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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AU0014}}의 소설 {{A01}} <!--작품소개-->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남긴 유일한 소설로 영혼의 내면을 기술한 서정적 교양소설이다. ‘그리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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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남긴 유일한 소설로 영혼의 내면을 기술한 서정적 교양소설이다. ‘그리스의 은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소설의 1부는 1797년에, 2부는 1799년에 발표되었다.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 삼으며 살아가는 그리스인 휘페리온이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줄곧 오스만 터키의 압제하에 있던 그리스인들이 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18세기이다. 1부에서 고향 티나에서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 휘페리온은 스승 아마다스를 만나 신화, 역사, 수학, 자연, 천문학 등을 섭렵한다. 아마다스와 작별한 후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행동주의자 알라반다를 만나 최고의 우정을 나눈다. 그는 또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신성한 것”이란 이념의 구현체인 그리스 여성 디오티마와의 사랑을 경험한다. 봄의 축제 분위기로 상승하던 1부와는 달리 쇠락하는 가을 분위기가 지배하는 2부에서 휘페리온은 알라반다와 함께 조국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가한다. 휘페리온의 ‘행위에 대한 욕구’는 함께 참전한 무리의 무차별적인 파괴와 약탈 행위로 손상을 입고, 전투에서 부상당한 휘페리온은 절망에 빠진다. 휘페리온과의 우정을 위해 네메시스 결사단을 배반한 알라반다의 죽음과 지상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이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은 디오티마의 죽음이 2부의 중심을 이룬다. 휘페리온은 독일로 가지만 그곳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스로 다시 돌아와 은자로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의 고대 그리스에 대한 동경과 지난날에 대한 회상은 당시의 독일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실제 작가 횔덜린이 당대의 독일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정신에 비추어 독일인들의 고루함과 편협함, 그들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국내 초역은 홍경호에 의해 1975년 이루어졌고(범조사), 2008년 장영태에 의해 새로 번역되었다(을유세계문학전집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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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남긴 유일한 소설로 영혼의 내면을 기술한 서정적 교양소설이다. ‘그리스의 은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소설의 1부는 1797년에, 2부는 1799년에 발표되었다.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 삼으며 살아가는 그리스인 휘페리온이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줄곧 오스만 터키의 압제하에 있던 그리스인들이 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18세기이다. 1부에서 고향 티나에서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 휘페리온은 스승 아마다스를 만나 신화, 역사, 수학, 자연, 천문학 등을 섭렵한다. 아마다스와 작별한 후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행동주의자 알라반다를 만나 최고의 우정을 나눈다. 그는 또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신성한 것”이란 이념의 구현체인 그리스 여성 디오티마와의 사랑을 경험한다. 봄의 축제 분위기로 상승하던 1부와는 달리 쇠락하는 가을 분위기가 지배하는 2부에서 휘페리온은 알라반다와 함께 조국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가한다. 휘페리온의 ‘행위에 대한 욕구’는 함께 참전한 무리의 무차별적인 파괴와 약탈 행위로 손상을 입고, 전투에서 부상당한 휘페리온은 절망에 빠진다. 휘페리온과의 우정을 위해 네메시스 결사단을 배반한 알라반다의 죽음과 지상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이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은 디오티마의 죽음이 2부의 중심을 이룬다. 휘페리온은 독일로 가지만 그곳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스로 다시 돌아와 은자로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의 고대 그리스에 대한 동경과 지난날에 대한 회상은 당시의 독일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실제 작가 횔덜린이 당대의 독일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정신에 비추어 독일인들의 고루함과 편협함, 그들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국내 초역은 홍경호에 의해 1975년 이루어졌다(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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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히페리온 || 히페리온 || || F. 횔덜린 || 홍경호 || 1975 || 汎友社 || 11-320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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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히페리온 || 젊은 詩人에게, 히페리온, 現代의 理性과 反理性 || 엘리트 북스 7 || 횔더린 || 홍경호, 신일철 || 1983 || 汎潮社 || 147-385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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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휘페리온 || 휘페리온 || 을유세계문학전집 11 || 프리드리히 횔덜린 || 장영태 || 2008 || 을유문화사 || 9-320 || 완역 || 완역 ||
 
| 4 || 휘페리온 || 휘페리온 || 을유세계문학전집 11 || 프리드리히 횔덜린 || 장영태 || 2008 || 을유문화사 || 9-320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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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휘페리온 || 히페리온, 그리스의 은자 ||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42 || 프리드리히 횔덜린 || 김재혁 || 2015 || 책세상 || 7-292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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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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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은 반평생을 정신병 환자로 탑 속에 갇혀 살았던 불우한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유일한 소설이다. 휘페리온은 이 소설의 일인칭 화자로 나오는 그리스인 주인공의 이름이며, 독일인 친구 벨라르민에게 휘페리온이 겪은 일들, 특히 사랑과 전쟁의 체험을 편지 형식으로 알리는 서간체 소설이다. 횔덜린이 본격적인 시작에 몰두하기 전에 쓴, 매우 서정적인 문체가 두드러지는 소설로서 1,2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1797년에 제1권, 1799년에 제2권이 코타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소설에서 디오티마라는 여성은 자연과 일치하는 이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 특히 문화국가로서의 아테네 예찬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주인공 휘페리온의 행동의 동기를 이루고 있으나, 그 내용은 고대 그리스 미술의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을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로 정의 내린 빙켈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리스 군대의 잔인함에 대한 실망이 휘페리온의 은거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런 내용은 프랑스 혁명 직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분열된 유럽의 상황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평화의 축제’를 꿈꾸던 횔덜린이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하던 많은 유럽 지식인들과 정신적 유대를 맺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한편, 자연과의 조화로운 일치 관계를 상실한 독일인들의 정신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리스 은자의 시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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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체 소설은 이미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젊은 베르터의 고뇌]]>(1774)를 통해 당시 독일 독자들에게 선을 보인 새로운 문학적 형식으로서, 특히 일인칭 서술자의 섬세한 감정표현에 유리한 형식인 반면에, 통일된 주관적 감정 안에서 무수히 사용되는 이상주의적, 잠언적 어휘를 번역텍스트에서 재현해내기가 만만치 않은 장애의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은 내밀한 대화의 분위기는 자칫 문맥을 벗어난 추상적인 논문의 일절처럼 읽히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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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75년 홍경호의 번역이 범우사에서 <히페리온>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후 30여 년 동안 유일한 번역본이었으나, 2008년 장영태의 <휘페리온>(을유문화사), 2015년 김재혁의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책세상)이 발간되었으며, 2021년 범우사에서 홍경호의 <히페리온>을 초판본으로 판권 표시하여 재 발행했다. 따라서 두 종류의 번역으로 존재하는 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사소한 윤문 이외에는 내용상 거의 수정된 사항이 없다. 그러나 장영태와 김재혁이 <휘페리온 또는 그리스의 은자>(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enland)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번역의 범위로 삼은 반면에 홍경호의 번역본은 <히페리온의 斷想>과 <히페리온의 청춘시절>을 첨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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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구성은 <제1권>(Erster Band), <제2권>(Zweiter Band)으로 나뉘어 있고, 각 권은 또다시 각각 <제1서>(Erstes Buch), <제2서>(Zweites Buch)로 구분되어 있으며, <제1권>에 일반 독자에게 향하는 <서문>(Vorrede)이 삽입된 이후 서간체 소설 형식에 따라 발신자와 수신자를 표기하여 주로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그리고 후반부에는 <휘페리온이 디오티마에게>, <디오티마가 휘페리온에게> 보내는 편지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을 장영태는 <'''제1권'''>, <서문>, <제1서>, <제2서>, <'''제2권'''>, <제1서>, <제2서>로 옮겼고, 김재혁은 <서문>, <'''제1권'''>, <제1장>, <제2장>, <'''제2권'''>, <제1장>, <제2장>으로, 원문 텍스트를 따라 숫자만으로 구분표시를 했으나, 홍경호는 <권> 대신 <부>를 사용하여 전체를 <제1부>와 <제2부>로 나누고, 각 부는 그 하위 단위를 숫자만으로 표시하지 않고 소제목을 달았다: <제I부>, <서문>, <1.짓밟힌 우정의 화원(花園)>, <2. 하나로서 모두인 아름다움>, <제II부>, <1. 슬퍼하는 대지(大地)>, <2, 영원히 작열하는 생명>. 이러한 소제목은 해당 부분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시하려는 의도를 표시하고는 있으나, 원문 텍스트의 주제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원문텍스트의 의미지평을 제한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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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소설 <휘페리온>은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편지만으로 이루어진 일인칭 소설로서 날자 표시도 없이 발신자와 수신자만을 적고 있는데, 무수히 반복되는 이 구절은 엄밀히 말하면 일인칭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객관적 시각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부분이다. 물론 제2권 끝부분에 휘페리온이 디오티마에게, 그리고 디오티마가 히페리온에게 보내는 편지도 들어있으나 그것도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편지에 삽입된 인용문의 성격을 띤다, 이것을 홍경호는 “휘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로, 김재혁과 장영태는 “휘[히]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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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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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경호(1975)| 홍경호 역의 <히페리온>(1975/ <sup>1</sup>2021, 2022)]]<span id="홍경호(1975)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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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최초(1975), 최신(2022) 번역본이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46년의 시차를 두고 발행된 두 번역본 사이에는 낡은 표현법을 현대의 어법에 따라 바꾸는 정도의 사소한 윤문 이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최신판의 저작권 표시에 “초판 1쇄” 일자를 “2021년 8월 5일”로 명기했음에도, 첫머리에 “1974년 12월 25일”에 쓴 “옮긴이”의 서문을 그대로 싣고 있는데, 이는, 역시 몇 가지 사소한 윤문을 제외하면, 1975년에 발행된 초판본의 “譯者”가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보내는 글과 내용이 똑같다. 최신 번역본 어디에도 최초 번역본과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문 텍스트에 대한 개역(改譯)이 전무한, 중복에 가까운 최신판에 “초판”이라는 저작권 표시를 한 것은 출판윤리상의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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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홍경호의 <히페리온> 최초 번역본과 최신 번역본은 똑같이 다음과 같은 번역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번역의 저본을 밝히지 않고 있다. 둘째, 원문 텍스트의 단락 구분을 지키지 않고 있다. 셋째, 원문 텍스트에서 탈락된 부분이 있다. 넷째, 오역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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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는 물론 장영태와 김재혁과는 달리 <히페리온의 斷想>과 <히페리온의 청춘 시절>을 함께 옮겨 수록했으나, 이 두 텍스트가 “《히페리온》 보다 먼저 씌어진 것”이고, “그것들은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소품”이라고 규정했을 뿐, <히페리온>의 생성사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사항들, 즉 이 세 판본의 복잡한 서지적 관계는 일체 상술하지 않았다. 특히 <히페리온의 斷想>은 <탈리아편(篇)>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고, 서문에서는 오히려 이 부제만을 지칭하고 있는데, 쉴러가 1794년에 발행한 문예지 <노이에 탈리아>(Neue Thalia)에 게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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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의 문체적 특징을 서술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역자의 기본적인 번역전략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시와 사상이 언어의 생동하는 리듬에 의해 그 융합이 실현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작품 속에서 그 점을 직접 캐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시와 사상의 융합’, 그것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생동하는 리듬’은 ‘작품 속’에 들어있는 문체의 특징을 가리키며, 그것을 ‘직접 캐[낼]’ 것을 독자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으나, 먼저 번역을 통한 그러한 특징들의 구현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홍경호의 번역본은 원문 텍스트의 사상적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일례로 한 대목의 원문과 번역본을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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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e eine Pflanze, wenn ihr Friede den strebenden Geist besänftigt, und die einfältige Genügsamkeit wiederkehrt in die Seele – so stand er vor mir.<ref>Hölderlin, Friedrich(1969): Hyperion. In: Beißner, Friedrich / Schm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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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chen(ed.): Werke und Briefe. Vol. 1. Frankfurt a. M.: Insel Verlag, 302. 이하에서는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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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평화스런 모습은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정신을 부드럽게 하며, 장식이 없는 만족의 감정을 혼에 불러 일으켜 준다. 그러한 식물 앞에 서듯, 그는 내 앞에 섰었다.(홍경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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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원문 텍스트의 어휘와 문장구조를 처리하는 번역의 전략을 살펴보자면, 1) 전체적으로 하나의 복합문 (wie ~ , so ~)을 두 개의 서술문으로 만들었다. 2) 원문과 일치하지 않거나 원문에 없는 어휘를 번역어에서 사용하고 있다(“초록의 평화스런 모습”, “인간의 끊임없는”, “혼에 불러 일으켜 준다”). 3) 우리말 표현이 생경하다(“장식이 없는 만족의 감정”). 4) 비유의 대상이 틀렸다(eine Pflanze = 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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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장영태는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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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평화로움으로 애쓰고 있는 영혼을 달래주고 그 천진난만한 만족감이 영혼 안으로 되돌아갈 때의 한 그루 나무처럼 – 그렇게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장영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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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위에서 지적한 홍경호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이 대부분 해소되고 있으나, 1) Seele(영혼)와 Geist(정신)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 원문의 의도가 무시되고 있으며, 2) “자신의 평화로움으로 애쓰고 있는 영혼”은 불분명한 어순 때문에 각각 다른 귀속처(자신의 평화로움 = 식물, 애쓰고 있는 영혼 = 사람)의 혼동을 야기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김재혁의 다음과 같은 번역은 이러한 문장 구조상의 문제들을 말끔히 해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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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의 정신을 평온함으로 식혀주고, 영혼에 소박한 만족을 심어주는 한 포기 초목처럼 그는 그렇게 내 앞에 와서 서 있었다.(김재혁,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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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strebende Geist가 각각 “끊임없는 노력의 정신”(홍경호), “애쓰고 있는 영혼”(장영태), “열광의 정신”(김재혁)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은, 원문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 차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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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전체적으로 추상적 개념과 주관적 감정표현을 조화롭게 재현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끝에서 두 번째 편지의 한 대목을 예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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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t er in ein Fach gedrückt, wo gar der Geist nicht leben darf, so stoß ers mit Verachtung weg und lerne pflügen! Deine Deutschen aber bleiben gerne beim Notwendigsten, und darum ist bei ihnen auch so viele Stümperarbeit und so wenig Freies, Echterfreuliches.(433-43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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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가 정신이 깃들일 여지가 없는 전문적인 것에 치우쳤다면, 그런 것은 경멸해 버리고 오히려 교양을 배우는 것이 나으리라. / 그러나 그대 독일인들은 어떻든 눈앞에 닥친 필요성에만 집착한다. / 그러기에 그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세공품 아닌 것이 없고, 자유스런 것, 정말로 사람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홍경호,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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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의 문제점을 열거하자면, 1) 여기 인용한 번역문에서 사선으로 단락 구분을 표시한 것은 원문에 없는 것이다. 2) 원문 텍스트의 명령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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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라”, “배워라”)을 서술형(“버리고”, “나으리라”)으로 바꿨다. 3) “교양”은 “전문적인 것”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즉 전공과목과 교양과목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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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pflügen”은 ‘밭갈이’를 의미한다. 4)“세공품”은 Stümperarbeit의 번역어인데, 전체 문맥에 맞지 않는다.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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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細工)”이라는 용어는 Kunststück의 번역어로도 등장하는데(64), 이 번역어로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 완전한 조화 속의 자연현상과 불완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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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人工)의 대립 관계에 대한 횔덜린의 비판적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의미를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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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원문 텍스트의 문단 나누기를 반대로, 즉 나누어야 할 곳은 합치고, 한 문단은 여러 문단으로 나눈 경우가 많은데, 이는 쉼표로 이어지는 부분을 여러 문장으로 끊어서 옮기는 것과 같이, 원문 텍스트의 리듬과 호흡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히페리온>의 마지막 부분의 표기 형식이다. 이 부분은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죽은 디오티마를 상대로 떠올렸던 긴 상념을 따로 전달하는 상황인데, 원문에 표시되어 있는 따옴표를 없애버렸을 뿐만 아니라, 맨 마지막 구절을 탈락시킴으로써 발신자와 수신자의 대화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오, 자연이여!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의 신들이여, 나는 인간계의 꿈은 모두 보아왔으나, 자연 그대만이 살아있다고 말하리라”.(홍경호, 223) “나는 생각했다”라는 번역문의 위치가 잘못되어, 친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의 내용과 그렇게 생각했다는 과거의 행동이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김재혁은 “나는 생각했다”를 따옴표(‘) 밖으로 끌어내고 휘페리온의 ‘생각’이 끝난 곳에서 따옴표를 닫으며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음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김재혁, 292) 장영태는 이 끝부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를 김재혁처럼 휘페리온의 ‘생각’을 종결된 따옴표 밖으로 위치시키기는 했으나, 그 ‘생각’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홍경호와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 그대,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그대의 신들과 더불어, 자연이여!”(장영태,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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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의 <히페리온> ‘제2부’에 제사(題辭)로 사용된 소포클레스의 인용구를 원문에서 생략한 것은, 본래 없는 소제목들을 첨부하여 주제를 함축적으로나마 드러내려는 시도와 상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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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재혁(2015)| 김재혁 역의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2015)]]<span id="김재혁(2015)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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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의 번역은 한국어의 유려함이 돋보인다. 예컨대 인간 내지 인공(人工)과 자연의 대조를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번역텍스트에서는 원문의 복잡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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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식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한때는 너희와 같았다고! 그리고 순수한 별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나중에 다른 세상에 가면 너희와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그러는 동안 인간은 분열되어 자신을 상대로 이런저런 기술을 써본다. 그렇게 해서 일단 완전히 해체되면 언젠가 담쌓기처럼 뭔가 생동감 있는 것을 조립해 낼 수 있을 것처럼. 개선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인간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행한 일을 스스로 여전히 재주라고 생각한다.(김재혁,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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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원문과 대조를 하지 않아도 자연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휘페리온의 풍자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 번역의 장점은 그와 같은 대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았을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저절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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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목을 향해 인간은 말한다. 자기도 애초엔 너희들 같았노라고. 깨끗한 별을 향해 이야기한다. 자기는 다른 세계에서는 너희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 그러기에 인간은 사물을 부수며 거기에다 인공을 가한다. 산 것이 일단 분해해 버린 뒤에도 벽이나 담처럼 그것을 조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런 수고로써 만사가 전혀 개선되지 않아도 일절 그 방법을 고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은 하나의 작은 세공(細工)에 지나지 않는다.(홍경호,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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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한 문단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문제 삼지 않더라도, ‘초목’과 ‘식물’, ‘깨끗한 별’과 ‘순수한 별’, ‘이야기한다’와 ‘말한다’, ‘자기’와 ‘나’ 등 어휘 선택도 다르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그러기에 인간은 사물을 부수며 거기에다 인공을 가한다. 산 것이 일단 분해해 버린 뒤”라는 부분이 원문 텍스트의 문법 관계를 오독한 결과라는 점이다.(“[...] inzwischen bricht er auseinander und treibt hin und wieder seine Künste mit sich selbst, als könnt er, wenn es einmal sich aufgelöst, Lebendiges zusammensetzen, wie ein Mauerwerk.”(302)) 그런 오독은 내용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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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은 상세한 역자후기에 “자유와 사랑을 위한 서정시”라는 부제를 붙임으로써 소설의 주제와 문체적 특징을 요약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간명하게 독자들에게 전한다. 무엇보다도 김재혁의 번역은 이 소설이 “탄탄한 서사 구조”와 “세세한 서정적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상상과 이상적인 것’에 눈길을 주는 ‘서정적 서간체 소설’의 특징, 그리고 ‘병렬문체와 대구표현’, ‘주어나 동사의 후치’를 통한 의식의 긴장감 조성’, ‘문장의 질서’와 ‘리듬’ 등 원문 텍스트가 지닌 여러 가지 언어적 특징들에 주목할 것을 번역전략의 전제로 삼는 것 같다. 그는 특히 ‘준고어’를 당시의 어법에 맞게 번역할 것과 횔덜린이 사용한 “철학용어를 일본식 번역어를 떠나 우리말 표현으로 문학어의 본질을 살려 번역”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 소설이 하이데거 이전에 쓰여졌기 때문에 이 소설에 나오는 Dasein을 ‘현존재’로 번역하는 것은 일본식이며 (그 자신은 ‘현존’(76)으로 번역), Wesen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 뜻한다고 했다. (실제는 그것을 “본질”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ins>본질적 약점</ins>을 보완해 주려고 자연이 만들어낸 미혹 중에서 가장 멋진 미혹이다.”(18) (“Es ist die schönste aller Täuschungen, womit die Natur der Schwachheit unseres Wesens aufhilft.”(299)) 또한 일본어 번역으로부터의 중역은 일찍이 제기된 번역의 과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낱말/어휘의 번역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다음의 문장은 아동 문학가이자 한글학자인 이오덕이 특히 비판하는 일본식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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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창공을 사랑하며, 깊은 <ins>내면에 있어</ins> 서로 닮아 있다.(김재혁, 292.밑줄 필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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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 또한 간혹 독일어 텍스트 자체를 오독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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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 kam nach Smyrna zurück, wie ein Trunkener vom Gastmahl. Mein Herz war des Wohlgefälligen zu voll, um nicht von seinem Überflusse der Sterblichkeit zu leihen. Ich hatte zu glücklich in mich die Schönheit der Natur erbeutet, um nicht die Lücken des Menschenlebens damit auszufüllen.(30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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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미르나로 돌아왔다. 잔치에서 술에 취해 돌아온 사람처럼. 나의 마음엔 만족감이 넘쳐 흘렀다. 그 넘침을 무상한 자연에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너무도 행복하게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삶의 빈틈을 채워 넣지 않을 수 없었다.(김재혁,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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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구절 장영태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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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향연에서 술에 취한 자가 돌아오듯이 스미르나로 돌아왔다. 나의 마음은 그 넘침을 인간들에게 나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만족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인간 삶의 결핍을 그것으로 채워 넣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 마음 가운데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행복하게 거두었다.(장영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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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은 원문의 “zu voll ..., um nicht / zu glücklich ..., um nicht” 의 복합구문을 각각 두 개의 문장으로 만들었고, 인간을 가리키는 “der Sterblichkeit”를 “자연”으로 오독했다.(특히 이 낱말은 다른 곳에서 “가멸적인 존재”(106)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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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아주 드물게 오역이 눈에 띄지만, 대체로 “원문의 음악적이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우리말로 되살리고 멀리서 천둥이 치는 듯한 번역의 모호함을 물리쳐 보려는 목적”은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여겨진다. 번역텍스트의 유려함이 원문 텍스트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매우 바람직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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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은 해설 끝부분에 텍스트 번역의 저본으로 사용한 카를 한저(Carl Hanser) 출판사의 1989년 판 횔덜린 전집과 해설을 위한 참고문헌 3종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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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영태 역의 <휘페리온>(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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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태는 번역 저본으로 삼은 슈투트가르트 판 횔덜린 전집(1943-1985)뿐만 아니라 헬링라트의 역사비평본(1913-1923), 자틀러의 프랑크푸르트 판(1976-2000) 등 3종의 판본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횔덜린 전공자답게 54쪽에 달하는 주석을 미주로 달았고, “문학의 나라에 있는 아직 아무도 발 딛지 않은 땅”이라는 횔덜린의 인용구를 제목으로 한 작품해설에서 이 소설의 생성사뿐만 아니라, 주제와 형식의 특징(편지체 소설, 교양소설, 철학적 소설), 등장인물의 성격(아다마스: 이상적 교사, 알라반다: 영웅적 우정, 디오티마: 이상의 체현) 등을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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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태의 주석이나 해설은 거의 논문처럼 읽힌다. 그의 <휘페리온>은 횔덜린 전공자의 번역으로서 거의 축자적(逐字的) 번역에 가깝다. 그러나 원문 이해의 정확성에 대한 요구와 번역문의 완결성이 얼마나 상응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세속에 시달린 휘페리온이 그리스의 자연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구절의 번역을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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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 vergiß nur, daß es Menschen gibt, darbendes, angefochtenes, tausendfach geärgertes Herz! und kehre wieder dahin, wo du ausgingst, in die Arme der Natur, der wandellosen, stillen und schönen.(296)<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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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저 잊자, 궁핍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수없이 분노를 산 이 마음이여! 그리고 그대가 떠나왔던 그곳으로, 변함없고 고요하며 아름다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다.(장영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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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잊어라, 고통과 시련에 시달리고 수천 번 분노한 마음이여, 이 세상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돌아가라, 네가 출발한 지점으로, 자연의 품속으로, 변함없고 고요하며 아름다운 자연의 품속으로.(김재혁,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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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태는 원문의 어순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그저 잊자”와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다”라는 권유형 또는 판결문 형식을 씀으로써, 비록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는 하나, 원문의 명령형과는 멀어졌다. 김재혁의 번역에서 돋보이는 것은 원문의 명령형을 그대로 옮겨 휘페리온의 절박한 심정을 살리는 한편, 그와 같은 절박한 심정에 어울리는 문장의 호흡을 표현하기 위해 원문의 어순을 재배열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감정표현의 긴장감은 행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축자적 번역으로는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의 예는 죽은 디오티마를 영원한 자연의 일부로 예찬하는 휘페리온의 감격적인 표현을 담고 있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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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 fallen die Menschen, wie faule Früchte von dir, o laß sie untergehn, so kehren sie zu deiner Wurzel wieder, und ich, o Baum des Lebens, daß ich wieder grüne mit dir und deine Gipfel umatme mit all deinen knospenden Zweigen! friedlich und innig, denn alle wuchsen wir aus dem goldnen Samkorn herauf.(43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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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은 썩은 과일처럼 그대로부터 떨어지고 있다. 오 그들이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라. 그렇게 하여 그들이 그대의 뿌리로 되돌아가도록 하라. 그리고 나는, 오 생명의 나무여, 나는 그대와 더불어 다시금 푸르러지고, 그대의 우듬지가 그대의 새싹이 움트는 가지들과 함께 숨쉬기를! 평화롭고 내밀하게 우리 모두가 황금의 종자로부터 움터 자라나기를!(장영태,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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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에서는 서술문(직설법, 현재 3인칭 복수), 명령문, 원망문(願望文, 가정법 1식), 그리고 다시 서술문(직설법, 과거 일인칭 복수)이 연속되고 있으며, 그만큼 화자인 휘페리온의 상념의 복잡한 구조와 긴장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장영태는 마지막 서술문을 원망문으로 바꿔놓아, 화자가 사실관계로 규정한 것을 소망의 대상으로 그 뜻을 왜곡시켰으며, 앞의 원망문에 속하는 “평화롭고 내밀하게(friedlich undinnig)”를 뒤의 서술문에 귀속시킴으로써 출생 근원이 같다는 화자의 믿음을 미래에 이룰 수 있는 소망의 대상으로 보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영태의 번역은 평생 횔덜린 연구에 매진한 전공자로서 원문에 대한 해박하고 정확한 독해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탄탄한 신뢰를 준다. 때때로 그러한 내용이 출발어와 도착어의 문체, 형식상의 불일치로 인해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점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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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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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휘페리온>은 그 생성사가 매우 복잡한 작품이다. 문학작품의 서지학적 생성사 연구는 그 역사-비판본 확정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특히 한 줄의 시행을 완성하기 위해 무수한 퇴고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 횔덜린의 경우는 면밀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히페리온의 단상>과 <히페리온의 청춘 시절>을 함께 번역 수록한 홍경호는 이 3종의 텍스트를 각각 “별개의 작품”이면서도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소품”이라고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 그 양식상의 차이와 변화과정(산문 → 운문 → 서간체 소설)에 대한 일말의 언급이 없다. 더구나 예나로 거주지를 옮긴 이후 같은 소재를 무운시(無韻詩 Blankvers)로도 쓴 횔덜린의 텍스트에 피히테의 자연관에 대한 거부와 플라톤의 객관적 이상주의의 영향이 나타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휘페리온>의 주제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이해를 축소시킨다. 김재혁과 장영태는 마지막 완성본인 <휘페리온>만을 번역대상으로 삼았는데, 앞으로는 ‘서간체 소설’ 형식과 관련된 생성사를 조금 더 상술할 것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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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독일어 Hyperion (Υπερων)의 원제를 <히페리온>(홍경호, 김재혁)으로 표기할 것이냐, <휘페리온>(장영태)으로 표기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현행 한글맞춤법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어떤 음성학적 근거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Schiller도 ‘실러’로 표기하게 되어 있으므로 출판사의 원칙과 고집을 꺾고 원음대로 표기할 것을 설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나, 삼라만상의 소리를 다 표기할 수 있다는 한글이라고 하니 원음에 가까운 표기를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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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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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2015):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 책세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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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태(2020; <sup>1</sup>2008): 휘페리온. 을유문화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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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호(2022; 2021/ <sup>1</sup>1975; <sup>2</sup>1992): 히페리온.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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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안문영</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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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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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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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독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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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횔덜린, 프리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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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비평된작품]]

2024년 8월 3일 (토) 01:24 기준 최신판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의 소설

휘페리온 (Hyperion)
작가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초판 발행1797/1799
장르소설


작품소개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남긴 유일한 소설로 영혼의 내면을 기술한 서정적 교양소설이다. ‘그리스의 은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소설의 1부는 1797년에, 2부는 1799년에 발표되었다.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 삼으며 살아가는 그리스인 휘페리온이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줄곧 오스만 터키의 압제하에 있던 그리스인들이 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18세기이다. 1부에서 고향 티나에서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 휘페리온은 스승 아마다스를 만나 신화, 역사, 수학, 자연, 천문학 등을 섭렵한다. 아마다스와 작별한 후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행동주의자 알라반다를 만나 최고의 우정을 나눈다. 그는 또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신성한 것”이란 이념의 구현체인 그리스 여성 디오티마와의 사랑을 경험한다. 봄의 축제 분위기로 상승하던 1부와는 달리 쇠락하는 가을 분위기가 지배하는 2부에서 휘페리온은 알라반다와 함께 조국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가한다. 휘페리온의 ‘행위에 대한 욕구’는 함께 참전한 무리의 무차별적인 파괴와 약탈 행위로 손상을 입고, 전투에서 부상당한 휘페리온은 절망에 빠진다. 휘페리온과의 우정을 위해 네메시스 결사단을 배반한 알라반다의 죽음과 지상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이 가능하지 않음을 깨달은 디오티마의 죽음이 2부의 중심을 이룬다. 휘페리온은 독일로 가지만 그곳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스로 다시 돌아와 은자로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의 고대 그리스에 대한 동경과 지난날에 대한 회상은 당시의 독일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실제 작가 횔덜린이 당대의 독일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정신에 비추어 독일인들의 고루함과 편협함, 그들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국내 초역은 홍경호에 의해 1975년 이루어졌다(범우사).


초판 정보

Hölderlin, Friedrich(1797/1799): 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enland. Tübingen: Cotta.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히페리온 히페리온 F. 횔덜린 홍경호 1975 汎友社 11-320 완역 완역
2 히페리온 젊은 詩人에게, 히페리온, 現代의 理性과 反理性 엘리트 북스 7 횔더린 홍경호, 신일철 1983 汎潮社 147-385 편역 완역
3 히페리온 히페리온 汎友古典選 12 F. 횔덜린 홍경호 1990 범우사 13-283 완역 완역
4 휘페리온 휘페리온 을유세계문학전집 11 프리드리히 횔덜린 장영태 2008 을유문화사 9-320 완역 완역
휘페리온 히페리온, 그리스의 은자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42 프리드리히 횔덜린 김재혁 2015 책세상 7-292 완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휘페리온>은 반평생을 정신병 환자로 탑 속에 갇혀 살았던 불우한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유일한 소설이다. 휘페리온은 이 소설의 일인칭 화자로 나오는 그리스인 주인공의 이름이며, 독일인 친구 벨라르민에게 휘페리온이 겪은 일들, 특히 사랑과 전쟁의 체험을 편지 형식으로 알리는 서간체 소설이다. 횔덜린이 본격적인 시작에 몰두하기 전에 쓴, 매우 서정적인 문체가 두드러지는 소설로서 1,2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1797년에 제1권, 1799년에 제2권이 코타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소설에서 디오티마라는 여성은 자연과 일치하는 이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 특히 문화국가로서의 아테네 예찬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주인공 휘페리온의 행동의 동기를 이루고 있으나, 그 내용은 고대 그리스 미술의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을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로 정의 내린 빙켈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리스 군대의 잔인함에 대한 실망이 휘페리온의 은거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런 내용은 프랑스 혁명 직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분열된 유럽의 상황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평화의 축제’를 꿈꾸던 횔덜린이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하던 많은 유럽 지식인들과 정신적 유대를 맺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한편, 자연과의 조화로운 일치 관계를 상실한 독일인들의 정신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리스 은자의 시각을 담고 있다.

서간체 소설은 이미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1774)를 통해 당시 독일 독자들에게 선을 보인 새로운 문학적 형식으로서, 특히 일인칭 서술자의 섬세한 감정표현에 유리한 형식인 반면에, 통일된 주관적 감정 안에서 무수히 사용되는 이상주의적, 잠언적 어휘를 번역텍스트에서 재현해내기가 만만치 않은 장애의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은 내밀한 대화의 분위기는 자칫 문맥을 벗어난 추상적인 논문의 일절처럼 읽히기 쉽다.

이 소설은 1975년 홍경호의 번역이 범우사에서 <히페리온>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후 30여 년 동안 유일한 번역본이었으나, 2008년 장영태의 <휘페리온>(을유문화사), 2015년 김재혁의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책세상)이 발간되었으며, 2021년 범우사에서 홍경호의 <히페리온>을 초판본으로 판권 표시하여 재 발행했다. 따라서 두 종류의 번역으로 존재하는 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사소한 윤문 이외에는 내용상 거의 수정된 사항이 없다. 그러나 장영태와 김재혁이 <휘페리온 또는 그리스의 은자>(Hyperion oder Der Eremit in Griechenland)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번역의 범위로 삼은 반면에 홍경호의 번역본은 <히페리온의 斷想>과 <히페리온의 청춘시절>을 첨가하였다.

이 소설의 구성은 <제1권>(Erster Band), <제2권>(Zweiter Band)으로 나뉘어 있고, 각 권은 또다시 각각 <제1서>(Erstes Buch), <제2서>(Zweites Buch)로 구분되어 있으며, <제1권>에 일반 독자에게 향하는 <서문>(Vorrede)이 삽입된 이후 서간체 소설 형식에 따라 발신자와 수신자를 표기하여 주로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그리고 후반부에는 <휘페리온이 디오티마에게>, <디오티마가 휘페리온에게> 보내는 편지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을 장영태는 <제1권>, <서문>, <제1서>, <제2서>, <제2권>, <제1서>, <제2서>로 옮겼고, 김재혁은 <서문>, <제1권>, <제1장>, <제2장>, <제2권>, <제1장>, <제2장>으로, 원문 텍스트를 따라 숫자만으로 구분표시를 했으나, 홍경호는 <권> 대신 <부>를 사용하여 전체를 <제1부>와 <제2부>로 나누고, 각 부는 그 하위 단위를 숫자만으로 표시하지 않고 소제목을 달았다: <제I부>, <서문>, <1.짓밟힌 우정의 화원(花園)>, <2. 하나로서 모두인 아름다움>, <제II부>, <1. 슬퍼하는 대지(大地)>, <2, 영원히 작열하는 생명>. 이러한 소제목은 해당 부분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시하려는 의도를 표시하고는 있으나, 원문 텍스트의 주제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원문텍스트의 의미지평을 제한할 수도 있다.

그밖에 소설 <휘페리온>은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편지만으로 이루어진 일인칭 소설로서 날자 표시도 없이 발신자와 수신자만을 적고 있는데, 무수히 반복되는 이 구절은 엄밀히 말하면 일인칭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객관적 시각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부분이다. 물론 제2권 끝부분에 휘페리온이 디오티마에게, 그리고 디오티마가 히페리온에게 보내는 편지도 들어있으나 그것도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편지에 삽입된 인용문의 성격을 띤다, 이것을 홍경호는 “휘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로, 김재혁과 장영태는 “휘[히]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로 옮기고 있다.


2. 개별 번역 비평

1) 홍경호 역의 <히페리온>(1975/ 12021, 2022)

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최초(1975), 최신(2022) 번역본이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46년의 시차를 두고 발행된 두 번역본 사이에는 낡은 표현법을 현대의 어법에 따라 바꾸는 정도의 사소한 윤문 이외에는 별 차이가 없다. 최신판의 저작권 표시에 “초판 1쇄” 일자를 “2021년 8월 5일”로 명기했음에도, 첫머리에 “1974년 12월 25일”에 쓴 “옮긴이”의 서문을 그대로 싣고 있는데, 이는, 역시 몇 가지 사소한 윤문을 제외하면, 1975년에 발행된 초판본의 “譯者”가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보내는 글과 내용이 똑같다. 최신 번역본 어디에도 최초 번역본과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문 텍스트에 대한 개역(改譯)이 전무한, 중복에 가까운 최신판에 “초판”이라는 저작권 표시를 한 것은 출판윤리상의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홍경호의 <히페리온> 최초 번역본과 최신 번역본은 똑같이 다음과 같은 번역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번역의 저본을 밝히지 않고 있다. 둘째, 원문 텍스트의 단락 구분을 지키지 않고 있다. 셋째, 원문 텍스트에서 탈락된 부분이 있다. 넷째, 오역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홍경호는 물론 장영태와 김재혁과는 달리 <히페리온의 斷想>과 <히페리온의 청춘 시절>을 함께 옮겨 수록했으나, 이 두 텍스트가 “《히페리온》 보다 먼저 씌어진 것”이고, “그것들은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소품”이라고 규정했을 뿐, <히페리온>의 생성사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사항들, 즉 이 세 판본의 복잡한 서지적 관계는 일체 상술하지 않았다. 특히 <히페리온의 斷想>은 <탈리아편(篇)>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고, 서문에서는 오히려 이 부제만을 지칭하고 있는데, 쉴러가 1794년에 발행한 문예지 <노이에 탈리아>(Neue Thalia)에 게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다.

<휘페리온>의 문체적 특징을 서술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역자의 기본적인 번역전략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시와 사상이 언어의 생동하는 리듬에 의해 그 융합이 실현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작품 속에서 그 점을 직접 캐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시와 사상의 융합’, 그것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생동하는 리듬’은 ‘작품 속’에 들어있는 문체의 특징을 가리키며, 그것을 ‘직접 캐[낼]’ 것을 독자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으나, 먼저 번역을 통한 그러한 특징들의 구현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홍경호의 번역본은 원문 텍스트의 사상적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일례로 한 대목의 원문과 번역본을 비교해 본다.


Wie eine Pflanze, wenn ihr Friede den strebenden Geist besänftigt, und die einfältige Genügsamkeit wiederkehrt in die Seele – so stand er vor mir.[1]
초록의 평화스런 모습은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정신을 부드럽게 하며, 장식이 없는 만족의 감정을 혼에 불러 일으켜 준다. 그러한 식물 앞에 서듯, 그는 내 앞에 섰었다.(홍경호, 22)


우선 원문 텍스트의 어휘와 문장구조를 처리하는 번역의 전략을 살펴보자면, 1) 전체적으로 하나의 복합문 (wie ~ , so ~)을 두 개의 서술문으로 만들었다. 2) 원문과 일치하지 않거나 원문에 없는 어휘를 번역어에서 사용하고 있다(“초록의 평화스런 모습”, “인간의 끊임없는”, “혼에 불러 일으켜 준다”). 3) 우리말 표현이 생경하다(“장식이 없는 만족의 감정”). 4) 비유의 대상이 틀렸다(eine Pflanze = er).

이 대목을 장영태는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자신의 평화로움으로 애쓰고 있는 영혼을 달래주고 그 천진난만한 만족감이 영혼 안으로 되돌아갈 때의 한 그루 나무처럼 – 그렇게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장영태, 22)


여기서는 위에서 지적한 홍경호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이 대부분 해소되고 있으나, 1) Seele(영혼)와 Geist(정신)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 원문의 의도가 무시되고 있으며, 2) “자신의 평화로움으로 애쓰고 있는 영혼”은 불분명한 어순 때문에 각각 다른 귀속처(자신의 평화로움 = 식물, 애쓰고 있는 영혼 = 사람)의 혼동을 야기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김재혁의 다음과 같은 번역은 이러한 문장 구조상의 문제들을 말끔히 해결하고 있다.


열광의 정신을 평온함으로 식혀주고, 영혼에 소박한 만족을 심어주는 한 포기 초목처럼 그는 그렇게 내 앞에 와서 서 있었다.(김재혁, 23)


der strebende Geist가 각각 “끊임없는 노력의 정신”(홍경호), “애쓰고 있는 영혼”(장영태), “열광의 정신”(김재혁)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은, 원문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 차이를 보여준다.

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전체적으로 추상적 개념과 주관적 감정표현을 조화롭게 재현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끝에서 두 번째 편지의 한 대목을 예로 살펴보기로 한다.


[...] ist er in ein Fach gedrückt, wo gar der Geist nicht leben darf, so stoß ers mit Verachtung weg und lerne pflügen! Deine Deutschen aber bleiben gerne beim Notwendigsten, und darum ist bei ihnen auch so viele Stümperarbeit und so wenig Freies, Echterfreuliches.(433-434)
만약 그가 정신이 깃들일 여지가 없는 전문적인 것에 치우쳤다면, 그런 것은 경멸해 버리고 오히려 교양을 배우는 것이 나으리라. / 그러나 그대 독일인들은 어떻든 눈앞에 닥친 필요성에만 집착한다. / 그러기에 그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세공품 아닌 것이 없고, 자유스런 것, 정말로 사람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홍경호, 217)


이 번역의 문제점을 열거하자면, 1) 여기 인용한 번역문에서 사선으로 단락 구분을 표시한 것은 원문에 없는 것이다. 2) 원문 텍스트의 명령형 (“버려라”, “배워라”)을 서술형(“버리고”, “나으리라”)으로 바꿨다. 3) “교양”은 “전문적인 것”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즉 전공과목과 교양과목의 구 분을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pflügen”은 ‘밭갈이’를 의미한다. 4)“세공품”은 Stümperarbeit의 번역어인데, 전체 문맥에 맞지 않는다. “세 공(細工)”이라는 용어는 Kunststück의 번역어로도 등장하는데(64), 이 번역어로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 완전한 조화 속의 자연현상과 불완전한 인공(人工)의 대립 관계에 대한 횔덜린의 비판적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의미를 환기시킨다.

홍경호의 <히페리온>은 원문 텍스트의 문단 나누기를 반대로, 즉 나누어야 할 곳은 합치고, 한 문단은 여러 문단으로 나눈 경우가 많은데, 이는 쉼표로 이어지는 부분을 여러 문장으로 끊어서 옮기는 것과 같이, 원문 텍스트의 리듬과 호흡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히페리온>의 마지막 부분의 표기 형식이다. 이 부분은 휘페리온이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죽은 디오티마를 상대로 떠올렸던 긴 상념을 따로 전달하는 상황인데, 원문에 표시되어 있는 따옴표를 없애버렸을 뿐만 아니라, 맨 마지막 구절을 탈락시킴으로써 발신자와 수신자의 대화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오, 자연이여!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의 신들이여, 나는 인간계의 꿈은 모두 보아왔으나, 자연 그대만이 살아있다고 말하리라”.(홍경호, 223) “나는 생각했다”라는 번역문의 위치가 잘못되어, 친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의 내용과 그렇게 생각했다는 과거의 행동이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김재혁은 “나는 생각했다”를 따옴표(‘) 밖으로 끌어내고 휘페리온의 ‘생각’이 끝난 곳에서 따옴표를 닫으며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음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김재혁, 292) 장영태는 이 끝부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를 김재혁처럼 휘페리온의 ‘생각’을 종결된 따옴표 밖으로 위치시키기는 했으나, 그 ‘생각’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홍경호와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 그대,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그대의 신들과 더불어, 자연이여!”(장영태, 263)

홍경호의 <히페리온> ‘제2부’에 제사(題辭)로 사용된 소포클레스의 인용구를 원문에서 생략한 것은, 본래 없는 소제목들을 첨부하여 주제를 함축적으로나마 드러내려는 시도와 상반되는 것이다.


2) 김재혁 역의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2015)

김재혁의 번역은 한국어의 유려함이 돋보인다. 예컨대 인간 내지 인공(人工)과 자연의 대조를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번역텍스트에서는 원문의 복잡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은 식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한때는 너희와 같았다고! 그리고 순수한 별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나중에 다른 세상에 가면 너희와 같은 존재가 될 거라고! 그러는 동안 인간은 분열되어 자신을 상대로 이런저런 기술을 써본다. 그렇게 해서 일단 완전히 해체되면 언젠가 담쌓기처럼 뭔가 생동감 있는 것을 조립해 낼 수 있을 것처럼. 개선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인간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행한 일을 스스로 여전히 재주라고 생각한다.(김재혁, 81)


이 부분은 원문과 대조를 하지 않아도 자연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휘페리온의 풍자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 번역의 장점은 그와 같은 대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았을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저절로 드러난다.


초목을 향해 인간은 말한다. 자기도 애초엔 너희들 같았노라고. 깨끗한 별을 향해 이야기한다. 자기는 다른 세계에서는 너희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 그러기에 인간은 사물을 부수며 거기에다 인공을 가한다. 산 것이 일단 분해해 버린 뒤에도 벽이나 담처럼 그것을 조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런 수고로써 만사가 전혀 개선되지 않아도 일절 그 방법을 고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은 하나의 작은 세공(細工)에 지나지 않는다.(홍경호, 64)


본래 한 문단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문제 삼지 않더라도, ‘초목’과 ‘식물’, ‘깨끗한 별’과 ‘순수한 별’, ‘이야기한다’와 ‘말한다’, ‘자기’와 ‘나’ 등 어휘 선택도 다르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그러기에 인간은 사물을 부수며 거기에다 인공을 가한다. 산 것이 일단 분해해 버린 뒤”라는 부분이 원문 텍스트의 문법 관계를 오독한 결과라는 점이다.(“[...] inzwischen bricht er auseinander und treibt hin und wieder seine Künste mit sich selbst, als könnt er, wenn es einmal sich aufgelöst, Lebendiges zusammensetzen, wie ein Mauerwerk.”(302)) 그런 오독은 내용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김재혁은 상세한 역자후기에 “자유와 사랑을 위한 서정시”라는 부제를 붙임으로써 소설의 주제와 문체적 특징을 요약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간명하게 독자들에게 전한다. 무엇보다도 김재혁의 번역은 이 소설이 “탄탄한 서사 구조”와 “세세한 서정적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상상과 이상적인 것’에 눈길을 주는 ‘서정적 서간체 소설’의 특징, 그리고 ‘병렬문체와 대구표현’, ‘주어나 동사의 후치’를 통한 의식의 긴장감 조성’, ‘문장의 질서’와 ‘리듬’ 등 원문 텍스트가 지닌 여러 가지 언어적 특징들에 주목할 것을 번역전략의 전제로 삼는 것 같다. 그는 특히 ‘준고어’를 당시의 어법에 맞게 번역할 것과 횔덜린이 사용한 “철학용어를 일본식 번역어를 떠나 우리말 표현으로 문학어의 본질을 살려 번역”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 소설이 하이데거 이전에 쓰여졌기 때문에 이 소설에 나오는 Dasein을 ‘현존재’로 번역하는 것은 일본식이며 (그 자신은 ‘현존’(76)으로 번역), Wesen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 뜻한다고 했다. (실제는 그것을 “본질”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 약점을 보완해 주려고 자연이 만들어낸 미혹 중에서 가장 멋진 미혹이다.”(18) (“Es ist die schönste aller Täuschungen, womit die Natur der Schwachheit unseres Wesens aufhilft.”(299)) 또한 일본어 번역으로부터의 중역은 일찍이 제기된 번역의 과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낱말/어휘의 번역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다음의 문장은 아동 문학가이자 한글학자인 이오덕이 특히 비판하는 일본식 문장이다.


우리는 모두 창공을 사랑하며, 깊은 내면에 있어 서로 닮아 있다.(김재혁, 292.밑줄 필자 강조)


김재혁 또한 간혹 독일어 텍스트 자체를 오독하는 경우가 있다.


Ich kam nach Smyrna zurück, wie ein Trunkener vom Gastmahl. Mein Herz war des Wohlgefälligen zu voll, um nicht von seinem Überflusse der Sterblichkeit zu leihen. Ich hatte zu glücklich in mich die Schönheit der Natur erbeutet, um nicht die Lücken des Menschenlebens damit auszufüllen.(309)
나는 스미르나로 돌아왔다. 잔치에서 술에 취해 돌아온 사람처럼. 나의 마음엔 만족감이 넘쳐 흘렀다. 그 넘침을 무상한 자연에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너무도 행복하게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삶의 빈틈을 채워 넣지 않을 수 없었다.(김재혁, 38)


같은 구절 장영태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나는 향연에서 술에 취한 자가 돌아오듯이 스미르나로 돌아왔다. 나의 마음은 그 넘침을 인간들에게 나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만족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인간 삶의 결핍을 그것으로 채워 넣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 마음 가운데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행복하게 거두었다.(장영태, 34)


김재혁은 원문의 “zu voll ..., um nicht / zu glücklich ..., um nicht” 의 복합구문을 각각 두 개의 문장으로 만들었고, 인간을 가리키는 “der Sterblichkeit”를 “자연”으로 오독했다.(특히 이 낱말은 다른 곳에서 “가멸적인 존재”(106)로 옮기고 있다.)

이 밖에도 아주 드물게 오역이 눈에 띄지만, 대체로 “원문의 음악적이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우리말로 되살리고 멀리서 천둥이 치는 듯한 번역의 모호함을 물리쳐 보려는 목적”은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여겨진다. 번역텍스트의 유려함이 원문 텍스트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매우 바람직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김재혁은 해설 끝부분에 텍스트 번역의 저본으로 사용한 카를 한저(Carl Hanser) 출판사의 1989년 판 횔덜린 전집과 해설을 위한 참고문헌 3종을 제시하고 있다.


3) 장영태 역의 <휘페리온>(2020)

장영태는 번역 저본으로 삼은 슈투트가르트 판 횔덜린 전집(1943-1985)뿐만 아니라 헬링라트의 역사비평본(1913-1923), 자틀러의 프랑크푸르트 판(1976-2000) 등 3종의 판본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횔덜린 전공자답게 54쪽에 달하는 주석을 미주로 달았고, “문학의 나라에 있는 아직 아무도 발 딛지 않은 땅”이라는 횔덜린의 인용구를 제목으로 한 작품해설에서 이 소설의 생성사뿐만 아니라, 주제와 형식의 특징(편지체 소설, 교양소설, 철학적 소설), 등장인물의 성격(아다마스: 이상적 교사, 알라반다: 영웅적 우정, 디오티마: 이상의 체현) 등을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장영태의 주석이나 해설은 거의 논문처럼 읽힌다. 그의 <휘페리온>은 횔덜린 전공자의 번역으로서 거의 축자적(逐字的) 번역에 가깝다. 그러나 원문 이해의 정확성에 대한 요구와 번역문의 완결성이 얼마나 상응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세속에 시달린 휘페리온이 그리스의 자연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구절의 번역을 비교해 본다.


Ja, vergiß nur, daß es Menschen gibt, darbendes, angefochtenes, tausendfach geärgertes Herz! und kehre wieder dahin, wo du ausgingst, in die Arme der Natur, der wandellosen, stillen und schönen.(296)
그렇다,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저 잊자, 궁핍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수없이 분노를 산 이 마음이여! 그리고 그대가 떠나왔던 그곳으로, 변함없고 고요하며 아름다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다.(장영태, 12)
그렇다, 잊어라, 고통과 시련에 시달리고 수천 번 분노한 마음이여, 이 세상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돌아가라, 네가 출발한 지점으로, 자연의 품속으로, 변함없고 고요하며 아름다운 자연의 품속으로.(김재혁, 13)


장영태는 원문의 어순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그저 잊자”와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다”라는 권유형 또는 판결문 형식을 씀으로써, 비록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는 하나, 원문의 명령형과는 멀어졌다. 김재혁의 번역에서 돋보이는 것은 원문의 명령형을 그대로 옮겨 휘페리온의 절박한 심정을 살리는 한편, 그와 같은 절박한 심정에 어울리는 문장의 호흡을 표현하기 위해 원문의 어순을 재배열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감정표현의 긴장감은 행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축자적 번역으로는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의 예는 죽은 디오티마를 영원한 자연의 일부로 예찬하는 휘페리온의 감격적인 표현을 담고 있는 구절이다.


Es fallen die Menschen, wie faule Früchte von dir, o laß sie untergehn, so kehren sie zu deiner Wurzel wieder, und ich, o Baum des Lebens, daß ich wieder grüne mit dir und deine Gipfel umatme mit all deinen knospenden Zweigen! friedlich und innig, denn alle wuchsen wir aus dem goldnen Samkorn herauf.(439)
인간들은 썩은 과일처럼 그대로부터 떨어지고 있다. 오 그들이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라. 그렇게 하여 그들이 그대의 뿌리로 되돌아가도록 하라. 그리고 나는, 오 생명의 나무여, 나는 그대와 더불어 다시금 푸르러지고, 그대의 우듬지가 그대의 새싹이 움트는 가지들과 함께 숨쉬기를! 평화롭고 내밀하게 우리 모두가 황금의 종자로부터 움터 자라나기를!(장영태, 264)


이 구절에서는 서술문(직설법, 현재 3인칭 복수), 명령문, 원망문(願望文, 가정법 1식), 그리고 다시 서술문(직설법, 과거 일인칭 복수)이 연속되고 있으며, 그만큼 화자인 휘페리온의 상념의 복잡한 구조와 긴장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장영태는 마지막 서술문을 원망문으로 바꿔놓아, 화자가 사실관계로 규정한 것을 소망의 대상으로 그 뜻을 왜곡시켰으며, 앞의 원망문에 속하는 “평화롭고 내밀하게(friedlich undinnig)”를 뒤의 서술문에 귀속시킴으로써 출생 근원이 같다는 화자의 믿음을 미래에 이룰 수 있는 소망의 대상으로 보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영태의 번역은 평생 횔덜린 연구에 매진한 전공자로서 원문에 대한 해박하고 정확한 독해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탄탄한 신뢰를 준다. 때때로 그러한 내용이 출발어와 도착어의 문체, 형식상의 불일치로 인해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점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3. 평가와 전망

횔덜린의 <휘페리온>은 그 생성사가 매우 복잡한 작품이다. 문학작품의 서지학적 생성사 연구는 그 역사-비판본 확정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특히 한 줄의 시행을 완성하기 위해 무수한 퇴고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 횔덜린의 경우는 면밀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히페리온의 단상>과 <히페리온의 청춘 시절>을 함께 번역 수록한 홍경호는 이 3종의 텍스트를 각각 “별개의 작품”이면서도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소품”이라고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 그 양식상의 차이와 변화과정(산문 → 운문 → 서간체 소설)에 대한 일말의 언급이 없다. 더구나 예나로 거주지를 옮긴 이후 같은 소재를 무운시(無韻詩 Blankvers)로도 쓴 횔덜린의 텍스트에 피히테의 자연관에 대한 거부와 플라톤의 객관적 이상주의의 영향이 나타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휘페리온>의 주제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이해를 축소시킨다. 김재혁과 장영태는 마지막 완성본인 <휘페리온>만을 번역대상으로 삼았는데, 앞으로는 ‘서간체 소설’ 형식과 관련된 생성사를 조금 더 상술할 것이 기대된다.

또 독일어 Hyperion (Υπερων)의 원제를 <히페리온>(홍경호, 김재혁)으로 표기할 것이냐, <휘페리온>(장영태)으로 표기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현행 한글맞춤법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어떤 음성학적 근거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Schiller도 ‘실러’로 표기하게 되어 있으므로 출판사의 원칙과 고집을 꺾고 원음대로 표기할 것을 설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나, 삼라만상의 소리를 다 표기할 수 있다는 한글이라고 하니 원음에 가까운 표기를 따라야 할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김재혁(2015):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 책세상.
장영태(2020; 12008): 휘페리온. 을유문화사.
홍경호(2022; 2021/ 11975; 21992): 히페리온. 범우사.

안문영
  • 각주
  1. Hölderlin, Friedrich(1969): Hyperion. In: Beißner, Friedrich / Schmidt, Jochen(ed.): Werke und Briefe. Vol. 1. Frankfurt a. M.: Insel Verlag, 302. 이하에서는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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