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항아리 (Der zerbrochne Krug)"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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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선(2005): 깨어진 항아리.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br> | 김기선(2005): 깨어진 항아리.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br> | ||
배중환(2022): 깨어진 항아리. 해피북미디어. | 배중환(2022): 깨어진 항아리. 해피북미디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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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4일 (일) 10:01 판
하인리히 클라이스트(Heinrich Klest, 1777-1811)의 희곡
작품소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1806년에 집필한 희극으로 1808년 괴테 휘하의 바이마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약혼자가 있는 에바라는 여성을 몰래 흠모하는 마을 판사 아담은 에바와 약혼자를 떼어놓고 자신이 그녀를 차지할 계략을 꾸민다. 이런 와중에 밤늦게 에바를 찾아갔던 아담은 같은 시각 그녀를 찾아온 약혼자에게 현장이 발각될 뻔하여, 급하게 도망가던 중에 항아리를 깨고, 판사 가발을 잃어버리고, 머리에 큰 상처까지 입게 된다. 문제가 커진 것은 다음날 오전 에바의 엄마가 깨어진 항아리의 범인을 잡아달라고 아담을 찾아와 재판을 걸게 되면서이다. 극은 에바의 엄마가 재판을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항아리를 깬 범인은 극의 진행 과정에서 밝혀지게 되는데, 이것은 극 전개를 통해 비밀을 밝혀가는 분석극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클라이스트 스스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분석극을 쓰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는데, <깨어진 항아리>는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분석극을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비극이 아닌 희극에 활용하였으며, 주인공 아담은 오이디푸스 왕처럼 스스로 비밀을 파헤치려는 인물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사건의 판사이자 범인이라는 딜레마 상황 때문에 비밀이 밝혀지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관객/독자는 이미 그가 항아리를 망가뜨린 범인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아담의 임기응변식 거짓말이 이 희극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국내에서는 1990년 정영호에 의해 처음으로 번역되었다(금성출판사).
초판 정보
Kleist, Heinrich von(1811): Der zerbrochne Krug. Ein Lustspiel. Berlin: Realschulbuchhandlung.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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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항아리 | 에밀리아 갈로티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World's famous classics 9 | 클라이스트 | 鄭永鎬 | 1990 | 金星出版社 | 369-438 | 편역 | 완역 | ||
깨어진 항아리 | 깨어진 항아리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배중환 | 1993 | 세종출판사 | 15-181 | 완역 | 완역 | |||
깨어진 항아리 | 깨어진 항아리 | 독일희곡시리즈 12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김기선 | 2005 |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 5-135 | 완역 | 완역 | ||
4 | 깨어진 항아리 | 깨어진 항아리 | 다락원 독일어 학습문고 5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서유경 | 2017 | 다락원 | 63-72 | 완역 | 개작 | |
깨어진 항아리 | 클라이스트 희곡선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배중환 | 2022 | 해피북미디어 | 7-164 | 편역 | 완역 | |||
6 | 깨어진 독(壺) | (要約)世界文學全集. 3 | 클라이스트 | 고금출판사 편집부 | 1955 | 古今出版社 | 139-148 | 편역 | 개작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비극 <슈로펜슈타인 가(家)>에 이어 집필된 <깨어진 항아리>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두 번째 희곡이자, 첫 번째 희극이다. 독일어권 최고의 희극으로 평가받는 <깨어진 항아리>는 오늘날 클라이스트의 드라마 중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으로 손꼽히지만, 발표되었을 당시 작품에 대한 반응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클라이스트가 1802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1806년에 탈고한 이 작품은 1808년 괴테의 감독하에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 대한 반응은 매우 냉담했는데,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괴테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전통적인 3막극으로 재구성하였는데, 이로 인해 생겨난 막 사이의 휴지부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플롯을 13개의 장 Auftritt으로 구성된 단막극에 담아내고자 한 원작의 의도와 상충함으로써 긴장감을 살리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12장의 지나치게 장황한 대사를 그 원인으로 꼽는 분석도 있다. 후자의 입장이 오늘날까지 초연 실패의 주원인으로 손꼽히는 데는 관련하여 명백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는 초연의 실패 이후 5막극에서의 5막에 해당하는, 다시 말하면 파국을 형성하는 12장을 전면적으로 재편집한다. 원래 초고의 12장에는 갈등이 거의 다 해소된 상황에서 법률 고문관 발터와 이브(에바)가 이브의 약혼자인 루프레히트의 징집 문제를 놓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긴 대화가 담겨 있었는데, 이러한 극의 전개 방식이 관객들에게는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지루함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클라이스트는 초연 실패 직후 초고의 12장의 9할 정도를 삭제하기도 하였으나, 종국에는 원래의 긴 버전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신 1811년 출간된 이 작품의 초판에 해당 부분을 ‘변형 Variante’이라 표기하여 덧붙여 내는 절충안을 택한다(Schneider 2013, 38f.). 클라이스트가 초연 실패의 원인을 이 장에서 찾는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이 장면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 작품의 연구사에서 7장의 ‘항아리 표면의 그림에 대한 묘사와 항아리의 역사’를 역설하는 마르테의 대사 다음으로 12장의 발터와 이브의 대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클라이스트의 판단이 틀리지만은 않았음을 방증한다. 작가 클라이스트에게는 큰 좌절로 각인된 초연의 뼈 아픈 실패는 이후 <깨어진 항아리>의 무대 수용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은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개작되고, 줄여지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렇게 개작된 각본 중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함부르크 극장 감독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슈미트의 버전은 원작보다 더 우선시되기도 했다. 클라이스트의 원작보다 슈미트의 극본을 우대하는 경향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원작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야 완전히 멈췄다. 특히 1900년을 전후하여 희극 장르가 연극 무대에서 인기를 끌게 되면서 이 작품의 주인공 아담은 유명한 배우들이 선호하는 배역이 되었고, 아담 역할로 가장 유명했던 배우 중 한 명인 베를린 출신 배우 되링 Theodor Döring은 1844년부터 여러 극장을 돌며 무려 삼십여 년간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고 한다(Schneider 2013, 40).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클라이스트는 애석하게도 이 작품이 새롭게 평가받고 성공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 이 작품이 클라이스트의 사후에나 인정받은 것처럼 우리나라에서의 클라이스트 수용도 ‘연착’된 인상을 준다. <깨어진 항아리>를 삼십여 년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번역한 배중환이 자신의 첫 번역서의 역자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독일 문학사나 세계 문학사에서 클라이스트가 지닌 위상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국내 수용은 다소 뒤늦은 감이 있다. 사실 이미 1955년 총서 <(要約)世界文學全集>의 3권에 <깨어진 항아리>가 실린 적이 있었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이 총서의 3권은 독일 문학에 할애되었는데, 여기서는 괴테, 쉴러, 헵벨, 하우프트만, 베데킨트, 카이저 등의 대표적인 희곡들을 주로 다룬다. <(要約)世界文學全集> 3권에는 클라이스트의 드라마 <깨어진 독>, <홈부르크公子>, <펜테질레-아>도 실려있어서 이 전집이 클라이스트를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 실린 작품들이 완역이 아닌 십여 쪽 분량의 요약본이라는 점에서 이를 클라이스트에 대한 본격적인 수용으로 간주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깨어진 항아리> 최초의 국내 완역은 1990년, 그러니까 이 전집에 요약본이 소개된 지 35년이 지난 후에나 이뤄졌다. <깨어진 항아리>의 번역본은 정영호의 초역을 포함하여 1993년과 2022년의 배중환 번역 2종, 2005년의 김기선 번역까지 총 4종이 확인된다. 독일 문학사에서 클라이스트가 지닌 위상이나 그가 판권이 소멸된 작가라는 정황을 고려한다면, 번역 종이 결코 많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희극이라는 장르적 한계 때문인지 무대에서의 수용도 제한적인 편이다. 다만 완역본보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앞서 공연이 먼저 성사되었다는 점에는 주목해 볼 만하다. 이런 맥락에서 연극 무대에서의 작품 수용이 이 작품이 단행본을 통해 처음 소개된 1955년과 첫 완역본이 출간된 1990년 사이 35년이라는 긴 공백기를 메워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최초의 공연은 1973년 주한 독일문화원 소속 극회 프라이에 뷔네에 의해 남산 독일문화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1]
더 대중적인 공연은 극단 민예극장에 의해 성사되었는데, 민예극장은 <깨어진 항아리>를 1980년 12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연극회관 세실극장의 무대에 올렸다.[2] 이 공연의 경우 비디오 자료뿐만 아니라 연극 대본도 남아 있어 한국에서의 <깨어진 항아리> 수용 양상을 가늠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 역할을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739년 고트쉐트와 노이버린에 의해 극장에서 퇴출된 희극과 희극 캐릭터를 칠십여 년 만에 독일 문학사로 다시 소환한 <깨어진 항아리>는 ‘고대극의 요소를 셰익스피어 극작술과 결합해 보다 상승된 새로운 통일체’(배중환 2022, 435-436)를 구현하려는 클라이스트의 야망을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작품의 집필 동기는 클라이스트가 직접 밝힌 두 예술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클라이스트가 이 작품의 서문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 동판화인데, 이 그림에는 망가진 항아리를 들고 호소하는 여인, 당황한 소녀, 고소당한 농부 소년, 불신에 찬 서기관의 시선을 마주한 판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동판화가 작품의 내용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영감을 주었다면, 작품의 형식은 서양 연극사에서 가장 유명한 분석극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서문에서도 ‘크레온’과 ‘오이디푸스’의 이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이는 이 동판화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일 뿐이어서 말하자면, 여기서 <오이디푸스 왕>은 어렴풋이 암시만 된다. 그러나 사실 클라이스트는 베른에서 이 동판화를 처음 보자마자 바로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렸다고 한다. 따라서 동판화가 묘사하고 있는 재판의 상황까지 포함하여 재판극이라는 형식과 재판극과 내적 친밀성을 지닌 분석극적 전개 모두 <오이디푸스 왕>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 전날 밤의 비밀을 봉인 해제하여 범인을 특정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주인공 아담의 “안짱다리 Klumpfuß”(Kleist 1984, 25)는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뜻인 동시에 극의 마지막에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역시나) 결정적 증거 ‘부은 발’에 상응하도록 설정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클라이스트는 작품의 선행 텍스트가 되는 <오이디푸스 왕>과의 친밀한 관계를 텍스트 안에 표식으로 남긴다. 결국 클라이스트는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희극에 차용하고, 소포클레스와는 동시대인인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 받은 영감과 셰익스피어 희극 캐릭터 폴스타프를 주인공 아담에 투영함으로써 고대 그리스 연극의 위대한 전통과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천재적 재기발랄함을 이 작품 안에서 동시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Schneider 2013, 34).
클라이스트의 고유한 글쓰기 방식에 더불어 선행 텍스트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희극 <깨어진 항아리>만의 특별한 상황은 번역의 어려움을 배가시킨다. 본격적으로 개별 비평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번역의 어려움을 야기하는 작품의 특성을 먼저 짚어보자. 우선 첫 번째 어려움은 이 작품이 <오이디푸스 왕>을 차용한 분석극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사실 분석극에서의 순행(順行)은 ‘비밀(여기서는 항아리를 깬 범인)’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석극을 차용했다는 클라이스트의 주장은 완전히 정합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는 분석극의 본래적 속성이 전복되면서, 일종의 역행(逆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인범을 찾는 일과 병합된 자신의 출생 비밀을 끝까지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깨어진 항아리>에서 제기된 소송의 판사이자 동시에 범인이기도 한 아담은 이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지어내는데(Schneider 2013, 35), 이 즉흥적인 거짓말과 그 거짓말에 대한 의구심(리히트, 발터) 사이에서 종종 모호함이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아담으로서는 앞으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기에 최대한 불명확하게 말을 얼버무려야 할 필요성이 있고, 법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리히트나 발터는 아담을 의심하면서도 그가 재판을 이끌어가는 판사이기에 그를 본격적으로 추궁하지는 못한다. 이런 명시적이지 않은 대화 속에서 종종 어떤 뉘앙스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문맥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클라이스트 자신은 ‘드라마의 치명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반감시킬 수 있는 안전장치로서의 지문을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 경향을 보인다. 대사에서 말 줄임을 의미하는 줄표가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법하다. 목적어나 동사, 보어 등 통사적 층위에서 꼭 필요한 요소가 누락된 문장들이 간혹 눈에 띄는데, 이런 경우 앞뒤 문맥을 고려해도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특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이것은 번역자의 번역 태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지점이 된다.
두 번째 어려움은 이 드라마가 상당 부분 단장(短長)격의 운율이 사용된 일종의 ‘운문(희)극 Versdrama’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판사인 아담과 서기관인 리히트, 법률 고문관인 발터를 제외하면 후이줌이라는 작은 마을의 배움 없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는 단순한 농민들의 언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는데, 클라이스트는 거친 언어들을 단장격과 같은 시적 운율에 ‘끼워 넣음’으로써 언어적 층위에서의 희극적 효과를 의도한다(Schneider 2013, 34). 원문에서는 운을 맞추기 위해 단어 차원에서의 축약이 일어나거나, 단어가 일반적인 문장 배열 방식과는 달리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전반적으로 문장이 압축적으로 표현되는 경향도 나타난다. 엄격한 형식이 빚어낸 제약들은 원문의 독해를 어렵게 하는 주원인이 되는데, 이는 번역에 더 가혹한 난관이 된다.
세 번째 어려움은 이 작품이 희극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희극의 희극성은 즉각적인 이해와 반응을 통해 고조될 수 있기에, 희극의 번역에서는 언어를 직관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대화’의 형태로 독자/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드라마 텍스트를 어느 정도까지 실제의 대화처럼 번역할 것인가는 번역자의 고민거리가 된다. 아울러 19세기 초의 고전적인 어휘나 대화 방식(예를 들면, 어미 처리나 존대법 등)을 얼마나 20세기 또는 21세기에도 소통될 수 있도록 적절히 현대화할 것인가 또한 번역자를 머뭇거리게 하는 지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 어려움은 클라이스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중의성, 모호함 등과 관련된 보편적 난관이다. 그의 드라마 등장인물들에 편재한 분열성의 형상화는 모호하고 중의적인 언어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한 단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번역의 과정은 클라이스트의 언어적 특성과 화해할 수 없는 대립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일례로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깨어진 항아리’는 다층적으로 주인공들의 상황이나 처지와 중첩된다. 한편 그것은 이브의 순결 훼손을 암시하는가 하면, 그 결과로서 젊은 연인, 즉 이브와 루프레히트 관계의 파탄을 함의한다. 또 다른 한편 네덜란드 독립에 관한 항아리 표면 그림에 난 구멍은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구세계의 붕괴를 예견한다는 점에서 ‘머리에 구멍이 난’ 향판 아담의 미래와 중첩된다. 제목에서 사용된 ‘깨어진’이라는 단어가 ‘zerbroch(e)n’인 반면, 원작에서 항아리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entzwei’, ‘geschieden’, ‘ein Loch’, ‘zerscherbt’ 등 다양한 단어가 활용되는 것도 깨어진 항아리에 다층적 함의를 포섭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상기한 논의를 기반으로 개별 번역 비평을 통해 문제가 될 법한 예문의 번역을 비교해보며 번역자들이 이런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최초의 완역본인 정영호의 <깨어진 항아리>는 <에밀리아 갈로티/ 群盜/ 깨어진 항아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편역서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정영호는 번역서 뒷부분에 레싱, 쉴러, 클라이스트 작품 세계 전반에 대한 설명, 번역 수록된 작품의 해설, 작가 연보를 첨부해 놓았으나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에밀리아 갈로티>, <군도>와 희극 <깨어진 항아리>를 함께 번역하여 나란히 실은 이유를 직접 언급하고 있진 않다. 이 번역서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원문의 행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책에 수록된 다른 운문극들의 번역도 이렇게 처리한 것으로 보아 이는 일괄적으로 적용된 번역자 또는 편집자의 편집 원칙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번역본은 자연스러운 대화문처럼 시각화되는 효과를 누리지만, 원작이 운문극임을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 가능성은 포기된다. 다만 이 시기 많은 운문극들도(예를 들면, 셰익스피어) 이런 방식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편집 방식은 의미 전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이 시기 번역의 공통된 목표에 주안점을 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Adam: für sich. Verflucht! Ich kann mich nicht dazu entschließen –! Es klirrte etwas, da ich Abschied nahm – Licht: ihn aufschreckend. Herr Richter! Seid Ihr –? Adam: Ich? Auf Ehre nicht!(Kleist 1984, 545-548) 아담 (독백) 제길할! 아직 결심이 서지 않는데……! 무엇인가 쨍그랑거렸거든, 실례했을 때 말이야…… 리히트 (아담을 놀라게 하려는 듯이) 재판관님! 당신은……? 아담 내가? 아니, 틀려!(정영호, 391. 밑줄 필자 강조)
위 인용문은 상기한 첫 번째 번역의 어려움(모호함과 생략)과 관련된 예문으로 선택해 보았다. 이 장면에서 판사이자 동시에 범인이기도 한 아담은 깨어진 항아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고 난 뒤 자신이 실제 항아리를 깬 것인지 관련 기억을 복기하고 있다. 인용문의 앞 장면에서 자신에게 소가 제기된 셈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을 파악하고 다급해진 아담은 비밀리에 이브에게 자신이 루프레히트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확인시키며 침묵을 강요한다. 이 때문에 아담은 발터로부터 재판 전에 당사자와 이야기 나누지 말라는 경고도 받은 상황이다. 우선 첫 번째 문장의 어려움은 ‘dazu’가 지시하는 문장이나 단어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이브로부터 아무런 확답도 받지 못한 아담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문장은 스스로 재판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지 결정하지 못한 아담의 당혹스러운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는 발터의 재촉 앞에서 어떻게 재판을 진행해야 할지 결정 내리지 못한 아담의 심리적 불안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인용문의 ‘아직 결심이 서지 않는데’라는 해석에서는 dazu는 누락되었고, 화법조동사의 뉘앙스는 반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명확한 판단과 선택을 의미하는 ‘결심’이라는 단어의 채택은 갈팡질팡하는 아담의 마음 상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해당 문장을 배중환은 “내가 그것에 대해 결정할 수 없다니 - !”(배중환 1993, 54) 또는 “난 그렇게 할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배중환 2022, 44)라고 번역했고, 김기선은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할 수가 없단 말이야!”(김기선, 46)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결심’ 대신 ‘결정’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김기선의 문장이 이 뉘앙스를 가장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세 번째 줄의 밑줄 친 부분은 이후 배중환의 번역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이제 항아리의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가 나오는 두 번째 인용문으로 넘어가 보자.
Frau Marthe: O ja. Entscheiden. Seht doch! Den Klugschwätzer! Den Krug mir, den zerbrochenen, entscheiden! Wer wird mir den geschiednen Krug entscheiden? Hier wird entschieden werden, daß geschieden Der Krug mir bleiben soll. Für so'n Schiedsurteil Geb ich noch die geschiednen Scherben nicht.(Kleist 1984, 417-423. 밑줄 필자 강조)
마르테 부인 아, 그래. 정해지지, 이 아는 체하는 녀석아. 내 이 항아리가, 깨져버린 이것이 정해진다니, 산산조각이 난 이 항아리를 누가 정해준단 말이야? 응, 산산조각인 채로. 이 항아리를 내 것으로 정해준단 말이야? 그렇게 정해진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난 조각 하나도 내놓지 않겠어.(정영호, 387. 밑줄 필자 강조)
본격적인 법정 장면이 시작되는 6장의 첫 부분인 위 인용문에서는 ‘geschieden’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이 대사에서 ‘geschieden’은 앞뒤의 ‘entscheiden’, ‘Schiedsurteil’과 어우러져 운율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entscheiden과의 연관성 때문에 ‘깨어진’을 의미해야 할 자리에 ‘갈라진, 분리된’이라는 의미로 geschieden이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테의 이 대사가 위치한 맥락을 보면 이 단어의 “중의적 zweideutige Sprache”(Kleist 1984, 542) 쓰임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사의 상대방은 이브의 약혼자인 루프레히트의 아버지 파이트 Veit이다. 항아리를 깬 범인(=약혼 관계를 파기한 당사자)으로 루프레히트를 지목한 마르테는 파이트가 루프레히트가 항아리를 깬 사람이라고 판결 날 경우 반드시 보상하겠다고 확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을 삭이지 못한다. 이미 깨진 항아리는 원상복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가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그녀가 화를 낸다고 항아리가 다시 원상 복구되는 것도 아니다. 보상을 회피하지 않는 예비 사돈에게 마르테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항아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entschädigen, ersetzen) 계속해서 악을 쓰는 마르테에게 루프레히트가 그녀가 꿰매고 싶은 것은 ‘구멍 난 항아리’에 상응하는 ‘구멍 난 결혼’이라고 응수하는 대사에서도 확인 가능한 것처럼 분노의 원인은 항아리 파손과는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딸과 루프레히트의 파혼을 결코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에 기인한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루프레히트와 이브의 대화에서 이브가 “그렇게 원한을 품고 나로부터 떠날 거냐? Willst du mit solchem Grolle von mir scheiden?”(Kleist 1984, 461)라고 말할 때 ‘scheiden/geschieden’의 중의성은 명확해진다(Schneider 2013, 36). 무엇보다 ‘geschieden’이 일반적으로 ‘깨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라는 점에서 이 단어는 ‘zerbrochen’과는 다르게 번역되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geschieden’의 중의성을 포섭할 수 있는 단어로 번역된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위 인용문에서 ‘zerbrochen’은 ‘깨져버린’으로, ‘geschieden’은 ‘산산조각’으로 번역된 것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작품에서 항아리는 일부만 구멍이 난 채 여전히 어느 정도는 항아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상태인데, 우리 말에서의 ‘산산조각난’이라는 형용사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상태를 상기시킨다는 점은 상당히 문제적이라 할 것이다.
마르테 부인 예. 판결난다고요.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잘난척하는 사람아. 내 깨어진 항아리에게 판결을 내린다. 도대체 누가 내 깨어진 항아리에게 판결을 내릴까요? 여기서 그 항아리가 나와 관계를 끊고 있어야 할 지를 판결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중재 판결을 위해 내 깨어진 항아리 조각들을 내주고 싶지 않습니다.(배중환 1993, 44. 밑줄 필자 강조)
마르테 부인 그래요, 결판난다고요? 자, 저 잘난 척하는 사람을 좀 보세요. 저 깨어진 항아리를 결판낸다고요? 도대체 누가 저 깨어진 항아리에 결판을 내릴까요? 산산조각 난 그 항아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인데도 여기서 결판을 낸다니요? 그런 결판을 위한 것이라면 제 깨어진 항아리 한 조각도 내주지 않겠습니다.(배중환 2022, 37. 밑줄 필자 강조)
마르테 그래요. 결판이 나겠죠. 이런 건방진 것들! 이 결판난 항아리를 가지고 결판을 내린다고? 누가 깨어진 항아리를 보상해 준답디까? 이 항아리가 다시는 온전한 새 항아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여기서 판결해 준다고요? 그런 판결은 나한테는 결판난 항아리 조각만큼의 가치도 없어요.(김기선, 38. 밑줄 필자 강조)
배중환이나 김기선의 번역도 ‘geschieden’의 중의성에는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는 듯하다. 정영호가 적어도 ‘zerbrochen’과 ‘geschieden’에 대한 대응어를 설정한 것과 달리 배중환은 ‘zerbrochen’과 ‘geschieden’의 번역에 분명한 차이를 두지 않는다. 우선 1993년의 번역에서는 두 번째 행의 ‘zerbrochen’과 세 번째와 다섯 번째 행의 ‘geschieden’은 ‘깨어진’으로, 네 번째 행의 ‘geschieden’은 ‘(나와) 관계를 끊고’로 번역하였다(배중환 1993, 44). 2022년의 번역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으나 기존의 네 번째 행의 ‘geschieden은 ‘산산조각 난’으로 수정하였다(배중환 2022, 37). 김기선은 ‘entscheiden’과 형성한 운율을 고려한 번역을 시도한다. 그는 두 번째 행의 ‘zerbrochen’과 다섯 번째 행의 ‘geschieden’을 ‘entscheiden’과 같은 단어인 ‘결판난’으로 번역한다. 세 번째 행의 ‘geschieden’은 ‘깨어진’으로, 네 번째 행의 ‘geschieden’은 ‘다시 온전한 (새 항아리가) 될 수 없다’로 의역한다(김기선, 38). 클라이스트의 독일어로 구현된 운율이나 중의성을 한국어로 완전히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항아리의 상태 묘사를 위해 유독 이 지점에서만 단어의 일상적 쓰임을 벗어난 ‘geschieden’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가독성을 포기하더라도 원문의 흔적을 남겨두는 번역을 시도해 보거나, 각주 등을 통해 원문의 특성을 상기시켰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지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번역에서는 사소한 오류가 종종 발견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다만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작품을 번역하는 경우라도 초역의 번역과 초역이 아닌 번역은 완전히 다른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초역의 고유한 의의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배중환은 1993년과 2022년 총 두 차례에 걸쳐 <깨어진 항아리>를 번역했다. 세종출판사에서 출간된 첫 번째 번역은 <깨어진 항아리>만 단독으로 번역해서 출간한 것이고, 두 번째 번역은 <클라이스트 희곡선>이라는 제목의 선집에 수록된 것으로, 이 선집에는 <깨어진 항아리> 이외 <암피트리온>과 <홈부르크 왕자>가 실려있다. 배중환은 삼십여 년의 시간을 두고 출판사를 달리해 번역서를 냈으며, 두 번째 번역은 첫 번째 번역의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두 번역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확인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연히 눈에 띄는 부분은 어조의 변화이다. 예를 들면 첫 번역에서는 아담과 리히트가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설정했던 반면, 두 번째 번역에서는 아담과 리히트의 위계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도록 아담은 반말을, 리히트는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변경했다. 아울러 첫 번역에서 “당신 정신이 온전합니까?”(배중환 1993, 19)라고 번역했던 부분은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배중환 2022, 15)라고 윤문하는 등 전반적으로 표현을 자연스럽게 변화시키고 현대화하는 시도도 일관되게 이뤄지고 있다. 배중환 번역본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외의 번역과는 차별된다. 첫째, 상기한 문제의 ‘12장’, 즉 ‘변형’이 실려있는 번역서는 배중환의 1993년 번역과 2022년 번역서뿐이다. 다른 번역서들이 작품의 해설에서 초고의 12장을 언급하면서도 이 부분을 따로 번역하지 않았다. 배중환이 초고의 12장을 번역한 이유는 1993년의 번역서 역자 서문에서 밝힌 번역 저본의 편집 방식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번역의 저본을 밝힌 번역서도 배중환의 1993년 번역이 유일하다. 둘째, 배중환은 텍스트의 틈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번역가이다. 앞서 줄표 등 문장 생략이나 축약은 <깨어진 항아리>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것이 종종 문맥의 모호성을 초래한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다른 번역자들이 이 모호함에 개입하지 않거나, 또는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배중환은 모호함을 완화하기 위해 문장의 틈새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관련해서는 앞서 정영호의 개별 번역 비평에서 살펴본 첫 번째 인용문을 살펴보자.
아담 (혼잣말로) 빌어먹을! 내가 그것에 대해 결정할 수 없다니 - ! - 내가 도망칠 때에 무슨 소리가 났었지 - 리히트 (그를 깜짝 놀라게 하면서) 재판장님! 당신은 [귀가 먹었소]? 아담 내가? 맹세코 아니지!(배중환 1993, 44. 밑줄 필자 강조)
아담: (혼자서) 빌어먹을! 난 그렇게 할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 - 작별할 때에 분명히 ‘쨍그랑’ 소리가 났었지 - 리히트: (아담을 놀라게 하려는 큰소리로) 판사님! [귀가 먹었습니까]? 아담: 내가? 맹세코 아니지!(배중환 2022, 54. 밑줄 필자 강조)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원문은 “Seid Ihr –?”(Kleist 1984, 547)이며, 해당 부분을 정영호는 “당신은……?”(정영호, 391)으로, 김기선은 “판사님이 -?”(김기선, 46)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배중환은 이 부분을 줄표로 처리하는 대신 ‘역자주 또는 역자표기’를 의미하는 ‘[ ]’를 사용하여 ‘귀가 먹었습니까’라는 말로 채워 넣는다. 그가 이 줄표를 ‘귀가 먹었냐’는 의미로 채운 근거는 바로 이어지는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Licht: Was? Adam: Was? Licht: Ich fragte –! Adam: Ihr fragtet, ob ich –? Licht: Ob Ihr taub seid, fragt ich.(Kleist 1984, 548-550) 리히트: 뭐라고요? 아담: 뭐? 리히트: 제가 질문했습니다 - 아담: 자네는 혹시 내가 [범인]이냐고 질문했지? 리히트: 귀가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기 계시는 사법 고문관님께서 당신을 부르셨습니다.(배중환 2022, 45)
이 대사를 이어놓고 보면 위의 줄표 부분을 ‘귀가 먹었냐’는 의미로 채우는 것이 전혀 무리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작가의 입장에서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다. 줄표 자리에 ‘taub’이라는 단어 하나만 넣으면 되는데, 굳이 이 단어를 넣지 않고 줄표로 대체한 이유는 무엇일까? <깨어진 항아리>에서 독자/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는 계몽을 연상시키는 ‘빛’이라는 뜻을 그 이름으로 삼고 있는 영리한 출세주의자 ‘리히트’가 대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이미 극의 첫 장면에서 아담의 거짓말을 간파라도 한 듯 아담이 다친 이유를 집요하게 파고든 바 있다. 만약 리히트가 아담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담의 혼잣말을 들었다면, 이 줄표에는 전혀 다른 단어가 들어갈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범인’과 같은 단어가 여기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리히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추측을 발설할 수 없기에 이 칸은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번역자도 이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번역자 스스로 위 인용문 아담의 말에서 줄표로 처리된 부분을 같은 방식으로 ‘[범인]’이라고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Walter: […] Herr Schreiber, wißt Ihr den Prozeß zu führen? Adam: Ach, was! Licht: Ob ich – ei nun, wenn Ew. Gnaden –(Kleist 1984, 862-864) 리히트: 제가 [재판을 이끌어] 갈 수 있느냐고요 - 바로 지금, 사법 고문관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 할 수 있습니다.(배중환 2022, 63)
위 인용문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기선이 “제가요? 검열관님께서 원하신다면-”(김기선, 64)이라고 번역한 리히트의 마지막 대사를 배중환은 위와 같이 줄표를 채워 넣어 보충적으로 번역하였다. 이 때문에 일곱 개의 단어로 구성된 리히트의 답변은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 문장에서의 줄표는 리히트의 선뜻 답하기 곤란한 망설임을 반영한다. 발터의 제안을 따를 경우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자기 상사의 자리를 빼앗는 셈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자가 텍스트의 틈새에 개입하는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의 번역 모토는 친절한 번역이다. 번역본이 원문보다 압도적으로 양이 많아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1993년의 번역본보다 2022년의 번역본에서 더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반대로 이러한 설명적이고 친절한 번역이 문학의 내용적 측면에만 치우쳐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고민해 볼 필요도 있다.
마지막으로 <깨어진 항아리> 등장인물의 이름 번역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고유명사는 보통 음역하기에 대개는 번역본들 사이에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에바 Eva’라는 이름의 음역이 문제가 된다. 이 이름을 세 명의 번역자가 다 다르게, 즉 정영호는 ‘에페’로, 김기선은 ‘에바’로 그리고 배중환은 ‘이브’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중환 자신도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다 독일어로 음역하고 있기에, 이 이름만 ‘이브’로 번역한 것은 번역본을 관통하는 일관된 원칙에는 위배된다. 다만 이 변칙이 ‘에바’가 ‘이브’인지 모르는 한국의 독자/관객에게 ‘아담과 이브’의 관습적인 관계를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아담의 이름이 지닌 성경적 함의가 작품의 1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작품에서 성경에 기반한 아담과 이브의 전통적인 관계가 철저히 전복되고 해체되고 있다는 점에서(둘은 연인이 아닌 위계에 의한 성적 억압 관계에 있으며, 아담의 타락은 이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 연결 고리를 인식하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아울러 봉건적 구세계를 표상하는 아담은 계몽주의적 합리성으로 무장한 ‘리히트’(빛)와 ‘발터(>walten, 관리하다)’에 의해 점진적으로 대체될 예정인데, 이런 맥락에서 이들의 이름이 지닌 의미도 각주 등을 통해 독자/관객에게 설명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4) 김기선 역의 <깨어진 항아리>(2005)
김기선의 <깨어진 항아리>는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총서 <독일희곡시리즈>의 12권으로 출간되었다. 이미 앞서 몇몇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김기선 번역의 가장 큰 장점은 ‘가독성’이다. 드라마 번역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김기선의 번역은 간결하고 압축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어 낭독하기에 좋다. 이러한 유려함은 필요할 경우 늘리거나, 빼는 방식으로 강조되어야 할 대사의 완급을 잘 다루는 것에 기인하는 것 같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Licht: Der erste Adamsfall, Den Ihr aus einem Bett hinaus getan.(Kleist 1984, 62-63) 리히트: 침대에서 떨어진 최초의 아담이 된 셈이군요.(정영호, 375) 리히트: 최초의 아담의 추락. 그것을 당신이 침대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했군요.(배중환 1993, 20) 리히트: 아담의 최초의 실족이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내디딘 아담의 최초의 실족이라 -(김기선, 14) 리히트: 침대에서 떨어진 첫 아담입니다.(배중환 2022, 15)
작품의 극 초반부에 나오는 이 대사는 성경적 의미에서의 인류의 원죄를 암시하면서, 동시에 ‘아담’의 실족(이브의 방에서 떨어짐, 리히트에게는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거짓말) 그리고 그 실족이 가져올 아담의 몰락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하는 중요한 핵심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을 보면 ‘최초의 아담의 추락/실족’이라는 명사가 한 행의 일부를 구성하고, 줄바꿈이 된 상태에서 이 문장을 꾸며주는 관계절이 이어진다. 원문에서는 행의 여백과 함께 ‘Der erste Adamsfall’만 독립적으로 쓰여 있기에 텍스트그래픽적인 측면에서도 이 단어가 부각되는 효과가 생긴다. 정영호의 번역과 배중환의 2022년 번역은 두 개의 행으로 이루어진 이 문장을 한 줄의 문장으로 만들고, ‘실족/몰락/타락’이라는 명사는 동사로 풀어서 번역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중요한 명사의 중의성은 전혀 강조되지 못한다. 배중환의 1993년 번역과 김기선의 번역만이 이 명사를 독립적으로 한 줄에 배치하여 원문과의 시각적 동질성을 꾀하고 있다. 배중환은 앞의 선행사와 수식 관계에 놓인 관계절을 해체한 뒤 관계사를 대명사처럼 처리한다. 반면 김기선은 완전히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는 ‘최초의 아담의 실족’을 한 번 더 번역한다. 다시 말하면 인용문의 두 번째, 세 번째 줄이 원문의 번역이고, 첫 번째 줄은 추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문의 두 행이 번역서에서는 세 줄로 늘어난다. 이런 방식을 통해 첫 번째 줄은 원문의 첫 행과 동일한 시각적 배치를 갖게 되고, 두 번째 세 번째 줄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으로 기능하게 된다. 김기선의 번역이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원문의 사정과는 달리 다른 번역에서는 주의하지 않고 넘어가 버릴 가능성이 높은 중요한 지점에 독자/관객을 멈추게 하고, 주목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번역의 의의가 확인된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강점으로 삼는 이 번역의 아쉬운 점은 의외의 오역들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의외’라고 표현한 이유는 선행된 번역들을 참고만 해보아도 피할 수 있었을 실수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이 번역서에서는 “Sackzehnte”(Ⅰ, 385), 즉 “십일조”(배중환 1993, 41)를 폐지했다는 의미를 “두 직책”(앞 행의 목사와 교장)을 폐지했다고 해석한다.
Adam: So wars – der Leberecht – Walter: Wer? Adam: Oder Ruprecht – Walter: Wer? Adam: Oder Lebrecht, der den Krug zerschlug.(Kleist 1984, 1083-1084)
또한 위 인용문에서는 아담이 잘못 발음한 첫 행의 이름 “레베레히트”를 원래의 이름인 “레프레히트”(김기선 78)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원문의 대화가 지닌 희극적 요소는 반감된다. 배중환의 1993년 번역도 이 지점에서 같은 실수를 하고 있는데, 정영호의 초역은 제대로 음역되어 있다. 이 또한 선행 번역서를 전반적으로 비교 대조해 보지 않음으로써 발생했을 법한 실수라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3. 평가와 전망
출판된 도서의 형태로 독자와 만나는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엄밀한 의미에서 연극 공연을 전제로 한 텍스트이다. 집단 창작과 집단 관람은 연극의 핵심적인 특징이자 고유한 장점이지만, 바로 이 집단성 때문에 여러 제약이 뒤따른다. 특히, 레제드라마 Lesedrama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고 드라마를 연극 공연을 위한 일종의 대본으로 전제할 경우, 드라마 자체를 완결된 작품으로 취급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서양 드라마의 국내 수용 과정에서 더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우선 드라마는 잘 번역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독자가 많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공연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드라마의 번역 출판 자체가 쉽지 않다.
우리의 드라마 번역이 처한 현실은 독일 사람들은 모두가 읽는다는, 독일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희극 <깨어진 항아리>도 피해가지 못한 듯하다. 이 작품이 지닌 명성에 비하면 번역 종은 매우 빈약하고, 실제 번역에서 확인 가능했던 것처럼 번역 종의 결핍은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 속에서 더 적절한 번역을 모색해가는 번역의 ‘진화’에는 취약한 환경이 된다. 무엇보다 클라이스트의 희극 번역에서 확인되는 여러 가지 난관은 드라마 번역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해서는 희극이나 비극이냐, 운문극이냐 산문극이냐 또는 고전극이냐 현대극이냐 등 여건들에 따라 발생하는 변수들도 촘촘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각성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변수가 최종적으로는 ‘대화’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드라마 번역의 고유한 특성이 확인된다. 나아가 이 ‘대화’가 구어적 환경과 더 친밀하다는 점에서, 그러나 한국어가 독일어와는 달리 구어와 문어를 엄격하게 구분한다는 점에서 드라마 번역의 어려움이 증폭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Adam: Heut noch, er, der Gerichtsrat, her, aus Utrecht!(Kleist 1984, 77) 아담 오늘이라도 그 법률 고문관이 여기 위트레히트에!(정영호, 375) 아담 오늘중으로, 사법고문관께서 우트레히트에서 이리로!(배중환 1993, 20) 아담 오늘중으로, 사법고문관께서 우트레히트에서 이리로 온다!(배중환 2022, 15-16) 아담 오늘 중이라고? 검열관이 이리로 와? 위트레히트에서? 검열하려고?(김기선, 14)
온몸이 엉망진창이 된 아담에게 때마침 아담의 업무 현황을 시찰하러 호랑이 법률검열관이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원문의 대사에서는 격을 제외한 통사적 원칙, 즉 어순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때 아담의 대사에서 나타난 어순 파기는 아담의 놀람, 허둥지둥거림, 다급함, 나아가 잠재적 또는 앞으로 닥칠 두려움을 함축한 것이며, 따라서 이 문장에서는 당황한 긴박함의 번역이 관건이다. 우선 첫 번째 번역에서는 ‘오늘이라도’와 ‘여기 위트레히트에’가 오역이다. 아울러 콤마를 모두 생략해 버림으로써 텍스트그래픽 차원 textgraphisch을 살리지 못했다. 두 번째 번역은 ‘오늘중으로’와 나머지 문장 사이에 (사실은 불필요한) 콤마를 한 번 사용하였으나, 번역된 한국어 어순은 그다지 부자연스럽지 않다. 특히 ‘께서’라는 존칭 조사를 챙기는 아담의 태도는 긴박함을 상쇄시켜 버린다. 같은 번역자의 최근 번역인 세 번째 번역은 두 번째 번역과 대동소이하지만, 부사 ‘her’로부터 ‘온다’라는 동사를 이끌어낸다. 마지막 네 번째 번역의 특징은 원문에서 총 네 번 사용된 콤마를 네 번의 ‘물음표’로 대체한 것이다. 여기서도 원문에는 없는 ‘(이리로) 와’, ‘검열하려고’와 같은 번역어들이 첨가된다. 이 때문에 원래 한 줄의 분량은 두 줄로 늘어났고, 늘어난 문장 길이는 역시나 원문의 긴박함과는 상충하는 효과를 낳는다.
위의 번역은 우리 언어가 지닌 ‘인쇄된 텍스트와 문어성의 (무의식적이고) 강박적 고착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원문의 핵심 메시지는 어순의 파기, 즉 비문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이들은 한국어로의 번역과정을 거치면서 매끄러운 문장으로 재정비된다. 아마도 인쇄된 텍스트와 비문(또는 구어)은 병립할 수 없다는 관념이 우리 무의식의 저변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쇄된 텍스트와 구어의 자연스러운 공존은 공연을 염두에 두고 번역되는 연극 번역에는 해당되지 않는 드라마 번역만의 문제이다. 따라서 활자화되는 대사에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정영호(1990): 깨어진 항아리. 금성출판사.
배중환(1993): 깨어진 항아리. 세종출판사.
김기선(2005): 깨어진 항아리.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배중환(2022): 깨어진 항아리. 해피북미디어.
- 각주
- ↑ 이 공연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었고, 해당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공연이 이뤄졌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린곳: https: //www.allurekorea. com/2020/11/25/%eb%82%a8%ec%82%b0-%ec%9c%84%ec%9d%98-%ec%a0% 80-%ec%88%98%ec%a0%95/?utm_source=naver&utm_medium=partnership (검색일: 2023.8.6.)
- ↑ <깨어진 항아리> 프로그램 참조. 실린곳: https://archive.arko.or.kr/search/0019/0000 00823104 (검색일: 202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