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츠 (Lenz)"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AU0004}}의 소설 {{A01}} <!--작품소개--> 독일 작가이자 자연철학자 게오르크 뷔히너의 미완성 단편소설이다. 작가 사후에 출간되었고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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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id="정경석(1971)"/>[[#정경석(1971)R|1]] || 렌츠 || 獨逸短篇文學大系, 現代篇 2 || 獨逸短篇文學大系 3 || 게오르그 뷔히너 || 鄭庚錫 || 1971 || 一志社 || 352-372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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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 || 렌쯔 || 뷔히너 文學全集 || 한마당문예 6 || 게오르그 뷔히너 || 임호일 || 1987 || 한마당 || 9-46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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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id="임호일(2008)"/>[[#임호일(2008)R|3]] || 렌츠 || 뷔히너 문학전집 || 지식을만드는지식 || 게오르크 뷔히너 || 임호일 || 2008 || 지식을만드는지식 || 127-172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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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id="이재인(2015)"/>[[#이재인(2015)R|4]] || 렌츠 || 보이첵 ||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미니북 49 || 게오르그 뷔히너 || 이재인 || 2015 || 미르북컴퍼니, 더클래식 || 161-206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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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id="박종대(2020)"/>[[#박종대(2020)R|5]] || 렌츠 || 뷔히너 전집 : 당통의 죽음·보이체크 외 || 열린책들 세계문학 || 게오르그 뷔히너 || 박종대 || 2020 || 열린책들 || 259-300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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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번역 현황 및 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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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독일파(Junges Deutschland)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스물셋의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단 세 편의 희곡과 1편의 단편소설만을, 그것도 대부분을 미완으로 남겼으나 독일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높다. 이는 한국 독문학계에서도 비슷하여, 1980년대 중반 작가 이름을 딴 소학회들이 창립되던 시기에 한국괴테학회와 한국카프카학회에 이어서 세 번째로 한국뷔히너학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작가들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브레히트와 함께 뷔히너가 크게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ref>고영석(2007): 1. 독일 소설, 한국의 학술연구, 제8집, 대한민국학술원, 172; 이원양(2007): 3. 독일 희곡, 한국의 학술연구, 제8집, 대한민국학술원, 202.</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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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뷔히너의 작품 중 <렌츠>는 이러한 뷔히너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시작되기 전에 유일하게 먼저 번역되었다. 1971년 <독일단편문학대계>에 <렌츠>는 독문학자 정경석의 번역으로 대표적인 독일 단편소설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 이후 뷔히너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될 무렵인 1987년에 뷔히너 전공자 임호일이 뷔히너 문학 전체를 번역한 <당통의 죽음>을 내놓으면서 <렌츠>는 두 번째로 번역된다. 임호일 역 이후 약 30년간 새 번역이 없다가 2015년에 이재인, 2020년에 박종대가 뷔히너 작품집을 번역해 내놓으면서 <렌츠>도 재번역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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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렌츠>의 번역을 살펴보기 전에 판본 문제를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뷔히너의 대다수 작품이 그렇듯이 <렌츠> 역시 미발표 유고로 남아 있다가 작가 사후에 편집 · 출간되어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문제는 작가의 수고(手稿)도, 약혼자 예글레의 사본도 모두 유실된 상태라서 편집자들이 원본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본 확립이 어려운 상황이며 기존 판본에 대한 평가도 뷔히너 연구사가 축적되면서 달라지고 있다. 한국어 번역본 역시 다양한 판본을 기초로 하고 있다. 가령 번역 저본을 밝히고 있는 임호일의 번역은 베르너 레만(Werner Lehmann)이 편집한 역사비평판을 기초로 했고, 박종대 번역의 경우는 편집자들의 개입을 비판하고 초판으로 돌아가려 한 ‘뮌헨 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런 판본의 차이에서도 적잖은 번역의 차이가 발생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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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렌츠>의 한국어 번역을 살펴볼 때 역자가 소설의 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옮겼는가도 중요하겠으나, 소설의 문체적 특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한국어로 구현하려 했는가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렌츠>는 특히 20세기 들어서 그 문체적 독특성과 예술성이 많은 현대 작가들과 연구자들의 경탄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또 이 작품은 독일문학사에서 ‘체험화법(erlebte Rede)’을 선구적으로 사용하여 현대성을 선취한 소설로 인정받는다. 뷔히너는 우울증과 광기에 시달리는 예술가 렌츠가 바라본 주관적 세계를 특유의 체험화법과 여러 수사법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대표적으로 연구자 페터 하주벡이 지적했듯이 작가는 다양한 문체적 수단을 사용하여 정(靜)과 동(動)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렌츠의 광적인 심신 상태를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이제 역자들이 이러한 문체적 특징들과 어떻게 씨름했는가를 중심으로 개별 번역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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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개별 번역 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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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경석(1971)|정경석 역의 <렌츠>(1971)]]<span id="정경석(1971)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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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석은 <렌츠>를 한국어로 제일 처음 번역했다. 그의 번역은 ‘질풍노도’ 시대부터 전후 동시대에 이르는 방대한 독일 단편소설 선집 <독일단편문학대계. 괴테에서 욘손까지>(일지사) 중 <근대편>에 실려 발표되었다. 작품 앞의 짤막한 소개글에서 뷔히너의 문학은 “인간존재의 무의미에 대한 통렬한 외침”으로, <렌츠>는 작가의 “주의주의(主意主義)적 현상 세계”(351)를 그려낸 작품이라고 설명되는데, 뷔히너 작품을 탈정치화하여 허무주의적으로 해석했던 20세기 중반 독일 독문학계의 영향이 엿보인다. 번역에 사용된 판본의 정보는 실려 있지 않다. | ||
+ | 정경석의 번역은 초역이지만 원문의 문체적 특징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다. 가령 <렌츠>의 유명한 첫 문장을 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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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n 20. [Jänner] ging Lenz durchs Gebirg.(3)<ref>독일어 원문은 구츠코프 초판을 따른 다음 판본에서 인용한다. Büchner, Georg(2015): Lenz. Hrsg. v. Ralf Kellermann u. Eva-Maria Scholz. Stuttgart: Reclam.</ref> | ||
+ | 1월 20일 렌츠는 산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정경석, 352) | ||
+ | 1월 20일에 렌츠는 산을 넘고 있었다.(임호일 2008, 129) | ||
+ | 1월 20일에 렌츠는 산으로 갔다.(이재인, 165) | ||
+ | 렌츠는 20일에 산에 갔다.(박종대, 2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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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본 네 종을 비교해 보면, 초판본을 따라서 ‘1월’을 옮기지 않은 박종대 역을 제외하고 모두 독일어 원문대로 시간 부사, 주어 순으로 옮겼다는 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또 역자들이 택한 동사도 차이를 보이는데, 이재인과 박종대가 ‘가다’를 택했다면, 임호일은 ‘넘다’, 정경석은 ‘걸어가다’를 택했다. 이는 역자들이 문장의 다층적인 의미망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텐데, 이재인과 박종대가 렌츠가 산에 갔다는 전체적인 방향에 초점을 맞췄다면 임호일과 정경석은 산을 걷고/넘고 있다는 그 순간의 동작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해보자면, 전자가 롱숏으로 소설을 시작하게 한다면, 후자는 클로즈업까지는 아니지만 대상에 상당히 가까운 미디엄 쇼트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역자들이 택한 시제도 서로 다르다. 이재인과 박종대가 렌츠가 산에 “갔다”라고 과거 시제로 옮겼다면, 정경석과 임호일은 과거 진행형을 사용했다. 이러한 차이는 사소해 보일 수 있으나 매우 중요하다. 과거 진행형을 사용함으로써 소설이 시작되었을 때 상황은 이미 한참 진행 중임(medias res)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렌츠는 이미 깊은 산속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 작품의 ‘현대성’을 보여주며, 첫 문장부터 긴박감을 조성한다. 또 같은 과거 진행 시제를 썼지만 “산을 넘고 있었다”라고 옮긴 임호일 역이 아직 나오지 않은 정보를 주어서 번역문의 독자에게 원문의 독자보다 많은 정보를 준다면, 정경석의 번역은 딱 원문 그대로, 렌츠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가는 것인지 모르게 독자를 내버려 둔다. 이는 렌츠의 걷기가 실은 방황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내용에 보다 잘 부합한다. 그리고 “1월 20일” 뒤에 ‘에’라는 조사를 붙이지 않아, 뚝 끊기는 맛을 주면서 문장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 뒤에 동사가 없는 명사구가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나오며 스타카토적인 리듬이 더 명확해지므로 적확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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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뷔히너는 <렌츠>에서 동사를 생략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하여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기도 하고 문장 리듬에 휴지부를 만들어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을 내면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러한 문체상의 특징이 번역에 얼마나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정경석이 가장 예민하게 이러한 특징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한국어로 구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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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s>[S]ein blasses Kindergesicht</ins>, das jetzt lächelte, <ins>sein lebendiges Erzählen;</ins>(6. 밑줄 강조 필자) | ||
+ | 그의 창백한 소년 같은 얼굴은 미소를 띠었고, <ins>그 생생한 이야기 솜씨란—</ins>.(정경석, 354. 밑줄 강조 필자) | ||
+ | 그의 창백한 동안이 이제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ins>활기를 띠어갔다.</ins>(임호일 2008, 133. 밑줄 강조 필자) | ||
+ | 아이 같은 창백한 얼굴에는 이제 미소가 피어올랐고, 이야기는 <ins>활기를 띠었다.</ins>(박종대, 265.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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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s>[D]as Zimmer im Pfarrhause</ins> mit seinen Lichtern und lieben Gesichtern, es war ihm wie ein Schatten, ein Traum,(6. 밑줄 강조 필자) | ||
+ | 불들이 켜 있고 사랑스런 얼굴들이 있는 <ins>목사관의 방</ins>. 그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그림자 같았고 꿈과도 같았다.(정경석, 354. 밑줄 강조 필자) | ||
+ | 그리고 목사관의 그 방과 불빛들, 또 그곳에 있던 다정한 얼굴들을 <ins>상기해 보았다</ins>. 그것은 마치 그림자들 같았고 꿈과도 같았다.(임호일 2008, 133. 밑줄 강조 필자) | ||
+ | 램프 불빛 아래 사랑스러운 얼굴들이 앉아 있던 목사관의 방도 <ins>떠올랐다</ins>. 모두 그림자 같고 꿈같았다.(박종대, 265.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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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s>Ein gewaltsames Drängen</ins>, und dann erschöpft zurückgeschlagen;(20. 밑줄 강조 필자) | ||
+ | <ins>무서운 절박감</ins>, 그 다음엔 기진맥진하여 뒤로 나자빠졌다.(정경석, 363. 밑줄 강조 필자) | ||
+ | 그렇게 엄청난 격동이 인 후 그의 지친 몸은 침몰했다.(임호일 2008, 152) | ||
+ | 격렬한 감정의 결과는 완전한 탈진이었다.(이재인, 189) | ||
+ | 하지만 그렇게 격렬하게 파고들다가 결국 지쳐서 나뒹굴고 말았다.(박종대, 28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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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역자들은 명사로 구문이 끝나는 곳에 동사를 새로 집어넣어 보완하거나(“상기해 보았다”, “떠올랐다”), 형용사를 동사로 바꾸어서 번역했다(“활기를 띠어갔다”, “활기를 띠었다”). 이러한 번역은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으나 문체나 어조에서 차이를 낳을 수 있다. 동사가 생략되거나 명사구로 문장이 끝나면 독서의 리듬상 잠시 멈칫하게 하고, 해당 부분을 좀더 강조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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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렌츠>에서는 특정 단어를 반복하는 조응법(Anphorik)이 자주 쓰이는데 정경석 역본은 이 조응법을 가장 잘 살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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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r hatte <ins>keinen</ins> Hass, <ins>keine</ins> Liebe, <ins>keine</ins> Hoffnung – eine schreckliche Leere, und doch eine folternde Unruhe, sie auszufüllen. Er hatte nichts.(29. 밑줄 강조 필자) | ||
+ | 그는 미움<ins>도</ins> 사랑도 희망도 없었다. <ins>있는 것은</ins> 무서운 공허와 그것을 메우려는 괴로운 불안뿐이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정경석, 369. 밑줄 강조 필자) | ||
+ | 그는 증오도 사랑도 그리고 희망도 모두 잃어버렸다. 무시무시한 공허와 이 공허를 메워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고통스런 불안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임호일 2008, 164) | ||
+ | 그는 증오도 사랑도 희망도 모두 잃어버렸고, 그 마음에는 끔찍한 공허감과 그 공허감을 메워야 한다는 괴로운 근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이재인, 201) | ||
+ | 그에겐 미움이나 사랑, 희망이 없었고, 끔찍한 공허와 그 공허를 채워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불안뿐이었다.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박종대, 2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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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수사 ‘kein’이 반복된 구문에서 정경석과 이재인은 ‘도’를 반복하여 리듬을 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정경석은 ‘없었다’에 바로 이어서 ‘있는 것은’이라고 번역하여 교차배열적(Chiasmus) 수사적 효과까지 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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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석은 격렬한 광기에 빠진 렌츠의 말투도 가장 잘 살려냈다. 오벌린이 스위스로 출타한 이후 정신적으로 크게 불안정해진 렌츠는 오벌린이 돌아와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훈계하자 격분한다. 게다가 오벌린이 그럴수록 하나님을 잘 믿고 따라야 한다고 타이르자, 렌츠는 목사에게 난데없이 프레데리케의 안부를 묻는다. 목사가 그녀가 누구인지 자신은 모르니 알아보겠다며 좀더 자세한 신상을 알려달라고 하자 렌츠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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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r antwortete nichts wie gebrochne Worte: »Ach sie ist tot! Lebt sie noch? Du Engel, Sie liebte mich – ich liebte sie, sie war's würdig, o du Engel. Verfluchte Eifersucht, ich habe sie aufgeopfert – sie liebte noch einen andern – ich liebte sie, sie war's würdig – o gute Mutter, auch die liebte mich – ich bin ein Mörder!«(24-25) | ||
+ | 그는 더듬더듬 말할 뿐이었다. “아! 그녀는 죽었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천사여! 그녀는 나를 사랑했는데――나도 그녀를 사랑했고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오! 천사여! 원수같은 질투! 나는 그녀를 희생시켰다. 그녀는 또 한 남자를 사랑했지.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 아! 인자하신 어머니도 나를 사랑했지. 나는 그들의 살인자다!”(정경석, 366) | ||
+ | 이 말에 렌츠는 두서없는 얘기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아,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고요? 그대 천사여! 그녀는 저를 사랑했습니다! 저 역시 그녀를 사랑했고요.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여자였습니다. 오, 그대 천사여! 저주받을 질투였습니다. 제가 그녀를 희생시켰어요. 그녀는 또 다른 남자를 사랑했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했고요.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오, 착한 어머니, 어머니도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전 살인자랍니다.”(임호일 2008, 159) | ||
+ | 렌츠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했다. “아, 그녀는 죽었어요! 그녀가 아직 살아 있나요? 그대 천사여! 그녀는 저를 사랑했어요! 저도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사랑받을 만했어요. 오, 그대 천사여! 저주받을 질투여, 저는 그녀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했어요. 저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사랑받을 만했습니다. 오, 자애로운 어머니여, 어머니도 저를 사랑했어요, 저는 살인자입니다.”(박종대, 2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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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석의 번역이 다른 두 번역과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어투다. 다른 두 번역이 계속 존칭을 사용해 렌츠가 오벌린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면, 정경석은 과감하게 존칭을 버리고, ‘저’를 ‘나’로 바꾸고, ‘~다’로 끝나는 연극적인 독백투로 번역해 렌츠가 정신을 놓았음을 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이에 비해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여자였습니다”라고 옮긴 임호일의 번역은 지나치게 설명투이며, “전 살인자랍니다”라는 고백하는 말투도 원문보다 렌츠를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저는 그녀를 희생시켰습니다”라고 옮긴 박종대의 번역도 지나치게 차분한 느낌을 준다. | ||
+ | |||
+ | 이렇게 정경석은 원문의 문체적 특징과 어조를 실감 나게 재현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문학적 감각을 발휘한다. 그러면서도 렌츠가 부딪친 문제를 한국 독자들에게 잘 이해시킨다. 가령 광기에 빠진 렌츠가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konsequent”라고 외치다가 또 “inkonsequent”(30)하다고 지껄이는 부분을 정경석은 “모순이 아니야”, “모순이다”(370)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수미일관하게”, “수미일관하지 못해”(임호일 167), “일관적이야”, “일관적이지 못해”(박종대 296)에 비해 그 의미를 쉽게 전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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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정경석 역은 몇몇 부분에서 중대한 오역을 하여 초역의 한계도 보여준다. 가령 오벌린의 목사관 하녀가 구슬픈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렌츠가 오벌린 부인에게 “그녀”[프레데리케]가 무엇을 하는지 말해줄 수 없냐고 하는 대목에서 “그녀”를 하녀로 오독하고 “저 아가씨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실 수 없을까요”(364)라고 잘못 번역한 부분은 내용상 중대한 오역에 해당한다. 또 렌츠가 속죄하기 위해 자기를 매질해 달라고 오벌린에게 가지고 온 회초리를 “오벌린 씨가 렌츠에게 갖다준 것”(367)이라고 잘못 번역하여, 렌츠의 행동이 오벌린에게 얼마나 당황스러운 것인지 잘 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가 있기는 하나 정경석 역은 소설의 주관적인 자연 풍경 묘사에서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중요한 대목에서 문장의 리듬감과 어조를 유사하게 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장점이 크다고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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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임호일(2008)|임호일 역의 <렌쯔>(1987)와 <렌츠>(2008)]]<span id="임호일(2008)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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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호일이 번역한 <렌츠>는 현재까지 나온 뷔히너 번역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판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가 한국의 대표적인 뷔히너 연구자로서 한국뷔히너학회 창립 멤버이자 뷔히너학회 회장을 역임한 만큼 학계 내외에서 역자의 번역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높았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렌츠>가 실린 번역서는 뷔히너의 문학작품은 물론, 정치혁명가이자 자연과학자로서의 뷔히너를 보다 전문적으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비문학 텍스트인 <[[헤센 지방의 전령 (Der Hessische Landbote)|헤센 지방의 전령]]>과 <[[두개골 신경에 관하여 (Über Schädelnerven)|두개골 신경에 관하여]]>, 그리고 뷔히너의 서한을 발췌 번역하여 수록하는 등 뷔히너의 문학세계를 전문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고 있기에 오랫동안 가장 권위 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거의 유일한 한국어 번역으로 통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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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호일의 번역은 1987년 한마당 출판사에서 나온 <당통의 죽음>에 수록된 이래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다. 1997년도에 개정판이 나왔고, 이후 한마당 출판사가 문을 닫자 2008년에 지만지 출판사에서 <뷔히너 문학전집>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책을 단장하여 냈다. 이때 <렌츠>의 번역은 일부 수정되었는데, 역자는 역자 후기에서 “이번 기회에 그간 뷔히너 문학을 강의하면서 체크해 두었던 오역 부분을 수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우리말 표현들을 다시 손질하여 다듬어보았다”(348)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개정된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인명이 달라진 것(대표적으로 ‘렌쯔’->‘렌츠’) 외에 일부 중요한 부분에서 번역이 수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
+ | |||
+ | 1987년도 판과 2008년도 판 모두 베르너 레만의 역사비평판을 저본으로 삼았고, 작품의 전문적 이해를 돕기 위해 발터 힌더러(Walter Hinderer)의 <뷔히너 주해Büchner-Kommentar>를 참고하여 주석을 달았다. 2008년도 판에서는 1987년도 판의 <해설>을 <지은이에 대해>와 <뷔히너의 문학세계>로 쪼개고 좀더 쉽게 뷔히너의 문학을 소개한다. 1987년도 판 해설이 연구 논문에 가깝다면, 2008년도 판 해설은 대학생과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왜 뷔히너가 중요한 작가인지 소개하는 성격을 띤다. 주로 요절한 천재 이미지를 강조하고 리얼리스트와 민중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한다. | ||
+ | |||
+ | 임호일은 초판 서문에서 그간 번역서에서 늘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던 “우리말의 구성 및 구사문제”(308)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매끄럽게 잘 읽히는 번역을 지향한다. 실제로 그의 번역을 살펴보면, 숨 가쁘게 이어지는 복문은 끊어서 번역하고, 뚝뚝 끊어지는 단문은 늘려서 번역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네 종의 번역 중에서 번역의 길이가 가장 길다. 그러다 보니 <렌츠>의 축약적이고 간결한 문체와 멀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 ||
+ | |||
+ | |||
+ | <ins>[K]ein</ins> Lärm, <ins>keine</ins> Bewegung, <ins>kein</ins> Vogel, nichts als das <ins>bald</ins> nahe, <ins>bald</ins> ferne Wehn des Windes.(7. 밑줄 강조 필자) | ||
+ | 그밖에는 <ins>어떤</ins> 움직임도 <ins>없었고</ins>, <ins>아무</ins> 소리도 들려오지 <ins>않았다</ins>. 새 한 마리<ins>조차</ins> 보이지 <ins>않았다</ins>. 단지 바람만이 <ins>때로는</ins> 가까이서 <ins>때로는</ins> 멀리서 살랑댈 뿐이었다.(임호일, 16. 밑줄 강조 필자) | ||
+ | 소리<ins>도 없고</ins> 움직이는 것<ins>도 없고</ins> 새들<ins>도 없었다</ins>. <ins>때로는</ins> 가까이, <ins>때로는</ins> 멀리서 바람이 불 뿐이었다.(정경석, 355) | ||
+ | <ins>아무</ins> 소리<ins>도</ins>, <ins>아무</ins> 움직임<ins>도 없었다</ins>. 새 한 마리 보이지 <ins>않았다</ins>. <ins>가끔은</ins> 가까이서, <ins>가끔은</ins> 멀리서 바람밖에 불지 않았다.(박종대, 2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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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예문을 보면 ‘kein’이 반복되어 리듬을 생성하는데, 정경석이 ‘도 없다’를 되풀이하여 반복의 양상을 재현하려 했다면, 임호일은 이 ‘kein’을 제각기 다르게 옮겼다. 의미상으로는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말소리로 반복의 느낌이 잘 전달되지 않으며 원문의 간결하고 축약적인 리듬이 늘어져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렌츠의 격렬한 신체적/심리적 동요와 대비되는 정적인 상태, 즉 고요와 평정, 극단적인 경직 상태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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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e Äste der Tannen hingen schwer herab in die feuchte Luft.(3) | ||
+ | 전나무가지들이 축축한 대기 속에서 그 육중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아래쪽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임호일 2008, 129) | ||
+ | 전나무 가지들이 습기찬 공기 속에 축 늘어져 있었고 [...](정경석, 352) | ||
+ | 전나무 가지들은 습기를 머금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이재인, 165) | ||
+ | 전나무 가지는 젖은 대기 속에 축 늘어져 있었다.(박종대, 2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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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임호일은 문장을 리듬의 제한에 가두기보다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든 문학적인 향취를 내기 위해서든 시적인 표현을 덧붙여 겨울철 습한 날씨에 전나무 가지들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이렇게 말을 덧붙이다 보니 전나무 가지가 축 처져 있는 것이 가지가 육중하기 때문이라는 역자의 상상력이 들어가게 된다. 이런 임호일 역의 경향은 위 예시처럼 자연을 의인화해서 묘사하는 대목에서 유독 빛을 발한다. 뷔히너는 <렌츠>에서 자연을 묘사할 때 의인화 수법을 자주 사용한다. 자연은 렌츠의 심신 상태를 반영하기도 하고 그것과 호응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 묘사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역자는 가령 렌츠가 “더 이상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Er konnte sich nicht mehr finden”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문장을 “더 이상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133)라고 번역하여 전나무와 렌츠 사이에 시적인 통일성을 부여한다. | ||
+ | 그런데 임호일은 뷔히너가 자연을 의인화하지 않았거나 간접적으로 의인화한 부분에서도 두드러진 의인화를 선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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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m Himmel zogen graue Wolken, aber alles so dicht – und dann <ins>dampfte</ins> der Nebel </ins>herauf und strich</ins> schwer und feucht durch das Gesträuch, so träg, so plump. [...] ; und dann der Wind verhallte und tief unten aus den Schluchten, aus den Wipfeln der Tannen wie ein Wiegenlied und Glockengeläute heraufsummte,[...].(3-4. 밑줄 강조 필자) | ||
+ | 하늘에는 잿빛 구름들이 온통 밀집된 상태로 떠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는지 <ins>축축하고 자욱한 안개가 가누지 못한 나른한 몸을 관목 가지들 사이로 무겁게 끌어가고 있었다.</ins> [...] 점차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깊은 협곡과 전나무의 우듬지에 내려앉아 마치 자장가 같기도 하고 은은한 종소리 같기도 한 음향으로 조용히 <ins>울어대고 있었다.</ins>(임호일, 2008, 129-130. 밑줄 강조 필자) | ||
+ |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흐르고 있었으나 모든 것이 육중했다. 그리고 안개가 뭉게뭉게 <ins>피어올라</ins> 무겁고 축축하게 관목 숲 속에 <ins>서리고</ins> 있었다. 몹시 완만하고 우울했다. [...] 바람이 자면 깊은 계곡의 전나무 가지에서 마치 자장가나 종소리 같은 것이 <ins>들려 왔다.</ins>(정경석, 352. 밑줄 강조 필자) | ||
+ | 하늘에는 먹구름이 깔려 있었고, 온 사방이 조밀했다. 땅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덤불숲 사이로 무겁고 축축하게 <ins>퍼져 나가더니</ins> 느릿하고 둔탁하게 사방을 <ins>에워쌌다</ins>. [...] 그러다 차츰 잦아든 바람이 협곡 깊숙한 곳과 전나무 우듬지에서 자장가와 종소리처럼 잔잔하게 <ins>올라오고</ins> [...](박종대 261-262.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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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예시에서 보듯 임호일은 전나무 가지들처럼 안개 역시 “가누지 못한 나른한 몸을 [...] 무겁게 끌어가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정경석이 안개가 ‘피어오르다’, ‘서리다’라는 동사를, 박종대가 ‘퍼져 나가다’, ‘에워싸다’라는, 보통 안개에 많이 쓰이는 동사를 사용한 것과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마지막에 임호일은 질풍이 “울어대다”라고 번역하여 뷔히너가 사실 의인화해서 쓰지 않은 부분까지 의인화해서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부분을 박종대는 원문에 더 가깝게 “올라오다”라고 옮겼다. 그렇다면 임호일은 번역에서 뷔히너가 즐겨 사용한 의인화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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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임호일은 한국 독자가 좀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여서 번역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렌츠가 산 위에서 땅바닥에 누워 자연과 교감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임호일은 “그는 우주의 삼라만상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라고 번역한다. 이는 박종대의 “우주 속으로 들어갔다”(263)에 비해서 렌츠의 행동이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또 렌츠가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대목을 정경석이 “그것은 고통을 주는 쾌감이었다”(353), 박종대가 “아픈 쾌감이 일었다”(263)로 번역하여 간결한 문체로 형용모순을 강조한다면, 임호일은 “그것이 그에게는 희열을 가져다주었고, 이 희열은 다시금 그에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라고 옮겨 문장이 많이 길어졌으나 의미 전달에 더 치중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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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가독성을 높이는 경향은 역자가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적 연결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개입하는 데에서 잘 나타난다. 아래 밑줄 친 부분처럼 임호일은 다른 역자들과 달리 논리적 인과관계를 지시하는 접속사를 집어넣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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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s drängte in ihm, er suchte nach etwas, wie nach verlornen Träumen, aber er fand nichts. Es war ihm alles so klein, so nahe, so nass; er hätte die Erde hinter den Ofen setzen mögen [...](3) | ||
+ | 그의 가슴은 콱콱 막혀왔다. 그는 <ins>답답한 나머지</ins> 무언가 잃어버린 꿈 같은 것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매우 조그맣고, 가깝고, 축축하게 젖은 것처럼 느껴졌다. <ins>그래서</ins> 그는 지구를 난로 뒤쪽에 밀어놓고 싶었다.(임호일, 2008, 129. 밑줄 강조 필자) | ||
+ | 가슴 속이 답답해지고 잃어버린 꿈을 찾듯이 무엇을 찾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매우 작고 가깝고 축축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이 대지를 난로 뒤에라도 갖다 놓고 싶었다.(정경석, 352) | ||
+ | 가슴이 죄어 왔다. 잃어버린 꿈과 같은 무언가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작고 가깝고 습하게 느껴졌다. 땅덩어리 전체를 오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박종대, 2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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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으로 렌츠가 오벌린의 허락을 받아 일요일 설교를 하는 장면을 보자. 렌츠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고통’과 ‘평안함’을 동시에 느끼는데, 이 대목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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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in ganzer Schmerz wachte jetzt auf und legte sich in sein Herz. Ein süßes Gefühl unendlichen Wohls beschlich ihn.(10) | ||
+ | 고통이 이제 일시에 잠에서 깨어나 그의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ins>그러나 동시에</ins> 끊임없는 평안의 달콤한 감정이 그에게 스며들었다.(임호일 2008, 139. 밑줄 강조 필자) | ||
+ | 그의 온 고뇌가 그때 깨어나 그의 마음을 점령했다. 무한한 감미로운 행복감이 스며들었다.(정경석, 357) | ||
+ | 이제 오롯한 고통이 깨어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무한한 편안함의 달콤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박종대, 270-2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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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시 임호일만이 ‘그러나 동시에’라는 말을 추가하여 일견 잘 이해되지 않는 렌츠의 모순된 내면을 독자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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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r schluchzte, er empfand ein tiefes, tiefes Mitleid mit sich selbst; das waren auch seine seligsten Augenblicke.(31) | ||
+ | 그는 오열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깊고 깊은 동정심이 들었다. <ins>그러나 한편으로</ins> 이 순간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임호일 2008, 168. 밑줄 강조 필자) | ||
+ | 그는 흐느껴 울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고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정경석, 370-371) | ||
+ | 흐느껴 울면서 스스로에게 깊고도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박종대, 2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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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에서도 임호일만이 ‘그러나 한편으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렌츠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독자가 좀더 쉽게 파악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이 광증에 빠진 사람의 심리 상태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과연 이런 논리화가 필요한지, 이것이 역자의 과도한 개입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 ||
+ | 임호일은 <렌츠>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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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in Dasein war ihm eine notwendige Last. ― So lebte er hin.(33) | ||
+ | 자신의 존재가 필연적인 짐처럼 느껴졌다. ― 이렇게 그는 계속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2008, 1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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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존재가 ‘짐’처럼 느껴졌다는 앞 문장을 고려하여 ‘삶을 살아가다’가 아니라 ‘지탱하다’라고 번역하여 시적인 이미지를 한층 강화한다. 이러한 번역은 다른 역자들의 번역, “이렇게 그는 살아갔다······”(정경석, 372),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박종대, 300)에 비해 렌츠가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버텨내는 인상을 준다. 렌츠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광기의 무기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인 ‘비극적인’ 영웅이 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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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이재인(2015)|이재인 역의 <렌츠>(2015)]]<span id="이재인(2015)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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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호일의 번역 이후 약 30년 만에 <렌츠>는 새롭게 번역되어 독자를 만난다. 번역자는 독일어교육을 전공하고 독일어를 강의하는 이재인이다. <[[보이체크 (Woyzeck)|보이체크]]>를 표제작으로 내걸고 <렌츠>와 <[[레옹스와 레나 (Leonce und Lena)|레옹스와 레나]]>까지 묶어 <뷔히너 단편선>이라는 부제를 붙여 놓았는데, <렌츠>를 제외한 다른 두 작품이 희곡이므로 책의 부제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또한 역자 해설에서 <보이체크>의 판본 문제는 꽤 자세히 언급하고 있음에도 <렌츠>의 판본 문제나 번역의 저본이 무엇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아서 아쉬움을 준다. | ||
+ | 그의 번역은 여러모로 임호일의 번역과 대조적이다. 전반적으로 문학적인 표현을 위해서 멋을 부리는 경우가 거의 없이 소박하게 문장을 구사하는 편이다. 이는 <렌츠>의 문체가 대부분 짧고 생략적이므로 오히려 원문에 더 가깝다고 여겨질 때도 많다. 아래 문장은 목사관에 도착한 렌츠가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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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s war kalt oben, eine weite Stube, leer, ein hohes Bett,(6) | ||
+ | 위쪽은 추웠다. 넓은 방이 하나 비어 있었고 뒤쪽에 높은 침대가 있었다.(이재인, 169) | ||
+ | 건물 위쪽에 위치한 그 방은 차가왔다. 커다란 방이었는데 비어 있었다. 높은 침대 하나가 맞은편 쪽에 놓여 있었다.(임호일 1987, 14-15.) | ||
+ | 위쪽 지역은 공기가 차가웠다. 커다란 방이었는데 비어 있었다. 높은 침대 하나가 맞은편에 놓여 있었다.(임호일 2008, 1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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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렌츠가 방에서 받은 첫인상이 동사생략법과 형용사 열외법을 통해 짧은 단어들로 토막 나 있다. 원문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임호일은 독자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건물 위쪽에 위치한 그 방은” 혹은 “위쪽 지역은 공기가”라고 부연했다. 그러나 이재인은 “위쪽은 추웠다”라고 원문대로 간결함을 살려 번역했는데, 오히려 원문의 의미를 더 잘 전달한다. | ||
+ | 그런데 이런 소박한 문장 구사가 심한 경우에는 지나친 단순화로 이어진다. 즉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은 생략하거나 단순화한 경우도 발견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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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m Himmel zogen graue Wolken, aber alles so dicht – und dann dampfte der Nebel herauf und strich schwer und feucht durch das Gesträuch, so träg, so plump.(3) | ||
+ |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가득했고, 덤불 사이로는 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랐다.(이재인, 165) | ||
+ |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흐르고 있었으나 모든 것이 육중했다. 그리고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무겁고 축축하게 관목 숲 속에 서리고 있었다. 몹시 완만하고 우울했다.(정경석, 352) | ||
+ | 하늘에는 잿빛 구름들이 온통 밀집된 상태로 떠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는지 축축하고 자욱한 안개가 가누지 못한 나른한 몸을 관목 가지들 사이로 무겁게 끌어가고 있었다.(임호일, 2008, 129) | ||
+ | |||
+ | |||
+ | 앞서 한 차례 인용했던 위 대목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이재인의 번역은 하늘에 잿빛 구름이 흐르는 모습―구름이 하늘에 꽉 차 있어서 아주 느리게 흐르는 모습―, 안개가 퍼져나가는 모습―습기를 잔뜩 머금어서 무거운 몸으로 아주 굼뜨게 덤불을 지나는 모습–을 그냥 단순하게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덤불 사이로는 안개가 피어올랐다는 식으로 옮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단순화하는 번역은 원문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데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부적인 뉘앙스나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원작의 문학성을 제대로 옮기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자연 풍경은 렌츠의 심리 상태와 긴밀히 조응하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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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단순화는 렌츠의 고통을 보여주는 역어 선택에서도 엿보인다. 우울증이 악화된 렌츠가 목사에게 자신의 권태를 호소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이재인은 “die Langeweile!”(26)를 “심심해요!”(197)라고 옮겼는데, 의미상 오역이라 할 수는 없으나 렌츠를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에 비해 그 어휘가 지나치게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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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박종대(2020)|박종대 역의 <렌츠>(2020)]]<span id="박종대(2020)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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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에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뷔히너 전집>이 출간되면서 <렌츠>도 새롭게 번역된다. 역자는 다수의 독일 문학을 번역한 박종대이다. <뷔히너 전집>도 임호일의 <뷔히너 문학전집>처럼 뷔히너의 작품과 비문학 텍스트를 망라한다. 차이가 있다면 새로 나온 전집이 <[[레옹스와 레나 (Leonce und Lena)|레옹스와 레나]]>의 흩어진 단편들을 추가해서 수록하고 있고, <[[헤센 지방의 전령 (Der Hessische Landbote)|헤센 지방의 전령]]>을 두 판본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작품의 해석을 돕는 주석도 자세히 달고 있다. 번역 저본은 구츠코프가 편집한 초판을 따르는 ‘뮌헨 판본’이다. 이에 따라 박종대 역만이 <렌츠>의 유명한 첫 문장을 “1월 20일 Den 20. Jänner”에서 1월이 빠진 “20일”로 옮겼다. 또한 소설에서 렌츠의 정신병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푸데에 사는 아이의 죽음도 판본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옮겨졌다. 기존 판본에서는 “프리데리케라는 이름의” 아이가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뮌헨 판본에서는 “프리데리케라는 이름의”가 빠져 있다. 이는 뷔히너의 원래 의도를 더 존중하려는 노력이나 독자로서는 작품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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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대 역은 정경석 역과 마찬가지로 <렌츠>의 문체적 특징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특징을 한국어로 옮기려고 시도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소설 서두에서 겨울산의 질풍을 묘사한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문장의 리듬은 단문이냐 장문이냐 혹은 단문이냐 복문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렌츠>의 첫 단락은 산속을 걷는 렌츠의 내면 상태와 겨울산의 황량한 풍경을 평행하게 보여주는 문장들이 짧고 리듬감 있게 병렬적으로 이어지다가, 매우 긴 종속절이 있는 복문이 시작되면서 독서의 호흡이 갑자기 길어진다. 이러한 문장 리듬의 돌연한 변화를 박종대 번역만 온전히 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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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ur manchmal, wenn der Sturm das Gewölk in die Täler warf und es den Wald herauf dampfte, und die Stimmen an den Felsen wach wurden, bald wie fern verhallende Donner und dann gewaltig heranbrausten, in Tönen, als wollten sie in ihrem wilden Jubel die Erde besingen,[85] und die Wolken wie wilde, wiehernde Rosse heransprengten, und der Sonnenschein dazwischen durchging und kam und sein blitzendes Schwert an den Schneeflächen zog, so daß ein helles, blendendes Licht über die Gipfel in die Täler schnitt; oder wenn der Sturm das Gewölk abwärts trieb und einen lichtblauen See hineinriß und dann der Wind verhallte und tief unten aus den Schluchten, aus den Wipfeln der Tannen wie ein Wiegenlied und Glockengeläute heraufsummte, und am tiefen Blau ein leises Rot hinaufklomm und kleine Wölkchen auf silbernen Flügeln durchzogen, und alle Berggipfel, scharf und fest, weit über das Land hin glänzten und blitzten, riß es ihm in der Brust [...](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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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만 가끔, 거센 바람이 구름 덩이를 골짜기 속으로 몰아넣고, 그 구름이 숲에서 수증기로 피어오르고, 바위 속의 목소리가 깨어나 곧 멀리 사라져 가는 천둥소리처럼 들리다가 이내 열렬한 환호성 속에서 대지를 찬미하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울려 퍼지고, 구름이 사납게 울부짖는 야생마처럼 질주하고, 햇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와 눈 덮인 곳을 번쩍이는 검처럼 가르고, 눈부신 햇빛 한 줄기가 봉우리를 지나 골짜기 속으로 파고들 때면, 또는 거센 바람이 구름 덩이를 산 아래로 몰아넣어 햇살로 반짝이는 푸른 호수를 휘젓고, 그러다 차츰 잦아든 바람이 협곡 깊숙한 곳과 전나무 우듬지에서 자장가와 종소리처럼 잔잔하게 올라오고, 짙푸른 하늘가에 분홍빛이 번져 가고, 조각 구름이 은빛 날개를 달고 지나가고, 봉우리마다 대지 위로 환한 빛이 선연하게 반짝거릴 때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박종대, 262-26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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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로 주어와 술어로만 이루어진 단문이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구문이 많은 <렌츠>에서 이렇게 긴 종속문이 쓰이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에 이 구문은 매우 눈에 띈다. 박종대 역은 위와 같이 이러한 문체적 특이성을 한국어로 모방하면서도 잘 읽히게끔 번역했다. | ||
+ | 또한 박종대 역은 앞서 정경석 역에서 보여주었듯이 동사가 생략된 부분이나 명사구로 이어지거나 끝나는 구절을 부분적으로 살려서 옮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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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s>[D]as heimliche Zimmer</ins> und <ins>die stillen Gesichter</ins>, die aus dem Schatten hervortraten: <ins>das helle Kindergesicht</ins>, auf dem alles Licht zu ruhen schien und das neugierig, vertraulich aufschaute, <ins>bis zur Mutter</ins>, die hinten im Schatten engelgleich stille saß.(5) | ||
+ | 아늑한 방, 방의 그늘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평온한 얼굴들, 세상 모든 빛이 깃든 것 같은 얼굴에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친근하게 올려다보는 아이, 방 뒤쪽의 그늘진 곳에 천사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의 어머니····· (264-2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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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대로 명사구를 나열함으로써 렌츠가 조금 전까지 산에서 겪은 격렬한 운동 상태와는 완벽히 대조를 이루는 차분하고 평온한 리듬이 전달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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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대 번역은 이렇게 부분적으로 원문의 어조를 충실히 옮기려 시도하면서도 기존 번역의 오류들을 수정하여 전체적으로는 가장 높은 정확성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작품에서 상당히 핵심적인 ‘예술대화’에서 이상주의 미학을 비판하는 대목은 가장 높은 설득력을 자랑한다. 렌츠는 이상주의 미학을 신봉하는 카우프만을 앞에 두고 이상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며 다음과 같이 강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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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eser Idealismus ist die schmächliste Verachtung der menschlichen Natur. Man versuchte es einmal und senke sich in <ins>das Leben des Geringsten</ins> und gebe es wieder, in den Zuckungen, den Andeutungen, dem ganzen feinen, kaum bemerkten Mienenspiel; er hätte dergleichen versucht im »Hofmeister« und »den Soldaten«. Es sind <ins>die prosaischsten Menschen</ins> unter der Sonne; aber die Gefühlsader ist in fast allen Menschen gleich, nur ist die Hülle mehr oder weniger dicht, durch die sie brechen muss.(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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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이상주의는 인간 본성의 가장 치욕적인 무시다. <ins>지극히 평범한 삶</ins>에 침잠해서 경련과 암시, 그리고 거의 인지할 수 없는 섬세한 표정 변화 속에서 그것을 재현해야 한다. 자신은 가정교사와 군인들에서 그런 시도를 해보았다. 그 속의 인물들은 <ins>하늘 아래 가장 산문적인, 그러니까 가장 범속한 인간들</ins>이다. 그러나 감정의 혈관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 다만 깨뜨려야 할 껍질의 두께만 다를 뿐이다.(박종대, 275.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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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이상주의는 인간, 자연에 대한 가장 굴욕적인 모욕이다. [...] <ins>가장 쓸데없는 생활</ins> 속에 몸을 가라앉히고 그 생활을 경련, 암시 그리고 섬세하고 거의 알아낼 수 없을 정도의 표정 속에서 재현(再現)해 보라. 자기는 그런 것을 가정 교사와 군인에게 시험해 보았다. 이 세상에는 <ins>산문적(散文的)인 인간들</ins>이 있으나 감정의 소질은 거의 모든 인간들에 있어서 같은 것이다. 다만 그들이 뚫고 나와야 할 외피가 두꺼우냐, 얇으냐 하는 것뿐이다.”(정경석, 359.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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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이상주의야말로 인간 본성에 대한 치욕적인 경멸이다. [...] <ins>가장 보잘것없는 존재</ins>의 삶 속으로 침잠해 보라. 그리고 그 삶을 떨림과 암시와 아주 섬세하고 거의 눈치 챌 수 없는 표정 연기로 재현해보라. 렌츠는 이와 같은 것을 <가정교사>와 <군인들>이란 작품에서 시도했다. / 이 세상에는 <ins>몰취미한 인간들</ins>도 있다. 그러나 감각기관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거의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단지 대상을 감지하는 그 감각의 촉수가 섬세한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가 다소간 있기는 하다.(임호일 2008, 144. 밑줄 강조 필자) | ||
+ | |||
+ | 이 이상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장 비열한 경멸이다. [...] <ins>가장 사소한 것의 삶</ins>에 깊이 침잠해 보고, 그것을 떨림과 암시와 극히 섬세하여 좀처럼 눈치챌 수 없는 표정으로 재현해 보아야 한다. / 실제로 렌츠는 자신의 작품 <가정교사>와 <군인들>에서 그런 시도를 했었다. 세상에는 <ins>참으로 무미건조한 사람들</ins>이 있다. 그러나 감각의 촉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깨뜨려야 할 덮개의 두께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눈과 귀만 있으면 된다.(이재인, 182.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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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번역에서 관건은 “das Leben des Geringsten”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가장 쓸데없는 생활”이라 옮긴 정경석의 번역은 진정한 예술가라면 이상주의 미학에 대항하여 건실한 시민생활이 지탄하는 무용한 삶을 살아봐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상주의 미학은 인간의 무용한 생활을 경시하므로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굴욕적인 모욕”인가?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해석이 아주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몇 줄 뒤에 나오는 “가장 산문적인 인간들die prosaischsten Menschen”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정경석 역에서 “가장 산문적인 인간들”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에서 렌츠가 다룬 가정교사와 군인들과 잘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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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 임호일은 이 대목을 신분 비판적, 계급 비판적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바 있다. 그는 이것을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이라 옮겨 번역문에서 명료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유사한 구절이 발견되는 편지의 한 대목을 각주에 인용한다. “이러한 귀족주의는 신성한 인간정신을 모독하는 치욕적인 행위입니다.”(임호일 1987, 144) 만일 뷔히너가 이상주의 미학에서 귀족주의를 비판한다면, 여기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은 하층민의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가장 산문적인 인간들”도 단순히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사람들이 아니라 역시 귀족이 아닌 평민들, 고상한 인간들이 아니라 평범하고 속된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극히 평범한 삶”, “가장 범속한 인간들”이라 옮긴 박종대 역이 이상주의 미학의 귀족주의에 대항하는 원문의 의미를 제일 잘 전달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직후의 문장 “그러나 감정의 혈관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에서도 렌츠가 이상주의 미학에 대항하여 추구하는 평등의 의미가 가장 잘 전달된다. | ||
+ | |||
+ | 그 밖에도 렌츠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해 정신을 차리려 하는 장면, 오벌린에게 회초리 다발을 들고 와 자신을 매질해달라고 하는 장면 등에서 발견되던 기존의 오역들이 바로잡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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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평가와 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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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 <렌츠>의 한국어 번역 총 네 종을 살펴보았다. <렌츠>의 한국어 번역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은 편이며, 작품 이해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 대부분 잘 번역되어 있다. 다만 <렌츠>의 뛰어난 예술성을 이루는 문체적 특징을 온전히 옮긴 번역은 아직 없다. 그러한 문체적 특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번역들이 발견되기는 하나, 수많은 특징 가운데 일부만을 살리거나, 그것도 일관되게 살리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원문의 문체적 특징들을 일부 마나 한국어로 되살리려는 역자들의 창의적이고 용기 있는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렌츠>에 대한 그간의 축적된 연구를 바탕으로 정확하면서도 작품의 문학성을 한국어로 구현하는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 ||
+ | |||
+ | |||
+ |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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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석(1971): 렌츠. 일지사. <br> | ||
+ | 임호일(1987): 렌쯔. 한마당.<br> | ||
+ | 임호일(2008): 렌츠. 지만지. <br> | ||
+ | 이재인(2015): 렌츠. 더클래식. <br> | ||
+ | 박종대(2020): 렌츠. 열린책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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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v style="text-align: right">이경진</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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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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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일 (수) 06:15 기준 최신판
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 1813-1837)의 소설
작가 | 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t) |
---|---|
초판 발행 | 1839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독일 작가이자 자연철학자 게오르크 뷔히너의 미완성 단편소설이다. 작가 사후에 출간되었고 작품 제목도 사후에 붙여진 것이다. 소설은 슈투름 운트 드랑 시대의 작가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다. 뷔히너는 렌츠의 실제 서한, 그리고 그를 돌봐준 경건주의적 박애주의적 목사 요한 프리드리히 오벌린(Johann Friedrich Oberlin)의 기록을 참조하여 광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렌츠가 1778년 1월 오벌린의 치료를 받으러 슈타인탈에 약 20일간 머물렀던 시기를 재구성했다. 이렇게 쓰인 소설은 일종의 병력사(病歷史)이면서 렌츠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연구이기도 하다. 작가는 정신적으로 몹시 피폐한 상태에 있는 렌츠의 심리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듯 자세하고 역동적으로 기술했으며 렌츠가 지각한 외부세계가 그의 내면에 의해 어떻게 굴절되고 왜곡되는지도 뛰어나게 묘사하였다. 특히 특정 시점에 초점을 맞추어 자연을 묘사하는 혁신적인 서술기법이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1987년에 뷔히너 전공자 임호일에 의해 제일 처음 번역되었다(한가람).
초판 정보
Büchner, Georg(1839): Lenz. Eine Reliquie von Georg Büchner. In: Telegraph für Deutschland 5/7-11/13/14. <단행본 초판> Büchner, Georg(1879): Lenz. In: Franzos, Karl Emil(ed.): Georg Büchner’s Sämtliche Werke. Frankfurt a. M.: J. D. Sauerländer’s Verlag, 205-239.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렌츠 | 獨逸短篇文學大系, 現代篇 2 | 獨逸短篇文學大系 3 | 게오르그 뷔히너 | 鄭庚錫 | 1971 | 一志社 | 352-372 | 편역 | 완역 | ||
2 | 렌쯔 | 뷔히너 文學全集 | 한마당문예 6 | 게오르그 뷔히너 | 임호일 | 1987 | 한마당 | 9-46 | 편역 | 완역 | |
렌츠 | 뷔히너 문학전집 | 지식을만드는지식 | 게오르크 뷔히너 | 임호일 | 2008 | 지식을만드는지식 | 127-172 | 편역 | 완역 | ||
렌츠 | 보이첵 |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미니북 49 | 게오르그 뷔히너 | 이재인 | 2015 | 미르북컴퍼니, 더클래식 | 161-206 | 편역 | 완역 | ||
렌츠 | 뷔히너 전집 : 당통의 죽음·보이체크 외 | 열린책들 세계문학 | 게오르그 뷔히너 | 박종대 | 2020 | 열린책들 | 259-300 | 편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청년 독일파(Junges Deutschland)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스물셋의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단 세 편의 희곡과 1편의 단편소설만을, 그것도 대부분을 미완으로 남겼으나 독일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높다. 이는 한국 독문학계에서도 비슷하여, 1980년대 중반 작가 이름을 딴 소학회들이 창립되던 시기에 한국괴테학회와 한국카프카학회에 이어서 세 번째로 한국뷔히너학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작가들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브레히트와 함께 뷔히너가 크게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1]
뷔히너의 작품 중 <렌츠>는 이러한 뷔히너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시작되기 전에 유일하게 먼저 번역되었다. 1971년 <독일단편문학대계>에 <렌츠>는 독문학자 정경석의 번역으로 대표적인 독일 단편소설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 이후 뷔히너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될 무렵인 1987년에 뷔히너 전공자 임호일이 뷔히너 문학 전체를 번역한 <당통의 죽음>을 내놓으면서 <렌츠>는 두 번째로 번역된다. 임호일 역 이후 약 30년간 새 번역이 없다가 2015년에 이재인, 2020년에 박종대가 뷔히너 작품집을 번역해 내놓으면서 <렌츠>도 재번역된다.
<렌츠>의 번역을 살펴보기 전에 판본 문제를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뷔히너의 대다수 작품이 그렇듯이 <렌츠> 역시 미발표 유고로 남아 있다가 작가 사후에 편집 · 출간되어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문제는 작가의 수고(手稿)도, 약혼자 예글레의 사본도 모두 유실된 상태라서 편집자들이 원본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본 확립이 어려운 상황이며 기존 판본에 대한 평가도 뷔히너 연구사가 축적되면서 달라지고 있다. 한국어 번역본 역시 다양한 판본을 기초로 하고 있다. 가령 번역 저본을 밝히고 있는 임호일의 번역은 베르너 레만(Werner Lehmann)이 편집한 역사비평판을 기초로 했고, 박종대 번역의 경우는 편집자들의 개입을 비판하고 초판으로 돌아가려 한 ‘뮌헨 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런 판본의 차이에서도 적잖은 번역의 차이가 발생한다.
<렌츠>의 한국어 번역을 살펴볼 때 역자가 소설의 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옮겼는가도 중요하겠으나, 소설의 문체적 특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한국어로 구현하려 했는가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렌츠>는 특히 20세기 들어서 그 문체적 독특성과 예술성이 많은 현대 작가들과 연구자들의 경탄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또 이 작품은 독일문학사에서 ‘체험화법(erlebte Rede)’을 선구적으로 사용하여 현대성을 선취한 소설로 인정받는다. 뷔히너는 우울증과 광기에 시달리는 예술가 렌츠가 바라본 주관적 세계를 특유의 체험화법과 여러 수사법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대표적으로 연구자 페터 하주벡이 지적했듯이 작가는 다양한 문체적 수단을 사용하여 정(靜)과 동(動)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렌츠의 광적인 심신 상태를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이제 역자들이 이러한 문체적 특징들과 어떻게 씨름했는가를 중심으로 개별 번역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개별 번역 비평
정경석은 <렌츠>를 한국어로 제일 처음 번역했다. 그의 번역은 ‘질풍노도’ 시대부터 전후 동시대에 이르는 방대한 독일 단편소설 선집 <독일단편문학대계. 괴테에서 욘손까지>(일지사) 중 <근대편>에 실려 발표되었다. 작품 앞의 짤막한 소개글에서 뷔히너의 문학은 “인간존재의 무의미에 대한 통렬한 외침”으로, <렌츠>는 작가의 “주의주의(主意主義)적 현상 세계”(351)를 그려낸 작품이라고 설명되는데, 뷔히너 작품을 탈정치화하여 허무주의적으로 해석했던 20세기 중반 독일 독문학계의 영향이 엿보인다. 번역에 사용된 판본의 정보는 실려 있지 않다. 정경석의 번역은 초역이지만 원문의 문체적 특징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다. 가령 <렌츠>의 유명한 첫 문장을 보자.
Den 20. [Jänner] ging Lenz durchs Gebirg.(3)[2] 1월 20일 렌츠는 산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정경석, 352) 1월 20일에 렌츠는 산을 넘고 있었다.(임호일 2008, 129) 1월 20일에 렌츠는 산으로 갔다.(이재인, 165) 렌츠는 20일에 산에 갔다.(박종대, 261)
번역본 네 종을 비교해 보면, 초판본을 따라서 ‘1월’을 옮기지 않은 박종대 역을 제외하고 모두 독일어 원문대로 시간 부사, 주어 순으로 옮겼다는 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또 역자들이 택한 동사도 차이를 보이는데, 이재인과 박종대가 ‘가다’를 택했다면, 임호일은 ‘넘다’, 정경석은 ‘걸어가다’를 택했다. 이는 역자들이 문장의 다층적인 의미망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텐데, 이재인과 박종대가 렌츠가 산에 갔다는 전체적인 방향에 초점을 맞췄다면 임호일과 정경석은 산을 걷고/넘고 있다는 그 순간의 동작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해보자면, 전자가 롱숏으로 소설을 시작하게 한다면, 후자는 클로즈업까지는 아니지만 대상에 상당히 가까운 미디엄 쇼트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역자들이 택한 시제도 서로 다르다. 이재인과 박종대가 렌츠가 산에 “갔다”라고 과거 시제로 옮겼다면, 정경석과 임호일은 과거 진행형을 사용했다. 이러한 차이는 사소해 보일 수 있으나 매우 중요하다. 과거 진행형을 사용함으로써 소설이 시작되었을 때 상황은 이미 한참 진행 중임(medias res)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렌츠는 이미 깊은 산속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 작품의 ‘현대성’을 보여주며, 첫 문장부터 긴박감을 조성한다. 또 같은 과거 진행 시제를 썼지만 “산을 넘고 있었다”라고 옮긴 임호일 역이 아직 나오지 않은 정보를 주어서 번역문의 독자에게 원문의 독자보다 많은 정보를 준다면, 정경석의 번역은 딱 원문 그대로, 렌츠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가는 것인지 모르게 독자를 내버려 둔다. 이는 렌츠의 걷기가 실은 방황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내용에 보다 잘 부합한다. 그리고 “1월 20일” 뒤에 ‘에’라는 조사를 붙이지 않아, 뚝 끊기는 맛을 주면서 문장을 시작하는데, 이는 그 뒤에 동사가 없는 명사구가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나오며 스타카토적인 리듬이 더 명확해지므로 적확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뷔히너는 <렌츠>에서 동사를 생략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하여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기도 하고 문장 리듬에 휴지부를 만들어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을 내면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러한 문체상의 특징이 번역에 얼마나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정경석이 가장 예민하게 이러한 특징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한국어로 구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S]ein blasses Kindergesicht, das jetzt lächelte, sein lebendiges Erzählen;(6. 밑줄 강조 필자) 그의 창백한 소년 같은 얼굴은 미소를 띠었고, 그 생생한 이야기 솜씨란—.(정경석, 354. 밑줄 강조 필자) 그의 창백한 동안이 이제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활기를 띠어갔다.(임호일 2008, 133. 밑줄 강조 필자) 아이 같은 창백한 얼굴에는 이제 미소가 피어올랐고, 이야기는 활기를 띠었다.(박종대, 265. 밑줄 강조 필자)
[D]as Zimmer im Pfarrhause mit seinen Lichtern und lieben Gesichtern, es war ihm wie ein Schatten, ein Traum,(6. 밑줄 강조 필자) 불들이 켜 있고 사랑스런 얼굴들이 있는 목사관의 방. 그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그림자 같았고 꿈과도 같았다.(정경석, 354. 밑줄 강조 필자) 그리고 목사관의 그 방과 불빛들, 또 그곳에 있던 다정한 얼굴들을 상기해 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들 같았고 꿈과도 같았다.(임호일 2008, 133. 밑줄 강조 필자) 램프 불빛 아래 사랑스러운 얼굴들이 앉아 있던 목사관의 방도 떠올랐다. 모두 그림자 같고 꿈같았다.(박종대, 265. 밑줄 강조 필자)
Ein gewaltsames Drängen, und dann erschöpft zurückgeschlagen;(20. 밑줄 강조 필자) 무서운 절박감, 그 다음엔 기진맥진하여 뒤로 나자빠졌다.(정경석, 363. 밑줄 강조 필자) 그렇게 엄청난 격동이 인 후 그의 지친 몸은 침몰했다.(임호일 2008, 152) 격렬한 감정의 결과는 완전한 탈진이었다.(이재인, 189) 하지만 그렇게 격렬하게 파고들다가 결국 지쳐서 나뒹굴고 말았다.(박종대, 282)
위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역자들은 명사로 구문이 끝나는 곳에 동사를 새로 집어넣어 보완하거나(“상기해 보았다”, “떠올랐다”), 형용사를 동사로 바꾸어서 번역했다(“활기를 띠어갔다”, “활기를 띠었다”). 이러한 번역은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으나 문체나 어조에서 차이를 낳을 수 있다. 동사가 생략되거나 명사구로 문장이 끝나면 독서의 리듬상 잠시 멈칫하게 하고, 해당 부분을 좀더 강조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또 <렌츠>에서는 특정 단어를 반복하는 조응법(Anphorik)이 자주 쓰이는데 정경석 역본은 이 조응법을 가장 잘 살린다.
[E]r hatte keinen Hass, keine Liebe, keine Hoffnung – eine schreckliche Leere, und doch eine folternde Unruhe, sie auszufüllen. Er hatte nichts.(29. 밑줄 강조 필자) 그는 미움도 사랑도 희망도 없었다. 있는 것은 무서운 공허와 그것을 메우려는 괴로운 불안뿐이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정경석, 369. 밑줄 강조 필자) 그는 증오도 사랑도 그리고 희망도 모두 잃어버렸다. 무시무시한 공허와 이 공허를 메워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이 고통스런 불안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임호일 2008, 164) 그는 증오도 사랑도 희망도 모두 잃어버렸고, 그 마음에는 끔찍한 공허감과 그 공허감을 메워야 한다는 괴로운 근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이재인, 201) 그에겐 미움이나 사랑, 희망이 없었고, 끔찍한 공허와 그 공허를 채워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불안뿐이었다.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박종대, 294)
부정수사 ‘kein’이 반복된 구문에서 정경석과 이재인은 ‘도’를 반복하여 리듬을 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정경석은 ‘없었다’에 바로 이어서 ‘있는 것은’이라고 번역하여 교차배열적(Chiasmus) 수사적 효과까지 낸다.
정경석은 격렬한 광기에 빠진 렌츠의 말투도 가장 잘 살려냈다. 오벌린이 스위스로 출타한 이후 정신적으로 크게 불안정해진 렌츠는 오벌린이 돌아와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훈계하자 격분한다. 게다가 오벌린이 그럴수록 하나님을 잘 믿고 따라야 한다고 타이르자, 렌츠는 목사에게 난데없이 프레데리케의 안부를 묻는다. 목사가 그녀가 누구인지 자신은 모르니 알아보겠다며 좀더 자세한 신상을 알려달라고 하자 렌츠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댄다.
Er antwortete nichts wie gebrochne Worte: »Ach sie ist tot! Lebt sie noch? Du Engel, Sie liebte mich – ich liebte sie, sie war's würdig, o du Engel. Verfluchte Eifersucht, ich habe sie aufgeopfert – sie liebte noch einen andern – ich liebte sie, sie war's würdig – o gute Mutter, auch die liebte mich – ich bin ein Mörder!«(24-25) 그는 더듬더듬 말할 뿐이었다. “아! 그녀는 죽었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천사여! 그녀는 나를 사랑했는데――나도 그녀를 사랑했고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오! 천사여! 원수같은 질투! 나는 그녀를 희생시켰다. 그녀는 또 한 남자를 사랑했지.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 아! 인자하신 어머니도 나를 사랑했지. 나는 그들의 살인자다!”(정경석, 366) 이 말에 렌츠는 두서없는 얘기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아,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고요? 그대 천사여! 그녀는 저를 사랑했습니다! 저 역시 그녀를 사랑했고요.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여자였습니다. 오, 그대 천사여! 저주받을 질투였습니다. 제가 그녀를 희생시켰어요. 그녀는 또 다른 남자를 사랑했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했고요.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오, 착한 어머니, 어머니도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전 살인자랍니다.”(임호일 2008, 159) 렌츠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했다. “아, 그녀는 죽었어요! 그녀가 아직 살아 있나요? 그대 천사여! 그녀는 저를 사랑했어요! 저도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사랑받을 만했어요. 오, 그대 천사여! 저주받을 질투여, 저는 그녀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했어요. 저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사랑받을 만했습니다. 오, 자애로운 어머니여, 어머니도 저를 사랑했어요, 저는 살인자입니다.”(박종대, 289)
정경석의 번역이 다른 두 번역과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어투다. 다른 두 번역이 계속 존칭을 사용해 렌츠가 오벌린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면, 정경석은 과감하게 존칭을 버리고, ‘저’를 ‘나’로 바꾸고, ‘~다’로 끝나는 연극적인 독백투로 번역해 렌츠가 정신을 놓았음을 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이에 비해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여자였습니다”라고 옮긴 임호일의 번역은 지나치게 설명투이며, “전 살인자랍니다”라는 고백하는 말투도 원문보다 렌츠를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저는 그녀를 희생시켰습니다”라고 옮긴 박종대의 번역도 지나치게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정경석은 원문의 문체적 특징과 어조를 실감 나게 재현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문학적 감각을 발휘한다. 그러면서도 렌츠가 부딪친 문제를 한국 독자들에게 잘 이해시킨다. 가령 광기에 빠진 렌츠가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konsequent”라고 외치다가 또 “inkonsequent”(30)하다고 지껄이는 부분을 정경석은 “모순이 아니야”, “모순이다”(370)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수미일관하게”, “수미일관하지 못해”(임호일 167), “일관적이야”, “일관적이지 못해”(박종대 296)에 비해 그 의미를 쉽게 전달한다.
그러나 정경석 역은 몇몇 부분에서 중대한 오역을 하여 초역의 한계도 보여준다. 가령 오벌린의 목사관 하녀가 구슬픈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렌츠가 오벌린 부인에게 “그녀”[프레데리케]가 무엇을 하는지 말해줄 수 없냐고 하는 대목에서 “그녀”를 하녀로 오독하고 “저 아가씨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실 수 없을까요”(364)라고 잘못 번역한 부분은 내용상 중대한 오역에 해당한다. 또 렌츠가 속죄하기 위해 자기를 매질해 달라고 오벌린에게 가지고 온 회초리를 “오벌린 씨가 렌츠에게 갖다준 것”(367)이라고 잘못 번역하여, 렌츠의 행동이 오벌린에게 얼마나 당황스러운 것인지 잘 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가 있기는 하나 정경석 역은 소설의 주관적인 자연 풍경 묘사에서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중요한 대목에서 문장의 리듬감과 어조를 유사하게 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장점이 크다고 하겠다.
2) 임호일 역의 <렌쯔>(1987)와 <렌츠>(2008)
임호일이 번역한 <렌츠>는 현재까지 나온 뷔히너 번역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판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가 한국의 대표적인 뷔히너 연구자로서 한국뷔히너학회 창립 멤버이자 뷔히너학회 회장을 역임한 만큼 학계 내외에서 역자의 번역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높았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렌츠>가 실린 번역서는 뷔히너의 문학작품은 물론, 정치혁명가이자 자연과학자로서의 뷔히너를 보다 전문적으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비문학 텍스트인 <헤센 지방의 전령>과 <두개골 신경에 관하여>, 그리고 뷔히너의 서한을 발췌 번역하여 수록하는 등 뷔히너의 문학세계를 전문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고 있기에 오랫동안 가장 권위 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거의 유일한 한국어 번역으로 통했을 것이다.
임호일의 번역은 1987년 한마당 출판사에서 나온 <당통의 죽음>에 수록된 이래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다. 1997년도에 개정판이 나왔고, 이후 한마당 출판사가 문을 닫자 2008년에 지만지 출판사에서 <뷔히너 문학전집>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책을 단장하여 냈다. 이때 <렌츠>의 번역은 일부 수정되었는데, 역자는 역자 후기에서 “이번 기회에 그간 뷔히너 문학을 강의하면서 체크해 두었던 오역 부분을 수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우리말 표현들을 다시 손질하여 다듬어보았다”(348)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개정된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인명이 달라진 것(대표적으로 ‘렌쯔’->‘렌츠’) 외에 일부 중요한 부분에서 번역이 수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87년도 판과 2008년도 판 모두 베르너 레만의 역사비평판을 저본으로 삼았고, 작품의 전문적 이해를 돕기 위해 발터 힌더러(Walter Hinderer)의 <뷔히너 주해Büchner-Kommentar>를 참고하여 주석을 달았다. 2008년도 판에서는 1987년도 판의 <해설>을 <지은이에 대해>와 <뷔히너의 문학세계>로 쪼개고 좀더 쉽게 뷔히너의 문학을 소개한다. 1987년도 판 해설이 연구 논문에 가깝다면, 2008년도 판 해설은 대학생과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왜 뷔히너가 중요한 작가인지 소개하는 성격을 띤다. 주로 요절한 천재 이미지를 강조하고 리얼리스트와 민중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한다.
임호일은 초판 서문에서 그간 번역서에서 늘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던 “우리말의 구성 및 구사문제”(308)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매끄럽게 잘 읽히는 번역을 지향한다. 실제로 그의 번역을 살펴보면, 숨 가쁘게 이어지는 복문은 끊어서 번역하고, 뚝뚝 끊어지는 단문은 늘려서 번역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네 종의 번역 중에서 번역의 길이가 가장 길다. 그러다 보니 <렌츠>의 축약적이고 간결한 문체와 멀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K]ein Lärm, keine Bewegung, kein Vogel, nichts als das bald nahe, bald ferne Wehn des Windes.(7. 밑줄 강조 필자) 그밖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바람만이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살랑댈 뿐이었다.(임호일, 16. 밑줄 강조 필자) 소리도 없고 움직이는 것도 없고 새들도 없었다. 때로는 가까이, 때로는 멀리서 바람이 불 뿐이었다.(정경석, 355)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가까이서, 가끔은 멀리서 바람밖에 불지 않았다.(박종대, 267)
위 예문을 보면 ‘kein’이 반복되어 리듬을 생성하는데, 정경석이 ‘도 없다’를 되풀이하여 반복의 양상을 재현하려 했다면, 임호일은 이 ‘kein’을 제각기 다르게 옮겼다. 의미상으로는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말소리로 반복의 느낌이 잘 전달되지 않으며 원문의 간결하고 축약적인 리듬이 늘어져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렌츠의 격렬한 신체적/심리적 동요와 대비되는 정적인 상태, 즉 고요와 평정, 극단적인 경직 상태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Die Äste der Tannen hingen schwer herab in die feuchte Luft.(3) 전나무가지들이 축축한 대기 속에서 그 육중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아래쪽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임호일 2008, 129) 전나무 가지들이 습기찬 공기 속에 축 늘어져 있었고 [...](정경석, 352) 전나무 가지들은 습기를 머금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이재인, 165) 전나무 가지는 젖은 대기 속에 축 늘어져 있었다.(박종대, 261)
위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임호일은 문장을 리듬의 제한에 가두기보다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든 문학적인 향취를 내기 위해서든 시적인 표현을 덧붙여 겨울철 습한 날씨에 전나무 가지들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이렇게 말을 덧붙이다 보니 전나무 가지가 축 처져 있는 것이 가지가 육중하기 때문이라는 역자의 상상력이 들어가게 된다. 이런 임호일 역의 경향은 위 예시처럼 자연을 의인화해서 묘사하는 대목에서 유독 빛을 발한다. 뷔히너는 <렌츠>에서 자연을 묘사할 때 의인화 수법을 자주 사용한다. 자연은 렌츠의 심신 상태를 반영하기도 하고 그것과 호응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 묘사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역자는 가령 렌츠가 “더 이상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Er konnte sich nicht mehr finden”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문장을 “더 이상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133)라고 번역하여 전나무와 렌츠 사이에 시적인 통일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임호일은 뷔히너가 자연을 의인화하지 않았거나 간접적으로 의인화한 부분에서도 두드러진 의인화를 선보인다.
Am Himmel zogen graue Wolken, aber alles so dicht – und dann dampfte der Nebel herauf und strich schwer und feucht durch das Gesträuch, so träg, so plump. [...] ; und dann der Wind verhallte und tief unten aus den Schluchten, aus den Wipfeln der Tannen wie ein Wiegenlied und Glockengeläute heraufsummte,[...].(3-4. 밑줄 강조 필자) 하늘에는 잿빛 구름들이 온통 밀집된 상태로 떠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는지 축축하고 자욱한 안개가 가누지 못한 나른한 몸을 관목 가지들 사이로 무겁게 끌어가고 있었다. [...] 점차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깊은 협곡과 전나무의 우듬지에 내려앉아 마치 자장가 같기도 하고 은은한 종소리 같기도 한 음향으로 조용히 울어대고 있었다.(임호일, 2008, 129-130. 밑줄 강조 필자)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흐르고 있었으나 모든 것이 육중했다. 그리고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무겁고 축축하게 관목 숲 속에 서리고 있었다. 몹시 완만하고 우울했다. [...] 바람이 자면 깊은 계곡의 전나무 가지에서 마치 자장가나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정경석, 352. 밑줄 강조 필자) 하늘에는 먹구름이 깔려 있었고, 온 사방이 조밀했다. 땅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덤불숲 사이로 무겁고 축축하게 퍼져 나가더니 느릿하고 둔탁하게 사방을 에워쌌다. [...] 그러다 차츰 잦아든 바람이 협곡 깊숙한 곳과 전나무 우듬지에서 자장가와 종소리처럼 잔잔하게 올라오고 [...](박종대 261-262. 밑줄 강조 필자)
위 예시에서 보듯 임호일은 전나무 가지들처럼 안개 역시 “가누지 못한 나른한 몸을 [...] 무겁게 끌어가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정경석이 안개가 ‘피어오르다’, ‘서리다’라는 동사를, 박종대가 ‘퍼져 나가다’, ‘에워싸다’라는, 보통 안개에 많이 쓰이는 동사를 사용한 것과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마지막에 임호일은 질풍이 “울어대다”라고 번역하여 뷔히너가 사실 의인화해서 쓰지 않은 부분까지 의인화해서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부분을 박종대는 원문에 더 가깝게 “올라오다”라고 옮겼다. 그렇다면 임호일은 번역에서 뷔히너가 즐겨 사용한 의인화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임호일은 한국 독자가 좀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여서 번역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렌츠가 산 위에서 땅바닥에 누워 자연과 교감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임호일은 “그는 우주의 삼라만상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라고 번역한다. 이는 박종대의 “우주 속으로 들어갔다”(263)에 비해서 렌츠의 행동이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또 렌츠가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대목을 정경석이 “그것은 고통을 주는 쾌감이었다”(353), 박종대가 “아픈 쾌감이 일었다”(263)로 번역하여 간결한 문체로 형용모순을 강조한다면, 임호일은 “그것이 그에게는 희열을 가져다주었고, 이 희열은 다시금 그에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라고 옮겨 문장이 많이 길어졌으나 의미 전달에 더 치중한다.
이렇게 가독성을 높이는 경향은 역자가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적 연결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개입하는 데에서 잘 나타난다. 아래 밑줄 친 부분처럼 임호일은 다른 역자들과 달리 논리적 인과관계를 지시하는 접속사를 집어넣는다.
[E]s drängte in ihm, er suchte nach etwas, wie nach verlornen Träumen, aber er fand nichts. Es war ihm alles so klein, so nahe, so nass; er hätte die Erde hinter den Ofen setzen mögen [...](3) 그의 가슴은 콱콱 막혀왔다. 그는 답답한 나머지 무언가 잃어버린 꿈 같은 것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매우 조그맣고, 가깝고, 축축하게 젖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지구를 난로 뒤쪽에 밀어놓고 싶었다.(임호일, 2008, 129. 밑줄 강조 필자) 가슴 속이 답답해지고 잃어버린 꿈을 찾듯이 무엇을 찾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매우 작고 가깝고 축축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이 대지를 난로 뒤에라도 갖다 놓고 싶었다.(정경석, 352) 가슴이 죄어 왔다. 잃어버린 꿈과 같은 무언가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작고 가깝고 습하게 느껴졌다. 땅덩어리 전체를 오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박종대, 262)
다음으로 렌츠가 오벌린의 허락을 받아 일요일 설교를 하는 장면을 보자. 렌츠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고통’과 ‘평안함’을 동시에 느끼는데, 이 대목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s]ein ganzer Schmerz wachte jetzt auf und legte sich in sein Herz. Ein süßes Gefühl unendlichen Wohls beschlich ihn.(10) 고통이 이제 일시에 잠에서 깨어나 그의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끊임없는 평안의 달콤한 감정이 그에게 스며들었다.(임호일 2008, 139. 밑줄 강조 필자) 그의 온 고뇌가 그때 깨어나 그의 마음을 점령했다. 무한한 감미로운 행복감이 스며들었다.(정경석, 357) 이제 오롯한 고통이 깨어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무한한 편안함의 달콤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박종대, 270-271)
역시 임호일만이 ‘그러나 동시에’라는 말을 추가하여 일견 잘 이해되지 않는 렌츠의 모순된 내면을 독자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옮겼다
[E]r schluchzte, er empfand ein tiefes, tiefes Mitleid mit sich selbst; das waren auch seine seligsten Augenblicke.(31) 그는 오열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깊고 깊은 동정심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순간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임호일 2008, 168. 밑줄 강조 필자) 그는 흐느껴 울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고 깊은 동정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정경석, 370-371) 흐느껴 울면서 스스로에게 깊고도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박종대, 297)
여기에서도 임호일만이 ‘그러나 한편으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렌츠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독자가 좀더 쉽게 파악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이 광증에 빠진 사람의 심리 상태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과연 이런 논리화가 필요한지, 이것이 역자의 과도한 개입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임호일은 <렌츠>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S]ein Dasein war ihm eine notwendige Last. ― So lebte er hin.(33) 자신의 존재가 필연적인 짐처럼 느껴졌다. ― 이렇게 그는 계속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2008, 171)
그는 존재가 ‘짐’처럼 느껴졌다는 앞 문장을 고려하여 ‘삶을 살아가다’가 아니라 ‘지탱하다’라고 번역하여 시적인 이미지를 한층 강화한다. 이러한 번역은 다른 역자들의 번역, “이렇게 그는 살아갔다······”(정경석, 372),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박종대, 300)에 비해 렌츠가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버텨내는 인상을 준다. 렌츠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광기의 무기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인 ‘비극적인’ 영웅이 되는 것이다.
임호일의 번역 이후 약 30년 만에 <렌츠>는 새롭게 번역되어 독자를 만난다. 번역자는 독일어교육을 전공하고 독일어를 강의하는 이재인이다. <보이체크>를 표제작으로 내걸고 <렌츠>와 <레옹스와 레나>까지 묶어 <뷔히너 단편선>이라는 부제를 붙여 놓았는데, <렌츠>를 제외한 다른 두 작품이 희곡이므로 책의 부제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또한 역자 해설에서 <보이체크>의 판본 문제는 꽤 자세히 언급하고 있음에도 <렌츠>의 판본 문제나 번역의 저본이 무엇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아서 아쉬움을 준다. 그의 번역은 여러모로 임호일의 번역과 대조적이다. 전반적으로 문학적인 표현을 위해서 멋을 부리는 경우가 거의 없이 소박하게 문장을 구사하는 편이다. 이는 <렌츠>의 문체가 대부분 짧고 생략적이므로 오히려 원문에 더 가깝다고 여겨질 때도 많다. 아래 문장은 목사관에 도착한 렌츠가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E]s war kalt oben, eine weite Stube, leer, ein hohes Bett,(6) 위쪽은 추웠다. 넓은 방이 하나 비어 있었고 뒤쪽에 높은 침대가 있었다.(이재인, 169) 건물 위쪽에 위치한 그 방은 차가왔다. 커다란 방이었는데 비어 있었다. 높은 침대 하나가 맞은편 쪽에 놓여 있었다.(임호일 1987, 14-15.) 위쪽 지역은 공기가 차가웠다. 커다란 방이었는데 비어 있었다. 높은 침대 하나가 맞은편에 놓여 있었다.(임호일 2008, 133)
렌츠가 방에서 받은 첫인상이 동사생략법과 형용사 열외법을 통해 짧은 단어들로 토막 나 있다. 원문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임호일은 독자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건물 위쪽에 위치한 그 방은” 혹은 “위쪽 지역은 공기가”라고 부연했다. 그러나 이재인은 “위쪽은 추웠다”라고 원문대로 간결함을 살려 번역했는데, 오히려 원문의 의미를 더 잘 전달한다.
그런데 이런 소박한 문장 구사가 심한 경우에는 지나친 단순화로 이어진다. 즉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해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은 생략하거나 단순화한 경우도 발견된다.
Am Himmel zogen graue Wolken, aber alles so dicht – und dann dampfte der Nebel herauf und strich schwer und feucht durch das Gesträuch, so träg, so plump.(3)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가득했고, 덤불 사이로는 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랐다.(이재인, 165)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흐르고 있었으나 모든 것이 육중했다. 그리고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무겁고 축축하게 관목 숲 속에 서리고 있었다. 몹시 완만하고 우울했다.(정경석, 352) 하늘에는 잿빛 구름들이 온통 밀집된 상태로 떠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는지 축축하고 자욱한 안개가 가누지 못한 나른한 몸을 관목 가지들 사이로 무겁게 끌어가고 있었다.(임호일, 2008, 129)
앞서 한 차례 인용했던 위 대목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이재인의 번역은 하늘에 잿빛 구름이 흐르는 모습―구름이 하늘에 꽉 차 있어서 아주 느리게 흐르는 모습―, 안개가 퍼져나가는 모습―습기를 잔뜩 머금어서 무거운 몸으로 아주 굼뜨게 덤불을 지나는 모습–을 그냥 단순하게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덤불 사이로는 안개가 피어올랐다는 식으로 옮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단순화하는 번역은 원문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데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부적인 뉘앙스나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원작의 문학성을 제대로 옮기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자연 풍경은 렌츠의 심리 상태와 긴밀히 조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화는 렌츠의 고통을 보여주는 역어 선택에서도 엿보인다. 우울증이 악화된 렌츠가 목사에게 자신의 권태를 호소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이재인은 “die Langeweile!”(26)를 “심심해요!”(197)라고 옮겼는데, 의미상 오역이라 할 수는 없으나 렌츠를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에 비해 그 어휘가 지나치게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2020년에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뷔히너 전집>이 출간되면서 <렌츠>도 새롭게 번역된다. 역자는 다수의 독일 문학을 번역한 박종대이다. <뷔히너 전집>도 임호일의 <뷔히너 문학전집>처럼 뷔히너의 작품과 비문학 텍스트를 망라한다. 차이가 있다면 새로 나온 전집이 <레옹스와 레나>의 흩어진 단편들을 추가해서 수록하고 있고, <헤센 지방의 전령>을 두 판본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작품의 해석을 돕는 주석도 자세히 달고 있다. 번역 저본은 구츠코프가 편집한 초판을 따르는 ‘뮌헨 판본’이다. 이에 따라 박종대 역만이 <렌츠>의 유명한 첫 문장을 “1월 20일 Den 20. Jänner”에서 1월이 빠진 “20일”로 옮겼다. 또한 소설에서 렌츠의 정신병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푸데에 사는 아이의 죽음도 판본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옮겨졌다. 기존 판본에서는 “프리데리케라는 이름의” 아이가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뮌헨 판본에서는 “프리데리케라는 이름의”가 빠져 있다. 이는 뷔히너의 원래 의도를 더 존중하려는 노력이나 독자로서는 작품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
박종대 역은 정경석 역과 마찬가지로 <렌츠>의 문체적 특징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특징을 한국어로 옮기려고 시도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소설 서두에서 겨울산의 질풍을 묘사한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문장의 리듬은 단문이냐 장문이냐 혹은 단문이냐 복문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렌츠>의 첫 단락은 산속을 걷는 렌츠의 내면 상태와 겨울산의 황량한 풍경을 평행하게 보여주는 문장들이 짧고 리듬감 있게 병렬적으로 이어지다가, 매우 긴 종속절이 있는 복문이 시작되면서 독서의 호흡이 갑자기 길어진다. 이러한 문장 리듬의 돌연한 변화를 박종대 번역만 온전히 살렸다.
Nur manchmal, wenn der Sturm das Gewölk in die Täler warf und es den Wald herauf dampfte, und die Stimmen an den Felsen wach wurden, bald wie fern verhallende Donner und dann gewaltig heranbrausten, in Tönen, als wollten sie in ihrem wilden Jubel die Erde besingen,[85] und die Wolken wie wilde, wiehernde Rosse heransprengten, und der Sonnenschein dazwischen durchging und kam und sein blitzendes Schwert an den Schneeflächen zog, so daß ein helles, blendendes Licht über die Gipfel in die Täler schnitt; oder wenn der Sturm das Gewölk abwärts trieb und einen lichtblauen See hineinriß und dann der Wind verhallte und tief unten aus den Schluchten, aus den Wipfeln der Tannen wie ein Wiegenlied und Glockengeläute heraufsummte, und am tiefen Blau ein leises Rot hinaufklomm und kleine Wölkchen auf silbernen Flügeln durchzogen, und alle Berggipfel, scharf und fest, weit über das Land hin glänzten und blitzten, riß es ihm in der Brust [...](3-4) 다만 가끔, 거센 바람이 구름 덩이를 골짜기 속으로 몰아넣고, 그 구름이 숲에서 수증기로 피어오르고, 바위 속의 목소리가 깨어나 곧 멀리 사라져 가는 천둥소리처럼 들리다가 이내 열렬한 환호성 속에서 대지를 찬미하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울려 퍼지고, 구름이 사납게 울부짖는 야생마처럼 질주하고, 햇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와 눈 덮인 곳을 번쩍이는 검처럼 가르고, 눈부신 햇빛 한 줄기가 봉우리를 지나 골짜기 속으로 파고들 때면, 또는 거센 바람이 구름 덩이를 산 아래로 몰아넣어 햇살로 반짝이는 푸른 호수를 휘젓고, 그러다 차츰 잦아든 바람이 협곡 깊숙한 곳과 전나무 우듬지에서 자장가와 종소리처럼 잔잔하게 올라오고, 짙푸른 하늘가에 분홍빛이 번져 가고, 조각 구름이 은빛 날개를 달고 지나가고, 봉우리마다 대지 위로 환한 빛이 선연하게 반짝거릴 때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박종대, 262-263)
주로 주어와 술어로만 이루어진 단문이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구문이 많은 <렌츠>에서 이렇게 긴 종속문이 쓰이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에 이 구문은 매우 눈에 띈다. 박종대 역은 위와 같이 이러한 문체적 특이성을 한국어로 모방하면서도 잘 읽히게끔 번역했다.
또한 박종대 역은 앞서 정경석 역에서 보여주었듯이 동사가 생략된 부분이나 명사구로 이어지거나 끝나는 구절을 부분적으로 살려서 옮겼다.
[D]as heimliche Zimmer und die stillen Gesichter, die aus dem Schatten hervortraten: das helle Kindergesicht, auf dem alles Licht zu ruhen schien und das neugierig, vertraulich aufschaute, bis zur Mutter, die hinten im Schatten engelgleich stille saß.(5) 아늑한 방, 방의 그늘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평온한 얼굴들, 세상 모든 빛이 깃든 것 같은 얼굴에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친근하게 올려다보는 아이, 방 뒤쪽의 그늘진 곳에 천사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의 어머니····· (264-265)
원문대로 명사구를 나열함으로써 렌츠가 조금 전까지 산에서 겪은 격렬한 운동 상태와는 완벽히 대조를 이루는 차분하고 평온한 리듬이 전달된다.
박종대 번역은 이렇게 부분적으로 원문의 어조를 충실히 옮기려 시도하면서도 기존 번역의 오류들을 수정하여 전체적으로는 가장 높은 정확성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작품에서 상당히 핵심적인 ‘예술대화’에서 이상주의 미학을 비판하는 대목은 가장 높은 설득력을 자랑한다. 렌츠는 이상주의 미학을 신봉하는 카우프만을 앞에 두고 이상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며 다음과 같이 강변한다.
Dieser Idealismus ist die schmächliste Verachtung der menschlichen Natur. Man versuchte es einmal und senke sich in das Leben des Geringsten und gebe es wieder, in den Zuckungen, den Andeutungen, dem ganzen feinen, kaum bemerkten Mienenspiel; er hätte dergleichen versucht im »Hofmeister« und »den Soldaten«. Es sind die prosaischsten Menschen unter der Sonne; aber die Gefühlsader ist in fast allen Menschen gleich, nur ist die Hülle mehr oder weniger dicht, durch die sie brechen muss.(14) 이 이상주의는 인간 본성의 가장 치욕적인 무시다. 지극히 평범한 삶에 침잠해서 경련과 암시, 그리고 거의 인지할 수 없는 섬세한 표정 변화 속에서 그것을 재현해야 한다. 자신은 가정교사와 군인들에서 그런 시도를 해보았다. 그 속의 인물들은 하늘 아래 가장 산문적인, 그러니까 가장 범속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감정의 혈관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 다만 깨뜨려야 할 껍질의 두께만 다를 뿐이다.(박종대, 275. 밑줄 강조 필자) 이 이상주의는 인간, 자연에 대한 가장 굴욕적인 모욕이다. [...] 가장 쓸데없는 생활 속에 몸을 가라앉히고 그 생활을 경련, 암시 그리고 섬세하고 거의 알아낼 수 없을 정도의 표정 속에서 재현(再現)해 보라. 자기는 그런 것을 가정 교사와 군인에게 시험해 보았다. 이 세상에는 산문적(散文的)인 인간들이 있으나 감정의 소질은 거의 모든 인간들에 있어서 같은 것이다. 다만 그들이 뚫고 나와야 할 외피가 두꺼우냐, 얇으냐 하는 것뿐이다.”(정경석, 359. 밑줄 강조 필자) 이 이상주의야말로 인간 본성에 대한 치욕적인 경멸이다. [...]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 속으로 침잠해 보라. 그리고 그 삶을 떨림과 암시와 아주 섬세하고 거의 눈치 챌 수 없는 표정 연기로 재현해보라. 렌츠는 이와 같은 것을 <가정교사>와 <군인들>이란 작품에서 시도했다. / 이 세상에는 몰취미한 인간들도 있다. 그러나 감각기관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거의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단지 대상을 감지하는 그 감각의 촉수가 섬세한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가 다소간 있기는 하다.(임호일 2008, 144. 밑줄 강조 필자) 이 이상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장 비열한 경멸이다. [...] 가장 사소한 것의 삶에 깊이 침잠해 보고, 그것을 떨림과 암시와 극히 섬세하여 좀처럼 눈치챌 수 없는 표정으로 재현해 보아야 한다. / 실제로 렌츠는 자신의 작품 <가정교사>와 <군인들>에서 그런 시도를 했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감각의 촉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깨뜨려야 할 덮개의 두께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눈과 귀만 있으면 된다.(이재인, 182. 밑줄 강조 필자)
위 번역에서 관건은 “das Leben des Geringsten”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가장 쓸데없는 생활”이라 옮긴 정경석의 번역은 진정한 예술가라면 이상주의 미학에 대항하여 건실한 시민생활이 지탄하는 무용한 삶을 살아봐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상주의 미학은 인간의 무용한 생활을 경시하므로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굴욕적인 모욕”인가?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해석이 아주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몇 줄 뒤에 나오는 “가장 산문적인 인간들die prosaischsten Menschen”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정경석 역에서 “가장 산문적인 인간들”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에서 렌츠가 다룬 가정교사와 군인들과 잘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임호일은 이 대목을 신분 비판적, 계급 비판적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바 있다. 그는 이것을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이라 옮겨 번역문에서 명료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유사한 구절이 발견되는 편지의 한 대목을 각주에 인용한다. “이러한 귀족주의는 신성한 인간정신을 모독하는 치욕적인 행위입니다.”(임호일 1987, 144) 만일 뷔히너가 이상주의 미학에서 귀족주의를 비판한다면, 여기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은 하층민의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가장 산문적인 인간들”도 단순히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사람들이 아니라 역시 귀족이 아닌 평민들, 고상한 인간들이 아니라 평범하고 속된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극히 평범한 삶”, “가장 범속한 인간들”이라 옮긴 박종대 역이 이상주의 미학의 귀족주의에 대항하는 원문의 의미를 제일 잘 전달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직후의 문장 “그러나 감정의 혈관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에서도 렌츠가 이상주의 미학에 대항하여 추구하는 평등의 의미가 가장 잘 전달된다.
그 밖에도 렌츠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해 정신을 차리려 하는 장면, 오벌린에게 회초리 다발을 들고 와 자신을 매질해달라고 하는 장면 등에서 발견되던 기존의 오역들이 바로잡혀 있다.
3. 평가와 전망
지금까지 <렌츠>의 한국어 번역 총 네 종을 살펴보았다. <렌츠>의 한국어 번역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은 편이며, 작품 이해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 대부분 잘 번역되어 있다. 다만 <렌츠>의 뛰어난 예술성을 이루는 문체적 특징을 온전히 옮긴 번역은 아직 없다. 그러한 문체적 특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번역들이 발견되기는 하나, 수많은 특징 가운데 일부만을 살리거나, 그것도 일관되게 살리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원문의 문체적 특징들을 일부 마나 한국어로 되살리려는 역자들의 창의적이고 용기 있는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렌츠>에 대한 그간의 축적된 연구를 바탕으로 정확하면서도 작품의 문학성을 한국어로 구현하는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정경석(1971): 렌츠. 일지사.
임호일(1987): 렌쯔. 한마당.
임호일(2008): 렌츠. 지만지.
이재인(2015): 렌츠. 더클래식.
박종대(2020): 렌츠. 열린책들.
-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