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후작 부인 (Die Marquise von O....)
하인리히 클라이스트(Heinrich Klest, 1777-1811)의 단편소설
작품소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180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평판 좋은 미망인 O... 후작 부인이 자신도 모르게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를 찾는다는 수수께끼 같은 신문광고를 내게 된 사건의 경위와 그 결과를 이야기한다. 소설은 추리소설 혹은 범죄소설의 구조를 띤다.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는 전시(戰時) 강간은 정작 말해지지 않고 짧은 ‘-’(대시) 기호로 은폐되어 있다. 후작 부인이 자신을 강간의 위험으로부터 구해준 은인인 줄 알았던 러시아 장교가 자신을 남몰래 범한 진짜 ‘범인’이자 아이의 친부라는 사실을 과연 언제 알게 되는가가 서사적 긴장을 유발한다. 클라이스트는 이 이야기가 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99-1802) 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쓰고 있다. 인물의 신원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는 듯이 주요 인물명과 지명을 약자로 표기한 것도 이러한 인상을 부추긴다. 여성의 몸에 대한 정복이 타국 영토의 정복과 평행하게 서술되며, 그 결과 공고해 보였던 가부장이자 사령관의 권위는 실추된다. 소설 출간 당시에는 강간에 의한 임신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평단의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한국어로는 이미 1924년에 벽초 홍명희가 일본어 번역본에서 <후작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번역해 소개한 바 있다. 첫 원전 번역은 1983년에 김광진이 번역한 「O侯爵 夫人」(범조사)이다.
초판 정보
Kleist, Heinrich von(1808): Die Marquise von O.... In: Phöbus - Ein Journal für die Kunst 1(2). Dresden: Carl Gottlob Gärtner, 3–32.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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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클라이스트의 단편소설 <O...후작 부인>(1808)의 한국어 번역사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 소설은 일찍이 1924년 벽초 홍명희에 의해 그 일부가 일본어에서 중역의 형태로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원전 번역은 이로부터 6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1983년 김광진의 번역으로 범조사 <세계중편문학선집>에 수록된 <O侯爵 夫人>은 국내 첫 완역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결정적인 대목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보다 완성도 높은 번역은 클라이스트 전공자가 활동하는 2000년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배중환은 클라이스트의 소설과 산문을 모아 번역한 <칠레의 지진. 클라이스트 단편전집>(세종출판사, 2003)에, 진일상은 클라이스트 단편소설을 전부 번역한 <버려진 아이 외>(책세상, 2005)에 해당 작품을 이전보다 훨씬 충실히 번역해 놓았다. 이후 <O...후작 부인>은 2013년에 다시 한번, 황종민(<미하엘 콜하스>, 창비, 2013)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렇게 2000년대부터 클라이스트 단편집이 여러 차례 번역됨에 따라 각기 상이한 단편이 표제작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O...후작 부인>이 표제작이 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이는 역자들이 생각하는 이 작품의 위상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클라이스트의 작품 가운데 두 번째로 국역이 시도된 바 있으나 클라이스트 최고의 대표작은 아닌 것이다.[1]
원제 “Die Marquise von O...”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까다로운 면모가 숨어 있다. 홍명희는 후작 부인의 이니셜을 빼고 그냥 “후작부인”이라고 옮겼고. 김광진은 O 뒤의 줄임표를 생략하고 나머지는 한문으로 표기하여 “O侯爵 夫人”을 제목으로 삼았다. 그후 배중환과 진일상은 모두 띄어쓰기 상의 차이가 있지만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O...후작 부인”으로 옮겼다. 황종민은 이니셜 표기를 “O...” 대신 “O.”로 바꿔 “O. 후작 부인”으로 옮겼다. 원래 이 작품이 잡지 <푀부스>(Phöbus)에 처음 발표됐을 때는 O 다음에 점이 네 개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후 많은 판본(대표적으로 젬프트너(Sembdner)가 편집한 전집)에서 줄임표의 점 네 개 대신 (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세 개가 쓰이면서 이렇게 제목이 알려지게 되었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생략점을 옮기는 결정은 원문을 대하는 역자의 태도와 무관치 않다. 이는 역자의 문자적 충실성의 의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현재까지 나온 번역본을 모두 개별적으로 살펴보겠다.
2. 개별 번역 비평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잘 알려진 벽초(碧初) 홍명희는 1906년에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막 일본어로 대거 번역되고 있던 다양한 서양 문학을 탐독했다. 그는 이렇게 쌓은 문학적 조예를 바탕으로 1910년대부터 여러 잡지에 시나 단편을 번역해 실으며 문단에 이름을 알린다. 1923년에는 <東明>(동명) 31호에 클라이스트의 <로카르노의 거지 노파>(<로칼노 거지 노파>라는 제목으로)를 번역하더니 이듬해 1월에 연이어 클라이스트의 <O... 후작부인>을 막 창간된 동인지 <廢墟利後>(폐허이후)(1924)에 소개했다. 그러나 홍명희는 여기서 원작의 3분의 1까지만 옮겨놓아 이 번역은 미완으로 남는다.
번역의 저본은 1922년에 출간된 일본어판 <聖ドミンゴの婚約>(성 도밍고 섬의 약혼)이다. 역자 사가라 모리오(相良守峰)는 여기에서 <로카르노의 거지 노파>와 <O...후작부인>을 포함한 클라이스트의 주요 단편을 일본어로 소개했다. 일본에서 클라이스트는 유명한 모리 오가이의 번역으로 일부 소개된 바 있으나 그의 여러 단편소설이 묶여서 번역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홍명희가 이 일역본이 나온 직후에 클라이스트의 단편을 두 편이나 번역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 이 책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명희의 번역은 비록 일본어 중역에 미완이지만, 훗날 <임꺽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 그의 생생하고 풍부한 입말이 여기에서 이미 구사되고 있다.
독문학자 김광진(金光珍)이 번역한 <O侯爵 夫人>은 최초의 원전 번역이다. 이 번역은 범조사 <세계중편문학선집> 제2권에 실려 발표되었다. 작품 출간 시기상이나 사조상으로 매우 다른 로브그리예의 <밀회의 집>, 사르트르의 <친밀한 관계>와 함께 한 권으로 묶여 대표적인 세계적 중편의 하나로 소개되었다. 세 명의 각각 다른 역자가 번역을 맡았고, 역자의 말은 없으며 번역의 저본을 밝히고 있지 않다. 맨 뒤에 세 작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이 실려 있을 뿐이다.
이 번역에서 제일 눈에 띄는 특징은 문체의 차이다. 역자는 클라이스트 특유의 길고 복잡한 중문을 다 쪼개어 놓았다. 문장을 잘라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간의 연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원문에 없는 말을 추가한 경우도 많다. 또 간접화법을 사용해 길게 이어지는 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장들이 직접화법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문장으로 해체되어 있다. 이러한 문장 재배치는 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체가 갖는 효과를 사실상 제거해 버린다. 클라이스트는 한 문장 내에서 상반되는 내용을 복문으로 구성해서 강렬한 반전의 효과를 노리는 작가다. 예컨대 주절의 내용은 이미 관계절에 가면 달라져 있거나 전치되어 있고, 일명 ‘안긴 문장’ 안의 문장과 바깥의 문장이 내용상 서로 배치되어 강한 대비와 아이러니 효과를 유발한다. 그런데 역자는 한국어 특유의 ‘자연스러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관계문은 모조리 따로 빼내어 독립된 문장으로 옮겨놓았고, 심지어 좀 길이가 긴 부사도 따로 빼내어 문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 한 문장 내에서 거의 동시에 전달되는 사실들을 시간순이나 인과관계에 따라 재배치하기도 했다. 사건을 빽빽하고 압축적으로 묘사하여 긴박감을 조성하는 것이 클라이스트 문체의 특징인데, 역자는 문장들을 여유를 두고 읽을 수 있도록 재배치한 것이다. 예컨대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을 보자. 비교를 위해 먼저 최대한 직역해 보겠다.
북부 이탈리아의 중요한 도시 M...에서 훌륭한 명성을 지닌 귀부인이자 얌전한 아이들의 어머니였던 과부 O...후작 부인은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가졌으니, 그녀가 낳게 될 아이의 아버지는 연락을 바라며, 자신은 가족을 고려하여 그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M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명망 높은 귀부인이자 잘 길러놓은 여러 아이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은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 이 후작 부인이 여러 신문에 광고를 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사정이 달라졌다. 그러니 나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아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응모하기 바란다.>(김광진 254)
원문에서 하나의 문장이었던 것이 번역문에서는 세 문장으로 쪼개져 있다. “도시 M시에서 있었던 일이다”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는 표현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관습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클라이스트의 문체 자체가 평이해지고 그만의 개성이 없어져 버렸다. 또 원문에는 그저 “과부가 된 O...후작 부인”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후작 부인은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라는 독립된 문장으로 바꾸어서 후작 부인이 과부가 된 일이 최근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인 양 서술된다. 즉 문장을 이렇게 쪼갠 결과, 사건의 중심이 후작 부인이 의아한 신문광고를 낸 일이 아니라 후작부인이 과부가 된 일에 놓이게 된다. 이야기의 초점이 전혀 달라진 것이다. 이런 문장 쪼개기는 원문의 문체를 완전히 바꿔 버림은 물론이거니와 오역으로도 이어졌다.
다음으로 소설의 결정적인 몇몇 대목들이 정확히 번역되지 못해 작품의 이해를 오도한다. 방금 인용한 대목 바로 뒤에 이어지는 광고를 보자. 여기서 ‘사정이 달라졌다’로 번역된 “in andere Umstände gekommen”은 ‘임신하다’를 뜻하는 은폐적 · 미화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는 바람에, 원래 후작 부인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임신시킨 범인에게 유화적으로 자수를 권하는 글이 남편감을 찾는 광고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후작 부인이 왜 신문에 남편을 공개 모집하는지 역자도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문에 없는 문장을 집어넣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니 마치 후작 부인이 과부가 된 뒤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져서 자신을 돌보아줄 새 남편을 찾는 모양새가 되었다. 역자는 단순히 오역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오역으로 어긋나버린 문장들 간의 논리적 관계를 보강하기 위해서 새로 문장을 지어서 집어넣었다.
또한 후작 부인이 찾는 범인이 백작임을 알려주는 결정적 단서도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다. 백작이 전쟁터에서 총 맞아 죽기 직전에 외쳤다는 “줄리에타! 이 총알이 당신의 복수를 하는구려!”를 “줄리에타! 이 총알이 당신한테 원한의 씨앗이 될 줄이야!”(262)로 잘못 옮겨 놓았다. 이 말을 통해 독자는 백작이 후작 부인에게 복수를 당해 마땅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이 총알이 마치 후작 부인에게 원한을 심어주는 원인이 된다고 읽힌다. 또한 백작이 후작 부인에게 저돌적으로 청혼한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가 자신이 이제껏 딱 한 번 세상이 모르는 떳떳치 못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 부분도 “꼭 한 가지 떳떳하지 못한 게 있다면 유명 인사가 되지 못한 것뿐이라고나 할까요”(269)라고 전혀 다르게 옮겨 놓았다. 이는 앞의 총 맞는 장면과 함께 백작의 은밀한 잘못을 독자가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잘못 번역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러한 오역은 이 소설의 핵심을 가려 버린다. 이 작품은 일종의 추리소설처럼 범행이 먼저 일어나고 범인을 극중 인물들과 독자가 함께 추리해 나가는 형식을 띤다. 서술자는 독자에게 범인을 가리키는 단서를 은근하게 던져주어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극중 인물들보다 먼저 범인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범인을 먼저 알아챈 독자가 후작 부인이 과연 언제 그 범인을 알게 되는가를 지켜봐야 하는 구조가 서사적 흥미를 유발한다. 그런데 이 번역본에서는 이런 단서들을 대부분 잘못 번역하여 원래 의도되었던 서사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다.
클라이스트는 많은 추리소설처럼 범행이 일어난 결정적 순간을 소설 속에 은폐해 두었는데 여기서 그 대목이 바로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시)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역자는 아마도 ‘대시’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물론 소설에 대한 연구를 접하지 못했다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역자는 이 대시를 임의로 생략하고 “여기에 이르러서도”(258)라고 뒷부분과 매끄럽게 연결되게 번역했다.
이 번역에서는 소설의 추리소설적인 서사의 구조가 잘 드러나지 않는 대신, 클라이스트 원작보다 유머러스한 면이 더 강조되어 있다. 특히 백작의 황당한 ‘청혼 공격’으로 인해 당황한 가족들의 반응에 대한 묘사는 익살스러운 가족극을 보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후작 부인의 결백을 확신하게 된 어머니가 남편을 겨우 설득하고 나와 하는 말을 보자.
“안되겠다. 이렇게 의심이 많은 녀석은 말이다! 이처럼 의심이 많은 녀석은 보다가 처음이다! 알아듣도록 달래느라고 한 시간 동안 진땀깨나 흘렸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앉아서 울고 있지 않겠니.”(320)
여기서 부인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남편을, 성경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해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까지 넣어 보았다고 하는 “의심 많은 토마스ein ungläubiger Thomas”라고 부른다. 그런데 역자는 이런 특정한 관용적 표현 대신 “의심이 많은 녀석”이라고 번역했다. 또 ‘설득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었을 단어 ‘überzeugen’을 “알아듣도록 달랜다”로 표현해 놓았다. 이렇게 되자 폭군처럼 행세하며 권총까지 쏘았던 사령관은 갑자기 부인이 달래고 얼러줘야 하는 어린 애가 되었다. 이러한 번역은 가족 내의 전복된 권력관계가 낳는 우스꽝스러움을 생생히 보여준다. 원작에서는 이러한 가족 내 해프닝을 다소 냉정하고 의아하게 바라보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여기서는 전반적으로 훨씬 과장된 어조를 구사하여 이 소동이 한바탕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익살스러운 광경으로 느껴진다. 예컨대 미안한 마음에 우느라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의 모습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사령관인 아버지는 바람맞은 나뭇가지처럼 몸이 완전히 휘었다. 어디 사람의 울음소리인가 말 울음소리라고는 해야지. 벽이 다 쩌렁쩌렁 울렸다.”(323) 또 “꼭 무슨 연인 같았다!”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누가 보면 꼭 죽자 사자 떨어질 수 없는 애인 사이라고 하겠다!”(325)라고 옮겨 놓았다.
역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문화적 배경도 최대한 제거하거나 단순화하는 방향의 번역을 택했다. 의심 많은 토마스, 판타수스나 모르페우스 등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문화적 요소들은 지워지고, “운명의 장난”과 같은 표현은 “처음 당하는 팔자 소관”(310)으로 옮겨지는 등 김광진의 번역은 전형적인 ‘자국화’ 번역의 경향을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역자는 원문의 핵심적인 대목들을 많이 놓쳤지만, 당시 한국 독자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를 생산해냈다고 할 수 있다.
3) 배중환 역의 <O... 후작 부인>(2003)
배중환의 <O... 후작 부인>은 이전의 번역본과 비교했을 때 여러 장점이 있다. 우선 역자가 이미 <미하엘 콜하스>와 <홈부르크 왕자>를 번역한 클라이스트 전공자이고, <O... 후작 부인>은 클라이스트의 단편과 일화, 우화, 소품을 모아 번역한 선집에 함께 묶여 있어 독자는 클라이스트의 전체적인 문학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저본(1984년에 나온 뮌헨본)을 밝히고 있으며 문헌학적으로 정확성을 기하려 하였다. 이를테면 이 소설이 <푀부스>에 처음 발표됐을 때 붙어 있던 부제도 처음으로 번역해 놓았다.
이런 점에서 이 역본은 이전의 역본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역자는 클라이스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의 문체가 지닌 중요성에 주목하여 원문의 어순 구조를 거의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그는 <역자 후기>에서 “특히 간접화법을 많이 쓰는 클라이스트의 문장, 도치법, 비문법적인 문장, 불완전한 문맥, 접속사를 사용하여 길게 늘어진 복문의 문장, 그리고 고전어투 등”(배중환, 434)을 번역하는 데 힘들었다고 밝히고 있는 만큼 그가 이런 클라이스트의 문체상의 특징을 옮기려고 고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소설의 첫 대목을 보자.
북부 이탈리아의 중요한 도시 M...에서, 정숙하기로 이름난 귀부인이며, 잘 키운 몇몇 아이의 어머니이며, O... 후작의 미망인이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임신을 했으며, 그녀가 낳게 될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은 신고를 하기 바라며, 가정의 사정을 고려하여 자신은 그 사람과 결혼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48)
김광진 역본과 비교했을 때 이 번역본에서는 문장을 최대한 끊지 않고 다소 긴 호흡의 한국어로 옮겨왔음도 알 수 있다. 또 직접화법이 간접화법으로 옮겨져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배중환 역본은 지금까지의 <O...후작 부인> 번역 가운데 유일하게 원문의 간접화법을 살려낸 번역이다.
또한 “독일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대시”라고 불리는 문제의 대목을 의식하고 번역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 그는 잠시 후 깜짝 놀란 그녀의 하녀들이 나타나자 그들에게 의사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50) 이렇게 번역하자 ‘대시’가 짧은 휴지부처럼 느껴져, 무언가가 생략된 느낌을 잘 전달한다.
전반적으로 단어 대 단어의 직역을 하려고 노력한 결과, 부분적으로는 원문의 느낌을 오히려 전달하지 못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예컨대 사령관이 자기 딸이 죄가 없다는 것을 실은 알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대목에서 자기 딸을 “그녀”라고 부르고 있어 어색하다. “오! 그녀에겐 죄가 없어요.” “그녀는 그 일을 잠결에 당했어요.”(80) 폭군으로 변신한 아버지가 할 법한 말도 아니거니와 어조가 완전히 빗나가 있다. 다른 한편 모녀간의 대화에서는 가장을 ‘그’라고 호칭할 때가 있어 역시 번역소설로서 미흡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단어의 직역은 때로는 성공하여 원문의 숨은 의미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많은 도움이 된다. 예컨대 “그 백작은 마치 젊은 신과 같이 아름답고,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들어왔다”(54)는 후작 부인의 임신을 신에 의한 성모 마리아의 수태와 나란히 놓을 수 있게 한다. 또 “네가 뭐라 손가락질받더라도 네 편에 서는 명예를 누리겠다”(황종민, 169)에 비해 “이제부터 네 치욕 이외의 다른 명예를 원치 않는다”(85)는 번역은 ‘치욕’과 ‘명예’의 의미가 아이러니하게 전치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배중환의 번역은 상기하였듯이 어조의 측면에서 다소 아쉬운 점을 보이나 클라이스트 문체의 특징을 최대한 모방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번역이라는 의의가 있다.
4) 진일상 역의 <O...후작 부인>(2005)
클라이스트 단편이 전부 번역되고 2년 만에 또다시 클라이스트 전공자가 번역한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역자 진일상은 클라이스트 단편소설을 연구하여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만큼 이 번역본에는 작품을 보다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데 유용한 정보들이 각주로 설명되어 있다.
번역본 뒤에 실린 가상의 작가 인터뷰에서 역자는 클라이스트의 문체와 내용의 긴밀한 연관성을 설명한다. 클라이스트의 “상자가 겹겹으로 쌓인 듯한 문장”(진일상, 337)은 “마치 즉흥적으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구문들을 나열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것”(337)이고, “이러한 문장구조가 사건의 동시성을 긴박감 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또 이에 따르면 “사건의 우연성이나 여러 사건들의 동시성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클라이스트 문학에서 “‘~할 때’, ‘~하자마자’ 등의 구문”(337)은 이를 표현하는 요소다. 이러한 설명대로 역자는 사건들의 동시성을 나타내는 구문이 분명하게 보이도록 번역했다. 또 클라이스트의 문체를 존중하여 가급적 문장을 끊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역자는 클라이스트의 문체를 독어와 한국어의 차이로 인해 완전히 옮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직접화법보다는 간접화법이 많고, 여러 문장이나 부사구들이 한 문장 안에서 콤마로 연결되어 [...] 이를 제대로 옮기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한국어에 생소한 구조 때문에 인용 부호를 넣거나, 독립된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던 부분도 있습니다.”(337) 이러한 말처럼 실제로 역자는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사이를 오가며 간접화법을 완전히 관철하지 못했고 복문을 옮길 때도 문장을 잘게 끊는 식으로 타협하기도 했다.
역자는 이른바 ‘칸트 위기’라 불리는 클라이스트의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더욱 두드러지게 옮기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후작 부인이 가족과 싸우고 당차게 집을 나서는 다소 영웅적인 장면에서 서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분별력은 그녀가 처한 이 이상한 상황에서도 버텨낼 만큼 충분히 강인했지만 이 세계의 거대하고 신성하고 설명할 수 없는 질서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Ihr Verstand, stark genug, in ihrer sonderbaren Lage nicht zu reissen, gab sich ganz unter der grossen, heiligen und unerklärlichen Einrichtung der Welt gefangen.” 이 대목을 역자는 이렇게 옮긴다. “그녀의 이성은 이런 이상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강인했으나, 위대하고 신성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질서 앞에서는 그런 이성도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역자는 후작 부인이 마치 클라이스트처럼 세상의 질서 앞에서는 아무리 강인한 인간의 이성도 무력하기 짝이 없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해석한다. 해설에서 역자는 ‘칸트 위기’를 “우리가 진실이라 부르는 것이 진정으로 진실인지, 아니면 진실처럼 보이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342)라는 인식의 위기로 설명하였는데 이 대목도 그런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5) 황종민 역의 <O. 후작 부인>(2013)
2013년에 새롭게 번역된 클라이스트 단편집 <미하엘 콜하스>에 실린 <O. 후작 부인>은 이전의 두 번역본이 택한 “O...” 대신 “O.”로 표기를 바꿨다. 이는 무언가가 생략되었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간략하게 적는 약자의 느낌을 주어서, 작가의 의뭉스러운 태도가 “O...”만큼 잘 전달되지는 못하는 듯하다. [2]
2000년대에 출간된 두 전공자의 번역이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지향하다 보니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면 역자 황종민은 보다 유려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고 풍부한 어휘력을 바탕으로 문학의 언어를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백작은 빈말쟁이라는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려 할 거예요”(황종민, 142), “의사는 앵돌아져서”(149)라든가 “생가슴을 태우며”(149), “내 앞갈망은 내가 한다는 뜻”(158)과 같은 부분은 맛깔스러운 표현력을 자랑하며 입말이 살아있는 예스러운 한국소설의 느낌을 준다. 또 따옴표만 안 쳤을 뿐, 간접화법을 사실상 직접화법으로 바꾸어서 번역했는데, 의미가 훨씬 잘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때로는 매끄럽게 다듬어진 문장이 오히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막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죽은 줄 알았던 백작이 사령관 가족들이 모여 있는 거실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자. “얼굴이 약간 창백했지만 신수가 훤하여 애젊은 신처럼 보이는 백작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136) 백작을 “젊은 신”에 빗댄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한 곳이다. 후작 부인의 임신은 마치 성모 마리아의 임신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거나 종교적 기적을 당한 것처럼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좋은 의도하에 왜 그가 젊은 신처럼 보였는지를 설명해놓았다. 즉 그가 “신수가 훤해서” 그렇게 보인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는 오히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또한 러시아 장군이 후작 부인을 추행한 러시아 병사들을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는 장면을 보자. 장군은 “먼저 백작의 고결한 행동을 짤막하게 칭찬하여 백작의 얼굴을 발갛게 달아오르게 한 다음 이렇게 다그쳤다.”(133) 백작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실은 자신이 문제의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이기 때문에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껴서일 수 있는데, 여기서는 마치 칭찬을 받아서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읽힌다. 이외에도 백작이 마음에 드느냐는 오빠의 질문에 후작 부인이 “그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한다”라는 아리송한 대답을 하는 대목을 보자. 소설이 추리소설의 구조로 되어 있기에 독자는 이런 후작 부인의 묘한 말로 인해서 후작 부인이 진짜로 혼절했었는지, 아이의 아버지가 백작인 것을 그녀가 정말로 알지 못하는지 의심할 수 있다. 그런데 역자는 이 질문을 의역해서 “백작의 사람 됨됨이는 마음에 드느냐?”(145)라고 물음으로써 이 질문이 꼭 백작의 인품에 대한 질문인 것처럼 바꾸어 버려 결과적으로 대답의 중의성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클라이스트의 세계가 지닌 특징으로 많이 거론되는 세계의 “취약성 Gebrechlichkeit”과 관련된 부분의 전달도 아쉬운 대목이다. 소설 끝에서 백작이 어떻게 후작 부인 가족에게 용서를 받는가를 설명할 때 클라이스트는 그것이 “세계의 부서지기 쉬운 질서로 인해서um der gebrechlichen Einrichtung der Welt” 혹은 “세계의 부서지기 쉬운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역자는 이것을 “세상일이란 알 수 없다고 여겼기에”(179)라고 다소 뭉뚱그려서 번역했다. 이 표현은 작가의 관점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것이다. 러시아인에게 이중의 성, 즉 성(成)과 성(性)을 동시에 정복당한 후작 부인은 아무리 의연하게 맞서려 한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는 세계의 취약성을 초월할 만큼의 분별력(Verstand)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세계의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그녀 딴에 ‘묘안’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그와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세우는 질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한낱 인간으로 이러한 질서에 휘둘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결국에는 이러한 질서를 위해서 백작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아쉬운 대목들이 있지만 이 번역본은 기존의 번역에서 발견되었던 오역들이 많이 수정되어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또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을 제공한다. 좋은 역서를 만들겠다는 역자의 정성이 돋보인다 하겠다.
3. 평가와 전망
지금까지 클라이스트의 <O...후작 부인>이 번역된 역사와 개별 번역본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비단 <O...후작 부인>뿐만 아니라 클라이스트 특유의 중첩 복합문과 간접화법으로 이루어진 문체를 그것과 대응하는 문법이 없는 한국어로 옮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런 어려움에 직면하여 역자들은 각자의 시대에 필요한 번역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김광진은 소개된 적 없는 이 소설을 최대한 한국 독자들의 곁으로 데려가려는 자국화 번역을 시도했다면, 배중환과 진일상은 이런 번역과는 차별화되는, 원문에 최대한 충실한 번역을 내놓으려 했다. 황종민은 원문의 정확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번역이 지닌 경직성을 극복하여 일반 독자의 눈에 한 편의 소설로서 손색없는 유려한 작품을 선보이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잘 부응하는 <O...후작 부인>의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벽초(1924): 후작부인. 廢墟利後.
김광진(1983): O侯爵 夫人. 범조사.
배중환(2003): O... 후작 부인. 세종출판사.
진일상(2005): O...후작 부인. 책세상.
황종민(2013): O. 후작 부인. 창비.
-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