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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3일 (토) 04:44 기준 최신판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1927-2015)의 소설

양철북 (Die Blechtrommel)
작가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초판 발행1959
장르소설


작품소개

1959년에 발표된 귄터 그라스의 장편 소설로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오스카는 정신병동에 있는 30세의 남자로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를 적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어머니 아그네스를 잉태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단치히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회상이 1부의 주를 이룬다. 오스카는 세 살 때 계단에서 구른 후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난쟁이로 살아간다. 작은 키와 어린아이라는 점 때문에 오스카는 세상을 아래로부터 제약 없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는 시대적 부패상황에 대해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 유리창을 깨거나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양철북을 두들겨 경고한다. 어머니의 부정과 어머니를 둘러싼 남자들(마체라트, 얀 브론스키 등)의 성적 문란함과 도덕적 퇴폐 상황은 나치 전당대회의 춤에서처럼 때로는 익살맞게, 혹은 말머리에 우글거리는 뱀장어 떼 등을 통해 즉물적으로 거침없이 비판되고 있다. 이러한 소시민 사회의 타락과 부패는 2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과 주변 국가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으로 확대해석 되어 나치 발흥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이 소설은 당대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돋보이는 시대소설이며 또한 독일 악동소설의 전통도 잇고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전후문학으로서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79년 폴커 슐렌도르프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1974년에 박환덕이 처음으로 번역하였다(을유문화사).


초판 정보

Grass, Günter(1959): Die Blechtrommel. Neuwied: Hermann Luchterhand Verlag.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양철북 양철북 世界文學全集 86 귄터 그라스 박환덕 1974 乙酉文化社 13-563 완역 완역 1979년, 1980년에 재판 출간
2 양철북 양철북 世界文學全集 59 귄터 그라스 박환덕 1979 乙酉文化社 13-563 완역 완역 1974년 초판발행. 1979년 신장판(新裝版) 초판발행.
3 양철북 양철북 현대의 세계문학,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14 귄터 그라스 황현수 1984 汎韓出版社 9-612 완역 완역
4 양철북 양철북 汎友批評版世界文學選 14 귄터 그라스 박환덕 1985 汎友社 12-647 완역 완역 초판. 이후 88년, 90년 등 쇄를 거듭함.
5 양철북 양철북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현대의 세계문학 14 귄터 그라스 황현수 1988 汎韓出版社 9-612 완역 완역 1988년 재판 발행
6 양철북 Ⅰ 양철북 1 世界名作 100選 72 G. 그라스 박수현 1991 一信書籍出版社 8-368 편역 완역
7 양철북 Ⅱ 양철북 2 世界名作 100選 73 G. 그라스 박수현 1991 一信書籍出版社 5-372 편역 완역
8 양철북 양철북 靑木精選世界文學 72 귄터 그라스 김영석 1993 청목사 7-555 완역 완역
9 양철북 양철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Jan-42 귄터 그라스 박환덕 1999 범우사 13-602 완역 완역 1985년 초판 발행, 1999년 2판 발행.
10 양철북 양철북 1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장희창 1999 민음사 9-479 편역 완역
11 양철북 양철북 2 세계문학전집 33 귄터 그라스 장희창 1999 민음사 9-491 편역 완역
12 양철북 양철북 월드북, World book 113 귄터 그라스 최은희 2010 동서문화사 11-629 완역 완역 1987년 1판, 2010년 2판, 2016년 3판 발행이라 표시되어 있으나 1판 정보 확인 안됨
13 양철북 양철북 세계문학전집 49 귄터 그라스 최은희 2016 동서문화사 11-629 완역 완역 1987년 1판, 2010년 2판, 2016년 3판 발행이라 표시되어 있으나 1판 정보 확인 안됨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Die Blechtrommel, 1959)은 결코 번역하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에 대한 폭넓은 선(先)지식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작가의 외설적이고도 반어적·풍자적인 문체 를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이 때로는 지난(至難)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우리말로 완역한 역자가 초역자 박환덕(을유문화사, 1974; 범우사, 1985)을 필두로, 황현수(범한출판사, 1984), 최은희(양 철북, 1, 2권, 동서문화사, 1987), 박수현(일신서적, 1991), 김영석(청목사, 1993), 장희창(민음사, 1999) 등 총 6명이나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며, 이들의 끈기와 성취가 실로 찬탄할 만하다.

그 사이에 필자가 확보할 수 있었던 역본은 김영석 역본을 제외한 박환덕의 범우사판(1985), 황현수의 범한출판사 판(1988 재판), 최은희의동서문화사 판(1987), 박수현의 일신서적 판(1991), 장희창의 민음사 판(1999) 등 5종이었는데, 박환덕의 을유문화사 초판을 구할 수 없어 부득이 범우사 판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심히 아쉬웠으며, 위 6종역본 중, 박수현의 일신서적 판과 장희창의 민음사 판은 <양철북1>과 <양철북2>로, 즉 2권으로 출간되었다.5종 역본을 대강 훑어보고 우선 받게 된 인상은 박환덕의 초역본의 영향이 곳곳에서 관찰된다는 점이었으며, 뒤에 나온 번역본들이 초역본의수준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실제 번역 사례 고찰


1)‘재목’, 혹은 ‘목재’

초역자 박환덕은 서울대 인문대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독문학계의 원로이며 일어에도 능통한 세대에 속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일어 번역본이 초역자로서의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그의 번역을 보면, “재목 전용부두”(범우사 25)(Holzhafen)[1],“재목 적치장”(26)(Holzfelder)(22), ‘재목과 재목 사이의 틈’(35)(eineLücke zwischen den Hölzern)(33) 등과 같은 번역이 눈에 띄는데, 여기서 “재목(材木)”은 물론 ‘목재(木材)’일 것인데, 일본어 번역본의 ‘材木’이란 한자어가 우리말로 더 자연스럽다고 할 ‘목재’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남은 것은 그 한자 단어의 시각성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고착되어 버린 결과가 아닐까 하고 추정된다.

물론, ‘재목’이란 말이 현재 우리말에서 아주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이를테면, ‘그는 앞으로 크게 될 재목이다.’라고 말할 때의 ‘재목’은 ‘재료로서의 나무’, 즉 ‘사람의 본 바탕’을 가리킨다. 그러나, 현대 우리말에서,책상은 ‘목재’, 또는 ‘나무’로 만들지, ‘재목’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하긴, “Holzhafen”을 ‘재목 적치장’으로 번역하지 않고 “목재 적치장’(36)으로 번역한 곳도 있고, 또한, 31쪽에서는 “목재”라 했다가 금방“재목”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상은 박환덕의 을유문화사 판(1974)과 범우사 판(1985)을 대조, 비교해 봐야 그 변화 과정이 자세하게 추적될 수 있겠는데, 을유문화사 판을 구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이점이 못내 아쉬웠다.

최은희 번역에서는 “저목장(貯木場)”(동서문화사 24)으로 바뀌었으나,금방 다시 “재목 적치장(積置場)”(24)과 “재목과 재목 사이의 틈”(34)으로번역됨으로써 ‘재목’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황현수 번역에서도 ‘Holzhafen’과 ‘Holzfelder’가 다 같이 “재목저장소”(범한출판사 22)로 번역되어 있으며, “재목과 재목 사이의 빈틈”(31)을 봐도, ‘재목’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박수현의 번역을 보아도, “재목 저장소”(일신서적 23), “재목 적치장”(24), “재목과 재목 사이의 틈바구니”(35)로 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장희창의 번을 보면, “목재 전용 부두”(민음사 29)라는 올바른 번역을 하고 있다가도, “재목 적치장”(30), “재목과 재목 사이에서 틈”(44)에서는 ‘재목’을 ‘목재’로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일역과 그것을 참고한 박환덕 초역의 흔적이 여기서도 아직 조금은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중반에 대학생이 된 세대인 역자 장희창이 독일어 ‘Holz’에서 ‘목재’가 아닌 ‘재목’이란 단어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희창의 번역을 보다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재목’이 거의 다 ‘목재’로 바뀌어 있음을 확인할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예: 42, 43, 45, 47, 51).


2) 사투리 말투의 번역

위의 짧은 예시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되겠지만, 박환덕의 초역이다음에 나온 번역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박환덕의초역 다음에 나온 번역들이 다른 면에서도 초역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 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5종의 비슷한 번역을 일일이 비교하는 괜히 번거로운 작업을 피하고, 초역인 박환덕 역과 최근 역인 장희창 역을 주된 대상으로 하여 논의를 보다 집중적으로 해 나가기로 하 겠다.

우선, <양철북>(원서 512쪽)에서 오스카의 할머니 아나 콜랴이체크의사투리가 섞인 말이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카슈바이 인(人)은 이렇게 당했던 거야. 오스카르야, 언제나 머리를 두들겨 맞기만 하고. 그래도 너희들은 좀더 살기 좋은 땅으로 가 버리면 좋겠는데. 할머니는 역시 남기로 하겠다. 카슈바이 인은 이주(移住)라는 것을 할 수가 없어. 언제까지나 본고장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무리들에게 두들겨 맞기 위해서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쨌든 우리들은 진짜 폴란드 인도 아니고 진짜 독일인도 아니야. 카슈바이 인은 독일인이 될 자격도 없고 폴란드 인이 될 자격도 없는 거야. 그 무리들은 어쨌든 엄밀하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니까 말이야!”(박환덕 420)

“오스카야, 카슈바이인은 늘 이렇게 당해 왔단다. 언제나 머리를 두들겨 맞았지. 너희들만은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는데. 할머니는 남겠지만 말이야. 카슈바이인에게 이주라는 건 없는 거야. 언제까지나 고향에 머물러 살면서 다른 자들에게 두들겨 맞기 위해 머리를 내밀어야 하지. 여하튼 우리는 진짜 폴란드인도 아니고 진짜 독일인도 아니야. 카슈바이인은 독일인도 폴란드인도 되지 못하는 거야. 이들은 언제든 까다롭게 생각한단 말이야!”(장희창 130)

“So issses nu mal mit de Kaschuben, Oskarchen.”이란 말을 우리말로 옮기자면, “오스카야, 카슈바이 사람의 처지라는 기 늘 이 꼴이란다!” 정도가 되겠는데, 박환덕과 장희창이 다 같이 “카슈바이인은 늘 이렇게 당해 왔단다”로 옮기고 있는 것은 좀 특이하지 않은가 싶다. 물론, 맞는 번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해 오다’란 말이 이런 경우에 그렇게 자동적으로 나오는 풀이는 아닌데, 두 역자가 똑같은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이하게도 두 역자는 다 같이 할머니의 사투리 말투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Aber ihr werd ja nun wägjehn nach drieben, wo besser is, und de Oma wird blaiben.”은 “하지만, 이제 늬들은 저 건너 어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가뿌리겠다만, 이 할미는 여기 남을 끼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할 텐데, 여기서도 할머니의 말투에 무신경한 것은 물론이고, ‘저 건너(nach drieben)’를 빼먹는다든가, 오스카네가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까지 곁들여 넣고 있다. 이 문장에 있는 ‘ja’를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할머니는 오스카네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곧 떠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 그런데, 새삼스레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말할 리가 없는 것이다. “wenn man Kaschub is, das raicht weder de Deitschen noch de Pollacken. De wollen es immer genau haben!”이란 문장을 대강 해석해 보자면, “우리 카슈바이 사람은 됙일놈들한테도 폴란드놈들한테도 다 마음에 차지 않지. 그놈들은 늘 꼬치꼬치 따지려 들거들랑!” 정도가 되겠는데, 두 역자가 다 ‘Pollacke’가 폴란드인을 비하하는 말이라는 것을 간과해서 너무 점잖게 번역하고 있다. ‘es genau haben’이란 무엇을 세세히 따진다는 말인데, 이것을 박환덕이 ‘엄밀하게 생각한다’라고 옮긴 것은 의미는 통하지만, ‘엄밀하다’란 말은 아나 콜랴이체크가 입에 올릴 듯한 표현은 아니다. 이것을 장희창이 ‘까다롭게 생각하다’로 바꾼 것은 올바른 방향이지만, ‘생각하다’가 그대로 남은 것은 유감이다. ‘까다롭게 굴다’가 더 맞을 텐데, 하필이면 왜 초역과 마찬가지로 ‘[까다롭게] 생각하다’일까 하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카슈바이인 할머니의 사투리 말투를 제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모든 역자에게 지극히 어려운 과제인 것은 틀림없다. 원작에서의 이런 말투를 역자가 자신의 번역에서 제대로, 또는 어느 정도나,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반영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정말 대단히 어렵고 꾀까다로운 문제다. 그것은 원작의 양식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역자가 상정하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인데, 여기서는 일단 문제점만 짚어둔 채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3)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ät)’의 처리 문제

위에서도 드러났지만, 한 외국 문학작품의 번역에서, 특히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같은 당대의 문제작을 번역함에 있어서는, 국내 초역의 영향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앞으로도 거듭 드러날 것이다. 아래에서는 일단 <양철북>의 다른 한 대목(원서 155쪽)이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아하고, 언제나 약간 측은해 보이고, 직업에서는 굴욕적이고, 애정에서는 야심적이고, 어리석은 동시에 탐미가인 얀 브론스키. 나의 어머니의 육체에 의해서 살고, 내가 지금도 믿고 또한 의심하고 있듯이 마체라트의 이름으로 나를 낳은 얀, 그가 바르샤바의 양복점에서 지은 듯한 우아한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자신의 기념 동상처럼 보였다. 그는 화석처럼 굳어진 모습으로 유리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눈 속에 서서 눈 속에서 피를 본 파르치발(영웅 서사시 『파르찌팔』의 주인공)과 같이. 금목걸이에 붙은 루비를 주시하며.(박환덕 130)

우아하지만 언제나 약간은 측은해 보이며, 직업에서는 굴종적이고, 애정에서는 야심적이며, 어리석은 동시에 탐미적인 얀 브론스키. 나의 어머니의 육체에 의지해 살고, 내가 지금도 반신반의하듯이 마체라트의 이름으로 나를 낳은 얀이 바르샤바의 양복점에서 맞춘 듯한 우아한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바로 자신의 기념 동상처럼 보였다. 그는 화석처럼 굳어진 채로 유리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눈보라 치는 가운데 서서 눈 속의 피를 보았던 파르치발처럼, 금목걸이에 붙어 있는 루비를 주시하면서.

  * 영웅서사시 파르치발의 주인공(장희창 200)

위의 두 번역을 비교해 보건대, 후자에서 약간의 개선점들이 보인다. 이를테면, 직업에서는 “굴욕적(untertänig)”이라는 표현이 “굴종적”으로 개선되었으며, “지금도 믿고 또한 의심하고 있듯이”는 “지금도 반신반의하고 있듯이”로 우리말 어감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두 번역의 문장 구조가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있다. 특히, “......서 있었다. 마치 ......처럼, ...... 루비를 주시하며[주시하면서.]”라는 번역문 구조가 그러하다. 파르치팔(Parzival)의 이름을 독일식 발음으로 표기하지 않은 것이나 파르치팔에 대해 ‘아주 간단한’ 주를 붙여놓은 것도 동일하다. 심지어는 ‘궁정서사시’ <파르치팔>을 ‘영웅서사시’로 잘못 안내한 것도 동일하다. 그런데, 기왕에 주를 붙일 바에야 좀 자세하게 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주의 내용이 이렇게 소략해서야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독자가 주를 읽고 나서도, 여기서 왜 파르치팔이 언급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볼프람 폰 에쉔바흐의 궁정서사시 <파르치팔>의 제6권 처음에 묘사되고 있는 유명한 눈 위의 ‘핏자국들 장면(Blutstropfenszene)’은 주인공 파르치팔이 흰 눈 위에 보이는 새빨간 세 핏자국을 – 갈매기가 매에 쫓겨 눈 위에 흘려놓은 핏자국을 - 보고 자기 아내의 얼굴(두 뺨과 턱의 세 부분)을 상기하고는 마상(馬上)에서 갑자기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져듦으로써, ‘미네(minne, 사랑)’와 ‘성배(聖杯, gral)’와 ‘자신의 구도(求道)’라는 삼위일체적 소명을 깨우쳐 가는 중요한 순간으로 이해되는데, 귄터 그라스의 오스카는 이 대목에서 얀 브론스키가 금목걸이에 박힌 붉은 루비들을 보면서 자신의 애인인 아그네스 마체라트에게 이 목걸이를 선물하고 싶은 생각에 골똘해 있는 모습을 살짝 풍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콘텍스트를 알리려는 역자라면, “마치 눈보라 치는 가운데 서서 눈 속의 피를 보았던 파르치발처럼”은 “마치 눈이 내리는 중에 갈길[말(馬)]을 멈추고] 눈 위의 핏자국들을 내려다보았던 파르치팔처럼”으로 옮길까? 아무튼, 파르치팔은 마상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냥 ”서서“라는 표현은 무리일 것이고, “눈 속의 피(Blut im Schnee)”도 우리말로는 “눈 위의 핏자국들”이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싶다. 물론, 독자가 이처럼 복잡한 상호텍스트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대목을 올바르게 번역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왕에 주를 붙이려면, 이 인물이 – 눈 위의 새빨간 세 핏자국을 바라보며 문득 아내 생각에 빠진 파르치팔처럼 - 자신의 애인을 생각하면서 쇼 윈도우 너머의 목걸이에 박힌 새빨간 루비들에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각주를 다는 문제이고, 다시 역문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적어도 파르치팔이 바라본 새빨간 세 핏자국들과 얀 브론스키가 바라본 새빨간 루비들의 상관관계가 시각적으로도 느껴지게끔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한데, 아마도 이런 요구가 지나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파르치팔이 비교의 대상이 된 이상, 얀 브론스키의 시선이 목걸이의 루비들에 꽂혀 있는 것이 왜 파르치팔이 눈 위의 핏자국들을 응시하는 것과 대비되고 있는지 그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전달을 해야 역자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눈이 오는 날의 파르치팔과 눈 위의 세 핏자국에 관한 이 에피소드는 작품 <양철북>의 후반부에 한 번 더 비교적 상세히 나오기 때문에, 전반부의 이런 소홀한 번역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번역 작품의 전반적 통합성을 재검하지 않은 역자의 성의 부족을 반증하기도 한다. 자, 그럼, 이제는, ‘눈’과 ‘핏자국 에피소드’가 다시 한 번 언급되는 대목(원서 584쪽)의 번역을 살펴보기로 하자.

파르치[발!](독일 시인 볼프람의 서사시 『파르치발』의 주인공, 우직한 자연아로 고난 끝에 왕이 된다)을 알고 계실는지. 나도 그를 특별히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얀 눈에 떨어져 있는 세 방울의 핏자국 이야기만은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나와 꼭 닮았으므로 진실인 것이다. 다분히 어떤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오스카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거의 의심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오크카르에게 꼭 어울리게 씌어진 것이다.

 [ ...... ] 눈은 이미 내리고 있었다. 눈에는 그 세 방울의 피가 떨어지고 피는 우직한 파르치발과 마찬가지로 나의 시선도 또한 고정시켰다. 그런데 우직한 오스카르는 파르치발에 대해서 거의 모르기 때문에 사양하는 일 없이 자신을 파르치발과 동일하다고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나의 비유는 서투르기는 하나 충분히 명백하리라. 눈은 간호부의 제복이다. 도로테아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간호부의 칼라를 붙들어 매는 브로치 한가운데에 들어 있는 적십자가 내 눈에는 세 방울의 피 대신으로 보였다. 나는 거기에 앉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박환덕 478) 

파르치발을 아시는지? 물론 나도 그를 특별히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얀 눈 위에 떨어져 있는 세 방울의 핏자국에 얽힌 이야기만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꼭 어울리는 것이므로 감동을 준다. 아마도 그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을 쓰기로 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거의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스카의 몸에 꼭 맞게 씌어진 것이다.

 [ ...... ] 그러다 보니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눈 위에 떨어졌던 세 방울의 피는 우직하기만 한 파르치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직한 오스카도 파르치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파르치발과 동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비유는 서투르기는 하지만 독자 여러분에게는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말하자면 하얀 눈은 간호사의 제복인 것이다. 도로테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칼라를 붙들어 매는 브로치 한가운데에 달고 있는 적십자가 나에게는 세 방울의 피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 독일 중세의 궁정 시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서사시  『파르치발』의 주인공.  『파르치발』은 천진난만한 자연아(自然兒)가 이상적인 기사(騎士)로 성장해 가는 고난의 길을 노래한 2만 5천 행의 서사시.(장희창 292)

우선 이 대목의 전후 관계를 대강 설명해 보자면, 전후(戰後)에 서독에 온 오스카는 아르바이트로 미술대학에서 스케치 모델을 서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창밖에 눈이 왔기 때문에 설산에서 핏자국을 보고 자기 아내를 연상하고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지게 되는 중세의 기사 파르치팔을 연상하면서, 오스카는 자기 자신도 – 나중에 알게 될 도로테아와 같은 – 백의의 간호사와의 연애 같은 것을 상상해 보고는 것이다. 전반부에서 얀 브론스키가 목걸이의 루비들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파르치팔 같다는 짤막한 언급만 있었지만, 후반부의 이 대목에서는 파르치팔에 관한 꽤 긴 언급과 설명이 나와 있기에, 이 대목을 접한 역자는 적어도 볼프람 폰 에쉔바흐의 <파르치팔>에 나오는 저 ‘핏자국 에피소드’를 찾아 읽고 그 의미를 탐구해 보는 수고 정도는 해야 했다. 하지만, 두 역자의 주를 보자면, 전반부에 붙였던 주보다 조금 더 상세해지긴 했지만, 독자들에게 핵심적 정보, 즉 파르치팔이 이 장면에서 문득 자기 아내를 생각하고 잠시 최면상태, 또는 황홀경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하는 피상적 정보 제공에 그치고 만다. 모든 번역자가 반드시 출발문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의 있는 역자라면, 텍스트를 옮기다가 어떤 의문점이 떠오를 때, 일단 그 의문점을 해결하려는 의지와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는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두 역자는 출발문화를 보다 깊이 탐구하려던 성의가 부족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은 다 같이 파르치팔에 대한 주를 한 작품에서 두 번이나 붙였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정보를 놓쳤다. 성의 있는 역자라면, 작품에서 파르치팔이 두 번째 등장할 때, 파르치팔에 대한 더 깊은 탐색에 들어갔어야 했고, 앞에 나온 파르치팔과 뒤에 나온 파르치팔을 연결해서 통합적으로 생각한 다음, 이 통합적 사고 하에서 앞의 번역을 한 번 더 검토해야 했다. 그리고, 역주는 파르치팔이 처음 나올 때, 한번 상세하게 붙여두고, 후반부에서는 전반부의 역주를 참조하도록 지시해 두는 것이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또는, 후반부 역주에서는 오스카의 심중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보다 자세하게 밝혀줄 수도 있을 듯하다.


3. 맺는말

두 번역을 기왕에 예시해 놓은 김에, 몇 가지 더 언급해 두고자 한다. 우선, ‘Parzival’의 표기 문제인데, ‘파르치발’이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독일에서는 ‘파르치팔’이 표준 발음이다. ‘die Geschichte mit den drei Blutstropfen im Schnee’를 박환덕은 ‘하얀 눈에 떨어져 있는 세 방울의 핏자국 이야기’라 옮기고 장희창은 ‘하얀 눈 위에 떨어져 있는 세 방울의 핏자국에 얽힌 이야기’라고 옮겼는데,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일견 무난한 번역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후 콘텍스트로 보건대, ‘Geschichte’는 여기서는 ‘이야기’로보다는 ‘에피소드’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 행에서 이 ‘이야기’가 반복되어 지칭되는데, 그것이 ‘핏자국 에피소드’를 가리키는지, <파르치팔>이란 전체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독자가 헷갈리기 쉽기 때문이다. ‘die Geschichte’를 ‘이야기’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말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폭넓은 개념이다. 이 대목의 대강의 의미를 다음에 적어 보겠다.

‘이 에피소드는 나를 두고 하는 얘기처럼 근사하다. 하기야,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글을 쓰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한테 딱 맞다는 기분을 줄 수 있는 에피소드이긴 하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이디어를 짜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쓸 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에피소드는 거의 수상쩍게 생각될 정도로 나한테 딱 맞게 정말 나를 두고 써놓은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이것이 일종의 모범 번역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고, 다만 위에 예시된 두 번역에 사소한 문제점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일단 그 문제점들을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이런 방법을 택해 본 것이다. ‘이야기’와 ‘에피소드’의 구별 문제 때문에 위의 제시문이 나왔지만, 여기서 사소한 문제점들도 지적해 보자면, ‘그 어떤 관념을 가진 사람’은 물론, 위의 제시문을 참고해 보자면, 오역 내지는 부정확한 번역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분히 어떤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일 것이다.’라는 박환덕의 번역문을 한번 주목해 주었으면 한다. ‘다분히’는 무슨 의미인지, 무슨 원문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언뜻 상상이 되지 않아, 원문을 보면, ‘wahrscheinlich’ 때문인 듯하다. 오늘날에도 물론,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와 같이 ‘다분히’가 간혹 쓰이는 우리말이긴 하지만, 이 ‘다분히’는 십중팔구 일본어 번역으로부터 남은 흔적일 수 있다. 이 부분의 장희창 번역을 보니, 과연, ‘아마도 그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일 것이다.’라고 되어 있음으로써, 우리는 박환덕의 ‘다분히’가 장희창에 이르러서는 ‘아마도’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환덕의 “관념”이 장희창에게는 “이념”으로 되면서, 오역이 심화되는 예도 없지 않다. 사실 이런 예는 거의 없고, 대개는 개선되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것은 박환덕의 ‘간호부’가 장희창에 이르러서는 ‘간호사’로 되고, ‘zwanglos(무리없이, 자연히)’에 대한 박환덕의 오역 “사양하는 일 없이”가 장희창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로 수정되는 변화이다. 아마도 미래의 한국 독자는 - 초역이 아닌 재역(再譯) 등에서는 - 이보다는 더 큰 개선을 요구할 것이다.


4. 사족(蛇足) 박환덕 선생님은 필자의 8년 선배이시고 필자가 평소에 존경하는 우리 학계의 원로이시다. 그리고, 장희창 교수로 말하자면, 필자가 존중하고 아끼는 후배로서, 많은 번역 작품을 내어놓아 독문학을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한 공이 실로 크다. <양철북>을 번역하신 두 분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음에도, 그리고, 두 분이 역자로서 처해 있던 시대적 제약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역자의 번역에 대한 이 평문이 본의 아니게도 다소 야박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서, 필자의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 필자는 앞으로 자신의 번역을 두고도 후배들이 부디 가차 없는 비평을 해 주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이런 엄정한 ‘번역 비평’을 통해 이 땅에서 부디 올바른 번역 문화가 창달되고 언젠가는 번역자들이 제대로 대우받는 시대가 오기를 빈다.


5.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환덕(1985): 양철북. 범우사.
최은희(1987): 양철북. 동서문화사.
황현수(1988): 양철북. 범한출판사.
박수현(1991): 양철북. 일신서적.
장희창(1999): 양철북. 민음사.

안삼환


바깥 링크

  • 각주
  1. Grass, Günter(1987): Die Blechtrommel. Roman. Vol. 2. Darmstadt/Neuwied:Luchterhand, 21. 이하 원문 인용은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