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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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AU0047}}의 소설 {{A01}} <!--작품소개--> 알프레트 되블린의 대표작으로, 1929년에 발표되었다. “프란츠 비버코프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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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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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1929)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대표작으로,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내적 독백 등 다양한 서술기법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대도시에서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며, ‘고전적 현대’로 불리는 20세기 전반 유럽 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대도시 소설이라는 점에서나 서술기법 면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도스 파소스의 <맨해튼 트랜스퍼> 등과 흔히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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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블린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71년 송동준이 <한송이 민들레꽃의 살해>라는 제목으로 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을 번역하면서였다. 되블린 작품들의 한국어 번역은 <한송이 민들레꽃의 살해>와 <유물론에 관한 동화>, <힌첼과 거친 렌헨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대표작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말로 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첫 번역은 장남준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삼성사, 1979)이고, 같은 해 지명렬의 번역이 잇따랐다(<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문화사). 1982년에 조견의 번역(<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 나온 후 약 30여 년 동안 새로운 번역이 없다가 2010년 안인희의 번역을 시작으로 2011년 김재혁, 2012년 권혁준의 번역이 나왔다. 본문에서는 이 번역본들 가운데 안인희, 김재혁, 권혁준의 번역본을 비교·분석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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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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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인희 역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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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는 독일 문학 작품들뿐 아니라 철학서, 역사서, 실용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책들을 번역하였고 여러 차례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한 전문번역가이다. 안인희, 김재혁, 권혁준은 모두 상당한 분량의 역자 해설을 번역본에 실었는데, 이 역자 해설들은 공통적으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들, 즉 이 소설이 베를린 자체를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대도시 소설이라는 점, 몽타주 테크닉, 내적 독백 등의 서술기법 및 베를린 방언, 이디시, 다양한 직업군이나 집단들의 사회어들(Soziolekte) 등의 혼합과 이로 인한 번역의 어려움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역자 해설들은 조금씩 다른 강조점과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안인희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실린 역자 해설은 “경쾌한 언어로 종말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 제목이 또한 안인희 역본의 특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인희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으로 비스마르크 시대의 독일 통일부터 시작하는 독일 근현대사에 대해 요약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 소설이 묵시록적 세계로서의 1920년대 말 대도시 베를린을 그려내고 있으며, 대공황 직전이기도 한 이 “공화국의 종말”을 되블린이 이 소설에서 “종말을 경쾌한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안 II, 402)고 보면서 소설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강조한다. 또한 이 작품의 대도시 소설로서의 성격, 대도시 베를린 자체가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안인희 역에서는 원문에 있는 긴 문단들을 원문과 다르게 짤막짤막하게 나누어 읽기 쉽게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체로 문장들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한 문단이 매우 긴 되블린 특유의 문체적 특성은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또한 가끔 부분적으로는 단어들을 생략하거나 변형하기도 하고 구어적인 표현들을 살림으로써 전체적으로 가독성이 높으며 경쾌한 문장들이 만들어진다. 세 역본 모두 베를린 방언이나 이디시 등을 옮기는 데 있어 특별한 장치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인희의 번역은 위와 같은 특징으로 인해 원문에 나타나는 많은 대화들의 구어적 특성들에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세 번역본에 모두 각주(안인희 역, 김재혁 역) 또는 미주(권혁준 역)가 달려 있는데, 안인희 역본에 각주가 최소화되어 있는 것도 가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젠더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세 번역본에 큰 차이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예컨대 프란츠 비버코프가 자신이 죽인 전 애인 이다의 여동생 미나를 출소 후에 찾아가 강간하는 장면의 번역에서 세 역본에는 다 젠더 비대칭성이 나타나지만, 안인희 역에서만 미나가 처음에는 존댓말을 하다가 나중에 프란츠와 함께 반말을 하는 것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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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인용문은 애인 미체가 살해된 충격에다가 그녀를 살인한 혐의까지 받은 프란츠가 건강이 나빠지고 의식이 혼미해져 강제로 입원된 부흐 정신병원의 감시병동에서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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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Mäuse laden Franz ein, mit ihnen zu essen und nicht traurig zu sein. Was ihn betrübt mache. Da stellte sich heraus, daß es für ihn nicht leicht ist, zu sprechen. Sie drängen ihn, er möchte doch ein ganzes Ende machen. Der Mensch ist ein häßliches Tier, '''der Feind aller Feinde, das widrigste  Geschöpf, das es auf der Erde gibt, noch schlimmer als die Kat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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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 sagt: '''Es ist nicht gut, in einem Menschenleib zu leben, ich will lieber kauern unter der Erde, über die Felder laufen und fressen, was ich finde, und der Wind weht, und der Regen fällt, und die Kälte kommt und vergeht, das ist besser als in einem Menschenleib le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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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Mäuse laufen, Franz ist eine Feldmaus und gräbt mit.(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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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들은 프란츠더러 슬퍼하지 말고 자기들과 함께 식사하자고 초대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우울하게 하는지. 그러다가 그가 말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그를 조르고 그는 완전히 끝장을 내고 싶어 한다. 인간은 못생긴 짐승이다, 모든 적들의 적이야,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역겨운 짐승이다, 심지어 고양이보다 더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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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다. '''인간의 몸 안에서 사는 건 좋지가 않아, 나는 차라리 땅 밑에 웅크리고 있을 거야, 들판 위로 돌아다니다가 그냥 보이는 걸 먹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가 왔다가 가고, 그게 인간의 몸 속에 사는 것보다 더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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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들이 돌아다닌다. 프란츠는 들쥐가 되어 함께 땅을 판다.(안 II, 348-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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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들은 프란츠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다. 뭣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그때 말을 한다는 것이 그에겐 쉬운 일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들은 그에게 왜 완전히 끝장을 내지 않느냐고 보챈다. '''인간은 정나미가 떨어지는 짐승이다, 모든 적들 중의 적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짐승이다, 고양이보다도 더 고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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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한다. '''인간의 몸뚱어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차라리 땅 밑에 웅크리고 있거나 들판을 달리다가 눈에 띄는 것을 먹고 싶다, 그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가 왔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인간의 몸뚱어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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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들이 달린다, 프란츠는 들쥐다, 그들과 함께 땅을 판다.(김 II, 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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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들은 프란츠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그때 말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들은 그에게 왜 완전히 끝장을 내지 않느냐고 보챈다. '''인간은 추악한 동물이다, 모든 적들 중의 적, 이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존재, 고양이보다 더 고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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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한다. '''인간의 몸뚱아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차라리 땅속에 웅크리고 있거나 들판을 뛰어다니며 내가 찾은 것을 먹고 싶다, 그곳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가 왔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인간의 몸뚱아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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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들이 돌아다니고, 이제 프란츠도 한 마리 들쥐가 되어 함께 땅을 판다.(권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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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에서 안인희의 번역은 권혁준과 김재혁의 번역에 비해 동물들의 내적 독백을 그와 같은 느낌을 살려 번역하였다. 부흐 정신병원 장면에서 프란츠 비버코프의 내적 독백 장면에서도 유사하다. 이에 비해 다른 두 역본에서는 이 두 부분을 3인칭 화자의 진술같이 ‘-다’체로 다소 거리를 둔 표현들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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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인용문은 역시 부흐 정신병원의 감시병동에 갇힌 프란츠 비버코프의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해체되고 상태가 나빠지면서 ‘죽음’이 등장하기 직전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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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mm Schlag, wumm Schlag, wumm Sturmbock, wumm Torschlag. Wuchten und Rammen, Krachen und Schwingen'''. Wer ist denn dieser verlogene Kerl, Franz Biberkopf, ein Wiedehopf, ein Gliedertropf, der moechte warten, bis mal Schnee faellt, dann, meint er, sind wir weg und kommen nicht wieder. [...] Dem werden wir aber die Suppe versalzen, wir haben Knochen aus Eisen, '''Krach Tor pass auf, knack Tor, Loch im Tor, Riß im Tor, paß auf, kein Tor, leeres Loch, Höhle, wumm wumm, paß auf, wumm wumm'''.(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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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잉 탁, 휘잉 탁, 휘잉 꽈당, 휘잉, 탁, 힘차게 쿵쿵, 탁탁, 휘잉''' – 이 거짓말쟁이 프란츠 비버코프, 비데호프, 멍청이, 그는 눈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거지, 그런 다음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 하지만 우린 그의 일을 망칠 거야, 우린 무쇠 뼈를 가졌으니, '''쿵쾅 잘 봐라, 문을 부숴, 문에 구멍, 문에 틈, 자 봐라, 문이 없다, 텅 빈 구멍, 동굴, 휘잉, 휭, 잘 봐라, 휭, 휘이'''.(안 II 339-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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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 쾅, 윙, 쾅, 윙, 성문 부수기, 윙, 성문 박살내기. 휘몰아치고 달리며 우지끈대며 흔들어 대기'''. 이 거짓말쟁이 프란츠 비버코프, 새대가리 비데호프, 멍청한 병신 자식,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눈이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셈이군, 그러면서 그 때쯤이면 우리가 떠나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 하지만 우리는 그의 계획을 망쳐 놓을 거야, 우리는 무쇠 뼈를 가졌어, '''쿵쾅, 잘 보라고, 문을 부수는 거야, 문에 구멍을 내는 거야, 문에 틈을 내는 거야, 자 보라고 문이 없어졌어, 다만 휑한 구멍만 남았어, 동굴에 불과해, 윙윙, 자 보라고, 윙윙'''.(권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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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 쾅, 윙, 쾅, 윙, 성벽을 부숴라, 윙, 성문을 부숴라. 쿵, 콰광, 우지끈, 덜컹덜컹'''. 이 거짓말쟁이 바보 자식, 프란츠 비버코프는 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비데코프 새대가리 같은 자식, 팔 병신 새끼, 눈이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셈이군, 이 친구는 우리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안 올 걸로 생각하나 보군.[...] 녀석을 골탕 먹여 줘야지, 우리의 뼈는 무쇠 같으니, '''이걸로 쾅, 문을 부수자, 우지끈 문을 부수고 문에 구멍을 내고, 문을 잡아 뜯자, 보라, 문이 없다, 텅 빈 구멍만 남았다, 휑하니 뚫렸다 윙윙, 보라, 윙윙'''.(김 II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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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역본 모두 원문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살리고 있는데, 이 가운데 안인희의 역본은 원문의 단어나 구문을 꼭 그대로 번역하지 않으면서 전체적으로 우리말의 생동감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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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재혁 역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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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자인 김재혁 번역본의 끝부분에 실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부르는 운명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해설”은 역자가 되블린과 인터뷰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베를린 방언 등과 같이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해 되블린과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역자는 베를린 방언을 우리나라 특정 지역 방언으로 옮길 경우 원작의 의미가 많이 함몰되고 우리나라 특정 지역에 대한 연상이 독자에게 전달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인공들의 교양이나 지위 등에 따라 우리말의 수위를 조절했다고 이야기한다(김재혁 II, 415-416 참조). 안인희가 소설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과 맥락을 강조한 데 비해, 김재혁은 전체적으로 이 소설을 일차적으로 프란츠 비버코프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읽으며, ‘구원과 자아 인식’이라는 인간 실존의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작가 되블린의 “철학적 성찰”(김 II, 422)의 시도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 역자 해설도 대도시 베를린보다는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성격과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며 베를린은 “프란츠 비버코프의 운명의 노래”의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작품 이해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운명의 굴레 속에 사로잡혀”(김 II, 418) 있는 비극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눈을 뜰 수 있는 인식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김재혁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도 프란츠가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미성년의 상태에서 성년의 상태로 접어들고 진정한 자아를 찾은 것으로, 눈을 감은 상태에서 눈을 뜬 상태로 이행한 것으로 바라본다. 이런 관점은 ‘anständig’라는 단어의 해석과도 연결된다. 이 단어는 과실치사로 감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하여 막 세상에 나온 프란츠 비버코프가 새로운 삶에 대해 하는 결심과 관련하여 소설 첫 대목부터 시작하여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Er] will anständig sein.”(7) 이 단어를 안인희는 “착실하게”, 권혁준은 “진실하게”로, 김재혁은 “바르게”로 번역한다. 유사한 계열의 단어들이지만 ‘착실하게’가 성실한 태도를, ‘진실하게’가 진리나 진실에 대한 가까움을 표현한다면, ‘바르게’는 세 단어 중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뉘앙스를 띠며, 사회규범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해설에서 번역자는 프란츠 비버코프가 겪은 세 번의 운명의 타격이 허세, 부족함, 불손함 등 그의 잘못에 기인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작품의 부제인 “프란츠 비버코프의 이야기”를 번역한 역자는 아무도 없지만, 이 부제는 김재혁의 번역본에 가장 어울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체적인 측면에서 김재혁 번역본의 특징은 원문에 충실한 문단 배치와, 가급적 변형을 가하거나 빠뜨리지 않고 원문에 가장 가깝게 번역을 하려는 번역 전략이다. 그래서 그의 번역본은 쉼표가 계속 이어지는 원문처럼 문장들을 대체로 길게 쓰며, 그런 번역 방식은 사고의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되블린 특유의 문체를 느끼게 하지만, 종종 나타나는 문어적인 표현들로 인해 안인희의 번역본과는 다른 개성을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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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품 시작 부분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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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Strafe begin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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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ihm schrie es entsetzt: Achtung, Achtung, es geht los. Seine Nasenspitze vereiste, über seine Backe schwirrte es. »Zwölf Uhr Mittagszeitung«, »B. Z.«, »Die neuste Illustrirte«, »Die Funkstunde neu« »Noch jemand zugestiegen?« Die Schupos haben jetzt blaue Uniformen. Er stieg unbeachtet wieder aus dem Wagen, war unter Menschen. Was war denn? Nichts. Haltung, ausgehungertes Schwein, reiß dich zusammen, kriegst meine Faust zu riechen. Gewimmel, welch Gewimmel. Wie sich das bewegte. Mein Brägen hat wohl kein Schmalz mehr, der ist wohl ganz ausgetrocknet. Was war das alles.(8-9)<ref>Alfred Döblin: Berlin Alexanderplatz. Die Geschichte vom Franz Biberkopf. Ungekürzte Ausgabe. München 199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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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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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서 무언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심, 조심, 시작이다'''. 코끝이 얼얼하고, 뺨 위로 모든 것이 휙 스쳐 지나갔다. <12시 정오 신문>. <최신 화보 신문>, <베를린 라디오 방송 신문>, “탈 사람 더 있소?” '''경찰관 제복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네'''. 그는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게 조용히 전차에서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차렷, 굶주린 돼지야, 정신 차려, 아님 내 주먹맛을 볼 테니. 혼잡한 군중. 왜 이리 혼잡할까. 마치 모두가 길을 나선 것 같다. 내 두뇌는 정말이지 활력이라곤 없다, 완전히 탈탈 말라버렸어. 이 모든 게 대체 뭔가.(안 I,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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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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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놀라서 소리쳤다. ‘'''조심해라. 조심해. 그게 시작되려 한다'''.’ 코끝이 얼어붙고 뺨 위에서 뭔가 윙윙거렸다. “12시 정오 신문이오.” “베를린 신문이오.” “베를린 화보 신문 최신판이오.” “베를린 라디오 방송입니다.” “여기 새로 승차하신 분 계십니까?” '''경찰관들이 이젠 녹색 제복을 입고 있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전차에서 내려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무 일도 없어. 심호흡을 하고, 이 쫄쫄 굶은 돼지 자식아, 정신 바짝 차려. 안 그러면 뺨을 한 대 갈길 테니. 사람 한번 많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담. 밀리고 밀치고 난리군. 내 골수엔 기름기가 없나 봐. 아마 다 말라 버렸겠지. 이게 다 뭐람.(김 I,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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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형벌이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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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의 내면에서 뭔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심, 조심, 이제 시작이야'''.’ 코끝이 얼얼하고 뺨위로 뭔가 휙 스쳐 지나갔다. “12시 정오 신문이오.” “베를린 신문이오.” “화보 신문 최신판이오.” “베를린 라디오 방송입니다.” “탈 사람 더 있습니까?” '''경찰관 제복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슬그머니 전차에서 내려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어. 차렷, 굶주린 돼지야, 정신 차려. 내 주먹맛을 봐야겠어? 혼잡한 군중. 왜 이렇게 복잡할까. 저 움직이는 모습들이 다 뭐야. 내 머릿속은 지방분이 하나도 없고 다 말라 버린 것 같군. 저건 다 뭐야.(권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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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서 “Achtung, Achtung, es geht los.”에 해당하는 부분을 안인희만 내적 독백으로 번역했고, 김재혁과 권혁준은 작은 따옴표 안에 옮겨 놓았다. 다른 한편 “Die Schupos haben jetzt blaue Uniformen.”라는 문장을 안인희와 김재혁은 내적 독백으로 처리한 반면, 권혁준은 화자의 진술로 번역하였다. 그런 차이들은 다음의 예문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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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krampfte sich sein Leib zusammen, ich kriege es nicht weg, wo soll ich hin? Es antwortete: '''Die Str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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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 konnte nicht zurück, er war mit der Elektrischen so weit hierher gefahren, er war aus dem Gefängnis entlassen und musste hier hinein, noch tiefer hinei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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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그는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건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군, 이제 어디로 간담? 그때 대답이 나왔다. '''이게 바로 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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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전차를 타고 여기까지 온 데다 형무소에서도 석방된 마당이니 이 도시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마땅했다, 안쪽으로 더욱 깊이'''.(김 I,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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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이 바싹 오그라들었다. 이걸 떼어낼 수가 없어,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지? 답변이 들렸다.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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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갈 순 없다, 전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감옥에서 석방되었으니 이제 도시로 들어가야 한다,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한다.(안 I,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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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의 온몸이 바싹 오그라든다. 이것은 어떻게 떨쳐 버릴 수가 없구나.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대답이 들려왔다. '''이게 바로 형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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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전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 온 데다 교도소에서도 석방되었으니 이 도시로 들어가야 한다,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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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 antwortete: Die Strafe.”에 해당하는 부분을 안인희와 권혁준은 따옴표 없는 직접화법으로 바라본 반면, 김재혁은 간접화법으로 번역한다. 반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Er konnte nicht zurück~noch tiefer hinein.”)을 김재혁과 권혁준이 화자의 진술로 바라본 반면, 안인희는 체험화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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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역가 모두 베를린 입말이나 이디시 등을 특별히 살리지는 않았다. 이디시의 예는 다음과 같다. 1권에 나오는 유대인과의 대화에는 ‘meschugge’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이는 ‘미친, 정신 나간’을 뜻하는 이디시어이다. “Wenn jetzt einer hereinkommt, möchte er uns beide für meschugge halten [...].”(16) 안인희는 이 문장을 “지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는 우리 둘이 미쳤다고 생각할 거요.”(안 I, 29)라고 번역했고, 김재혁은 “지금이라도 누가 들어와서 우리 꼴을 보면 미친 사람 취급할지도 몰라요.”(김 I, 27), 권혁준은 “지금 누군가 우리 꼴을 본다면 아마 미쳤다고 생각할 거요.”(권 27)라고 번역하였다. 즉 우리말 번역본들에서는 이디시어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베를린 방언은 이 소설에서 수없이 많이 쓰이고 심지어 9권에 등장하는 ‘죽음’도 베를린 방언으로 이야기한다. 하나의 예를 통해 세 번역본에 나타나는 베를린 방언 번역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Mir kann keener.”(36) 이것을 안인희는 “아무도 날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김재혁은 “아무도 나를 어쩔 수 없어요.”, 권혁준은 “누구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요!”라고 번역하여 사실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 역본 중 안인희 역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나 내적 독백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가장 입말의 느낌을 살리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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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권혁준 역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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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독문학자인 권혁준의 역본도 다른 역자들처럼 적지 않은 분량의 작품해설을 번역본 끝부분에 싣고 있는데, “대도시에서의 수난의 삶”이라는 제목의 이 해설은 되블린의 생애나 문체, 몽타주 기법 등의 서술기법, 베를린 방언들에 대한 부분들 등 다른 두 역본과 공통된 요소들을 가지면서도 또 다른 작품 해석과 번역 전략을 보여 준다. 이 역자 해설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대도시 소설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종교적인 수난극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는 대도시 베를린을 주인공으로 바라보는 안인희의 관점과 유사하며,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수난과 고통 역시 “실존적 소외나 불안”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상태’”(권 737)로 바라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수난극으로 이 소설을 보면 프란츠 비버코프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 역시 일종의 “표현주의적 비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 어느 공장의 보조 수위로 다시 베를린에 나타난 프란츠 비버코프를 권혁준의 역본은 앞의 두 역본과 달리 활력을 잃어버린 일종의 “기계인형”(권 742) 같은 존재로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문단 나누기에 있어 권혁준은 김재혁과 안인희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안인희처럼 자유롭게 행 바꾸기를 하여 가독성을 높이지는 않지만, 김재혁처럼 원문 그대로의 문단 나누기를 반드시 지키지는 않으며, 한 문단이 지나치게 길다고 여겨지는 부분에서는 종종 문단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두 권으로 나뉜 다른 두 역본에서와 달리 권혁준의 역본은 한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 번역본 중 가장 많은 주석을 미주로 달아 가독성과 학술적인 성격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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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인용된 소설의 중요한 한 장면에서는 권혁준 역본의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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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tiefem Beben empfängt er das Bild des jämmerlichen Lüders. Der böse Reinhold latscht auf ihn zu. Mit tiefem Beben empfängt er Idas Worte, Mietzes Gesicht, sie ist es, nun ist alles erfüllt. '''Franz weint und weint, ich bin schuldig, ich bin kein Mensch, ich bin ein Vieh, ein Untier'''.(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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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떨림으로 그는 비참한 뤼더스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사악한 라인홀트가 발을 질질 끌며 그에게로 다가온다. 깊은 떨림으로 이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미체의 얼굴을 받아들인다. 그녀구나. 이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프란츠는 울고 또 운다. 내게 죄가 있다. 난 인간도 아니다. 난 짐승이요, 괴물이다'''.(안 II,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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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초췌한 뤼더스의 상을 맞이한다. 사악한 라인홀트 녀석이 철벅대는 걸음걸이로 그를 향해 다가온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이다의 말[言]과 미체의 얼굴을 맞이한다. 그녀가 왔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프란츠는 울고 또 운다, 다 내 잘못이야, 난 인간이 아니야, 나는 짐승만도 못한 몸이라고'''.(김 II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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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초췌한 뤼더스의 모습을 맞이한다. 사악한 라인홀트 녀석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그에게 다가온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이다의 목소리와 미체의 얼굴을 맞이한다. 그녀가 왔다. 이제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프란츠는 울고 또 운다. 다 내 잘못이야. 나는 인간이 아니야. 나는 짐승이고 괴물이야'''.(권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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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가 자기 인식에 이르는, 일종의 회심의 순간을 표현하는 장면을 세 번역본들은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게 옮기고 있다. 안인희와 권혁준의 역본은 하나의 긴 문장을 끊어 네 개의 짧은 문장으로 나눈 반면, 김재혁은 하나의 긴 문장으로 번역한다.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는 프란츠의 내적 독백 부분을 앞의 두 번역자와 달리 김재혁은 간접화법으로 번역한다. 안인희와 권혁준은 이 부분을 여러 면에서 유사하게 번역하였지만, 안인희는 내적독백 부분을 ‘-다’로 한 반면, 권혁준은 ‘-야’로 번역함으로써 다시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드러낸다. 안인희의 번역 부분에서 내적 독백의 직접성은 ‘-다’라는 종결어미로 다시 완화되는 반면, 권혁준의 번역에서는 프란츠가 주관적이고 내면적으로 하는 생각이 직접적으로 재현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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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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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펴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번역본들은 바로 앞에 나온 번역본과 거의 30년의 간격을 두고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거의 동시에 나왔으며,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적 지식을 공동의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 가지 서로 다른 강조점과 초점을 가진 개성적인 번역들이 되었다. 젠더의 측면과 베를린 방언, 사회어들, 이디시어 등의 측면에서 또 다른 개성을 가지며,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또 새로워지는 다양한 해석들을 바탕으로 나타날 미래의 번역본들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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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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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2010):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2.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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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혁(2011):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2.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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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준(2012):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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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조향</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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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0일 (월) 02:18 판

알프레트 되블린 (Alfred Döblin, 1878-1957)의 소설


작품소개

알프레트 되블린의 대표작으로, 1929년에 발표되었다. “프란츠 비버코프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제목과 부제에서 나타나듯이 이 소설은 대도시 베를린과 반영웅인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의 삶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시멘트 공장 노동자이자 가구 운송 인부였던 프란츠는 소설 도입부에서 4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베를린 테겔 형무소에서 막 나와 진실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외부에서 세 번의 큰 충격이 가해져 그의 시도는 좌절된다. 그것은 같이 행상 일을 하던 동료 뤼더스의 배신, 범죄 집단에서 우연히 알게 된 라인홀트와 함께 일하다가 차 밖으로 떠밀려 오른팔이 절단된 사건, 라인홀트가 프란츠의 애인 미체를 살해한 일이다. 게다가 그는 미체의 살인 혐의까지 받는다. 몸도 마음도 망가져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그는 ‘죽음’의 방문을 받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과오를 깨닫는 체험을 한다. 소설은 다시 태어난 프란츠가 수위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내적 독백 등을 통한 다양한 서술기법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대도시에서의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고전적 현대’로 불리는 20세기 전반 유럽 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작품에서 현대적인 대도시 베를린은 “창녀 바빌론”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타락과 파괴의 장소이자 변신과 각성이 일어나는 새로운 삶의 장소이기도 하다. 대도시 소설이라는 점에서나 서술기법 면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도스 파소스의 <맨해튼 트랜스퍼> 등과 비교된다. 우리말로는 1979년 장남준이 처음으로 옮겼고(삼성출판사), 같은 해 지명렬의 번역이 잇따랐다(을유문화사).

초판 정보

Döblin, Alfred(1929): Berlin Alexanderplatz. Die Geschichte vom Franz Biberkopf. Berlin: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베를린 알렉산더廣場 베를린 알렉산더廣場 三省版世界文學全集 37 되블린 張南駿 1979 三省出版社 13-472 완역 완역
2 베를린 알렉산더廣場 베를린 알렉산더廣場 世界文學全集 47 되블린 池明烈 1979 乙酉文化社 19-463 편역 완역
3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三省版)世界現代文學全集 5 알프레트 되블린 張南駿 1982 三省出版社 13-514 완역 완역
4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主友 세계문학 72 알프레드 되블린 조견 1983 學園社 17-448 완역 완역
5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세계문학의 숲 001 알프레트 되블린 안인희 2010 시공사 9-396 편역 완역
6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2 세계문학의 숲 002 알프레트 되블린 안인희 2010 시공사 9-393 편역 완역
7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세계문학전집 269 알프레트 되블린 김재혁 2011 민음사 7-343 편역 완역
8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2 세계문학전집 270 알프레트 되블린 김재혁 2011 민음사 9-408 편역 완역
9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권혁준 2012 을유문화사 9-711 완역 완역


1. 번역 현황 및 개관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1929)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대표작으로,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내적 독백 등 다양한 서술기법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대도시에서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며, ‘고전적 현대’로 불리는 20세기 전반 유럽 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대도시 소설이라는 점에서나 서술기법 면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도스 파소스의 <맨해튼 트랜스퍼> 등과 흔히 비교된다.

되블린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71년 송동준이 <한송이 민들레꽃의 살해>라는 제목으로 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을 번역하면서였다. 되블린 작품들의 한국어 번역은 <한송이 민들레꽃의 살해>와 <유물론에 관한 동화>, <힌첼과 거친 렌헨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대표작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말로 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첫 번역은 장남준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삼성사, 1979)이고, 같은 해 지명렬의 번역이 잇따랐다(<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문화사). 1982년에 조견의 번역(<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 나온 후 약 30여 년 동안 새로운 번역이 없다가 2010년 안인희의 번역을 시작으로 2011년 김재혁, 2012년 권혁준의 번역이 나왔다. 본문에서는 이 번역본들 가운데 안인희, 김재혁, 권혁준의 번역본을 비교·분석하려고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안인희 역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2010)

안인희는 독일 문학 작품들뿐 아니라 철학서, 역사서, 실용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책들을 번역하였고 여러 차례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한 전문번역가이다. 안인희, 김재혁, 권혁준은 모두 상당한 분량의 역자 해설을 번역본에 실었는데, 이 역자 해설들은 공통적으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들, 즉 이 소설이 베를린 자체를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대도시 소설이라는 점, 몽타주 테크닉, 내적 독백 등의 서술기법 및 베를린 방언, 이디시, 다양한 직업군이나 집단들의 사회어들(Soziolekte) 등의 혼합과 이로 인한 번역의 어려움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역자 해설들은 조금씩 다른 강조점과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안인희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실린 역자 해설은 “경쾌한 언어로 종말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 제목이 또한 안인희 역본의 특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인희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으로 비스마르크 시대의 독일 통일부터 시작하는 독일 근현대사에 대해 요약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 소설이 묵시록적 세계로서의 1920년대 말 대도시 베를린을 그려내고 있으며, 대공황 직전이기도 한 이 “공화국의 종말”을 되블린이 이 소설에서 “종말을 경쾌한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안 II, 402)고 보면서 소설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강조한다. 또한 이 작품의 대도시 소설로서의 성격, 대도시 베를린 자체가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안인희 역에서는 원문에 있는 긴 문단들을 원문과 다르게 짤막짤막하게 나누어 읽기 쉽게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체로 문장들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한 문단이 매우 긴 되블린 특유의 문체적 특성은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또한 가끔 부분적으로는 단어들을 생략하거나 변형하기도 하고 구어적인 표현들을 살림으로써 전체적으로 가독성이 높으며 경쾌한 문장들이 만들어진다. 세 역본 모두 베를린 방언이나 이디시 등을 옮기는 데 있어 특별한 장치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인희의 번역은 위와 같은 특징으로 인해 원문에 나타나는 많은 대화들의 구어적 특성들에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세 번역본에 모두 각주(안인희 역, 김재혁 역) 또는 미주(권혁준 역)가 달려 있는데, 안인희 역본에 각주가 최소화되어 있는 것도 가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젠더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세 번역본에 큰 차이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예컨대 프란츠 비버코프가 자신이 죽인 전 애인 이다의 여동생 미나를 출소 후에 찾아가 강간하는 장면의 번역에서 세 역본에는 다 젠더 비대칭성이 나타나지만, 안인희 역에서만 미나가 처음에는 존댓말을 하다가 나중에 프란츠와 함께 반말을 하는 것으로 바뀐다.

다음의 인용문은 애인 미체가 살해된 충격에다가 그녀를 살인한 혐의까지 받은 프란츠가 건강이 나빠지고 의식이 혼미해져 강제로 입원된 부흐 정신병원의 감시병동에서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다.

Die Mäuse laden Franz ein, mit ihnen zu essen und nicht traurig zu sein. Was ihn betrübt mache. Da stellte sich heraus, daß es für ihn nicht leicht ist, zu sprechen. Sie drängen ihn, er möchte doch ein ganzes Ende machen. Der Mensch ist ein häßliches Tier, der Feind aller Feinde, das widrigste  Geschöpf, das es auf der Erde gibt, noch schlimmer als die Katzen.
Er sagt: Es ist nicht gut, in einem Menschenleib zu leben, ich will lieber kauern unter der Erde, über die Felder laufen und fressen, was ich finde, und der Wind weht, und der Regen fällt, und die Kälte kommt und vergeht, das ist besser als in einem Menschenleib leben.
Die Mäuse laufen, Franz ist eine Feldmaus und gräbt mit.(386)
쥐들은 프란츠더러 슬퍼하지 말고 자기들과 함께 식사하자고 초대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우울하게 하는지. 그러다가 그가 말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그를 조르고 그는 완전히 끝장을 내고 싶어 한다. 인간은 못생긴 짐승이다, 모든 적들의 적이야,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역겨운 짐승이다, 심지어 고양이보다 더 나빠.
그가 말한다. 인간의 몸 안에서 사는 건 좋지가 않아, 나는 차라리 땅 밑에 웅크리고 있을 거야, 들판 위로 돌아다니다가 그냥 보이는 걸 먹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가 왔다가 가고, 그게 인간의 몸 속에 사는 것보다 더 낫지.
쥐들이 돌아다닌다. 프란츠는 들쥐가 되어 함께 땅을 판다.(안 II, 348-349).
쥐들은 프란츠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다. 뭣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그때 말을 한다는 것이 그에겐 쉬운 일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들은 그에게 왜 완전히 끝장을 내지 않느냐고 보챈다. 인간은 정나미가 떨어지는 짐승이다, 모든 적들 중의 적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짐승이다, 고양이보다도 더 고약하다.

그는 말한다. 인간의 몸뚱어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차라리 땅 밑에 웅크리고 있거나 들판을 달리다가 눈에 띄는 것을 먹고 싶다, 그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가 왔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인간의 몸뚱어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낫다. 쥐들이 달린다, 프란츠는 들쥐다, 그들과 함께 땅을 판다.(김 II, 364-5)

쥐들은 프란츠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말한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그때 말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들은 그에게 왜 완전히 끝장을 내지 않느냐고 보챈다. 인간은 추악한 동물이다, 모든 적들 중의 적, 이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존재, 고양이보다 더 고약하다. 

그는 말한다. 인간의 몸뚱아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차라리 땅속에 웅크리고 있거나 들판을 뛰어다니며 내가 찾은 것을 먹고 싶다, 그곳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가 왔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인간의 몸뚱아리를 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낫다.

쥐들이 돌아다니고, 이제 프란츠도 한 마리 들쥐가 되어 함께 땅을 판다.(권 671)

위의 인용문에서 안인희의 번역은 권혁준과 김재혁의 번역에 비해 동물들의 내적 독백을 그와 같은 느낌을 살려 번역하였다. 부흐 정신병원 장면에서 프란츠 비버코프의 내적 독백 장면에서도 유사하다. 이에 비해 다른 두 역본에서는 이 두 부분을 3인칭 화자의 진술같이 ‘-다’체로 다소 거리를 둔 표현들로 번역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역시 부흐 정신병원의 감시병동에 갇힌 프란츠 비버코프의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해체되고 상태가 나빠지면서 ‘죽음’이 등장하기 직전의 장면이다.

Wumm Schlag, wumm Schlag, wumm Sturmbock, wumm Torschlag. Wuchten und Rammen, Krachen und Schwingen. Wer ist denn dieser verlogene Kerl, Franz Biberkopf, ein Wiedehopf, ein Gliedertropf, der moechte warten, bis mal Schnee faellt, dann, meint er, sind wir weg und kommen nicht wieder. [...] Dem werden wir aber die Suppe versalzen, wir haben Knochen aus Eisen, Krach Tor pass auf, knack Tor, Loch im Tor, Riß im Tor, paß auf, kein Tor, leeres Loch, Höhle, wumm wumm, paß auf, wumm wumm.(381) 
휘잉 탁, 휘잉 탁, 휘잉 꽈당, 휘잉, 탁, 힘차게 쿵쿵, 탁탁, 휘잉 – 이 거짓말쟁이 프란츠 비버코프, 비데호프, 멍청이, 그는 눈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거지, 그런 다음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 하지만 우린 그의 일을 망칠 거야, 우린 무쇠 뼈를 가졌으니, 쿵쾅 잘 봐라, 문을 부숴, 문에 구멍, 문에 틈, 자 봐라, 문이 없다, 텅 빈 구멍, 동굴, 휘잉, 휭, 잘 봐라, 휭, 휘이.(안 II 339-340) 
윙, 쾅, 윙, 쾅, 윙, 성문 부수기, 윙, 성문 박살내기. 휘몰아치고 달리며 우지끈대며 흔들어 대기. 이 거짓말쟁이 프란츠 비버코프, 새대가리 비데호프, 멍청한 병신 자식,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눈이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셈이군, 그러면서 그 때쯤이면 우리가 떠나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 하지만 우리는 그의 계획을 망쳐 놓을 거야, 우리는 무쇠 뼈를 가졌어, 쿵쾅, 잘 보라고, 문을 부수는 거야, 문에 구멍을 내는 거야, 문에 틈을 내는 거야, 자 보라고 문이 없어졌어, 다만 휑한 구멍만 남았어, 동굴에 불과해, 윙윙, 자 보라고, 윙윙.(권 663) 
윙, 쾅, 윙, 쾅, 윙, 성벽을 부숴라, 윙, 성문을 부숴라. 쿵, 콰광, 우지끈, 덜컹덜컹. 이 거짓말쟁이 바보 자식, 프란츠 비버코프는 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비데코프 새대가리 같은 자식, 팔 병신 새끼, 눈이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셈이군, 이 친구는 우리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안 올 걸로 생각하나 보군.[...] 녀석을 골탕 먹여 줘야지, 우리의 뼈는 무쇠 같으니, 이걸로 쾅, 문을 부수자, 우지끈 문을 부수고 문에 구멍을 내고, 문을 잡아 뜯자, 보라, 문이 없다, 텅 빈 구멍만 남았다, 휑하니 뚫렸다 윙윙, 보라, 윙윙.(김 II 355)

세 역본 모두 원문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살리고 있는데, 이 가운데 안인희의 역본은 원문의 단어나 구문을 꼭 그대로 번역하지 않으면서 전체적으로 우리말의 생동감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다.


2) 김재혁 역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2011)

독문학자인 김재혁 번역본의 끝부분에 실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부르는 운명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해설”은 역자가 되블린과 인터뷰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베를린 방언 등과 같이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해 되블린과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역자는 베를린 방언을 우리나라 특정 지역 방언으로 옮길 경우 원작의 의미가 많이 함몰되고 우리나라 특정 지역에 대한 연상이 독자에게 전달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인공들의 교양이나 지위 등에 따라 우리말의 수위를 조절했다고 이야기한다(김재혁 II, 415-416 참조). 안인희가 소설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과 맥락을 강조한 데 비해, 김재혁은 전체적으로 이 소설을 일차적으로 프란츠 비버코프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읽으며, ‘구원과 자아 인식’이라는 인간 실존의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작가 되블린의 “철학적 성찰”(김 II, 422)의 시도로 바라본다. 이에 따라 역자 해설도 대도시 베를린보다는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성격과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며 베를린은 “프란츠 비버코프의 운명의 노래”의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작품 이해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운명의 굴레 속에 사로잡혀”(김 II, 418) 있는 비극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눈을 뜰 수 있는 인식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김재혁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도 프란츠가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미성년의 상태에서 성년의 상태로 접어들고 진정한 자아를 찾은 것으로, 눈을 감은 상태에서 눈을 뜬 상태로 이행한 것으로 바라본다. 이런 관점은 ‘anständig’라는 단어의 해석과도 연결된다. 이 단어는 과실치사로 감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하여 막 세상에 나온 프란츠 비버코프가 새로운 삶에 대해 하는 결심과 관련하여 소설 첫 대목부터 시작하여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Er] will anständig sein.”(7) 이 단어를 안인희는 “착실하게”, 권혁준은 “진실하게”로, 김재혁은 “바르게”로 번역한다. 유사한 계열의 단어들이지만 ‘착실하게’가 성실한 태도를, ‘진실하게’가 진리나 진실에 대한 가까움을 표현한다면, ‘바르게’는 세 단어 중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뉘앙스를 띠며, 사회규범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해설에서 번역자는 프란츠 비버코프가 겪은 세 번의 운명의 타격이 허세, 부족함, 불손함 등 그의 잘못에 기인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작품의 부제인 “프란츠 비버코프의 이야기”를 번역한 역자는 아무도 없지만, 이 부제는 김재혁의 번역본에 가장 어울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체적인 측면에서 김재혁 번역본의 특징은 원문에 충실한 문단 배치와, 가급적 변형을 가하거나 빠뜨리지 않고 원문에 가장 가깝게 번역을 하려는 번역 전략이다. 그래서 그의 번역본은 쉼표가 계속 이어지는 원문처럼 문장들을 대체로 길게 쓰며, 그런 번역 방식은 사고의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되블린 특유의 문체를 느끼게 하지만, 종종 나타나는 문어적인 표현들로 인해 안인희의 번역본과는 다른 개성을 띄게 된다.

유명한 작품 시작 부분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Die Strafe beginnt.[...]
In ihm schrie es entsetzt: Achtung, Achtung, es geht los. Seine Nasenspitze vereiste, über seine Backe schwirrte es. »Zwölf Uhr Mittagszeitung«, »B. Z.«, »Die neuste Illustrirte«, »Die Funkstunde neu« »Noch jemand zugestiegen?« Die Schupos haben jetzt blaue Uniformen. Er stieg unbeachtet wieder aus dem Wagen, war unter Menschen. Was war denn? Nichts. Haltung, ausgehungertes Schwein, reiß dich zusammen, kriegst meine Faust zu riechen. Gewimmel, welch Gewimmel. Wie sich das bewegte. Mein Brägen hat wohl kein Schmalz mehr, der ist wohl ganz ausgetrocknet. Was war das alles.(8-9)[1]
바야흐로 형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심, 조심, 시작이다. 코끝이 얼얼하고, 뺨 위로 모든 것이 휙 스쳐 지나갔다. <12시 정오 신문>. <최신 화보 신문>, <베를린 라디오 방송 신문>, “탈 사람 더 있소?” 경찰관 제복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네. 그는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게 조용히 전차에서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차렷, 굶주린 돼지야, 정신 차려, 아님 내 주먹맛을 볼 테니. 혼잡한 군중. 왜 이리 혼잡할까. 마치 모두가 길을 나선 것 같다. 내 두뇌는 정말이지 활력이라곤 없다, 완전히 탈탈 말라버렸어. 이 모든 게 대체 뭔가.(안 I, 14)
벌이 시작된다.[...]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놀라서 소리쳤다. ‘조심해라. 조심해. 그게 시작되려 한다.’ 코끝이 얼어붙고 뺨 위에서 뭔가 윙윙거렸다. “12시 정오 신문이오.” “베를린 신문이오.” “베를린 화보 신문 최신판이오.” “베를린 라디오 방송입니다.” “여기 새로 승차하신 분 계십니까?” 경찰관들이 이젠 녹색 제복을 입고 있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전차에서 내려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무 일도 없어. 심호흡을 하고, 이 쫄쫄 굶은 돼지 자식아, 정신 바짝 차려. 안 그러면 뺨을 한 대 갈길 테니. 사람 한번 많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담. 밀리고 밀치고 난리군. 내 골수엔 기름기가 없나 봐. 아마 다 말라 버렸겠지. 이게 다 뭐람.(김 I, 12-13)
바야흐로 형벌이 시작된다. [...]
그 때 그의 내면에서 뭔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심, 조심, 이제 시작이야.’ 코끝이 얼얼하고 뺨위로 뭔가 휙 스쳐 지나갔다. “12시 정오 신문이오.” “베를린 신문이오.” “화보 신문 최신판이오.” “베를린 라디오 방송입니다.” “탈 사람 더 있습니까?” 경찰관 제복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슬그머니 전차에서 내려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어. 차렷, 굶주린 돼지야, 정신 차려. 내 주먹맛을 봐야겠어? 혼잡한 군중. 왜 이렇게 복잡할까. 저 움직이는 모습들이 다 뭐야. 내 머릿속은 지방분이 하나도 없고 다 말라 버린 것 같군. 저건 다 뭐야.(권 13-14) 

원문에서 “Achtung, Achtung, es geht los.”에 해당하는 부분을 안인희만 내적 독백으로 번역했고, 김재혁과 권혁준은 작은 따옴표 안에 옮겨 놓았다. 다른 한편 “Die Schupos haben jetzt blaue Uniformen.”라는 문장을 안인희와 김재혁은 내적 독백으로 처리한 반면, 권혁준은 화자의 진술로 번역하였다. 그런 차이들은 다음의 예문에서도 발견된다.

Oh, krampfte sich sein Leib zusammen, ich kriege es nicht weg, wo soll ich hin? Es antwortete: Die Strafe.
Er konnte nicht zurück, er war mit der Elektrischen so weit hierher gefahren, er war aus dem Gefängnis entlassen und musste hier hinein, noch tiefer hinein.(9) 
아니, 이런, 그는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건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군, 이제 어디로 간담? 그때 대답이 나왔다. 이게 바로 벌이라고.
그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전차를 타고 여기까지 온 데다 형무소에서도 석방된 마당이니 이 도시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마땅했다, 안쪽으로 더욱 깊이.(김 I, 14)
그는 몸이 바싹 오그라들었다. 이걸 떼어낼 수가 없어,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지? 답변이 들렸다. 형벌이다.
되돌아갈 순 없다, 전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감옥에서 석방되었으니 이제 도시로 들어가야 한다,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한다.(안 I, 15)
아, 그의 온몸이 바싹 오그라든다. 이것은 어떻게 떨쳐 버릴 수가 없구나.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대답이 들려왔다. 이게 바로 형벌이야.
그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전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 온 데다 교도소에서도 석방되었으니 이 도시로 들어가야 한다,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권 15)

“Es antwortete: Die Strafe.”에 해당하는 부분을 안인희와 권혁준은 따옴표 없는 직접화법으로 바라본 반면, 김재혁은 간접화법으로 번역한다. 반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Er konnte nicht zurück~noch tiefer hinein.”)을 김재혁과 권혁준이 화자의 진술로 바라본 반면, 안인희는 체험화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세 번역가 모두 베를린 입말이나 이디시 등을 특별히 살리지는 않았다. 이디시의 예는 다음과 같다. 1권에 나오는 유대인과의 대화에는 ‘meschugge’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이는 ‘미친, 정신 나간’을 뜻하는 이디시어이다. “Wenn jetzt einer hereinkommt, möchte er uns beide für meschugge halten [...].”(16) 안인희는 이 문장을 “지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는 우리 둘이 미쳤다고 생각할 거요.”(안 I, 29)라고 번역했고, 김재혁은 “지금이라도 누가 들어와서 우리 꼴을 보면 미친 사람 취급할지도 몰라요.”(김 I, 27), 권혁준은 “지금 누군가 우리 꼴을 본다면 아마 미쳤다고 생각할 거요.”(권 27)라고 번역하였다. 즉 우리말 번역본들에서는 이디시어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베를린 방언은 이 소설에서 수없이 많이 쓰이고 심지어 9권에 등장하는 ‘죽음’도 베를린 방언으로 이야기한다. 하나의 예를 통해 세 번역본에 나타나는 베를린 방언 번역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Mir kann keener.”(36) 이것을 안인희는 “아무도 날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김재혁은 “아무도 나를 어쩔 수 없어요.”, 권혁준은 “누구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요!”라고 번역하여 사실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 역본 중 안인희 역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나 내적 독백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가장 입말의 느낌을 살리려고 하였다.


3) 권혁준 역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2012)

역시 독문학자인 권혁준의 역본도 다른 역자들처럼 적지 않은 분량의 작품해설을 번역본 끝부분에 싣고 있는데, “대도시에서의 수난의 삶”이라는 제목의 이 해설은 되블린의 생애나 문체, 몽타주 기법 등의 서술기법, 베를린 방언들에 대한 부분들 등 다른 두 역본과 공통된 요소들을 가지면서도 또 다른 작품 해석과 번역 전략을 보여 준다. 이 역자 해설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대도시 소설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종교적인 수난극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는 대도시 베를린을 주인공으로 바라보는 안인희의 관점과 유사하며,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수난과 고통 역시 “실존적 소외나 불안”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상태’”(권 737)로 바라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수난극으로 이 소설을 보면 프란츠 비버코프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 역시 일종의 “표현주의적 비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 어느 공장의 보조 수위로 다시 베를린에 나타난 프란츠 비버코프를 권혁준의 역본은 앞의 두 역본과 달리 활력을 잃어버린 일종의 “기계인형”(권 742) 같은 존재로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문단 나누기에 있어 권혁준은 김재혁과 안인희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안인희처럼 자유롭게 행 바꾸기를 하여 가독성을 높이지는 않지만, 김재혁처럼 원문 그대로의 문단 나누기를 반드시 지키지는 않으며, 한 문단이 지나치게 길다고 여겨지는 부분에서는 종종 문단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두 권으로 나뉜 다른 두 역본에서와 달리 권혁준의 역본은 한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 번역본 중 가장 많은 주석을 미주로 달아 가독성과 학술적인 성격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루려고 한다.

다음에 인용된 소설의 중요한 한 장면에서는 권혁준 역본의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Mit tiefem Beben empfängt er das Bild des jämmerlichen Lüders. Der böse Reinhold latscht auf ihn zu. Mit tiefem Beben empfängt er Idas Worte, Mietzes Gesicht, sie ist es, nun ist alles erfüllt. Franz weint und weint, ich bin schuldig, ich bin kein Mensch, ich bin ein Vieh, ein Untier.(399)
깊은 떨림으로 그는 비참한 뤼더스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사악한 라인홀트가 발을 질질 끌며 그에게로 다가온다. 깊은 떨림으로 이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미체의 얼굴을 받아들인다. 그녀구나. 이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프란츠는 울고 또 운다. 내게 죄가 있다. 난 인간도 아니다. 난 짐승이요, 괴물이다.(안 II, 371)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초췌한 뤼더스의 상을 맞이한다. 사악한 라인홀트 녀석이 철벅대는 걸음걸이로 그를 향해 다가온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이다의 말[言]과 미체의 얼굴을 맞이한다. 그녀가 왔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프란츠는 울고 또 운다, 다 내 잘못이야, 난 인간이 아니야, 나는 짐승만도 못한 몸이라고.(김 II 387)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초췌한 뤼더스의 모습을 맞이한다. 사악한 라인홀트 녀석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그에게 다가온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이다의 목소리와 미체의 얼굴을 맞이한다. 그녀가 왔다. 이제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프란츠는 울고 또 운다. 다 내 잘못이야. 나는 인간이 아니야. 나는 짐승이고 괴물이야.(권 693)

프란츠가 자기 인식에 이르는, 일종의 회심의 순간을 표현하는 장면을 세 번역본들은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게 옮기고 있다. 안인희와 권혁준의 역본은 하나의 긴 문장을 끊어 네 개의 짧은 문장으로 나눈 반면, 김재혁은 하나의 긴 문장으로 번역한다.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는 프란츠의 내적 독백 부분을 앞의 두 번역자와 달리 김재혁은 간접화법으로 번역한다. 안인희와 권혁준은 이 부분을 여러 면에서 유사하게 번역하였지만, 안인희는 내적독백 부분을 ‘-다’로 한 반면, 권혁준은 ‘-야’로 번역함으로써 다시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드러낸다. 안인희의 번역 부분에서 내적 독백의 직접성은 ‘-다’라는 종결어미로 다시 완화되는 반면, 권혁준의 번역에서는 프란츠가 주관적이고 내면적으로 하는 생각이 직접적으로 재현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3. 평가와 전망

위에서 살펴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번역본들은 바로 앞에 나온 번역본과 거의 30년의 간격을 두고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거의 동시에 나왔으며,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적 지식을 공동의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 가지 서로 다른 강조점과 초점을 가진 개성적인 번역들이 되었다. 젠더의 측면과 베를린 방언, 사회어들, 이디시어 등의 측면에서 또 다른 개성을 가지며,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또 새로워지는 다양한 해석들을 바탕으로 나타날 미래의 번역본들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이 글을 마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안인희(2010):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2. 시공사. 김재혁(2011):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2. 민음사. 권혁준(2012):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문화사.

조향


바깥 링크

  1. Alfred Döblin: Berlin Alexanderplatz. Die Geschichte vom Franz Biberkopf. Ungekürzte Ausgabe. München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