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사람 (Der Erwählte)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소설
작품소개
1951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이다. 그리말트 공의 쌍둥이 남매 빌리기스와 지빌라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에게 끌리며 깊이 사랑을 하게 된다. 이 금지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인 그레고리우스는 상자에 버려져 한 어부의 집에서 성장한다. 그는 육체와 정신이 빼어난 기사가 되어 출생의 비밀을 찾아 집을 떠나며 전쟁에서 한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 여왕의 남편이자 군주가 된다. 3년 뒤 밝혀진 비밀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내가 바로 어머니 지빌라임을 알게 된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엄청난 죄에 대한 속죄의 길을 떠난다. 한 바위 위에 웅크려 17년간을 반성하고 참회한 그에게 신은 교황이라는 은총을 내려준다.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는 마찬가지로 참회의 삶을 살아온 어머니이자 아내를 만나 용서해준다. 1961년에 박종서에 의해 <선택된 인간>이란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정음사).
초판 정보
Mann, Thomas(1951): Der Erwählte. Frankfurt a. M.: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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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選擇된 人間 |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外 | 世界文學全集 19 | 토마스 만 | 朴鍾緖(박종서) | 1959 | 正音社 | 11-242 | 편역 | 완역 | 초판 |
2 | 선택된 인간 | 世界文學選集, 10 | 世界文學選集 10 | 토마스 만 | 합동출판사 | 1964 | 合同出版社 | 220-250 | 발췌역 | 편역 | 축소판이라 명시되어 있음 |
3 | 選擇된 人間 |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外 | 世界文學全集 38 | 토마스 만 | 박종서 | 1969 | 正音社 | 11-242 | 편역 | 완역 | 중판, 총서번호 19에서 38로 변화 |
4 | 選擇된 人間 | 世界文學大全集 11 | 世界文學大全集 11 | 토마스 만 | 姜斗植(강두식) | 1974 | 大洋書籍 | 7-230 | 편역 | 완역 | |
5 | 選擇된 人間 | 大公殿下, 選擇된 人間 | (三省版)世界文學全集 52 | 토마스 만 | 朴鍾緖(박종서) | 1976 | 三省出版社 | 289-524 | 편역 | 완역 | 역자해설에서 선택된 인간의 경우 "이미 出刊된 바 있으나 이번에 改譯하였음도 아울러 밝히는 바"라 적음 |
6 | 選擇된 人間 | 選擇된 人間 | 三中堂文庫 336 | 토마스 만 | 朴鍾緖(박종서) | 1977 | 三中堂 | 5-361 | 완역 | 완역 | |
7 | 선택된 人間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선택된 人間, 群盜 | 世界名作 다이제스트 1 | 토마스 만 | 洪京鎬(홍경호) | 1978 | 汎友社 | 67-97 | 편역 | 편역 | |
8 | 選擇된 人間 |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베니스에서 죽다 | (愛臟版)世界文學大全集 28 | 토마스 만 | 李鼎泰(이정태) | 1981 | 금성출판사 | 3-258 | 편역 | 완역 | 초판, 1984년 중판 |
9 | 選擇된 人間 | 選擇된 人間, 데이지 밀러 | 知星版 最新 世界文學全集 14 | 토마스 만 | 郭福祿(곽복록) | 1982 | 知星出版社 | 9-372 | 편역 | 완역 | |
10 | 선택된 인간 | 한자루 촛불 밝음이 다할 때까지 | 토마스 만 | 확인불가 | 1982 | 金文堂 | 188-189 | 편역 | 편역 | ||
11 | 선택된 인간 | 선택된 인간, 호모 파베르 | (三省版)世界現代文學全集 21 | 토마스 만 | 朴鍾緖(박종서) | 1982 | 三省出版社 | 13-267 | 편역 | 완역 | |
12 | 選擇된 人間 |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外 | 世界文學全集 38 | 토마스 만 | 朴鍾緖(박종서) | 1986 | 正音文化社 | 11-242 | 편역 | 완역 | 정음문화사의 초판 |
13 | 선택된 인간 | 世界文學大全集, 22 | (High Seller)世界文學大全集 22 | 토마스 만 | 김기봉 | 1989 | 敎育文化社 | 211-445 | 편역 | 완역 | |
14 | 選擇된 人間 |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베네치아에서 죽다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116 | 토마스 만 | 李鼎泰(이정태) | 1990 | 금성출판사 | 3-284 | 편역 | 완역 | 초판, 1993년 중판 |
15 | 선택된 인간 | 선택된 인간. 호모 파베르 | Ever books. 삼성세계문학 29 | 토마스 만 | 박종서 | 1992 | 삼성출판사 | 11-268 | 편역 | 완역 | |
16 | 선택된 인간 | 선택된 인간 | Hong shin elite book's 100 | 토마스 만 | 최호 | 1995 | 홍신문화사 | 11-273 | 완역 | 완역 | 초판, 2012년 중판 |
17 | 선택된 인간 | 선택된 인간 | 하서세계문학 54 | 토마스 만 | 김남경 | 1995 | 하서출판사 | 3-342 | 완역 | 완역 | |
18 | 선택된 인간 | 선택된 인간 | (초등학교·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논리논술 세계 대표 문학 50 | 토마스 만 | 확인불가 | 2006 | 삼성비엔씨 | 9-128 | 편역 | 편역 | 아동청소년문학 |
19 | 선택된 인간 |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09 | 누멘 | 101-103 | 편역 | 편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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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토마스 만의 이 소설은 1959년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선택된 인간>이란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번역자 박종서(1922~1983)는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독문학자로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등 독일문학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번역은 1976년 삼성출판사에서 개역판이 나왔고 92년까지 때론 출판사를 바꾸어가며 총 7회에 걸쳐 출간되었다. 중간에 강두식의 번역본(1974/1989)과 곽복록의 번역본(1982)이 나오긴 했으나, 이들의 번역은 박종서의 번역과 유사도가 매우 높다. 따라서 이 소설의 국내 수용은 오랜 기간 박종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1년 금성출판사 <세계문학대전집>을 통해 독문학자 이정태의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90년에 다시 출간될 때는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세로쓰기 인쇄에서 가로쓰기 인쇄로 바뀌었다. 이정태의 번역본은 개정 또는 개역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두 판본 모두 중판이 나왔는바,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 박종서의 번역과 함께 많이 읽힌 것으로 판단된다.
1995년에는 한 해에 두 권의 새로운 번역본이 추가되었다. <하서세계문학>을 통해 김남경의 번역본이, <Hongshin Elite Book’s>를 통해 최호의 번역본이 나왔다. 박종서와 이정태의 번역은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묶어서 출판되었는데, 김남경과 최호의 그것은 전집이라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온 점에서는 공통되나, 이 소설만 단독으로 출판되면서 책 제목이 <선택된 인간>이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상업적으로 볼 때 여러 작품을 묶어서 두꺼운 책으로 출판하는 것보다 개별 작품마다 책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런 변화가 나타난 것 같다. 이전의 번역자들이 교수들이었다면, 이들 두 사람은 조금 다르다. 김남경은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번역문학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역자 소개가 되어 있다. 그런데 최호의 경우에는 역자 소개가 없는 것 등으로 보아 독문학 전공자가 아닌 듯하다.
한편 2020년 <나남>에서 나온 김현진의 번역본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제목이 <선택받은 사람>으로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박종서의 번역 이래 계속 고수돼 오던 <선택된 인간>이란 제목에 하나의 대안이 등장한 것이다. 김현진은 이 소설의 기독교적 내용을 고려할 때, 신에 의해 ‘선택이 되다’ 보다는 ‘선택을 받다’라는 표현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으로 보인다. 원제인 Der Erwählte는 erwählen 동사의 과거분사로 만든 명사형이다. 과거분사를 번역할 때 보통 피동형을 사용하기에 종래에는 ‘선택된’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김현진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어법에 따라 ‘선택받은’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번역본의 또 다른 면모는 토마스 만 전공자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김현진은 ‘한국토마스만학회’의 독회에서 이 소설을 같이 읽으면서 “수년간에 걸쳐 학회 회원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번역문 초안을 역자가 수정하며 재작업을 한 결과”(김현진 2020, 6)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특유의 해학의 미학에 대한 해설을 비롯해 20쪽이 넘는 긴 역자 해제는 소설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이하에서는 몇몇 중요 번역본에 대해 개별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개별 번역본 고찰
박종서 번역본의 의의는 국내 초역이라는 점인데, 이후 이 소설의 이해 및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설의 중요한 개념 및 상황에 대한 번역에서 그런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
1951년, 토마스 만이 그의 나이 77세에 발표한 이 소설에서는 작가의 원숙한 세계관과 한층 더 세련된 문체가 돋보인다. 여기에는 서사의 전개에 틈틈이 끼어들면서 자기 생각과 감정 등을 거침없이 표출하는 서술자의 역할이 매우 크다. 현대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전지적 서술자인, 소설 밖의 이 인물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 책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준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서술자는 로마에 있는 종이란 종이 다 울리고 있다며, 그것을 울리는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Wer also läutet die Glocken Roms? ― Der Geist der Erzählung. ― Kann denn der überall sein, hic et ubique, [...] Allerdings, das vermag er. Er ist luftig, körperlos, allgegenwärtig, nicht unterworfen dem Unterschiede von Hier und Dort. 그러면 대체 누가 로오마의 종을 울리고 있을까? ― 전설의 넋이다. ― 그런데 그 넋은 어디나 있는 것일까? [...] 전설의 넋은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형체도 없이 어디나 있을 수 있는 것이요, 이곳저곳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292)
소설의 서술자는 자신이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편재하면서 종을 울리고 있는 저 “전설의 넋”(박종서는 Der Geist der Erzählung을 이렇게 번역했다)의 육화된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 소설은 중세 고지 독일의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서사시 <그레고리우스>에 기초하고 있는바, 즉 전설에서 그 소재를 가져왔기에 박종서는 Erzählung을 전설로 번역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에는 소설의 내용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서사/이야기 Erzählen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렇게 번역된 것 같다. 박종서 이후의 번역자들도 이 서술자를 “전설의 영혼”(이정태), “전설의 혼”(김남경)으로 번역했다. 김현진만 “이야기의 정령”으로 번역했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서술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meine Gnadenmär”라고 표현한다. 이에 대한 번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박종서는 이를 “나의 은혜로운 전설”(18)로, 이정태는 “나의 은총의 전설”(12)로, 김남경은 “나의 은총에 대한 전설”(11)로 번역했다. 반면 김현진은 “은총에 관한 믿기 힘든 이야기”(19)라고 단어의 내용을 풀어 쓰면서 전설이 아닌 이야기로 번역했다. 독일어 사전 두덴에 따르면 Mär는 “이상한 이야기, 믿을 수 없거나 사실이 아닌 보고”이다. 소설의 또 다른 장면을 살펴보자. 하느님의 어린 양이 로마에 사는 경건한 남자 프로부스의 꿈에 나타나서 새 교황이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프로부스는 어린 양의 계시에 놀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wie das? Symmachus und Eulalius sind beide tot, die Kirche ist ohne Haupt, die Menschheit entbehrt des Richters, und der Stuhl der Welt steht leer.
박종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쥠마쿠스나 에울라리우스는 모두 다 죽어버리어, 교회에는 교황이 없고, 인간 사회에는 판사가 없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가 비어 있는 것이 지금의 현상이다.”(188) 박종서는 전반적으로 직역을 추구하는데, 이곳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는 의도로 원문에 없는 ‘지금의 현상’이란 말을 넣어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후의 역자들도 박종서와 마찬가지로 원문에 없는 “오늘의 현실”(이정태 218)이나 “현재의 상황”(김남경 262) 같은 표현을 덧붙여서 번역했다. 이와 같이 박종서의 초역은 이후 역자들에게 사실상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종서의 초역은 전체적으로 직역을 추구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름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어색한 표현 및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종종 발견되기도 하는데 1976년의 개정판에서는 이런 점들이 상당 부분 개선된다.
독문학자 김정회(前 경기대 교수)는 1981년 금성사 세계문학대전집(全 120권) 제11권 <모래 사나이·브람빌라 왕녀>에 호프만의 다른 단편들과 함께 <모래 사나이>를 번역했다. 이 번역은 초역보다 훨씬 질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1997년에 새로운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오랫동안 유일한 번역이었기 때문에, 8·90년대 <모래 사나이> 수용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번역본 또한 여러 의문점을 남기는데, 우선 나타나엘을 ‘나타니엘’로, 로타르 Rothar를 ‘로타리오’로 옮겨놓아 독일어 원문을 직접 옮긴 것이 맞는 것인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김정회의 번역은 호프만의 소설에 담긴 강렬한 감정을 생생하게 살려내어 작품의 매력을 십분 전달한다. 역자는 전반적으로 독일어의 문장구조나 표현에 얽매이기보다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읽는 맛을 살리는 이른바 의역을 했다. 이러한 번역은 원문과 그 의미가 크게 엇나가지 않으면서도 나타나엘의 격정적인 정신세계를 잘 전달하는 장점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나타나엘이 친구 로타르에게 자신이 최근 겪은 끔찍한 일을 털어놓으면서 “이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데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인생에 깊은 상처를 입힌 이른바 인연(因緣)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군.”(김정회, 6)이라고 번역한 부분을 보자. 여기서 ‘인연’은 ‘Beziehung’을 옮긴 말로, 똑같은 단어를 ‘연관성’이라고 옮긴 이후의 김현성 역본과 비교해 볼 때 훨씬 구체적이고 가깝게 들린다. 또한 ‘인연’을 수식하는 말인 “내 인생에 깊은 상처를 입힌 tief in mein Leben eingreifende”도 “내 삶에 깊이 관련된”(김현성, 14)이라고 옮긴 경우보다 훨씬 생생하게 그 의미가 다가온다. 역자는 책 맨 뒤에 <호프만, 그 인간과 작품>이라는 제목의 캐리커처 형식의 해설에서 호프만이 얼마나 개성 넘치는 익살꾼에 “유별난 괴짜”(김정회, 450)인지를 묘사한다. 그는 호프만을 “다재다능한 ‘격정의 방랑가’”(김정회, 447), “스스로 자처한 ‘격정의 방랑가’”로 바라보고 있으며, 호프만이 충동적이고 정지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임을 강조한다(김정회, 448). 이러한 해석을 토대로 역자는 원문의 격정적인 어조를 생동감 넘치게 – 때로는 충실한 수준을 넘어서- 살리고 있다. 나타나엘이 로타르에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는 부분을 보자:
“그럼 이제부터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해보겠네. 아무래도 털어놓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해도 마치 미치광이처럼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릴 녀석이 내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다네.”(김정회, 5)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야겠지. 그래야 한다는 걸 알지만, 생각만 해도 미친 듯이 웃음이 터져 나오지 뭐야.”(김현성, 13-4)
이 번역의 격정적 어조는 다른 번역본, 예컨대 이후의 김현성 역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곧바로 알 수 있다. 김정회는 여기서 ‘es’(그것)를 김현성처럼 수동으로 번역하여 언급을 피하거나, 혹은 김영옥처럼 ‘그것’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녀석’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자기 안의 타자를 당시 한국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할 뿐만 아니라, 수동문으로 번역할 때보다 주인공이 겪는 분열의 감각을 훨씬 강렬하게 전달한다. 또한 김정회는 모래 사나이의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를 묘사할 때도 다른 판본들보다 더 격정적이고 어감이 센 표현을 많이 사용하여, 나타나엘의 공포를 실감 나게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김정회는 어조를 절묘하게 선택하여 작품의 극적 긴장감을 크게 높인다. 예컨대 그는 나타나엘이 로타르에게 보내는 첫 편지를 서간체(~네, ~지)로 번역하고 있으나, 중간에 나타나엘이 어릴 적의 기이하고 무서운 경험을 회고하는 부분부터 정확히 ‘~다’ 체로 문체를 전환한다. 나타나엘은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로타르라는 특정한 수신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독백하는 사람처럼 자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역자는 중간에 수신자에게 다시 말을 거는 “상상해 보게나”(김영옥, 278)와 같은 문장을 과감히 빼기도 했다. 또한 편지 수신인에게 이야기하는 말투는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을 전달하는 느낌을 준다면, '~다'체는 독자의 눈앞에 지금 그 사건이 일어나는 느낌을 준다. 이런 생생함이 돋보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불안과 기대로 나의 가슴은 와들와들 떨렸다. —방문 바로 앞에서 뚜렷이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손잡이가 심하게 울리며 방문이 요란스레 열린다!—나는 불끈 용기를 내어 조심조심 밖을 엿보았다.(김정회, 9)
모래 사나이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몰래 숨어서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나타나엘의 눈앞에 드디어 방문이 열리는 대목은 ‘현재 시제’로 번역되어 그 생생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또 나타나엘이 클라라와 탑 위에서 코펠리우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시 광기가 도지는 장면에서도 이런 시제 변화가 두드러진다. “코폴라의 망원경을 찾아내 그것으로 옆쪽을 들여다보았다——클라라가 렌즈 바로 앞에 보인다!——그 순간 온몸의 혈관이 찡 하고 경련을 일으켜—”(김정회, 44). 역자는 줄표 안의 문장 시제를 임의로 현재로 바꿔서 번역함으로써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독자에게 던진다. 호프만의 원작은 줄표(전각 대시)를 대단히 많이, 즐겨 사용하여 나타나엘의 어수선하고 광기 어린 사고의 흐름을 시각적으로도 보여준다. 이 줄표를 번역에서 얼마나 많이 재현했는가는 역자 개인의 의식적인 선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출판 관행에서 한국어 문장에 낯선 문장부호인 줄표가 얼마나 용인되었는가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김정회의 번역은 눈여겨볼 만하다. 역자는 줄표를 한국어 문장에 사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줄표의 사용이 자아내는 효과는 줄표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후의 번역과 비교해 보면 더 잘 드러난다. 역자는 나타나엘의 아주 논리적이지만은 않은 사고와 감정의 비약을 이미지적으로도 보여준다. 이는 역자가 해설에서 호프만의 문체를 두고 “꺾어 일그러진 소용돌이처럼, 마치 말을 찾아 허덕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김정회, 456)라고 지적한 바와 상통한다.
1997년 독문학자 김영옥이 새롭게 번역한 <모래 사내>는 서울대학교 독일학연구소가 편역한 <기적의 진실과 환상 속의 현실: 독일 작가들의 창작동화>(1997) 2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이 판본은 호프만의 이 소설을 ‘경이로운 것’과 ‘환상’을 문학으로 제시한 독일 동화와 낭만주의 문학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고, 세 쪽가량의 해설에서 처음으로, 이 작품을 현실 인식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눈을 빼앗긴 낭만주의자의 자기 파멸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소개하여 한국 독자들에게 작품 해석의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영옥의 <모래 사내>는 원문의 문장구조를 최대한 모방하면서도 의미가 대체로 정확하고 가독성이 높은 한국어로 옮겨놓아 이전 번역본에 비해 처음으로 학술적으로 인용 가능한 번역본을 내놓았다는 의의가 있다.
2001년에 출간된 김현성의 <모래 사나이>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번역본은 90년대 말 열린책들에서 프로이트 전집을 펴내면서 정신분석에 대한 수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소설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던 시점에 출간되었다. 같은 시기에 출간된 번역본 중에서도 저명한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는 점, 호프만의 다른 단편들과 함께 소개되어 전문성을 갖추었으면서도 학술서의 외피를 띠지 않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김현성의 번역본은 가장 널리 읽힌 판본이 되었다. 그런데 김현성의 번역은 다른 번역본과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정돈되고 다소 밋밋한 인상을 준다. 예컨대 소설의 맨 첫 문장, “너무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않아 모두들 걱정하고 있겠지”(김현성, 13)는 김영옥 번역의 “모두들 분명 안절부절 못하겠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 정말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않았으니 말이야”(273)에 비해 나타나엘이 로타르에게 편지를 쓰는 그 초조하고 답답하며 미칠 것 같은 심정을 전달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 또한 원문의 줄표를 옮기지 않아 원문보다 어조가 단조로워졌다. 예컨대 스플란차니와 코폴라가 한바탕 혈투를 벌일 때 그들이 서로에게 퍼붓는 저주와 욕설은 줄표를 살린 번역에 비해 이것이 서로에게 퍼붓는 저주라는 것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원문의 문체가 지닌 역동성과 난삽함이 상당 부분 약해지고 말았다.
쿵쿵거리는 소리, 덜컹거리는 소리, 밀치는 소리, 문에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저주와 욕설이 들렸다. ‘이거 놔. 내놔. 비열한 놈. 흉악한 놈. 그래서 거기다 신명을 다 바쳤어? 하하하하! 우린 그런 내기는 안 했어. 나는, 나는 눈을 만들었어. 기계장치도. 네 기계 장치는 멍청한 악마야. 빌어먹을 개 같은 멍청한 시계공 주제에. 꺼져, 이 악마. 잠깐. 꼭두각시나 조종하는 놈. 악마 같은 짐승, 거기 서. 꺼져 내놔!’(김현성, 62-63)
발 구르는 소리 – 쨍그랑 소리 – 밀치는 소리 – 문에 부딪치는 소리, 그 사이로 욕설과 저주가 들렸다. 놓으라고 – 놓으라고 – 비열한 놈아 – 흉악한 놈아! - 거기 몸과 인생을 다 바쳤다고? - 하하하하! - 약속이 틀리잖아 – 내가, 내가 눈알을 만들었어 – 기계장치는 내가 만들었지 – 멍청한 놈아, 그것도 기계장치냐 – 빌어먹을 개 같은 머저리 기계공아 – 꺼지라고 – 사탄아- 그만- 돌팔이 인형공 - 악마 같은 짐승아! - 그만 – 꺼져 – 놓으라고!-(황종민, 164)
쿵쾅쿵쾅 바닥을 발로 구르기도 하고—서로 맞부딪치기도 하고—그 사이에 간간이 욕지거리와 저주하는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이것 놔……네 놈이 먼저 놔……비열한 자식……악당놈! 이건 내 목숨이 걸린 거야……하, 하, 하, 하!……전혀 얘기가 틀리잖아……눈알은 눈알은 내가 만든 거야……태엽 장치를 만든 사람은 나라구. 네놈이 네놈이 만든 그 개떡 같은 태엽 장치가 뭐야……싸구려 시계방의 미친개 같은 놈……빨리 나가……악마……그만둬……꺼져버려……놓지 못해!>(김정회, 40)
그 외에 김현성의 번역본은 처음으로 상세한 각주와 해설을 제공하여 원문의 이해를 돕는다. 역자는 해설에서 이 작품을 다른 호프만의 작품과의 연관성 속에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갈등으로 해석하고, 프로이트의 ‘섬뜩함’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소설에 여러 번 등장하는 “unheimlich”를 모두 일관되게 ‘두려운’이라고 옮겼다. 이는 앞서 번역된 프로이트의 논문에서 이 용어를 ‘두려운 낯설음’이라고 옮긴 것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 역자는 특정한 관점의 설명에 국한되지 않고, 작품이 다루는 여러 주제를 개략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이 번역본은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기에 오랫동안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은 번역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종민이 번역하여 창비 세계문학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된 <모래 사나이>(2017)다. 황종민의 번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기존 번역본들과 달리 현대적인 어조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나타나엘이 로타르에게 편지를 쓸 때 기존의 ‘~네’체가 아니라 확연한 반말체인 ‘~어’체를 쓰고, ‘자네’ 대신 ‘너희’라고 칭한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클라라가 나타나엘에게 반말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연인 간의 편지에서 여성의 어투로 간주되는 ‘~요’체를 버리고 ‘~어’체를 택했다.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의 관계가 보다 평등한 느낌을 주며, 클라라가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상냥하고 혹은 “유순한”(이정태, 176) 아가씨가 아니라, 나타나엘이 느끼듯 쌀쌀맞고 냉정한 사람으로 나타나 보이는 효과를 준다. 예컨대 클라라가 나타나엘에게 “나타나엘 —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나타나엘! 얼토당토않고—어처구니없고—제 정신이 아닌 그 동화 따위는 불속에 던져버려”(황종민, 150)는 정말로 독설을 날리는 그 어조가 잘 살아 있다. 그래서 나타나엘이 이후 클라라에게서 마음이 돌아서고 올랭피아에게로 향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준다. 또한 이 번역에서는 이탈리아인 코폴라의 어색한 독일어를 어떻게 우리 말로 살릴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미 김영옥이 “앤경”이라는 역어를 써서 코폴라의 말투를 조금이라도 변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면, 황종민은 더 과감하게 “알흠다운 눈깔”(황종민, 153)이라고 번역한다. 이 표현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비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악마에 씌인, 혹은 악마적 광기에 지배당한 나타나엘을 보다 강렬하게 보여준다. 그밖에도 “sausend und brausend”와 같이 운이 맞는 표현을 “윙윙 휭휭”(황종민, 148)이라고 옮겨놓은 부분에서도 역자가 원어의 느낌을 다소 어색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얼마나 충실하게 옮기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창비 세계문학전집이 그렇듯이 번역의 문체는 정성스럽고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어 문학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높여준다. 때때로 이런 언어적 조탁이 노파의 거친 말투에도 적용되어 노파가 “꼬부랑한”이나 “구부러진”과 같은 말을 제치고 “휘움한”이란 문어체를 쓴다거나 할 때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황종민의 번역은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인만큼 지금까지 여러 번역본이 반복적으로 범한 번역 실수가 거의 없고,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대목을 거의 유일하게(권혁준 역과 함께) 제대로 옮기고 있다. 나타나엘은 아버지와 코펠리우스의 수상쩍은 실험을 몰래 훔쳐보다가 그만 걸리고 만다. 이때 코펠리우스는 경악스럽게도 나타나엘의 팔다리를 빼서 이리저리 끼워 맞춰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s steht doch überall nicht recht! ’s gut so wie es war! – Der Alte hat’s verstanden!“(18) <어디 할 것 없이 온통 고장투성이군! 좋아, 이제 본래대로 됐어! ... 이러한 기술도 다 여러 해 동안 익힌 솜씨거든!>(김정회, 12) “어디다 끼워 봐도 좋지 않군! 이전 상태로 있는 게 좋아! — 꼰대가 뭔가를 이해하긴 했구만”(김영옥, 231) “온통 제대로 맞질 않아. 원래 있던 대로가 더 낫군! 늙은이 말이 맞아!”(김현성, 23)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아! 원래대로가 좋겠어! — 조물주가 제대로 만들었군!”(황종민, 132)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Der Alte”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해석의 관건이다. 이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나님께 파우스트의 유혹을 허락받은 직후에 ‘하나님’을 비꼬아 부른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Der Alte”는 신이다. 코펠리우스라는 이름의 악마는 나타나엘이 마치 관절인형이라도 되는 듯이 그의 팔다리를 이리저리 뺐다가 끼워 본다. 이것은 인간도 조물주가 만든 인형, 기계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나타나엘의 팔다리의 구조가 원래가 나았음을 확인하고, 다시 돌려놓으면서 “하나님 노친네가 잘 하긴 했네”라고 마지못해 인정한다. 이것을 이해한 번역은 여기서는 황종민 역 뿐이다. 김정회는 아예 의역으로 문제를 가려버렸으며, 김영옥 역의 “꼰대”는 메피스토펠레스가 했을 법한 말이나, 이를 설명하는 부분이 없어 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김현성도 늙은이라고 그냥 직역하는 데 그쳤다. 황종민 역본은 이렇듯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원문의 의미에 가장 충실한 번역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그간의 연구성과가 반영된 상당히 전문적인 깊이가 있는 해설 <에테아 호프만의 생애와 소설>도 제공한다. 이 해설은 작가의 생애를 유년 시절부터 법원 관리 시절, 밤베르크에서 악단장으로 고용되어 있던 시기, 창작 시기 등으로 나누어서 상당히 자세하게 소개하고, <모래 사나이>와 함께 번역되어 실린 작품들을 모두 꼼꼼하게 해설한다. <모래 사나이>의 경우 네 문단에 걸쳐서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키틀러의 해석까지도 소개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코펠리우스를 앙시앵 레짐의 상징이라고도 해석한 부분이다. 또한 이 판본은 각주가 가장 많이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몇몇은 그 성격이 학술적이다. 이미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독자들의 높아진 기대 수준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3. 평가와 전망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가 한국어로 번역되어온 지난 50여 년 동안 번역의 정확도는 크게 올라갔으며, 작품에 대한 이해도 그만큼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졌다. 현실과 환상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하는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자화상이라는 해석에서부터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이라는 해석, 과도한 낭만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자의 자기비판이라는 해석 등으로 작품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왔으며, 그간 간과되었던 표현이나 구조를 새롭게 독해해낸 정신분석 등의 관점이 번역에도 수용되어 번역어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정태(1971): 모래사람. 박문사.
김정회(1981): 모래 사나이. 금성사.
김영옥(1997): 모래 사내. 서울대학교출판부.
김현성(2001): 모래 사나이. 문학과지성사.
황종민(2017): 모래 사나이.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