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카 (Tonka)"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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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번역 현황 및 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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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베르트 무질은 노벨레 <통카>를 1923년에 처음 발표했고, 이듬해에 다른 두 작품 [[그리지아 (Grigia)|<그리지아>]], [[포르투갈 여인 (Die Portugiesin)|<포르투갈 여인>]]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세 여인 (Drei Frauen)|<세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후 <통카>는 작가의 전집에도 <세 여인>의 목차 아래에 수록되어 연작과 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는 <통카>가 독자적으로 번역된 적은 없고 매번 작품집 <세 여인>이 번역되면서 그 안에 수록된 작품으로 번역되어왔다. 현재까지 세 명의 번역자가 <통카>를 번역했고 횟수로는 총 4번에 이른다. 첫 번역은 김명수가 했고 1990년 금성판 세계문학대전집 제74권에 실렸다. 두 번째 번역자는 강명구로 그녀의 번역은 <세 여인>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형태로 1997년에 문학과지성사 판 문지스팩트럼의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세 번째 번역자는 최성욱으로 그는 <통카>를 포함하여 무질의 작품들을 선별해서 번역하고 엮은 편역집 <사랑의 완성>을 출간하였다. 가장 최근의 번역은 강명구가 1997년의 번역을 전반적으로 손을 보고 수정한 것으로 2020년 민음사에서 나온 <세 여인>에 실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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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개별 번역 비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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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베르트 무질은 <통카>에 대해서 “크나큰 불확실성과 혼란스러움을 묘사하는 것이 한 목적” <ref>Musil, Robert(1976): Tagebücher. Frisé, Adolf(ed.). Vol. 1. Reinbek bei Hamburg: Rowohlt, 394.</ref> 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작가의 의도가 그렇다 보니 이야기되는 내용이 불가사의한 것은 물론이고 이야기하는 방식도 상당히 특이하다. 통카의 임신은 마지막까지 해명되지 않고, 작품 <통카>는 서술의 불확정성으로 이야기의 불가사의함을 마지막까지 지켜낸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익명의 남자 주인공이 과거 자신의 여자였던 통카에 대해서 기억하는데, 인물이자 디제시스의 서술 심급인 남자는 자기 기억이 불확실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또 인정한다. 그가 기억하는 서술을 코멘트하는 서술의 심급이 또 있는데, 이 서술자는 인물들의 사고와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점의 주관성을 숨기지 않고 시시때때로 “vielleicht(=아마도/어쩌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의미를 귀착시키지 않고 되레 해석의 여지를 키운다. 이 둘의 경계도 흐려서 상호침윤과 합체가 일어나기도 하여 ‘아마도’가 기억의 주체인 남자의 소리인지 디제시스 외부의 서술자의 소리인지 불분명하다. 이런 것들을 합치면 <통카>의 불가해성, 불확실성, 불확정성을 그것인 채로 제대로 옮기는 번역이란, 그 노고를 떠맡은 역자한테, 그리고 무람없이 비평하는 누군가에게도 난제 중에 으뜸일 것이다. 번역자가 어떤 전략을 선택하든, 단어 대 단어로 옮기든지 아니면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여 자유롭게 의역하든지 오류의 복잡한 길을 헤맬 것이며 오역의 함정을 피하기란 대략 난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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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이 글에서는 오역의 여부와 정도는 일단 접어둔다. 그 대신 번역자들이 역자 해설과 관련 연구 등에서 밝힌 견해로부터 출발해서 각 번역이 무질의 <통카>에서 무엇을 끌어내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ref>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사용한다. Musil, Robert(1990): Tonka. In: Drei Frauen. Reinbek bei Hamburg: Rowohlt.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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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김명수 역의 <통카>(199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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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수의 번역은 그때까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 로베르트 무질을 알린 의의가 있다. 1990년 이전에 번역된 무질의 작품은 두 편의 단편 [[지빠귀|<지빠귀>]], [[그리지아 (Grigia)|<그리지아>]]에 불과했고 이천 페이지에 달하는 [[특성 없는 남자|<특성 없는 남자>]]는 단지 몇 페이지만 번역되어 <독일단편문학대계>에 실린 것이 전부였다. 김명수는 작가의 처녀작인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Die Verwirrungen des Zöglings Törleß)|<생도 퇴를레스의 혼란>도 <小年 퇴를레스의 迷惑>]]이라는 제목으로 초역해서 <세 여인>과 나란히 세계문학대전집에 포함시켰는데, 이로써 오늘날 제임스 조이스, 미셸 푸르스트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모더니즘 작가로 평가받는 로베르트 무질의 존재를 국내 독자들에게 알린 계기가 마련되었다. 김명수는 시인이자 아동 문학가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번역자로서의 프로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수학한 바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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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수는 꽤 상세한 작가소개와 작품소개를 첨부했는데, 특히 지면을 할애하여 무질의 문체를 상찬하는 점이 눈에 띈다. 무질의 문체에는 “숨을 삼킬 정도로 눈부신 비유나 금욕의 눈이 포착하는 예기치 못한 관능, 뛰어난 생략법”이 있고, “그의 문장에는 한 걸음 다음에 어느 쪽으로 향할지 알 수 없는, 혹은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부터 대상을 자르는, 타성에 젖지 않는 결벽성이 있어, 그것이 독자의 지성과 감성을 한순간도 태만한 감상에 맡겨두지 않는다.”(김명수, 559) 이렇듯 독서의 경험을 전면에 드러내는 해설은 강명구, 최성욱의 역자 해설과 차별되는데, 로베르트 무질의 연구자들이기도 한 이 두 번역자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해설을 첨부하였다. 김명수는 <통카>를 “무질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작품”(김명수, 560)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도 그가 일차 독자로 무질의 언어조탁에서 받은 감동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실제로 <통카>에는 곳곳에 예상 밖의 묘사, 관습적이지 않은 비유, 아포리즘적인 언술 등이 있어서 밑줄을 치고 뇌에 새기고 싶은 문장이 많다. 가령 통카의 ‘동화적인’ 존재성을 표현하는 ‘한여름 날 홀로 내리는 눈송이’라는 비유는 독자를 타격하고 각성시킨다. 한겨울에 노모를 위해서 눈 속을 헤매며 딸기를 구하는 효자가 나온 ‘동화’를 믿었던 독자라면 그 예외 상황에 대한 믿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에 없는 것이 있을 가능성 내지는 현실이 아닌 것이 밝혀지지 않은 현실일 가능성에 활짝 열리는 상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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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수의 번역에도 시인인 번역자의 직관력과 문장력이 빛나는 구문들이 있다. 남자는 통카의 부정을 99%의 확률로 확신한다. 그러나 통카는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고, 그의 의심을 알아채고부터는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때로 그는 악의 없는 듯한 질문을 문득 던져서 고백받아내려고도 하는데, “<ins>그 매끄러운</ins> 여운에 끌려 그녀의 경계심이 <ins>발을 미끄러뜨렸으면</ins>, 하는 생각에서였다.”(김명수, 52. 밑줄 강조 필자) 원문은 “...auf deren <ins>glattem Klang ihre Vorsicht aus<ins>gleiten<ins> sollte”(73)로 매끄러운 울림에 통카의 조심성이 미끄러진다는 뜻인데, 김명수는 ‘매끄러운 glatt’과 ‘미끄러지다 ausgleiten’를 절묘하게 살렸다. 다른 두 번역자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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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함으로써 통카의 경계심을 풀어볼 작정이었다.(최성욱, 159) | ||
+ |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해서 통카의 경계심을 풀려고 했다.(강명구 2020, 1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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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욱과 강명구의 번역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계심을 풀다’라고 해서 원문장의 요지를 전달하지만, 원문의 리듬과 말맛이 사라지고 평이한 설명문이 되었다. | ||
+ | 직역이 아니고 의역도 아니면서 원문의 뜻과 울림을 옮기는 문장은 또 있다. 통카는 임신과 성병으로 인해 급격히 쇠락하는데, 통카가 매력을 잃고 추해질수록 남자는 여자를 더욱 세심하게 보살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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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elleicht wurde sein Gefühl für sie desto zärtlicher, je tiefer es enttäuscht war, [...] (7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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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통카에 대한 감정은 환멸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한층 빛깔이 진해졌다.(김명수, 520) | ||
+ | 실망이 깊을수록 통카를 향한 그의 감정은 더욱 애틋해지는 듯했다.(최성욱, 159). | ||
+ | 마찬가지로 실망이 클수록 통카를 향한 그의 감정은 깊어졌다.(강명구 2020, 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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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명구와 최성욱의 번역은 통카를 향한 감정을 어휘 “zärtlich”에 담긴 다정함과 강하게 접착시킨다. 이 두 번역에서는 남자가 통카한테 크게 실망하지만 그럴수록 통카에 대한 애정이 커져서 살뜰히 보살핀다. 김명수의 번역에서는 남자의 감정이 환멸을 경험하지만, 그 대상이 통카로 특정되지 않으며 짙어지는 감정의 색깔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세 번역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김명수의 번역이 원문을 가장 멀리서 스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원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남자가 통카의 외출에 동행하고 식당에 따라가는 식의 보살핌은 의지가지없는 통카를 책임지기로 했던 의무감 때문이다. 그의 통카에 대한 감정은 정체가 애매모호하고 또 그런 채로 밀도가 높아진다. 김명수의 번역은 직역도 의역도 아닌데, 원문의 맥을 꿰뚫어 거기에 흐르는 느낌의 한 자락을 충실하게 담고 옮겨서 독자가 원문을 느끼도록 만든다. | ||
+ | 때로는 오역에도 불구하고 그 오역마저 문맥에 삼투되는 뛰어난 대목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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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좁은 안뜰의 맞은편 창문은 <ins>눈이 먼 것처럼</ins> <ins>그늘로 들어갔으며</ins>, 사람들은 모두 일하러 나갔다. 아래쪽에서는 <ins>안뜰이 우물처럼 어두워져 있었고</ins>, 태양은 연판(鉛版)을 들이밀 듯<ref>“연판을 들이밀 듯”은 “...durch Bleischeiben”의 오역이다. Bleischeiben은 유리 조각들을 접합하여 금속 틀 안에 끼워 넣는 방법으로 만든 유리창을 가리킨다.</ref> 실내에 둔한 빛을 쏟아부어 하나하나의 대상을 부각시키고는 그것을 죽은 것처럼 <ins>빛나게 만들었다</ins>. 거기에는 예를 들면 묵은 달력이 마치 통카가 방금 들치고 있던 것처럼 펼쳐진 채로 있었다. <ins>그 한 페이지의 광대한 흰 평원에 그날을 기념하는 추억의 피라미드인 양</ins> 조그만 빨간 느낌표가 찍혀 있었다. [...] 날짜도 대략 들어맞을 것 같았고, 확신은 피를 뿜어내는 샘처럼 머리로 치솟았다.(김명수, 529-530. 밑줄 강조 필자)<ref>Die Fenster jenseits des engen Hofes lagen blind im Schatten, die Menschen waren zur Arbeit gegangen, wie ein Brunnen dunkelte unten der Hof, die Sonne schien wie durch Bleischeiben in die Wohnung, sie hob jeden Gegenstand heraus und ließ ihn tot aufleuchten. Und da lag zum Beispiel auch einmal ein kleiner alter Kalender so aufgeschlagen, als hätte Tonka eben in ihm geblättert, und in der weiten, weißen Ebene eines Blattes stand, wie eine Pyramide der Erinnerung zu einem Tag gesetzt, ein kleines rotes Rufzeichen.[...] die Zeit mochte ungefähr stimmen, und die Gewißheit schoß wie ein Blutsprudel in den Kopf.(81)</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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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날 남자가 달력에 표기된 느낌표를 보고 일순간에, 하지만 일순간 동안만 통카의 부정을 확신하는 대목이다. 전반부에는 ‘눈이 먼 것처럼’, ‘우물처럼 어둡고’, ‘둔한 빛을 쏟아부어’, ‘대상을 부각시키고’ 등 시각적인 장치들이 배치되어 있다. 햇빛이 유리창으로 들어와 방 안의 물건들 위를 지나 줌인하면서 묵은 달력 위로 옮겨간다. 통카를 의심하는 남자의 주관적인 감각에는 달력에 표시된 느낌표가 실제 빛의 낮은 조도와 대조되면서 밝고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김명수의 번역은 “광대한 평원에 조그만 느낌표”, “흰 종이에 빨간색 느낌표”의 대비를 부각하면서 이 문장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한다. 이 시각적인 초점화는 “피를 뿜어내는 샘”의 분출하는 이미지와 어우러져 남자의 의심이 확신으로 급변하는 것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여준다. 일말의 상투성도 용납하지 않는 원문을 이미지적으로 변환해서 옮기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강명구의 번역에서는 “그런 확신이 들자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했다”(강명구 2020, 119)로 변형되어 흥분과 분노가 표출된다. 최성욱의 번역은 아예 대놓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순간”(최성욱, 174) 이라고 원문에 없는 어휘를 부가하여 분노로 귀착시킨다. 이 두 번역은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관습적인 표현을 차용하여 원문을 상투화하면서 남자 주인공을 그가 원문에서는 겪지 않는 감정 상태에 빠트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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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수의 번역은 강명구의 1997년 번역에 일정 정도 참조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나, 최성욱의 번역과 강명구의 2020년 번역에는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명수의 번역은 <통카>에 있는 철학적이고 메타서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오역이 상당하다는 취약점이 있으나, 시인의 직관력으로 원문의 외피와 과육을 ‘함께’, 이 둘을 분리시키지 않고 온전히 옮긴 문장들이 있고 특히 남자 주인공의 내적 균열을 옮기는 데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통카>는 언젠가 오게 될 새로운 번역에 증여할 자산을 품고 있다고 생각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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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강명구 역의 <통카>(19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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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강명구 역의 <통카>(20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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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명구는 꾸준히 번역 활동을 해오고 있는 번역가로 그녀의 <통카>는 1997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세 여인>에 수록되어 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강명구는 같은 번역의 “미흡한 부분을 다듬어”(강명구 2020, 134) 2020년에 민음사에서 새롭게 출판했다. 강명구는 <여성 체험과 자아 인식: R. Musil의 『세 여인』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무질의 연구자이기도 한데 여성의 역할과 작용에 주목했던 연구 관심은 1997년 번역에 역자 해설의 제목인 “여성의 의미에 대한 재조명”에서도 나타난다. 이로부터 번역자의 번역지향이 여성 인물 통카에 대한 서술에 반영되었을 걸로 추측해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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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카는 매매춘이 낯설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고 족보 꼬인 친척들과 생활하는 빈민계층의 노동자로, 그녀의 사회적 벡터는 여러 차례 “einfach”라는 어휘로 표식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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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 So gleich blieb sich Tonka, so <ins>einfach und durchsichtig</ins> war sie, daß man meinen konnte, eine Halluzination zu haben und die unglaublichsten Dinge zu sehen.(55) | ||
+ | ② »Sie ist doch <ins>ein ganz einfaches Mädchen«</ins>, hatte man gesagt, »aus dem Tuchgeschäft.«(59) | ||
+ | ③ aber ebensosehr fehlte ihr jedes Streben, aus ihrem Kreis in einen höheren zu gelangen; sie blieb wie die Natur rein und unbehauen. Es war gar nicht so einfach, <ins>die Einfache</ins> zu lieben.(62) | ||
+ | ④ <ins>Die einfache Art</ins> zum Beispiel, <ins>wie sie ihm zugelaufen war</ins>, konnte Gleichgültigkeit sein oder Sicherheit des Herzens.(74) | ||
+ | ⑤ Er gab schon etwas nach, [...], daß er <ins>die Fremdheit ihres allzu einfachen Lebens</ins>, [...], nicht mehr täglich reparieren konnte.(83) (이상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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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용사 einfach는 꾸밈없이 투명하고(①), 단순한 여자(③) 등 통카의 인성을 가리키거나, 교육받지 못한 상태(②), 앞뒤 재지 않고 남자 주인공을 따르는 태도(④), 지나치게 범상한 생활(⑤)을 나타내는 등 다양한 뉘앙스를 갖는다. 통카의 이런 특성은 한 마리 “개”에게 어울리는 “선(善)”(강명구 2020, 123)과 연결되어 통카가 거짓을 꾸미지 않는 사람임을 가리키는 한편, 아무나 주인으로 따르는 한 마리의 “개”(강 2020, 109)와 같은 이미지와 연결되면 통카가 자신이 저지른 세속의 죄를 그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처럼 어휘 einfach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어서 보기와 달리 번역하는 게 무척 까다롭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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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명구는 1997년 번역에서는 ①“너무도 단순하며 투명하여”(강명구 1997, 106), ②“통카는 아주 단순한 처녀”(114), ③“단순한 여자”(120) ④“그를 그저 쉽게 따르는 태도”(142), ⑤“너무도 단순한 생활 방식”(159) 등 거의 일관되게 단순함이라는 하나의 어휘로 통일했다. 그런데 2020년 번역에서는 ③의 번역을 “순수한 여자”로 바꾸어, “그녀는 자연처럼 순수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였다. 순수한 여자를 사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강명구 2020, 93)로 쓴다. 이 두 문장은 ‘자연처럼 순수하고’로부터 ‘순수한 여자’로 두운을 맞추고 소리를 이어지게 한다. 원문의 rein과 einfach를 순수함으로 옮기면서 자연-순수-여자를 조합하는데 어딘가 순진, 순정, 순결, 혹은 무구함과 같은 클리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자연은 <통카>에서 ‘Unendlichkeit(=무한성)’으로 불리는 독특한 함의를 갖는다. 자연은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무한의 카오스로 정신이라는 “차원 높은 영역”(강명구 1997, 120)과 완전히 달라서 정신의 활동인 개념과 언어가 자연의 앞에서는 한계에 부딪힌다. 디제시스 외부의 서술자는 이 문맥에서 통카를 가리켜 “자기 영역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영역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없었다”(강명구 2020, 93)고 하고, “그녀는 정신을 좇지만 정신이 되려 하지 않는 자연이었다”(강명구 1997, 121)<ref>강명구의 2020년 번역에서는 이 문장이 다음과 같다. “그녀는 정신세계와 나란히 있는 자연이었다. 스스로 정신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사랑했고 [...]”(강명구 2020, 94). 여기서는 1997년의 번역이 원문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해서 이 번역문을 인용한다. </ref>라고도 한다. 통카가 자연 그대로이고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식의 비유는 그녀의 동화적이고 무한한 특성을 함축한다. 그럼에도 강명구가 1997년에 번역한 “단순한 여자”를 2020년에 “순수한 여자”로 수정한 것은 통카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인물인지 애써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통카가 말없이 자신의 존재로 주장하는 ‘부정(不貞)의 부정(否定)’에 개연성을 더하려는 번역 의도가 있어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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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 주인공은 통카의 임신에 합리적 의심을 하고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검증받는다. 의사에게 뭐라고 묻든 그가 묻고 싶은 것은 처녀 수태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가 뭐라고 묻든 그런 일은 인류의 역사에 없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도‘ ‘그것을 상상하고 싶어 하면 개선의 여지 없이 오쟁이를 지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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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d doch wäre er ein unverbesserlicher Hahnrei, wollte er sich das einbilden!(67) | ||
+ | 영락없이 구제할 길 없는 간부의 남편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그런 일을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겠는가!(강명구 1997, 128) | ||
+ | 그는 어쩔 수 없이 부정한 여자의 남편이 되느니 그런 일을 상상하고 싶었다!(강명구 2020, 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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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명구의 1997년 번역에서 처녀 수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이야기된다. 2020년의 번역에서는 문장의 의미를 확정짓기가 애매하다. 어불성설인 그런 일을 억지로 상상할 만큼 통카에게 속고 바보가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읽을 수 있고, 혹은 남자 주인공이 내심 99% 확률의 수학적 진리에 회의적이며 처녀 수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척하지 않는다, 라고 읽을 수 있다. 그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끌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강명구는 1997년 번역에서 문장의 뜻을 명확히 했다가 2020년의 번역에서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문장을 흩트리는데, 그 결과 2020년의 번역이 임신과 성병의 인과를 밝히지 않는 서술자의 의도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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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명구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통카의 임신과 성병을 해명될 수 없는 미스테리 쪽으로 끌고 간다. 이에 비해 김명수와 최성욱의 번역에서는 무게의 중심이 통카가 부정했다는 사실로 이동한다. 원문에서 의사들은 통카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도록 ‘그녀(sie)’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는데, 김명수는 ‘그녀’를 “당신(Sie)”으로 오독하여 “당신이 지금 놓여있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할 생각이라면”(김명수, 513) 통카를 위로하고 간호하라고 써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인물을 남자로 교체한다. 명백한 오독은 통카가 해고당하는 장면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사장은 임신을 이유로 통카를 해고하는데, 남자 주인공은 냉혹한 장사꾼을 속으로 남몰래 감탄한다. 김명수는 해당 부분을 “통카는 [...] 장사치에게 마음 속으로 은근히 찬탄했다”(김명수, 517-518)고 주어를 통카로 바꿔치기한다. 김명수의 번역문에서 통카는 자신이 나쁜 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응징받는 인과응보에 동의하는 것이다. 최성욱은 위에서 인용한 ②번의 einfach를 헤프다는 뜻을 포함하여 다루기 쉽다는 식으로 번역한다. “포목점에서 일했다면 아주 쉬운 여자겠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최성욱, 134) 그리고 최성욱은 원문의 Untreue(=부정)을 부부관계를 전제로 하는 “간통”으로 번역해서 동거하는 두 인물의 관계를 과도하게 변형한다. 김명수의 오독과 최성욱의 의도적인 오역은 왠지 징후적으로 보이는데 번역자가 남자 주인공의 합리적 의심에 동조하며 통카의 죄를 확신하는 시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명수의 번역과 최성욱의 번역에서는 남자가 99퍼센트 확실하게 속고 있음에도 억지로 통카를 믿겠다는 의지가 훨씬 더 선명하다. 속고 있을 “99퍼센트의 확률 die neunundneunzig Prozent Wahrscheinlichkeit”(77)은 김명수에게는 “치욕의 가능성”(김명수, 525)이고 최성욱한테는 “모욕적인 확률”(최성욱, 166)이다. 강명구에게는? “부끄러운 확률”(강명구 1997, 147/ 강명구 2020, 113)로 강도가 약화된다. 작은 차이지만 그 다름은 명확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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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언: 강명구의 2020년 번역은 1997년 번역에 비해 한층 세련된 편집으로 보기에 편하고 문장이 읽기에 섬세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어떤 부분들에서는 최성욱의 번역을 따른다는 의구심이 들고, 이 경우 1997년의 번역보다 더 나아 보이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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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최성욱 역의 <통카>(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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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욱은 <주체의 위기와 유토피아: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을 중심으로>로 학위를 하고 연구서 <로베르트 무질>(한국학술정보「주」 2008)을 출간한 바 있는 무질 연구의 전문가이다. 그는 [[세 여인 (Drei Frauen)|<세 여인>]]뿐 아니라 [[지빠귀|<지빠귀>]], <사랑의 완성>, [[생전의 유고|<생전의 유고>]] 등 무질의 여러 작품을 번역해서 <사랑의 완성>이라는 제목의 편역서로 출간하였다. 이 책에 번역 의도나 번역지향을 짐작해 볼 정보는 주어져 있지 않으나, 최성욱의 <통카>에는 번역자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지식과 해석을 번역에 적용했음을 알리는 꽤 많은 단서가 있다. 단적인 예로 진리 혹은 진실로 번역되곤 하는 개념어 Wahrheit를 남자 주인공과 관련해서는 진리로, 통카와 관련해서는 진실로 구분해서 번역한다. 최성욱은 통카가 속한 “심오한 동화의 나라”를 설명하는 관계절에서는 “진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진리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세계”(최성욱, 148)로 번역하고, 통카가 의학적 근거에 마주하여 자신을 믿지 못하면 떠나게 해달라고 남자 주인공에게 말할 때는 “통카가 자기 말을 변호해줄 방법은 오로지 그녀의 인간적 진실성뿐이었다”(최성욱, 160)고 번역한다. 남자 주인공은 화학 전공의 자연과학자로 원래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는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인물이다. “그는 감정의 파괴를 옹호하고 문학, 선, 덕, 꾸밈없는 순진함에 반대했다.”(최성욱, 137) 그런데 통카의 임신은 ‘엔지니어 정신’에 광신적인 남자한테 인식의 메커니즘이 교란되는 사태를 불러일으키고 남자는 어렵사리 세계이해와 세계 인식에 전회를 겪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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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망과 지식과 감정은 실타래처럼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는 때가 돼서야 비로소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혹시 진리라는 실마리를 따라가는 방법 외에 다른 길로 세계를 살아갈 수는 없을까? 진리의 냉철함이 그를 모든 것과 분리시켜놓은 순간에 통카는 동화 이상의 존재였다. 이런 점에서 통카는 거의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다.(최성욱, 165-166)<ref>Wollen, Wissen und Fühlen sind wie ein Knäuel verschlungen; man merkt es erst, wenn man das Fadenende verliert; aber vielleicht kann man anders durch die Welt gehen als am Faden der Wahrheit? In solchen Augenblicken, wo ihm von allen ein Firnis der Kälte trennte, war Tonka mehr als ein Mädchen, da war sie fast eine Sendung.(77. 밑줄 강조 필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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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대목에서 남자 주인공은 대상의 인식에 대해 혼란을 거듭한 끝에 사념을 정리하고 통카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서술자는 오성의 법칙으로 참을 증명하는 ‘진리의 길(道)’에 회의하고 한계를 표명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자문하는데, 최성욱은 원문의 “Firnis der Kälte”(77)를 해석하여 과감하게 “진리의 냉철함”으로 다시쓰기를 하여 다른 두 번역자와 확연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얻는다. 김명수는 Firnis(=바니시)의 사전적 뜻을 사용해서 “얼음 니스”(김명수, 524)로 번역했고, 강명구는 Firnis의 파생적 뜻을 가져와 “차가운 허식”(강명구, 1997, 146), “냉정한 겉치레”(강명구 2020, 113)로 옮겼다. 김명수와 강명구의 번역은 난해한 원문을 오리무중의 심연으로 침몰시켜버리는데, 최성욱의 번역은 독자에게 원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한다. 즉, 오성의 합리적 법칙에 따라서 인식하려고 한다면 통카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이것도 Sendung을 풀어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오라클이나 신의 메시지처럼 수수께끼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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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질은 응축하고 생략하는 글쓰기를 하는 까닭에 원문을 단어 대 단어로 직역해서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다. 최성욱의 번역은 원문을 설명하고 해석을 부연하는 경향이 큰데, 이는 무질 연구자이기도 했던 강명구의 번역이 원문에 뭔가를 보태려고 하지 않는 점과 사뭇 대조적이다. “Der Schattenmensch, das Unwirkliche in ihm [...]”(80)처럼 응축(Schatten+Mensch)하고 첫 어휘와 두 번째 어휘 사이를 생략하는 말의 조합인 경우, 최성욱은 “그의 그림자, 그의 내면에서 <ins>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그의 다른 자아</ins>”(최성욱, 172. 밑줄 강조 필자)라고 쓴다. 원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das Unwirkliche를 ‘가능성~자아’로 번역한 부분에서는 이 어휘를 무질의 개념인 ‘Möglichkeitssinn(=가능성 감각)’과 유비하는 연구자의 면모마저 나타난다. 그런데 텍스트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고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하려다 보니 확증 편향적으로 텍스트를 번역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최성욱은 mehr als Mädchen을 Märchen으로 잘못 읽고 “동화 이상의 존재”로 번역했다. 오독과 오역이 발생한 경로를 알 수는 없으나 (첫음절이 같아서 헷갈렸을 수도 있다. 다른 두 번역자도 Mädchen를 Märchen으로 오독했다), 짐작건대 과학적 진리 대 통카의 불가해성이라는 대립의 도식을 세우는 연구자가 번역자의 작업에 간섭한 것 아닐까. 다시금 한여름날 외롭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예로 들어보자. 서술자는 통카가 언어를 매개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함을 깨달으면서 이 표현을 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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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d in diesem Augenblick erkannte er sie ganz klar. Eine mitten an einem Sommertag allein niederfallende Schneeflocke war sie. Aber im nächsten Augenblick war dies gar keine Erklärung,(84) | ||
+ | 이 순간 그는 통카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하게 인식했다. 통카는 한여름에 외롭게 떨어지는 눈송이였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이 말은 <ins>그녀의 본질을 결코 해명해주지 못했다</ins>.(최성욱, 178. 밑줄 강조 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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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욱은 여기서도 원문에 없는 “그녀의 본질”을 추가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해석이 깔린 강하게 주장하는 문장을 쓴다. 그런데 이 번역은 원문을 이해하도록 만들려다 원문을 모순되게 만들고 만다. 이제 원문에 더해진 “그녀의 본질”을 걷어내고 번역해 보면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이것은 전혀 설명이 되지 않았다”(김명수, 533)가 된다. 김명수의 번역에서 낡은 느낌을 살짝 고치면 ‘그러나 다음 순간에 이것은 전혀 해명이 아니었다’로 옮길 수 있다. 그렇기도 한 것이 한여름에 내리는 눈송이는 설명이나 해명이 아니라 은유이니까, 이렇게 원문을 읽고 옮길 수 있다. 한여름에 내리는 눈송이는 통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밝히자’하는 설명(說明)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현실일 가능성을 탐구하는 문학적 인식을 실어나르는 은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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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평가와 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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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베르트 무질은 작가의 중요성에 비해서 번역이 지체된 감이 있다. 최근에 대작 [[특성없는 남자|<특성 없는 남자>]]가 연달아 완역되어 출판되었기에 그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거나 재번역되어 한층 더 넓은 독자층과 만나기를 기대하게 된다. 2023년 8월 현재까지 출간된 네 편의 <통카>는 번역자의 배경과 관심에 따라서 일정 정도 차별성이 있다. 김명수의 번역은 시인의 직관력과 언어력을 드러내는 한편, 모호한 원문들을 어휘 대 어휘로 직역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명구의 번역은 젠더적인 문제의식으로 서술의 어떤 의도를 번역작업의 안에 용해한다. 최성욱의 번역에서는 원문에 부가어들을 삽입하는 전략이 두드러지는데, 작품의 의미를 밝혀서 전달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들은 저마다 무질의 원작에서 무언가를 끌어내었는데, 작품의 시적 핵심은 끌어낼수록 더 깊어지고 더 커지고 더 자라난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자신을 끌어내어 줄 번역을 여전히 강하게 부르고 있기에, 새롭게 나타날 다음 번역이 <통카>를 어떻게 번역해서 무엇을 끌어낼지 벌써 기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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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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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수(1990): 통카. 금성출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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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명구(1997): 통카. 문학과지성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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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욱(2015): 통카. 북인더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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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명구(2020): 통카. 민음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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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v style="text-align: right">박희경</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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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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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6일 (일) 13:37 기준 최신판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의 노벨레
작가 |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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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923 |
장르 | 노벨레 |
작품소개
로베르트 무질이 1923년에 발표한 노벨레이다. 익명의 남성 주인공이 통카가 죽은 후 어떤 시점에서 통카에 대해서 기억하는 내용으로 모두 1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은 독일계 부르주아 계층 출신인 젊은 과학도로 체코계의 하층계급 노동자인 통카를 사귀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카를 데리고 대도시로 와서 동거한다. 남자는 학업을 이어가고 통카는 큰 상회에서 헐값의 노동자로 일한다. 몇 년 후 통카는 임신하고, (병명이 언급되지 않지만) 매독에 걸린다. 자연과학을 신봉하는 남자는 확률적으로 자신이 태아의 생부가 아니며 병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통카한테서 고백을 받아내고 싶어 하지만 통카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할 뿐이다. 남자는 통카의 결백을 믿지 않고, 통카가 죽는 순간까지 임신과 질병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통카의 죽음은 남자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그의 삶을 변화시킨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장마다 서술의 초점이 특정 순간이나 개별적인 사건에 집중되며, 내용상으로 통카의 불가해한 면모가 남자의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혼란이 서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무질은 <통카>를 <특성 없는 남자>를 준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계획했다고 하며, <통카>에 있는 로또 장면은 이미 1903년에 쓰는 등 이 작품은 생성사 면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또한 <통카>는 작가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사귀었던 헤르마 디츠(Herma Dietz)와의 관계에 바탕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내 초역은 1990년 김명수에 의해 이루어졌다(금성출판사).
초판 정보
Musil, Robert(1923): Tonka. In: Der Neue Roman - Ein Halbjahr neuester Prosa. Reichenberg: Gebrüder Stiepel, 349-389.
<단행본 초판>Musil, Robert(1924): Tonka. In: Drei Frauen. Novellen. Berlin: Ernst Rowohlt Verlag, 91-167.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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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로베르트 무질은 노벨레 <통카>를 1923년에 처음 발표했고, 이듬해에 다른 두 작품 <그리지아>, <포르투갈 여인>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세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후 <통카>는 작가의 전집에도 <세 여인>의 목차 아래에 수록되어 연작과 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는 <통카>가 독자적으로 번역된 적은 없고 매번 작품집 <세 여인>이 번역되면서 그 안에 수록된 작품으로 번역되어왔다. 현재까지 세 명의 번역자가 <통카>를 번역했고 횟수로는 총 4번에 이른다. 첫 번역은 김명수가 했고 1990년 금성판 세계문학대전집 제74권에 실렸다. 두 번째 번역자는 강명구로 그녀의 번역은 <세 여인>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형태로 1997년에 문학과지성사 판 문지스팩트럼의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세 번째 번역자는 최성욱으로 그는 <통카>를 포함하여 무질의 작품들을 선별해서 번역하고 엮은 편역집 <사랑의 완성>을 출간하였다. 가장 최근의 번역은 강명구가 1997년의 번역을 전반적으로 손을 보고 수정한 것으로 2020년 민음사에서 나온 <세 여인>에 실렸다.
2. 개별 번역 비평
로베르트 무질은 <통카>에 대해서 “크나큰 불확실성과 혼란스러움을 묘사하는 것이 한 목적” [1] 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작가의 의도가 그렇다 보니 이야기되는 내용이 불가사의한 것은 물론이고 이야기하는 방식도 상당히 특이하다. 통카의 임신은 마지막까지 해명되지 않고, 작품 <통카>는 서술의 불확정성으로 이야기의 불가사의함을 마지막까지 지켜낸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익명의 남자 주인공이 과거 자신의 여자였던 통카에 대해서 기억하는데, 인물이자 디제시스의 서술 심급인 남자는 자기 기억이 불확실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또 인정한다. 그가 기억하는 서술을 코멘트하는 서술의 심급이 또 있는데, 이 서술자는 인물들의 사고와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점의 주관성을 숨기지 않고 시시때때로 “vielleicht(=아마도/어쩌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의미를 귀착시키지 않고 되레 해석의 여지를 키운다. 이 둘의 경계도 흐려서 상호침윤과 합체가 일어나기도 하여 ‘아마도’가 기억의 주체인 남자의 소리인지 디제시스 외부의 서술자의 소리인지 불분명하다. 이런 것들을 합치면 <통카>의 불가해성, 불확실성, 불확정성을 그것인 채로 제대로 옮기는 번역이란, 그 노고를 떠맡은 역자한테, 그리고 무람없이 비평하는 누군가에게도 난제 중에 으뜸일 것이다. 번역자가 어떤 전략을 선택하든, 단어 대 단어로 옮기든지 아니면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여 자유롭게 의역하든지 오류의 복잡한 길을 헤맬 것이며 오역의 함정을 피하기란 대략 난망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오역의 여부와 정도는 일단 접어둔다. 그 대신 번역자들이 역자 해설과 관련 연구 등에서 밝힌 견해로부터 출발해서 각 번역이 무질의 <통카>에서 무엇을 끌어내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
1) 김명수 역의 <통카>(1990)
김명수의 번역은 그때까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 로베르트 무질을 알린 의의가 있다. 1990년 이전에 번역된 무질의 작품은 두 편의 단편 <지빠귀>, <그리지아>에 불과했고 이천 페이지에 달하는 <특성 없는 남자>는 단지 몇 페이지만 번역되어 <독일단편문학대계>에 실린 것이 전부였다. 김명수는 작가의 처녀작인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도 <小年 퇴를레스의 迷惑>이라는 제목으로 초역해서 <세 여인>과 나란히 세계문학대전집에 포함시켰는데, 이로써 오늘날 제임스 조이스, 미셸 푸르스트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모더니즘 작가로 평가받는 로베르트 무질의 존재를 국내 독자들에게 알린 계기가 마련되었다. 김명수는 시인이자 아동 문학가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번역자로서의 프로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수학한 바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김명수는 꽤 상세한 작가소개와 작품소개를 첨부했는데, 특히 지면을 할애하여 무질의 문체를 상찬하는 점이 눈에 띈다. 무질의 문체에는 “숨을 삼킬 정도로 눈부신 비유나 금욕의 눈이 포착하는 예기치 못한 관능, 뛰어난 생략법”이 있고, “그의 문장에는 한 걸음 다음에 어느 쪽으로 향할지 알 수 없는, 혹은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부터 대상을 자르는, 타성에 젖지 않는 결벽성이 있어, 그것이 독자의 지성과 감성을 한순간도 태만한 감상에 맡겨두지 않는다.”(김명수, 559) 이렇듯 독서의 경험을 전면에 드러내는 해설은 강명구, 최성욱의 역자 해설과 차별되는데, 로베르트 무질의 연구자들이기도 한 이 두 번역자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해설을 첨부하였다. 김명수는 <통카>를 “무질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작품”(김명수, 560)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도 그가 일차 독자로 무질의 언어조탁에서 받은 감동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실제로 <통카>에는 곳곳에 예상 밖의 묘사, 관습적이지 않은 비유, 아포리즘적인 언술 등이 있어서 밑줄을 치고 뇌에 새기고 싶은 문장이 많다. 가령 통카의 ‘동화적인’ 존재성을 표현하는 ‘한여름 날 홀로 내리는 눈송이’라는 비유는 독자를 타격하고 각성시킨다. 한겨울에 노모를 위해서 눈 속을 헤매며 딸기를 구하는 효자가 나온 ‘동화’를 믿었던 독자라면 그 예외 상황에 대한 믿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에 없는 것이 있을 가능성 내지는 현실이 아닌 것이 밝혀지지 않은 현실일 가능성에 활짝 열리는 상태이다.
김명수의 번역에도 시인인 번역자의 직관력과 문장력이 빛나는 구문들이 있다. 남자는 통카의 부정을 99%의 확률로 확신한다. 그러나 통카는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고, 그의 의심을 알아채고부터는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때로 그는 악의 없는 듯한 질문을 문득 던져서 고백받아내려고도 하는데, “그 매끄러운 여운에 끌려 그녀의 경계심이 발을 미끄러뜨렸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김명수, 52. 밑줄 강조 필자) 원문은 “...auf deren glattem Klang ihre Vorsicht ausgleiten sollte”(73)로 매끄러운 울림에 통카의 조심성이 미끄러진다는 뜻인데, 김명수는 ‘매끄러운 glatt’과 ‘미끄러지다 ausgleiten’를 절묘하게 살렸다. 다른 두 번역자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함으로써 통카의 경계심을 풀어볼 작정이었다.(최성욱, 159)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해서 통카의 경계심을 풀려고 했다.(강명구 2020, 108)
최성욱과 강명구의 번역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계심을 풀다’라고 해서 원문장의 요지를 전달하지만, 원문의 리듬과 말맛이 사라지고 평이한 설명문이 되었다. 직역이 아니고 의역도 아니면서 원문의 뜻과 울림을 옮기는 문장은 또 있다. 통카는 임신과 성병으로 인해 급격히 쇠락하는데, 통카가 매력을 잃고 추해질수록 남자는 여자를 더욱 세심하게 보살핀다.
Vielleicht wurde sein Gefühl für sie desto zärtlicher, je tiefer es enttäuscht war, [...] (73)
그의 통카에 대한 감정은 환멸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한층 빛깔이 진해졌다.(김명수, 520) 실망이 깊을수록 통카를 향한 그의 감정은 더욱 애틋해지는 듯했다.(최성욱, 159). 마찬가지로 실망이 클수록 통카를 향한 그의 감정은 깊어졌다.(강명구 2020, 107)
강명구와 최성욱의 번역은 통카를 향한 감정을 어휘 “zärtlich”에 담긴 다정함과 강하게 접착시킨다. 이 두 번역에서는 남자가 통카한테 크게 실망하지만 그럴수록 통카에 대한 애정이 커져서 살뜰히 보살핀다. 김명수의 번역에서는 남자의 감정이 환멸을 경험하지만, 그 대상이 통카로 특정되지 않으며 짙어지는 감정의 색깔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세 번역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김명수의 번역이 원문을 가장 멀리서 스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원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남자가 통카의 외출에 동행하고 식당에 따라가는 식의 보살핌은 의지가지없는 통카를 책임지기로 했던 의무감 때문이다. 그의 통카에 대한 감정은 정체가 애매모호하고 또 그런 채로 밀도가 높아진다. 김명수의 번역은 직역도 의역도 아닌데, 원문의 맥을 꿰뚫어 거기에 흐르는 느낌의 한 자락을 충실하게 담고 옮겨서 독자가 원문을 느끼도록 만든다. 때로는 오역에도 불구하고 그 오역마저 문맥에 삼투되는 뛰어난 대목도 있다.
좁은 안뜰의 맞은편 창문은 눈이 먼 것처럼 그늘로 들어갔으며, 사람들은 모두 일하러 나갔다. 아래쪽에서는 안뜰이 우물처럼 어두워져 있었고, 태양은 연판(鉛版)을 들이밀 듯[3] 실내에 둔한 빛을 쏟아부어 하나하나의 대상을 부각시키고는 그것을 죽은 것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예를 들면 묵은 달력이 마치 통카가 방금 들치고 있던 것처럼 펼쳐진 채로 있었다. 그 한 페이지의 광대한 흰 평원에 그날을 기념하는 추억의 피라미드인 양 조그만 빨간 느낌표가 찍혀 있었다. [...] 날짜도 대략 들어맞을 것 같았고, 확신은 피를 뿜어내는 샘처럼 머리로 치솟았다.(김명수, 529-530. 밑줄 강조 필자)[4]
어떤 날 남자가 달력에 표기된 느낌표를 보고 일순간에, 하지만 일순간 동안만 통카의 부정을 확신하는 대목이다. 전반부에는 ‘눈이 먼 것처럼’, ‘우물처럼 어둡고’, ‘둔한 빛을 쏟아부어’, ‘대상을 부각시키고’ 등 시각적인 장치들이 배치되어 있다. 햇빛이 유리창으로 들어와 방 안의 물건들 위를 지나 줌인하면서 묵은 달력 위로 옮겨간다. 통카를 의심하는 남자의 주관적인 감각에는 달력에 표시된 느낌표가 실제 빛의 낮은 조도와 대조되면서 밝고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김명수의 번역은 “광대한 평원에 조그만 느낌표”, “흰 종이에 빨간색 느낌표”의 대비를 부각하면서 이 문장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한다. 이 시각적인 초점화는 “피를 뿜어내는 샘”의 분출하는 이미지와 어우러져 남자의 의심이 확신으로 급변하는 것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여준다. 일말의 상투성도 용납하지 않는 원문을 이미지적으로 변환해서 옮기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강명구의 번역에서는 “그런 확신이 들자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했다”(강명구 2020, 119)로 변형되어 흥분과 분노가 표출된다. 최성욱의 번역은 아예 대놓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순간”(최성욱, 174) 이라고 원문에 없는 어휘를 부가하여 분노로 귀착시킨다. 이 두 번역은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관습적인 표현을 차용하여 원문을 상투화하면서 남자 주인공을 그가 원문에서는 겪지 않는 감정 상태에 빠트린다.
김명수의 번역은 강명구의 1997년 번역에 일정 정도 참조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나, 최성욱의 번역과 강명구의 2020년 번역에는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명수의 번역은 <통카>에 있는 철학적이고 메타서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오역이 상당하다는 취약점이 있으나, 시인의 직관력으로 원문의 외피와 과육을 ‘함께’, 이 둘을 분리시키지 않고 온전히 옮긴 문장들이 있고 특히 남자 주인공의 내적 균열을 옮기는 데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통카>는 언젠가 오게 될 새로운 번역에 증여할 자산을 품고 있다고 생각된다.
2) 강명구 역의 <통카>(1997)
3) 강명구 역의 <통카>(2020)
강명구는 꾸준히 번역 활동을 해오고 있는 번역가로 그녀의 <통카>는 1997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세 여인>에 수록되어 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강명구는 같은 번역의 “미흡한 부분을 다듬어”(강명구 2020, 134) 2020년에 민음사에서 새롭게 출판했다. 강명구는 <여성 체험과 자아 인식: R. Musil의 『세 여인』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무질의 연구자이기도 한데 여성의 역할과 작용에 주목했던 연구 관심은 1997년 번역에 역자 해설의 제목인 “여성의 의미에 대한 재조명”에서도 나타난다. 이로부터 번역자의 번역지향이 여성 인물 통카에 대한 서술에 반영되었을 걸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통카는 매매춘이 낯설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고 족보 꼬인 친척들과 생활하는 빈민계층의 노동자로, 그녀의 사회적 벡터는 여러 차례 “einfach”라는 어휘로 표식된다.
① So gleich blieb sich Tonka, so einfach und durchsichtig war sie, daß man meinen konnte, eine Halluzination zu haben und die unglaublichsten Dinge zu sehen.(55) ② »Sie ist doch ein ganz einfaches Mädchen«, hatte man gesagt, »aus dem Tuchgeschäft.«(59) ③ aber ebensosehr fehlte ihr jedes Streben, aus ihrem Kreis in einen höheren zu gelangen; sie blieb wie die Natur rein und unbehauen. Es war gar nicht so einfach, die Einfache zu lieben.(62) ④ Die einfache Art zum Beispiel, wie sie ihm zugelaufen war, konnte Gleichgültigkeit sein oder Sicherheit des Herzens.(74) ⑤ Er gab schon etwas nach, [...], daß er die Fremdheit ihres allzu einfachen Lebens, [...], nicht mehr täglich reparieren konnte.(83) (이상 밑줄 강조 필자)
형용사 einfach는 꾸밈없이 투명하고(①), 단순한 여자(③) 등 통카의 인성을 가리키거나, 교육받지 못한 상태(②), 앞뒤 재지 않고 남자 주인공을 따르는 태도(④), 지나치게 범상한 생활(⑤)을 나타내는 등 다양한 뉘앙스를 갖는다. 통카의 이런 특성은 한 마리 “개”에게 어울리는 “선(善)”(강명구 2020, 123)과 연결되어 통카가 거짓을 꾸미지 않는 사람임을 가리키는 한편, 아무나 주인으로 따르는 한 마리의 “개”(강 2020, 109)와 같은 이미지와 연결되면 통카가 자신이 저지른 세속의 죄를 그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처럼 어휘 einfach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어서 보기와 달리 번역하는 게 무척 까다롭다.
강명구는 1997년 번역에서는 ①“너무도 단순하며 투명하여”(강명구 1997, 106), ②“통카는 아주 단순한 처녀”(114), ③“단순한 여자”(120) ④“그를 그저 쉽게 따르는 태도”(142), ⑤“너무도 단순한 생활 방식”(159) 등 거의 일관되게 단순함이라는 하나의 어휘로 통일했다. 그런데 2020년 번역에서는 ③의 번역을 “순수한 여자”로 바꾸어, “그녀는 자연처럼 순수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였다. 순수한 여자를 사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강명구 2020, 93)로 쓴다. 이 두 문장은 ‘자연처럼 순수하고’로부터 ‘순수한 여자’로 두운을 맞추고 소리를 이어지게 한다. 원문의 rein과 einfach를 순수함으로 옮기면서 자연-순수-여자를 조합하는데 어딘가 순진, 순정, 순결, 혹은 무구함과 같은 클리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자연은 <통카>에서 ‘Unendlichkeit(=무한성)’으로 불리는 독특한 함의를 갖는다. 자연은 의미가 정해지지 않은 무한의 카오스로 정신이라는 “차원 높은 영역”(강명구 1997, 120)과 완전히 달라서 정신의 활동인 개념과 언어가 자연의 앞에서는 한계에 부딪힌다. 디제시스 외부의 서술자는 이 문맥에서 통카를 가리켜 “자기 영역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영역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없었다”(강명구 2020, 93)고 하고, “그녀는 정신을 좇지만 정신이 되려 하지 않는 자연이었다”(강명구 1997, 121)[5]라고도 한다. 통카가 자연 그대로이고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식의 비유는 그녀의 동화적이고 무한한 특성을 함축한다. 그럼에도 강명구가 1997년에 번역한 “단순한 여자”를 2020년에 “순수한 여자”로 수정한 것은 통카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인물인지 애써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통카가 말없이 자신의 존재로 주장하는 ‘부정(不貞)의 부정(否定)’에 개연성을 더하려는 번역 의도가 있어 보인다.
남자 주인공은 통카의 임신에 합리적 의심을 하고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검증받는다. 의사에게 뭐라고 묻든 그가 묻고 싶은 것은 처녀 수태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가 뭐라고 묻든 그런 일은 인류의 역사에 없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도‘ ‘그것을 상상하고 싶어 하면 개선의 여지 없이 오쟁이를 지는 것이다!’
Und doch wäre er ein unverbesserlicher Hahnrei, wollte er sich das einbilden!(67) 영락없이 구제할 길 없는 간부의 남편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그런 일을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겠는가!(강명구 1997, 128) 그는 어쩔 수 없이 부정한 여자의 남편이 되느니 그런 일을 상상하고 싶었다!(강명구 2020, 99)
강명구의 1997년 번역에서 처녀 수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이야기된다. 2020년의 번역에서는 문장의 의미를 확정짓기가 애매하다. 어불성설인 그런 일을 억지로 상상할 만큼 통카에게 속고 바보가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읽을 수 있고, 혹은 남자 주인공이 내심 99% 확률의 수학적 진리에 회의적이며 처녀 수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척하지 않는다, 라고 읽을 수 있다. 그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끌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강명구는 1997년 번역에서 문장의 뜻을 명확히 했다가 2020년의 번역에서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문장을 흩트리는데, 그 결과 2020년의 번역이 임신과 성병의 인과를 밝히지 않는 서술자의 의도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강명구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통카의 임신과 성병을 해명될 수 없는 미스테리 쪽으로 끌고 간다. 이에 비해 김명수와 최성욱의 번역에서는 무게의 중심이 통카가 부정했다는 사실로 이동한다. 원문에서 의사들은 통카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도록 ‘그녀(sie)’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는데, 김명수는 ‘그녀’를 “당신(Sie)”으로 오독하여 “당신이 지금 놓여있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할 생각이라면”(김명수, 513) 통카를 위로하고 간호하라고 써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인물을 남자로 교체한다. 명백한 오독은 통카가 해고당하는 장면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사장은 임신을 이유로 통카를 해고하는데, 남자 주인공은 냉혹한 장사꾼을 속으로 남몰래 감탄한다. 김명수는 해당 부분을 “통카는 [...] 장사치에게 마음 속으로 은근히 찬탄했다”(김명수, 517-518)고 주어를 통카로 바꿔치기한다. 김명수의 번역문에서 통카는 자신이 나쁜 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응징받는 인과응보에 동의하는 것이다. 최성욱은 위에서 인용한 ②번의 einfach를 헤프다는 뜻을 포함하여 다루기 쉽다는 식으로 번역한다. “포목점에서 일했다면 아주 쉬운 여자겠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최성욱, 134) 그리고 최성욱은 원문의 Untreue(=부정)을 부부관계를 전제로 하는 “간통”으로 번역해서 동거하는 두 인물의 관계를 과도하게 변형한다. 김명수의 오독과 최성욱의 의도적인 오역은 왠지 징후적으로 보이는데 번역자가 남자 주인공의 합리적 의심에 동조하며 통카의 죄를 확신하는 시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명수의 번역과 최성욱의 번역에서는 남자가 99퍼센트 확실하게 속고 있음에도 억지로 통카를 믿겠다는 의지가 훨씬 더 선명하다. 속고 있을 “99퍼센트의 확률 die neunundneunzig Prozent Wahrscheinlichkeit”(77)은 김명수에게는 “치욕의 가능성”(김명수, 525)이고 최성욱한테는 “모욕적인 확률”(최성욱, 166)이다. 강명구에게는? “부끄러운 확률”(강명구 1997, 147/ 강명구 2020, 113)로 강도가 약화된다. 작은 차이지만 그 다름은 명확하다.
첨언: 강명구의 2020년 번역은 1997년 번역에 비해 한층 세련된 편집으로 보기에 편하고 문장이 읽기에 섬세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어떤 부분들에서는 최성욱의 번역을 따른다는 의구심이 들고, 이 경우 1997년의 번역보다 더 나아 보이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4) 최성욱 역의 <통카>(2015)
최성욱은 <주체의 위기와 유토피아: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을 중심으로>로 학위를 하고 연구서 <로베르트 무질>(한국학술정보「주」 2008)을 출간한 바 있는 무질 연구의 전문가이다. 그는 <세 여인>뿐 아니라 <지빠귀>, <사랑의 완성>, <생전의 유고> 등 무질의 여러 작품을 번역해서 <사랑의 완성>이라는 제목의 편역서로 출간하였다. 이 책에 번역 의도나 번역지향을 짐작해 볼 정보는 주어져 있지 않으나, 최성욱의 <통카>에는 번역자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지식과 해석을 번역에 적용했음을 알리는 꽤 많은 단서가 있다. 단적인 예로 진리 혹은 진실로 번역되곤 하는 개념어 Wahrheit를 남자 주인공과 관련해서는 진리로, 통카와 관련해서는 진실로 구분해서 번역한다. 최성욱은 통카가 속한 “심오한 동화의 나라”를 설명하는 관계절에서는 “진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진리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세계”(최성욱, 148)로 번역하고, 통카가 의학적 근거에 마주하여 자신을 믿지 못하면 떠나게 해달라고 남자 주인공에게 말할 때는 “통카가 자기 말을 변호해줄 방법은 오로지 그녀의 인간적 진실성뿐이었다”(최성욱, 160)고 번역한다. 남자 주인공은 화학 전공의 자연과학자로 원래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는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인물이다. “그는 감정의 파괴를 옹호하고 문학, 선, 덕, 꾸밈없는 순진함에 반대했다.”(최성욱, 137) 그런데 통카의 임신은 ‘엔지니어 정신’에 광신적인 남자한테 인식의 메커니즘이 교란되는 사태를 불러일으키고 남자는 어렵사리 세계이해와 세계 인식에 전회를 겪는다.
욕망과 지식과 감정은 실타래처럼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는 때가 돼서야 비로소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혹시 진리라는 실마리를 따라가는 방법 외에 다른 길로 세계를 살아갈 수는 없을까? 진리의 냉철함이 그를 모든 것과 분리시켜놓은 순간에 통카는 동화 이상의 존재였다. 이런 점에서 통카는 거의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다.(최성욱, 165-166)[6]
이 대목에서 남자 주인공은 대상의 인식에 대해 혼란을 거듭한 끝에 사념을 정리하고 통카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서술자는 오성의 법칙으로 참을 증명하는 ‘진리의 길(道)’에 회의하고 한계를 표명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자문하는데, 최성욱은 원문의 “Firnis der Kälte”(77)를 해석하여 과감하게 “진리의 냉철함”으로 다시쓰기를 하여 다른 두 번역자와 확연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얻는다. 김명수는 Firnis(=바니시)의 사전적 뜻을 사용해서 “얼음 니스”(김명수, 524)로 번역했고, 강명구는 Firnis의 파생적 뜻을 가져와 “차가운 허식”(강명구, 1997, 146), “냉정한 겉치레”(강명구 2020, 113)로 옮겼다. 김명수와 강명구의 번역은 난해한 원문을 오리무중의 심연으로 침몰시켜버리는데, 최성욱의 번역은 독자에게 원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한다. 즉, 오성의 합리적 법칙에 따라서 인식하려고 한다면 통카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이것도 Sendung을 풀어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오라클이나 신의 메시지처럼 수수께끼가 된다.
무질은 응축하고 생략하는 글쓰기를 하는 까닭에 원문을 단어 대 단어로 직역해서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다. 최성욱의 번역은 원문을 설명하고 해석을 부연하는 경향이 큰데, 이는 무질 연구자이기도 했던 강명구의 번역이 원문에 뭔가를 보태려고 하지 않는 점과 사뭇 대조적이다. “Der Schattenmensch, das Unwirkliche in ihm [...]”(80)처럼 응축(Schatten+Mensch)하고 첫 어휘와 두 번째 어휘 사이를 생략하는 말의 조합인 경우, 최성욱은 “그의 그림자, 그의 내면에서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그의 다른 자아”(최성욱, 172. 밑줄 강조 필자)라고 쓴다. 원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das Unwirkliche를 ‘가능성~자아’로 번역한 부분에서는 이 어휘를 무질의 개념인 ‘Möglichkeitssinn(=가능성 감각)’과 유비하는 연구자의 면모마저 나타난다. 그런데 텍스트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고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하려다 보니 확증 편향적으로 텍스트를 번역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최성욱은 mehr als Mädchen을 Märchen으로 잘못 읽고 “동화 이상의 존재”로 번역했다. 오독과 오역이 발생한 경로를 알 수는 없으나 (첫음절이 같아서 헷갈렸을 수도 있다. 다른 두 번역자도 Mädchen를 Märchen으로 오독했다), 짐작건대 과학적 진리 대 통카의 불가해성이라는 대립의 도식을 세우는 연구자가 번역자의 작업에 간섭한 것 아닐까. 다시금 한여름날 외롭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예로 들어보자. 서술자는 통카가 언어를 매개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함을 깨달으면서 이 표현을 쓴다.
Und in diesem Augenblick erkannte er sie ganz klar. Eine mitten an einem Sommertag allein niederfallende Schneeflocke war sie. Aber im nächsten Augenblick war dies gar keine Erklärung,(84) 이 순간 그는 통카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하게 인식했다. 통카는 한여름에 외롭게 떨어지는 눈송이였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이 말은 그녀의 본질을 결코 해명해주지 못했다.(최성욱, 178. 밑줄 강조 필자)
최성욱은 여기서도 원문에 없는 “그녀의 본질”을 추가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해석이 깔린 강하게 주장하는 문장을 쓴다. 그런데 이 번역은 원문을 이해하도록 만들려다 원문을 모순되게 만들고 만다. 이제 원문에 더해진 “그녀의 본질”을 걷어내고 번역해 보면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이것은 전혀 설명이 되지 않았다”(김명수, 533)가 된다. 김명수의 번역에서 낡은 느낌을 살짝 고치면 ‘그러나 다음 순간에 이것은 전혀 해명이 아니었다’로 옮길 수 있다. 그렇기도 한 것이 한여름에 내리는 눈송이는 설명이나 해명이 아니라 은유이니까, 이렇게 원문을 읽고 옮길 수 있다. 한여름에 내리는 눈송이는 통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밝히자’하는 설명(說明)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현실일 가능성을 탐구하는 문학적 인식을 실어나르는 은유이다.
3. 평가와 전망
로베르트 무질은 작가의 중요성에 비해서 번역이 지체된 감이 있다. 최근에 대작 <특성 없는 남자>가 연달아 완역되어 출판되었기에 그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거나 재번역되어 한층 더 넓은 독자층과 만나기를 기대하게 된다. 2023년 8월 현재까지 출간된 네 편의 <통카>는 번역자의 배경과 관심에 따라서 일정 정도 차별성이 있다. 김명수의 번역은 시인의 직관력과 언어력을 드러내는 한편, 모호한 원문들을 어휘 대 어휘로 직역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명구의 번역은 젠더적인 문제의식으로 서술의 어떤 의도를 번역작업의 안에 용해한다. 최성욱의 번역에서는 원문에 부가어들을 삽입하는 전략이 두드러지는데, 작품의 의미를 밝혀서 전달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들은 저마다 무질의 원작에서 무언가를 끌어내었는데, 작품의 시적 핵심은 끌어낼수록 더 깊어지고 더 커지고 더 자라난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자신을 끌어내어 줄 번역을 여전히 강하게 부르고 있기에, 새롭게 나타날 다음 번역이 <통카>를 어떻게 번역해서 무엇을 끌어낼지 벌써 기대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김명수(1990): 통카. 금성출판사.
강명구(1997): 통카. 문학과지성사.
최성욱(2015): 통카. 북인더갭.
강명구(2020): 통카. 민음사.
- 각주
- ↑ Musil, Robert(1976): Tagebücher. Frisé, Adolf(ed.). Vol. 1. Reinbek bei Hamburg: Rowohlt, 394.
- ↑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사용한다. Musil, Robert(1990): Tonka. In: Drei Frauen. Reinbek bei Hamburg: Rowohlt.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 ↑ “연판을 들이밀 듯”은 “...durch Bleischeiben”의 오역이다. Bleischeiben은 유리 조각들을 접합하여 금속 틀 안에 끼워 넣는 방법으로 만든 유리창을 가리킨다.
- ↑ Die Fenster jenseits des engen Hofes lagen blind im Schatten, die Menschen waren zur Arbeit gegangen, wie ein Brunnen dunkelte unten der Hof, die Sonne schien wie durch Bleischeiben in die Wohnung, sie hob jeden Gegenstand heraus und ließ ihn tot aufleuchten. Und da lag zum Beispiel auch einmal ein kleiner alter Kalender so aufgeschlagen, als hätte Tonka eben in ihm geblättert, und in der weiten, weißen Ebene eines Blattes stand, wie eine Pyramide der Erinnerung zu einem Tag gesetzt, ein kleines rotes Rufzeichen.[...] die Zeit mochte ungefähr stimmen, und die Gewißheit schoß wie ein Blutsprudel in den Kopf.(81)
- ↑ 강명구의 2020년 번역에서는 이 문장이 다음과 같다. “그녀는 정신세계와 나란히 있는 자연이었다. 스스로 정신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사랑했고 [...]”(강명구 2020, 94). 여기서는 1997년의 번역이 원문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해서 이 번역문을 인용한다.
- ↑ Wollen, Wissen und Fühlen sind wie ein Knäuel verschlungen; man merkt es erst, wenn man das Fadenende verliert; aber vielleicht kann man anders durch die Welt gehen als am Faden der Wahrheit? In solchen Augenblicken, wo ihm von allen ein Firnis der Kälte trennte, war Tonka mehr als ein Mädchen, da war sie fast eine Sendung.(77. 밑줄 강조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