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 갈로티 (Emilia Galotti)"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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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id="정영호(1990)" />[[#정영호(1990)R|1]]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9 || 레싱 || 鄭永鎬 || 1990 || 金星出版社 || 3-90 || 편역 || 완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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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div id="윤도중(1991)" />[[#윤도중(1991)R|2]] || 에밀리아 갈로티 || 현자 나탄 || 창비교양문고 14 || G.E.레씽 || 윤도중 || 1991 || 창작과 비평사 || 179-292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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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div id="송정(2000)" />[[#송전(2000)R|3]]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서문문고 316 || G.E. 레싱 || 송전 || 2000 || 서문당 || 7-175 || 완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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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div id="윤도중(2009)" />[[#윤도중(2009)R|4]]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360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09 || 지식을만드는지식 || 21-166 || 완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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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5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3-171 || 완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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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6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큰글씨책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3-171 || 완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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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7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만지드라마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19 || 지만지드라마 || 3-171 || 완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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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는 자기 안에 내연(內燃)하는 유혹당할 가능성을 Blut와 Sinne로 표현하는데, Blut(=피)는 번역이 쉽지만 Sinne(=감각)는 번역이 무척 까다롭다. 이 어휘는 레싱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그 의미영역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18세기의 독일어 용례사전을 들여다보면 명사 der Sinn은 원래 눈으로 보는 것을 뜻했으며, 차차 광의의 의미에서 외부의 대상을 수용하고 인지하는 감각작용을 가리켰고, 비유적으로는 감정을 동반하는 인식, 의식, 의지와도 관련해서 사용되었다.<ref>https://lexika.digitale-sammlungen.de/adelung/lemma/bsb00009134_2_0_853</ref> 이 명사의 복수형인 die Sinne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담당하는 감각기관을 가리키면서 또한 이 신체적 기관들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오감(五感) 작용을 나타낸다. 레싱은 이 어휘 die Sinne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사전적인 뜻에서 감각으로 번역되는 이 어휘에 오성(der Verstand)에만 귀속되었던 인식에의 능력과 의지로의 방향성을 부여하였다. 레싱에게 있어서 die Sinne는 인식의 정신활동과 합쳐져 ‘감각적 인식(die sinnliche Erkenntnis)’으로, 또한 도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도덕적인 함의를 포함한다. <에밀리아 갈로티>에서도 이 어휘는 일차적으로 인지하고 인식하며 판단하는 능력과 작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밀리아는 성당에서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Meine Sinne hatten mich verlassen”이라고 말하고, 클라우디아는 아피아니가 죽으면서 ‘그런 어조로’ 마리넬리를 불렀던 ‘그 어조’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면서 “Wo waren meine Sinne, daß sie diesen Ton nicht sogleich verstanden.”(Lessing, 437)이라고 말한다. 이에 에밀리아가 말하는 “또 제 감각도 감각이예요”도 우선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는 인지와 인식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말이 발화되는 맥락을 보자. 에밀리아는 자신이 젊고 더운 피를 가진 존재이며, 아버지가 세뇌하고 각인시킨 도덕의 실천을 약속할 수 없으며, 화려한 그리말디의 집에서 심적인 혼란을 겪었음을 고백하면서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에밀리아의 어휘와 문장에는 모종의 의지가 담기고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것의 정체가 환히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고 흐릿하게 비칠 뿐이다. 그것은 재상의 집에서 접해본 감각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소환하는 것일 수 있고, 혹은 그녀가 영주의 유혹에 향후 자발적으로 동의할 가능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어쩌면 에밀리아가 말하는 건 사람이 자연스럽게 타고난 사랑과 생식의 본성일 수도 있다. <ref>Ter-Nedden, Gisbert(2011): Lessings dramatisierte Religionsphilosophie. Ein philologischer Kommentar zu Emilia Galotti und Nathan der Weise. In: Bultmann, Christoph/ Vollhardt, Friedrich(ed.): Gotthold Ephraim Lessings Religionsphilosophie im Kontext.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300-301.</ref> | 에밀리아는 자기 안에 내연(內燃)하는 유혹당할 가능성을 Blut와 Sinne로 표현하는데, Blut(=피)는 번역이 쉽지만 Sinne(=감각)는 번역이 무척 까다롭다. 이 어휘는 레싱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그 의미영역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18세기의 독일어 용례사전을 들여다보면 명사 der Sinn은 원래 눈으로 보는 것을 뜻했으며, 차차 광의의 의미에서 외부의 대상을 수용하고 인지하는 감각작용을 가리켰고, 비유적으로는 감정을 동반하는 인식, 의식, 의지와도 관련해서 사용되었다.<ref>https://lexika.digitale-sammlungen.de/adelung/lemma/bsb00009134_2_0_853</ref> 이 명사의 복수형인 die Sinne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담당하는 감각기관을 가리키면서 또한 이 신체적 기관들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오감(五感) 작용을 나타낸다. 레싱은 이 어휘 die Sinne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사전적인 뜻에서 감각으로 번역되는 이 어휘에 오성(der Verstand)에만 귀속되었던 인식에의 능력과 의지로의 방향성을 부여하였다. 레싱에게 있어서 die Sinne는 인식의 정신활동과 합쳐져 ‘감각적 인식(die sinnliche Erkenntnis)’으로, 또한 도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도덕적인 함의를 포함한다. <에밀리아 갈로티>에서도 이 어휘는 일차적으로 인지하고 인식하며 판단하는 능력과 작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밀리아는 성당에서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Meine Sinne hatten mich verlassen”이라고 말하고, 클라우디아는 아피아니가 죽으면서 ‘그런 어조로’ 마리넬리를 불렀던 ‘그 어조’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면서 “Wo waren meine Sinne, daß sie diesen Ton nicht sogleich verstanden.”(Lessing, 437)이라고 말한다. 이에 에밀리아가 말하는 “또 제 감각도 감각이예요”도 우선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는 인지와 인식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말이 발화되는 맥락을 보자. 에밀리아는 자신이 젊고 더운 피를 가진 존재이며, 아버지가 세뇌하고 각인시킨 도덕의 실천을 약속할 수 없으며, 화려한 그리말디의 집에서 심적인 혼란을 겪었음을 고백하면서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에밀리아의 어휘와 문장에는 모종의 의지가 담기고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것의 정체가 환히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고 흐릿하게 비칠 뿐이다. 그것은 재상의 집에서 접해본 감각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소환하는 것일 수 있고, 혹은 그녀가 영주의 유혹에 향후 자발적으로 동의할 가능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어쩌면 에밀리아가 말하는 건 사람이 자연스럽게 타고난 사랑과 생식의 본성일 수도 있다. <ref>Ter-Nedden, Gisbert(2011): Lessings dramatisierte Religionsphilosophie. Ein philologischer Kommentar zu Emilia Galotti und Nathan der Weise. In: Bultmann, Christoph/ Vollhardt, Friedrich(ed.): Gotthold Ephraim Lessings Religionsphilosophie im Kontext.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300-301.</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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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영호(1990)|정영호 역의 <에밀리아 갈로티>(1990)]]<span id="정영호(1990)R" />''' | ||
<에밀리아 갈로티>를 처음 번역한 정영호는 하인리히 뵐, 헤르만 헤세의 작품 등을 번역한 바 있는 독문학자로, 그가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금성판 세계문학대전집>의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는 한 권에 복수의 작가와 작품을 모았는데, 이 책에도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와 프리드리히 쉴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희곡 작품들이 정영호의 번역으로 들어있다.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소개글이 첨부되어 있으나 저본에 대한 정보는 없다.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는 인물들이 생동감 넘치는 구어체로 말하고, 극의 진행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급박히 전개된다. 정영호의 번역은 대체로 이 점을 잘 살리고 있으며 때로는 원작의 박진감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용어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어투가 전반적으로 거칠어서 인물들의 대화에서 비극적인 효과가 반감되는 부작용이 일어난다. 고결한 품성을 가진 인물인 아피아니조차도 마리넬리의 뒤에서 “개새끼”(정영호, 39)라고 욕을 하는 게 한 예라면, 영주인 곤차가는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입이 험해서 아랫사람에게는 반말투로 말하기 예사이고, 마리넬리와 함께 아피아니를 “그놈”(3막 1장 참조)으로 지칭하며, 혼잣말할 때는 마리넬리를 “녀석”으로, 오도아르도를 “놈”이라고 한다. 말투로 보자면 정영호의 곤차가는 경솔하고 안하무인 격인 전제군주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다만 레싱의 원작에서는 주요 인물들이 단선적이지 않고 영주 또한 욕망에 충실한 면모와 더불어 죄책을 인식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주의 어투를 거칠고 하대하는 식으로 번역한 것은 인물을 평면적으로 만들어 아쉬운 부분이다. 이 외에 정영호의 번역에서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계급 낙차를 크게 만들어서 인물들 간 위계질서가 뚜렷이 드러나는 점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마리넬리 후작의 직책인 Kammerherr를 “公의 시종”으로 번역하여, 헤토레 곤차가와의 관계를 주인과 시종으로 설정하고, 원문에 있는 “후작(Marquis)” 칭호를 번역하지 않는다. 곤차가는 마리넬리를 “자네”로 낮추어 부른다. 수직적인 위계는 시민적 도덕의 화신이라 할 오도아르도의 가족관계에서도 나타나서, 오도아르도는 부인 클라우디아에게 반말을 하고, 클라우디아는 딸 에밀리아에게 명령형으로 말한다. 이외 “서비스”, “서클”, “플러스”와 같은 영어가 튀어나오는 등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있고, “Vorsaal”과 “Vorzimmer”를 각각 전실(前室)과 비서실로 번역하는 대신에 “대합실”로 옮기는 등, 맥락에서 이탈하는 부정확한 어휘들이 있다. | <에밀리아 갈로티>를 처음 번역한 정영호는 하인리히 뵐, 헤르만 헤세의 작품 등을 번역한 바 있는 독문학자로, 그가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금성판 세계문학대전집>의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는 한 권에 복수의 작가와 작품을 모았는데, 이 책에도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와 프리드리히 쉴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희곡 작품들이 정영호의 번역으로 들어있다.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소개글이 첨부되어 있으나 저본에 대한 정보는 없다.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는 인물들이 생동감 넘치는 구어체로 말하고, 극의 진행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급박히 전개된다. 정영호의 번역은 대체로 이 점을 잘 살리고 있으며 때로는 원작의 박진감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용어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어투가 전반적으로 거칠어서 인물들의 대화에서 비극적인 효과가 반감되는 부작용이 일어난다. 고결한 품성을 가진 인물인 아피아니조차도 마리넬리의 뒤에서 “개새끼”(정영호, 39)라고 욕을 하는 게 한 예라면, 영주인 곤차가는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입이 험해서 아랫사람에게는 반말투로 말하기 예사이고, 마리넬리와 함께 아피아니를 “그놈”(3막 1장 참조)으로 지칭하며, 혼잣말할 때는 마리넬리를 “녀석”으로, 오도아르도를 “놈”이라고 한다. 말투로 보자면 정영호의 곤차가는 경솔하고 안하무인 격인 전제군주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다만 레싱의 원작에서는 주요 인물들이 단선적이지 않고 영주 또한 욕망에 충실한 면모와 더불어 죄책을 인식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주의 어투를 거칠고 하대하는 식으로 번역한 것은 인물을 평면적으로 만들어 아쉬운 부분이다. 이 외에 정영호의 번역에서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계급 낙차를 크게 만들어서 인물들 간 위계질서가 뚜렷이 드러나는 점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마리넬리 후작의 직책인 Kammerherr를 “公의 시종”으로 번역하여, 헤토레 곤차가와의 관계를 주인과 시종으로 설정하고, 원문에 있는 “후작(Marquis)” 칭호를 번역하지 않는다. 곤차가는 마리넬리를 “자네”로 낮추어 부른다. 수직적인 위계는 시민적 도덕의 화신이라 할 오도아르도의 가족관계에서도 나타나서, 오도아르도는 부인 클라우디아에게 반말을 하고, 클라우디아는 딸 에밀리아에게 명령형으로 말한다. 이외 “서비스”, “서클”, “플러스”와 같은 영어가 튀어나오는 등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있고, “Vorsaal”과 “Vorzimmer”를 각각 전실(前室)과 비서실로 번역하는 대신에 “대합실”로 옮기는 등, 맥락에서 이탈하는 부정확한 어휘들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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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는 역자해설에서 원작에서 에밀리아가 하는 말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점을 비판한다. 에밀리아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어떤 事態일까. 이것이 작가의 이른바 ‘近代化된 비르기니아劇’의 근대성의 내용인 것인가. 이 점에서 <ins>레싱의 筆致는 애매하며, 분명히 이 희곡의 缺點의 하나라</ins> 해도 좋을 것이다.”(정영호, 444) 정영호는 연구자로서 극의 결말부에 대한 불만족에 근거하여 번역자로서 텍스트의 의미를 선명히 드러내려는 번역전략을 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번역은 원문을 뚜렷하게 다시 쓰면서 원문에 담긴 복합적인 함의를 잘라내 버리고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 정영호는 역자해설에서 원작에서 에밀리아가 하는 말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점을 비판한다. 에밀리아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어떤 事態일까. 이것이 작가의 이른바 ‘近代化된 비르기니아劇’의 근대성의 내용인 것인가. 이 점에서 <ins>레싱의 筆致는 애매하며, 분명히 이 희곡의 缺點의 하나라</ins> 해도 좋을 것이다.”(정영호, 444) 정영호는 연구자로서 극의 결말부에 대한 불만족에 근거하여 번역자로서 텍스트의 의미를 선명히 드러내려는 번역전략을 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번역은 원문을 뚜렷하게 다시 쓰면서 원문에 담긴 복합적인 함의를 잘라내 버리고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 ||
− | ''' | + | 2)'''[[#윤도중(1991)|윤도중 역의 <에밀리아 갈로티>(1991]]<span id="윤도중(1991)R" />''' |
윤도중의 번역은 199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레싱 희곡선: 현자 나탄, 에밀리아 갈로티>에 수록되었다. 윤도중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喜劇에 있어서의 反轉技法>으로 학위를 하였으며, 이 한 해에 <에밀리아 갈로티>뿐 아니라 <[[필로타스|필로타스]]>, <[[민나 폰 바른헬름, 또는 군인의 행운 (Minna von Barnhelm, oder das Soldatenglück)|민나 폰 바른헬름]]> <[[현자 나탄|현자 나탄]]> 등 레싱의 주요 작품을 번역하여 레싱을 한국의 독서계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전반적으로 인물들의 대사가 자연스럽고, 대사의 연결도 매끄러워 읽기에 무리가 없다. 일례로 곤차가는 영주라는 사회적 계급에 어울리게 자못 점잖고 품위가 있는 어투로 말하며, 마리넬리의 위치는 “시종장”으로 원작의 직책에 가까워지고, 영주가 마리넬리를 부르는 호칭도 “그대”로 원문의 “Sie”에 상응한다. 원작의 언어가 1770년대의 독일어로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경어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윤도중의 번역본에서 가끔 나타나는 문어체의 대사들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 윤도중의 번역은 199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레싱 희곡선: 현자 나탄, 에밀리아 갈로티>에 수록되었다. 윤도중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喜劇에 있어서의 反轉技法>으로 학위를 하였으며, 이 한 해에 <에밀리아 갈로티>뿐 아니라 <[[필로타스|필로타스]]>, <[[민나 폰 바른헬름, 또는 군인의 행운 (Minna von Barnhelm, oder das Soldatenglück)|민나 폰 바른헬름]]> <[[현자 나탄|현자 나탄]]> 등 레싱의 주요 작품을 번역하여 레싱을 한국의 독서계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전반적으로 인물들의 대사가 자연스럽고, 대사의 연결도 매끄러워 읽기에 무리가 없다. 일례로 곤차가는 영주라는 사회적 계급에 어울리게 자못 점잖고 품위가 있는 어투로 말하며, 마리넬리의 위치는 “시종장”으로 원작의 직책에 가까워지고, 영주가 마리넬리를 부르는 호칭도 “그대”로 원문의 “Sie”에 상응한다. 원작의 언어가 1770년대의 독일어로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경어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윤도중의 번역본에서 가끔 나타나는 문어체의 대사들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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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정영호가 Sinne를 “육체”로 번역한 것과 달리 윤도중은 “감각”으로 번역한다. 에밀리아는 감각의 사례로 “쾌락의 집”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한다. 그리말디 재상의 집에서 그녀는 ‘즐거움’과 관련된, 그리고 오감이 깨어나는 어떤 경험을 했고, 그것이 어찌나 강렬한지 심각한 정도의 내적 후폭풍을 겪었다. 그 경험에는 영주가 그곳에서 에밀리아를 보았고, 대화했고, 그녀에게 반한 것도 포함된다. (이는 2막 4장에서 클라우디아가 오도아르도에게 전해준다). 그러니 에밀리아가 가라앉히지 못했던 “혼란”에는 화려한 귀족 생활의 볼거리와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즐길 거리에 한정되지 않고, 영주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흔들림이나 내적 파문까지도 포함되지 않을까. 역자인 윤도중은 에밀리아의 위 대사를 “보통 사람들과 같이 감정과 정열을 가진 인간인 에밀리아의 자아인식”(윤도중, 304)이라는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역자는 “제 감각도 역시 감각입니다”라는 문장에 감각기관과 작용에 의한 감정과 느낌도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명사 “감각”의 국어사전적인 뜻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에밀리아의 ‘자아인식’까지 담아내기에는 다소 협소해 보이기도 한다. 역자도 이점을 알고 있는 듯, 2009년의 개역에서는 “관능”으로 수정한다. | 앞서 살펴본 정영호가 Sinne를 “육체”로 번역한 것과 달리 윤도중은 “감각”으로 번역한다. 에밀리아는 감각의 사례로 “쾌락의 집”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한다. 그리말디 재상의 집에서 그녀는 ‘즐거움’과 관련된, 그리고 오감이 깨어나는 어떤 경험을 했고, 그것이 어찌나 강렬한지 심각한 정도의 내적 후폭풍을 겪었다. 그 경험에는 영주가 그곳에서 에밀리아를 보았고, 대화했고, 그녀에게 반한 것도 포함된다. (이는 2막 4장에서 클라우디아가 오도아르도에게 전해준다). 그러니 에밀리아가 가라앉히지 못했던 “혼란”에는 화려한 귀족 생활의 볼거리와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즐길 거리에 한정되지 않고, 영주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흔들림이나 내적 파문까지도 포함되지 않을까. 역자인 윤도중은 에밀리아의 위 대사를 “보통 사람들과 같이 감정과 정열을 가진 인간인 에밀리아의 자아인식”(윤도중, 304)이라는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역자는 “제 감각도 역시 감각입니다”라는 문장에 감각기관과 작용에 의한 감정과 느낌도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명사 “감각”의 국어사전적인 뜻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에밀리아의 ‘자아인식’까지 담아내기에는 다소 협소해 보이기도 한다. 역자도 이점을 알고 있는 듯, 2009년의 개역에서는 “관능”으로 수정한다. | ||
− | ''' | + | 3) '''[[#송전(2000)|송전 역의 <에밀리아 갈로티>(2000)]]<span id="송전(2000)R" /> |
송전이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2000년에 서문당에서 출간한 서문문고 316권,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송전의 번역은 가독성의 측면에서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이나, 들여다보면 언어의 밀도가 떨어지고 세부적으로 취약한 부분들이 꽤 있다. 마리넬리의 직책을 일본의 행정 조직에서 유래하고 일제강점기 때 관직명이던 “관방장”으로 번역한 것은 꽤 의아스럽고, Maler를 화가가 아니라 “환쟁이”로 번역한 것과 화가 콘티가 자신을 심하게 낮추면서 말끝마다 “~읍죠”, “~입죠”라는 종결어미를 쓰는 번역은 콘티의 말에 담긴 예술론적 함의를 가린다. 이곳저곳에 오역과 부정확한 번역이 문맥을 불분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클라우디아가 마리넬리를 아피아니의 살인자로 지목하는 3막 8장의 경우, 레싱의 원작에서는 클라우디아가 죽어가는 아피아니가 ‘저주가 섞인’ 어조로 마리넬리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고, 마리넬리는 ‘죽어가는’ 아피아니가 마침내 죽었는지 그 여부만을 궁금해한다. 둘의 관심이 어긋나면서 대화에 팽팽한 긴장이 생기는데, 송전의 번역에서는 이 두 정보가 담긴 문장들이 그냥 누락되어 버려서 클라우디아와 마리넬리 간 말싸움의 원인이 불명확하다. | 송전이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2000년에 서문당에서 출간한 서문문고 316권,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송전의 번역은 가독성의 측면에서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이나, 들여다보면 언어의 밀도가 떨어지고 세부적으로 취약한 부분들이 꽤 있다. 마리넬리의 직책을 일본의 행정 조직에서 유래하고 일제강점기 때 관직명이던 “관방장”으로 번역한 것은 꽤 의아스럽고, Maler를 화가가 아니라 “환쟁이”로 번역한 것과 화가 콘티가 자신을 심하게 낮추면서 말끝마다 “~읍죠”, “~입죠”라는 종결어미를 쓰는 번역은 콘티의 말에 담긴 예술론적 함의를 가린다. 이곳저곳에 오역과 부정확한 번역이 문맥을 불분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클라우디아가 마리넬리를 아피아니의 살인자로 지목하는 3막 8장의 경우, 레싱의 원작에서는 클라우디아가 죽어가는 아피아니가 ‘저주가 섞인’ 어조로 마리넬리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고, 마리넬리는 ‘죽어가는’ 아피아니가 마침내 죽었는지 그 여부만을 궁금해한다. 둘의 관심이 어긋나면서 대화에 팽팽한 긴장이 생기는데, 송전의 번역에서는 이 두 정보가 담긴 문장들이 그냥 누락되어 버려서 클라우디아와 마리넬리 간 말싸움의 원인이 불명확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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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가 유혹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이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송전의 번역은 그리말디 재상의 집에서 겪은 심적 요동을 현재형으로 옮겨 시제가 원문과 다르고, Sinne가있는 문장은 “제 감각도 감각인 건 마찬가지예요”(송전, 171)라고 번역하여 윤도중의 번역과 같은 어휘를 택하고 있다. | 에밀리아가 유혹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이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송전의 번역은 그리말디 재상의 집에서 겪은 심적 요동을 현재형으로 옮겨 시제가 원문과 다르고, Sinne가있는 문장은 “제 감각도 감각인 건 마찬가지예요”(송전, 171)라고 번역하여 윤도중의 번역과 같은 어휘를 택하고 있다. | ||
− | ''' | + | 4) '''[[#윤도중(2009)|윤도중 역의 <에밀리아 갈로티>(2009, 2019)]]<span id="윤도중(2009)R" />''' |
윤도중은 1991년 이후 다수의 레싱 저작을 번역하고 관련 연구서와 논문을 발표하는 등 레싱 문학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에밀리아 갈로티> 번역의 경우, 1991년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하되 “원전의 충실한 번역에 중점을 두어 다시”(윤도중 2009, 15) 번역하여 2009년에 새롭게 출판하였다. 역자는 원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옮기는 의미 번역을 지향하면서 다수의 독일어 문장을 풀어서 한국어로 옮기는데, 이렇듯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의역으로 기우는 경향은 어휘와 자구의 직역이 많았던 1991년의 번역과 차별된다. 일례로 욕망에 사로잡힌 영주 곤차가가 마리넬리를 그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고, 영주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면서 사익을 챙기는 교활한 마리넬리가 치고받는 대사들은 2009년의 번역본에서 언변이 더욱 화려하고 문장의 길이도 길다. 원전의 의미에 충실하면서 직역을 고수하지 않는 번역 의도는 역자가 가독성을 번역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윤도중의 2009년 번역본은 원작에 대한 충실성과 국내 독자를 위한 가독성을 적절히 조율하여 원작의 재미를 잘 전달하고 있으며 국내 독문학자들이 연구에 참조할 신뢰성 높은 번역으로 판단된다. 이 번역은 2014년과 2019년에 각각 편집을 달리하여 재출판되었다. | 윤도중은 1991년 이후 다수의 레싱 저작을 번역하고 관련 연구서와 논문을 발표하는 등 레싱 문학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에밀리아 갈로티> 번역의 경우, 1991년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하되 “원전의 충실한 번역에 중점을 두어 다시”(윤도중 2009, 15) 번역하여 2009년에 새롭게 출판하였다. 역자는 원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옮기는 의미 번역을 지향하면서 다수의 독일어 문장을 풀어서 한국어로 옮기는데, 이렇듯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의역으로 기우는 경향은 어휘와 자구의 직역이 많았던 1991년의 번역과 차별된다. 일례로 욕망에 사로잡힌 영주 곤차가가 마리넬리를 그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고, 영주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면서 사익을 챙기는 교활한 마리넬리가 치고받는 대사들은 2009년의 번역본에서 언변이 더욱 화려하고 문장의 길이도 길다. 원전의 의미에 충실하면서 직역을 고수하지 않는 번역 의도는 역자가 가독성을 번역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윤도중의 2009년 번역본은 원작에 대한 충실성과 국내 독자를 위한 가독성을 적절히 조율하여 원작의 재미를 잘 전달하고 있으며 국내 독문학자들이 연구에 참조할 신뢰성 높은 번역으로 판단된다. 이 번역은 2014년과 2019년에 각각 편집을 달리하여 재출판되었다. |
2025년 2월 2일 (일) 14:43 기준 최신판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의 희곡
작가 |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
---|---|
초판 발행 | 1772 |
장르 | 희곡 |
작품소개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시민비극으로 1772년에 초연되었고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레싱은 극의 모티브를 로마 시대 역사가 리비우스가 쓴 지르기나 이야기(폭군으로부터 딸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딸을 살해하고 대중봉기가 일어나 독재가 몰락하고 민주제도와 법질서가 회복됨)에서 가져왔고, 극의 시공간적 배경을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구아스탈라로 설정했다. 극은 5막으로 구성되었고 극의 시간은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다. 구아스탈라의 영주 곤차가는 에밀리아 갈로티에게 완전히 반했는데, 아피아니 백작이 그날 그녀와 결혼할 것임을 알게 된다. 시종장인 마리넬리는 영주의 허락하에 결혼식이 일어나지 않도록 계략을 짠다(1막). 에밀리아의 아버지 오도아르도는 영주가 에밀리아에게 호감을 보였다는 아내 클라우디아의 말에 크게 화를 낸다. 에밀리아는 성당에서 영주한테 유혹받았다고 말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오도아르도와 아피아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한다. 마리넬리는 아피아니에게 영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외국 파견을 전하는데 아피아니가 거절하자 둘이 언쟁을 벌인다(2막). 마리넬리의 사주를 받은 무리가 강도떼로 위장하여 신랑신부 일행을 습격해 아피아니를 죽이고, 보호를 구실로 에밀리아를 영주의 별궁으로 데려간다. 딸을 찾아 그곳에 간 클라우디아는 마리넬리를 보자 그가 꾸민 범행임을 직감한다(3막). 영주의 정부인 오르시나 백작부인이 오도아르도에게 살인과 납치의 음모를 알려주고, 무기를 찾는 오도아르도에게 자신의 단도를 건네준다(4막). 오도아르도가 에밀리아를 데리고 가려 하자 영주와 마리넬리는 사건조사를 핑계로 에밀리아를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한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죽여달라고 청하고 오도아르도의 손에 들린 단도에 찔려 죽는다(5막). 이 극은 귀족에 국한되었던 비극의 주인공을 시민계급에서 찾은 점, 당대 문학을 지배하던 규범미학에서 탈피한 점, 장르적 클리셰를 벗어난 자연스러운 구어체의 사용 및 긴장감 넘치는 구성과 전개 등에 있어서 18세기 독일 계몽주의를 대표할 뿐 아니라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이다. 지금까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정신사적, 심리적 관점 등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작품의 시의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국내 초역은 1990년 정영호에 의해 이루어졌다(금성출판사).
초판 정보
Lessing, Gotthold Ephraim(1772): Emilia Galotti. Ein Trauerspiel in fünf Aufzügen. Berlin: Verlag Christian Friedrich Voß.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9 | 레싱 | 鄭永鎬 | 1990 | 金星出版社 | 3-90 | 편역 | 완역 | ||
< | 에밀리아 갈로티 | 현자 나탄 | 창비교양문고 14 | G.E.레씽 | 윤도중 | 1991 | 창작과 비평사 | 179-292 | 편역 | 완역 | |
<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서문문고 316 | G.E. 레싱 | 송전 | 2000 | 서문당 | 7-175 | 완역 | 완역 | |
<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360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09 | 지식을만드는지식 | 21-166 | 완역 | 완역 | |
5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3-171 | 완역 | 완역 | |
6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큰글씨책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3-171 | 완역 | 완역 | |
7 | 에밀리아 갈로티 | 에밀리아 갈로티 | 지만지드라마 | 고트홀트 레싱 | 윤도중 | 2019 | 지만지드라마 | 3-171 | 완역 | 완역 |
1. 번역 현황 및 개관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소설 <젊은 베르터의 고뇌>, 권총으로 짧은 삶을 마감한 베르터의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 책의 제목은 <에밀리아 갈로티>로 괴테보다 스무 살이 많은 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1)이 쓴 비극이었다. 전 5막의 이 희곡은 1772년에 성공적으로 초연되었으며, 같은 해에 출판되었고 문학청년의 필독서로 인기를 구가하였다.[1] <젊은 베르터의 고뇌>의 주인공인 베르터의 실제 모델이던 칼 빌헬름 예루살렘은 1772년 10월 29일에 총으로 자살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실제로 그의 책상 위에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에밀리아 갈로티>가 당대에 누렸던 명성은 사그라지지 않아 독일 문학사에서는 ‘시민비극’의 모범으로 평가되며,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학창 시절에 한번은 읽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작가 레싱의 존재와 함께 <에밀리아 갈로티>의 명성이 전공자들에게는 일찌감치 전해졌는데, 번역은 1990년에 처음 나와서 작품의 위상에 비해서 초역이 꽤 지체된 감이 있다.[2] <에밀리아 갈로티>는 북한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씽(1966): 에밀리아 갈로티 (전5막). 홍석근 역. 평양: 조선문학 예술 총동맹 출판사. 이 번역본은 현재 국내에서 연구자료로 접할 수 있는 극소수의 북한에서 번역된 독일어 문학작품이다. 번역본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전제군주의 폭압에 맞선 투쟁을 형상화한 계급투쟁 문학으로 평가되고 수용되었다고 판단되며, 이 관점에서 독일어 문학작품의 번역이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북한에서 1960년대에 일찌감치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현재까지 세 명의 번역자가 <에밀리아 갈로티>를 번역했고 4종의 번역이 있으며 출판된 횟수는 8회이다. 1990년에 출간된 정영호의 번역이 국내 초역이고, 윤도중의 번역이 이듬해인 1991년에 출판되었다. 정영호의 번역이 1990년 12월에, 그리고 윤도중의 번역이 1991년 8월에 출판된 것으로 보아, 두 번역자가 비슷한 시기에 상호 영향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000년에 송전의 번역이 서문당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윤도중은 1991년의 번역을 개역하여 2009년에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에서 고전선집의 일환으로 새롭게 출판했다. 이 번역은 2014년에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으로 다시 출판되었고, 2019년에는 커뮤니케이션북스(주)의 지만지드라마로 출간되었다. <에밀리아 갈로티>의 번역본들은 상당량의 역자 해설을 부록으로 첨부하고 있다. 역자들이 독문학자이며 작품의 연구사와 수용사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겸비했기 때문인데, 정영호와 윤도중은 특히 ‘아버지에 의한 딸의 살해’ 문제를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개별 번역이 갖는 특징들을 살펴보면서 역자들이 이 문제가 드러나는 장면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해 보기로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순결을 지키고 목숨을 희생시킬 것인지 수치와 치욕 속에서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에밀리아의 딜레마는 지금껏 수없이 해석되었고, 시대마다 또 관점마다 다르게 평가되어왔다. 비극적 파국을 맞는 5막 7장에서 에밀리아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에는 저항할 수 있으나 내부에서 발동하는 유혹에는 굴복할 것 같은 두려움을 표출한다. 에밀리아의 대사 중 가장 유명한 대목을 인용하고, 평자의 번역을 덧붙여 보자.
Emilia: [......]- Gewalt! Gewalt! wer kann der Gewalt nicht trotzen? Was Gewalt heißt, ist nichts: Verführung ist die wahre Gewalt. - Ich habe Blut, mein Vater; so jugendliches, so warmes Blut, als eine. Auch meine Sinne, sind Sinne. Ich stehe für nichts. Ich bin für nichts gut. Ich kenne das Haus der Grimaldi. Es ist das Haus der Freude. Eine Stunde da, unter den Augen meiner Mutter; - und es erhob sich so mancher Tumult in meiner Seele, den die strengsten Übungen der Religionen kaum in Wochen besänftigen konnten! [3](Lessing, 464)(이하 모든 밑줄 강조 필자)
에밀리아: [......]폭력! 폭력! 누군들 폭력에 저항하지 못할까요?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유혹이 진짜 폭력이예요. 저도 피가 흘러요, 아버지, 여느 여자처럼 젊고 더운 피가요. 또 제 감각도 감각이예요. 저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아요. 저는 쓸모없어요. 그리말디의 집을 알아요. 향락의 집이죠. 한 시간 동안 그곳에 있었어요, 어머니의 눈 밑에서요, 그런데도 제 마음에 많은 분란이 일어났어요, 교회의 가장 엄격한 수행도 몇 주 동안 가라앉히질 못했어요!
에밀리아는 자기 안에 내연(內燃)하는 유혹당할 가능성을 Blut와 Sinne로 표현하는데, Blut(=피)는 번역이 쉽지만 Sinne(=감각)는 번역이 무척 까다롭다. 이 어휘는 레싱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그 의미영역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18세기의 독일어 용례사전을 들여다보면 명사 der Sinn은 원래 눈으로 보는 것을 뜻했으며, 차차 광의의 의미에서 외부의 대상을 수용하고 인지하는 감각작용을 가리켰고, 비유적으로는 감정을 동반하는 인식, 의식, 의지와도 관련해서 사용되었다.[4] 이 명사의 복수형인 die Sinne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담당하는 감각기관을 가리키면서 또한 이 신체적 기관들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오감(五感) 작용을 나타낸다. 레싱은 이 어휘 die Sinne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사전적인 뜻에서 감각으로 번역되는 이 어휘에 오성(der Verstand)에만 귀속되었던 인식에의 능력과 의지로의 방향성을 부여하였다. 레싱에게 있어서 die Sinne는 인식의 정신활동과 합쳐져 ‘감각적 인식(die sinnliche Erkenntnis)’으로, 또한 도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도덕적인 함의를 포함한다. <에밀리아 갈로티>에서도 이 어휘는 일차적으로 인지하고 인식하며 판단하는 능력과 작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밀리아는 성당에서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Meine Sinne hatten mich verlassen”이라고 말하고, 클라우디아는 아피아니가 죽으면서 ‘그런 어조로’ 마리넬리를 불렀던 ‘그 어조’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면서 “Wo waren meine Sinne, daß sie diesen Ton nicht sogleich verstanden.”(Lessing, 437)이라고 말한다. 이에 에밀리아가 말하는 “또 제 감각도 감각이예요”도 우선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는 인지와 인식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말이 발화되는 맥락을 보자. 에밀리아는 자신이 젊고 더운 피를 가진 존재이며, 아버지가 세뇌하고 각인시킨 도덕의 실천을 약속할 수 없으며, 화려한 그리말디의 집에서 심적인 혼란을 겪었음을 고백하면서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에밀리아의 어휘와 문장에는 모종의 의지가 담기고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것의 정체가 환히 드러나지 않고 모호하고 흐릿하게 비칠 뿐이다. 그것은 재상의 집에서 접해본 감각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소환하는 것일 수 있고, 혹은 그녀가 영주의 유혹에 향후 자발적으로 동의할 가능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어쩌면 에밀리아가 말하는 건 사람이 자연스럽게 타고난 사랑과 생식의 본성일 수도 있다. [5]
<에밀리아 갈로티>를 처음 번역한 정영호는 하인리히 뵐, 헤르만 헤세의 작품 등을 번역한 바 있는 독문학자로, 그가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금성판 세계문학대전집>의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는 한 권에 복수의 작가와 작품을 모았는데, 이 책에도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와 프리드리히 쉴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희곡 작품들이 정영호의 번역으로 들어있다.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소개글이 첨부되어 있으나 저본에 대한 정보는 없다.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는 인물들이 생동감 넘치는 구어체로 말하고, 극의 진행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급박히 전개된다. 정영호의 번역은 대체로 이 점을 잘 살리고 있으며 때로는 원작의 박진감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용어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어투가 전반적으로 거칠어서 인물들의 대화에서 비극적인 효과가 반감되는 부작용이 일어난다. 고결한 품성을 가진 인물인 아피아니조차도 마리넬리의 뒤에서 “개새끼”(정영호, 39)라고 욕을 하는 게 한 예라면, 영주인 곤차가는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입이 험해서 아랫사람에게는 반말투로 말하기 예사이고, 마리넬리와 함께 아피아니를 “그놈”(3막 1장 참조)으로 지칭하며, 혼잣말할 때는 마리넬리를 “녀석”으로, 오도아르도를 “놈”이라고 한다. 말투로 보자면 정영호의 곤차가는 경솔하고 안하무인 격인 전제군주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다만 레싱의 원작에서는 주요 인물들이 단선적이지 않고 영주 또한 욕망에 충실한 면모와 더불어 죄책을 인식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주의 어투를 거칠고 하대하는 식으로 번역한 것은 인물을 평면적으로 만들어 아쉬운 부분이다. 이 외에 정영호의 번역에서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계급 낙차를 크게 만들어서 인물들 간 위계질서가 뚜렷이 드러나는 점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마리넬리 후작의 직책인 Kammerherr를 “公의 시종”으로 번역하여, 헤토레 곤차가와의 관계를 주인과 시종으로 설정하고, 원문에 있는 “후작(Marquis)” 칭호를 번역하지 않는다. 곤차가는 마리넬리를 “자네”로 낮추어 부른다. 수직적인 위계는 시민적 도덕의 화신이라 할 오도아르도의 가족관계에서도 나타나서, 오도아르도는 부인 클라우디아에게 반말을 하고, 클라우디아는 딸 에밀리아에게 명령형으로 말한다. 이외 “서비스”, “서클”, “플러스”와 같은 영어가 튀어나오는 등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있고, “Vorsaal”과 “Vorzimmer”를 각각 전실(前室)과 비서실로 번역하는 대신에 “대합실”로 옮기는 등, 맥락에서 이탈하는 부정확한 어휘들이 있다.
내용의 측면에서 정영호의 번역은 영주가 에밀리아에게 품는 사랑의 감정을 성적 쾌락을 위한 욕구로 특정한다. 결혼식 날 아침에 집에 들른 오도아르도는 클라우디아한테서 영주가 지난 연회에서 에밀리아의 영민함과 아름다운 용모를 칭찬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크게 놀라서 “Ein Wollüstling, der bewundert, begehrt. -”(Lessing, 418)라고 말한다. 원문에 가까운 윤도중의 번역은 “감탄하고 탐내는 호색한”(윤도중 1991, 208)인데, 정영호는 “바람둥이가 여자를 칭찬했다는 것은, 결국 그 여자와 자고 싶다는 뜻이란 말이야...”(정영호, 26)로 옮긴다. 원문에 없는 어휘를 부가하고 불완전 문장을 설명조의 문장으로 써서 영주의 관심을 노골적으로 ‘자고 싶다’로 치환한다. ‘자고 싶다’는 정영호의 번역본에서 드라마의 향방을 결정짓는 말이기도 하다. 레싱의 오도아르도가 “die gekränkte Tugend”를 말하는데, 정영호의 오도아르도는 “훌륭한 처녀가 정조를 빼앗기려고 하는 것”(정영호, 76)으로 말한다. 여기서 역자는 다시금 문제는 에밀리아의 정조라고 콕 짚어주는 해설가의 역할을 자처하는데, 이는 윤도중이 번역한 “모욕당한 미덕”(윤도중 1991, 274)과 송전의 번역인 “도덕이 훼손된 것”(송전 150)과 비교해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비극적 파국으로 달려가는 갈등은 정조를 뺏으려는 자와 정조를 지키려는 자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3막에서 별궁으로 납치된 에밀리아를 만난 곤차가는 성당에서 속삭였던 사랑 고백을 사과하는 한편, 이번에는 위압적인 말로 사랑을 고백한다. “Nur falle Ihnen nie bei, daß Sie eines andern Schutzes gegen mich bedürfen.”(Lessing, 435) ‘나에게 맞서서 어떤 다른 보호를 찾으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문장인데, 정영호는 “내게서 몸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보호가 필요하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말아주시오.”(정영호, 49)로 옮겨 원문에 없는 ‘몸을 지키는’ 의미를 첨가한다. 5막 5장에서 영주가 에밀리아를 부모한테서 떼어놓을 목적으로 그리말디 장관의 집에 위탁하겠다고 명하자, 오도아르도는 영주를 향하여 “장관의 저택이라면, 물론 딸의 정조는 완전히 지켜집니다.”(정영호, 84)라고 대답한다. 여기서도 역자는 ‘미덕의 도피처’라는 뜻의 원문 “eine Freistatt der Tugend”(Lessing, 461)를 정조의 문제로 치환한다. 그러니 에밀리아가 종국에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을 “육체”에서 찾는 것은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다.
에밀리아 [...] 유혹이라는 것이야말로 진짜 폭력이에요! ...... 저도 피가 통하는 인간이에요, 아버님, 보통 사람들처럼 젊고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저의 육체도 육체임에는 틀림없어요. 전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어요.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어요.(정영호, 87)
정영호는 역자해설에서 원작에서 에밀리아가 하는 말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점을 비판한다. 에밀리아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어떤 事態일까. 이것이 작가의 이른바 ‘近代化된 비르기니아劇’의 근대성의 내용인 것인가. 이 점에서 레싱의 筆致는 애매하며, 분명히 이 희곡의 缺點의 하나라 해도 좋을 것이다.”(정영호, 444) 정영호는 연구자로서 극의 결말부에 대한 불만족에 근거하여 번역자로서 텍스트의 의미를 선명히 드러내려는 번역전략을 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번역은 원문을 뚜렷하게 다시 쓰면서 원문에 담긴 복합적인 함의를 잘라내 버리고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윤도중의 번역은 199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레싱 희곡선: 현자 나탄, 에밀리아 갈로티>에 수록되었다. 윤도중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喜劇에 있어서의 反轉技法>으로 학위를 하였으며, 이 한 해에 <에밀리아 갈로티>뿐 아니라 <필로타스>, <민나 폰 바른헬름> <현자 나탄> 등 레싱의 주요 작품을 번역하여 레싱을 한국의 독서계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전반적으로 인물들의 대사가 자연스럽고, 대사의 연결도 매끄러워 읽기에 무리가 없다. 일례로 곤차가는 영주라는 사회적 계급에 어울리게 자못 점잖고 품위가 있는 어투로 말하며, 마리넬리의 위치는 “시종장”으로 원작의 직책에 가까워지고, 영주가 마리넬리를 부르는 호칭도 “그대”로 원문의 “Sie”에 상응한다. 원작의 언어가 1770년대의 독일어로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경어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윤도중의 번역본에서 가끔 나타나는 문어체의 대사들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레싱은 희곡 작품에서 줄표를 즐겨 사용했는데, <에밀리아 갈로티>에는 희극 <민나 폰 바른헬름>이나 또 다른 비극 <미스 사라 샘슨>과 비교해서 더 많은 줄표가 있다. <에밀리아 갈로티>에서는 줄표가 형식 부호의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문장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성당에 갔던 에밀리아가 겁에 질려 황급히 집으로 뛰어 들어와서 어머니 클라우디아에게 성당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는 대사에도 줄표가 많은데, 그중 한 부분을 보자.
EMILIA [......]- Aber es währte nicht lange, so hört’ ich, ganz nah’ an meinem Ohre, - nach einem tiefen Seufzer, - nicht den Namen einer Heiligen, - den Namen, - zürnen Sie nicht, meine Mutter – den Namen Ihrer Tochter! - Meinen Namen! - O daß laute Donner mich verhindert hätten, mehr zu hören! - Es sprach von Schönheit, von Liebe – Es klagte, daß dieser Tag, welcher mein Glück mache, - wenn er es anders mache – sein Unglück auf immer entscheide. - Es beschwor mich – hören mußt’ ich dies alles.(Lessing, 419)
줄표는 시각적으로 이미 문장을 토막토막 끊어서 말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흐름을 막는다. 또 줄표가 청각적인 역할을 하기도 해서, 이 대목을 소리 내어 읽으면 들숨과 날숨의 교차가 많아져 숨이 가빠진다. 줄표는 에밀리아가 충격과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뱉으며 두서없이 말한다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녀의 말이 어떤 내용인지 윤도중의 번역으로 읽어보자.
에밀리아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귀 바로 옆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깊은 탄식소리 다음에 성녀의 이름이 아니라 – 어머님, 화내지 마십시오, 어머님의 딸의 이름이 – 제 이름이 들리는 것이었어요! 오, 요란한 천둥이 쳐 제가 더이상 듣지 못하게 방해했었더라면! 아름답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자는 제 행복을 결정짓는 오늘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의 불행을 영원히 결정짓는다고 하소연했어요. 제게 애원했습니다. 저는 모든 얘기를 다 듣지 않을 수 없었어요.(윤도중, 211)
윤도중의 번역은 줄표를 최소화하면서, 문장을 삽입하는 기능에 국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줄표를 한국어의 형식구조로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한데, 윤도중은 2009년의 개역에서는 줄표를 모두 생략하고 쉼표 “,”로 혹은 말줄임표 “...”로 대체했다. 암튼 위에 인용한 것처럼 줄표가 사라진 번역에서는 에밀리아의 말이 평서문들로 나열되고, 주어와 술어를 갖춘 문장은 툭툭 끊어진 원문에 비해 사뭇 조리 있어 보인다. 에밀리아는 성당에서 겪은 일을 “영주가 오늘 저에게 말했다 [......] daß der Prinz mich heute gesprochen”(Lessing, 421)고 하는 원문과 다르게 “영주가 오늘 저에게 수작을 부렸다”(윤도중, 214)고 하여, 사건에 휘말린 당사자이지만 영주의 행동을 평가하기도 한다. 요컨대 레싱의 에밀리아는 영주가 쫓아왔는지 혹은 어디까지 따라왔는지 기억하지 못할 만큼 놀라고 정신이 나갈 지경인데, 윤도중의 에밀리아는 그보다 영주의 행동을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하고 격정적인 말로 언짢은 기분을 전달한다.
이제 에밀리아가 유혹에 넘어가는 두려움을 말하는 부분을 보자.
에밀리아 [......] 폭력! 폭력! 누가 폭력에 대항하지 못하겠습니까? 폭력이라 불리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혹이 진짜 폭력입니다. 저에게도 피가 흐릅니다, 아버님. 누구 못지 않게 젊고 따뜻한 피가. 제 감각도 역시 감각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요. 저에게도 약점이 있어요. 저는 그리말디의 집을 잘 압니다. 쾌락의 집이지요. 어머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그곳에 한 시간밖에 있지 않았는데 제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났어요. 수주일 동안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를 올려도 잠재우기 힘들었습니다!(윤도중, 289)
앞서 살펴본 정영호가 Sinne를 “육체”로 번역한 것과 달리 윤도중은 “감각”으로 번역한다. 에밀리아는 감각의 사례로 “쾌락의 집”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한다. 그리말디 재상의 집에서 그녀는 ‘즐거움’과 관련된, 그리고 오감이 깨어나는 어떤 경험을 했고, 그것이 어찌나 강렬한지 심각한 정도의 내적 후폭풍을 겪었다. 그 경험에는 영주가 그곳에서 에밀리아를 보았고, 대화했고, 그녀에게 반한 것도 포함된다. (이는 2막 4장에서 클라우디아가 오도아르도에게 전해준다). 그러니 에밀리아가 가라앉히지 못했던 “혼란”에는 화려한 귀족 생활의 볼거리와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즐길 거리에 한정되지 않고, 영주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흔들림이나 내적 파문까지도 포함되지 않을까. 역자인 윤도중은 에밀리아의 위 대사를 “보통 사람들과 같이 감정과 정열을 가진 인간인 에밀리아의 자아인식”(윤도중, 304)이라는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를 참조하면 역자는 “제 감각도 역시 감각입니다”라는 문장에 감각기관과 작용에 의한 감정과 느낌도 담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명사 “감각”의 국어사전적인 뜻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에밀리아의 ‘자아인식’까지 담아내기에는 다소 협소해 보이기도 한다. 역자도 이점을 알고 있는 듯, 2009년의 개역에서는 “관능”으로 수정한다.
송전이 번역한 <에밀리아 갈로티>는 2000년에 서문당에서 출간한 서문문고 316권,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송전의 번역은 가독성의 측면에서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이나, 들여다보면 언어의 밀도가 떨어지고 세부적으로 취약한 부분들이 꽤 있다. 마리넬리의 직책을 일본의 행정 조직에서 유래하고 일제강점기 때 관직명이던 “관방장”으로 번역한 것은 꽤 의아스럽고, Maler를 화가가 아니라 “환쟁이”로 번역한 것과 화가 콘티가 자신을 심하게 낮추면서 말끝마다 “~읍죠”, “~입죠”라는 종결어미를 쓰는 번역은 콘티의 말에 담긴 예술론적 함의를 가린다. 이곳저곳에 오역과 부정확한 번역이 문맥을 불분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클라우디아가 마리넬리를 아피아니의 살인자로 지목하는 3막 8장의 경우, 레싱의 원작에서는 클라우디아가 죽어가는 아피아니가 ‘저주가 섞인’ 어조로 마리넬리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고, 마리넬리는 ‘죽어가는’ 아피아니가 마침내 죽었는지 그 여부만을 궁금해한다. 둘의 관심이 어긋나면서 대화에 팽팽한 긴장이 생기는데, 송전의 번역에서는 이 두 정보가 담긴 문장들이 그냥 누락되어 버려서 클라우디아와 마리넬리 간 말싸움의 원인이 불명확하다.
에밀리아가 유혹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이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송전의 번역은 그리말디 재상의 집에서 겪은 심적 요동을 현재형으로 옮겨 시제가 원문과 다르고, Sinne가있는 문장은 “제 감각도 감각인 건 마찬가지예요”(송전, 171)라고 번역하여 윤도중의 번역과 같은 어휘를 택하고 있다.
4) 윤도중 역의 <에밀리아 갈로티>(2009, 2019)
윤도중은 1991년 이후 다수의 레싱 저작을 번역하고 관련 연구서와 논문을 발표하는 등 레싱 문학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에밀리아 갈로티> 번역의 경우, 1991년의 번역본을 바탕으로 하되 “원전의 충실한 번역에 중점을 두어 다시”(윤도중 2009, 15) 번역하여 2009년에 새롭게 출판하였다. 역자는 원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옮기는 의미 번역을 지향하면서 다수의 독일어 문장을 풀어서 한국어로 옮기는데, 이렇듯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의역으로 기우는 경향은 어휘와 자구의 직역이 많았던 1991년의 번역과 차별된다. 일례로 욕망에 사로잡힌 영주 곤차가가 마리넬리를 그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고, 영주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하면서 사익을 챙기는 교활한 마리넬리가 치고받는 대사들은 2009년의 번역본에서 언변이 더욱 화려하고 문장의 길이도 길다. 원전의 의미에 충실하면서 직역을 고수하지 않는 번역 의도는 역자가 가독성을 번역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윤도중의 2009년 번역본은 원작에 대한 충실성과 국내 독자를 위한 가독성을 적절히 조율하여 원작의 재미를 잘 전달하고 있으며 국내 독문학자들이 연구에 참조할 신뢰성 높은 번역으로 판단된다. 이 번역은 2014년과 2019년에 각각 편집을 달리하여 재출판되었다.
윤도중은 2009년도 번역에서 최소 두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개역을 한다. 우선 아피아니는 피앙세인 에밀리아를 “아가씨”로 부른다.[6]1991년 번역에서 아피아니는 에밀리아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그대”로 부르는데 이 호칭은 두 사람이 결혼을 앞둔 사랑하는 사이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2009년의 번역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상당히 멀찌감치 잡는다. 역자는 그대라는 다정한 호칭을 아가씨라는 의례적인 호칭으로 바꾸며, 원문에 “Emilia”로 적혀 있어도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옮긴다. “아가씨”는 영주가 에밀리아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요컨대 역자는 신랑 아피아니와 신부 에밀리아의 친밀도를 떨어트려서 두 사람 사이를 영주와 에밀리아의 그것에 근접시키는 것이다. 이런 개역은 에밀리아가 영주의 유혹에 어느 정도 심리적 감응을 했을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에밀리아가 성당에서 영주에게 유혹당했고 사랑에 빠졌다는 해석에 불을 붙인 이는 다름 아닌 괴테이다). 이와 함께 역자는 2009년의 번역에서 에밀리아가 유혹에 굴복하는 두려움을 말하는 대목을 1991년의 번역과 다르게 옮긴다.
에밀리아 [......] 폭력! 폭력! 누군들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겠습니까? 폭력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녜요. 유혹이야말로 진짜 폭력입니다. 제 몸에도 피가 흘러요, 아버님. 어느 누구 못지않게 젊고 뜨거운 피가요. 저도 관능이 있답니다. 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어요. 그리말디의 집은 잘 압니다. 쾌락의 집이지요. 어머님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그 곳에 한 시간밖에 머물지 않았는데도 제 마음이 매우 혼란스러워졌어요. 몇 주일 동안 교회가 명하는 가장 엄격한 근행을 시행했어도 진정시키기 힘들었습니다.(윤도중 2009, 162)
이 번역에서 Sinne는 “관능”으로 옮겨져, 1991년의 번역에서 에밀리아가 “제 감각도 역시 감각입니다”라고 말한 문장이 “저도 관능이 있답니다”라는 말로 바뀐다. 국어사전적인 뜻풀이에 따르면 ‘관능’은 눈, 코, 입 등 감각기관의 기능과 작용을 가리키는 명사이자 성적인 감각을 자극하고 육체적인 쾌감을 동반하는 작용을 나타낸다. 그런데 일상적으로는 통상 후자의 의미, 즉 성적인 감각에 한정되거나 특정되어 사용된다. 최소한 역자가 번역한 “저도 관능이 있다”는 에밀리아의 말은 본격적으로 독일어 Sinne의 의미를 섹슈얼리티의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역자는 에밀리아가 “이제 눈뜨기 시작한 관능을 억제할 자신이 없다”(윤도중 2009, 10)는 해석을 덧붙여서 번역의 의도를 선명히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번역상의 변화에는 에밀리아의 딜레마를 ‘성적 욕망’과 연관시키고 Sinne를 Sinnlichkeit로 읽는 1990년대의 연구 경향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7] 다만 레싱의 원문 “Auch meine Sinne, sind Sinne”에서 성적 욕망을 읽어내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텍스트의 의도로 환원하는 것은 곤란하다. “저도 관능이 있답니다”라는 문장은 에밀리아처럼 에둘러서 표현하는 인물이 입에 올리기에는 과도하게 직접적이다. 에밀리아는 속내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일례로 5막 7장에서 아버지 오도아르도를 만나서 아피아니의 죽음을 언급할 때, 에밀리아는 “Und warum er tot ist! .... wenn er darum tot ist – darum!”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작님이 목숨을 잃은 이유”(윤도중 2009, 160)를 안다고 하면서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면,”(윤도중 2009, 160)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거나 짐작하는 그 이유를 표현하지 않는다. [8]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꿈의 특징으로 제시한 압축과 전위처럼 에밀리아의 말은 뭔가를 가리키지만 그것을 은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Auch meine Sinne, sind Sinne도 자기 안에서 내연하지만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은폐하는 말이 아닐까. 이렇게 보자면 관능이라는 번역은 일부러 흐릿하게만 나타나는 텍스트의 의도를 굳이 환하게 밝히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3. 평가 및 전망
<에밀리아 갈로티>의 국내 번역 4종은 모두 독문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되었는데, 레싱 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윤도중이 개역하여 2009년에 출판했고 그 후 재출판된 번역본은 ‘연구 번역’의 한 모범적인 사례로 신뢰성이 높은 번역으로 판단되며 또 현재 독자들이 쉽게 구할 수 있어 접근성의 측면에서도 장점이 크다. <에밀리아 갈로티>는 아버지에 의한 딸의 살해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평가할 건지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논쟁을 불러온 작품으로, 시대에 따라서 또 관점에 따라서 그 결과가 거듭 변화해왔다. 정영호와 윤도중 등 번역자는 작품의 핵심 문제에 대한 연구 경향을 잘 알고 그것을 번역에 반영했다. 윤도중의 1991년 번역과 2009년 번역에서 일어난 번역의 이동은 레싱의 이 비극이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되고 수용되었음을 증명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정영호(1990): 에밀리아 갈로티. 금성출판사. 윤도중(1991): 에밀리아 갈로티. 창작과비평사. 송전(2000): 에밀리아 갈로티. 서문당. 윤도중(2009): 에밀리아 갈로티. 지식을만드는지식. 윤도중(2019): 에밀리아 갈로티. 지만지드라마.
- 각주
- ↑ <젊은 베르터의 고뇌>의 주인공인 베르터의 실제 모델이던 칼 빌헬름 예루살렘은 1772년 10월 29일에 총으로 자살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실제로 그의 책상 위에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 ↑ <에밀리아 갈로티>는 북한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씽(1966): 에밀리아 갈로티 (전5막). 홍석근 역. 평양: 조선문학 예술 총동맹 출판사. 이 번역본은 현재 국내에서 연구자료로 접할 수 있는 극소수의 북한에서 번역된 독일어 문학작품이다. 번역본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전제군주의 폭압에 맞선 투쟁을 형상화한 계급투쟁 문학으로 평가되고 수용되었다고 판단되며, 이 관점에서 독일어 문학작품의 번역이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북한에서 1960년대에 일찌감치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 ↑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사용한다. Lessing, Gotthold Ephraim(1967): Emilia Galotti. Ein Trauerspiel in fünf Aufzügen. In: Wölfel, Kurt(ed.): Lessings Werke. Frankfurt a. M.: Insel Verlag. 399-466.
- ↑ https://lexika.digitale-sammlungen.de/adelung/lemma/bsb00009134_2_0_853
- ↑ Ter-Nedden, Gisbert(2011): Lessings dramatisierte Religionsphilosophie. Ein philologischer Kommentar zu Emilia Galotti und Nathan der Weise. In: Bultmann, Christoph/ Vollhardt, Friedrich(ed.): Gotthold Ephraim Lessings Religionsphilosophie im Kontext.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300-301.
- ↑ 원작에서 아피아니가 에밀리아를 부르는 호칭들은 “meine Teuerste”, “mein Fräulein”, “meine Emilia” 등이며, 영주는 에밀리아를 일관되게 “mein Fräulein”이라고 부른다.
- ↑ Fick, Monika(2016): Lessing-Handbuch. Leben-Werk-Wirkung. Stuttgart: J.B.Metzler. 355-356 참조. 예를 들어 “Emilia [......] redet von ihren Sinnen und ihrem Blut, d.h. von ihrem sexuellen Begehren.”
- ↑ 정영호는 이 대목을 “더구나 제가 원인이 되어 죽었어요...”(정영호, 86)라고 해석 번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