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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0일 (월) 01:23 판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 , 1921-1947)의 희곡
작품소개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1946년 늦가을, 단 며칠 만에 이 작품을 쓰고 지인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유일한 희곡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그린다. 러시아 전선에서 부상당한 채 돌아온 귀환병 베크만은 자기 집, 애인의 집, 연대장의 집, 극장, 부모님의 집에서 차례로 쫓겨난다. 아내는 딴 사내와 있고 얼굴도 보지 못한 아기가 죽은 걸 알게 된 그는 엘베강에 투신했으나 강물에서도 밀려난다. 한 젊은 여인을 만나지만 부상병으로 귀환한 남편에게 쫓기고, 연대장을 찾아가서 자신을 짓누르는 악몽의 책임을 묻지만 실패하고, 카바레극장에서 배우로 시작하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나치 추종자였던 부모는 자살했고 부모의 집은 남의 손에 넘어간 상태다. 베크만은 자기 부하 열한 명이 죽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죄다 과거를 잊고 산다. 특히 ‘타자’로 불리는 그의 또 다른 자아가 그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문하면서 그의 자살 시도를 막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베크만은 신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살란 말이야!”라는 질문에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부제는 “공연하려는 극장도 없고 보려는 관객도 없는 작품”이지만 보르헤르트의 이름을 단번에 알리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패망한 독일의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 희곡에서 독일의 죄와 책임을 묻지 않고 너무 쉽게 실존적 고통으로 넘어감으로써 독일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판도 있다. 국내에서는 강두식이 1971년 최초로 번역했다(동아출판사).
초판 정보
Borchert, Wolfgang(1947): Draußen vor der Tür. Ein Stück, das kein Theater spielen und kein Publikum sehen will. Hamburg: Rowohlt Verlag.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문밖에서 | 20世紀戱曲選 | 世界文學大系; 10 | 볼프강 보르헤르트 | 강두식 | 1971 | 世界文學社 | 371-434 | 편역 | 완역 | ||
門밖에서 | 門밖에서 | 볼프강 보르헤르트 | 채희문 | 1974 | 文藝出版社 | 3-129 | 완역 | 완역 | |||
3 | 門밖에서 | 門밖에서 | 文藝文庫 58 | W. 보르헤르트 | 채희문 | 1977 | 文藝出版社 | 3-129 | 완역 | 완역 | |
4 | 門밖에서 | 門밖에서 | 볼프강 보르헤르트 | 채희문 | 1981 | 文藝 | 3-116 | 편역 | 완역 | ||
5 | 門밖에서 | 門밖에서 | 볼프강 보르헤르트 | 채희문 | 1981 | 文藝 | - | 편역 | 완역 | ||
6 | 저 門 밖에서 | 20世紀戱曲選 | 世界文學全集 36 | W. 보르헤르트 | 金周園 | 1982 | 知星出版社 | 327-414 | 편역 | 완역 | |
7 | 門 밖에서 | 門 밖에서 | 文藝敎養選書 57 | 볼프강 보르헤르트 | 채희문 | 1987 | 文藝出版社 | 4-166 | 편역 | 완역 | |
8 | 門 밖에서 | 가로등과 밤과 별 | 작가정신 세계문학 1 | 볼프강 보르헤르트 | 채희문 | 1990 | 작가정신 | 229-304 | 편역 | 완역 | |
문 밖에서 | 문 밖에서 | 볼프강 보르헤르트 전집, 시, 희곡 2 | 볼프강 보르헤르트 | 김길웅 | 1996 | 강 | 17-126 | 편역 | 완역 | ||
문밖에서 | 그리고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 볼프강 보르헤르트 | 박병덕 | 2018 | 현대문학 | 163-280 | 완역 | 완역 | 방송극 | ||
문밖에서―공연하려는 극장도, 보려는 관객도 없는 작품 |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 | 대산세계문학총서 157 | 볼프강 보르헤르트 | 박규호 | 2020 | 문학과지성사 | 134-227 | 완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밖에서>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를 하루아침에 유명하게 만든 희곡이다. 1947년 2월 13일 방송극으로 라디오 전파를 타자마자 독일의 유수 출판사인 로볼트 출판사 측이 병상에 있던 작가를 찾아와 계약을 맺었고, 그해 11월 21일에는(작가는 그전날 병사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이 희곡은 독일문학사에 “폐허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알려진 바로는 이 희곡에 세 개의 버전, 즉 최초 버전, 라디오 방송극 버전, 최초 버전을 바탕으로 한 연극공연 버전이 있다. 로볼트 출판사는 작가의 사후인 1949년에 작가 생전에 출판된 작품 및 작가가 남긴 유고를 함께 묶어 <전집>으로 출판했는데, 연극공연 버전을 <문밖에서. 어떤 극장도 공연하지 않고 어떤 관객도 보려고 하지 않는 희곡>으로 수록하였다. 2007년에는 <전집>의 개정증보판을 출판했는데 <문밖에서>의 경우는 1949년의 판본과 달라진 바가 없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여섯 명의 번역자에 의해서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출판 횟수는 총 10차례에 이른다. 강두식의 번역이 그 시작으로 1971년 세계문학사에서 발행한 <20세기 희곡선>(세계문학대계 10권)에 <저 門 밖에서>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여기서는 작품 정보, 작가 정보, 역자 정보가 없으며 저본도 제시되지 않았다. 1982년에는 번역자 김주원의 이름으로 지성출판사에서 출판한 <20세기 희곡선>에 동명의 번역이 실렸는데, 역자 정보가 없고 강두식의 번역과 근소한 차이만 있을 뿐이어서 강두식의 번역이 편집을 달리해서 출판된 경우로 보인다. 채희문은 1974년 <門밖에서>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문예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 번역은 편집을 바꾸면서 또 출판사를 옮겨가면서, 하지만 수정되지는 않은 채 수 차례 출간되었다. 채희문의 번역은 1990년에 마지막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때는 채희문이 보르헤르트의 <전집>을 편역해서 출판한 <가로등과 밤과 별>이라는 제목의 책에 수록되었다. 채희문이 번역한 <門밖에서>는 오역이 있을 뿐 아니라 역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과하게 개입하여 상당히 문제적이나, 번역의 출판 횟수가 많았던 점으로 보아 널리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1996년에 김길웅의 번역이 나왔는데, 보르헤르트의 <전집>을 처음으로 완역한 의의가 있다. 로볼트 출판사가 편집한 <전집>은 작가의 작품을 생성된 순으로 엮었는데, 김길웅의 번역은 장르별로 편집해서 두 권의 책으로 출판했으며 <문밖에서>는 두 번째 권의 표제작으로 수록되었다. 이 번역은 작품설명을 담은 역자해설 및 작가 관련 사진 자료를 첨부한 점도 눈에 띄는데, 사진들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독자에게 시각적 정보로 다가갔을 것이다. 이후에 새로운 번역이 없다가 2018년, 2019년, 2020년에 연달아 번역이 출판되었다. 2018년에 박병덕은 <문밖에서>로 번역하여 보르헤르트의 <전집>을 완역한 책 <그리고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에 수록했다. 박병덕의 책은 로볼트 출판사의 <전집>과 같이 작품생성에 따라서 목차순서를 정하고 단권으로 편집한 점에서 김길웅의 번역과 차별성을 갖는다. 2019년에는 보르헤르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연구서를 쓴 바 있는 이관우가 <문 밖에서>로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가장 최근 번역은 2020년에 출판된 박규호의 번역으로 부제를 포함해서 <문밖에서-공연하려는 극장도, 보려는 관객도 없는 작품>으로 제목을 정했다. 이 번역은 2007년에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된 보르헤르트의 <전집>을 완역한 책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 – 볼프강 보르헤르트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번역자들은 한자를 병기하거나 띄어쓰기를 다르게 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문밖에서>를 표준제목으로 제안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문밖에서>의 메시지를 귀환병 베크만이 존재의 이유를 물으며 부르짖는 절규에서 찾는다면, 번역본들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반적으로 작품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있다. 이 희곡의 번역 작품들은 작가 특유의 스타일을 이루는 이미지들 (현실과 환각의 중첩, 그로테스크한 꿈), 알레고리적 인물들 (신, 죽음, 엘베강) 및 스타카토처럼 끊어지는 언어를 십분 살려서 베크만의 절망감, 배신감, 죄책감을 전달하려고 시도해 왔다. 베크만은 고향으로 왔으나 ‘홈, 마이 스윗 홈’을 찾지 못한다. 아내는 다른 사내를 품었고, 얼굴 한번 못 본 아들은 이미 죽었고, 애인이 될 뻔한 여자 집에서는 남편의 망령에 쫓기고, 그가 죄책감을 넘기려고 찾아간 대령은 양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고, 일자리를 구하러 간 카바레에서도 쫓겨난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음의 고향인 부모님 댁을 찾아가는데, 크라머라는 여자가 나와서 부모님이 가스로 자살했다고 말한다. <문밖에서>가 1947년 2월 라디오 방송극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베크만의 부친은 삼십 년 동안 일했던 조선소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되었고, 이에 절망한 것이 자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무대에서 공연된 작품에서는 죽음의 인과가 다르다. 부친은 나치주의자, 반유대주의자였고 그 결과 전후 직장에서 퇴출되고 집에서도 나와야 하자 자살한 것이다. 텍스트 내적으로는 베크만의 부모가 하필이면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가스로 자살했다는 것, 텍스트 외적으로는 독일이 패망한 직후 나치주의자의 자살이 수천 건 이상이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노골적으로 당시의 현실을 작품 안으로 가져온다. 보르헤르트가 방송극과 희곡에서 각각 내용을 다르게 쓴 까닭은 여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1] 아무튼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의 ‘탈나치’ 정책으로 함부르크의 블롬앤포스(Blohm&Voss) 조선소가 공중분해가 된 것도, 또 나치 전범자들이 직장에서 퇴출당한 것도 당시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베크만이 부모님 댁 앞에서 크라머 부인과 이야기하는 장면(이하 편의상 크라머 장면으로 축약)은 베크만이 가졌던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마저 좌절되어 그의 비극이 정점에 달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장면의 복잡한 함수는 독일에서도 근자에 와서야 그 중요성에 값하는 주목을 얻게 되었다. 번역의 경우에는 크라머 장면이 유독 상당한 편차로 다르게 옮겨진 점이 눈에 띈다. 번역이 새롭게 일어나면 기존의 번역을 마땅히 참조하면서 좋은 번역을 수용하거나 오류를 수정하기 마련인데, 크라머 장면의 경우 오역이 반복되는 경향이 나타나서 매번 번역이 독자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에서는 여섯 개의 번역문들이 저마다 만들어내는 효과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번역문을 직접 인용할 시 비평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어귀들은 글씨를 두껍게 표시한다.)
강두식의 번역 <저 門 밖에서>는 국내 초역으로 이 작품을 처음으로 한국 독자에게 소개한 의의가 있다. 초역이지만 번역의 정확성과 가독성이 이후의 번역들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다. 다만 60년대 번역에서 종종 발견되는 문체의 옛스러움과 어투의 어색함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이 희곡에는 베크만에게 나타나는 “der Andere”가 있어 그에게 죽지말고 계속해서 살아가라고 달래고 어르는데, 강두식의 번역은 “딴사람”이라고 번역하여 이 존재가 베크만의 또 다른 자아일 가능성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어투를 결정하는 문장의 술어부가 한 인물의 대사에서도 들쭉날쭉하여 인물과 인물의 관계 설정이 불안정하다. 딴사람은 베크만을 이끌고 지도하는 듯 상당히 강한 명령형 문장을 구사하는 데 비해서 베크만은 반말을 쓰다가 존댓말을 쓰는 등, 딴사람에 대해서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보인다. 원문에서는 베크만과 딴사람이 상호간 ‘너’라고 부르는 수평적 관계인데, 강두식의 번역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가변적이고 군데군데 위계관계로 나타난다. 문체의 어색함은 크라머 장면에도 나타나서, 중장년의 여성인 크라머 부인이 남성인물의 말에서 기대되는 종결어미인 “~했소”, “~이었소” 등을 쓴다.
크라머부인 (정답게, 주책없이 거칠은 감상적 기분이 되어) [......] 그 노인 벡크만의 집안은 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요. 알겠소. 제삼제국 시대에 그 사람들은 좀 지나치게 정력을 소모시켰지. 그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그렇게 늙은 사람이 그래 또 군복을 입을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더니 그 사람은 유태인들에 대해서 좀 어리석게 굴었소. 그건 당신도 알 것이 아니오. 여보, 당신은 아들이었으니 말이지, 당신의 늙은 아버지는 유태인들이 싫어 견딜 수가 없었소. 그들은 그분의 화를 돋우어 놓았고. 그분은 그자들을 모조리 자기 손으로 파레스틴으로 보내 버리겠다고 소동을 일으켰소. 방공호에서, 알겠소, 폭탄이 떨어지기만 하면 유태인에 대한 욕설을 했단 말이요. 좀 지나치게 적극적이었소, 당신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나치시대에 정력을 쏟아서, 그런데, 갈색 예복의 나치시대가 지나가 버리자 그들은 그분을 혼을 냈지 뭐요. 당신 아버지를 말이요. 유태인을 꼬투리로 잡아서. 사실 좀 지나치게 어리석게 굴었지. 유태인들에 대해서 말이오. 왜 그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지를 못했는지 모르겠소, 그 늙은 벡크만은 좀 지나치게 적극적이었소. 그래 갈색 예복 입은 젊은 친구들의 시대가 지나가 버리자 사람들은 그분의 뱃속을 좀 알아보려고 하였었소, 그런데 말이요. 그 뱃속이 아주 썩었더란 말이오. 아주 속속들이 썩었다고 할 수 있었단 말이오.(409-410)
크라머 부인의 이 대사에는 중요한 의미소의 코드가 두 번씩 반복되는데, 강두식의 번역은 이 점을 잘 살려서 ‘나치시대에 정력을 쏟았다,’ ‘유태인에 대해서 지나치게 어리석게 굴었다’, ‘지나치게 적극적’, ‘나치시대가 지나가 버리자’를 반복해서 옮겼다. 이 반복은 크라머 부인의 한정된 표현력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자기 말에 어떤 정보를 담는지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말인즉 부친이 나치에 매우 적극적으로 동조했으며 유대인 혐오를 공공연히 표출했고 나치 시대가 끝났을 때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나치 시대가 끝나자 “그들은” 아버지를 혼냈다. 그들이 누구인가? 보르헤르트의 원문에도 그들이라는 삼인칭 복수 1격 sie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듯이 크라머의 이 대사에 두 번 등장한다. 강두식의 번역에서는 한번은 누구인지 모를 익명의 “그들은”으로, 다른 한 번은 일반명사 “사람들은”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부친을 혼내고 뱃속을 알아보는 행위는 있으나, 그 주체는 누구로도 환원되지 않은 채 불분명하게 가려진다. 원작 <문밖에서>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또 무대에 올려진 1947년에는 그 배경이 선명해서 굳이 그들이 누구인지 설명을 부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치를 색출하고 직장에서 해고했던 이들이 실제로 누구였던지 간에 그 일은 독일을 점령했던 연합군의 탈나치화 정책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번역자가 그 일련의 사태를 전혀 모르는 한국인을 독자로 한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역자해설에 배경으로 설명하든지, 역자주로 부언하든지, 본문에 첨언으로 버무려 넣든지 해야 하지 않았을까. 다만 강두식의 초역 이후에 오는 번역들에서도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다.
채희문은 서문으로 삽입한 글에서 자신이 “문 밖 인생적 의식이 강할 때” 이 희곡을 접하고 “무슨 상비약이나 되는 것처럼 휴대하고” 다녔음을 고백한다. 역자가 작가와 주인공에 깊은 유대감을 느낀 것은 그가 작가의 “혼이 감전된 듯한 상태에서” 약 이십 여일 만에 번역을 마쳤다는 소회에서도 나타난다. 채희문은 <문밖에서>를 전쟁을 소재로 하였으되 그 심층에서는 삶과 죽음의 실존적인 문제를 다룬 부조리극으로 읽었다고 하는데, 그가 일차 독자로 가졌던 이러한 독서 경험이 번역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크다. 채희문의 번역은 작가의 글을 주관적으로 옮기거나 작가의 글에 말을 보태기도 하는 등, 전반적으로 원문에서 자유로운 경향을 보이며, 때로는 독일어 오독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오류를 행하기도 한다. 특히 크라머 장면은 기이하리만큼 원문을 왜곡한다.
크람머 부인 (퍽 친숙한 듯이, 수다를 떨며) [......] 하여튼 당신의 부친 벡크만 씨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어요. 당신도 짐작이 가겠지만 제 三제국의 희생물이 된거죠. 그런 노인네를 무엇 때문에 군에서 붙잡아 뒀는지. 유태인을 못 살게 굴었어요. 그러니 유태인은 당신 아버질 벼르고 있을 밖에요. 결국 그것이 더 당신 아버지의 분노를 사고 말았어요. 모든 유태인들을 자기가 손수 팔레스티나로 추방하겠다고 호통 호통을 쳤으니까요. 방공호 속에서도 공습이 있을 적마다 오히려 유태인에게 저주를 퍼부었어요. 너무 과격했지요, 당신 부친은 나치스의 화려한 희생물이 된 거죠. 그와 같이 나치스가 판을 치던 시대가 지나가자 당신 부친에 대한 유태인의 증오가 노골화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유태인을 못 살게 군 때문이죠. 왜 입을 못 다물고 계셨는지 부친 벡크만씨는 정말 약간 과격했어요. 그렇게 세상이 뒤바뀌자, 유태인들은 당신 부친이 아직도 어떤 권력을 행사할 수 있나를 뒤로 알아봤지요. 물론 이젠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83-84)
여기서 번역은 창작에 진배없는 글쓰기가 되고 있다. 역자는 원문에 크게 개입하여 어휘, 구문, 문장을 생략하고 왜곡하며, 크라머 부인의 말과 말 사이를 상상으로 채운다. 그리하여 베크만의 부친은 노인인데도 군대에 붙들려 있었던 나치의 희생자이다. 유대인은 기다렸다는 듯 부친의 뒤를 캐고 무력한 노인을 가스 자살로 몰아간다. 이 단락뿐 아니라 크라머 장면 전체가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크라머 부인의 말은 부친이 “퇴직금도 못 타고 떨려”나고 “집마저 압수당하고” “마지막 판엔 나치스 당을 스스로 탈당까지 했는데도” “보복을 받고야 말았어요”라고 이어진다. 부모의 죽음을 “하도 끔찍해서 볼 수가 없었다”고 역자가 만든 문장을 끼워 넣기도 한다. 채희문의 번역에서 ‘그들이’는 유대인으로 특정되고, 부친의 죽음은 유대인의 잔혹한 복수극이 된다. 이렇게 번역자 채희문은 베크만 부친의 이야기에서 나치에 동조했던 흔적을 지운다. 여기에는 비참한 말로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앞섰거나 고난받는 주인공 베크만에 이입하는 등 역자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은 최소한의 정치적인 정확성마저도 지키지 않고 있다. 보르헤르트가 <문밖에서>를 쓴 시기에 유대인들은, 그들이 생존했더라도, 공식적으로 DP(Displaced People)로 불리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까지 난민과 다름없는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았다. 채희문의 번역은 부모를 선량한 피해자로 만듦으로써 베크만의 비극적인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이 번역이 굴절시켜 되비추는 희곡 <문밖에서>는 베크만을 배척하는 현실이 더욱 비정하고 냉혹하게 나타나는 데 부모의 억울한 죽음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채희문의 번역은 1975년에 국내 연극무대에서 공연된 바 있는데(예술지식백과)[2] 현재에도 이 번역이 동명의 연극 대본으로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김길웅은 역자 해설에서 베크만의 부모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연금도 없이 집에서 쫓겨나 떠돌다 가스를 틀어 자살했다고 요약한다. 김길웅의 번역에서 크라머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라머 부인 (숨기지 않고, 무성의하게, 감상적이기는 하지만 거칠게) [......] 베크만씨 노부부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알겠어요? 제3제국에서 이미 기력을 다 소모해버렸으니까. 당신도 아시겠지. 그런 나이 드신 분이 제복을 입을 필요가 뭐 있었겠어요? 그리고 그분은 유태인들에 대해 꽤 펄펄 뛰셨지, 당신도 아실 거요, 그분의 아들이니까. 당신의 어르신은 유태인들을 참을 수 없어 했어요. 그들은 그분의 분노를 자극했지요. 그분은 그들 모두를 자기 손으로 팔레스 티나로 쫒아내고 싶다고 늘 호령했죠. 당신도 아시겠지만,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그분은 지하 방공호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았지요. 꽤 적극적이셨지요, 그분은. 나치스 시절에 정말 기력을 다 소모해버리셨어. 그런데 갈색의 시대가 끝나자, 이젠 그들이 당신 아버지를 화나게 했어요. 유태인들 말이오. 그분은 성미가 괄괄했어. 특히 유태인에 대해서는. 왜 그분은 그렇게 입을 다물지 못했을까. 노 베크만씨는 너무 적극적이었어. 갈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시대가 끝나자, 그들은 그분의 성향을 조사했어요. 냄새가 났지. 냄새가 진하게 났다구.(86)
이 번역에서 부친은 자발적으로 기력을 다할 만큼 나치 활동을 했고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이는 부친의 성향에서 진하게 냄새가 났다는 마지막 문장에서 재차 강조된다. 그런데 전후에 벌어진 상황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들이”가 “유태인들”과 동일시되어서, 아버지와 유대인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지고 만다. 나치 시대가 끝난 시점에 유대인이 아버지를 화나게 했음에 해당하는 원문은 “(...), da habensie ihn dann hochgehen lassen,(...)”이다. hochgehen은 높이 hoch와 가다 gehen가 결합된 형태로 어디론가 혹은 어떤 상태로 올라가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로부터 분노가 폭발한다는 비유적인 뜻이 생겼다. 김길웅의 번역은 이 뜻을 번역에 차용하는데, 이는 채희문, 박병덕, 이관우의 번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단어 hochgehen이 사역동사 lassen과 함께 관용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누군가의 범법행위나 범죄행위가 발각되고 드러나게 하는 뜻을 갖게 된다. 강두식과 박규호는 이 의미에 따라 각각 ‘조사하다’, ‘고발하다’로 옮겼다. 번역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 문제의 관용어를 ‘화나게 하다’처럼 분노의 뜻으로 옮기면 크라머 부인이 말하는 맥락이 꼬여버리고, 아버지가 죽음을 택한 인과관계가 뒤틀리는 결과에 이른다. 김길웅의 번역에서는 원문에서 두 번 반복되는 “doll auf die Juden”이 나치 시대에는 “유태인에 펄펄뛰다”로 번역되고, 나치 시대 후에는 “성미가 괄괄하다”로 상이하게 옮겨졌다. 유대인 혐오가 과도하고 지속적이었다는 원어의 함의가 아버지의 성격으로 바뀌면서, 마치 유대인이 나치 시대가 끝나자 아버지를 자극했고 아버지는 성미대로 유대인과 싸운 듯한 의미가 생긴다. 양친의 죽음도 유대인이 아버지의 성향을 조사하고 직장과 집에서 몰아낸 결과가 된다.
박병덕은 보르헤르트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주제로 2차 세계 대전을 소개하고,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역자해설에 첨부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밖에서>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전후 독일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다. 박병덕의 번역에서는 크라머 부인이 베크만 부친이 죽음을 택한 저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라머 부인 (스스럼없이, 무성의하게, 험악하지만 감상적으로) [......] 베크만 노부부는 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어요. 알겠어요? 제3제국에서 약간 진이 빠졌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지요. 왜 그런 노인 양반이 제복을 착용하는 것이 필요하겠어요? 그리고 그분은 유태인을 조금 싫어하셨는데, 당신도 잘 아실거예요, 당신은, 아드님인 당신은 말이에요. 당신 아버님은 유태인을 싫어하셨어요. 그들이 그분의 분노를 자극했어요. 그분은 그들 모두를 당신이 손수 팔레스타인으로 쫓아내고 싶었노라고 늘 우레같이 호통을 치셨어요. 방공호에서, 당신도 알겠지만,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항상 그분은 유태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어댔어요. 약간은 아주 적극적이셨어요. 당신 아버님 말이에요. 나치 시절에 진이 대단히 많이 빠져버렸어요. 자, 그런데 그 갈색 시대가 지나갔을 때, 그들이 당신 아버님을 격분하게 만들었어요. 그 유태인들 때문이에요. 정말로 유태인들을 조금 싫어했어요. 왜 그분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을까요. 너무 적극적이셨어요, 베크만 영감님 말이에요. 그리고 이제 갈색 젊은이들의 시절이 지나갔을 때, 그들은 그 양반의 속을 한번 떠보았어요. 그런데 설마 했는데,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어요. 아니, 그분이 매우 의심을 받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네요.(237-238)
이 번역은 크라머 부인이 하는 말 중에 조금, 약간, 늘, 아주, 대단히, 너무 등과 같이 부사로 번역할 수 있는 어휘들을 거의 빼지 않고 옮기고 있다. 크라머 부인은 말버릇처럼 “ein bißchen”을 사용하는데, 부친이 나치에 얼마나 충성했는지, 유대인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또 얼마나 수상했는지 말하는 문장마다 이 어휘를 쓰고 ‘당신도 잘 알지 않냐’면서 베크만의 호응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 어휘를 기능으로 보지 않고 약간 혹은 조금 등 그 뜻으로 옮기면 “약간은 아주 적극적”이라고 비문에 가깝게 된다. 박병덕의 번역에서는 부친이 “유태인을 조금 싫어했다”와 “유태인을 싫어했다”가 병렬되고, 나치 시대에 “약간 진이 빠졌다”와 “진이 대단히 많이 빠졌다”가 병렬되어 크라머 부인이 말하는 내용이 모호하다. 이 모호함은 부친을 “격분하게 만들었다”는 “그들이”의 정체성에도 해당한다. 이 번역에서 ‘그들’은 유대인과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대한 서술자의 관점은 애매하게 남는다. 베크만 부친은 “그들이”에게 격분한 걸까? 부친을 단죄하는 그들의 조치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지 않아서 격분한 것인가? 혹은 부친은 반유대주의적인 언행을 썩 옳다고 여겨서 전후에도 유대인 혐오를 숨기지 않은 것인가? 마침 박병덕의 번역이 외래어, 지명, 인명 등에 역자주를 첨부하기에 그 자리를 저 문제의 “그들이”에 관련한 설명으로 확장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이 생기는 지점이다.
5) 이관우 역의 <문 밖에서>(2019)
이관우의 번역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역자가 보르헤르트에 관한 연구서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삶과 문학>을 집필했던 만큼 비교적 상세한 작가소개와 작품소개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이관우는 <문밖에서>가 전쟁의 부조리와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작품이지만,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이관우의 번역에서도 역사적 현실에 대한 실증적인 조사가 선행되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크라머 부인은 베크만 부모가 자살한 원인을 유대인에게로 돌린다.
크라머 부인 (친밀하게, 단정치 못하게, 거친 감상을 섞어) [......] 그런데 당신의 부모님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들은 제3제국에서 좀 지나쳤지요. 나이 들어서까지 그 제복을 입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또한 아들인 당신도 알테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유대인에 대해 좀 광포했지요. 그는 유대인들을 견딜 수 없이 싫어 했지요. 유대인들이 그의 분노를 일으켰지요. 그는 항상 자기 손으로 유대인들을 모조리 팔레스티나로 쫒아내버리겠다고 외쳐왔지요. 그는 폭탄이 계속 떨어지는 방공호 속에서도 유대인들에 대한 저주를 퍼부어댔지요. 당신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적극적 이었지요. 그는 나치에 모든 것을 다 바쳤지요. 그런데 그 갈색의 나치시대가 끝나자 유대인들은 당신의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렸지요. 일은 유대인들 때문에 벌어진 거지요. 그는 유대인에 관해 좀 광포했어요. 그는 어째서 입을 다물 수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아버지 베크만 노인은 지나치게 적극적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나치시대가 끝나자 그들은 그의 영향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를 탐색해보았지요. 그들은 그의 영향력이 미미해져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다는 걸 알았지요.(82)
이 번역은 ‘그들’을 유대인으로 잘못 특정하고, 이는 유대인들이 아버지에게 분노의 복수를 가할 요량으로 탐색했고 아버지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는 오역으로 이어진다. 이 외에도 이관우의 번역에는 사소하다고 넘기기 곤란한 오역이 군데군데 있다. 크라머 장면에서 크라머 부인이 자기 남편을 아버지라고 칭하거나, 베크만의 양친이 더 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지난날의 지배력은 더 이상 제대로 된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되었지요”로 번역한 것 등이다.
6) 박규호 역의 <문밖에서–공연하려는 극장도, 보려는 관객도 없는 작품>(2020)
가장 최근에 나온 박규호의 번역에서는 베크만의 부친이 나치 전력의 결과로 직장에서 해고되고 집에서 쫓겨나게 된 인과관계가 보다 더 뚜렷이 드러난다. 크라머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라머 부인 (친밀하게, 하지만 성의 없이, 조야하게 감상적으로) [......] 노(老)베크만 부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짐작하겠지만, 제3제국에서 기력이 다 했던 거예요. 그렇게 나이 든 남자한테 제복은 왜 그렇게 계속 입혀놓았는지, 원. 아무튼 그분은 유대인들한테 좀 심하게 굴었어요. 아들이니까 잘 알겠지만 말이에요. 당신 아버지는 유대인들을 참 못 견뎌 했어요. 유대인들만 보면 분노를 터뜨렸죠. 그들을 모두 자기 손으로 직접 팔레스타인으로 내쫓아버리고 싶다고 늘 소리치곤 했어요. 방공호안에서 말이에요.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유대인들한테 저주를 퍼부었죠. 너무 적극적이었어요, 당신 노친네는. 나치에 너무 기력을 쏟았어요. 그러다 그 갈색 시절이 지나가자 그들이 그분을 고발했어요. 유대인 문제로 말이에요. 유대인들한테 너무하기는 했어요. 조금만 입조심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적극적이었어요, 노베크만 씨는. 갈색 제복 차림들의 시대가 지나고 나자 그들은 그분을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결과는 생각했던 대로였어요. 당신 아버지는 아무 데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죠.(192)
이 번역에서는 아버지를 고발하고 조사한 “그들이”가 유대인과 분명히 구별된다. 그들의 조사가 완벽해서 꼼짝없이 당한 것인지 혹은 부친의 나치 전력이 워낙 뚜렷해서인지 확실치 않으나 여하튼 부친이 처벌을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이 번역문장은 보르헤르트의 원문과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원문에서 크라머 부인은 이빨을 만져본다는 관용적 표현을 쓴다. “(...), da haben sie ihm mal ein bißchen auf den Zahn gefühlt. Na, und der Zahn war ja faul, das muß man wohl sagen, der war ganzoberfaul.” (여기서도 크라머 부인은 ein bißchen을 말한다). 그들이 아버 지 이빨을 만져봤는데, 이빨이 썩었으며 그것도 완전히 썩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정도인 이 표현은 말(馬)의 나이와 건강 상태를 치아로 알아봤던 오래전 관습에서 유래하는 관용어로 치과적 치료가 아직 떠돌이 의료행위일 때 충치를 찾아내는 방식을 가리키기도 했다. 이로부터 성향이나 사상, 또는 의도 등을 파헤쳐서 밝혀내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독일어 원문에서는 이빨이 썩었다는 언어유희를 반복하면서 완전히 썩었다로 강화해서 부친이 나치에 협력한 정도가 확신범의 수준이었음을 추측하도록 한다. 번역자들은 이 문장을 제각각 다르게 번역했다. 강두식은 의미가 유사한 관용적 표현을 신체 용어에서 찾아서, 이빨을 “뱃속”으로 옮기고 원문의 썩었다는 어휘를 살려 뱃속을 조사하니 속속들이 썩었더라고 번역했다. 한국의 언어문화는 ‘뱃속이 검다’라는 관용적 표현에 익숙하고 뱃속이 썩었다는 말이 낯설지만, 강두식은 독일어 원문의 생생한 이미지를 생경한 상태 그대로 살리려고 한 것 같다. 박병덕은 이빨을 만진다는 구문의 의미에 상응하는 표현을 찾아서 “속을 한번 떠보았다”로 번역하고, 썩었다는 어휘 부분을 “수상한 냄새가 났다”, “매우 의심받았다”고 옮겼다. 원문대로라면 썩었다고 해야겠지만, 속이 썩었다고 옮기면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에 냄새가 수상했다고 번역했을 것이다. 이빨을 만져본다는 관용적 표현은 출발어인 독일어의 이미지로 쓰면 한국어 독자에게 낯설고, 의미의 등가성을 갖는 어휘를 뱃속 등에서 찾으면 원문의 이미지를 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런 까닭인지 박규호는 다르게 궁리한다. 박규호의 번역은 원문의 어휘를 옮기지 않고, 그 대신 원문을 해석하여 문장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로써 이 번역은 원문의 뜻을 무난히 전달하지만, 원문의 이미지적인 표현이 갖는 고유한 역할을 삭제하기도 한다. 크라머 부인은 유독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관용어들을 쓴다. 이런 표현은 그녀가 일상적이다 못해 은근히 비속적이기도 한 말을 구사하는 인물이며, 겉으로는 베크만 부친의 죽음을 딱한 듯이 말하지만, 사실은 남의 불행을 그저 입방아를 찧듯이 말하는 인물임을 가리키는 신호이다. 희곡의 장르적 특성상 인물이 하는 말이 인물의 성격을 결정짓기에 크라머 부인의 표현을 십분 살리는 독창적인 번역이 그립다.
3. 평가와 전망
번역가 조재룡은 그의 책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이런 문장을 적은 적이 있다. ‘세상에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투명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문은 복잡한 함수로 구성되어있는 텍스쳐이고, 번역은 원문의 정체성을 되묻는다’. 하물며 그 함수가 독일의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에서 비롯한다면 번역의 어휘는 중립적일 수 없고, 번역행위는 원문의 정체성을 되묻는 정치적 결정이게 된다. 요컨대 크라머 부인이 전달하는 메시지(Inhalt)는 베크만 부모의 가스 자살이지만, 그녀의 말이 생산하는 내용(Gehalt), 즉 말하는 태도, 사용하는 언어, 어휘의 반복, 원문에 숨겨져 있는 어세 등을 어떻게 옮기냐에 따라서 부친의 죽음은 극렬 나치의 당연한 귀결이 될 수도 있고 무소불위 연합군이 행사한 탈나치화 정책의 무고한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크라머 장면을 옮기는 번역은 박규호의 번역 이전에는 엉뚱한 곳을 유랑한 듯 보인다. 개별 번역간 차이는 있으나 부모의 죽음에서 탈나치화 정책의 현실적 문맥이 소거되고, 부모의 나치 전력과 그들의 죽음을 잇는 인과의 고리가 왜곡되면서 부모의 자살에 은근슬쩍 유대인의 복수라는 픽션이 만들어진 것이다.
역자 해설들은 공통적으로 <문밖에서>의 허무주의적 감상과 실존주의적 경향을 언급한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무력한 신과 도처에 편재한 죽음의 대립구도 안에서 한 양심적 개인이 이기적이고 냉혹한 세상에서 내쳐지는 서사가 펼쳐지고 있어서, 이 작품이 쓰였던 시공간에서 먼 거리에 위치하는 번역자가 작품을 실존적 차원으로 보편화하는 방식으로 도착문화에 고유한 지평으로 옮겨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밖에서>는 전쟁 직후 독일의 현실을 민낯 그대로 담았고 그 현실성으로 공감을 얻었고 논쟁도 불렀던 희곡이다. 그래서 텍스트의 구체성과 역사성에 바탕하면서 문학이 지향하는 보편성과 인간성을 고려한 번역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의 번역은 역자 해설에서 작가소개 및 작품소개를 다하고 있으나 1949년에 알려진 정보를 거듭해서 반복적으로 제공하는 한계가 있다. 기왕에 역자 해설에 작품소개의 지면이 제공된다면 최근의 연구와 평가를 고려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번역이 되묻는 원문의 정체성이 시대에 따라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니 말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강두식(1971): 저 門 밖에서. 세계문학사.
채희문(1974): 門밖에서. 문예출판사.
김길웅(1996): 문 밖에서. 강.
박병덕(2018): 문밖에서. 현대문학.
이관우(2019): 문 밖에서. BookPOD.
박규호(2020): 문밖에서-공연하려는 극장도, 보려는 관객도 없는 작품.
문학과지성사
- 각주
- ↑ <문밖에서>는 세 개의 버전이 있었다. 작가가 여드레 만에 썼다고 하는 최초 버전, 북서독일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방송극 버전, 그리고 최초 버전을 바탕으로 하여 공연된 연극공연 버전이다. 최초 버전은 발견되지 않았고, 연극공연 버전이 1949년 <전집>에 실려서 정본으로 자리잡았다. 방송극 버전은 연극 버전과 거의 대동소이하나 크라머 장면에서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방송극 버전과 연극 버전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작가가 연합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최초 버전의 대본을 수정했다는 설이 있는 한편, 함부르크 조선소에서 대량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새롭게 직장이 알선되었기 때문에 방송극 중 베크만 부친의 자살한 연유가 실제 현실과 유리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de.wikipedia.org/wiki/Drau%C3%9Fen_vor_der_T%C3%BCr#5._Szene 및 Ulrike Weckel(2003): Spielarten der Vergangenheitsbewältigung – Wolfgang Borcherts Heimkehrer und sein langer Weg durch die westdeutschen Medien. In: Mosheh Tuskerman(ed.): Medien-Politik-Geschichte. Göttingen: Wallstein-Verlag, 125-161 참조.
- ↑ https://www.culture.go.kr/knowledge/encyclopediaView.do?vvm_seq=8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