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 브리스트 (Effi Briest)"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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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오늘의 세계문학,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4 || 테오도르 폰타네 || 김영주 || 1982 || 中央日報社 || 6-346 || 편역 || 완역 || | + | | <div id="김영주(1982)" />[[#김영주(1982)R|1]]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오늘의 세계문학,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4 || 테오도르 폰타네 || 김영주 || 1982 || 中央日報社 || 6-346 || 편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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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대산세계문학총서 83 || 테오도르 폰타네 || 김영주 || 2009 || 문학과지성사 || 7-408 || 완역 || 완역 || | + | | <div id="김영주(2000)" />[[#김영주(2000)R|2]]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대산세계문학총서 83 || 테오도르 폰타네 || 김영주 || 2009 || 문학과지성사 || 7-408 || 완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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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세계문학전집 48 || 테오도어 폰타네 || 한미희 || 2010 || 문학동네 || 7-414 || 완역 || 완역 || | + | | <div id="한미희(2010)" />[[#한미희(2010)R|3]]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세계문학전집 48 || 테오도어 폰타네 || 한미희 || 2010 || 문학동네 || 7-414 || 완역 || 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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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번역 현황 및 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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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사실주의 소설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가 1894년과 1895년에 <도이체 룬트샤우> 지에 연재하고 1895년에 단행본으로 펴낸 <에피 브리스트>는 작가의 후기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이다. 한국에서는 1982년에 김영주가 처음으로 <에피 브리스트>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중앙일보사의 <오늘의 세계문학> 제3권으로 출판하였고, 뒤이어 동일 번역자가 개작하여 200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의 제83권으로 출판하였다. 이후 한미희가 동일한 제목으로 2010년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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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의 여타 사실주의, 즉 러시아나 프랑스, 영국의 사실주의와 달리 독일 사실주의는 한국에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한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야 독일 관념주의의 전통에서 해석하자는 새로운 시각인 ‘시적 사실주의 poetischer Realismus’ 개념을 중심으로 연구와 소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뒤늦은 감이 있으며 이는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중 테오도르 폰타네의 작품은 1980년에 처음으로 몇몇 시가 번역되었고, 산문으로는 <에피 브리스트>가 1982년에 번역되었으며, 이후 사실주의 연구 붐과 더불어 몇몇 장편과 단편소설이 활발하게 번역되었으나 최근에는 다시 소강기를 맞이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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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이 소설은 계속 동일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며 <3월 18일>이 더불어 번역되어있는 김영주의 중앙일보사 번역본을 제외하고는. 이 한 작품만 담아 단행본으로 번역되었다. 소설은 경직된 프로이센 사회에서 에피의 약혼과 결혼, 탈선, 이혼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김영주나 한미희의 번역본 표지에도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한 불행한 젊은 여성의 무너진 내면을 드러내는 그림이 실려 있다. 독일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소설로 자주 수업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유럽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소설로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더불어 여성의 일탈 서사라는 공통된 소재를 중심으로 비교되기도 하며 최근에는 당대의 사회상, 결혼제도, 젠더상, 사랑 담론들이 주로 논의되곤 한다. | ||
+ | 폰타네 전문 연구자 김영주의 번역본은 독일에서 출판된 <에피 브리스트> 핸드북인 <Effi Briest. Handbuch>(2020)에 해외 번역사례로도 실려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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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번역 비교 분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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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김영주(1982)| 김영주 역의 <에피 브리스트>(1982)]]<span id="김영주(1982)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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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피 브리스트>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영주의 1982년 중앙일보사 번역은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을 한국에 처음 알렸다는 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세심하고 정확하고 성실하게 번역한 판본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번역본의 첫머리 부분에는 작가의 사진뿐 아니라 친필 원고, 초상화, 생가, 서재 사진과 더불어 작가의 대표작들의 독일어본 사진들이 10여 종 실려 있어 작가와 작품 세계 소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단행본에는 소설 <에피 브리스트>뿐 아니라 <3월 18일>이라는 폰타네의 자서전적 색채가 짙은 글이 같이 실려 있는데, 1848년의 독일 시민혁명과 관련된 부분을 담아 작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작품 말미의 역자 후기는 <독일 사회소설의 거장>이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생애, 문학사적 배경, 독일의 사회소설 등 작품을 둘러싼 맥락뿐 아니라 작품 <에피 브리스트>에 대한 주제 등을 요약해서 전달하여, 19세기-20세기의 독일 전환기 상황에서의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을 다루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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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에피 브리스트> 번역본은 지난 30년간 독자적인 번역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번역으로 폰타네의 소설을 대변했다. <오늘의 세계문학>의 3번으로 선정된 데에서 보듯 당시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독일 작가의 대표작을 소개한다는 의욕도 드러난다. 역자는 사건이나 긴장된 줄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심리나 인물들 간의 대화에 집중한 이 소설을 되도록 원문에 충실하게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전체 구조, 문단, 문장, 어휘 등을 원본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역자는 원작이 역사적 시차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거리가 큰 작품임을 인지하고 있고 되도록 그 배경지식이나 맥락도 같이 상세하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향의 번역 원칙은 무엇보다도 역자주에서 드러난다. 이 주석들은 19세기 말 독일 프로이센 사회라는 작품 배경에 대한 지식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소설의 시작 첫 부분만 보아도 드러난다. “게오르그 빌헬름 시대”, “대황”, “구즈베리 열매”, “프릿츠 로이터”, “미닝과 리닝”, “가브리엘 천사” 등 시대적,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한국 독자에게 낯선 이질적인 소설의 배경은 괄호 안에서 설명이 되고 있다. 또한 원작의 간결하게 압축된 서술이나 대화 부분들을 한국 독자를 위해 풀어서 옮겨 이를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역자는 “진짜 맥주 정열” 혹은 “슐론”에서 보다시피 독일의 관용어나 특정 자연현상도 되도록 원어를 같이 담아 번역하여 그 느낌을 같이 옮기고자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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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주는 의미를 더 자세히 표현해 주는 조동사를 특히 신경 써서 번역함으로써 사회적 압박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müssen”이나 “dürfen”의 반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의 아이’로 대변되는 에피는 사회적 규율과 원칙으로 대변되는 인슈테텐과 성격상 대조를 이루지만, 사회의 강한 압력은 이미 결혼 전의 에피조차도 “müssen”을 사용하여 개인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정략결혼을 “그런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갖는 결말이었지”(15)라고 옹호하면서 에피의 이미 사회화된 내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핵심 장면이라 할 인슈테텐의 결투 결정 장면에서도 그러한데, 뷜러스도르프가 인슈테텐에게 “그 결투가 불가피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인슈테텐은 “저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323)라고 “müssen”을 사용하여 대답하는데 역자는 이를 강조한다. 이러한 조동사에 대한 주목은 다른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에피는 사회에서의 추방 후 외동딸 안니를 3년 만에 만나게 되나 아무런 정감의 교환 없이 “네, 허락을 받으면”(dürfen)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하고 자신의 죄보다 더 참기 어려운 그들의 미덕을 비판하고는 “난 살아가야 해.”(377) 라고 자문자답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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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김영주(2000)| 김영주 역의 <에피 브리스트>(2000))]]<span id="김영주(2000)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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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자는 2000년에 <에피 브리스트>를 다른 출판사(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한번 출판하였다. 이 개작본은 번역에 있어서는 큰 변화는 없으나 부분적으로 개선을 하고 이전의 번역본보다 문단을 보다 세분화하고 있어 독자로서는 읽기가 편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본문 중 괄호 안의 역자주를 쪽 하단의 각주로 옮기고 또한 한자어 처리를 많이 줄여 보다 현대화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역자 후기는 <테오도르 폰타네의 걸작. 에피 브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사회소설, 페미니스트적 성향, 독일 사실주의의 특징인 변용, 체념 등 그간의 연구 성과들이 간략하게 앞쪽에 보충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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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한미희(2010)| 한미희 역의 <에피 브리스트>(2010)]]<span id="한미희(2010)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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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희의 2010년 번역은 김영주의 번역본만이 있는 상황에서, 언어나 감각이나 문체상으로 산뜻한 새 번역으로서 폰타네의 작품을 한국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시 소개하고 있다. 이 번역의 특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폰타네의 작품을 언어나 문체에서 현지화, 현대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우선 소설 전체에 있어서 번역어가 현대화된 것이 눈에 두드러진다. 소설의 도입부인 호헨크레멘 에피 집의 정원 묘사는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세밀하고 구체적이며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한미희는 어휘나 구문, 문장 등을 읽기 쉽게 현대화하여 독자가 이 광경을 보다 쉽게 상상하게 만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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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히 사건보다는 사건의 전과 후에 보이는 인물들의 반응이 주를 이루는 이 소설에서 인물들 간의 대화가 동시대적 언어로 옮겨져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원작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되 간결하며 직접적인 번역을 통하여 생동감이 생겨나고 있고 독자들은 인물들의 심리나 대화, 혹은 갈등을 더 깊이 그리고 더 현실감 있게 추체험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이 소설을 대상으로 개인과 사회의 갈등에 주목했다면, 현대에는 인물들의 내면이나 심리적 구조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데 한미희의 번역이 이를 보다 용이하게 파악하게 해주고 있다. 주인공 에피 브리스트와 친구들과의 대화는 마치 현대 소녀들의 대화라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에피는 약혼을 하기 전에 친구들에게 어머니와 인슈테텐의 과거 연애사를 전달한다. 이 연애사는 딸인 에피의 결혼 관계에도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에피의 결혼에서의 불안감과 압박감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는데, 작가의 중요한 심리적 복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의 해석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독일어 원문 및 김영주의 번역본(2000)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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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un, es kam, wie's kommen mußte, wie's immer kommt. Er war ja noch viel zu jung, und als mein Papa sich einfand, der schon Ritterschaftsrat war und Hohen-Cremmen hatte, da war kein langes Besinnen mehr, und sie nahm ihn und wurde Frau von Briest … Und das andere, was sonst noch kam, nun, das wißt Ihr … das andere bin ich.(440)<ref>Fontane, Theodor(1985): Effi Briest. München: Hanser. 이하에서는 위에서처럼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ref> | ||
+ | <br> | ||
+ | 그런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갖는 결말이었지. 그 남자는 아직 너무 어렸대. 우리 아빠가 귀족원의원이 되어서 이곳 호헨 크레멘을 모두 소유하고 우리 엄마 앞에 등장했을 때, 우리 엄마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아빠를 선택해서 브리스트 부인이 되신거야...... 그리고 너희들도 알지. 그다음 바로 이 몸이 태어난 거야.(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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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희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어 두 번역자의 다른 언어와 문체가 드러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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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뻔하지 뭐. 남작님은 아직 너무 젊었고, 프로이센 지방의회의 귀족 지주 대표이자 호엔크레멘의 주인인 우리 아빠가 등장하자 엄마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빠를 선택해서 브리스트 부인이 됐단다...... 그리고 그다음엔 ...... 알지? 바로 내가 태어났지.(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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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작품 전반에 걸친 사건이나 인물 서술에 있어 언어가 동시대의 언어로 현대화되어 현대 한국의 독자에게도 큰 낯섦이나 거리감이 없이 잘 읽히고 있다. 이는 에피를 “작은 아씨”로 부르는 호칭에서뿐 아니라 인슈테텐의 직명인 “Landrat”는 “군수”(이전 “관구장”)로, 크람파스의 직명인 “Landwehrbezirkskommandeur”는 “민방위대 대장”(이전 ”관구사령관“) 등으로 번역한 현지화된 직명에서도 드러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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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방향은 소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27장의 인슈테텐과 뷜러스도르프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서 인슈테텐이 대변하는 당대 사회의 명예 개념과 사회 개념은 김영주(2000)에게서 다음과 같이 옮겨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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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eil es trotzdem sein muß. Ich habe mir's hin und her überlegt. Man ist nicht bloß ein einzelner Mensch, man gehört einem Ganzen an, und auf das Ganze haben wir beständig Rücksicht zu nehmen, wir sind durchaus abhängig von ihm.(663) | ||
+ | [...] | ||
+ | Jenes, wenn Sie wollen, uns tyrannisierende Gesellschafts-Etwas, das fragt nicht nach Charme und nicht nach Liebe und Verjährung. Ich habe keine Wahl. Ich muß.(664) | ||
+ | <br> |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 가지로 곰곰이 생각해보았어요. 우리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에 소속되어 있는 개인입니다. 따라서 전체라는 것을 항상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철두철미 그 전체에 의존하고 있어요.(322) | ||
+ | <br> | ||
+ | 그러나 굳이 말씀드리자면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적인 그 무엇은 매력이라느니 사랑이라느니 시효 따위를 문제시하지 않아요.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저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3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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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희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주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한국어의 구조와 생략을 통한 묘미를 살려 번역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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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로 깊이 생각해보았어요. 사람은 개인일 뿐 아니라 전체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이 전체를 생각해야 해요. 우리는 전적으로 이 전체에 종속되어 있어요.(326) | ||
+ | <br> | ||
+ | 하지만 굳이 듣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전권을 휘두르는 사회의 그 어떤 것은 매력과 사랑과 시효에게 묻지 않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저는 해야 합니다.(3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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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러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한미희 번역의 특징은 주인공의 내면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주요 모티브인 중국인 유령에 대한 부분에서도 드러나, 땅에 질질 끄는 “커튼”(이전 “휘장”)으로 쉽게 번역되고 있다. 여주인공을 두렵고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이렇게 간명하게 번역될수록 이를 의도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아내를 교육시키기 위해 그냥 현상태로 놔두려는 인슈테텐의 의도는 독자에게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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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희의 번역은 전체적으로는 80년대 이후 이루어진 소설에 대한 한국 연구상황의 진전을 반영하고 있다. 한동안 폰타네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문화 매체와의 비교 연구나 상호 매체성 연구가 활발했었는데 역자는 이 부분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는 작품의 바탕 구조에 흐르는 의미의 정합성을 드러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늘의 딸>과 같은 문학 작품뿐 아니라 미술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특히 인간의 욕망과 탈선이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소설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상징주의파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회화 <행복한 사람들의 섬 Insel der Seligen>에 대한 정확한 작품명 제시와 이에 대한 “당시 나체의 요정을 그려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는”(30) 간결한 주석은 중요하다. 한편으로 화자인 사촌 다고베르트의 에피에 대한 에로스적 시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이렇게 촘촘하게 짜여져 있는 의미망은 주인공의 탈선을 미리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초반에 친구 헤르타에게 에피가 한 이야기로 부정한 여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물속에 빠뜨리는 콘스탄티노플의 관습은 에피의 부정 이후 남편과 우연히 헤르타 호수를 방문하고 두려워하는 에피의 모습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는 사회의 압박을 “희극 Komödie”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을 일관되게 같은 용어로 번역하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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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의 연구 경향을 반영한 번역이라는 또 다른 예로 배경이 되는 프로이센 사회가 이름 그대로 등장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상 등으로 우회적으로 언급할 수도 있으나 역자는 비스마르크(95, 286, 301)나 영지인 바르친(95, 110)이라는 고유명사를 매번 그대로 쓰고 있으며, 이는 작품 내에 나오는 <비스마르크 후작에게>(61) 식당이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구 보오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구 보불전쟁)의 승전지인 스당 전승 기념일(38)이나 쾨니히그레처의 번역(361)도 원어를 살려 빠짐없이 세심하게 그대로 옮겨주고 있다. 에피가 10월 3일에 결혼을 하고 비스마르크의 인슈테텐 소환으로 중국인 유령을 보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전일에 딸을 낳고 엠스에 요양을 갔다가 부정이 발각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사회에서 추방된 후 베를린의 쾨니히그레처 가의 작은 집에 살았다면, 이는 개인사에 침투한 당대 프로이센 사회의 영향력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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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희의 역자 후기는 <사랑과 결혼, 그 치명적인 경계>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테오도르 폰타네의 작품 세계 및 에피 브리스트에 나타난 여성과 사회로 나누어 작품을 해설하고 있다. 특히 후반 부분에서는 간통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여성 인물들뿐 아니라 인슈테텐의 체념을 시대적 상황에서 해석하고 무엇보다도 서술 내용보다 “등장인물들 모두를 따뜻한 시선을 바라보고 담담하게 그리는” 작가의 서술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소설에 여러 차례 시도동기로 등장하고, 동시에 후에 귄터 그라스의 장편 소설의 제목이 된 “Das ist ein weites Feld.”는 김영주는 “그건 쉽게 논의하기 어려운 광범위한 문제요.”로, 한미희는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로 번역하여, 원어를 살리려는 역자와 의도 중심으로 옮기는 각 역자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 구절은 매사에 합리적이고 분명한 판단을 내리고 시류를 쫓아가는 부인 루이제와 달리 항상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남편 노 브리스트의 자세와 관련이 있는데, 나중에 사회적 체면보다는 자식을 택하는 그의 따뜻한 휴머니티 및 소설에 관통하는 사실주의적 태도인 ‘반어적 해학(Humor)’과 연결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절이다.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 ‘폰티 Fonti’로 작가 폰타네와의 강한 연관성을 상기시키는 그라스의 소설 <Ein weites Feld>는 아직 한국에 번역이 되지 않았으나 이를 언급할 때 작품명이 자주 <광야>로 언급되는데, 허영재의 <난제> 제안처럼 폰타네의 소설과의 관련 속에서 고찰이 되어야 하며 더 적합한 번역 제목이 필요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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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평가와 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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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주의 충실한 <에피 브리스트>의 번역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이 작품을 둘러싼 많은 종단, 횡단 연구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사실주의나 테오도르 폰타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물론 다른 유럽의 사실주의와 독일 사실주의의 비교와 분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사실주의 3대 간통 소설로서 <안나 카레니나>, <마담 보바리>와의 비교가 가능해졌고, 각 나라나 문화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이 작품들이 나온 공통의 배경인 사랑 담론, 성의 억압이나 젠더 질서 등이 토론이 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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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한미희의 예에서 보듯 작가의 대표작의 새로운 해석을 담은 새 번역은 마찬가지로 새로운 독자층을 끌어오며 새로운 독서와 해석을 가능케 한다.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는 특히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등 많은 작가들뿐 아니라 동명의 제목으로 베르너 파스빈더가 영화를 만든 것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영화화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었는데, 앞으로 이러한 비교 연구도 기대해 볼 만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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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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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주(1982): 에피 브리스트. 중앙일보사.<br> | ||
+ | 김영주(2000): 에피 브리스트. 문학과사상.<br> | ||
+ | 한미희(2010): 에피 브리스트. 문학동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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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v style="text-align: right">최윤영</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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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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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독일문학]] | [[분류: 독일문학]] | ||
[[분류: 폰타네, 테오도르]] | [[분류: 폰타네, 테오도르]] | ||
+ | [[분류: 비평된작품]] |
2024년 7월 28일 (일) 06:33 판
테오도르 폰타네(Theodor Fontane, 1819-1898)의 소설
작가 | 테오도르 폰타네(Theodor Fontane) |
---|---|
초판 발행 | 1894-1895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1895년에 출간된 테오도르 폰타네의 장편 소설로, 당대 사회와 개인과의 갈등 관계를 보여주는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에피 브리스트는 호엔크레멘 귀족 집안의 무남독녀로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한 17세 소녀로 등장하나, 곧 케신의 관구장인 38세의 프로이센 사회의 질서를 대변하는 인스테텐이 청혼을 하자 인습에 따른 결혼을 하게 된다. 애정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결혼생활은 곧 지루하고 고독한 것으로 드러나고, 집안에 출몰하는 중국인 유령 사건을 통해 에피는 결혼생활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에피는 군인 크람파스와 바람을 피우나 진정한 연애가 아니었기 때문에 잊게 된다. 그러나 뒤늦게 편지가 발각되자 남편은 크람파스와 결투를 하고 에피를 사회에서 고립시킨다. 마지막에 에피는 집으로 돌아가 일찍 죽게 된다. 이 소설은 <보봐리 부인>, <안나 카레니나>와 더불어 유럽의 3대 간통 소설로 간주되며, 노 작가 폰타네는 사건에 거리를 두고 주인공들의 회의와 유머를 통해 당대 결혼제도의 모순과 부조리, 여성에 대한 억압을 우회적으로 고발한다. 이 작품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1982년에 김영주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중앙일보사).
초판 정보
Fontane, Theodor(1894-1895): Effi Briest. In: Deutsche Rundschau 81-82. <단행본 초판> Fontane, Theodor(1896): Effi Briest. Berlin: F. Fontane & Co.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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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오늘의 세계문학, Contemporary world literature 4 | 테오도르 폰타네 | 김영주 | 1982 | 中央日報社 | 6-346 | 편역 | 완역 |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대산세계문학총서 83 | 테오도르 폰타네 | 김영주 | 2009 | 문학과지성사 | 7-408 | 완역 | 완역 | ||
에피 브리스트 | 에피 브리스트 | 세계문학전집 48 | 테오도어 폰타네 | 한미희 | 2010 | 문학동네 | 7-414 | 완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독일 사실주의 소설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가 1894년과 1895년에 <도이체 룬트샤우> 지에 연재하고 1895년에 단행본으로 펴낸 <에피 브리스트>는 작가의 후기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이다. 한국에서는 1982년에 김영주가 처음으로 <에피 브리스트>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중앙일보사의 <오늘의 세계문학> 제3권으로 출판하였고, 뒤이어 동일 번역자가 개작하여 200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의 제83권으로 출판하였다. 이후 한미희가 동일한 제목으로 2010년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았다.
유럽의 여타 사실주의, 즉 러시아나 프랑스, 영국의 사실주의와 달리 독일 사실주의는 한국에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한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야 독일 관념주의의 전통에서 해석하자는 새로운 시각인 ‘시적 사실주의 poetischer Realismus’ 개념을 중심으로 연구와 소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뒤늦은 감이 있으며 이는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중 테오도르 폰타네의 작품은 1980년에 처음으로 몇몇 시가 번역되었고, 산문으로는 <에피 브리스트>가 1982년에 번역되었으며, 이후 사실주의 연구 붐과 더불어 몇몇 장편과 단편소설이 활발하게 번역되었으나 최근에는 다시 소강기를 맞이하였다.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이 소설은 계속 동일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며 <3월 18일>이 더불어 번역되어있는 김영주의 중앙일보사 번역본을 제외하고는. 이 한 작품만 담아 단행본으로 번역되었다. 소설은 경직된 프로이센 사회에서 에피의 약혼과 결혼, 탈선, 이혼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김영주나 한미희의 번역본 표지에도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한 불행한 젊은 여성의 무너진 내면을 드러내는 그림이 실려 있다. 독일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소설로 자주 수업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유럽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소설로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더불어 여성의 일탈 서사라는 공통된 소재를 중심으로 비교되기도 하며 최근에는 당대의 사회상, 결혼제도, 젠더상, 사랑 담론들이 주로 논의되곤 한다. 폰타네 전문 연구자 김영주의 번역본은 독일에서 출판된 <에피 브리스트> 핸드북인 <Effi Briest. Handbuch>(2020)에 해외 번역사례로도 실려 있다.
2. 번역 비교 분석
<에피 브리스트>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영주의 1982년 중앙일보사 번역은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을 한국에 처음 알렸다는 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세심하고 정확하고 성실하게 번역한 판본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번역본의 첫머리 부분에는 작가의 사진뿐 아니라 친필 원고, 초상화, 생가, 서재 사진과 더불어 작가의 대표작들의 독일어본 사진들이 10여 종 실려 있어 작가와 작품 세계 소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단행본에는 소설 <에피 브리스트>뿐 아니라 <3월 18일>이라는 폰타네의 자서전적 색채가 짙은 글이 같이 실려 있는데, 1848년의 독일 시민혁명과 관련된 부분을 담아 작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작품 말미의 역자 후기는 <독일 사회소설의 거장>이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생애, 문학사적 배경, 독일의 사회소설 등 작품을 둘러싼 맥락뿐 아니라 작품 <에피 브리스트>에 대한 주제 등을 요약해서 전달하여, 19세기-20세기의 독일 전환기 상황에서의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을 다루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에피 브리스트> 번역본은 지난 30년간 독자적인 번역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번역으로 폰타네의 소설을 대변했다. <오늘의 세계문학>의 3번으로 선정된 데에서 보듯 당시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독일 작가의 대표작을 소개한다는 의욕도 드러난다. 역자는 사건이나 긴장된 줄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심리나 인물들 간의 대화에 집중한 이 소설을 되도록 원문에 충실하게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전체 구조, 문단, 문장, 어휘 등을 원본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역자는 원작이 역사적 시차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거리가 큰 작품임을 인지하고 있고 되도록 그 배경지식이나 맥락도 같이 상세하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향의 번역 원칙은 무엇보다도 역자주에서 드러난다. 이 주석들은 19세기 말 독일 프로이센 사회라는 작품 배경에 대한 지식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소설의 시작 첫 부분만 보아도 드러난다. “게오르그 빌헬름 시대”, “대황”, “구즈베리 열매”, “프릿츠 로이터”, “미닝과 리닝”, “가브리엘 천사” 등 시대적,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한국 독자에게 낯선 이질적인 소설의 배경은 괄호 안에서 설명이 되고 있다. 또한 원작의 간결하게 압축된 서술이나 대화 부분들을 한국 독자를 위해 풀어서 옮겨 이를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역자는 “진짜 맥주 정열” 혹은 “슐론”에서 보다시피 독일의 관용어나 특정 자연현상도 되도록 원어를 같이 담아 번역하여 그 느낌을 같이 옮기고자 하였다.
김영주는 의미를 더 자세히 표현해 주는 조동사를 특히 신경 써서 번역함으로써 사회적 압박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müssen”이나 “dürfen”의 반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의 아이’로 대변되는 에피는 사회적 규율과 원칙으로 대변되는 인슈테텐과 성격상 대조를 이루지만, 사회의 강한 압력은 이미 결혼 전의 에피조차도 “müssen”을 사용하여 개인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정략결혼을 “그런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갖는 결말이었지”(15)라고 옹호하면서 에피의 이미 사회화된 내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핵심 장면이라 할 인슈테텐의 결투 결정 장면에서도 그러한데, 뷜러스도르프가 인슈테텐에게 “그 결투가 불가피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인슈테텐은 “저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323)라고 “müssen”을 사용하여 대답하는데 역자는 이를 강조한다. 이러한 조동사에 대한 주목은 다른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에피는 사회에서의 추방 후 외동딸 안니를 3년 만에 만나게 되나 아무런 정감의 교환 없이 “네, 허락을 받으면”(dürfen)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하고 자신의 죄보다 더 참기 어려운 그들의 미덕을 비판하고는 “난 살아가야 해.”(377) 라고 자문자답한다.
역자는 2000년에 <에피 브리스트>를 다른 출판사(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한번 출판하였다. 이 개작본은 번역에 있어서는 큰 변화는 없으나 부분적으로 개선을 하고 이전의 번역본보다 문단을 보다 세분화하고 있어 독자로서는 읽기가 편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본문 중 괄호 안의 역자주를 쪽 하단의 각주로 옮기고 또한 한자어 처리를 많이 줄여 보다 현대화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역자 후기는 <테오도르 폰타네의 걸작. 에피 브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사회소설, 페미니스트적 성향, 독일 사실주의의 특징인 변용, 체념 등 그간의 연구 성과들이 간략하게 앞쪽에 보충되어 있다.
한미희의 2010년 번역은 김영주의 번역본만이 있는 상황에서, 언어나 감각이나 문체상으로 산뜻한 새 번역으로서 폰타네의 작품을 한국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시 소개하고 있다. 이 번역의 특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폰타네의 작품을 언어나 문체에서 현지화, 현대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우선 소설 전체에 있어서 번역어가 현대화된 것이 눈에 두드러진다. 소설의 도입부인 호헨크레멘 에피 집의 정원 묘사는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세밀하고 구체적이며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한미희는 어휘나 구문, 문장 등을 읽기 쉽게 현대화하여 독자가 이 광경을 보다 쉽게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사건보다는 사건의 전과 후에 보이는 인물들의 반응이 주를 이루는 이 소설에서 인물들 간의 대화가 동시대적 언어로 옮겨져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원작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되 간결하며 직접적인 번역을 통하여 생동감이 생겨나고 있고 독자들은 인물들의 심리나 대화, 혹은 갈등을 더 깊이 그리고 더 현실감 있게 추체험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이 소설을 대상으로 개인과 사회의 갈등에 주목했다면, 현대에는 인물들의 내면이나 심리적 구조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데 한미희의 번역이 이를 보다 용이하게 파악하게 해주고 있다. 주인공 에피 브리스트와 친구들과의 대화는 마치 현대 소녀들의 대화라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에피는 약혼을 하기 전에 친구들에게 어머니와 인슈테텐의 과거 연애사를 전달한다. 이 연애사는 딸인 에피의 결혼 관계에도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에피의 결혼에서의 불안감과 압박감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는데, 작가의 중요한 심리적 복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의 해석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독일어 원문 및 김영주의 번역본(2000)은 다음과 같다.
Nun, es kam, wie's kommen mußte, wie's immer kommt. Er war ja noch viel zu jung, und als mein Papa sich einfand, der schon Ritterschaftsrat war und Hohen-Cremmen hatte, da war kein langes Besinnen mehr, und sie nahm ihn und wurde Frau von Briest … Und das andere, was sonst noch kam, nun, das wißt Ihr … das andere bin ich.(440)[1]
그런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갖는 결말이었지. 그 남자는 아직 너무 어렸대. 우리 아빠가 귀족원의원이 되어서 이곳 호헨 크레멘을 모두 소유하고 우리 엄마 앞에 등장했을 때, 우리 엄마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아빠를 선택해서 브리스트 부인이 되신거야...... 그리고 너희들도 알지. 그다음 바로 이 몸이 태어난 거야.(15)
한미희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어 두 번역자의 다른 언어와 문체가 드러난다.
뻔하지 뭐. 남작님은 아직 너무 젊었고, 프로이센 지방의회의 귀족 지주 대표이자 호엔크레멘의 주인인 우리 아빠가 등장하자 엄마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빠를 선택해서 브리스트 부인이 됐단다...... 그리고 그다음엔 ...... 알지? 바로 내가 태어났지.(15)
또한 작품 전반에 걸친 사건이나 인물 서술에 있어 언어가 동시대의 언어로 현대화되어 현대 한국의 독자에게도 큰 낯섦이나 거리감이 없이 잘 읽히고 있다. 이는 에피를 “작은 아씨”로 부르는 호칭에서뿐 아니라 인슈테텐의 직명인 “Landrat”는 “군수”(이전 “관구장”)로, 크람파스의 직명인 “Landwehrbezirkskommandeur”는 “민방위대 대장”(이전 ”관구사령관“) 등으로 번역한 현지화된 직명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방향은 소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27장의 인슈테텐과 뷜러스도르프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서 인슈테텐이 대변하는 당대 사회의 명예 개념과 사회 개념은 김영주(2000)에게서 다음과 같이 옮겨지고 있다.
Weil es trotzdem sein muß. Ich habe mir's hin und her überlegt. Man ist nicht bloß ein einzelner Mensch, man gehört einem Ganzen an, und auf das Ganze haben wir beständig Rücksicht zu nehmen, wir sind durchaus abhängig von ihm.(663) [...] Jenes, wenn Sie wollen, uns tyrannisierende Gesellschafts-Etwas, das fragt nicht nach Charme und nicht nach Liebe und Verjährung. Ich habe keine Wahl. Ich muß.(66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 가지로 곰곰이 생각해보았어요. 우리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에 소속되어 있는 개인입니다. 따라서 전체라는 것을 항상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철두철미 그 전체에 의존하고 있어요.(322)
그러나 굳이 말씀드리자면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적인 그 무엇은 매력이라느니 사랑이라느니 시효 따위를 문제시하지 않아요.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저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323)
한미희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주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한국어의 구조와 생략을 통한 묘미를 살려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로 깊이 생각해보았어요. 사람은 개인일 뿐 아니라 전체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이 전체를 생각해야 해요. 우리는 전적으로 이 전체에 종속되어 있어요.(326)
하지만 굳이 듣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전권을 휘두르는 사회의 그 어떤 것은 매력과 사랑과 시효에게 묻지 않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저는 해야 합니다.(327)
이러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한미희 번역의 특징은 주인공의 내면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주요 모티브인 중국인 유령에 대한 부분에서도 드러나, 땅에 질질 끄는 “커튼”(이전 “휘장”)으로 쉽게 번역되고 있다. 여주인공을 두렵고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이렇게 간명하게 번역될수록 이를 의도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아내를 교육시키기 위해 그냥 현상태로 놔두려는 인슈테텐의 의도는 독자에게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
한미희의 번역은 전체적으로는 80년대 이후 이루어진 소설에 대한 한국 연구상황의 진전을 반영하고 있다. 한동안 폰타네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문화 매체와의 비교 연구나 상호 매체성 연구가 활발했었는데 역자는 이 부분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는 작품의 바탕 구조에 흐르는 의미의 정합성을 드러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늘의 딸>과 같은 문학 작품뿐 아니라 미술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특히 인간의 욕망과 탈선이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소설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상징주의파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회화 <행복한 사람들의 섬 Insel der Seligen>에 대한 정확한 작품명 제시와 이에 대한 “당시 나체의 요정을 그려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는”(30) 간결한 주석은 중요하다. 한편으로 화자인 사촌 다고베르트의 에피에 대한 에로스적 시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이렇게 촘촘하게 짜여져 있는 의미망은 주인공의 탈선을 미리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초반에 친구 헤르타에게 에피가 한 이야기로 부정한 여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물속에 빠뜨리는 콘스탄티노플의 관습은 에피의 부정 이후 남편과 우연히 헤르타 호수를 방문하고 두려워하는 에피의 모습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는 사회의 압박을 “희극 Komödie”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을 일관되게 같은 용어로 번역하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경향을 반영한 번역이라는 또 다른 예로 배경이 되는 프로이센 사회가 이름 그대로 등장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상 등으로 우회적으로 언급할 수도 있으나 역자는 비스마르크(95, 286, 301)나 영지인 바르친(95, 110)이라는 고유명사를 매번 그대로 쓰고 있으며, 이는 작품 내에 나오는 <비스마르크 후작에게>(61) 식당이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구 보오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구 보불전쟁)의 승전지인 스당 전승 기념일(38)이나 쾨니히그레처의 번역(361)도 원어를 살려 빠짐없이 세심하게 그대로 옮겨주고 있다. 에피가 10월 3일에 결혼을 하고 비스마르크의 인슈테텐 소환으로 중국인 유령을 보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전일에 딸을 낳고 엠스에 요양을 갔다가 부정이 발각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사회에서 추방된 후 베를린의 쾨니히그레처 가의 작은 집에 살았다면, 이는 개인사에 침투한 당대 프로이센 사회의 영향력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희의 역자 후기는 <사랑과 결혼, 그 치명적인 경계>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테오도르 폰타네의 작품 세계 및 에피 브리스트에 나타난 여성과 사회로 나누어 작품을 해설하고 있다. 특히 후반 부분에서는 간통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여성 인물들뿐 아니라 인슈테텐의 체념을 시대적 상황에서 해석하고 무엇보다도 서술 내용보다 “등장인물들 모두를 따뜻한 시선을 바라보고 담담하게 그리는” 작가의 서술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소설에 여러 차례 시도동기로 등장하고, 동시에 후에 귄터 그라스의 장편 소설의 제목이 된 “Das ist ein weites Feld.”는 김영주는 “그건 쉽게 논의하기 어려운 광범위한 문제요.”로, 한미희는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로 번역하여, 원어를 살리려는 역자와 의도 중심으로 옮기는 각 역자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 구절은 매사에 합리적이고 분명한 판단을 내리고 시류를 쫓아가는 부인 루이제와 달리 항상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남편 노 브리스트의 자세와 관련이 있는데, 나중에 사회적 체면보다는 자식을 택하는 그의 따뜻한 휴머니티 및 소설에 관통하는 사실주의적 태도인 ‘반어적 해학(Humor)’과 연결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절이다.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 ‘폰티 Fonti’로 작가 폰타네와의 강한 연관성을 상기시키는 그라스의 소설 <Ein weites Feld>는 아직 한국에 번역이 되지 않았으나 이를 언급할 때 작품명이 자주 <광야>로 언급되는데, 허영재의 <난제> 제안처럼 폰타네의 소설과의 관련 속에서 고찰이 되어야 하며 더 적합한 번역 제목이 필요하다.
3. 평가와 전망
김영주의 충실한 <에피 브리스트>의 번역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이 작품을 둘러싼 많은 종단, 횡단 연구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사실주의나 테오도르 폰타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물론 다른 유럽의 사실주의와 독일 사실주의의 비교와 분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사실주의 3대 간통 소설로서 <안나 카레니나>, <마담 보바리>와의 비교가 가능해졌고, 각 나라나 문화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이 작품들이 나온 공통의 배경인 사랑 담론, 성의 억압이나 젠더 질서 등이 토론이 되기도 했다.
또한 한미희의 예에서 보듯 작가의 대표작의 새로운 해석을 담은 새 번역은 마찬가지로 새로운 독자층을 끌어오며 새로운 독서와 해석을 가능케 한다.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는 특히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등 많은 작가들뿐 아니라 동명의 제목으로 베르너 파스빈더가 영화를 만든 것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영화화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었는데, 앞으로 이러한 비교 연구도 기대해 볼 만하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김영주(1982): 에피 브리스트. 중앙일보사.
김영주(2000): 에피 브리스트. 문학과사상.
한미희(2010): 에피 브리스트. 문학동네.
- 각주
- ↑ Fontane, Theodor(1985): Effi Briest. München: Hanser. 이하에서는 위에서처럼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