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사람 (Der Erwählte)

Root02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6월 22일 (목) 08: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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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소설


작품소개

1951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이다. 그리말트 공의 쌍둥이 남매 빌리기스와 지빌라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에게 끌리며 깊이 사랑을 하게 된다. 이 금지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인 그레고리우스는 상자에 버려져 한 어부의 집에서 성장한다. 그는 육체와 정신이 빼어난 기사가 되어 출생의 비밀을 찾아 집을 떠나며 전쟁에서 한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 여왕의 남편이자 군주가 된다. 3년 뒤 밝혀진 비밀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내가 바로 어머니 지빌라임을 알게 된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엄청난 죄에 대한 속죄의 길을 떠난다. 한 바위 위에 웅크려 17년간을 반성하고 참회한 그에게 신은 교황이라는 은총을 내려준다.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는 마찬가지로 참회의 삶을 살아온 어머니이자 아내를 만나 용서해준다. 1961년에 박종서에 의해 <선택된 인간>이란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정음사).

초판 정보

Mann, Thomas(1951): Der Erwählte. Frankfurt a. M.: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選擇된 人間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外 世界文學全集 19 토마스 만 朴鍾緖(박종서) 1959 正音社 11-242 편역 완역 초판
2 선택된 인간 世界文學選集, 10 世界文學選集 10 토마스 만 합동출판사 1964 合同出版社 220-250 발췌역 편역 축소판이라 명시되어 있음
3 選擇된 人間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外 世界文學全集 38 토마스 만 박종서 1969 正音社 11-242 편역 완역 중판, 총서번호 19에서 38로 변화
4 選擇된 人間 世界文學大全集 11 世界文學大全集 11 토마스 만 姜斗植(강두식) 1974 大洋書籍 7-230 편역 완역
5 選擇된 人間 大公殿下, 選擇된 人間 (三省版)世界文學全集 52 토마스 만 朴鍾緖(박종서) 1976 三省出版社 289-524 편역 완역 역자해설에서 선택된 인간의 경우 "이미 出刊된 바 있으나 이번에 改譯하였음도 아울러 밝히는 바"라 적음
6 選擇된 人間 選擇된 人間 三中堂文庫 336 토마스 만 朴鍾緖(박종서) 1977 三中堂 5-361 완역 완역
7 선택된 人間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선택된 人間, 群盜 世界名作 다이제스트 1 토마스 만 洪京鎬(홍경호) 1978 汎友社 67-97 편역 편역
8 選擇된 人間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베니스에서 죽다 (愛臟版)世界文學大全集 28 토마스 만 李鼎泰(이정태) 1981 금성출판사 3-258 편역 완역 초판, 1984년 중판
9 選擇된 人間 選擇된 人間, 데이지 밀러 知星版 最新 世界文學全集 14 토마스 만 郭福祿(곽복록) 1982 知星出版社 9-372 편역 완역
10 선택된 인간 한자루 촛불 밝음이 다할 때까지 토마스 만 확인불가 1982 金文堂 188-189 편역 편역
11 선택된 인간 선택된 인간, 호모 파베르 (三省版)世界現代文學全集 21 토마스 만 朴鍾緖(박종서) 1982 三省出版社 13-267 편역 완역
12 選擇된 人間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外 世界文學全集 38 토마스 만 朴鍾緖(박종서) 1986 正音文化社 11-242 편역 완역 정음문화사의 초판
13 선택된 인간 世界文學大全集, 22 (High Seller)世界文學大全集 22 토마스 만 김기봉 1989 敎育文化社 211-445 편역 완역
14 選擇된 人間 選擇된 人間, 토니오 크뢰거, 베네치아에서 죽다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116 토마스 만 李鼎泰(이정태) 1990 금성출판사 3-284 편역 완역 초판, 1993년 중판
15 선택된 인간 선택된 인간. 호모 파베르 Ever books. 삼성세계문학 29 토마스 만 박종서 1992 삼성출판사 11-268 편역 완역
16 선택된 인간 선택된 인간 Hong shin elite book's 100 토마스 만 최호 1995 홍신문화사 11-273 완역 완역 초판, 2012년 중판
17 선택된 인간 선택된 인간 하서세계문학 54 토마스 만 김남경 1995 하서출판사 3-342 완역 완역
18 선택된 인간 선택된 인간 (초등학교·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논리논술 세계 대표 문학 50 토마스 만 확인불가 2006 삼성비엔씨 9-128 편역 편역 아동청소년문학
19 선택된 인간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토마스 만 윤순식 2009 누멘 101-103 편역 편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토마스 만의 이 소설은 1959년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선택된 인간>이란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번역자 박종서(1922~1983)는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독문학자로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등 독일문학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번역은 1976년 삼성출판사에서 개역판이 나왔고 92년까지 때론 출판사를 바꾸어가며 총 7회에 걸쳐 출간되었다. 중간에 강두식의 번역본(1974/1989)과 곽복록의 번역본(1982)이 나오긴 했으나, 이들의 번역은 박종서의 번역과 유사도가 매우 높다. 따라서 이 소설의 국내 수용은 오랜 기간 박종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81년 금성출판사 <세계문학대전집>을 통해 독문학자 이정태의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90년에 다시 출간될 때는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세로쓰기 인쇄에서 가로쓰기 인쇄로 바뀌었다. 이정태의 번역본은 개정 또는 개역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두 판본 모두 중판이 나왔는바,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 박종서의 번역과 함께 많이 읽힌 것으로 판단된다.

1995년에는 한 해에 두 권의 새로운 번역본이 추가되었다. <하서세계문학>을 통해 김남경의 번역본이, <Hongshin Elite Book’s>를 통해 최호의 번역본이 나왔다. 박종서와 이정태의 번역은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묶어서 출판되었는데, 김남경과 최호의 그것은 전집이라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온 점에서는 공통되나, 이 소설만 단독으로 출판되면서 책 제목이 <선택된 인간>이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상업적으로 볼 때 여러 작품을 묶어서 두꺼운 책으로 출판하는 것보다 개별 작품마다 책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런 변화가 나타난 것 같다. 이전의 번역자들이 교수들이었다면, 이들 두 사람은 조금 다르다. 김남경은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번역문학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역자 소개가 되어 있다. 그런데 최호의 경우에는 역자 소개가 없는 것 등으로 보아 독문학 전공자가 아닌 듯하다.

한편 2020년 <나남>에서 나온 김현진의 번역본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제목이 <선택받은 사람>으로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박종서의 번역 이래 계속 고수돼 오던 <선택된 인간>이란 제목에 하나의 대안이 등장한 것이다. 김현진은 이 소설의 기독교적 내용을 고려할 때, 신에 의해 ‘선택이 되다’ 보다는 ‘선택을 받다’라는 표현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으로 보인다. 원제인 Der Erwählte는 erwählen 동사의 과거분사로 만든 명사형이다. 과거분사를 번역할 때 보통 피동형을 사용하기에 종래에는 ‘선택된’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김현진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어법에 따라 ‘선택받은’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번역본의 또 다른 면모는 토마스 만 전공자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김현진은 ‘한국토마스만학회’의 독회에서 이 소설을 같이 읽으면서 “수년간에 걸쳐 학회 회원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번역문 초안을 역자가 수정하며 재작업을 한 결과”(김현진 2020, 6)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특유의 해학의 미학에 대한 해설을 비롯해 20쪽이 넘는 긴 역자 해제는 소설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이하에서는 몇몇 중요 번역본에 대해 개별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개별 번역본 고찰

1) 박종서 역의 <선택된 인간>(1969)

박종서 번역본의 의의는 국내 초역이라는 점인데, 이후 이 소설의 이해 및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설의 중요한 개념 및 상황에 대한 번역에서 그런 흔적이 종종 발견된다.

1951년, 토마스 만이 그의 나이 77세에 발표한 이 소설에서는 작가의 원숙한 세계관과 한층 더 세련된 문체가 돋보인다. 여기에는 서사의 전개에 틈틈이 끼어들면서 자기 생각과 감정 등을 거침없이 표출하는 서술자의 역할이 매우 크다. 현대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전지적 서술자인, 소설 밖의 이 인물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 책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준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서술자는 로마에 있는 종이란 종이 다 울리고 있다며, 그것을 울리는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Wer also läutet die Glocken Roms? ― Der Geist der Erzählung. ― Kann denn der überall sein, hic et ubique, [...] Allerdings, das vermag er. Er ist luftig, körperlos, allgegenwärtig, nicht unterworfen dem Unterschiede von Hier und Dort.
그러면 대체 누가 로오마의 종을 울리고 있을까? ― 전설의 넋이다. ― 그런데 그 넋은 어디나 있는 것일까? [...] 전설의 넋은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형체도 없이 어디나 있을 수 있는 것이요, 이곳저곳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292)

소설의 서술자는 자신이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편재하면서 종을 울리고 있는 저 “전설의 넋”(박종서는 Der Geist der Erzählung을 이렇게 번역했다)의 육화된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 소설은 중세 고지 독일의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서사시 <그레고리우스>에 기초하고 있는바, 즉 전설에서 그 소재를 가져왔기에 박종서는 Erzählung을 전설로 번역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에는 소설의 내용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서사/이야기 Erzählen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렇게 번역된 것 같다. 박종서 이후의 번역자들도 이 서술자를 “전설의 영혼”(이정태), “전설의 혼”(김남경)으로 번역했다. 김현진만 “이야기의 정령”으로 번역했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서술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meine Gnadenmär”라고 표현한다. 이에 대한 번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박종서는 이를 “나의 은혜로운 전설”(18)로, 이정태는 “나의 은총의 전설”(12)로, 김남경은 “나의 은총에 대한 전설”(11)로 번역했다. 반면 김현진은 “은총에 관한 믿기 힘든 이야기”(19)라고 단어의 내용을 풀어 쓰면서 전설이 아닌 이야기로 번역했다. 독일어 사전 두덴에 따르면 Mär는 “이상한 이야기, 믿을 수 없거나 사실이 아닌 보고”이다. 소설의 또 다른 장면을 살펴보자. 하느님의 어린 양이 로마에 사는 경건한 남자 프로부스의 꿈에 나타나서 새 교황이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프로부스는 어린 양의 계시에 놀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wie das? Symmachus und Eulalius sind beide tot, die Kirche ist ohne Haupt, die Menschheit entbehrt des Richters, und der Stuhl der Welt steht leer.

박종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쥠마쿠스나 에울라리우스는 모두 다 죽어버리어, 교회에는 교황이 없고, 인간 사회에는 판사가 없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가 비어 있는 것이 지금의 현상이다.”(188) 박종서는 전반적으로 직역을 추구하는데, 이곳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는 의도로 원문에 없는 ‘지금의 현상’이란 말을 넣어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후의 역자들도 박종서와 마찬가지로 원문에 없는 “오늘의 현실”(이정태 218)이나 “현재의 상황”(김남경 262) 같은 표현을 덧붙여서 번역했다. 이와 같이 박종서의 초역은 이후 역자들에게 사실상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종서의 초역은 전체적으로 직역을 추구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름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어색한 표현 및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종종 발견되기도 하는데 1976년의 개정판에서는 이런 점들이 상당 부분 개선된다.


2) 박종서 역의 <선택된 인간>(1976)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 52권을 통해 <선택된 인간>을 다시 발표하면서 박종서는 번역 텍스트로 S. 피셔 출판사의 1956년 판을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저본 정보를 밝힌 것으로, 이 점에서는 박종서가 이 소설의 번역자 중 유일하다. 번역자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그의 책임감과 열정이 느껴지는 면모이다. 그는 역자 해설에서 이 소설이 “이미 出刊된 바 있으나 이번에 改譯하였음도 아울러 밝히는 바”(535)라고 말하는데, 인명을 비롯하여 어휘를 현대식으로 바꾸고 표현도 가독성을 높이는 쪽으로 수정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할머니 “Baduhenna”는 “바아두헤나”에서 “바두헤나”로, “페에터”는 “베드로”로 “로오마”는 “로마”로, “크리스트”는 “그리스도”로 바뀌는 등 현대식 표기법이 적용되었다. “나전어”도 “라틴어”로, “교회의 추장(酋長)” 같은 표현도 “교회의 대표자”로 바뀌었다. 한편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어머니 지빌라가 서로의 관계를 모른 채 사랑하는 감정을 느껴 키스하는 장면의 묘사에서, 초판은 “입술을 서로 물고 오랜 침묵이 흘렀다”(151)라고 했는데, 개정판에서는 “입술을 서로 맞대고 오랜 침묵이 흘렀”(431)다고 나온다. 입술을 물었다는 표현은 자칫 입맞춤으로 연상되지 못할 여지가 있었는데, 맞댄다는 표현으로 수정되면서 그런 점이 개선되었다. 지빌라의 태몽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도 개정이 일어난다. 이 꿈은 앞으로의 내용 전개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바, 아들 그레고리우스가 태어나자마자 떠남으로써 그녀에게 아픔을 주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더 큰 아픔을 준다는 내용, 즉 오빠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들 그레고리우스가 버려졌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그녀의 남편이 되는 이중 근친상간을 예시하는 내용이다. 초판에서는 이 “schweren Traum”이 “우울한 꿈”(52)으로 번역됐다가 개정판에서는 “좋지 못한 꿈”(330)으로 바뀌었다. 당사자를 짓누르는 꿈의 성격을 생각할 때 후자가 나은 번역이라 하겠다.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으로 로마에 입성할 때 축하의 종들이 울릴 때도, 원문의 “von selber”를 종이 “자연히”(14) 울리기 시작했다는 초역이 개정판에서는 종이 “저절로”(292) 울리기 시작했다로 수정되었다.


3) 이정태 역의 <선택된 인간>(1990)

이정태의 번역은 1981년 금성출판사의 <(애장판) 세계문학대전집>을 통해, 1990년에는 같은 출판사의 <(금성판) 세계문학대전집>을 통해 출간되었다. 그의 번역에서 먼저 눈에 띄는 점은 각 장의 제목에 대한 번역 방식이다. 가령 독일어 제목 “Die Aussetzung”을 “아이를 버리다”로, “Die Entdeckung”을 “탄로가 나다”로 번역했다. 독일어의 명사적 표현을 동사적 표현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다. 유럽어는 어떤 복잡한 개념이나 사건을 하나의 명사나 명사구로 압축해서 표현하는 법이 발달한 명사 중심 언어이지만, 한국어는 동사 중심 언어라 동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정태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번역한 것 같다. Die Aussetzung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버리는 사실을 지칭하고, Die Entdeckung은 그레고리우스가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박종서는 이를 각각 “버림 받은 아이”, “누설된 비밀”로 번역했다. 이보다는 이정태의 번역이 단어의 함의를 보다 잘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역자들도 대부분 이정태와 같은 방식을 택한 경향을 보여준다.

이정태 번역본의 또 다른 특징은 번역이 매끄럽고 가독성이 좋다는 점이다. 특히 토마스 만의 유려한 장문의 문체를 살려서 번역한 것이 돋보인다.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를 끝내고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서술자 클레멘스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이와 같이 오랜 전설을 끝까지 이끌어온 나 클레멘스는, 독자 여러분이 주의를 다해 귀를 기울여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나 스스로 기울인 수고에 대해 여러분이 주시는 감사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겠다.”(283) “이와 같이 충고를 하고 경고를 한 보답으로서 나는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 가운데 나 자신도 포함시켜서, 우리들 모두가 언젠가는 한 번 내가 이야기한 사람들과 함께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빌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284) 아주 긴 문장은 아니지만 한 문장으로 된 원문을 똑같이 한 문장으로 번역했는데, 가독성도 좋아 토마스 만적 문체가 느껴지면서 동시에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도 맛보게 해준다.

이정태는 “토마스 만의 생애와 작품”이라는 긴 해설을 통해 이전의 역자들보다는 한 걸음 나아간 작품 이해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전의 역자들은 이중의 근친상간에 중점을 두며 줄거리 위주로 소개했는데, 이정태는 이 소설을 “원죄와 은총의 이야기”(449)로 소개하면서, 서술자에 대한 해설도 덧붙인다. 그는 서술자를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언어의 인간인 토마스 만에게 있어서의 문학 정신”(450)이라고 설명하는데, 그의 이런 작품 이해가 서술자의 자유로운 서술 태도에 대한 번역에서도 잘 반영된 것 같다.

4) 김남경 역의 <선택된 인간>(1995)

1세대 독문학자라 할 수 있는 박종서와 이정태의 번역 이후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지 않던 차에 1995년 <하서세계문학> 54권을 통해 김남경의 번역본이 발표되었다. 기존 세계문학전집의 장정에서 느껴지던 무거운 느낌이 아닌 분홍색의 밝고 예쁜 표지에 이 소설을 타이틀로 한 단독작품의 형태로 출간되었다. 2020년 김현진의 번역이 나오기 전까지 25년 동안, 약 반년 늦게 나온 최호의 번역과 함께 이 소설의 국내 수용에 있어서 큰 역할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남경 번역의 특징은 이전 번역들보다 표현이 좀 더 현대적이고 매끄러워서 동시대 독자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어린 양의 계시에 놀란 프로부스가 말하는 장면에서 “der Stuhl der Welt”를 박종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이정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번역했는데, 김남경은 “세계의 성좌”(262)로 번역했는바, 직역의 방식을 취하면서 원문의 의미를 깔끔하게 전달하였다. 같은 장면에서 어린 양이 프로부스에게 “Euer Gebet ist erhört und die Wahl geschehen.”이라고 말한 것도 박종서는 “당신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닿아서 선출된 것입니다.”로, 이정태는 “당신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셔서 선택된 것입니다.”(218)로 번역했지만, 김남경은 “당신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져 선출이 이루어졌습니다.”(263) 라고 번역했다. 여기서도 원문을 단어 그대로 보충 설명 없이 매끄럽게 번역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남경의 직역 방식은 단점도 드러낸다. 가령 앞에서 언급했던 장의 제목인 Die Entdeckung을 “폭로”라고 번역했는데, ‘탄로가 나다’로 번역한 이정태의 의역에 비해 내용 전달 면에서 불명확하다. 명사가 문장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독일어와 달리 우리 말에서는 동사가 문장의 핵심적 역할을 하기에 ‘폭로’라고 명사만 제시하면 의미가 너무 막연하게 다가온다. Die Aussetzung의 경우에는 김남경도 박종서와 같이 ‘아이를 버리다’로 의역했다. 또 다른 장의 제목인 “Die schlimmen Kinder”를 김남경은 “가련한 아이들”로 번역했는데, 아버지 그리말트 공이 돌아가신 날 남매가 동침하는 것 때문에 붙여진 제목임을 생각할 때 “나쁜 아이들”(박종서)이나 “못된 아이들”(김현진)이 적합할 듯하다.

독일어과를 졸업한 번역문학가라는 정보 외에 자세한 역자 정보가 없어서 토마스 만 전공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토마스 만의 생애와 문학”이라는 제법 긴 해설과 상세한 작가 연보를 제공하는 반면에 이 소설을 위한 전문적인 해설은 없었다. 국내 독문학계의 토마스 만 연구를 반영하지 않은 채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번역문학가’라는 역자 소개와 달리 번역 원칙이나 역자의 말은 찾을 수 없어 아쉽다.


5) 김현진 역의 <선택받은 사람>(2020)

김현진 역의 <선택받은 사람>은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12권으로 출간되었다. 토마스 만의 “섬세하고 치밀하면서도 매력적인 산문을 어떻게 국내의 독자들에게 전달할지 고민”했으며,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자”(6) 노력했다고 역자는 번역에 임하는 자세를 밝히고 있다. 그의 번역본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토마스 만 전공자에 의한 것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가 번역 및 작품해설에 반영되어서 이전의 번역본들보다 한 단계 나아갔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der Geist der Erzählung을 김현진은 전설이 아닌 이야기의 정령으로 번역했는데, 이 소설의 이야기/서사적 특징에 주목한 점이 다른 번역자들과 특히 구분된다. 이 소설에서는 이중의 근친상간과 속죄, 구원이라는 심각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독자는 읽으면서 자주 웃게 된다. 그것은 이야기의 정령, 즉 서술자 클레멘스가 보여주는 독특한 서술 방식에 의한 것으로, “토마스 만이 만년에 보여준 해학적 글쓰기와 세계관에서 나온 독자적 효과”(420)이다. 서술자는 중요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을 구분하여 보고함으로써 자못 심각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웃음으로 종결짓곤 한다. 항해 중이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와 그 일행이 어느 항구 도시에 접근하다 전투가 벌어져 선원 중 몇 명이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는데, 서술자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Doch waren sie ja nur Nebenpersonen.” 이에 대한 번역자들의 번역을 살펴보자.

박종서: 그러나 그네들은 그리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1976, 392)
이정태: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그리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127)
김남경: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조연에 불과했던 것이다.(153)
김현진: 그러나 그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한 인물들일 뿐이었다.(186)

얼핏 보기에 큰 차이가 안 느껴질 수도 있지만, 김현진은 ja라는 부사를 살려서 ‘뿐이었다’라고 번역함으로써 이전 세 사람의 건조한 사실 보고식 번역과 결을 달리한다. 여기서 ja는 자신이 말하는 사실에 대한 강조의 의미를 지니는데, 다친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할 뿐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며, 주인공이 항구에 무사히 도착한 사실에 더 주목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김현진의 번역에서는 서술자의 독특한 태도가 느껴지기에 독자는 미소를 짓게 된다. 이런 식의 해학적 글쓰기 태도가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바, 김현진은 그런 뉘앙스를 잘 살려서 번역했다.

각 장의 제목 번역에서도 역자는 의역을 추구하는데, 이는 원문의 내용에 충실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Die Aussetzung은 “아이를 내버리다”로, Die Entdeckung은 “비밀을 알게 되다”로, Die schlimmen Kinder는 “못된 아이들”로 번역함으로써 그 장의 주요 내용이 잘 전달된다. 김현진 번역의 이런 특징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서술자는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eine zugleich entsetzliche und hocherbauliche Geschichte”로 지칭한다. 이는 이중의 근친상간이 벌어지지만 철저한 속죄를 통해 신에 의해 교황으로 선택받는다는 이 소설의 핵심 내용을 지칭한다. 박종서는 “무지막지하고 매우 교훈이 될 수 있는 전설”(1990, 295)로, 이정태는 “매우 두렵고도 교훈이 될 수 있는 전설”(10)로, 김남경은 “정말 무섭고도 동시에 지극히 교화(敎化)적인 전설”(10)로 번역했다. 하지만 김현진은 “경악할 만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교훈적인 이야기”(17)라고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더 소개하자면, 이야기를 다 마친 서술자는 독자가 소설의 이런 내용에서 “es sei zuletzt mit der Sünde ein leichtes Ding”이라고 잘못된 교훈을 끌어낼까 봐 염려한다. 김현진은 이 말을 “죄라는 것은 결국 별것 아니라고”(413)로 번역했다. 반면 박종서는 “죄라는 것은 결국 험한 것이라고”(1976, 523), 이정태는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 편리한 것이라고”(283), 김남경은 “죄라는 것은 결국 가벼운 것이다”(341)로 번역했다.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볼 때 죄가 ‘험한 것’이나 ‘편리한 것’은 아닐 것이고 ‘가벼운 것’일 수도 있겠으나 ‘별것’ 아닌 것이 의미상 가장 정확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현진 번역본의 학술적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 두 가지 발견된다. 하나는 대화가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원문과 달리 행을 바꾸어서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본 정보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토마스 만의 경우 S. 피셔 출판사의 판본만 존재하기에 다른 작가들과 달리 어느 판본을 저본으로 이용했는지 여부가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존과는 다른 번역 제목을 제시했고 원문의 내용을 충실히 전하려 노력한 점, 연구가 병행된 번역이라는 점 등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의 번역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3. 평가와 전망

토마스 만의 이 소설은 박종서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여러 번역자를 거치면서 번역의 정확도가 많이 개선되었다. 특히 최근에 나온 김현진의 번역본은 ‘한국토마스만학회’의 독회를 통한 공동연구 및 작품 이해가 뒷받침되어 나온 것으로, 질 좋은 번역을 위한 새로운 방식 및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어떤 번역에도 오역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 및 해석이 나오면 그에 발맞추어 번역도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는 평범한 사실을 되새겨보면서 글을 마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종서(1969): 선택된 인간. 정음사.
박종서(1976): 선택된 인간. 삼성출판사.
이정태(1990): 선택된 인간. 금성출판사.
김남경(1995): 선택된 인간. 하서출판사.
김현진(2020): 선택받은 사람. 나남.

권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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