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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는 척했다.(정미경, 219-220)
 
  나는 자는 척했다.(정미경, 219-220)
  
뱀에 물려 쓰러진 자베트를 안고 아테네의 병원을 찾은 파버는 그 자신도 탈진 상태가 되어 병원 침대에 누운 채로 젊은 시절의 연인 한나와 20여 년 만에 재회한다. 여기서도 그 장면을 과거시제로 회상하다가 재회의 순간 자체에 대한 묘사는 현재형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에 대한 부분에서는 과거시제로 돌아온다. 이런 서술 시제의 혼재는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경험”이라는 과거와 “존재”라는 현재, “기대”라는 미래의 구분 및 연결을 통해 세 가지 시간 차원이 수렴됨으로써 비로소 인간 존재가 구현될 수 있다. https://de.wikipedia.org/wiki/Homo_faber_(Roman)#cite_ref-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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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 물려 쓰러진 자베트를 안고 아테네의 병원을 찾은 파버는 그 자신도 탈진 상태가 되어 병원 침대에 누운 채로 젊은 시절의 연인 한나와 20여 년 만에 재회한다. 여기서도 그 장면을 과거시제로 회상하다가 재회의 순간 자체에 대한 묘사는 현재형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에 대한 부분에서는 과거시제로 돌아온다. 이런 서술 시제의 혼재는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경험”이라는 과거와 “존재”라는 현재, “기대”라는 미래의 구분 및 연결을 통해 세 가지 시간 차원이 수렴됨으로써 비로소 인간 존재가 구현될 수 있다.<ref><nowiki>https://de.wikipedia.org/wiki/Homo_faber_(Roman)#cite_ref-2</nowiki> 참조.</ref> 작가는 중요한 장면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융합시켜서 현대 물질문명의 대변자라 할 수 있는 발터 파버의 존재를 생동감 있게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정미경은 이런 서술 시제의 혼재를 원문 그대로 따름으로써 작가의 의도와 장면의 현재성을 살려서 번역했다. 봉원웅의 경우 이런 서술 시제의 변화를 번역에 반영하기도 했지만, 항상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다른 역자들의 경우에는 시종일관 과거형으로만 번역했다.  
작가는 중요한 장면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융합시켜서 현대 물질문명의 대변자라 할 수 있는 발터 파버의 존재를 생동감 있게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정미경은 이런 서술 시제의 혼재를 원문 그대로 따름으로써 작가의 의도와 장면의 현재성을 살려서 번역했다. 봉원웅의 경우 이런 서술 시제의 변화를 번역에 반영하기도 했지만, 항상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다른 역자들의 경우에는 시종일관 과거형으로만 번역했다.  
 
  
  

2025년 4월 15일 (화) 01:19 판

막스 프리쉬(Max Frisch, 1911-1991)의 소설

호모 파베르. 한 보고서
(Homo faber. Ein Bericht)
작가막스 프리쉬(Max Frisch)
초판 발행1957
장르소설


작품소개

막스 프리쉬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출판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문학 수업에서 자주 교재로 이용되고 있다. 일인칭 서술자 발터 파버는 애인 한나가 지어준 호모 파베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엔지니어인 그는 별명처럼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다. 예술, 자연, 종교 숭배를 원시적으로 여기고 통계와 확률을 중시하는 현대 기술 문명의 추종자다. 그는 반복되는 우연에 의해 뉴욕에서 파리로 가는 배에서 엘리자베트라는 젊은 여자를 만나 청혼하고 그녀와 동침하는데, 그녀는 그가 젊은 시절 한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그는 엘리자베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지난 삶에 큰 오류가 있었음을 자각하고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독백처럼 이 글을 서술한다. 그는 자신이 한나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망쳐 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지만, 위암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소설은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에 경도된 현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비판이자 경고로 이해된다. 국내에서는 1974년 손재준에 의해 <호모 파버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 출판되었다(을유문화사).


초판 정보

Frisch, Max(1957): Homo faber. Ein Bericht. Frankfurt a. M.: Suhrkamp.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호모 파버르 호모파버르, 大暴君과 審判 世界文學全集 89 막스 프리시 손재준 1974 乙酉文化社 295-464 편역 완역
現代人의 肖像 現代人의 肖像 博英文庫 38 막스 프리쉬 장남준 1974 博英社 9-312 완역 완역
3 호모 파베르 幼年時節, 젊은이의 變貌, 호모파베르 (三省版)世界文學全集 82 막스 프리시 장남준 1978 三省出版社 245-435 편역 완역
4 호모 파베르 선택된 인간, 호모 파베르 (三省版)世界現代文學全集 21 막스 프리시 장남준 1982 三省出版社 271-481 편역 완역
5 호모 파베르 선택된 인간. 호모 파베르 Ever books. 삼성세계문학 29 막스 프리시 장남준 1992 삼성출판사 269-484 편역 완역
사랑과 슬픔의 여로 사랑과 슬픔의 여로 막스 프리히 남궁옥 1992 황기성사단 5-257 완역 완역
호모 파버 호모 파버 막스 프리쉬 봉원웅 2003 생각의나무 11-359 완역 완역
8 현대인의 초상 현대인의 초상 지혜·교양 그리고 슬기로운 삶을 주는 시리즈 10 막스 프리쉬 장남준 2004 박영사 9-312 완역 완역
9 호모 파버 호모 파버 지혜·교양 그리고 슬기로운 삶을 주는 시리즈 10 막스 프리쉬 정미경 2021 을유문화사 7-289 완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스위스 출신의 작가 막스 프리쉬는 희곡, 소설, 일기, 에세이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호모 파베르. 한 보고서>는 그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1년 독일의 유명 영화감독 폴커 슐뢴도르프(Volker Schlöndorff)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프리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소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총 다섯 명의 역자가 번역작업에 뛰어들었다. 독문학자이자 시인인 손재준(고려대학교 교수 역임)이 1974년 “호모 파버르”라는 제목으로 국내 초역을 내놓았고, 같은 해에 독문학자 장남준(중앙대학교 교수 역임)이 “現代人의 肖像”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했다. 장남준의 번역은 1978년, 1982년, 1992년에 삼성출판사에서 “호모 파베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되었으며, 2004년에는 다시 박영사에서 예전과 같이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92년 남궁옥은 “사랑과 슬픔의 여로”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으며, 2003년에는 봉원웅이, 2021년에는 정미경이 “호머 파버”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했다. 따라서 막스 프리쉬의 이 소설은 1974년에 초역이 나온 후 80년대와 90년대에도 계속 번역서가 출판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2021년까지 총 3권이 나왔는바, 꾸준히 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명의 역자에 의해 총 9종의 번역서가 나왔으며, 제목도 “호모 파버르”, “현대인의 초상”, “호모 파베르”, “사랑과 슬픔의 여로”, “호모 파버” 등 다섯 개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작업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란 뜻의 라틴어 Homo faber를 라틴어 표기법에 따라 “호모 파베르”로 정하여 사용한다.

이 소설은 정거장(Station)으로 칭해지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정거장은 일인칭 서술자 발터 파버가 카라카스에서 6월 21일에서 7월 8일까지 쓴 것으로, 두 번째 정거장은 아테네 병원에서 7월 19일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술자라는 서술자의 직업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 정보가 제시되며, 기술 용어와 통계 데이터 등도 자주 등장한다. ‘보고서’라는 부제에 걸맞게 소설의 문체는 전반적으로 매우 간결하고 딱딱하며, 때론 전문 용어도 곁들인 엔지니어의 언어를 보여준다. 대부분 번역자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작품의 특징으로 제시했는바, 이 글에서는 소설의 문체적 특징이 어떻게 번역에 반영됐는지를 중심으로 비평해 보려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손재준 역의 <호모 파버르>(1974)

손재준의 번역은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89권에 베르너 베르겐그륀의 <대폭군과 심판>(Der Großtyrann und das Gericht)과 함께 실려 1974년 10월 출판되었다. 번역서에는 두 작품에 대해 제법 상세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손재준은 막스 프리쉬의 이 소설을 “수학적인 計算可能性(계산가능성)만을 믿고 인생의 神祕(신비)는 부정하고 살다가 자기 딸을 애인으로 삼게 된, 合理主義(합리주의)의 誤謬(오류)에 희생된 어느 기술자의 이야기”(손재준, 10)로 소개한다. 손재준 번역서의 의의는 국내 초역이라는 점인데, 두 달 뒤인 12월에 나온 장남준의 번역서와 비교해 볼 때 어휘가 매우 현대적이다. 오타나 맞춤법 오류가 거의 없고 단락 구분 또한 원문 그대로 따르고 있는 점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좋은 편인 반면, 오역이 종종 발견되는 아쉬움이 있다.

먼저 소설의 첫 장면을 살펴보자.

Ich war todmüde. 
Ivy hatte drei Stunden lang, während wir auf die verspätete Maschine warteten, auf mich eingeschwatzt, obschon sie wußte, daß ich grundsätzlich nicht heirate. 
Ich war froh, allein zu sein.
Endlich ging’s los ―(7)[1]
무척 피곤했다. 
이비는 내가 도시 결혼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세 시간이나 보챘다. 
나는 혼자인 것이 기뻤다. 
드디어 출발―(손재준, 295)

엔지니어답게 일인칭 서술자 발터 파버는 수식어 없이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며 단락도 자주 나눈다. 손재준은 원문의 단락 구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문장 또한 간결하게 번역하여 원문의 문체를 살리고 있다. 주인공 파버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로 통계와 확률을 중시하는 반면, 예술과 자연, 종교 숭배는 원시적이라 생각한다. 그는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독일인이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Er las seinen Roman.
Ich mache mir nichts aus Romanen ― sowenig wie aus Träumen, [...](15)
그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나는 소설을 즐기지 않는다― 꿈도 별로 없다.(손재준, 301) 
그는 소설책을 읽고 있던 것이다. 도대체 소설 따위는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치 꿈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장남준, 21) 

여기서 두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나온 장남준의 번역과 비교해 보면 손재준 번역의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난다. 장남준은 원문의 두 단락을 하나로 합쳤고, 약간의 해석이 가미됨으로써 문장도 길어졌다. 반면 손재준은 단락 구분과 문체 면에서 원문의 스타일을 따라 간결하게 번역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원문의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지는 못한 거 같다. 원문의 화자는 자신이 소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꿈도 그렇게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 손재준은 이를 ‘소설을 즐기지 않’고 ‘꿈도 별로 없다’고 번역했고, 장남준은 ‘소설 따위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꿈도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번역했다. 엔지니어로서 기계문명을 추종하고 실용성과 합리주의를 중시하는 반면 소설과 꿈은 비실용적이고 비합리적이라며 무시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소설의 중요 부분에서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손재준이 해설에서 이야기한 주인공의 합리주의적 성격 및 인생의 신비에 대한 부정이 노골적으로 표명되는 다음의 문장들에 대한 번역을 살펴보자.

Ich glaube nicht an Fügung und Schicksal, als Techniker bin ich gewohnt mit den Formeln der Wahrscheinlichkeit zu rechnen. Wieso Fügung? Ich gebe zu: Ohne die Notlandung in Tamaulipas, wäre alles anders gekommen: ich hätte diesen jungen Hencke nicht kennengelernt, ich hätte vielleicht nie wieder von Hanna gehört, ich wüßte heute noch nicht, daß ich Vater bin. Es ist nicht auszudenken, wie anders alles gekommen wäre, ohne diese Notlandung in Tamaulipas. Vielleicht würde Sabeth noch leben. Ich bestreite nicht: Es war mehr als Zufall, daß alles so gekommen ist, es war eine Kette von Zufällen. Aber wieso Fügung? Ich brauche, um das Unwahrscheinliche als Erfahrungstatsache gelten zu lassen, keinerlei Mystik; Mathematik genügt mir.(22; 밑줄은 필자에 의한 것임)
신의 섭리라든가 운명이란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기술자로서 나는 늘 확률의 공식을 고려하는 버릇이 있다. 무엇 때문에 섭리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타아마울리파아스에 불시착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젊은 헨케라는 신사도 사귀지 못했을 것이며, 필경 한나의 소식도 몰랐을 것이고 내가 자베트의 아버지라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타아마울리파아스의 그 불시착이 없었을 경우 모든 것이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가는 상상할 수가 없다. 어쩌면 자베트도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결코 하나의 우연 이외의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실로 그것은 우연의 연속이었다고 믿어진다. 그것을 어떻게 신의 섭리라 할 수 있을까? 비예상성을 체험의 사실로 문제삼으려는 데 있어 나에게는 아무런 신비설도 필요치 않다. 수학만으로도 충분하다.(손재준, 306-307) 

손재준은 전반적으로 간결한 문체를 추구한 편이지만 위에 밑줄 친 Wieso Fügung?을 ‘무엇 때문에 섭리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처럼 풀어서 길게 번역하기도 했다.[2] Wahrscheinlichkeit를 “확률”로 번역한 것이나,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몰랐다는 두 번째 밑줄 친 부분을 “자베트의 아버지”라고 자식의 이름을 넣어 번역한 것 말고도 비교적 큰 오역이 발견된다. 세 번째 밑줄 친 문장은 모든 게 그렇게 된 것은 우연 이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모든 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결코 하나의 우연 이외의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고 번역함으로써 문맥이 엉뚱하게 흘러가면서 내용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에서 오역이 발견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손재준의 번역서는 국내 초역으로 전반적으로 원문의 문체를 살려 번역하고, 이 소설 및 프리쉬 문학의 주제 의식을 소개한 점(“기계, 물질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아동일성 상실의 위기에 처해 있는 현대인의 문제”(10)), 이 소설의 독특한 문체를 지정(指定)한(“간결하고 투박하며 건방진 말투, 관료적이고 진부하며 냉담하고 타산적인 말, 문장이 절반쯤 생략되어 비약이 심한 말 등”(15))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2) 장남준 역의 <현대인의 초상>(1974)과 <호모 파베르>(1978)

장남준의 번역은 74년 12월 박영사에서 박영문고 38권으로 단독 출판되었다. 당시의 세로쓰기 관행이 아닌 가로쓰기로 인쇄되어 독서의 편의성을 기했다. 장남준 번역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국내 수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다른 번역자들의 번역서는 1회 출판에 그쳤는데, 장남준의 번역은 총 5회에 걸쳐 출판되었다. 시기적으로도 74년과 78년, 82년, 92년, 2004년으로 꾸준히 출판되면서 읽혀왔다. 두 번은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은 “호모 파베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장남준은 78년도 번역서에서 이 소설이 “20세기 기계문명에 의해 탄생된 자기를 상실한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장남준, 453)고 해설하는데, 이런 이유에서 소설 제목을 “현대인의 초상”으로 정한 것 같다.

앞의 손재준 번역에 대한 장에서 제시한 소설의 첫 장면에 대한 장남준의 74년도 번역과 78년도 번역을 살펴보자.

이뷔이는 내가 예정 시간보다 지연되어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더러 결혼하자고 세 시간 동안이나 졸라대었다. 
나는 지칠대로 지쳐 버렸다(도대체 내가 결혼 같은 것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졸라대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혼자 있게 된 것이 무척 홀가분하고 기뻤다. 
드디어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장남준 1974, 9-10)
나는 지칠대로 지쳐 버렸다. 
아이비는 내가 예정 시간보다 지연되어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도대체 내가 결혼 같은 것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더러 결혼하자고 세 시간 동안이나 졸라대었다. 
나는 이렇게 혼자 있게 된 것이 무척 홀가분하고 기뻤다. 
드디어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장남준 1978, 245)

원문의 한 문장짜리 첫 단락인 Ich war todmüde.에 대한 번역 ‘나는 지칠대로 지쳐 버렸다.’가 74년의 초역에는 두 번째 단락 중간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문장 순서를 달리하고 원문에 없는 괄호를 사용하여 파버가 그렇게 몹시 지친 이유를 아이비가 결혼하자고 졸라댄 탓으로 인과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78년도 번역본은 원문의 단락 구분을 그대로 따랐고, 원문의 문장 순서 그대로 번역한 점도 눈에 띈다. 원문의 마지막 두 단락인 Ich war froh, allein zu sein.과 Endlich ging’s los ―를 손재준은 ‘나는 혼자인 것이 기뻤다.’와 ‘드디어 출발―’로 번역했는데, 장남준은 ‘나는 이렇게 혼자 있게 된 것이 무척 홀가분하고 기뻤다.’와 ‘드디어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간결한 문체와 차이를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손재준 번역에 대한 장에서 제시한 소설과 꿈에 대한 파버의 견해 번역에서도 목격되었다. 장남준은 원문 고유의 문체를 살리기보다는 의역 내지는 자국화 번역의 경향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런 연유에서 장남준 초역에서는 “호주머니가 달랑달랑했다”(151)나 “절대 그런 불장난은 아니었다”(151)와 같은 재미있는 우리말 표현이 발견되기도 한다. 반면에 “슈우샤인 보이”(264)나 “펨프”(278), “피크닉”(291), “스크리인”(293), “러쉬아워”(294), “포지션”(307) 같은 외래어도 매우 자주 발견된다. 고유의 번역 원칙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작품 해설[3] 외에 번역에 대한 견해나 저본 정보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앞에서 본 것처럼 74년도 번역서와 달리 78년도 번역서에서 장남준은 단락 구분을 원문에 충실하게 수정했는데, 맞춤법 오류와 오타 등도 개선했다. 예를 들면, “닥아왔다;다가왔다”(15;249), “담구었다;담그었다”(16;249), “쓸어지듯;쓰러지듯”(17;250), “검으스레하게;거무스레하게”(25;255), “붙쳤다;붙였다”(41;265), “염두도;엄두도”(47;269), “누어서;누워서”(54;273), “닥아올;다가올”(74;286) 등이다.

장남준의 번역은 가장 초기에 번역된 후 개정되어 재출판되면서 이 소설의 국내 수용에 크게 기여한 공(功)과 잦은 맞춤법 오류나 중대한 오역이라는 과(過)가 교차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3) 남궁옥 역의 <사랑과 슬픔의 여로>(1992)

막스 프리쉬의 이 소설은 1992년에는 “사랑과 슬픔의 여로”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번역자는 남궁옥으로 일본 문학과 중국사를 공부했고 전문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는바,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부터 중역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작가 이름도 “막스 프리히”라고 표기되어 있다. 출판사는 황기성사단으로 유명한 영화제작사이다. 폴커 슐뢴도르프가 1991년 이 소설 원작의 영화를 제작하자 국내 개봉에 대비해 이 소설을 번역한 것으로 판단된다. 1992년 국내 개봉 당시 우리말 제목도 “사랑과 슬픔의 여로”이다. 따라서 남궁옥의 번역본은 유명 감독의 영화와 맞물리면서 당시에 많이 읽혔을 거로 생각된다.

남궁옥은 “Your attention please, your attention please! - ”(11)와 같이 공항에서 나오는 영어 안내방송을 “유아 어텐션 플리이스, 유아 어텐션 플리이스!”(10)라고 번역이 아닌 음차하기도 하는데, 영어 및 영어 어휘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동시에 Offizier(46)를 “사관”(55)으로, Fremdenpolizei(46)를 “외사과”(55)로 번역하는 등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고어식 표현들도 자주 발견된다. 비행기에서 흡연이 허락됨을 알리는 “Rauchen wieder gestattet.”(17)를 “다시 금연이 허락되었다!”(18)라고 오역한 경우처럼 오역도 종종 발견된다. 전반적으로 오역이나 비문, 어색한 표현이 자주 발견되어서 번역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4) 봉원웅 역의 <호모 파버>(2003)

2003년에 나온 봉원웅의 <호모 파버>는 막스 프리쉬 전공자에 의한 번역답게 기존 번역들과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최근 연구를 반영한 자세한 작품 해설(“기계문명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의 절망과 파멸”)과 작가의 생애 및 작품 세계 소개(“현대인의 분열과 소외를 파헤친 20세기 독일문학의 전범”)는 작가 및 작품 이해에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준다. 소설을 구성하는 두 개의 장인 Erste Station과 Zweite Station을 원문의 의미대로 “첫 번째 정거장”과 “두 번째 정거장”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첫 번째 보고”와 “두 번째 보고”(손재준), “제1부”와 “제2부”(장남준)로 번역하거나 아예 생략해버린(남궁옥) 기존 번역들과 구별된다. 그리고 주어캄프 출판사(Suhrkamp Verlag)와의 독점계약으로 한국어 판권이 ㈜도서출판 생각의 나무에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1957년 초판을 저본으로 사용했음도 짐작하게 해 준다.

역자는 해설에서 기계 인간을 대변하는 인물 발터 파버의 성격 형상화를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간결하고, 관료적이고, 통속적이고 냉정하고, 계산적이고, 속기와 같은 언어”, 즉 “냉정하고, 삭막하고, 딱딱하고, 단조로운 문체를 통해 엔지니어의 언어를 창조”(371)했다고 말하는데, -번역 원칙이나 전략에 대한 견해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원문의 그런 문체를 최대한 살려 번역한 흔적이 느껴진다. 각주 2)에서 언급했던 비행기 흡연 표시등에 불이 들어온 것과 옆좌석 독일인에 관해 소개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Rauchen gestattet.
Er kam aus Düsseldorf, mein Nachbar, und so jung war er auch wieder nicht, anfangs Dreißig, immerhin jünger als ich; er reiste, wie er mich sofort unterrichtete, nach Guatemala, geschäftlich, soviel ich verstand ―(8)
흡연 표시등 점등. 
옆자리 사내는 뒤셀도르프 출신이었다. 그리 젊은 축은 아니었다. 삼십대 초반이었으니까. 어쨌든 나보다는 젊었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과테말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는 사업상 여행 중이었다.(봉원웅, 13) 

원문의 두 번째 문장은 콤마와 세미콜론 등으로 연결해서 문장이 길어졌다. 한국어도 콤마로 연결하여 문장을 길게 만들 수 있지만, 역자는 그것보다는 짧게 잘라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딱딱한 보고체 스타일을 살리는 쪽을 선택한 거 같다. 봉원웅 번역의 특징은 짧은 문장들로 번역하여 원문 문체를 살리면서 가독성도 매우 좋다는 점이다. 위의 ‘흡연 표시등 점등.’도 “담배를 피워도 좋다는 신호등이 켜졌다.”(손재준, 295)나, “「금연」 표시등이 꺼졌다.”(장남준, 10), “끽연이 허락되었다.”(남궁옥, 6), “흡연 표시등이 들어왔다.”(정미경, 8) 등과 비교해 볼 때 건조한 보고체의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이라 판단된다.

현대 기계문명의 추종자인 발터 파버가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 말하는 다음 장면을 살펴보자.

Zu den glücklichsten Minuten, die ich kenne, gehört die Minute, wenn ich eine Gesellschaft verlassen habe, wenn ich in meinem Wagen sitze, die Türe zuschlage und das Schlüsselchen stecke, Radio andrehe, meine Zigarette anzünde mit dem Glüher, dann schalte, Fuß auf Gas; Menschen sind eine Anstrengung für mich, auch Männer.(92)
일행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자가용에 오른다. 문을 닫고, 자동차 키를 꽂고, 라디오를 켜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숱한 행복한 순간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이 부담스럽다. 남자들 역시 그렇다.(봉원웅, 159) 

여기서도 원문은 콤마와 세미콜론으로 연결되면서 문장이 길어졌지만, 여러 행동을 순차적으로 열거한 것으로 주인공이 모임에서 나와 자동차에 올라 출발하기까지의 모습이 간결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문장은 길지만 부연, 수식에 의한 만연체가 아니고 오히려 간결한 문장들로 연결된 간결체라 할 수 있다. 봉원웅은 콤마를 사용해 긴 문장을 유지하되 꼭 필요한 문장 성분만으로 이루어진 간결하고 건조한 말투로 원문의 톤을 살려내고 있다. 마지막에 사람과 관련한 부분에서도 봉원웅은 최소한의 말로만 번역하여 딱딱한 보고문 스타일을 구현했다. 반면에 정미경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나한텐 힘든 일이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정미경, 130)라고 원문의 단어들을 빠짐없이(예를 들면 für mich) 그대로 번역했는데, 원문의 건조한 보고체가 약간 부드러워진 느낌을 준다.

봉원웅과 정미경 번역의 이런 차이점은 두 번째 정거장의 첫 문장에 대한 번역에서도 나타난다.

Athen, Krankenhaus 
Beginn der Aufzeichnungen 19. Juli (161)
아테네, 병원, 7월 19일,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봉원웅, 287)
아테네 병원에서
7월 19일,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정미경, 229)

일기를 쓴 도시와 장소, 그리고 날짜가 온전한 문장이 아닌 메모처럼 명사와 날짜로만 제시되고 있다. 봉원웅은 명사들이 콤마로만 연결된 딱딱한 문체로 번역했는데, 정미경은 ‘아테네 병원에서’라고 도시와 장소를 하나의 구로 묶고 조사도 넣어 조금 부드러운 문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원문에는 줄 바꿈이 있고, 강조를 위해 이탤릭체가 사용되고 있는데, 봉원웅은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정미경은 원문 그대로 줄을 바꾸고 진한 고딕체로 강조한 점도 눈에 띈다.

봉원웅의 번역은 전공자에 의한 최초의 번역으로 원문의 딱딱하고 간결한 엔지니어 언어를 최대한 살려 번역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겠다.


5) 정미경 역의 <호모 파버>(2021)

정미경의 <호모 파버>는 2021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113권으로 출판되었다. 다른 번역서에는 없는 “판본 소개”가 눈에 띄는데, 이 소설의 생성 및 출판에 얽힌 정보들을 제공한다. 작가가 1957년의 초판 발간 이후 날짜가 어긋나는 부분을 고쳐 1977년에 수정판을 펴냈기에, 그것을 저본으로 사용했다고 밝힌다. 저본을 명시적으로 밝힌 유일한 번역서이다. 더불어 이 작품의 주제 및 시의성 그리고 엔지니어 문체 등에 대해 역자의 유용한 해설을 제공한다. 다만 번역 원칙이나 전략에 대한 언급은 없어 아쉬웠다.

정미경의 번역본은 원문에의 충실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봉원웅의 번역과의 비교에서 본 것처럼 정미경은 원문에 충실하게 단어들을 빠트리지 않고 번역했다. 때론 그것이 원문의 간결한 문체가 주는 문장의 긴밀성을 조금은 약화시킨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 두 번째 정거장의 경우 그날의 일과나 경험이 아닌 서술자의 성찰에 관한 부분은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되어 있는데, 정미경은 그런 곳을 진한 고딕체를 이용해 구분했다. 다른 역자들의 번역서에서는 그런 구분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미경의 번역본은 서술 시제의 번역에서 기존의 번역들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일인칭 서술자의 기억에 의한 보고 형식으로 서술되기에 시제가 전반적으로 과거형이다. 그런데 종종 현재형으로 서술될 때가 있다. 가령 아이비와 다투는 장면, 자베트가 뱀에 물려 뒷걸음질 치다 뒤로 넘어지는 장면, 한나와의 재회 장면 등이 그것인데, 현재형 서술 시제가 사용됨으로써 그 장면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나와의 재회 장면을 예로 살펴보자.

[...] ich schlief, ich hörte alles und wußte, daß ich schlief, und ich wußte: Wenn ich erwache, dann vor Hanna.
Plötzlich die Stille ―
Mein Schrecken, das Kind sei tot. 
Plötzlich liege ich mit offenen Augen: ― das weiße Zimmer, ein Laboratorium, die Dame, die vor dem Fenster steht und meint, ich schlafe und sehe sie nicht. Ihr graues Haar, ihre kleine Gestalt. Sie wartet, beide Hände in den Taschen ihres Jacketts, Blick zum Fenster hinaus. Sonst niemand im Zimmer. Eine Fremde. Ihr Gesicht ist nicht zu sehen, nur ihr Nacken, ihr Hinterkopf, ihr kurzgeschnittenes Haar. Ab und zu nimmt sie ihr Taschentuch, um sich zu schneuzen, und steckt es sofort wieder zurück, beziehungsweise knüllt es in ihrer nervösen Hand zusammen. [...]
Ich tat, als schiefe ich.(125-126)
잠이 들었다. 모든 걸 들으면서도 자고 있다는 걸 난 알았다. 그리고 내가 깨어나면 한나가 앞에 있을 거라는 것도.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 애가 죽었다니, 난 소스라치게 놀란다. 
문득 난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검사실처럼 보이는 하얀 방, 창가에 어떤 여인이 서 있다. 내가 자느라 자기를 못 본다고 생각한다. 회색 머리카락에 체격이 자그마하다. 양손을 재킷 주머니에 찌른 채 창밖을 내다보며 그녀는 기다린다. 방에 다른 사람은 없다. 낯선 사람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덜미, 뒷머리, 짧게 자른 머리만 보인다. 가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는 즉시 다시 찔러 넣거나 신경질적으로 구겨 버린다. [...] 
나는 자는 척했다.(정미경, 219-220)

뱀에 물려 쓰러진 자베트를 안고 아테네의 병원을 찾은 파버는 그 자신도 탈진 상태가 되어 병원 침대에 누운 채로 젊은 시절의 연인 한나와 20여 년 만에 재회한다. 여기서도 그 장면을 과거시제로 회상하다가 재회의 순간 자체에 대한 묘사는 현재형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에 대한 부분에서는 과거시제로 돌아온다. 이런 서술 시제의 혼재는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경험”이라는 과거와 “존재”라는 현재, “기대”라는 미래의 구분 및 연결을 통해 세 가지 시간 차원이 수렴됨으로써 비로소 인간 존재가 구현될 수 있다.[4] 작가는 중요한 장면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융합시켜서 현대 물질문명의 대변자라 할 수 있는 발터 파버의 존재를 생동감 있게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정미경은 이런 서술 시제의 혼재를 원문 그대로 따름으로써 작가의 의도와 장면의 현재성을 살려서 번역했다. 봉원웅의 경우 이런 서술 시제의 변화를 번역에 반영하기도 했지만, 항상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다른 역자들의 경우에는 시종일관 과거형으로만 번역했다.


3. 평가와 전망

막스 프리쉬의 이 소설은 작가의 가장 유명한 산문 작품 중 하나로 독일어권에서 문학 수업의 교재로도 사용되는 등 널리 읽히고 있다. 국내에서도 70년대부터 시작해 2021년까지 다섯 명의 역자에 의해 9종의 번역서가 출판되면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다섯 명의 번역자의 번역본을 살펴본 결과 2000년 이전에 나온 세 역자의 번역본들은 번역에 오류가 적지 않고, 때론 성실성도 부족하여 역자들이 장편의 소설을 번역하는 데 들인 노력과 시간에 답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에 나온 두 역자의 번역서는 이런 오류들을 줄이면서 간결하고 건조한 기술자의 언어 및 문체를 살려 번역했고 원문에의 충실성도 추구하였다. 여러 면에서 번역의 점진적 발전이 발견되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라 하겠다. 그런데 역자들 모두 “Ein Bericht”(한 보고서)라는 소설의 부제는 제목 번역에 넣지 않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독특한 문체를 생각할 때 역자들은 나름의 원칙이나 전략을 갖고 번역에 임했을 텐데, 그런 성찰과 고민 그리고 노력과 관련한 언급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후의 번역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자못 궁금하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손재준(1974): 호모 파버르. 을유문화사.

장남준(1974): 현대인의 초상. 박영사.

장남준(1978): 호모 파베르. 삼성출판사.

남궁옥(1992): 사랑과 슬픔의 여로. 황기성사단.

봉원웅(2003): 호모 파버. 생각의나무.

정미경(2021): 호모 파버. 을유문화사.

권선형

바깥 링크

  1. Frisch, Max(1957): Homo faber. Ein Bericht. Frankfurt a. M.: Suhrkamp. 이하에서는 위에서처럼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
  2. 비행기에서 흡연이 허용되는 것을 알리는 “Rauchen gestattet.”(8)를 “담배를 피워도 좋다는 신호등이 켜졌다.”(손재준, 295)로 번역한 것도 그러하다.
  3. 74년도 번역서에는 해설이 3쪽으로 짤막했던 반면 78년도 번역서에는 “막스 프리시와 그의 작품세계”라는 제목으로 16쪽짜리 긴 해설이 제공되는데, 손재준의 해설을 일정 부분 그대로 갖다 이용한 점이 발견된다.
  4. https://de.wikipedia.org/wiki/Homo_faber_(Roman)#cite_ref-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