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Der Zauberberg)"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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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 <!--작품소개--> | {{A01}} <!--작품소개--> | ||
− | 1924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장편 교양소설이다. 독일 시민 문화의 문제와 대결한 | + | 1924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장편 교양소설이다. 독일 시민 문화의 문제와 대결한 걸작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독일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조선공학을 전공한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평범한 청년이 알프스 산중의 요양원에 있는 사촌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폐 질환 진단을 받고 7년을 보낸다. 그는 정상적 삶에서 단절된 요양원이라는 실험적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만나면서,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치열한 사상 대결을 곁에서 지켜보고, 병과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하며 정신적 성숙의 과정을 밟아간다. 소설은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한스 카스토르프가 7년 만에 요양원을 나와 자원입대하여 전쟁의 포화 속에 뛰어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독일 시민 문화의 종언을 암시한다. 국내에서는 1970년에 이효상의 번역으로 처음 출간되었다(동아출판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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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2}}<!--초판 정보--> | {{A02}}<!--초판 정보--> | ||
− | Mann, Thomas(1924): Der Zauberberg. Berlin: Fischer. | + | Mann, Thomas(1924): Der Zauberberg. Berlin: S. Fis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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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 魔의 山 || 魔의 산 || (컬러版) 世界의 文學大全集 22 || 토마스 만 || 李孝祥(이효상) || 1970 || 同和出版社 || 15-728 || 완역 || 완역 || 초판, 1978년 중판 | + | | 1 || 魔의 山 || 魔의 산 || (컬러版)世界의 文學大全集 22 || 토마스 만 || 李孝祥(이효상) || 1970 || 同和出版社 || 15-728 || 완역 || 완역 || 초판, 1978년 중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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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魔의 山 || 魔의 山 || || 토마스 만 || 郭福祿(곽복록) || 1975 || 文學出版社 || 11-427 || 편역 || 편역 || | | 2 || 魔의 山 || 魔의 山 || || 토마스 만 || 郭福祿(곽복록) || 1975 || 文學出版社 || 11-427 || 편역 || 편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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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 || 마의 산 || 魔의 山 || Great Books 69 || 토마스 만 || 郭福祿(곽복록) || 1976 || 東西文化社 || 7-984 || 완역 || 완역 || | + | | <div id="곽복록(1976)" />[[#곽복록(1976)R|3]] |
+ | || 마의 산 || 魔의 山 || Great Books 69 || 토마스 만 || 郭福祿(곽복록) || 1976 || 東西文化社 || 7-984 || 완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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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世界文學全集 41 || 만 || 郭福祿(곽복록) || 1978 || 東西文化社 || 7-464 || 편역 || 완역 || | | 4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世界文學全集 41 || 만 || 郭福祿(곽복록) || 1978 || 東西文化社 || 7-464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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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三中堂文庫 473 || 토마스만 || 郭福祿(곽복록) || 1981 || 三中堂 || 5-405 || 편역 || 완역 || | | 8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三中堂文庫 473 || 토마스만 || 郭福祿(곽복록) || 1981 || 三中堂 || 5-405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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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9 || 마의 산 || 魔의 山 (Ⅱ), 短篇選 || (愛藏版) 世界文學大全集 96 || 만 || 洪京鎬(홍경호) || 1983 || 금성출판사 || 5-349 || 편역 || 완역 || 2권에는 단편선이 함께 수록되어 있음 | + | | 9 || 마의 산 || 魔의 山 (Ⅱ), 短篇選 ||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 96 || 만 || 洪京鎬(홍경호) || 1983 || 금성출판사 || 5-349 || 편역 || 완역 || 2권에는 단편선이 함께 수록되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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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0 || 마의 산 || 魔의 山 (Ⅰ) || (愛藏版) 世界文學大全集 95 || 만 || 洪京鎬(홍경호) || 1983 || 금성출판사 || 4-453 || 편역 || 완역 || | + | | 10 || 마의 산 || 魔의 山 (Ⅰ) ||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 95 || 만 || 洪京鎬(홍경호) || 1983 || 금성출판사 || 4-453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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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Great books 36 || 만 || 郭福祿(곽복록) || 1983 || 學園出版公社 || 7-464 || 편역 || 완역 || | | 11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Great books 36 || 만 || 郭福祿(곽복록) || 1983 || 學園出版公社 || 7-464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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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魔의 山 || 魔의 山 Ⅱ || Great books 37 || 만 || 郭福祿(곽복록) || 1983 || 學園出版公社 || 465-984 || 편역 || 완역 || | | 12 || 魔의 山 || 魔의 山 Ⅱ || Great books 37 || 만 || 郭福祿(곽복록) || 1983 || 學園出版公社 || 465-984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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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3 || 마의 산 || 마의 산 (상)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8 || 토마스 만 || 홍경호 || 1987 || 汎友社 || 11-392 || 편역 || 완역 || | + | | 13 || 마의 산 || 마의 산 || (가정판)세계문학전집 || 토마스 만 || 황오현 || 1984 || 영 || 7-310 || 편역 || 편역 || 편역자가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지만 원작의 머리말이 생략되고, 원작의 분량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므로 편역이라 표기함 |
+ | |- | ||
+ | | 14 || 마의 산 || 마의 산 || 동서세계문학전집 22 || 만 || 곽복록 || 1987 || 동서문화사 || 11-600 || 완역 || 완역 || | ||
+ | |- | ||
+ | | 15 || 마의 산 || 마의 산 (상)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8 || 토마스 만 || 홍경호 || 1987 || 汎友社 || 11-392 || 편역 || 완역 || | ||
+ | |- | ||
+ | | 16 || 마의 산 || 마의 산 (하)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9 || 토마스 만 || 홍경호 || 1987 || 汎友社 || 11-446 || 편역 || 완역 || | ||
+ | |- | ||
+ | | 17 || 마의 산 || 마의 산 || 우리시대의 세계문학 22 || 만 || 곽복록 || 1988 || 계몽사 || 3-452 || 완역 || 완역 || | ||
+ | |- | ||
+ | | 18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81 || 토마스 만 || 洪京鎬(홍경호) || 1990 || 金星出版社 || 5-514 || 편역 || 완역 || 초판, 1993년 중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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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 || 마의 산 || 마(魔)의 산 Ⅰ || 世界名作 100選 59 || 토마스 만 || 오계숙 || 1990 || 일신서적출판사 || 7-406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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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0 || 마(魔)의 산 || 마(魔)의 산 Ⅱ || 世界名作 100選 60 || 토마스 만 || 오계숙 || 1990 || 일신서적출판사 || 5-455 || 편역 || 완역 || |
|- | |- | ||
− | | | + | | 21 || 마의 산 || 魔의 山 Ⅱ, 短篇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82 || 토마스 만 || 洪京鎬(홍경호) || 1990 || 金星出版社 || 5-394 || 편역 || 완역 || 초판, 1993년 중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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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2 || 마의 산 || 마의 산 Ⅰ || Hong Shin Elite Book's 81 || 토마스 만 || 최호 || 1994 || 홍신문화사 || 9-401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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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3 || 마의 산 || 마의 산 1 || 우리시대의 세계문학 13 || 만 || 곽복록 || 1994 || 계몽사 || 9-314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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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4 || 마의 산 || 마의 산 Ⅱ || Hong Shin Elite Book's 82 || 토마스 만 || 최호 || 1994 || 홍신문화사 || 11-469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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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5 || 마의 산 || 마의 산2, 묘지로 가는 길, 토니오 크뢰거 || 우리시대의 세계문학 14 || 만 || 곽복록 || 1994 || 계몽사 || 9-230 || 편역 || 완역 || |
|- | |- | ||
− | | | + | | 26 || 마의 산 || 마의 산 1 || 밀레니엄북스 52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05 || 신원문화사 || 7-677 || 편역 || 완역 || 초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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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7 || 마의 산 || 마의 산 2 || 밀레니엄북스 53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06 || 신원문화사 || 7-748 || 편역 || 완역 || 초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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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8 || 마의 산 || 마의 산 || 세계문학 93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07 || 동서문화사 || 11-917 || 완역 || 완역 || 판권기에 중판이라 적혀 있지만 초판이라 밝힌 1978년판의 개정판에 가까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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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29 || 마의 산 || 마의 산 ||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309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08 || 지식을만드는지식 || 39-130 || 발췌역 || 편역 ||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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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0 || 마의 산 || 마의 산 (상) || 을유세계문학전집 1 || 토마스 만 || 홍성광 || 2008 || 을유문화사 || 9-660 || 편역 || 완역 || 마의 산 (하)권에 판본 소개와 함께 저본 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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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1 || 마의 산 || 마의 산 (하) || 을유세계문학전집 2 || 토마스 만 || 홍성광 || 2008 || 을유문화사 || 9-732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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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2 || 마의 산 ||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09 || 누멘 || 92-94 || 편역 || 편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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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3 || 마의 산 || 마의 산 ||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2 || 지식을만드는지식 || 41-132 || 발췌역 || 편역 ||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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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4 || 마의 산 || (중학생이 보는) 마의 산 1 ||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113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2 || 신원문화사 || 10-628 || 편역 || 완역 || 아동청소년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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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5 || 마의 산 || (중학생이 보는) 마의 산 2 ||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114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2 || 신원문화사 || 10-697 || 편역 || 완역 || 아동청소년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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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6 || 마법의 산 || 마법의 산 (상) || || 토마스 만 || 원당희 || 2013 || 세창미디어 || 31-604 || 편역 || 완역 || 토마스 만의 「프린스턴 대학생을 위한 《마법의 산》 입문」이 "저자 해설"로 번역되어 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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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7 || 마법의 산 || 마법의 산 (하) || || 토마스 만 || 원당희 || 2013 || 세창미디어 || 9-660 || 편역 || 완역 || 동일 역자의 번역서 <마법의 산 (상)>에 토마스 만의 「프린스턴 대학생을 위한 《마법의 산》 입문」이 "저자 해설" 번역되어 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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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8 || 마의 산 || 마의 산 ||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큰글씨책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41-132 || 편역 || 편역 || 큰글씨책,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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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39 || 마의 산 || 마의 산 (상) || 열린책들 세계문학 217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열린책들 || 9-489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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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40 || 마의 산 || 마의 산 (중) || 열린책들 세계문학 218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열린책들 || 7-483 || 편역 || 완역 || |
|- | |- | ||
− | | | + | | 41 || 마의 산 || 마의 산 (하) || 열린책들 세계문학 219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열린책들 || 7-453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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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42 || 마의 산 || 마의 산 Ⅰ || 세계문학전집 95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7 || 동서문화사 || 13-432 || 편역 || 완역 || 동서문화사 창업 60주년 특별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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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43 || 마의 산 || 마의 산 Ⅱ || 세계문학전집 96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7 || 동서문화사 || 433-898 || 편역 || 완역 || 동서문화사 창업 60주년 특별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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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44 || 마의 산 || 마의 산 Ⅰ || World book 274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8 || 동서문화사 || 13-432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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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45 || 마의 산 || (원서발췌) 마의 산 ||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8 || 지식을만드는지식 || 1-98 || 편역 || 편역 ||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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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46 || 마의 산 || (원서발췌) 마의 산 ||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8 || 지식을만드는지식 || 1-98 || 편역 || 편역 || 큰글씨책,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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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47 || 마의 산 || 마의 산 Ⅱ || World book 275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8 || 동서문화사 || 433-898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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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04}}<!--번역비평--> | + | |
+ | {{A04+}}<!--번역비평--> | ||
+ | '''1. 번역 현황 및 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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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마스 만은 비단 독일의 한 소설가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말에 그 뿌리를 두고 20세기 전반(前半) 너머까지 활약한 세계 산문문학의 최고봉이다. | ||
+ | 따라서, 이 작가를 이해하려면 서구 소설사 전체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독일어와 문화적 간극이 커서, 문화전이(文化轉移)를 고려한 상응어를 찾기가 쉽지 않은 한국어로 이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려면, 서구어권 역자보다 훨씬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임은 명백하다. | ||
+ | 토마스 만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 <마의 산>이야 말로 그 분량으로 보나, 그 반어적 문체와 복잡하고도 미묘한 세계사적 함의로 보나,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실로 지난(至難)한 작업이다. | ||
+ |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우리말로 완역한 역자가 이효상으로부터 윤순식에 이르기까지 도합 8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이들의 끈기, 분투 그리고 성취가 찬탄과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 ||
+ | 최초의 우리말 완역본을 낸 사람은 1930년에 동경제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대구 교남(嶠南)학교(현 대륜고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52년에 경북대 교수가 된 한솔 이효상(李孝祥, 1906년생)이다. 1970년에 동화출판사에서 낸 <魔의 山>이 우리나라 초역본인데, 당시 그는 이미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독문학자였던 그의 번역본은 거의 수용되지 않았으며, 현재는 유감스럽게도 책이 절판되어 필자로서는 구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번역판 <붓덴브루크 一家>(을유문화사, 1960)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일본어 번역을 참고한 흔적이 더러 눈에 띄었고, 독일 현지 사정에 어두운 기상천외한 번역(예: Mengstraße (in Lübeck) -> (대구의) 중앙통)도 있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지금은 웬만한 독문학도는 다 알다시피, ‘멩슈트라세’는 뤼벡의 ‘중앙통’이라 할 만큼 중심가가 아니다. 그의 번역작품 <魔의 山>도 아마 이와 유사한 번역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 ||
+ | 전 경북대 이효상 교수가 번역한 <魔의 山>이 제대로 수용되지 못한 데에는 정치가로서의 그의 여러 극적인 행보도 한몫했겠지만, 실은 이 책보다 6년 늦게 나온 서강대 독문과의 곽복록(郭福祿) 교수의 <魔의 山>(東西文化社, 상, 하 2권, 1976)이 중앙 독문학계 및 출판계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된 영향도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곽복록 교수는 미국 및 독일 유학생 출신으로서 한국 독문학자 최초의 독일 박사로서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가 곧이어서 서강대 독문과 창건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효상의 번역이 거의 수용되지 못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 ||
+ | 곽복록의 <魔의 山> 이후에도 홍경호(洪京鎬)의 <魔의 山>(I, II권, 金星出版社, 1983), 오계숙의 <魔의 山>(I, II권, 일신서적, 1990), 최호의 <마의 산>(I, II권, 홍신문화사, 1994), 홍성광의 <마의 산>(상, 하권, 을유문화사, 2008), 원당희의 <마법의 산>(상, 하권, 세창미디어, 2013), 윤순식(尹順植)의 <마의 산>(상, 중, 하권, 열린책들, 2014) 등 모두 6종의 완역이 더 출간되었다. | ||
+ | 필자가 과문한 까닭이겠지만, 평소에 오계숙과 최호라는 독문학도의 이름을 듣지 못했거니와 그들의 역서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곽복록, 홍경호, 홍성광, 원당희, 윤순식 등 5종의 완역본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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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실제 번역의 예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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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면, 이하에서 이들 번역의 실례(實例)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작품의 제목 번역에 관해서부터 말해 보자면, 도합 8명의 역자 중 7명은 <마의 산>이라 번역했고, 원당희만 <마법의 산>이라고 번역했다. | ||
+ | 원당희의 말대로, “마(魔)는 악마라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아서”(역자 해설), <마의 산>이 틀린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Zauberflöte”가 ‘마적(魔笛)’이나 ‘마술 피리’로 번역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Zauberberg”는 <마의 산>으로 얼마든지 번역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이 작품에서도 ‘Satana’나 ‘Rhadamanth’ 등 ‘악마’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들도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 요양원에서의 악마의 존재 여부나 ‘폐쇄 공간’인 요양원에서 겪는 주인공의 ‘연금술적 고양’ 등 때문에 <마법의 산>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고, 둘 다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 ||
+ | 그렇지만, 도합 8명의 번역 중 유독 작품 제목을 <마법의 산>으로 새로이 번역하고자 시도했고, 또 그럼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역자 원당희의 창의성은 한결 돋보인다. | ||
+ | 그러면, 이하에서는 번역의 실제 예들을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 ||
+ | |||
+ | <b>1) 눈(雪)의 장(章)의 한 대목</b> | ||
+ | |||
+ | Oh, so ist es deutlich geträumt und gut regiert! Ich will dran denken. Ich will dem Tode Treue halten in meinem Herzen, doch mich hell erinnern, daß Treue zum Tode und Gewesenen nur Bosheit und finstere Wollust und Menschenfeindschaft ist, bestimmt sie unser Denken und Regieren. Der Mensch soll um der Güte und Liebe willen dem Tode keine Herrschaft einräumen über seine Gedanken. Und damit wach’ ich auf ... Denn damit hab‘ ich zu Ende geträumt und recht zum Ziele. | ||
+ | |||
+ | 우선, 상호 비교가 가능하게 하려고, 필자가 위 독문의 – ‘모범 번역’을 시도한 것이 아니고 – 대강의 의미를 ‘해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
+ | |||
+ | 아, 이렇게 나는 분명히 꿈을 꾸었고 이 꿈이 귀착할 방향을 잘 이끌었다! 이 결과를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 가슴 속에서는 나는 죽음에 대하여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 하지만, 만약 이 변치 않는 마음이 우리의 사고와 행위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런 절의(節義)는 단지 악의와 음험한 쾌락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적대적 태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싶다. 인간은 인애(仁愛)와 사랑을 위해서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죽음한테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이 깨달음과 더불어 이제 난 깨어난다....... 이것으로 난 꿈을 다 꾸었고 내가 지향해 온 바로 그 지점에 이제 난 도달한 것이니까 말이다. | ||
+ | |||
+ | [[#곽복록(1976)|곽복록]]<span id="곽복록(1976)R" />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 ||
+ | |||
+ | […] 나는 이처럼 확실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한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마음속으로 죽음에 성실한 생각을 계속 가지도록 하자. 그러나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탕함과 반인간성으로 바뀐다는 것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죽음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마지막까지 다 꾸고 목적을 이룬 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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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술래잡기’라는 번역이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설원(雪原)에 쓰러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마치 꿈속에서처럼 자신의 사고를 한쪽 방향으로 이끌어 온 그 과정을 곽복록은 어인 까닭인지 ‘술래잡기’로 옮기고 있다. 한스 카스토르프의 꿈속에서의 성찰과 그 지향적 노력에 약간의 반어성이 실려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가 이렇게 번역하게 된 원인과 그의 의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regieren’이란 단어와는 너무 먼 거리가 있어서, 원문의 내용과 형식이 뒤바뀐 오역, 즉 주객이 전도된 오역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하이제(Joh. Christ. Aug. Heyse)의 <외래어사전>(Fremdwörterbuch, 1897)에서 ‘regieren’을 찾아보면, ‘다스리다’와 ‘통치하다’라는 오늘날의 일반적 의미 이외에도, ‘lenken ((방향을) 설정하다, 돌리다)’, ‘leiten (인도하다)’, ‘steuern (조종하다)’ 등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숨바꼭질하다’라는 의미는 없다!), 대개 이런 의미로 해석을 해서 그때그때마다 문맥에 맞게 다시 잘 옮기는 것이 역자의 몫이라 하겠다. 주인공이 ‘꿈속에서 자기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서’, 꿈을 깨기 직전에는 그가 ‘지향해 오던’ ‘바로 그 지점(recht zum Ziele)’에 도달한 것으로 번역해야 할 것인데, 무슨 ‘술래잡기’를 하다가 ‘목적 지점’에 도착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싶다. | ||
+ | 또한, ‘Treue zum Tode und Gewesenen’을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성’이라 번역했는데, 이것은 독일 정신의 낭만주의적 전통, 즉 이 문맥에서는 ‘죽음에의 공감(Sympathie mit dem To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Treue’는 여기서 죽음과 과거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 ‘충성심’ 또는 ‘절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실성’이란 번역은 그 본래의 뜻에 무난하게 다가간 것이기는 하다. 물론, 남자한테는 ‘절개’라는 표현이 맞지 않고 ‘충성심’은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수반할 수 있기에, ‘성실성’으로 낙착된 데에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아주 흡족한 번역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좀 미흡하다. 여기서, 이런 사소한 미흡성을 굳이 지적하는 이유는, 이 번역이 아래의 네 역자가 다 따를 만큼 그렇게도 유일한 대안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아래에서 금방 다시 언급하겠다. | ||
+ |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작품 <마의 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문장으로 알려진 “Der Mensch soll um der Güte und Liebe willen dem Tode keine Herrschaft einräumen über seine Gedanken.”의 번역인데, 곽복록은 이 문장을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죽음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Güte’를 ‘착한 마음씨’로 번역한 것은 그 의미에 가까이 가긴 갔으되, 그 의미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Güte und Liebe’ 앞에 정관사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두 명사가 거의 동의어로 쓰였음을 의미한다. 만약 ‘Güte’가 없이 그냥 ‘um der Liebe willen’이라고만 되어 있다면, 남녀 간의 ‘사랑’인지 인간애적 ‘사랑’인지 확실히 분간되지 않을 우려가 있는 까닭에, 여기서는 후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Güte’를 보충해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Güte’는 ‘인애(仁愛)’, 또는 ‘자애(慈愛)’ 등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의어로 옮겨야 마땅하다. 실제로도 ‘Güte’라는 단어는 ‘선(善)’, 또는 ‘선의(善意)’라기보다는 ‘사랑’이란 의미 범주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사소한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 인간이 이미 지니고 있는 이런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 이런 인간에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우리 인간은 자기 사고를 죽음에다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전체 콘텍스트에 더 맞을 것이다. | ||
+ | 이상에서 곽복록의 번역에 대한 사소한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번역이 무슨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이효상 번역을 제외하면(곽복록이 이효상 번역을 참고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만큼), 이 번역이 우리말 번역의 ‘제2의 초역’이라 할만한데, 그런 번역 치고는 대체로 맥을 잘 짚어낸 수준급 번역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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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면, 이제부터는 홍경호, 홍성광, 원당희, 윤순식의 번역을 살펴보기로 하자. | ||
+ | 아, 정말로 나는 확실하게 꿈을 꾸고, 멋진 ‘술래잡기’를 했다.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죽음에 대한 성실한 생각을 한시도 잊지 말자. 그러나 만일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결정지으려고 한다면, 그 성실은 음탕하고 반인간적으로 바뀐다는 사실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선의와 사랑을 위해서 그 사고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양도해서는 안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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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 이제 눈을 떠라....... 이것으로 내 꿈은 끝나고,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홍경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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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이렇게 나는 선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죽음을 성실하게 대하겠지만,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기로 하자.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홍성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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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이 얼마나 명료한 꿈을 꾼 것이고 훌륭하게 술래잡기를 한 것인가! 나는 이 점을 잊지 않겠다. 가슴으로는 죽음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취하겠지만,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사유와 술래잡기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악의와 음침한 육욕, 인간 적대성이 된다는 것을 명료하게 기억할 것이다. 인간은 선량함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이것으로 나는 깨어나야겠다. 이것으로 나는 마지막까지 꿈을 꾸면서 제대로 목적을 이루었으니 말이다.(원당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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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이렇게 나는 분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나는 이것을 늘 생각할 것이다. 마음속으로 죽음에 대해 늘 성실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뀐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선(善)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내 꿈은 끝났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기 때문이다.(윤순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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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4종의 역문을 살펴보자면, 곽복록의 ‘술래잡기’라는 ‘문제의 번역’이 그대로 차용되고 있고,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 또는 ‘성실성’도 대체로 그냥 답습되고 있으며, ‘착한 마음씨’와 사랑, ‘선의’와 사랑, ‘선량함’과 사랑, ‘선’과 사랑도 거의 그대로다. 문장이 약간 현대화된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듯이, ‘regieren’, ‘Treue’ 그리고 ‘Güte’에 대한 새 역자로서의 새로운 해석 시도라곤 찾아볼 수 없다. ‘regieren’이 어찌 4명의 역자에 의해 한결같이 ‘술래잡기’로 번역될 수 있단 말인가? ‘Treue’라는 단어의 근원적 뜻이 ‘충성심’이나 ‘절개’, 또는 ‘절의’인데, 어째서 4명의 역자가 한결같이 ‘성실성’이나 ‘성실’에 머무르고 있는가? ‘성실’이란 단어는 원래 ‘참’과 ‘진실’에 가까운 말이다. ‘성실’이 ‘충성’이나 ‘절개’를 이렇게도 유일하게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Güte’의 일반적 의미가 ‘선(善)’이 아니라 ‘자애’ 또는 ‘후의(厚意)’인데, 무슨 연유로 아무도 이런 의미로 해석을 시도해 보지도 않았는가? 아무튼, 위 4종의 번역본 모두가 곽복록 번역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보다 창의적 번역으로 과감히 나아간 흔적을 보이지 않음은 심히 유감스럽다. | ||
+ |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홍성광과 원당희가 주인공의 핵심적 깨달음을 이탤릭체로 강조한 작가의 뜻을 별도로 표시하지 않은 것도 소홀함이며, 홍경호가 마지막에 갑자기 문단을 바꾸고 있는 것도 소홀함을 넘어 자의적 번역 행태이다. 홍성광과 윤순식이 “인간은 […]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죽음에다 “넘겨주어서는” 내지는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옮긴 것은 동사 ‘einräumen’을 ‘종속시키다’, ‘양도하다’, ‘양보하다’로 해석한 것보다 더 나은 번역으로 생각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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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2) 탕아(蕩兒) 모티프의 번역</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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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hn, Behrens, betreffend, so trage er keinem was nach, er halte die Arme väterlich geöffnet und sei bereit, ein Kalb für den Ausreißer zu schlachten. | ||
+ | (베렌스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는 누구한테도 꽁한 마음 같은 걸 오래 품지 않는 사람이며, 집 나갔다 돌아온 자식의 아버지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아들을 위해 송아지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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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면, 곽복록의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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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는 아버지처럼 두 팔을 벌려, 송아지를 요리해서 탈주병을 맞이하겠습니다.”(곽복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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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곽복록이 간접화법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직접화법으로 옮긴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누구한테도 꽁한 마음 같은 걸 오래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라는 원문을 빠트리고, 옮기지 않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또한, ‘Ausreißer’를 ‘탈주병’으로 약간 반어적으로 번역한 것도 결과적으로 문제가 없지 않다. 즉, 여기서 ‘탈주병’이란 베렌스 자기가 원장으로 관리하고 있는 요양원 울타리를 벗어나 평지의 근무처로 복귀했던 장교 요아힘의 과감한 ‘퇴원’을 가리키는 말인데, 장교인 요아힘이 ‘병(兵)’도 아니거니와, 유명한 ‘탕아 에피소드’에서의 ‘집 나간 자식’을 가리키므로, 굳이 ‘탈주병’이라는 반어적 번역을 할 필요 없이, 그냥 ‘집 나간 자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임은 자명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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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면, 이제 다른 네 사람의 번역을 살펴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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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아버지처럼 두 팔을 벌려, 송아지를 잡아서 탈주병을 환대하겠습니다.”(홍경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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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렌스 자신은 아무런 유감이 없으며, 아버지의 심정으로 두 팔을 벌려 탈영병에게 송아지라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홍성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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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렌스 자신에 관한 한 그 누구에게도 유감이 없으며, 자신은 아버지처럼 두 팔을 벌려 탈영병에게 송아지라도 한 마리 잡아서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원당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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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는 아무런 유감이 없으며, 아버지의 심정으로 두 팔 벌려 탈영병에게 송아지라도 잡아 환대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윤순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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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데, 곽복록 이후의 네 역자가 모두 ‘탈주병’, 혹은 약간 현대화해서 ‘탈영병’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런 번역은, 요아힘이 군인이기 때문에, 마치 그가 군대에서 탈주, 또는 탈영해서 요양원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잘못 인식될 소지까지 남긴다. 네 역자가 다 굳이 이렇게까지 곽복록의 ‘탈주병’이란 번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껏해야 ‘탈주병’을 ‘탈영병’ 정도로만 바꾸고 있는 것은 참으로 보기 답답하다. | ||
+ | 곽복록이 빠트린 대목, 즉 ‘er trage keinem was nach’를 제대로 찾아 번역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홍경호는 ‘누구에게나 똑 같이’라는 잘못 짚은 번역을 하고 있으며, 베렌스 자기가 ‘누구한테도 뒤끝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홍성광과 윤순식은 엄연한 하나의 문장을 ‘아무런 유감없이’라는 아리송한 부사구로 대체하고 있고, 원당희는 ‘누구에게도 유감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원문에 조금 더 다가가기는 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곽복록이 번역을 하다가 하필이면 빠트린 부분에서 넷 다 원문의 의미를 –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 잘못짚고 있다. 좀 심한 말이 되겠지만, 만약 곽복록의 번역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들 후속 역자들은 이 작품 번역에서 다른 대목에서도 많은 오역을 내었으리라는 추측까지 가능할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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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3) 마지막 문단의 번역</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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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hr wohl! - du lebest nun oder bleibest! Deine Aussichten sind schlecht; das arge Tanzvergnügen, worein du gerissen bist, dauert noch manches Sündjährchen, und wir möchten nicht hoch wetten, daß du davonkommst. Ehrlich gestanden, lassen wir ziemlich unbekümmert die Frage offen. Abentuerer im Fleische und Geist, die deine Einfachheit stergerten, ließen dich im Geist überleben, was du im Fleichsche wohl kaum überleben sollst. Augenblicke kamen, wo dir aus Tod und Körperunzucht ahnungsvoll und regierungsweis ein Traum von Liebe erwuchs. Wird auch aus diesem Weltfest des Todes, auch aus der schlimmen Fieberbrunst, die rings den regnerischen Abendhimmel entzündet, einmal die Liebe steigen? | ||
+ | (이제 네가 살든지, 혹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냥 머물든지 간에, 아무튼 잘 가거라! 너의 전망은 좋지 않구나. 네가 휩쓸려 들어간 그 사악한 춤판은 아직도 몇 해 더 지속되면서 계속 죄악의 춤을 출 텐데, 우리는 네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데에 내기를 크게 걸고 싶지 않단다.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는 그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미결인 채 남겨두고자 한다. 네 단순성을 고양시켜 준 육체적, 정신적 모험들로 인하여 너는 정신적으로는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마도 너는 그 살아남은 정신을 네 육체 속에 계속 품고 있을 수는 없을 듯하구나. 예감에 차서 방향을 모색하다 보니 육체의 음란성과 죽음에 관한 너의 체험으로부터 사랑에 관한 어떤 꿈이 네게서 피어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이 ‘죽음의 세계적 잔치’로부터도, 비 오는 저녁 하늘 주위를 훤하게 불타오르게 하는 이 지독한 열병과도 같은 포화(砲火)로부터도, 언젠가는 그런 사랑이 피어오를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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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선, 곽복록의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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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 자네가 살아 있든, 또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사라지든 이것으로 작별이다. 자네의 앞길은 결코 밝지는 않다. 자네가 말려들어간 사악한 무도(舞蹈)는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그 죄 많은 춤을 계속 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그 의문은 의문으로 남겨둘 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겠다. 자네가 겪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자네를 더욱 단순하게 만들어서, 자네의 육체로는 이처럼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을 정신의 세계에서 오래 살게 해주었던 것이다, 자네는 ‘술래잡기’로 죽음과 육체의 방종 속에서 예감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꿈이 탄생하는 순간을 겪었다. 이 세계를 덮는 죽음의 향연 속에서, 비 내리는 밤하늘을 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 같은 불길 속에서, 그러한 것들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태어날 것인가?(곽복록) | ||
+ | |||
+ | 위 곽복록의 번역을 고찰하자면, 또 ‘술래잡기’가 등장한 것은 그만 논외로 치더라도, 한스 카스토르프가 겪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이 그를 ‘더욱 단순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큰 오역이다. 이것은 주인공의 육체적, 정신적 모험이 그의 ‘단순성을 [정신적으로] 고양시켜 주었다’는 의미로 옮겨야, 이 소설 전체의 ‘교양소설적 구조’(설령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전통적 교양소설에 대한 패러디라 할지라도)에 상응한다. | ||
+ | 또한, ‘wir möchten nicht hoch wetten, daß du davonkommst.’를 ‘우리는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데에 내기를 크게 걸고 싶지는 않다’라고 옮기지 않고, ‘우리는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라고 옮기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가능한 대안일 뿐이다. 즉, ‘~에 큰돈을 걸다’, ‘~에 내기를 크게 걸다’를 ‘~를 크게 기대하다’, ‘~를 크게 장담하다’로 대체할 수 있기는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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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 이제 곽복록 이후의 번역판들을 보기로 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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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가게 – 그대가 살아 있든, 그대로 사라지든 간에! 그대의 앞날은 밝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대가 말려든 사악한 춤은 앞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절망적인 춤을 계속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대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오리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그 의문은 의문대로 남겨두겠다. 그대의 단순성을 높여 준 육체와 정신의 모험론은 그대를 육체적으로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하게 한 것을, 정신에서는 그토록 오래 살도록 해 준 것이다. 그대는 죽음과 육체의 방종 속에서 예감에 가득 차 사랑의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다. 이 세계를 뒤덮는 죽음의 향연 속에서, 비내리는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사악한 열병과 같은 업화 속에서 그러한 것들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를 것인가?(홍경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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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가게나. 네가 살아 있든 그대로 사라지든 간에 말이야! 너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거야. 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앞으로 몇 년간은 죄 많은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지. 네가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놓아둘 거야. 네가 겪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너의 단순성을 고양시켜, 육체 속에서는 그렇게 오래 살 수 없겠지만 정신 속에서는 오래도록 살아남게 했어. 너는 예감에 가득 차 ‘술래잡기’에 의해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어.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홍성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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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네가 살아 있든 그 상태로 머물러 있든 안녕! 너의 전망은 어둡다. 네가 휩쓸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는 앞으로도 수년간 죄 많은 춤사위를 계속 벌일 테니 말이다. 네가 거기서 빠져 나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덤덤한 심정으로 이 물음을 미해결로 남겨 놓으려 한다. 너의 단순함을 고양시킨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육체적으로는 그다지 오래 살 수 없을 너를 정신적으로는 오래 살아남게 했던 거야. 너는 예감에 가득 차 술래잡기의 방식에 따라 사랑의 꿈이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피어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던 것이다. 세계를 뒤덮는 이 죽음의 축제로부터, 온 세상의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저 끔찍한 열병의 도가니로부터, 어느 때가 되어야 사랑이 피어날 것인가?(원당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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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가게나 – 자네가 살아 있든,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그대로 머물러 있든 간에 말일세! 자네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을 것이네. 자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아직도 여러 해에 걸쳐 죄 많은 춤을 계속 출 것이기 때문이네.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 둘 걸세. 자네의 단순성을 높여 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육체 속에서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게 한 것을 정신 속에서는 오래도록 살게 해주었네. 자네는 예감으로 충만해 <술래잡기> 방법으로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네. 이 세계를 뒤덮은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도 같은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르겠지?(윤순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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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서 ‘Treue’를 네 역자가 다 ‘성실성’으로 옮긴 것과 비슷한 현상인데, 이번에는 ‘etwas hoch wetten’이란 독문을 네 역자가 다 ‘~을 크게 기대하다’로 옮긴 사실은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심한 우연이다. | ||
+ | 문제의 ‘술래잡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셋은 곽복록을 답습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아예 무시하고 옮기지도 않고 있다. ‘가독성’을 높이고자 이른바 ‘독자에게 다가가는’ 번역을 선호했다고 치더라도, 이런 생략법은 아무래도 성실하지 않다. | ||
+ |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곽복록이 오역한 곳에서, 둘은 단순성을 ‘높여주었다’고 번역하고 있고, 홍성광과 원당희는 단순성을 ‘고양시켰다’고 번역하고 있다. 후자는 곽복록의 실수로 생긴 오역이 후배 역자에 의해 올바르게 교정되는 드문 예이기도 하다. 말이 난 김에 확실히 해 두자면, ‘단순성을 높여주었다’는 표현은 ‘결정적 오역’을 피하려고 애매한 지점에서 그만 막연하게 머문 해석이다. 즉, ‘더 단순하게 만들었다’는 것인지, ‘단순성을 고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지점에서 그냥 머물러 있는 모호한 번역이다. 이에 비해, 단순성을 ‘고양시켰다’는 홍성광과 원당희의 번역이 옳다는 사실이, 이 소설의 ‘교양소설적 구조’를 감안할 때,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홍성광 및 원당희의 번역보다 뒤에 나온 윤순식의 번역이 이를 따르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 ||
+ | 이 소설의 마지막 두 문장에서는,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예감에 가득 차서 꿈속에서의 자신의 성찰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다 보니, 죽음과 육체의 방종을 체험한 그에게서 ‘사랑에 관한 어떤 꿈이 피어났’는데, 또 다른 죽음의 잔치라 할 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도 언젠가 ‘그러한 사랑’이 피어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 문장의 ‘사랑에 관한 어떤 꿈 (ein Traum von Liebe)’과 뒤 문장의 ‘바로 그 사랑(die Liebe)’을 대비시켜야 한다. 역자가 뒤 문장의 ‘사랑’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5명의 역자가 다 이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 ||
+ | 특히, 윤순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저 끔찍한 열병과도 같은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르겠지?’라고까지 옮김으로써,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를 것임을 조금 더 기정사실화하는 방향으로 의미를 조금 바꾸고 있다. 원문을 보면, 희망을 품고는 있으나 아직은 중립적인 의문문에 머물고 있다. 제일 나중에 나온 번역이 중립적 질문을 하고 있는 서술자의 관점까지 약간 변경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불필요한 수정이며, 결과적으로 개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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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맺는말과 짤막한 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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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 편의상 소설 <마의 산> 중에서 세 대목만 골라서, 그 번역의 실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
+ | 우선, 곽복록의 번역이 뒤에 나온 다른 번역들을 위한 중요한 표본으로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술래잡기’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곽복록이 오역을 하면, 그 오역이 거의 수정되지 못하고 후배들에 의해 답습되는 경향이 짙다. | ||
+ | 위의 ‘술래잡기’, ‘성실성’, ‘탈주병’, ‘크게 기대하다’ 등의 예에서도 드러났지만,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은 출발어 원문을 보고 새로이 해석해 보고자 하는 시도를 거의 해 보지도 않고, 대체로 그냥 따라가고만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점에서 작품 제목이라도 달리 번역해 본 원당희의 시도는 단연 돋보인다. | ||
+ | 결론적으로 말해서,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이 현대 한국어 구사에서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홍경호는 원문의 복잡한 요소를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있는데, 이것이 가독성을 높이는 정당한 방법이 아님은 물론이고, 본받을 만한 역자의 자세가 아님은 명백하다. 요컨대,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이 현대 한국어 구사에서 진일보했지만, 그들의 번역이 곽복록 번역판의 수준을 시대적으로 완전히 뛰어넘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의 출발어 원전 해독 능력이 곽복록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번역을 하는 데에는 우선 출발어 원전에 대한 - 독해력 이전에 이미 느낌으로 다가오는 - 직관적 이해력이 전제되어야 하고, 도착어의 능통한 구사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 ||
+ | |||
+ | * 번역 비평이라는 것을 처음 쓰자니, 관련 역자님들께 미안한 마음 때문에 여러 번 가슴이 오그라들곤 했다. 막상 필자가 <마의 산>이라는 이 문제작을 옮겨야 한다고 ‘역지사지’를 해 보았을 때, 이 역자들의 끈기와 성취를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이었다. 과연 그 기나긴 작업 기간 내내 두 언어 사이, 두 문화 사이를 잇는 그 불편한 교량 작업을 끈기 있게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하고 심각하게 자문해 보기도 했다. | ||
+ | 정말 지난한 작업이다. 아무나 함부로 덤벼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출발어와 도착어, 출발문화와 도착문화에 거의 똑같이 조예가 깊어야 하고,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오랜 온축(蘊蓄)이 있어야 한다. 우리말과 우리 문학에 대한 공부도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설령 그런 역자라 할지라도, 이 <마의 산>과 같은 대작을 올바르게 번역해 내자면, 자신의 일생을,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무서운 일이다. 이런 무서운 작업의 결과를 놓고 감히 비평을 한다는 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
+ | 무섭고 불편하다고 해서 그냥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은사든, 선배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오직 바람직한 독문학 번역 및 번역 비평의 미래만 생각하고자 했으며, ‘좋은 말’과 ‘온유한 미사여구’ 뒤에 숨고 싶어 하는 ‘낙산 도동재(道東齋)의 독거노인’을 사정없이 편달(鞭撻)함으로써, 그가 읽고 느낀 진실을 그대로 기록하도록 독려했다. 그만큼 지금 독문학계에서의 번역 비평이 그 엄중한 출발선 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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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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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복록(1976): 마의 산. 동서문화사.<br> | ||
+ | 홍경호(1983): 마의 산. 금성출판사.<br> | ||
+ | 홍성광(2008): 마의 산. 을유문화사.<br> | ||
+ | 원당희(2013): 마법의 산. 세창미디어.<br> | ||
+ | 윤순식(2014): 마의 산. 열린책들.<br> | ||
+ | |||
+ | <div style="text-align: right">안삼환</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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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6일 (화) 06:17 기준 최신판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소설
작가 | 토마스 만(Thomas Mann) |
---|---|
초판 발행 | 1924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1924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장편 교양소설이다. 독일 시민 문화의 문제와 대결한 걸작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독일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조선공학을 전공한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평범한 청년이 알프스 산중의 요양원에 있는 사촌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폐 질환 진단을 받고 7년을 보낸다. 그는 정상적 삶에서 단절된 요양원이라는 실험적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만나면서,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치열한 사상 대결을 곁에서 지켜보고, 병과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하며 정신적 성숙의 과정을 밟아간다. 소설은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한스 카스토르프가 7년 만에 요양원을 나와 자원입대하여 전쟁의 포화 속에 뛰어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독일 시민 문화의 종언을 암시한다. 국내에서는 1970년에 이효상의 번역으로 처음 출간되었다(동아출판공사).
초판 정보
Mann, Thomas(1924): Der Zauberberg. Berlin: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1 | 魔의 山 | 魔의 산 | (컬러版)世界의 文學大全集 22 | 토마스 만 | 李孝祥(이효상) | 1970 | 同和出版社 | 15-728 | 완역 | 완역 | 초판, 1978년 중판 |
2 | 魔의 山 | 魔의 山 | 토마스 만 | 郭福祿(곽복록) | 1975 | 文學出版社 | 11-427 | 편역 | 편역 | ||
마의 산 | 魔의 山 | Great Books 69 | 토마스 만 | 郭福祿(곽복록) | 1976 | 東西文化社 | 7-984 | 완역 | 완역 | ||
4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世界文學全集 41 | 만 | 郭福祿(곽복록) | 1978 | 東西文化社 | 7-464 | 편역 | 완역 | |
5 | 魔의 山 | 魔의 山 Ⅱ | 世界文學全集 42 | 만 | 郭福祿(곽복록) | 1978 | 東西文化社 | 465-984 | 편역 | 완역 | |
6 | 魔의 山 | 魔의 山 Ⅲ | 三中堂文庫 475 | 토마스만 | 郭福祿(곽복록) | 1981 | 三中堂 | 5-382 | 편역 | 완역 | |
7 | 마(魔)의 산 | 魔의 山 Ⅱ | 三中堂文庫 474 | 토마스만 | 郭福祿(곽복록) | 1981 | 三中堂 | 5-409 | 편역 | 완역 | |
8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三中堂文庫 473 | 토마스만 | 郭福祿(곽복록) | 1981 | 三中堂 | 5-405 | 편역 | 완역 | |
9 | 마의 산 | 魔의 山 (Ⅱ), 短篇選 |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 96 | 만 | 洪京鎬(홍경호) | 1983 | 금성출판사 | 5-349 | 편역 | 완역 | 2권에는 단편선이 함께 수록되어 있음 |
10 | 마의 산 | 魔의 山 (Ⅰ) |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 95 | 만 | 洪京鎬(홍경호) | 1983 | 금성출판사 | 4-453 | 편역 | 완역 | |
11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Great books 36 | 만 | 郭福祿(곽복록) | 1983 | 學園出版公社 | 7-464 | 편역 | 완역 | |
12 | 魔의 山 | 魔의 山 Ⅱ | Great books 37 | 만 | 郭福祿(곽복록) | 1983 | 學園出版公社 | 465-984 | 편역 | 완역 | |
13 | 마의 산 | 마의 산 | (가정판)세계문학전집 | 토마스 만 | 황오현 | 1984 | 영 | 7-310 | 편역 | 편역 | 편역자가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지만 원작의 머리말이 생략되고, 원작의 분량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므로 편역이라 표기함 |
14 | 마의 산 | 마의 산 | 동서세계문학전집 22 | 만 | 곽복록 | 1987 | 동서문화사 | 11-600 | 완역 | 완역 | |
15 | 마의 산 | 마의 산 (상)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8 | 토마스 만 | 홍경호 | 1987 | 汎友社 | 11-392 | 편역 | 완역 | |
16 | 마의 산 | 마의 산 (하)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9 | 토마스 만 | 홍경호 | 1987 | 汎友社 | 11-446 | 편역 | 완역 | |
17 | 마의 산 | 마의 산 | 우리시대의 세계문학 22 | 만 | 곽복록 | 1988 | 계몽사 | 3-452 | 완역 | 완역 | |
18 | 魔의 山 | 魔의 山 Ⅰ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81 | 토마스 만 | 洪京鎬(홍경호) | 1990 | 金星出版社 | 5-514 | 편역 | 완역 | 초판, 1993년 중판 |
19 | 마의 산 | 마(魔)의 산 Ⅰ | 世界名作 100選 59 | 토마스 만 | 오계숙 | 1990 | 일신서적출판사 | 7-406 | 편역 | 완역 | |
20 | 마(魔)의 산 | 마(魔)의 산 Ⅱ | 世界名作 100選 60 | 토마스 만 | 오계숙 | 1990 | 일신서적출판사 | 5-455 | 편역 | 완역 | |
21 | 마의 산 | 魔의 山 Ⅱ, 短篇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82 | 토마스 만 | 洪京鎬(홍경호) | 1990 | 金星出版社 | 5-394 | 편역 | 완역 | 초판, 1993년 중판 |
22 | 마의 산 | 마의 산 Ⅰ | Hong Shin Elite Book's 81 | 토마스 만 | 최호 | 1994 | 홍신문화사 | 9-401 | 편역 | 완역 | |
23 | 마의 산 | 마의 산 1 | 우리시대의 세계문학 13 | 만 | 곽복록 | 1994 | 계몽사 | 9-314 | 편역 | 완역 | |
24 | 마의 산 | 마의 산 Ⅱ | Hong Shin Elite Book's 82 | 토마스 만 | 최호 | 1994 | 홍신문화사 | 11-469 | 편역 | 완역 | |
25 | 마의 산 | 마의 산2, 묘지로 가는 길, 토니오 크뢰거 | 우리시대의 세계문학 14 | 만 | 곽복록 | 1994 | 계몽사 | 9-230 | 편역 | 완역 | |
26 | 마의 산 | 마의 산 1 | 밀레니엄북스 52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05 | 신원문화사 | 7-677 | 편역 | 완역 | 초판 |
27 | 마의 산 | 마의 산 2 | 밀레니엄북스 53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06 | 신원문화사 | 7-748 | 편역 | 완역 | 초판 |
28 | 마의 산 | 마의 산 | 세계문학 93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07 | 동서문화사 | 11-917 | 완역 | 완역 | 판권기에 중판이라 적혀 있지만 초판이라 밝힌 1978년판의 개정판에 가까움 |
29 | 마의 산 | 마의 산 |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309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08 | 지식을만드는지식 | 39-130 | 발췌역 | 편역 |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30 | 마의 산 | 마의 산 (상) | 을유세계문학전집 1 | 토마스 만 | 홍성광 | 2008 | 을유문화사 | 9-660 | 편역 | 완역 | 마의 산 (하)권에 판본 소개와 함께 저본 제시 |
31 | 마의 산 | 마의 산 (하) | 을유세계문학전집 2 | 토마스 만 | 홍성광 | 2008 | 을유문화사 | 9-732 | 편역 | 완역 | |
32 | 마의 산 |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09 | 누멘 | 92-94 | 편역 | 편역 | ||
33 | 마의 산 | 마의 산 |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2 | 지식을만드는지식 | 41-132 | 발췌역 | 편역 |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34 | 마의 산 | (중학생이 보는) 마의 산 1 |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113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2 | 신원문화사 | 10-628 | 편역 | 완역 | 아동청소년문학 |
35 | 마의 산 | (중학생이 보는) 마의 산 2 |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114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2 | 신원문화사 | 10-697 | 편역 | 완역 | 아동청소년문학 |
36 | 마법의 산 | 마법의 산 (상) | 토마스 만 | 원당희 | 2013 | 세창미디어 | 31-604 | 편역 | 완역 | 토마스 만의 「프린스턴 대학생을 위한 《마법의 산》 입문」이 "저자 해설"로 번역되어 실림 | |
37 | 마법의 산 | 마법의 산 (하) | 토마스 만 | 원당희 | 2013 | 세창미디어 | 9-660 | 편역 | 완역 | 동일 역자의 번역서 <마법의 산 (상)>에 토마스 만의 「프린스턴 대학생을 위한 《마법의 산》 입문」이 "저자 해설" 번역되어 실림 | |
38 | 마의 산 | 마의 산 |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큰글씨책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41-132 | 편역 | 편역 | 큰글씨책,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39 | 마의 산 | 마의 산 (상) | 열린책들 세계문학 217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열린책들 | 9-489 | 편역 | 완역 | |
40 | 마의 산 | 마의 산 (중) | 열린책들 세계문학 218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열린책들 | 7-483 | 편역 | 완역 | |
41 | 마의 산 | 마의 산 (하) | 열린책들 세계문학 219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4 | 열린책들 | 7-453 | 편역 | 완역 | |
42 | 마의 산 | 마의 산 Ⅰ | 세계문학전집 95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7 | 동서문화사 | 13-432 | 편역 | 완역 | 동서문화사 창업 60주년 특별출판 |
43 | 마의 산 | 마의 산 Ⅱ | 세계문학전집 96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7 | 동서문화사 | 433-898 | 편역 | 완역 | 동서문화사 창업 60주년 특별출판 |
44 | 마의 산 | 마의 산 Ⅰ | World book 274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8 | 동서문화사 | 13-432 | 편역 | 완역 | |
45 | 마의 산 | (원서발췌) 마의 산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8 | 지식을만드는지식 | 1-98 | 편역 | 편역 |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
46 | 마의 산 | (원서발췌) 마의 산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18 | 지식을만드는지식 | 1-98 | 편역 | 편역 | 큰글씨책,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발췌역에 대한 상세 정보 제공함 | |
47 | 마의 산 | 마의 산 Ⅱ | World book 275 | 토마스 만 | 곽복록 | 2018 | 동서문화사 | 433-89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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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토마스 만은 비단 독일의 한 소설가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말에 그 뿌리를 두고 20세기 전반(前半) 너머까지 활약한 세계 산문문학의 최고봉이다. 따라서, 이 작가를 이해하려면 서구 소설사 전체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독일어와 문화적 간극이 커서, 문화전이(文化轉移)를 고려한 상응어를 찾기가 쉽지 않은 한국어로 이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려면, 서구어권 역자보다 훨씬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임은 명백하다. 토마스 만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 <마의 산>이야 말로 그 분량으로 보나, 그 반어적 문체와 복잡하고도 미묘한 세계사적 함의로 보나,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실로 지난(至難)한 작업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우리말로 완역한 역자가 이효상으로부터 윤순식에 이르기까지 도합 8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이들의 끈기, 분투 그리고 성취가 찬탄과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최초의 우리말 완역본을 낸 사람은 1930년에 동경제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대구 교남(嶠南)학교(현 대륜고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52년에 경북대 교수가 된 한솔 이효상(李孝祥, 1906년생)이다. 1970년에 동화출판사에서 낸 <魔의 山>이 우리나라 초역본인데, 당시 그는 이미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독문학자였던 그의 번역본은 거의 수용되지 않았으며, 현재는 유감스럽게도 책이 절판되어 필자로서는 구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번역판 <붓덴브루크 一家>(을유문화사, 1960)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일본어 번역을 참고한 흔적이 더러 눈에 띄었고, 독일 현지 사정에 어두운 기상천외한 번역(예: Mengstraße (in Lübeck) -> (대구의) 중앙통)도 있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지금은 웬만한 독문학도는 다 알다시피, ‘멩슈트라세’는 뤼벡의 ‘중앙통’이라 할 만큼 중심가가 아니다. 그의 번역작품 <魔의 山>도 아마 이와 유사한 번역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전 경북대 이효상 교수가 번역한 <魔의 山>이 제대로 수용되지 못한 데에는 정치가로서의 그의 여러 극적인 행보도 한몫했겠지만, 실은 이 책보다 6년 늦게 나온 서강대 독문과의 곽복록(郭福祿) 교수의 <魔의 山>(東西文化社, 상, 하 2권, 1976)이 중앙 독문학계 및 출판계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된 영향도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곽복록 교수는 미국 및 독일 유학생 출신으로서 한국 독문학자 최초의 독일 박사로서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가 곧이어서 서강대 독문과 창건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효상의 번역이 거의 수용되지 못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곽복록의 <魔의 山> 이후에도 홍경호(洪京鎬)의 <魔의 山>(I, II권, 金星出版社, 1983), 오계숙의 <魔의 山>(I, II권, 일신서적, 1990), 최호의 <마의 산>(I, II권, 홍신문화사, 1994), 홍성광의 <마의 산>(상, 하권, 을유문화사, 2008), 원당희의 <마법의 산>(상, 하권, 세창미디어, 2013), 윤순식(尹順植)의 <마의 산>(상, 중, 하권, 열린책들, 2014) 등 모두 6종의 완역이 더 출간되었다. 필자가 과문한 까닭이겠지만, 평소에 오계숙과 최호라는 독문학도의 이름을 듣지 못했거니와 그들의 역서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곽복록, 홍경호, 홍성광, 원당희, 윤순식 등 5종의 완역본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2. 실제 번역의 예들
그러면, 이하에서 이들 번역의 실례(實例)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작품의 제목 번역에 관해서부터 말해 보자면, 도합 8명의 역자 중 7명은 <마의 산>이라 번역했고, 원당희만 <마법의 산>이라고 번역했다. 원당희의 말대로, “마(魔)는 악마라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아서”(역자 해설), <마의 산>이 틀린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Zauberflöte”가 ‘마적(魔笛)’이나 ‘마술 피리’로 번역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Zauberberg”는 <마의 산>으로 얼마든지 번역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이 작품에서도 ‘Satana’나 ‘Rhadamanth’ 등 ‘악마’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들도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 요양원에서의 악마의 존재 여부나 ‘폐쇄 공간’인 요양원에서 겪는 주인공의 ‘연금술적 고양’ 등 때문에 <마법의 산>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고, 둘 다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도합 8명의 번역 중 유독 작품 제목을 <마법의 산>으로 새로이 번역하고자 시도했고, 또 그럼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역자 원당희의 창의성은 한결 돋보인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번역의 실제 예들을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눈(雪)의 장(章)의 한 대목
Oh, so ist es deutlich geträumt und gut regiert! Ich will dran denken. Ich will dem Tode Treue halten in meinem Herzen, doch mich hell erinnern, daß Treue zum Tode und Gewesenen nur Bosheit und finstere Wollust und Menschenfeindschaft ist, bestimmt sie unser Denken und Regieren. Der Mensch soll um der Güte und Liebe willen dem Tode keine Herrschaft einräumen über seine Gedanken. Und damit wach’ ich auf ... Denn damit hab‘ ich zu Ende geträumt und recht zum Ziele.
우선, 상호 비교가 가능하게 하려고, 필자가 위 독문의 – ‘모범 번역’을 시도한 것이 아니고 – 대강의 의미를 ‘해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 이렇게 나는 분명히 꿈을 꾸었고 이 꿈이 귀착할 방향을 잘 이끌었다! 이 결과를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 가슴 속에서는 나는 죽음에 대하여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 하지만, 만약 이 변치 않는 마음이 우리의 사고와 행위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런 절의(節義)는 단지 악의와 음험한 쾌락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적대적 태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싶다. 인간은 인애(仁愛)와 사랑을 위해서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죽음한테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이 깨달음과 더불어 이제 난 깨어난다....... 이것으로 난 꿈을 다 꾸었고 내가 지향해 온 바로 그 지점에 이제 난 도달한 것이니까 말이다.
곽복록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 나는 이처럼 확실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한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마음속으로 죽음에 성실한 생각을 계속 가지도록 하자. 그러나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탕함과 반인간성으로 바뀐다는 것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죽음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마지막까지 다 꾸고 목적을 이룬 셈이다.
여기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술래잡기’라는 번역이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설원(雪原)에 쓰러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마치 꿈속에서처럼 자신의 사고를 한쪽 방향으로 이끌어 온 그 과정을 곽복록은 어인 까닭인지 ‘술래잡기’로 옮기고 있다. 한스 카스토르프의 꿈속에서의 성찰과 그 지향적 노력에 약간의 반어성이 실려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가 이렇게 번역하게 된 원인과 그의 의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regieren’이란 단어와는 너무 먼 거리가 있어서, 원문의 내용과 형식이 뒤바뀐 오역, 즉 주객이 전도된 오역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하이제(Joh. Christ. Aug. Heyse)의 <외래어사전>(Fremdwörterbuch, 1897)에서 ‘regieren’을 찾아보면, ‘다스리다’와 ‘통치하다’라는 오늘날의 일반적 의미 이외에도, ‘lenken ((방향을) 설정하다, 돌리다)’, ‘leiten (인도하다)’, ‘steuern (조종하다)’ 등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숨바꼭질하다’라는 의미는 없다!), 대개 이런 의미로 해석을 해서 그때그때마다 문맥에 맞게 다시 잘 옮기는 것이 역자의 몫이라 하겠다. 주인공이 ‘꿈속에서 자기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서’, 꿈을 깨기 직전에는 그가 ‘지향해 오던’ ‘바로 그 지점(recht zum Ziele)’에 도달한 것으로 번역해야 할 것인데, 무슨 ‘술래잡기’를 하다가 ‘목적 지점’에 도착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싶다. 또한, ‘Treue zum Tode und Gewesenen’을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성’이라 번역했는데, 이것은 독일 정신의 낭만주의적 전통, 즉 이 문맥에서는 ‘죽음에의 공감(Sympathie mit dem To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Treue’는 여기서 죽음과 과거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 ‘충성심’ 또는 ‘절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실성’이란 번역은 그 본래의 뜻에 무난하게 다가간 것이기는 하다. 물론, 남자한테는 ‘절개’라는 표현이 맞지 않고 ‘충성심’은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수반할 수 있기에, ‘성실성’으로 낙착된 데에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아주 흡족한 번역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좀 미흡하다. 여기서, 이런 사소한 미흡성을 굳이 지적하는 이유는, 이 번역이 아래의 네 역자가 다 따를 만큼 그렇게도 유일한 대안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아래에서 금방 다시 언급하겠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작품 <마의 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문장으로 알려진 “Der Mensch soll um der Güte und Liebe willen dem Tode keine Herrschaft einräumen über seine Gedanken.”의 번역인데, 곽복록은 이 문장을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죽음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Güte’를 ‘착한 마음씨’로 번역한 것은 그 의미에 가까이 가긴 갔으되, 그 의미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Güte und Liebe’ 앞에 정관사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두 명사가 거의 동의어로 쓰였음을 의미한다. 만약 ‘Güte’가 없이 그냥 ‘um der Liebe willen’이라고만 되어 있다면, 남녀 간의 ‘사랑’인지 인간애적 ‘사랑’인지 확실히 분간되지 않을 우려가 있는 까닭에, 여기서는 후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Güte’를 보충해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Güte’는 ‘인애(仁愛)’, 또는 ‘자애(慈愛)’ 등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의어로 옮겨야 마땅하다. 실제로도 ‘Güte’라는 단어는 ‘선(善)’, 또는 ‘선의(善意)’라기보다는 ‘사랑’이란 의미 범주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사소한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 인간이 이미 지니고 있는 이런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 이런 인간에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우리 인간은 자기 사고를 죽음에다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전체 콘텍스트에 더 맞을 것이다. 이상에서 곽복록의 번역에 대한 사소한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번역이 무슨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이효상 번역을 제외하면(곽복록이 이효상 번역을 참고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만큼), 이 번역이 우리말 번역의 ‘제2의 초역’이라 할만한데, 그런 번역 치고는 대체로 맥을 잘 짚어낸 수준급 번역이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홍경호, 홍성광, 원당희, 윤순식의 번역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 정말로 나는 확실하게 꿈을 꾸고, 멋진 ‘술래잡기’를 했다.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죽음에 대한 성실한 생각을 한시도 잊지 말자. 그러나 만일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결정지으려고 한다면, 그 성실은 음탕하고 반인간적으로 바뀐다는 사실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선의와 사랑을 위해서 그 사고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양도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떠라....... 이것으로 내 꿈은 끝나고,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홍경호)
아, 이렇게 나는 선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죽음을 성실하게 대하겠지만,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기로 하자.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홍성광)
아, 이 얼마나 명료한 꿈을 꾼 것이고 훌륭하게 술래잡기를 한 것인가! 나는 이 점을 잊지 않겠다. 가슴으로는 죽음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취하겠지만,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사유와 술래잡기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악의와 음침한 육욕, 인간 적대성이 된다는 것을 명료하게 기억할 것이다. 인간은 선량함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이것으로 나는 깨어나야겠다. 이것으로 나는 마지막까지 꿈을 꾸면서 제대로 목적을 이루었으니 말이다.(원당희)
아, 이렇게 나는 분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나는 이것을 늘 생각할 것이다. 마음속으로 죽음에 대해 늘 성실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뀐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자. 인간은 선(善)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내 꿈은 끝났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기 때문이다.(윤순식)
위 4종의 역문을 살펴보자면, 곽복록의 ‘술래잡기’라는 ‘문제의 번역’이 그대로 차용되고 있고, 죽음과 과거에 대한 ‘성실’, 또는 ‘성실성’도 대체로 그냥 답습되고 있으며, ‘착한 마음씨’와 사랑, ‘선의’와 사랑, ‘선량함’과 사랑, ‘선’과 사랑도 거의 그대로다. 문장이 약간 현대화된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듯이, ‘regieren’, ‘Treue’ 그리고 ‘Güte’에 대한 새 역자로서의 새로운 해석 시도라곤 찾아볼 수 없다. ‘regieren’이 어찌 4명의 역자에 의해 한결같이 ‘술래잡기’로 번역될 수 있단 말인가? ‘Treue’라는 단어의 근원적 뜻이 ‘충성심’이나 ‘절개’, 또는 ‘절의’인데, 어째서 4명의 역자가 한결같이 ‘성실성’이나 ‘성실’에 머무르고 있는가? ‘성실’이란 단어는 원래 ‘참’과 ‘진실’에 가까운 말이다. ‘성실’이 ‘충성’이나 ‘절개’를 이렇게도 유일하게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Güte’의 일반적 의미가 ‘선(善)’이 아니라 ‘자애’ 또는 ‘후의(厚意)’인데, 무슨 연유로 아무도 이런 의미로 해석을 시도해 보지도 않았는가? 아무튼, 위 4종의 번역본 모두가 곽복록 번역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보다 창의적 번역으로 과감히 나아간 흔적을 보이지 않음은 심히 유감스럽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홍성광과 원당희가 주인공의 핵심적 깨달음을 이탤릭체로 강조한 작가의 뜻을 별도로 표시하지 않은 것도 소홀함이며, 홍경호가 마지막에 갑자기 문단을 바꾸고 있는 것도 소홀함을 넘어 자의적 번역 행태이다. 홍성광과 윤순식이 “인간은 […]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죽음에다 “넘겨주어서는” 내지는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옮긴 것은 동사 ‘einräumen’을 ‘종속시키다’, ‘양도하다’, ‘양보하다’로 해석한 것보다 더 나은 번역으로 생각된다.
2) 탕아(蕩兒) 모티프의 번역
Ihn, Behrens, betreffend, so trage er keinem was nach, er halte die Arme väterlich geöffnet und sei bereit, ein Kalb für den Ausreißer zu schlachten. (베렌스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는 누구한테도 꽁한 마음 같은 걸 오래 품지 않는 사람이며, 집 나갔다 돌아온 자식의 아버지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아들을 위해 송아지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곽복록의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나는 아버지처럼 두 팔을 벌려, 송아지를 요리해서 탈주병을 맞이하겠습니다.”(곽복록)
여기서 곽복록이 간접화법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직접화법으로 옮긴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누구한테도 꽁한 마음 같은 걸 오래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라는 원문을 빠트리고, 옮기지 않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또한, ‘Ausreißer’를 ‘탈주병’으로 약간 반어적으로 번역한 것도 결과적으로 문제가 없지 않다. 즉, 여기서 ‘탈주병’이란 베렌스 자기가 원장으로 관리하고 있는 요양원 울타리를 벗어나 평지의 근무처로 복귀했던 장교 요아힘의 과감한 ‘퇴원’을 가리키는 말인데, 장교인 요아힘이 ‘병(兵)’도 아니거니와, 유명한 ‘탕아 에피소드’에서의 ‘집 나간 자식’을 가리키므로, 굳이 ‘탈주병’이라는 반어적 번역을 할 필요 없이, 그냥 ‘집 나간 자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면, 이제 다른 네 사람의 번역을 살펴보자.
“[…] 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아버지처럼 두 팔을 벌려, 송아지를 잡아서 탈주병을 환대하겠습니다.”(홍경호)
베렌스 자신은 아무런 유감이 없으며, 아버지의 심정으로 두 팔을 벌려 탈영병에게 송아지라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홍성광)
베렌스 자신에 관한 한 그 누구에게도 유감이 없으며, 자신은 아버지처럼 두 팔을 벌려 탈영병에게 송아지라도 한 마리 잡아서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원당희)
자기는 아무런 유감이 없으며, 아버지의 심정으로 두 팔 벌려 탈영병에게 송아지라도 잡아 환대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윤순식)
그런데, 곽복록 이후의 네 역자가 모두 ‘탈주병’, 혹은 약간 현대화해서 ‘탈영병’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런 번역은, 요아힘이 군인이기 때문에, 마치 그가 군대에서 탈주, 또는 탈영해서 요양원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잘못 인식될 소지까지 남긴다. 네 역자가 다 굳이 이렇게까지 곽복록의 ‘탈주병’이란 번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껏해야 ‘탈주병’을 ‘탈영병’ 정도로만 바꾸고 있는 것은 참으로 보기 답답하다. 곽복록이 빠트린 대목, 즉 ‘er trage keinem was nach’를 제대로 찾아 번역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홍경호는 ‘누구에게나 똑 같이’라는 잘못 짚은 번역을 하고 있으며, 베렌스 자기가 ‘누구한테도 뒤끝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홍성광과 윤순식은 엄연한 하나의 문장을 ‘아무런 유감없이’라는 아리송한 부사구로 대체하고 있고, 원당희는 ‘누구에게도 유감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원문에 조금 더 다가가기는 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곽복록이 번역을 하다가 하필이면 빠트린 부분에서 넷 다 원문의 의미를 –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 잘못짚고 있다. 좀 심한 말이 되겠지만, 만약 곽복록의 번역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들 후속 역자들은 이 작품 번역에서 다른 대목에서도 많은 오역을 내었으리라는 추측까지 가능할 듯하다.
3) 마지막 문단의 번역
Fahr wohl! - du lebest nun oder bleibest! Deine Aussichten sind schlecht; das arge Tanzvergnügen, worein du gerissen bist, dauert noch manches Sündjährchen, und wir möchten nicht hoch wetten, daß du davonkommst. Ehrlich gestanden, lassen wir ziemlich unbekümmert die Frage offen. Abentuerer im Fleische und Geist, die deine Einfachheit stergerten, ließen dich im Geist überleben, was du im Fleichsche wohl kaum überleben sollst. Augenblicke kamen, wo dir aus Tod und Körperunzucht ahnungsvoll und regierungsweis ein Traum von Liebe erwuchs. Wird auch aus diesem Weltfest des Todes, auch aus der schlimmen Fieberbrunst, die rings den regnerischen Abendhimmel entzündet, einmal die Liebe steigen? (이제 네가 살든지, 혹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냥 머물든지 간에, 아무튼 잘 가거라! 너의 전망은 좋지 않구나. 네가 휩쓸려 들어간 그 사악한 춤판은 아직도 몇 해 더 지속되면서 계속 죄악의 춤을 출 텐데, 우리는 네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데에 내기를 크게 걸고 싶지 않단다.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는 그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미결인 채 남겨두고자 한다. 네 단순성을 고양시켜 준 육체적, 정신적 모험들로 인하여 너는 정신적으로는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마도 너는 그 살아남은 정신을 네 육체 속에 계속 품고 있을 수는 없을 듯하구나. 예감에 차서 방향을 모색하다 보니 육체의 음란성과 죽음에 관한 너의 체험으로부터 사랑에 관한 어떤 꿈이 네게서 피어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이 ‘죽음의 세계적 잔치’로부터도, 비 오는 저녁 하늘 주위를 훤하게 불타오르게 하는 이 지독한 열병과도 같은 포화(砲火)로부터도, 언젠가는 그런 사랑이 피어오를 것인가?)
우선, 곽복록의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안녕 – 자네가 살아 있든, 또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사라지든 이것으로 작별이다. 자네의 앞길은 결코 밝지는 않다. 자네가 말려들어간 사악한 무도(舞蹈)는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그 죄 많은 춤을 계속 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그 의문은 의문으로 남겨둘 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겠다. 자네가 겪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자네를 더욱 단순하게 만들어서, 자네의 육체로는 이처럼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을 정신의 세계에서 오래 살게 해주었던 것이다, 자네는 ‘술래잡기’로 죽음과 육체의 방종 속에서 예감으로 충만하여 사랑의 꿈이 탄생하는 순간을 겪었다. 이 세계를 덮는 죽음의 향연 속에서, 비 내리는 밤하늘을 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 같은 불길 속에서, 그러한 것들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태어날 것인가?(곽복록)
위 곽복록의 번역을 고찰하자면, 또 ‘술래잡기’가 등장한 것은 그만 논외로 치더라도, 한스 카스토르프가 겪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이 그를 ‘더욱 단순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큰 오역이다. 이것은 주인공의 육체적, 정신적 모험이 그의 ‘단순성을 [정신적으로] 고양시켜 주었다’는 의미로 옮겨야, 이 소설 전체의 ‘교양소설적 구조’(설령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전통적 교양소설에 대한 패러디라 할지라도)에 상응한다. 또한, ‘wir möchten nicht hoch wetten, daß du davonkommst.’를 ‘우리는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데에 내기를 크게 걸고 싶지는 않다’라고 옮기지 않고, ‘우리는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라고 옮기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가능한 대안일 뿐이다. 즉, ‘~에 큰돈을 걸다’, ‘~에 내기를 크게 걸다’를 ‘~를 크게 기대하다’, ‘~를 크게 장담하다’로 대체할 수 있기는 하다.
자, 이제 곽복록 이후의 번역판들을 보기로 하자.
잘 가게 – 그대가 살아 있든, 그대로 사라지든 간에! 그대의 앞날은 밝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대가 말려든 사악한 춤은 앞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절망적인 춤을 계속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대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오리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그 의문은 의문대로 남겨두겠다. 그대의 단순성을 높여 준 육체와 정신의 모험론은 그대를 육체적으로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하게 한 것을, 정신에서는 그토록 오래 살도록 해 준 것이다. 그대는 죽음과 육체의 방종 속에서 예감에 가득 차 사랑의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다. 이 세계를 뒤덮는 죽음의 향연 속에서, 비내리는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사악한 열병과 같은 업화 속에서 그러한 것들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를 것인가?(홍경호)
잘 가게나. 네가 살아 있든 그대로 사라지든 간에 말이야! 너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거야. 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앞으로 몇 년간은 죄 많은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지. 네가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놓아둘 거야. 네가 겪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너의 단순성을 고양시켜, 육체 속에서는 그렇게 오래 살 수 없겠지만 정신 속에서는 오래도록 살아남게 했어. 너는 예감에 가득 차 ‘술래잡기’에 의해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어.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홍성광)
안녕, 네가 살아 있든 그 상태로 머물러 있든 안녕! 너의 전망은 어둡다. 네가 휩쓸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는 앞으로도 수년간 죄 많은 춤사위를 계속 벌일 테니 말이다. 네가 거기서 빠져 나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덤덤한 심정으로 이 물음을 미해결로 남겨 놓으려 한다. 너의 단순함을 고양시킨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육체적으로는 그다지 오래 살 수 없을 너를 정신적으로는 오래 살아남게 했던 거야. 너는 예감에 가득 차 술래잡기의 방식에 따라 사랑의 꿈이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피어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던 것이다. 세계를 뒤덮는 이 죽음의 축제로부터, 온 세상의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저 끔찍한 열병의 도가니로부터, 어느 때가 되어야 사랑이 피어날 것인가?(원당희)
잘 가게나 – 자네가 살아 있든,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그대로 머물러 있든 간에 말일세! 자네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을 것이네. 자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아직도 여러 해에 걸쳐 죄 많은 춤을 계속 출 것이기 때문이네.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 둘 걸세. 자네의 단순성을 높여 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육체 속에서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게 한 것을 정신 속에서는 오래도록 살게 해주었네. 자네는 예감으로 충만해 <술래잡기> 방법으로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네. 이 세계를 뒤덮은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도 같은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르겠지?(윤순식)
앞서 ‘Treue’를 네 역자가 다 ‘성실성’으로 옮긴 것과 비슷한 현상인데, 이번에는 ‘etwas hoch wetten’이란 독문을 네 역자가 다 ‘~을 크게 기대하다’로 옮긴 사실은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심한 우연이다. 문제의 ‘술래잡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셋은 곽복록을 답습하고 있지만, 한 사람은 아예 무시하고 옮기지도 않고 있다. ‘가독성’을 높이고자 이른바 ‘독자에게 다가가는’ 번역을 선호했다고 치더라도, 이런 생략법은 아무래도 성실하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곽복록이 오역한 곳에서, 둘은 단순성을 ‘높여주었다’고 번역하고 있고, 홍성광과 원당희는 단순성을 ‘고양시켰다’고 번역하고 있다. 후자는 곽복록의 실수로 생긴 오역이 후배 역자에 의해 올바르게 교정되는 드문 예이기도 하다. 말이 난 김에 확실히 해 두자면, ‘단순성을 높여주었다’는 표현은 ‘결정적 오역’을 피하려고 애매한 지점에서 그만 막연하게 머문 해석이다. 즉, ‘더 단순하게 만들었다’는 것인지, ‘단순성을 고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지점에서 그냥 머물러 있는 모호한 번역이다. 이에 비해, 단순성을 ‘고양시켰다’는 홍성광과 원당희의 번역이 옳다는 사실이, 이 소설의 ‘교양소설적 구조’를 감안할 때,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홍성광 및 원당희의 번역보다 뒤에 나온 윤순식의 번역이 이를 따르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두 문장에서는,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예감에 가득 차서 꿈속에서의 자신의 성찰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다 보니, 죽음과 육체의 방종을 체험한 그에게서 ‘사랑에 관한 어떤 꿈이 피어났’는데, 또 다른 죽음의 잔치라 할 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도 언젠가 ‘그러한 사랑’이 피어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 문장의 ‘사랑에 관한 어떤 꿈 (ein Traum von Liebe)’과 뒤 문장의 ‘바로 그 사랑(die Liebe)’을 대비시켜야 한다. 역자가 뒤 문장의 ‘사랑’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5명의 역자가 다 이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윤순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저 끔찍한 열병과도 같은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르겠지?’라고까지 옮김으로써,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를 것임을 조금 더 기정사실화하는 방향으로 의미를 조금 바꾸고 있다. 원문을 보면, 희망을 품고는 있으나 아직은 중립적인 의문문에 머물고 있다. 제일 나중에 나온 번역이 중립적 질문을 하고 있는 서술자의 관점까지 약간 변경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불필요한 수정이며, 결과적으로 개악이다.
3. 맺는말과 짤막한 후기
지금까지 편의상 소설 <마의 산> 중에서 세 대목만 골라서, 그 번역의 실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선, 곽복록의 번역이 뒤에 나온 다른 번역들을 위한 중요한 표본으로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술래잡기’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곽복록이 오역을 하면, 그 오역이 거의 수정되지 못하고 후배들에 의해 답습되는 경향이 짙다. 위의 ‘술래잡기’, ‘성실성’, ‘탈주병’, ‘크게 기대하다’ 등의 예에서도 드러났지만,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은 출발어 원문을 보고 새로이 해석해 보고자 하는 시도를 거의 해 보지도 않고, 대체로 그냥 따라가고만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점에서 작품 제목이라도 달리 번역해 본 원당희의 시도는 단연 돋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이 현대 한국어 구사에서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홍경호는 원문의 복잡한 요소를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있는데, 이것이 가독성을 높이는 정당한 방법이 아님은 물론이고, 본받을 만한 역자의 자세가 아님은 명백하다. 요컨대,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이 현대 한국어 구사에서 진일보했지만, 그들의 번역이 곽복록 번역판의 수준을 시대적으로 완전히 뛰어넘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곽복록의 후배 역자들의 출발어 원전 해독 능력이 곽복록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번역을 하는 데에는 우선 출발어 원전에 대한 - 독해력 이전에 이미 느낌으로 다가오는 - 직관적 이해력이 전제되어야 하고, 도착어의 능통한 구사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 번역 비평이라는 것을 처음 쓰자니, 관련 역자님들께 미안한 마음 때문에 여러 번 가슴이 오그라들곤 했다. 막상 필자가 <마의 산>이라는 이 문제작을 옮겨야 한다고 ‘역지사지’를 해 보았을 때, 이 역자들의 끈기와 성취를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이었다. 과연 그 기나긴 작업 기간 내내 두 언어 사이, 두 문화 사이를 잇는 그 불편한 교량 작업을 끈기 있게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하고 심각하게 자문해 보기도 했다.
정말 지난한 작업이다. 아무나 함부로 덤벼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출발어와 도착어, 출발문화와 도착문화에 거의 똑같이 조예가 깊어야 하고, 작가에 대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오랜 온축(蘊蓄)이 있어야 한다. 우리말과 우리 문학에 대한 공부도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설령 그런 역자라 할지라도, 이 <마의 산>과 같은 대작을 올바르게 번역해 내자면, 자신의 일생을,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무서운 일이다. 이런 무서운 작업의 결과를 놓고 감히 비평을 한다는 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섭고 불편하다고 해서 그냥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은사든, 선배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오직 바람직한 독문학 번역 및 번역 비평의 미래만 생각하고자 했으며, ‘좋은 말’과 ‘온유한 미사여구’ 뒤에 숨고 싶어 하는 ‘낙산 도동재(道東齋)의 독거노인’을 사정없이 편달(鞭撻)함으로써, 그가 읽고 느낀 진실을 그대로 기록하도록 독려했다. 그만큼 지금 독문학계에서의 번역 비평이 그 엄중한 출발선 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곽복록(1976): 마의 산. 동서문화사.
홍경호(1983): 마의 산. 금성출판사.
홍성광(2008): 마의 산. 을유문화사.
원당희(2013): 마법의 산. 세창미디어.
윤순식(2014): 마의 산.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