠 카프카 || 세계문학단편선 37 || 프란츠 카프카 || 박병덕 || 2020 || 현대문학 || 272-27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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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박병덕(2020)" />[[#박병덕(2020)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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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칼과 아랍인 || 프란츠 카프카 || 세계문학단편선 37 || 프란츠 카프카 || 박병덕 || 2020 || 현대문학 || 272-27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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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자칼과 아랍인 || 변신·단식 광대 || 창비세계문학 78 || 프란츠 카프카 || 편영수; 임홍배 || 2020 || 창비 || 176-181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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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편영수(2020)" />[[#편영수(2020)R|21]] || 자칼과 아랍인 || 변신·단식 광대 || 창비세계문학 78 || 프란츠 카프카 || 편영수; 임홍배 || 2020 || 창비 || 176-181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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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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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과 아랍인>은 프란츠 카프카가 1917년에 마르틴 부버가 펴내는 월간 문학 잡지인 <유대인>에 발표한 단편소설로서 나중에 작품 모음집인 <시골 의사>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독어 제목은 <Schakale und Araber>이며 한국에서는 이규영이 1977년에 카프카 작품 선집인 <변신>에 처음으로 <쟈컬과 아라비아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였고, 이듬해인 1978년에 독문학자 김윤섭이 <재칼과 아랍>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한동안 휴지기를 거치다가 1997년에 이주동이 <재컬과 아랍인>이라는 제목으로 카프카 단편 선집에 수록한 이후로 번역과 재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처럼 여러 번역가가 자주 번역을 시도한 작품이 되었다. 2023년 1월 현재까지 총 15인의 번역자가 21편의 번역본/재번역본을 출간하였다. 박환덕, 이주동, 홍성광, 김태환, 박병덕, 편영수 같은 카프카 전문가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김윤섭, 김영옥, 지명렬 같은 독문학자, 그리고 이규영, 최준환, 정제광, 송명희, 조원규, 이준미, 김진언 등의 번역자들도 이에 가담하였다. 또한 국내의 유수 출판사들이 대거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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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최초에 <쟈컬과 아라비아인>으로 번역되었다가 박환덕이 <승냥이와 아랍인>으로 번역한 것이 특이하며, 이주동 이후 <재컬과 아랍인>으로 번역이 되었으며 김영옥이 독어식 발음인 <자칼과 아랍인>으로 번역한 이후 이 제목으로 고정되어 가고 있다. 이 작품만 독립적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적은 없으며 보통 선집이나 전집에 편입되어 출판되었고, 이 작품이 표제작으로 실린 적도 아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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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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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는 화자인 ‘나’와 자칼 무리, 그리고 아랍인이 등장한다. 나 역시 동료들과 같이 집단 속에서 여행하고 있고, 아랍인도 개인으로 등장하지만 종족의 대표로 집단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 집단의 각각의 특징들, 집단 간의 관계 및 갈등 묘사에 주목하면서 번역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자칼은 이방인 화자인 ‘나’에게 다가와 자기 종족이 아랍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북쪽에서 오는 구원자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자기들은 비록 시체를 먹지만 깨끗하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자인 화자에게 가위로 아랍인의 목을 베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아랍인이 등장하여 이 모든 것을 연극으로 돌리며 자칼의 본성을 이방인에게 보여주고자 낙타시체를 던져준다. 그러자 아랍인의 조롱과 채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칼은 미친 듯이 시체에 달려들어 동물적 본능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랍인은 자칼 종족을 개처럼 취급하며 구원자 유럽인을 대대로 기다리는 것도 무시한다. 화자는 자칼 편을 들지는 않지만 자칼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아랍인을 만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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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서는 이러한 세 그룹의 사회적 관련성이나 작품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상징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차이를 가져왔다. 자칼은 자주 유대인의 운명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되었다. 오랫동안 구원자를 기다려 온 점, 종족의 순수함을 주장하는 점, 모계 혈통을 따진다는 점, 피에 대한 담론과 아랍인과의 적대감 등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왔다. 작품은 그러나 자칼 비유를 통하여 유대인 집단을 호의적으로만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의 호소와 어울리지 않는 동물적 본능을 드러내 작품을 반유대적으로 읽을 가능성도 열어 놓고있다. 또한 자칼 무리와 아랍인들이 각각 체코인이나 독일인, 혹은 독일인이나 체코인 그룹을 상징한다고도 보는 기존의 연구들도 있고, 당대의 프라하 사회가 체코인, 독일인, 유대인들이 서로 반목하면서 얽혀있었고, 작품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또한 작가는 교훈적이고 범례적인 전통적인 유대의 비유담이라기보다는 ‘동물 이야기’로서 더욱 자유롭게 읽어내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관점들을 고려하여 번역 차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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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규영(1977)| 이규영 역의 <쟈컬과 아라비아인>(1977)]]<span id="이규영(1977)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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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영은 헤르만 헤세나 에리히 프롬, 카알 힐티 등의 독어 작품을 주로 옮긴 번역자로 소개되어 있고, 이 작품은 <풍림명작신서시리즈>의 하나로 기획되어 <변신>이라는 책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가 한 번역의 의의는 1977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이 작품을 소개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번역은 과거의 세로 읽기로 인쇄되어 있고 어휘, 어투, 문체가 현대와는 차이가 크게 난다. 전체적으로 초역으로서는 번역의 큰 문제를 잘 풀고 있으나, 간혹 난해한 부분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번역하거나 원작과 차이가 크다는 단점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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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세 그룹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공손법에서 그 특성이 드러난다. 작품에서는 모두 처음 만나는 상황임에도 서로 ‘dutzen’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자들은 본인 해석에 따라 호칭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이규영의 번역에서 자칼은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다음처럼 공대하는 말투로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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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근처에서 제일 오래 살아온 쟈컬이올시다. 아직 이런 곳에서 만나뵐 수 있다니 뜻하지 않은 기쁨입니다.(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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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이방인은 하대하는 어투를 사용하여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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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랐어. 먼 북쪽나라에서 그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요. 여정도 짧았지, 그런데 자네들 무슨 용건이죠?(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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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번역은 원문과 차이가 크다. 북쪽 나라는 출신을 가리키는데 마치 과거에 만난 사건을 언급하는 것처럼 옮기고 있다. 그 외에도 원문과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자칼들의 한탄도 “이런 민족과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불행이 아닙니까?”(234)로 추방/배척을 의미하는 단어가 번역에서 빠져 핵심을 놓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이방인의 대답은 “딴은 옳거니.”(234)로 둘 사이의 큰 공감대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원문을 지나치게 확장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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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이 소원을 읍소할 때 이방인을 “선생님”(236)이라고 호칭하며, 또 동시에 “기품 높은 가슴과 맛있는 내장의 임자인 당신”(237)이라고 불러 자칼이 이방인을 대하는 이중적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칼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호소하는 문장들의 패러독스를 옮길 때 원문에는 피를 빨아먹는다고 되어 있고 “피”는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어 작품의 붉은 줄을 형성하는데. 이 어휘가 빠져 정확성이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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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그 짐승을 빨아 마셔 버리고 뼈만 남기고 깨끗이 먹어치우고 싶습니다. 깨끗하다는 것, 이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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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은 “마침내 가위가 나와 끝이 났군요?”(237)라는 말로 자칼의 이야기를 종결지으며 등장한다. 자칼과 똑같이 아랍인도 이방인을 “Herr”라는 용어로 지칭하는데, 자칼은 “선생님”, 아랍인은 “당신”이라 다르게 번역한다. 즉 자칼과 유럽인은 수직적 관계, 유럽인과 아랍인은 수평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아랍인은 유럽인들이 모두 “사명”을 가진 선지자라고 보는 자칼을 개 취급하며 채찍으로 다스리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는 그들을 동물 취급하며 자신들과 거리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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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 lassen sie bei ihrem Beruf, auch ist es Zeit aufzubrechen. Gesehen hast du sie. Wunderbare Tiere, nicht wahr? Und wie sie uns hassen!(135)<ref>Kafka, Franz(1987): Sämtliche Erzählungen. Herausgegeben von Paul Raabe, Frankfurt a. M.: Fischer. 이하에서는 위에서처럼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ref><br>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둡시다. 게다가 이제 출발시간이올시다. 당신도 보셨지만 이상한 짐승이죠? 그리고 참으로 무서울 정도로 우리를 미워하고 있죠!(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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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환덕(1986)| 박환덕 역의 <승냥이와 아랍인>(1986)]]<span id="박환덕(1986)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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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덕은 역대 번역본 중 가장 독특하게 작품 제목을 <승냥이와 아랍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역자는 ‘동물 이야기’라는 장르적 특성을 많이 살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승냥이의 동물적 본능을 더욱 충실하게 묘사하지만, 이때 승냥이를 보다 강하게 의인화시켜 또한 유대인 집단과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첫 부분에 승냥이 한 마리가 앞으로 나와 “나를 마주 보며 거의 나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fast Aug in Aug mit mir” 지껄이기 시작하는데, 이어지는 다음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간화시켜 번역한다. “나는 이 일대의 승냥이들 중에서 제일 높은 장로입니다.”(178)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온 승냥이 족의 대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179) 이 이방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에 “이해가 가지 않는 Es wundert mich”다고 거리를 두고 반응을 보이며 상대방을 “승냥이 제군”이라 호칭한다. 자칼은 이방인을 “다른 나라 사람 ein Fremder”이라 부르고 “이런 인종 속에 추방당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행은 충분하지 않”는가 라고 동의를 구한다. 승냥이들의 행동 묘사에서의 의인화 기법은 자신들의 행동을 “졸렬한 행동”(181)이라고 자신을 낮출 때도 드러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애원조의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번역할 때도 드러난다. 그리고 독특하게 “우리들은 불쌍한 동물입니다. 우리는 무는 것 이외에는 달리 수단이 없습니다.”(181)라고 호소하게 시킨다. 다른 역자들이 “이빨”이라고 명사로 즉물적으로 번역하는 것과 달리 박환덕은 “무는 것”이라는 동작을 지칭하여 사물이 주는 객체성, 동물성을 다소 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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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Herr”를 “당신”이라 호칭하며 “당신은 세계를 두 개로 갈라놓고 있는 이 싸움을 종결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자칼의 그로테스크하고 패러독스한 호소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데, “Reinheit”를 “청결과 순수성”으로 이중으로 번역한다. 한 번은 피를 마시고 뼈를 먹는 청결과 결부시켜 동물의 행동에 직접 연관을 시키고 다른 한편은 그 행위가 갖는 고차원적 의미로 순수성을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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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n Klagegeschrei eines Hammels, den der Araber absticht; ruhig soll alles Getier krepieren; ungestört soll es von uns leergetrunken und bis auf die Knochen gereinigt werden. Reinheit, nichts als Reinheit wollen wir.(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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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짐승들이 편안하게 그들의 목숨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방해당하지 않고 그 피를 마시고, 그 뼈까지도 먹어 치워, 청결과 순수성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순수성 – 오직 순수성만을 우리는 원합니다.(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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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대화에서 만류하는 “나”에게 아랍인은 “그놈들의 장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상한 동물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183)라고 번역하여 자칼들의 행위를 “장사”로 동물성을 다소 감경하고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영위해 온 대표 직업으로 치환하고 있다. 즉, 박환덕은 전체적으로 동물 이야기를 유대인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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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주동(1997)| 이주동 역의 <재칼과 아랍인>(1997)]]<span id="이주동(1997)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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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문가인 이주동이 1997년에 옮긴 번역은 박환덕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자칼을 동물에, 대상에 가깝게 번역했다고 할 수 있다. 이주동 번역의 특징은 자칼 집단, 화자, 아랍인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데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공손법이나 호칭을 차이 나게 사용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자칼은 “나와 거의 눈과 눈을 마주대다시피하고”(228) 이야기를 시작하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재칼이오”(228)라고 일단 이방인 화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이방인도 “그런 말을 듣다니 매우 놀랍군요.”라고 동등한 위치에서 대답한다. 자칼은 아랍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런 종족 밑에서 배척당한 것으로 불행은 충분하지 않은가요?”(229)라고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고 동의를 구하는데, 이에 이방인은 “그렇겠지요, 그렇겠지요.”라고 다소 거리를 두며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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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화자가 자칼의 태도 때문에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자칼은 어투를 갑자기 바꾸어 “우리는 불쌍한 동물들입니다.”라고 시작하면서 “호소하던 목소리”로 말한다. “‘주인님’하고 그가 소리쳤고, 모든 재칼들이 울부짖었다.”(231) 자칼은 이방인에게 널리 알려진 자신들의 동물적 습성을 깨끗함, 순수함으로 전도시켜 설명하는데 이주동은 이를 웅변조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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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이 찔러 죽이는 숫양의 비애에 찬 울부짖음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짐승들은 조용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방해받지 않고 우리들에 의해 완전히 비어져야 하고, 뼛속까지 깨끗이 순화되어져야 합니다. 순수함, 우리들은 순수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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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은 숫양을 죽이는 잔인한 종족이라 비난하고 모든 짐승은 평안히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칼 자기들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그 시체를 먹을 수 있어야 하고 피까지 다 빨아먹는 행위도 순수하다고 자가당착적으로 주장하고 있어 카프카적 낯섦과 즉물성, 패러독스가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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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동 번역의 흥미로운 부분은 “Herr”라는 어휘의 번역이다. 주지하다시피 “Herr”는 독어로 주인, 지배자, 주님, 하느님, 귀족 등의 영주, 신사 등에 이르기까지 의미가 광범위하다. “Herr, du sollst den Streit beenden, der die Welt entzweit.”(134)에서 자칼이 화자를 부르는 호칭을 이주동은 “주인님”으로 번역해 자칼들과 화자와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수직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방인을 “그대 숭고한 마음과 즐거운 내면의 소유자여”(231)라고 동물성(“달콤한 내장”)을 지우고 추상적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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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은 “자, 마침내 가위구나. 그리고 그것으로 끝장이겠지!”라는 말로 등장하는데, 그 역시 이방인에게 “Herr”라는 같은 어휘를 사용하는데 “선생”으로 옮겨 이방인과 아랍인을 거의 동등한 위치에 놓는다. “그러니까 선생, 당신 역시 이 연극을 보았고 들었지요. So hast du, Herr, auch dieses Schauspiel gesehen und gehört.”라고 번역하면서 자칼의 한탄과 종족 이야기를 그저 반복되는 연극으로 해석하게 만들어 진정성을 감소시킨다. 아랍인은 자칼의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 어제 죽은 낙타의 사체를 가져와 던져준다. 자칼들은 순수하고 억울한 피해자 종족의 모습이 아니라 동물적 본성을 보여주며 잔인하게 달려들고 이주동은 자칼들을 “그것”으로 일관되게 대상화하며 번역한다. 아랍인이 채찍을 휘두르자 일단 도망쳤다가 다시 사체로 달려드는 자칼은 “그것들”일 뿐이다. “그러자 이미 모두가 같은 일을 하면서 그것들은 시체 위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233) 아랍인을 만류하는 이방인에게 마지막으로 아랍인은 이렇게 말하는데, “Beruf”는 천직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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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들이 자신의 천직을 행할 때는 그대로 놓아둡시다. 또한 떠날 시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보았지요. 놀라운 동물들이요. 그렇지 않소? 게다가 우리를 증오하는 모습이란.(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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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영옥 역의 <자칼과 아랍인>(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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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98년에 카프카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한 독문학자 김영옥은 <오드라텍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선집 제목으로 책을 펴냈으며 <자칼과 아랍인>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처음으로 독어 발음식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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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은 자칼 한 마리가 다가와 “내 앞으로 나서서 거의 내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다시피”(169)하며 말을 시작했다고 번역하여 화자와 자칼의 관계를 다소 변형시켰다. 즉 자칼이 화자의 주의를 끌려고 함을 강조하면서 “나는 이 일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칼입니다.”(170)라고 “~입니다”체를 사용하여 정중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방인은 이들의 이야기에 대해 “이상하다”고 일관된 반응을 보이며 이를 잘 살려 번역하고 있고, 자칼과 이방인 사이의 이해 거리를 보다 벌린다. 자칼은 “저런 종족들 사이로 추방 되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불행하지 않습니까?”라고 정확하면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한탄에 대해 화자는 자기는 “아주 상관없는 일에 판단을 내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171)다고 거리를 두고 있으며 “어쩌면 피를 봐야 끝날지도 모르죠.”라고 보다 신중한 어투로 개입을 거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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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영옥은 자칼이 이방인을 향해 “선생, 당신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 싸움을 종결시켜야만 합니다.”(173)라고 요청하게 하고 있으며 이주동이 누락한 피 부분을 넣어 이 자칼들 주장의 모순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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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짐승들이 조용히 죽어가야 합니다. 아무 방해받지 않고 우리들이 그것들의 피를 다 빨아 마시고 그래서 그것들이 뼛속까지 깨끗해지게 해야 합니다. 깨끗함, 우리가 원하는 것은 깨끗함뿐입니다.(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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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랍인은 “자, 드디어 이 가위로 종말을!”(174)이라고 말하며 등장하여 화자를 동등한 위치에서 “자, 선생, 당신은 이제 이 연극도 보고 듣게 되었군요.”(174)라고 말한다. 즉 김영옥은 종교적 색채를 완화시키고 있고 또한 “Herr”를 자칼이나 아랍인이나 일관되게 “선생”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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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낙타를 찢어 먹는 탐욕스러운 자칼 무리의 모습을 묘사할 때 김영옥은 “그것”이라 번역한 이주동과 달리 매번 주어를 “자칼들”이라고 써서 대상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동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화자와 아랍인이 나누는 대화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김영옥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의역이나 2차적 의미화, 상징화, 혹은 종족들 간의 위계화를 배제하며 옮기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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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대로 하라고 놔둡시다. 그리고 출발할 시간도 되었구요. 저들을 보긴 한 거니까요. 대단한 짐승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증오는 또 어떻구요!(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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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홍성광(2010)| 홍성광 역의 <재칼과 아랍인>(2010)]]<span id="홍성광(2010)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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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광은 <재칼과 아랍인>으로 영어식으로 번역하였다. 홍성광 번역의 특징은 전체적으로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살짝 의역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알다가도 모를 말이야.”, “그런 민족의 압박에 우리가 쫓겨났다는 것이야말로 불행이 아닐까요?”에서 보다시피 자칼의 우두머리가 이방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게 하고 이방인 화자는 이들에게 하대하게 한다. “나는 이 일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재칼입니다.”에 “자네들이 바라는 게 대체 뭔가, 재칼들?”이라고 응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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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사태 전환 후 자칼들은 이방인을 “나리!”(156)라고 부르며 “세상을 두 개로 갈라 놓고 있는 싸움을 끝내야 합니다”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아랍인도 이방인을 “나리”라 부르며 “이것으로 나리도 좋은 구경거리를 보고 들으셨군요.”(157)라고 말하게 한다. “유럽인만 보면 그런 일을 하기에 적격이라고 생각하거든요.”(157), “그들이 끌리는 본성에 맡겨 둡시다”(158) 등에서 보듯 전체적으로 카프카 특유의 낯섦을 유발하는 그로테스크하거나 패러독스한 명사들의 특성은 다소 덜 드러나나 독자들을 위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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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준미(2014)| 이준미 역의 <재컬과 아라비아인>(2014)]]<span id="이준미(2014)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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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 이준미가 <칼다 기차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카프카 선집을 냈는데 이때 첫번 째에 ‘유순한 동물들’이라는 소제목 하여 카프카의 여러 동물 이야기를 소속시키며 그 중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재칼과 아라비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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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와 재칼과의 관계는 여기에서는 이제까지의 번역들과는 달리 뒤바뀌어 있다. 자칼이 당당하게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재칼이다”(18)라고 하대하며 말을 건네자, 화자가 거꾸로 “그대들, 재칼들은 무엇을 원하는 거지요?”라고 공손하게 묻는다. 전체적으로 이준미는 독자의 가독성을 위하여 카프카의 다소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쉽게 고치고 있지만 부정확한 부분도 꽤 보인다. 예를 들어“우리가 그런 민족 때문에 쫓겨나는 것으로 불행은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19)라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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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가 자칼의 행동을 나무라자 자칼들이 어조와 태도를 급격하게 바꾸어 “우리는 불쌍한 동물들입니다”라고 하소연하기 시작하며 이에 화자는 입장을 바꾸어 “너는 무엇을 원하는 거지?”(21)라고 드러내놓고 하대하기 시작한다. 이때 자칼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싸움을 끝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가위로 아랍인의 목을 끊어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아랍인이 등장하며 이방인을 “당신,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 대화에 자칼들이 시체를 뜯어 먹을 때 이 행동을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사명을 다하도록 놔둡시다”(25)라고 제안하여 “Beruf”를 추상적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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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태환(2015)| 김태환 역의 <자칼과 아랍인>(2015)]]<span id="김태환(2015)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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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은 제목을 김영옥처럼 <자칼과 아랍인>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다른 역자들보다 원본에 충실하면서도 상징화, 의미화를 배제하며 옮긴다. 화자인 나에게 다가오는 자칼이 “나와 거의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다가왔다고 번역하여 나와 자칼의 사이를 긴장 상태로 몰아가며 자칼의 어투를 “나는 이 넓은 지역을 통들이 가장 나이 많은 자칼일세”라고 자칼 종족의 우두머리로서의 위엄 있는 말투로 반말을 사용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북쪽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것 이외에도 아랍인과 달리 “이성”(169)을 가지고 있으며 자칼들의 불행은 “그런 족속 아래 내몰린 것”에 있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이들의 오랜 분쟁을 “그러니까 아마 핏속에 흐르는 싸움일 테지. 결국 피로써만 끝날 것이고”(170)라고 “피”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또한 의역하지도 않고 일관성이 드러나게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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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인 부분은 자칼이 분쟁을 종료시켜달라는 부탁을 할 때 다른 번역들과 달리 어투를 바꾸지 않고 있으며 화자를 “신사 양반”이라고 불러 종교적 색채를 없애고 있다. “세계를 분열시키는 이 분쟁을 종식시켜 주게나”(171)라고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요청으로 번역한다. 자칼들의 자기변명을 김태환은 “모든 짐승들이 평온하게 죽어가야지. 아무 방해 없이 우리가 그것들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뼈까지 깨끗이 해치워야 해. 깨끗함. 우리가 원하는 건 깨끗함뿐이니까”(172)로 해석해서 일관되게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해석을 배제하며 “Reinheit”의 개념을 실제 시체를 먹는 행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며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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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도 역시 화자를 “신사 양반”이라고 부르게 하고 있으며 “당신도 이 연극을 보고 들었군.”(172)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아랍인이 던져준 낙타 사체에 달려든 자칼 떼들을 “그들”이라고 일관되게 동물들로 옮긴다. 자칼 떼들이 사체에 달라붙어 움찔거리는 장면을 자칼들의 동물성의 절정으로 옮기고 “녀석”이라고까지 부른다. 화자와 아랍인의 마지막 대화 장면에서는 “Beruf”를 “저들이 제 일을 하게 내버려두지.”라고 만류하며 “당신도 녀석들을 봤지. 정말 멋진 장면이 아닌가? 녀석들이 우리는 또 어찌나 미워하는지!”라고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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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병덕(2020)| 박병덕 역의 <자칼과 아랍인>(2020)]]<span id="박병덕(2020)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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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덕의 <자칼과 아랍인>은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본들 중 하나로서 독자들에게 이제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여러 지점의 크고 작은 의문을 풀어준다. 예를 들어 자칼이 아랍인은 오성이 없다는 점을 비난하기 위해 한 말을 “그자들은 동물들을 잡아먹기 위해 죽이지만 동물들의 시체는 경멸하지요.”(273)라고 번역하여 아랍인의 모순과 연결시킨다. 이전의 번역들이 “그들은 처먹기 위해 짐승을 죽이고 짐승의 시체를 모독하지” 등으로 애매모호하게 한 부분들을 깔끔하게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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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의 자기 정체성 옹호가 가진 패러독스를 다음처럼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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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짐승은 조용히 죽어야 합니다.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우리에 의해 완전히 비워져야 하고, 뼛속까지 깨끗이 순화되어야 합니다. 순수함, 순수함 이외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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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Herr”를 “주인님”으로 호명함으로써 거의 주님에 가까운 의미로 번역하고 있으며, 또한 모계로 이어지는 유대인에게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수많은 증조, 고조 어머니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지위에까지 올라간다. 아랍인은 “선생”으로 호칭을 번역하여 두 그룹 간에 차이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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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편영수(2020)| 편영수 역의 <자칼과 아랍인>(2020)]]<span id="편영수(2020)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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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과 아랍인>은 창비세계문학의 한 권으로 <변신· 단식광대>라는 제명으로 편영수 임홍배 공역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작품은 편영수가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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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영수는 세 집단을 거의 동등한 관계에서 번역하고 있으나 자칼이 다소 높은 위치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칼일세.”(176)의 투로 말을 걸며, 이방인은 “그런 말을 듣다니 정말 놀랍소.”(177)라는 투로 거의 동등하나 다소 공손하게 대답한다. 중간 이후 “선생님”이라 부르며 부탁을 한 이후로는 자칼의 말투는 깍듯이 공손한 어투로 바뀐다. 특히 자칼의 자기 호소는 가장 정확하게 패러독스하게 번역이 되고 있다. 이규영의 최초 번역 이외에는 모두 “뼈까지” 깨끗해져야 한다고 옮겼었으나 편영수에 와서는 “뼈만 남기고”로 옳게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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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짐승은 조용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그 시체들의 피를 모두 빨아 마시고, 깨끗하게 뼈만 남겨야 합니다. 깨끗함, 우리가 원하는 것은 깨끗함일뿐입니다.(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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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으로써 자칼이라는 동물 비유담이 갖는 유대적 해석과 반유대적 해석을 동시에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자칼들이 낙타 사체에 달려들 때 자칼의 몸이 펌프처럼 경련을 일으키는데 이를 낙타로 번역하여 자칼의 동물성과 관련된 부분을 오인하고 있다. 이어 아랍인은 “그러니까 선생님, 당신은 이제 이 연극도 보고 듣게 됐군요.”(180)의 투로 이방인에게 말을 하며 자칼과 아랍인 모두 이방인을 “선생님 Herr”으로 호칭하며 “습성대로 하도록 내버려둡시다”(181)라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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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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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과 아랍인>은 최근에 와서 자주 번역되는 카프카 작품에 속하고 카프카 선집에 자주 포함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번역된 빈도수에 비하면 연구논문이나 개별적인 역자주는 두세 편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작품 이해가 깊어지고 풍부해짐에 따라 번역도 이를 반영하여 심화되고 풍부해진다. 이 작품은 다의적이거나 난해한 부분이 점차 해명되고 있지만, 그 많은 번역 횟수에 비해 획기적인 변화나 번역본들 사이의 큰 차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는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을 담은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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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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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영(1977): 쟈컬과 아라비아인. 풍림출판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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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덕(1986): 승냥이와 아랍인. 어문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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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동(1997): 재칼과 아랍인. 솔출판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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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1998): 자칼과 아랍인. 문지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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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광(2010): 재칼과 아랍인. 열린책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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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미(2014): 재컬과 아라비아인. 하늘연못.<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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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2015): 자칼과 아랍인. 을유문화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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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덕(2020): 자칼과 아랍인. 현대문학.<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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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영수(2020): 자칼과 아랍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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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최윤영</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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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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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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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독일문학]]
 
[[분류: 독일문학]]
 
[[분류: 카프카, 프란츠]]
 
[[분류: 카프카, 프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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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비평된작품]]

2024년 8월 3일 (토) 00:45 기준 최신판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소설

자칼과 아랍인
(Schakale und Araber)
작가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초판 발행1917
장르소설


작품소개

카프카가 1917년에 마르틴 부버가 펴내는 월간지 <유대인>에 발표한 단편으로 나중에 소설집 <시골의사>에 수록되었다. 1인칭 화자는 동행자들과 함께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숙영을 하고 있다. 잠이 오지 않아 홀로 깨어 있는데, 한 떼의 자칼들이 가위를 물고 찾아와 아랍인들의 목을 따줄 것을 부탁한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 자칼들은 세계를 숨 쉴 수 없을 만큼 더럽히는 아랍인들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아랍인 지도자가 채찍을 휘두르며 나타난다. 아랍인은 자칼들이 유럽인만 나타나면 같은 소동을 일으킨다고 설명하면서 낙타의 사체를 자칼들에게 던져준다. 자칼들은 당장 낙타에 달려들어 물어뜯기 시작하고 아랍인의 채찍질에도 마법에 취한 듯 거듭 먹잇감으로 돌아온다. 화자가 채찍을 휘두르는 아랍인을 말리자, 아랍인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칼은 순결함을 갈망하면서도 자신의 충동에 떠밀려 어떤 비굴한 조롱도 마다하지 않는 모순적이고 분열된 존재로 나타나며, 때로는 유대민족의, 때로는 카프카 자신의 비유로 해석된다. 한국어로는 1977년 이규영이 번역한 카프카 작품 선집 <변신> 속에 <쟈컬과 아라비아인>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다(풍림출판사).


초판 정보

Kafka, Franz(1917): Schakale und Araber. In: Der Jude 2(7), 488-490. <단행본 초판> Kafka, Franz(1920): Schakale und Araber. In: Ein Landarzt. Kleine Erzählungen. München/Leipzig: Kurt Wolff, 57-74.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쟈컬과 아라비아人 變身 카프카 이규영 1977 豊林出版社 231-272 편역 완역
2 재칼과 아랍人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프란츠 카프카 金潤涉 1978 德文出版社 9-16 편역 완역
3 재칼과 아라비아인 동생.변신, 집, 시골의사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현대의 세계문학 15 프란츠 카프카 지명렬 1984 汎韓出版社 351-354 편역 완역
4 쟈컬과 아라비아인 고독과 죽음의 美學 카프카 수상집 프란츠 카프카 崔俊煥 1985 豊林出版社 267-273 편역 완역
승냥이와 아랍인 변신 외 어문각 세계문학문고 119 카프카 박환덕 1986 어문각 119-126 편역 완역
6 재칼과 아라비아인 동생.변신, 집, 시골의사 현대의 세계문학 =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15 프란츠 카프카 지명렬 1988 汎韓出版社 351-354 편역 완역
7 승냥이와 아랍인 변신, 유형지에서(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6 프란츠 카프카 박환덕 1989 汎友社 164-169 편역 완역
8 쟈컬과 아라비아인 변신 풍림명작신서 시리즈 15 카프카 李圭韺 1993 豊林出版社 155-162 편역 완역
재칼과 아랍인 변신 : 단편전집 카프카 전집 1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1997 솔출판사 228-233 편역 완역
10 재칼과 아랍인 변신 : 단편전집 카프카 전집 1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2003 솔출판사 228-233 편역 완역
11 재칼과 아랍 인 변신 : 변신 외 3편 수록 프란츠 카프카 정제광 2007 지경사 151-162 편역 완역
12 자칼과 아랍 인 변신 외 프란츠 카프카 송명희 2009 교원 143-151 편역 완역
재칼과 아랍인 변신: 프란츠 카프카 중단편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10 프란츠 카프카 홍성광 2010 열린책들 218-223 편역 완역
14 자칼과 아랍인 독수리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15 프란츠 카프카 조원규, 이승수 2011 바다출판사 67-76 편역 완역
재컬과 아라비아인 칼다 기차의 추억 프란츠 카프카 이준미 2014 하늘연못 17-25 편역 완역
자칼과 아랍인 선고 을유세계문학전집 72 프란츠 카프카 김태환 2015 을유출판사 168-174 편역 완역
17 재칼과 아랍인 소송, 변신, 시골의사 외 프란츠 카프카 홍성광 2016 열린책들 455-462 편역 완역
18 자칼과 아랍인 카프카 우화집 프란츠 카프카 김진언 2017 玄人 78-87 편역 완역
19 재칼과 아랍인 변신 : 단편전집 카프카 전집 1 프란츠 카프카 이주동 2017 솔출판사 228-233 편역 완역
자칼과 아랍인 프란츠 카프카 세계문학단편선 37 프란츠 카프카 박병덕 2020 현대문학 272-278 편역 완역
자칼과 아랍인 변신·단식 광대 창비세계문학 78 프란츠 카프카 편영수; 임홍배 2020 창비 176-181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자칼과 아랍인>은 프란츠 카프카가 1917년에 마르틴 부버가 펴내는 월간 문학 잡지인 <유대인>에 발표한 단편소설로서 나중에 작품 모음집인 <시골 의사>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독어 제목은 <Schakale und Araber>이며 한국에서는 이규영이 1977년에 카프카 작품 선집인 <변신>에 처음으로 <쟈컬과 아라비아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였고, 이듬해인 1978년에 독문학자 김윤섭이 <재칼과 아랍>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한동안 휴지기를 거치다가 1997년에 이주동이 <재컬과 아랍인>이라는 제목으로 카프카 단편 선집에 수록한 이후로 번역과 재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처럼 여러 번역가가 자주 번역을 시도한 작품이 되었다. 2023년 1월 현재까지 총 15인의 번역자가 21편의 번역본/재번역본을 출간하였다. 박환덕, 이주동, 홍성광, 김태환, 박병덕, 편영수 같은 카프카 전문가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김윤섭, 김영옥, 지명렬 같은 독문학자, 그리고 이규영, 최준환, 정제광, 송명희, 조원규, 이준미, 김진언 등의 번역자들도 이에 가담하였다. 또한 국내의 유수 출판사들이 대거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이 작품은 최초에 <쟈컬과 아라비아인>으로 번역되었다가 박환덕이 <승냥이와 아랍인>으로 번역한 것이 특이하며, 이주동 이후 <재컬과 아랍인>으로 번역이 되었으며 김영옥이 독어식 발음인 <자칼과 아랍인>으로 번역한 이후 이 제목으로 고정되어 가고 있다. 이 작품만 독립적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적은 없으며 보통 선집이나 전집에 편입되어 출판되었고, 이 작품이 표제작으로 실린 적도 아직은 없다.


2. 개별 번역 비평

작품에는 화자인 ‘나’와 자칼 무리, 그리고 아랍인이 등장한다. 나 역시 동료들과 같이 집단 속에서 여행하고 있고, 아랍인도 개인으로 등장하지만 종족의 대표로 집단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 집단의 각각의 특징들, 집단 간의 관계 및 갈등 묘사에 주목하면서 번역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자칼은 이방인 화자인 ‘나’에게 다가와 자기 종족이 아랍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북쪽에서 오는 구원자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자기들은 비록 시체를 먹지만 깨끗하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자인 화자에게 가위로 아랍인의 목을 베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아랍인이 등장하여 이 모든 것을 연극으로 돌리며 자칼의 본성을 이방인에게 보여주고자 낙타시체를 던져준다. 그러자 아랍인의 조롱과 채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칼은 미친 듯이 시체에 달려들어 동물적 본능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랍인은 자칼 종족을 개처럼 취급하며 구원자 유럽인을 대대로 기다리는 것도 무시한다. 화자는 자칼 편을 들지는 않지만 자칼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아랍인을 만류한다.

번역에서는 이러한 세 그룹의 사회적 관련성이나 작품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상징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차이를 가져왔다. 자칼은 자주 유대인의 운명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되었다. 오랫동안 구원자를 기다려 온 점, 종족의 순수함을 주장하는 점, 모계 혈통을 따진다는 점, 피에 대한 담론과 아랍인과의 적대감 등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왔다. 작품은 그러나 자칼 비유를 통하여 유대인 집단을 호의적으로만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의 호소와 어울리지 않는 동물적 본능을 드러내 작품을 반유대적으로 읽을 가능성도 열어 놓고있다. 또한 자칼 무리와 아랍인들이 각각 체코인이나 독일인, 혹은 독일인이나 체코인 그룹을 상징한다고도 보는 기존의 연구들도 있고, 당대의 프라하 사회가 체코인, 독일인, 유대인들이 서로 반목하면서 얽혀있었고, 작품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또한 작가는 교훈적이고 범례적인 전통적인 유대의 비유담이라기보다는 ‘동물 이야기’로서 더욱 자유롭게 읽어내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관점들을 고려하여 번역 차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이규영 역의 <쟈컬과 아라비아인>(1977)

이규영은 헤르만 헤세나 에리히 프롬, 카알 힐티 등의 독어 작품을 주로 옮긴 번역자로 소개되어 있고, 이 작품은 <풍림명작신서시리즈>의 하나로 기획되어 <변신>이라는 책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가 한 번역의 의의는 1977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이 작품을 소개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번역은 과거의 세로 읽기로 인쇄되어 있고 어휘, 어투, 문체가 현대와는 차이가 크게 난다. 전체적으로 초역으로서는 번역의 큰 문제를 잘 풀고 있으나, 간혹 난해한 부분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번역하거나 원작과 차이가 크다는 단점들도 보인다.

등장하는 세 그룹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공손법에서 그 특성이 드러난다. 작품에서는 모두 처음 만나는 상황임에도 서로 ‘dutzen’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자들은 본인 해석에 따라 호칭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이규영의 번역에서 자칼은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다음처럼 공대하는 말투로 말을 건다.


나는 이 근처에서 제일 오래 살아온 쟈컬이올시다. 아직 이런 곳에서 만나뵐 수 있다니 뜻하지 않은 기쁨입니다.(232)


이에 대해 이방인은 하대하는 어투를 사용하여 대답한다.


정말 놀랐어. 먼 북쪽나라에서 그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요. 여정도 짧았지, 그런데 자네들 무슨 용건이죠?(233)


이 부분에서 번역은 원문과 차이가 크다. 북쪽 나라는 출신을 가리키는데 마치 과거에 만난 사건을 언급하는 것처럼 옮기고 있다. 그 외에도 원문과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자칼들의 한탄도 “이런 민족과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불행이 아닙니까?”(234)로 추방/배척을 의미하는 단어가 번역에서 빠져 핵심을 놓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이방인의 대답은 “딴은 옳거니.”(234)로 둘 사이의 큰 공감대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원문을 지나치게 확장해석한 것이다.

자칼이 소원을 읍소할 때 이방인을 “선생님”(236)이라고 호칭하며, 또 동시에 “기품 높은 가슴과 맛있는 내장의 임자인 당신”(237)이라고 불러 자칼이 이방인을 대하는 이중적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자칼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호소하는 문장들의 패러독스를 옮길 때 원문에는 피를 빨아먹는다고 되어 있고 “피”는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어 작품의 붉은 줄을 형성하는데. 이 어휘가 빠져 정확성이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이 그 짐승을 빨아 마셔 버리고 뼈만 남기고 깨끗이 먹어치우고 싶습니다. 깨끗하다는 것, 이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237)


아랍인은 “마침내 가위가 나와 끝이 났군요?”(237)라는 말로 자칼의 이야기를 종결지으며 등장한다. 자칼과 똑같이 아랍인도 이방인을 “Herr”라는 용어로 지칭하는데, 자칼은 “선생님”, 아랍인은 “당신”이라 다르게 번역한다. 즉 자칼과 유럽인은 수직적 관계, 유럽인과 아랍인은 수평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아랍인은 유럽인들이 모두 “사명”을 가진 선지자라고 보는 자칼을 개 취급하며 채찍으로 다스리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는 그들을 동물 취급하며 자신들과 거리를 둔다.

[W]ir lassen sie bei ihrem Beruf, auch ist es Zeit aufzubrechen. Gesehen hast du sie. Wunderbare Tiere, nicht wahr? Und wie sie uns hassen!(135)[1]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둡시다. 게다가 이제 출발시간이올시다. 당신도 보셨지만 이상한 짐승이죠? 그리고 참으로 무서울 정도로 우리를 미워하고 있죠!(239)


2) 박환덕 역의 <승냥이와 아랍인>(1986)

박환덕은 역대 번역본 중 가장 독특하게 작품 제목을 <승냥이와 아랍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역자는 ‘동물 이야기’라는 장르적 특성을 많이 살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승냥이의 동물적 본능을 더욱 충실하게 묘사하지만, 이때 승냥이를 보다 강하게 의인화시켜 또한 유대인 집단과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첫 부분에 승냥이 한 마리가 앞으로 나와 “나를 마주 보며 거의 나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fast Aug in Aug mit mir” 지껄이기 시작하는데, 이어지는 다음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간화시켜 번역한다. “나는 이 일대의 승냥이들 중에서 제일 높은 장로입니다.”(178)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온 승냥이 족의 대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179) 이 이방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에 “이해가 가지 않는 Es wundert mich”다고 거리를 두고 반응을 보이며 상대방을 “승냥이 제군”이라 호칭한다. 자칼은 이방인을 “다른 나라 사람 ein Fremder”이라 부르고 “이런 인종 속에 추방당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행은 충분하지 않”는가 라고 동의를 구한다. 승냥이들의 행동 묘사에서의 의인화 기법은 자신들의 행동을 “졸렬한 행동”(181)이라고 자신을 낮출 때도 드러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애원조의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번역할 때도 드러난다. 그리고 독특하게 “우리들은 불쌍한 동물입니다. 우리는 무는 것 이외에는 달리 수단이 없습니다.”(181)라고 호소하게 시킨다. 다른 역자들이 “이빨”이라고 명사로 즉물적으로 번역하는 것과 달리 박환덕은 “무는 것”이라는 동작을 지칭하여 사물이 주는 객체성, 동물성을 다소 완화한다.

그리고 “Herr”를 “당신”이라 호칭하며 “당신은 세계를 두 개로 갈라놓고 있는 이 싸움을 종결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자칼의 그로테스크하고 패러독스한 호소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데, “Reinheit”를 “청결과 순수성”으로 이중으로 번역한다. 한 번은 피를 마시고 뼈를 먹는 청결과 결부시켜 동물의 행동에 직접 연관을 시키고 다른 한편은 그 행위가 갖는 고차원적 의미로 순수성을 내세우고 있다.


[K]ein Klagegeschrei eines Hammels, den der Araber absticht; ruhig soll alles Getier krepieren; ungestört soll es von uns leergetrunken und bis auf die Knochen gereinigt werden. Reinheit, nichts als Reinheit wollen wir.(134)

모든 짐승들이 편안하게 그들의 목숨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방해당하지 않고 그 피를 마시고, 그 뼈까지도 먹어 치워, 청결과 순수성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순수성 – 오직 순수성만을 우리는 원합니다.(181)


마지막 대화에서 만류하는 “나”에게 아랍인은 “그놈들의 장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상한 동물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183)라고 번역하여 자칼들의 행위를 “장사”로 동물성을 다소 감경하고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영위해 온 대표 직업으로 치환하고 있다. 즉, 박환덕은 전체적으로 동물 이야기를 유대인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다.


3) 이주동 역의 <재칼과 아랍인>(1997)

카프카 전문가인 이주동이 1997년에 옮긴 번역은 박환덕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자칼을 동물에, 대상에 가깝게 번역했다고 할 수 있다. 이주동 번역의 특징은 자칼 집단, 화자, 아랍인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데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공손법이나 호칭을 차이 나게 사용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자칼은 “나와 거의 눈과 눈을 마주대다시피하고”(228) 이야기를 시작하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재칼이오”(228)라고 일단 이방인 화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이방인도 “그런 말을 듣다니 매우 놀랍군요.”라고 동등한 위치에서 대답한다. 자칼은 아랍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런 종족 밑에서 배척당한 것으로 불행은 충분하지 않은가요?”(229)라고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고 동의를 구하는데, 이에 이방인은 “그렇겠지요, 그렇겠지요.”라고 다소 거리를 두며 대답한다.

그러다가 화자가 자칼의 태도 때문에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자칼은 어투를 갑자기 바꾸어 “우리는 불쌍한 동물들입니다.”라고 시작하면서 “호소하던 목소리”로 말한다. “‘주인님’하고 그가 소리쳤고, 모든 재칼들이 울부짖었다.”(231) 자칼은 이방인에게 널리 알려진 자신들의 동물적 습성을 깨끗함, 순수함으로 전도시켜 설명하는데 이주동은 이를 웅변조로 번역한다.


아랍인이 찔러 죽이는 숫양의 비애에 찬 울부짖음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짐승들은 조용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방해받지 않고 우리들에 의해 완전히 비어져야 하고, 뼛속까지 깨끗이 순화되어져야 합니다. 순수함, 우리들은 순수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231) 


아랍인들은 숫양을 죽이는 잔인한 종족이라 비난하고 모든 짐승은 평안히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칼 자기들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그 시체를 먹을 수 있어야 하고 피까지 다 빨아먹는 행위도 순수하다고 자가당착적으로 주장하고 있어 카프카적 낯섦과 즉물성, 패러독스가 두드러진다.

이주동 번역의 흥미로운 부분은 “Herr”라는 어휘의 번역이다. 주지하다시피 “Herr”는 독어로 주인, 지배자, 주님, 하느님, 귀족 등의 영주, 신사 등에 이르기까지 의미가 광범위하다. “Herr, du sollst den Streit beenden, der die Welt entzweit.”(134)에서 자칼이 화자를 부르는 호칭을 이주동은 “주인님”으로 번역해 자칼들과 화자와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수직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방인을 “그대 숭고한 마음과 즐거운 내면의 소유자여”(231)라고 동물성(“달콤한 내장”)을 지우고 추상적으로 해석한다.

아랍인은 “자, 마침내 가위구나. 그리고 그것으로 끝장이겠지!”라는 말로 등장하는데, 그 역시 이방인에게 “Herr”라는 같은 어휘를 사용하는데 “선생”으로 옮겨 이방인과 아랍인을 거의 동등한 위치에 놓는다. “그러니까 선생, 당신 역시 이 연극을 보았고 들었지요. So hast du, Herr, auch dieses Schauspiel gesehen und gehört.”라고 번역하면서 자칼의 한탄과 종족 이야기를 그저 반복되는 연극으로 해석하게 만들어 진정성을 감소시킨다. 아랍인은 자칼의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 어제 죽은 낙타의 사체를 가져와 던져준다. 자칼들은 순수하고 억울한 피해자 종족의 모습이 아니라 동물적 본성을 보여주며 잔인하게 달려들고 이주동은 자칼들을 “그것”으로 일관되게 대상화하며 번역한다. 아랍인이 채찍을 휘두르자 일단 도망쳤다가 다시 사체로 달려드는 자칼은 “그것들”일 뿐이다. “그러자 이미 모두가 같은 일을 하면서 그것들은 시체 위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233) 아랍인을 만류하는 이방인에게 마지막으로 아랍인은 이렇게 말하는데, “Beruf”는 천직으로 옮겨진다.


우리는 그것들이 자신의 천직을 행할 때는 그대로 놓아둡시다. 또한 떠날 시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보았지요. 놀라운 동물들이요. 그렇지 않소? 게다가 우리를 증오하는 모습이란.(233)


4) 김영옥 역의 <자칼과 아랍인>(1998)

이듬해인 1998년에 카프카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한 독문학자 김영옥은 <오드라텍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선집 제목으로 책을 펴냈으며 <자칼과 아랍인>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처음으로 독어 발음식으로 번역하였다.

김영옥은 자칼 한 마리가 다가와 “내 앞으로 나서서 거의 내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다시피”(169)하며 말을 시작했다고 번역하여 화자와 자칼의 관계를 다소 변형시켰다. 즉 자칼이 화자의 주의를 끌려고 함을 강조하면서 “나는 이 일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칼입니다.”(170)라고 “~입니다”체를 사용하여 정중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방인은 이들의 이야기에 대해 “이상하다”고 일관된 반응을 보이며 이를 잘 살려 번역하고 있고, 자칼과 이방인 사이의 이해 거리를 보다 벌린다. 자칼은 “저런 종족들 사이로 추방 되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불행하지 않습니까?”라고 정확하면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한탄에 대해 화자는 자기는 “아주 상관없는 일에 판단을 내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171)다고 거리를 두고 있으며 “어쩌면 피를 봐야 끝날지도 모르죠.”라고 보다 신중한 어투로 개입을 거절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옥은 자칼이 이방인을 향해 “선생, 당신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 싸움을 종결시켜야만 합니다.”(173)라고 요청하게 하고 있으며 이주동이 누락한 피 부분을 넣어 이 자칼들 주장의 모순을 드러낸다.


모든 짐승들이 조용히 죽어가야 합니다. 아무 방해받지 않고 우리들이 그것들의 피를 다 빨아 마시고 그래서 그것들이 뼛속까지 깨끗해지게 해야 합니다. 깨끗함, 우리가 원하는 것은 깨끗함뿐입니다.(173) 


그리고 아랍인은 “자, 드디어 이 가위로 종말을!”(174)이라고 말하며 등장하여 화자를 동등한 위치에서 “자, 선생, 당신은 이제 이 연극도 보고 듣게 되었군요.”(174)라고 말한다. 즉 김영옥은 종교적 색채를 완화시키고 있고 또한 “Herr”를 자칼이나 아랍인이나 일관되게 “선생”으로 옮긴다.

마지막에 낙타를 찢어 먹는 탐욕스러운 자칼 무리의 모습을 묘사할 때 김영옥은 “그것”이라 번역한 이주동과 달리 매번 주어를 “자칼들”이라고 써서 대상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동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화자와 아랍인이 나누는 대화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김영옥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의역이나 2차적 의미화, 상징화, 혹은 종족들 간의 위계화를 배제하며 옮기는 특징이 있다.


천성대로 하라고 놔둡시다. 그리고 출발할 시간도 되었구요. 저들을 보긴 한 거니까요. 대단한 짐승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증오는 또 어떻구요!(176)


5) 홍성광 역의 <재칼과 아랍인>(2010)

홍성광은 <재칼과 아랍인>으로 영어식으로 번역하였다. 홍성광 번역의 특징은 전체적으로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살짝 의역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알다가도 모를 말이야.”, “그런 민족의 압박에 우리가 쫓겨났다는 것이야말로 불행이 아닐까요?”에서 보다시피 자칼의 우두머리가 이방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게 하고 이방인 화자는 이들에게 하대하게 한다. “나는 이 일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재칼입니다.”에 “자네들이 바라는 게 대체 뭔가, 재칼들?”이라고 응대한다.

중간의 사태 전환 후 자칼들은 이방인을 “나리!”(156)라고 부르며 “세상을 두 개로 갈라 놓고 있는 싸움을 끝내야 합니다”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아랍인도 이방인을 “나리”라 부르며 “이것으로 나리도 좋은 구경거리를 보고 들으셨군요.”(157)라고 말하게 한다. “유럽인만 보면 그런 일을 하기에 적격이라고 생각하거든요.”(157), “그들이 끌리는 본성에 맡겨 둡시다”(158) 등에서 보듯 전체적으로 카프카 특유의 낯섦을 유발하는 그로테스크하거나 패러독스한 명사들의 특성은 다소 덜 드러나나 독자들을 위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6) 이준미 역의 <재컬과 아라비아인>(2014)

같은 해에 이준미가 <칼다 기차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카프카 선집을 냈는데 이때 첫번 째에 ‘유순한 동물들’이라는 소제목 하여 카프카의 여러 동물 이야기를 소속시키며 그 중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재칼과 아라비아인>이다.

화자와 재칼과의 관계는 여기에서는 이제까지의 번역들과는 달리 뒤바뀌어 있다. 자칼이 당당하게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재칼이다”(18)라고 하대하며 말을 건네자, 화자가 거꾸로 “그대들, 재칼들은 무엇을 원하는 거지요?”라고 공손하게 묻는다. 전체적으로 이준미는 독자의 가독성을 위하여 카프카의 다소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쉽게 고치고 있지만 부정확한 부분도 꽤 보인다. 예를 들어“우리가 그런 민족 때문에 쫓겨나는 것으로 불행은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19)라고 묻고 있다.

화자가 자칼의 행동을 나무라자 자칼들이 어조와 태도를 급격하게 바꾸어 “우리는 불쌍한 동물들입니다”라고 하소연하기 시작하며 이에 화자는 입장을 바꾸어 “너는 무엇을 원하는 거지?”(21)라고 드러내놓고 하대하기 시작한다. 이때 자칼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싸움을 끝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가위로 아랍인의 목을 끊어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아랍인이 등장하며 이방인을 “당신,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 대화에 자칼들이 시체를 뜯어 먹을 때 이 행동을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사명을 다하도록 놔둡시다”(25)라고 제안하여 “Beruf”를 추상적으로 해석한다.


7) 김태환 역의 <자칼과 아랍인>(2015)

김태환은 제목을 김영옥처럼 <자칼과 아랍인>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다른 역자들보다 원본에 충실하면서도 상징화, 의미화를 배제하며 옮긴다. 화자인 나에게 다가오는 자칼이 “나와 거의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다가왔다고 번역하여 나와 자칼의 사이를 긴장 상태로 몰아가며 자칼의 어투를 “나는 이 넓은 지역을 통들이 가장 나이 많은 자칼일세”라고 자칼 종족의 우두머리로서의 위엄 있는 말투로 반말을 사용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북쪽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것 이외에도 아랍인과 달리 “이성”(169)을 가지고 있으며 자칼들의 불행은 “그런 족속 아래 내몰린 것”에 있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이들의 오랜 분쟁을 “그러니까 아마 핏속에 흐르는 싸움일 테지. 결국 피로써만 끝날 것이고”(170)라고 “피”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또한 의역하지도 않고 일관성이 드러나게 번역한다.

특징적인 부분은 자칼이 분쟁을 종료시켜달라는 부탁을 할 때 다른 번역들과 달리 어투를 바꾸지 않고 있으며 화자를 “신사 양반”이라고 불러 종교적 색채를 없애고 있다. “세계를 분열시키는 이 분쟁을 종식시켜 주게나”(171)라고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요청으로 번역한다. 자칼들의 자기변명을 김태환은 “모든 짐승들이 평온하게 죽어가야지. 아무 방해 없이 우리가 그것들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뼈까지 깨끗이 해치워야 해. 깨끗함. 우리가 원하는 건 깨끗함뿐이니까”(172)로 해석해서 일관되게 종교적이나 정치적인 해석을 배제하며 “Reinheit”의 개념을 실제 시체를 먹는 행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며 번역하고 있다.

아랍인도 역시 화자를 “신사 양반”이라고 부르게 하고 있으며 “당신도 이 연극을 보고 들었군.”(172)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아랍인이 던져준 낙타 사체에 달려든 자칼 떼들을 “그들”이라고 일관되게 동물들로 옮긴다. 자칼 떼들이 사체에 달라붙어 움찔거리는 장면을 자칼들의 동물성의 절정으로 옮기고 “녀석”이라고까지 부른다. 화자와 아랍인의 마지막 대화 장면에서는 “Beruf”를 “저들이 제 일을 하게 내버려두지.”라고 만류하며 “당신도 녀석들을 봤지. 정말 멋진 장면이 아닌가? 녀석들이 우리는 또 어찌나 미워하는지!”라고 끝맺는다.


8) 박병덕 역의 <자칼과 아랍인>(2020)

박병덕의 <자칼과 아랍인>은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본들 중 하나로서 독자들에게 이제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여러 지점의 크고 작은 의문을 풀어준다. 예를 들어 자칼이 아랍인은 오성이 없다는 점을 비난하기 위해 한 말을 “그자들은 동물들을 잡아먹기 위해 죽이지만 동물들의 시체는 경멸하지요.”(273)라고 번역하여 아랍인의 모순과 연결시킨다. 이전의 번역들이 “그들은 처먹기 위해 짐승을 죽이고 짐승의 시체를 모독하지” 등으로 애매모호하게 한 부분들을 깔끔하게 수정한다. 자칼의 자기 정체성 옹호가 가진 패러독스를 다음처럼 번역한다.


모든 짐승은 조용히 죽어야 합니다.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우리에 의해 완전히 비워져야 하고, 뼛속까지 깨끗이 순화되어야 합니다. 순수함, 순수함 이외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276)


그리고 “Herr”를 “주인님”으로 호명함으로써 거의 주님에 가까운 의미로 번역하고 있으며, 또한 모계로 이어지는 유대인에게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수많은 증조, 고조 어머니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지위에까지 올라간다. 아랍인은 “선생”으로 호칭을 번역하여 두 그룹 간에 차이를 둔다.


9) 편영수 역의 <자칼과 아랍인>(2020)

<자칼과 아랍인>은 창비세계문학의 한 권으로 <변신· 단식광대>라는 제명으로 편영수 임홍배 공역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작품은 편영수가 번역하였다. 편영수는 세 집단을 거의 동등한 관계에서 번역하고 있으나 자칼이 다소 높은 위치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칼일세.”(176)의 투로 말을 걸며, 이방인은 “그런 말을 듣다니 정말 놀랍소.”(177)라는 투로 거의 동등하나 다소 공손하게 대답한다. 중간 이후 “선생님”이라 부르며 부탁을 한 이후로는 자칼의 말투는 깍듯이 공손한 어투로 바뀐다. 특히 자칼의 자기 호소는 가장 정확하게 패러독스하게 번역이 되고 있다. 이규영의 최초 번역 이외에는 모두 “뼈까지” 깨끗해져야 한다고 옮겼었으나 편영수에 와서는 “뼈만 남기고”로 옳게 번역된다.


모든 짐승은 조용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그 시체들의 피를 모두 빨아 마시고, 깨끗하게 뼈만 남겨야 합니다. 깨끗함, 우리가 원하는 것은 깨끗함일뿐입니다.(179)


그럼으로써 자칼이라는 동물 비유담이 갖는 유대적 해석과 반유대적 해석을 동시에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자칼들이 낙타 사체에 달려들 때 자칼의 몸이 펌프처럼 경련을 일으키는데 이를 낙타로 번역하여 자칼의 동물성과 관련된 부분을 오인하고 있다. 이어 아랍인은 “그러니까 선생님, 당신은 이제 이 연극도 보고 듣게 됐군요.”(180)의 투로 이방인에게 말을 하며 자칼과 아랍인 모두 이방인을 “선생님 Herr”으로 호칭하며 “습성대로 하도록 내버려둡시다”(181)라고 제안한다.


3. 평가와 전망

<자칼과 아랍인>은 최근에 와서 자주 번역되는 카프카 작품에 속하고 카프카 선집에 자주 포함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번역된 빈도수에 비하면 연구논문이나 개별적인 역자주는 두세 편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작품 이해가 깊어지고 풍부해짐에 따라 번역도 이를 반영하여 심화되고 풍부해진다. 이 작품은 다의적이거나 난해한 부분이 점차 해명되고 있지만, 그 많은 번역 횟수에 비해 획기적인 변화나 번역본들 사이의 큰 차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는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을 담은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규영(1977): 쟈컬과 아라비아인. 풍림출판사.
박환덕(1986): 승냥이와 아랍인. 어문각.
이주동(1997): 재칼과 아랍인. 솔출판사.
김영옥(1998): 자칼과 아랍인. 문지사.
홍성광(2010): 재칼과 아랍인. 열린책들.
이준미(2014): 재컬과 아라비아인. 하늘연못.
김태환(2015): 자칼과 아랍인. 을유문화사.
박병덕(2020): 자칼과 아랍인. 현대문학.
편영수(2020): 자칼과 아랍인. 창비.


최윤영


  • 각주
  1. Kafka, Franz(1987): Sämtliche Erzählungen. Herausgegeben von Paul Raabe, Frankfurt a. M.: Fischer. 이하에서는 위에서처럼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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