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Der Spaziergang) (로베르트 발저)

Root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7일 (일) 16: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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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의 소설


작품소개

로베르트 발저의 수많은 산문텍스트들 중에서 열 한편의 단편을 임의로 발췌하여 옮겼다(산책, 젬파흐 전투, 빌케 부인, 그것이면 된다, 시인, 스노드롭,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툰의 클라이스트, 어느 학생의 일기, 죽음에 관한 두 개의 이상한 이야기, 작가). 그는 이 짧은 산문들에서 20세기 초 산업사회의 광기와 그림자를 보여준다. 비인간적인 대도시의 분위기, 인간들의 소외와 고독을 주제화한다. 기법상으로는 이야기가 느닷없이 시작되거나 끊기고, 글의 흐름이 개연성이 없이 거의 의식의 흐름을 따른다. 상식에 상응하지 않는 단어나 시제를 자주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서사 기법을 거부한다. 발저는 이 단편들을 통해 훗날 20세기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선집에 실린 발저의 단편들은 국내에서는 2016년 박광자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으나, 배수아와 임홍배에 의해 번역된 다른 산문 텍스트들이 뒤를 이었다(민음사).


초판 정보

Walser, Robert(1917): Der Spaziergang. Schweizerische Erzähler. Band 9. Mit Titelzeichnung v. Otto Baumberger. Frauenfeld: Hub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산책 산책 로베르트 발저 박광자 2016 민음사 7-70 편역 완역
2 산책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2017 한겨레출판 278-377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1956년 세상을 떠난 로베르트 발저는 독일어권에서도 그의 사후에 상당히 뒤늦게 재발견되었지만, 국내 번역 및 수용은 그보다 훨씬 더 늦게 나타난다. 2000년대에 들어 발저 작품의 번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 그의 산문 한두 편이 선집에 포함되어 번역된 적은 있었다. 예컨대, 1972년 일지사에서 펴낸 <世界短篇文學大系 현대편> I권에 송동준에 의해 번역된 <시인>(Der Dichter)이, 1984년에 현대의 세계문학 31권 <現代詩選>에 발저의 시 <풍경>, <윤무>, <꿈> 3편이 수록되었다. 그 후 폴커 미헬스가 편집한 <Unterbrochene Schulstunde>가 푸른꿈출판사 편집부에 의해 <학교에서 길들여진 것들>(1990)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여기에 발저의 <학생들의 일기장>(원제: Tagebuch eines Schülers)가 수록되었다.

국내 최초의 단행본으로는 2003년에 나온 <프리츠 콕의 작문시간>(Fritz Kochs Aufsätze)(박신자 옮김, 이유)을 들 수 있다. 또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Einer, der nichts merkte)가 2004년 아동용 그림책으로 조국현에 의해 번역되어 나왔다(한길사 2004). 이어서 발저의 주요 소설들,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문학동네 2009)가 홍길표에 의해, <타너 가의 남매들>(지만지 2017)이 김윤미에 의해 옮겨졌다.

1,500여 편에 가까운 산문 텍스트의 번역은 이보다 조금 늦게 나타나는데, 2016년에 나온 박광자의 <산책>을 들 수 있다. <산책>에는 국내 독자들뿐 아니라 전공자들에게도 아직은 낯선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 중 총 11편이 수록되었다. 다음 해 배수아가 총 42편을 옮겨 <산책자>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한겨레출판 2017), 박광자의 <산책>에 비해 양적으로 훨씬 풍부해졌다. 같은 해에 임홍배의 <세상의 끝>(Das Ende der Welt)(문학판 2017)이 출판된 것은 국내에서 발저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임홍배의 번역본은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박광자와 배수아의 번역본에는 총 6편의 산문 텍스트가 공통으로 수록되었다(<산책>, <젬파흐 전투>, <빌케 부인>, <그것이면 된다>, <스노드롭>). 이처럼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두 번역본은 발저 산문 텍스트의 특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두 번역본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내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개별 문장의 해석이나 우리말로 다시 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얼마간의 차이는 번역자 개개인의 개성이나 글쓰기 스타일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발저 산문의 번역은 길이가 짧고 단문들로 이루어진 것이 많아 첫눈에는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연상 작용, 비전형적인 은유로 인해 논리적 비약이 많고, 단어나 문장 간의 연결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은 탓에 번역자는 종종 어려움에 처한다. 이는 번역자로 하여금 드러나지 않은 맥락이나 연결 관계를 스스로 유추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번역상의 크고 작은 차이, 심지어는 오역을 낳는 주된 원인이 된다.


2. 개별 번역본의 비교분석: 박광자와 배수아의 경우

2.1. 언어적 차원

발저의 산문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산책>의 첫머리를 놓고, 박광자와 배수아의 번역을 비교해 본다.


Ich teile mit, daß ich eines schönen Vormittags, ich weiß nicht mehr genau um wieviel Uhr, da mich die Lust, einen Spaziergang zu machen, ankam, den Hut auf den Kopf setzte, das Schreib- oder Geisterzimmer verließ, die Treppe hinunterlief, um auf die Straße zu eilen. Beifügen könnte ich, daß mir im Treppenhaus eine Frau begegnete, die wie eine Spanierin, Peruanerin oder Kreolin aussah. Sie trug etwelche bleiche, welke Majestät zur Schau. [...] Freudig war ich auf alles gespannt, was mir auf dem Spaziergang etwas begegnen oder entgegentreten könnte. Meine Schritte waren gemessen und ruhig, und soviel ich weiß, ließ ich, indem ich so meines Weges ging, ziemlich viel würdevolles Wesen sehen. Meine Empfindungen liebe ich vor den Augen meiner Mitmenschen zu verbergen, ohne daß ich mich jedoch deswegen ängstlich bemühe, was ich für einen großen Fehler und für eine starke Dummheit halten würde. Ich war noch nicht zwanzig oder dreißig Schritte weit über einen weiten, menschenbelebten Platz gegangen, als mir Herr Professor Meili, eine Kapazität allerersten Ranges, leicht begegnete.(7f.)


이야기는 이러한데, 어느 화창한 오전에 몇 시쯤인지 기억은 없지만, 난 산책하고 싶은 생각에 모자를 머리에 눌러쓰고 내 서재 혹은 유령의 방을 나와, 층계를 내려가서, 서둘러 길로 나섰다. 덧붙일 말은 내가 층계참에서 스페인, 페루, 아니면 크리올 여자처럼 보이는 누군가와 마주친 일이다. 그녀는 뭐랄까 시들고 퇴색한,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산책 중에 무슨 일을 만나게, 마주치게 될지 나는 무척 기대하며 긴장했다. 발걸음은 정확하고 조용했는데, 길을 가는 동안 나는 내가 꽤 위엄있는 사람으로 보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노심초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내 감정을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숨기기를 좋아하지만, 난 그걸 커다란 과오, 엄청나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넘쳐나는 큰 광장을 스물 혹은 서른 걸음도 채 가지 않았을 때, 최고의 권위자 마일리 교수가 내 곁을 스쳐 갔다.(박광자 7)

어느 화창한 날, 정확한 시각은 기억나지 않는 아침 무렵, 문득 산책을 나서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힌 나는 머리에 모자를 올려 쓰고 내 서재를, 유령의 방을 나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도중에 층계참에서 스페인 사람처럼 보이는 혹은 페루 사람이나 크레올 인처럼 보이는 어느 여인과 마주쳤다는 말을 첨언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파리하게 시들어버린 모종의 존엄을 온몸으로 풍기고 있었다. [...]

나는 산책길에서 마주칠 것들, 내게 닥칠 일들, 그 모두에게 관심과 기쁨으로 화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일정한 보폭으로 느리게 걸었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렇게 특유의 걸음걸이를 유지할 때 나는 상당히 위엄있는 존재로 보인다. 나는 내 세세한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들키지 않으려고 죽어라 안간힘을 쓰고 노력하는 정도는 당연히 아닌 것이, 그건 정말로 한심한 바보짓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스무 걸음 혹은 서른 걸음도 채 걷지 않았는데 어느새 사람들로 붐비는 커다란 광장에 도착했고, 그때 최고의 권위자인 마일리 교수를 잠깐 스쳐 지나갔다.(배수아 279f.)


배수아는 이 첫 문장을 원문의 구문과는 달리 “어느 화창한 날, 정확한 시각은 기억나지 않는 아침 무렵”이라고 명사구로 시작하여, “이야기는 이러한데”라고 원문처럼 동사절로 시작하는 박광자의 번역보다 시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박광자는 “etwelche bleiche, welke Majestät”를 “시들고 퇴색한, 위엄있는 모습”이라고 세 개의 형용사로 옮기는데, 앞의 두 단어(시들고, 퇴색한)와 뜻이 상반되는 뒤의 단어(위엄있는)를 차례로 나열하다 보니 얼마간 의미상의 충돌이 느껴진다. 배수아의 경우는 이를 “파리하게 시들어버린 모종의 존엄”으로 옮겨 의미상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각각 어휘의 운용에서 배수아의 경우 의미론적 정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보다 어우러지게 옮겨 놓았다.

텍스트의 곳곳에서 번역자들의 서로 다른 우리말 구사 방식으로 사소하지만 분명한 의미상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박광자의 경우 “Meine Empfindungen liebe ich vor den Augen meiner Mitmenschen zu verbergen, ohne daß ich mich jedoch deswegen ängstlich bemühe, was ich für einen großen Fehler und für eine starke Dummheit halten würde.”를 “노심초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내 감정을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숨기기를 좋아하지만, 난 그걸 커다란 과오, 엄청나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로 옮겼다. 이것은 배수아의 역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들키지 않으려고 죽어라 안간힘을 쓰고 노력하는 정도는 당연히 아닌 것이, 그건 정말로 한심한 바보짓에 불과하니까 말이다.”와는 뉘앙스 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박광자의 경우 오역이라 할 수는 없지만, 원 텍스트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고, 배수아는 추가적인 어휘를 넣어 감정을 고조시킴으로써 번역가 자신의 파토스를 드러낸다.


2.2 문체적 차원: 다층적 서술 층위

일반적으로 번역의 어려움이 드러나는 지점은 작가와 등장인물 등, 여러 사람의 사유가 다층적으로 얽히는 부분이다. 이때 두 겹 혹은 여러 겹의 서술 층위가 겹쳐진다. 다음은 <툰의 클라이스트>(Kleist in Thun)의 한 장면이다.


Wochen vergehen. Kleist hat eine Arbeit, zwei, drei Arbeiten vernichtet. Er will höchste Meisterschaft, gut, gut. Was da. Gezaudert? Hinein in den Papierkorb. Neues, Wilderes, Gezaudert? Hinein in den Papierkorb, Neues, Wilderes, Schöneres. Er fängt die Sempacherschlacht an mit der Figur des Leopold von Österreich im Mittelpunkt, dessen sonderbares Geschick ihn reizt. Dazwischen erinnert er sich des Robert Guiskard. Den will er herrlich haben. Das Glück, ein vernunftvoll abwägender, einfach empfindender Menschen zu sein, sieht er, zu Geröll zersprengt, wie polternde und schmetternde Felsblöcke den Bergsturz seines Lebens hinunterrollen. Er hilft noch, es ist jetzt entschieden. Er will dem Dichterunstern gänzlich verfallen sein: es ist das beste, ich gehe möglichst rasch zugrunde!(2, 77f.)


몇 주가 지나갔다. 클라이스트는 하나, 둘, 세 개의 작업을 파기한다. 그는 최고의 걸작을 원한다. 그래, 그랬겠다. 어땠을까? 망설였을까?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새로운 것, 더 강력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써야 한다. 그는 <젬파흐 전투>를 쓰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라는 인물이 있다. 그의 특이한 운명이 클라이스트를 매혹한다. 그 사이에 <로베르트 귀스카르트>가 생각난다. 그를 멋지게 만들고 싶다. 이성적으로 균형이 있고, 소박하게 감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행운이 부서진 탓에, 그는 굴러 떨어지는 바윗덩어리처럼 조각나고 자기 인생이 파괴되는 것을 본다. 클라이스트는 불운한 시인으로서 완전히 파멸하고 싶다. 가능한 한 빨리 파괴될수록 최상이다.(박광자 109)


몇 주일이 흐른다. 클라이스트는 원고를, 한 편, 두 편, 세 편의 원고를 찢어버린다. 그는 최고의 걸작을 원한다. 훌륭하고도 훌륭한 것을. 그건 어떤가. 잘 모르겠다고? 휴지통 속으로. 더 새로운 것, 더 격렬한 것, 더 아름다운 것을. 그는 젬파하 전투를 소재로 삼고,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대공을 중심인물로 잡는다. 대공의 기이한 운명이 그를 매혹시킨다. 그러다 보니 로베르 기스카르가 생각난다. 그는 기스카르를 뛰어난 인물로 그려내고 싶다. 합리적인 이성으로 충분히 고려할 줄 아는, 단순한 감정의 소유자라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는 산산이 부서진 바윗덩이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면서 자신의 삶의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본다. 그는 나서서 돕는다. 이제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는 시인의 불운에 전 생애를 온전히 맡기고자 한다. 이것이 최고다. 나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나락으로 떨어지겠다!(배수아 198)


이 부분은 클라이스트가 스위스의 툰에 머물면서 젬파흐 전투와 로베르 기스카르라는 인물에 관해 집필하던 장면을 작가 발저가 상상하여 기술한 장면으로, 작중 인물을 구상하는 클라이스트의 사유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대목은 실제로 원 텍스트 상에서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무엇보다 역사적 인물들의 실제 상황이나 클라이스트 텍스트에서 묘사된 부분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의 문장들이 지속적인 흐름 속에 연결되어 있기보다는 하나하나가 거의 분절적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문장 간의 연속성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때 번역자는 세 겹의 서로 다른 층위와 마주하게 된다. 즉, 작가 발저의 서술 층위, 발저가 그리는 또 다른 작가 클라이스트의 사유 층위, 나아가서는 레오폴드 대공이나 기스카르라는 인물의 층위가 그것이다. 여기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 발저와 주인공 클라이스트의 사유는 대단히 유사하고, 부분적으로는 서로 겹쳐서 나타난다. 레오폴트 대공이나 기스카르란 역사적 인물을 선택하여 작중 인물로 구상하려는 클라이스트,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합리적 이성과 소박한 감정을 그려내려는 이상이 파괴된 채, 시인의 가혹한 운명에 자신을 내맡긴 주인공 클라이스트의 내면을 그리는 작가의 서술 과정을 파악해야 하는 것으로, 이 부분은 전체 텍스트에서 가장 복잡한 층위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단절적인 각각의 층위를 제대로 전달하기란 쉽지 않아 두 번역 모두 의미상으로나 문체상으로 최상의 번역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가능한 한 빨리 파괴될수록 최상이다”(박광자)란 번역문과 비교해 “나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나락으로 떨어지겠다!”(배수아)로, ‘나’라는 주어를 내세운 배수아의 번역은 클라이스트의 파멸적 운명을 스스로 초래한 의미가 더 강하게 나타나게 한다. 그럼에도 독일어 대명사 (er, ich)가 지칭하는 인물을 우리말에서는 명사로 표현했더라면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을까?


3. 평가와 전망

박광자의 번역과 배수아의 번역, 이어서 같은 해 임홍배에 의해 <세상의 끝>이 번역되어 나온 것은 국내에서 발저의 번역과 수용이 비록 소수의 마니아층에 국한되긴 하지만 일종의 ‘붐’을 이루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박광자의 번역과 배수아의 번역은 전공자의 번역과 작가 겸 전문번역가의 번역이란 점에서 크게 구분된다. 독일문학 작품들이 많은 부분 독문학 전공자에 의해 행해졌다는 점을 기억하면, 배수아의 번역은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 대학의 외국어 전공 수업이 대부분 번역, 그것도 축어적 번역으로 이루어졌던 탓에 전공자의 번역은 몸에 밴 습관대로 원 텍스트의 문법적 구조에 충실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우리말로 다시 쓰는 과정이 그다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례를 흔히 본다. 하지만 의미의 정확성이란 측면에서는 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전공자의 번역, 즉 학술 번역의 장점은 정확성이라 불러야 할 텐데, 박광자의 번역은 부분적으로는 독자들의 이 같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박광자의 번역은 원 텍스트의 구문을 가급적 그대로 유지하려는 입장에서 출발하다 보니 번역가 자신의 목소리는 최대한 자제되고 중립적으로 남아있다. 그에 비해 작가이자 전문번역가인 배수아는 역자로서 자신의 글쓰기 개성이나 고유한 목소리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 배수아의 우리말 글쓰기는 보다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읽히면서도 정확성이나 의미 전달에 있어서도 심각한 결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두 번역은 번역가가 자신을 드러내는 번역과 드러내지 않는 번역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 외에도 임홍배의 <세상의 끝>(2017)에는 총 61편이 번역되어 보다 풍성해졌지만, 발저의 산문 텍스트 번역은 원저작의 전체 분량에 비하면 아직 시작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광자(2016): 산책. 민음사.
배수아(2017): 산책자. 한겨레출판.

안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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