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통의 죽음 (Dantons Tod)

Bib02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7월 16일 (화) 08: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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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 1813-1837)의 희곡


작품소개

뷔히너가 1835년에 쓴 4막 극으로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희곡이다. 초연은 1902년 1월 5일 베를린의 벨레-알리앙스-극장에서 열렸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당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배경으로 1794년 3월 16일에서 지롱드 당의 지도자 당통이 처형된 4월 5일까지의 상황이 다루어진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화국을 만들려고 한다. 당통, 데몰랭과 몇몇 사람은 로베스피에르의 조치들이 야기하는 테러와 폭력을 더 이상 묵과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혁명 공회 집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당이 민중의 편에 서 있으며 민중의 적은 모두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참석자들을 설득한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이 여자와 노름에 관심을 둔다고 비난하면서 민중의 의지에 반하고 혁명의 성공에 위협이 되는 당통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계획에 대해 알게 되지만 국민 공회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동지들은 당통에게 도피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과거에 암살 명령을 내린 적이 있는 당통은 혁명의 후유증으로 큰 죄의식을 느끼고 도피를 거부한다. 점차 스스로 죽음을 바라게 되는 당통은 이를 부인 쥘리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시민군이 어느 날 그의 집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한다. 로베스피에르와 쥐스트는 당통 체포의 당위성을 공회 앞에서 방어하는데 공회의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와 쥐스트는 자신들의 입지를 관철시킨다. 사형을 기다리는 당통은 감옥에서 혁명가들과 몇몇 추종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신에 대해, 삶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투표를 통해 당통에게 모반죄가 있다는 판결이 내려지고 당통과 그의 추종자들은 처형된다. 이 작품에서 뷔히너는 1793~1794년에 걸친 자코뱅당 독재를 통해 원래의 자유 이념이 자의적 권력의 수단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국내에서는 1987년 임호일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한마당).


초판 정보

Büchner, Georg(1835): Dantons Tod. Dramatische Bilder aus Frankreichs Schreckenherrschaft. Frankfurt a. M.: Johann David Sauerländ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단톤의 죽음 단톤의 죽음 게오르그 뷔히너 손은주 1983 예니 - 확인불가 확인불가
2 당통의 죽음 뷔히너 文學全集 한마당문예 6 게오르그 뷔히너 임호일 1987 한마당 47-154 편역 완역
3 당통의 죽음 당통의 죽음 게오르그 뷔히너 최병준 2003 예니 26-183 완역 완역
4 당통의 죽음 당통의 죽음 지만지고전천줄 97 게오르크 뷔히너 임호일 2008 지만지 13-189 편역 완역
5 당통의 죽음 뷔히너 문학전집 지식을만드는지식 게오르크 뷔히너 임호일 2008 지식을만드는지식 7-126 편역 완역
6 당통의 죽음 당통의 죽음 지식을만드는지식 게오르크 뷔히너 임호일 2011 지식을만드는지식 7-189 편역 완역
7 당통의 죽음 보이체크, 당통의 죽음 세계문학전집 309 게오르크 뷔히너 홍성광 2013 민음사 75-218 편역 완역
8 당통의 죽음 당통의 죽음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큰글씨책 게오르크 뷔히너 임호일 2014 지식을만드는지식 7-198 완역 완역 큰글씨책
9 당통의 죽음 당통의 죽음 게으르크 뷔히너 임호일 2019 지만지드라마 3-192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스물네 해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게오르크 뷔히너는 <헤센 지방의 전령>과 같은 산문 몇 편을 제외하면 세 편의 드라마와 단 한 편의 소설만을 남겼다. <당통의 죽음>은 그의 첫 드라마로, 지명수배 중이었던 뷔히너가 도피 자금 마련을 위해 4주 만에 집필한 작품이다. 미완성 유고로 남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보이체크>와는 달리 이 작품은 작가 생존 중에 출간되었음에도 작가가 의도한 대로 출판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작품에 드리워진 짙은 정치색 때문이었다. 파격적인 형식과 더불어 이러한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첫 출간 후 칠십여 년이 지난 1902년이 되어서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뷔히너 연구와 수용이 전폭적인 활기를 띠게 된다. 1987년 2월 한국뷔히너학회가 발족했으며,[1] 같은 해 <당통의 죽음> 초역이 수록된 임호일 번역의 <뷔히너 문학전집>도 출간되었다. 바로 이듬해인 1988년에는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주석이 달린 원문과 관련 자료들이 수록된 <Dantons Tod 硏究>라는 책이 출간된 바 있다(김광진, 창학사).[2]


현재까지 번역자를 기준으로 한 <당통의 죽음>의 번역 종 수는 총 4종이다. 초역인 임호일의 번역은 15년 이상 <당통의 죽음>의 유일한으로 번역본으로서 뷔히너 수용과 연구에 선봉장 역할을 하였으나, 2003년 연극이론가 최병준의 번역이 나오면서, 유일한 번역본의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공연 전문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이 번역서에 대해 역자는 <당통의 죽음>이 뷔히너의 드라마 중 공연 빈도가 가장 낮다고 강조하면서 번역 의도를 분명히 하는 동시에, 이러한 번역 의도를 다각적인 방식으로 번역서에 투영한다. 2008년에는 독문학자이자 번역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홍성광의 <보이체크>와 <당통의 죽음> 번역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309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2020년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뷔히너 전집>은 가장 최근의 번역으로 독문학 전공자이자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종대가 번역하였다. 초역자인 임호일의 번역도 2008년 출판사를 달리하여 <당통의 죽음> 단행본으로도 나온 이래, 2011년, 2014년, 2019년 발행된 바 있다.

뮤지컬로까지 만들어지는 등 매우 활발하게 수용된 <보이체크>와 비교할 때 <당통의 죽음>의 국내 무대 수용은 미미한 편이다. <당통의 죽음>의 국내 최초 공연은 비공식적으로는 1971년 독문과 대학생 연극 동아리 ‘프라이에 뷔네’에 의해 이뤄졌으며(최병준), 공식적 초연은 <단톤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1983년 4월 문화예술회관 소극장(현 아르코예술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뷔히너 탄생 200주년인 2013년 10월에는 극단 <새벽>이 <당통의 죽음>을 개작한 <어느 혁명가의 죽음>을 한남대 56주년 기념관의 무대에 올렸고(송전 2014), 같은 해 11월에는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루마니아 출신 가보 톰파의 연출로 공연되기도 했다.


2. 개별 번역 비평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임호일이 1987년 국내 최초로 뷔히너의 전 작품을 번역해서 출간한 이래 15년 이상 개정을 거듭하며 독보적인 번역본으로 자리매김했던 <뷔히너 문학전집>은 이후의 번역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속 번역서들이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면서도 선행 번역을 상당 부분 참조하고 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유로 번역서 간의 비교 작업은 난관에 놓인다. 오역의 수정, 문장 길이의 변화, (시대적 언어 감각을 반영한) 종결어미의 변경, 편집 층위에서의 시각적 편차 등을 제외하면 개별 번역서의 고유한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번역 비평에서는 작품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 방식(또는 번역자가 작품의 해석/연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번역의 미묘한 차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번역 비평에서는 ‘장르’와 ‘뷔히너의 등장인물 형상화 방식’을 기준 삼아, ‘1막 6장’과 ‘2막 5장’의 일부를 중점적으로 분석해본다. 극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로 평가받고 있는 이 두 장면은 현실을 꿈으로 인식하려는 로베스피에르의 독백과 꿈을 현실과 혼동하는 당통의 내적 고백을 담고 있다.

<당통의 죽음> 연구에 있어 여전히 논쟁적이기도 한 첫 번째 지점은 드라마 장르 규정, 즉 이 작품을 역사극으로 볼 것인지, (당통의) 비극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작가에 의해서는 단순히 ‘드라마’로 명명된 이 작품을 어떤 장르로 규정 짓느냐의 문제와 번역은 일면 크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을 역사극으로 볼 것이냐 또는 비극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나 상호적 관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고, 이것은 번역 층위에서는 대사의 어조나 뉘앙스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만약 이 작품을 비극으로 간주할 경우, 이 비극의 주인공은 극의 마지막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혁명 영웅 당통이 될 것이다. 이 경우 그와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갈등을 빚어 당통의 파멸을 초래하는 로베스피에르는 ‘적대자 Antagonist’로 형상화될 수 있다. 반면, 이 작품을 역사극의 범주에 둔다면,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중 누가 비극의 주인공/영웅이고 또는 누가 비극의 적대자인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때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는 역사적 인물로서 중립적으로 그려질 수 있다.[3]

이런 맥락에서 1막 6장은 단두대 형리를 연상시키는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의 색다른 면모가 드러내는 장면으로서 주목을 요한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논쟁하는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혁명 완수에 대한 서로의 상반된 입장과 메울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한 채 헤어진다. 같은 장면에서 당통이 떠나고 무대에 혼자 남겨진 로베스피에르는 ‘악덕’의 청산을 위해 당통과 그 일파를 숙청하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이때 최종적인 결정에 도달하기까지 로베스피에르의 내적 갈등은 그의 독백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이 독백을 어떤 어조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로베스피에르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그려질 수도 있고, 또는 한때의 혁명 동지를 숙청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평범한 인간적 면모를 지닌 인물로 그려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4종의 번역 중 박종대의 번역이 가장 특징적이기에, 이 부분은 박종대의 번역을 언급하면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두 번째 지점은 작품에 나타난 인간관의 형상화 방식, 또는 작가의 ‘마리오네트’ 인간관에 관한 것이다(류종영 1988 참조). 이와 관련하여 <당통의 죽음>이 지닌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다층적인 자기 반영적 매체성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선 작품의 메타적 특성을 간단하게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 첫째, 작품의 소재이자 주제인 프랑스 대혁명은 뛰어난 연설가의 웅변, 두 혁명가의 ‘언어결투 Rededuell’, 국민공회의 재판, 단두대 처형과 같은 스펙터클로 구현됨으로써 그 자체로 연극적이다(실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자체를 일종의 연극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둘째, 작품의 대사에서 연극에 대한 언급이나 연극적 요소들을 비유로 활용하는 문장들이 빈번히 확인된다(일례로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숭고한 드라마’, 즉 비극으로 정의한다). 셋째, 자신을 연극적으로 연출하는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로마의 비극적 주인공들에 빗대어 표현하는 연극 프롬프터 시몽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당통의 죽음>은 ‘이 세상이 하나의 극장이고, 인간은 잠깐 등장했다 퇴장하는 배우들’이라는 ‘세계극(장)’을 전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세계극장 안에서의 등장인물들은 ‘이중의’ 등장인물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매체적 언급이 빈번히 나타나는 이 작품에서 프랑스 혁명 자체가 일련의 ‘연극 Schauspiel’으로 구현되기에 이 사건의 토대는 자연스럽게 (세계/프랑스라는) 무대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실질적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배우에 준한다. 무대 뒤에서 내려진 보이지 않는 연출가의 지시에 의해 행위하는 배우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은유가 되며, 당통에 의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 즉 마리오네트로 진단되는 것이다.

마리오네트적 인간에 관한 대사가 나오는 2막 5장은 공포와 죄책감으로 뒤섞인 당통의 내적 혼란을 형상화한다. 당통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자신의 주도하에 자행된 ‘9월 학살’의 악몽에 시달린다. 엄습하는 죄책감으로 인해 그는 자신이 해체되고, 분리되어 스스로가 더 이상 사고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데, 당통 스스로 이러한 상태를 마리오네트적인 것으로 진단한다. 사실 이 장면에서 일어나는 육신과 의식을 분리하려는 당통의 시도는 일면 9월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그 자신의 무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위대한 혁명가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고 행위하지 못한 채 죽음의 굴레에 속박된다는 사실은 ‘거대한 힘에 의해 조종되는 인간의 운명’, 또는 ‘인간소외’라는 말로도 치환 가능한 작가의 고유한 인간관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이런 맥락에서 2막 5장은 악몽 속에서 자신이 외친 ‘9월’을 마치 다른 누군가의 ‘외침’인 것처럼 주장하며 자신을 해리(解離)시키는 당통의 시도와 이를 통해 스스로를 대학살의 범죄로부터 면죄하려는 혁명가 당통의 나약한 인간적 면모를 형상화한 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서는 임호일의 번역이 가장 특징적이기에 이 부분은 임호일의 번역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이제 이 두 가지 관점을 염두에 두고 개별 번역서들을 살펴보자.


1) 임호일 역의 <당통의 죽음>(1987/1997)

이 초역은 1987년 한마당에서 출간된 <뷔히너 문학전집>에 실려있다. 한마당 출판사의 <뷔히너 문학전집>이 절판된 이후에도, 임호일이 번역한 <당통의 죽음>이나 <뷔히너 문학전집>이 출판사를 달리하여 지금까지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뷔히너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에 뷔히너 수용과 연구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뷔히너 수용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번역자는 <뷔히너 문학전집> 맨 뒤에 수록된 역자 후기를 통해 ‘원문을 우선시한다고 하면서 우리말에 불충실한 번역도, 또 우리말을 우선시하면서 원문에 불충실한 번역도 지양해야 할 것’임을 역설하면서, 보통의 사람들이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고 읽어낼 수 있”도록 주력했음을 강조한다. 상기한 4종의 번역서 비교를 통해 번역본 간의 상당한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후의 번역들이 임호일의 번역을 상당 부분 참조했기 때문이며, 이런 맥락에서 이 번역은 초역의 난관 속에서도 무난하게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역이 나온 1987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개정판이 출간되었으며, 여기 수록된 ‘개정판에 부치는 글’에서 번역자는 번역에서 완벽함이란 없음을 성찰하며 ‘오역 내지 오역성 문장들’을 찾아 수정했음을 밝힌 바 있다. 다만 본 번역 비평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장면의 경우 1987년의 초역, 1997년의 개정판 번역 그리고 2008년 지만지 출판사에서 출간된 <당통의 죽음> 사이에서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임호일의 번역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2008년 출간된 번역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임호일 역의 <당통의 죽음>(2008)

한마당 출판사에서 출간된 <뷔히너 문학전집>이 절판된 이후 임호일은 지만지 출판사를 통해 <뷔히너 문학전집>뿐만 아니라 <당통의 죽음>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보이체크>와 <레옹스와 레나>를 묶어 또 다른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상기한 것처럼 2008년 처음 출간된 <당통의 죽음> 단행본과 1997년 한마당 출판사의 <뷔히너 문학전집>에 수록된 <당통의 죽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변경된 부분이라면 ‘-구’와 같은 종결어미를 ‘-고’로 전면적으로 변경하는 등 언어를 현대화하고 있는 점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리오네트’ 인간 형상이 나타난 2막 5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Danton (am Fenster). Will denn das nie aufhören? Wird das Licht nie ausglühn und der Schall nie modern? Will's denn nie still und dunkel werden, daß wir uns die garstigen Sünden einander nicht mehr anhören und ansehen? –September!–
[…]
Julie. Du sprachst von garstigen Sünden, und dann stöhntest du: September!
Danton. Ich, ich? ① Nein, ich sprach nicht; das dacht' ich kaum, das waren nur ganz leise, heimliche Gedanken.
Julie. Du zitterst, Danton!
Danton. Und soll ich nicht zittern, wenn so die Wände plaudern? Ⓐ Wenn mein Leib so zerteilt ist, daß meine Gedanken unstet, umirrend mit den Lippen der Steine reden? Das ist seltsam.
[…]
Julie. Gott erhalte dir deine Sinne! – Georg, Georg, erkennst du mich?
Danton. Ei warum nicht! Du bist ein Mensch und dann eine Frau und endlich meine Frau, und die Erde hat fünf Weltteile, Europa, Asien, Afrika, Amerika, Australien, und zwei mal zwei macht vier. ② Ich bin bei Sinnen, siehst du. – Schrie's nicht September? Sagtest du nicht so was?
Julie. Ja, Danton, durch alle Zimmer hört ich's.
[…]
Danton. ③ Wie ich ans Fenster kam – durch alle Gassen schrie und zetert' es: September!
Julie. Du träumtest, Danton. Faß dich!
Danton. Träumtest? Ja, ich träumte; doch das war anders, ich will dir es gleich sagen – mein armer Kopf ist schwach – gleich! So, jetzt hab ich's: Unter mir keuchte die Erdkugel in ihrem Schwung; ich hatte sie wie ein wildes Roß gepackt, mit riesigen Gliedern wühlt' ich in ihren Mähnen und preßt' ich ihre Rippen, das Haupt abwärts gewandt, die Haare flatternd über dem Abgrund; so ward ich geschleift. ④ Da schrie ich in der Angst, und ich erwachte. Ich trat ans Fenster – und da hört' ich's, Julie.
⑤ Was das Wort nur will? Warum gerade das? Was hab ich damit zu schaffen? Was streckt es nach mir die blutigen Hände? Ich hab es nicht geschlagen. – O hilf mir, Julie, mein Sinn ist stumpf! War's nicht im September, Julie?
[…]
Danton. Wir schlugen sie – das war kein Mord, das war Krieg nach innen.
Julie. ⑥ Du hast das Vaterland gerettet.
[…]
Danton. ⑦ Ja, das hab ich; das war Notwehr, wir mußten. Der Mann am Kreuze hat sich's bequem gemacht: es muß ja Ärgernis kommen, doch wehe dem, durch welchen Ärgernis kommt! – Es muß; das war dies Muß. Wer will der Hand fluchen, auf die der Fluch des Muß gefallen? Wer hat das Muß gesprochen, wer? Was ist das, was in uns lügt, hurt, stiehlt und mordet?
Ⓑ Puppen sind wir, von unbekannten Gewalten am Draht gezogen; nichts, nichts wir selbst! die Schwerter, mit denen Geister kämpfen – man sieht nur die Hände nicht, wie im Märchen. – Jetzt bin ich ruhig.(25-27. Ⅱ/5,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당통: (창가에서) 정말 멈추지 않으려나? 빛이 꺼지고 음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인가? 고요하게 어둠이 깔려서 우리가 저 추한 죄악들을 더 이상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될 수는 없을까? - 9월이여!
[…]
쥘리: 당신 방금 추한 죄악들이란 얘기를 하고 나서 9월!하고 신음 소리를 냈어요. 
당통: 내가, 내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① 아니오, 내가 말한 것이 아니오. 그런 말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걸. 그건 내 마음속 깊은 데서 나온 나도 모르는 감추어진 생각들일 게요.
쥘리: 당신 떨고 있군요. 
당통: Ⓐ 사방 내 육신이 산산이 부서진 나머지 내 생각들이 튀어나와 불안하게 방황하며 저 돌들의 입과 이야기를 벽들이 말을 해대는데 내가 떨지 않을 수 있소?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
쥘리: 정신 좀 차려요, 여보, 조르주 날 알아보겠어요?
당통: 암, 물론이지. 당신은 사람이고, 여자요, 또 내 마누라지, 지구는 다섯 개 대륙으로 이루어졌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로 말이오, 둘 곱하기 둘은 넷이지. ② 당신 보다시피 난 정신이 멀쩡하오. 9월이라고 외쳐대지 않았냐고? 당신, 그렇게 말했었지?
쥘리: 그래요 당통, 온 방 안이 떠들썩했어요.
[…]
당통: ③ 내가 창가로 왔을 때... 사방 길거리에서 고함 소리들이 들려왔었지. 그건 9월! 하는 외침이었어.
쥘리: 당신은 꿈을 꾸었어요. 정신 좀 차리세요.
당통: 꿈을 꾸었다고? 그래, 난 꿈을 꾸었소.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소, 금방 얘기해 줄게! 내 머리가 가련하게도 쇠약해졌나 보오. 곧 말해 줄게! 그래, 이제 생각났소! 내 발 아래 있던 지구 덩어리가 갑자기 거친 호흡을 몰아쉬면서 날기 시작했지. 그래 난 그걸 마치 사나운 말인 양 꽉 움켜쥐었소. 난 거대해진 내 몸통을 말갈기에 바짝 들이대고 그놈의 갈빗대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머리는 아래로 내리박은 채 심연 위로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말이오. 그렇게 난 끌려간 거요. ④ 그때 겁이 나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고, 그 통에 깨어나게 됐지. 난 창가로 다가갔었소. - 내가 고함 소리를 들은 건 바로 그때였소, 쥘리.
⑤ 그 소리는 뭘 원하는 걸까? 왜 하필이면 그 말이 나온걸까?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것이 왜 나한테 피 묻은 손을 내미는 건가? 난 그걸 내려치지 않았어. 오, 날 좀 도와줘요, 쥘리 내 감각이 무디어져 가오. 그게 9월 아니었소, 쥘리?
[…]
당통: 그래서 우린 그들을 쳤던 거요. 그건 살인이 아니었소. 그건 내란이었소.
쥘리: ⑥ 당신은 조국을 구했어요.
[…]
당통: ⑦ 그래, 난 조국을 구했어. 그건 정당방위였소. 우린 어쩔 수가 없었소.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은 자신에게만 편한 소리를 했어. “화 불러일으킨 자는 저주 받을지어다”라고 말이오. 당위를 얘기했지. 그래, 이번 경우가 바로 그 당위의 소산이라고 당위의 저주가 내린 그 팔을 누가 저주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우린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끈으로 조종되는 인형이라고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우린 유령들이 들고 싸우는 칼이나 같은 존재지. 동화에서처럼 손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이제 좀 진정되는군.(임호일 2007, 92-96,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이 장면에서 당통의 아내인 쥘리에 따르면 ‘9월’이라고 외친 것은 당통이 분명하다. 반면 당통은 자신은 결코 ‘9월’을 외친 적이 없으며, 두려움에 소리 지르며 꿈에서 깨어 창문에 다가섰을 때 밖에서 ‘9월’이라는 외침을 들었다고 주장한다(③, ④). 이 장면은 당통 자신에게 드리워지는 단두대의 그림자가 당통의 주도하에 자행되었던 9월 학살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환기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증폭된 당통의 심리적 불안을 형상화하고 있다. 위대한 웅변가 당통의 당당함과 주체성은 찾아볼 수 없는 이 장면에서 그의 생각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통은 처음엔 ‘9월’을 외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감추어진 생각이라고 했다가(②), 잠시 후엔 ‘꿈에서 깨어난 뒤’ 창가로 다가갔을 때 ‘9월’이라는 함성을 듣게 되었다고 번복한다(③, ④). 그리고선 다시 반문한다. ‘대체 그 소리가 왜 자신에게 들리는 것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⓹)’ 당통의 반어적 죄책감을 간파한 쥘리는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⑥). 그의 결정에는 ‘조국, 즉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명분이 있다고. 그래서 당통은 쥘리의 정당화에 힘입어 자신에겐 ‘당위의 저주’가 내렸고, 그렇기에 누구도 자신을 ‘저주할 수 없다’고 자위한다(⑦). 왜냐하면 ‘우리’, 즉 인간 그리고 역시 인간에 불과한 당통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장면에서는 자신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방편으로 당통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려는 시도, 말하자면 일종의 유체이탈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시도는 이 장면 마지막 당통의 대사, 즉 ‘끈으로 조종되는 인형’ 마리오네트라는 단어로 소급되는데, 이때 당통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줄에 매달린 인형에 대한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있기에 마리오네트의 ‘이미지’ 또한 부각된다. 우선 마리오네트는 보통의 인간 배우가 지닌 뇌, 즉 생각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는 점에서 생각/의식과 분리된 당통과 유사성을 지닌다. 동시에 줄에 매달린 인형은 공연 시 인간과 흡사한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서 관절과 같은 단위(Teil)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면 인형의 몸은 완결된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장면의 초반에 나오는 ‘zerteilt’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은 ‘마리오네트’와 연결될 가능성을 내비치는데, 이 문장에 대한 임호일의 번역은 원문에는 없는 단어를 첨가하여 장면 맨 뒤의 ‘마리오네트’와 장면 초반의 zer‘teil’t의 연결 가능성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 문장을 보자. 이 번역의 '튀어나와'는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 육신과 생각의 분리를 강조하기 위해 번역과정에서 부가된 것이다.[4]


당통: 내 육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바람에 내 생각들이 튀어나와 정처 없이 헤매며 돌들의 입술과[5] 대화를 나누는데도? 이상한 일이야.(홍성광 145,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같은 지점에서 홍성광이 임호일의 번역을 거의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홍성광은 이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반면, 최병준은 “내 육신이 산산이 부서져서, 생각은 불안하게 방황하며 벽들의 입과 말을 하고 있는데도?”(최병준, 95)라고 번역하여 ‘zerteilt’가 들어간 문장과 ‘Gedanken’이 주어인 ‘daß’ 부문장을 대등하게 병렬적으로 연결하였고, 박종대 또한 최병준과 유사하게 번역하였다. 여기서 임호일/홍성광 번역과 최병준/박종대의 번역을 비교해보면, ‘튀어나와’의 유무에 따라 생각이 신체로부터 이탈되는 이미지가 강화되거나 또는 반대로 전혀 인지되지 않는다는 점이 확연해진다.


우린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철사로 조종되는 꼭두각시야.(홍성광, 148)
우린 알지도 못하는 힘에 매여있는 꼭두각시야.(최병준, 97) 
우린 미지의 힘에 철사 줄로 묶여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이야.(박종대, 73)


임호일이 마리오네트에 천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번째 볼드체 부분(Ⓑ)의 번역에서도 다시금 확인된다. 다른 번역들과 달리 임호일은 이 문장을 “우린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끈으로 조종되는 인형이라고”라고 번역하여 관계절로 연결된 문장을 두 문장으로 나누어 반복적으로 번역한다. 특히 이때 그는 원문에는 없는 ‘꼭두각시’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있는데 이후의 세 번역자가 원문의 ‘인형’을 ‘꼭두각시’로 의역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호일 번역의 영향력이 확인된다.

이제 다시 2막 5장을 재구성해보면, 이 장면의 도입부에서 당통은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는 무력감과 이를 핑계 삼아 자신의 주도하에 자행된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의식을 꿈의 이미지에 빗대어 묘사하였다가, 해당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마리오네트’라는 ‘말로 표현 artikulieren’할 수 있게 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튀어나와’라는 번역어의 부연은 당통의 감각적 인지를 시각화하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감각적 인지와 ‘표현/개념화’ 사이를 매개하는 연결 고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3) 최병준 역의 <당통의 죽음>(2003)

<뒤렌마트 연극론>이라는 이론서를 출간한 바 있는 연극이론가 최병준의 번역은 ‘공연예술전문출판 예니’에서 출간되었다. 상기한 것처럼 이 번역서는 4종의 번역서 중 ‘번역 의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번역서라고 할 수 있다. 최병준은 번역서 맨 뒤 ‘작품소개’에서 난해함으로 인해 이 작품이 잘 공연되지 않는 현실을 진단하고, 2001년 샤우뷔네 베를린에서 <당통의 죽음> 공연을 관람했던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의 난해함을 야기하는 비 설명적 특징(지문의 부재)이 오히려 연출가의 상상력과 유희를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 주목한다. 즉 최병준은 이 작품의 공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번역서를 낸 것이다. 최병준의 이러한 번역 의도는 번역서에 다양한 방식으로 투영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째, 번역자의 번역 의도는 번역서의 편집 방식에 반영된다. 해설을 번역서의 마지막에 실은 3종의 다른 번역서와 달리 이 번역서는 ‘프랑스 대혁명 약사’를 책의 맨 앞에 배치하였는데, 이는 난해한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경우에 따라서는 대개 독문학과는 무관한 연출가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이해를 돕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실존 인물이었던 주인공이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이미지 자료뿐만 아니라, 샤우뷔네 무대 사진 자료 등을 함께 수록하여 연출가를 위한 시각적 영감을 도모하는 것 또한 무대연출을 위한 번역서로 기능하겠다는 번역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번역서의 서두에 표기된 ‘희곡집에 실린 작품을 공연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역자의 승인’을 얻으라는 저작권을 환기하는 경고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번역 텍스트 차원에서도 번역 의도가 감지된다. 번역자는 원문의 의미는 훼손하지 않되, 일부 부가어 등과 같은 부연 설명적인 요소들은 과감하게 생략하여 문장을 짧고 간결하게 구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연에 더 적합한 구어체의 사용을 지향하고 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셋째, 텍스트 편집 차원에서도 번역 의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다른 번역서와는 달리 장면과 그 장면이 일어나는 배경을 큰 글씨로 굵게 처리하고(“제2장: 골목”), 새로운 장면을 새로운 페이지(항상 오른쪽)에서 시작하게 함으로써 막과 장의 구분을 시각적으로 조망하기 쉽도록 배려하고 있다. 아울러 각주 처리 방식에서도 다른 세 종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텍스트에서는 각주를 페이지 아래로 내리지 않고, 해당 단어 바로 옆에 줄표와 글씨 크기의 차이를 통해 각주임을 가시화하는 방식으로 표시했다. 독서 스타일에 따라 각주나 미주는 아예 안 읽고 넘어가 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표기 방식은 독서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도 보충 설명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임호일의 번역이 유일무이한 뷔히너 번역서로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병준이 <당통의 죽음>을 새롭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번역 의도가 새로운 번역의 당위성을 담보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인들과 연출가의 요구와 눈높이를 맞춘 이러한 번역서의 존재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4) 홍성광 역의 <당통의 죽음>(2013)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 번역서에는 <보이체크>와 <당통의 죽음>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뷔히너 전집들이 <당통의 죽음>을 맨 앞에 배치한 반면, 이 책이 <보이체크>를 먼저 배치한 것은 집필 시기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전집들과는 달리 작품의 인지도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왕성한 번역 활동을 통해 독일 문학의 소개와 수용에 헌신하고 있는 독문학자 홍성광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믿을 만한 번역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당통의 죽음>도 그러한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이 번역은 선행 번역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참조하여 이를 존중하면서도, 이들의 오역을 일부 보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문장의 자연스러움을 살려내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덕분에 독서의 호흡은 원만하고, 글의 리듬과 완급도 자연스럽다. 한 등장인물의 대사 안에서는 줄 바꿈을 거의 하지 않은 임호일의 번역서와 달리,[6] 홍성광은 적절한 줄 바꿈을 통해 긴 대사들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배치하여, 독서 리듬을 조절하고, 시각적 차원에서도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를 노린다. 아울러 상호텍스트적 맥락이 분명한 인용문들은 쌍따옴표 안에 넣어 인용 처리하는 방식으로 낯선 이름들과 표현들이 비유로 난무하는 원작 고유의 난해함을 완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다른 3종의 번역서와 차별되는 홍성광 번역의 가장 큰 특징은 ‘젠더적 감수성’에서 확인된다. 홍성광은 원작에서 서로를 ‘du(zen)’로 지칭하는 당통과 아내 쥘리의 대화, 당통과 창녀 마리옹의 대화, 카미유와 뤼실의 대화 그리고 시몽과 시몽 아내의 대화를 ‘평어체’로 번역하였다. 이는 나머지 세 종의 번역 모두 남녀의 사적인 대화를 ‘경어체’로 번역하고 있는 것과 차별되는 홍성광 번역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특히 이러한 평어체의 대화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읽힌다는 것은, 이 번역의 장점이다. 무엇보다 번역에서 이러한 시도가 계속해서 축적된다면 우리말 번역에서 늘 문제가 되곤 하는 남녀 간의 경어체 사용이라는 경직성을 타계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홍성광 번역의 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5) 박종대 역의 <당통의 죽음>(2020)

2020년 출간된 박종대의 <당통의 죽음>은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 <뷔히너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상기한 것처럼 이 번역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로베스피에르의 독백 부분을 다른 세 번역자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상기한 1막 6장, 즉 당통과의 언쟁 이후 당통이 떠난 후 로베스피에르의 독백 부분을 살펴보자.


Robespierre. (allein). Geh nur! Er will die Rosse der Revolution am Bordell halten machen, wie ein Kutscher seine dressierten Gäule; ① sie werden Kraft genug haben, ihn zum Revolutionsplatz zu schleifen.
Mir die Absätze von den Schuhen treten! Um bei deinen Begriffen zu bleiben! – Halt! Halt! Ist's das eigentlich? Sie werden sagen, seine gigantische Gestalt hätte zu viel Schatten auf mich geworfen, ich hätte ihn deswegen aus der Sonne gehen heißen. – Und wenn sie recht hätten? Ist's denn so notwendig? Ja, ja! die Republik! ② Er muß weg.
Es ist lächerlich, wie meine Gedanken einander beaufsichtigen. – ③ Er muß weg. Wer in einer Masse, die vorwärts drängt, stehenbleibt, leistet so gut Widerstand, als trät' er ihr entgegen: ④ er wird zertreten.
Wir werden das Schiff der Revolution nicht auf den seichten Berechnungen und den Schlammbänken dieser Leute stranden lassen; ⑤ wir müssen die Hand abhauen, die es zu halten wagt – und wenn er es mit den Zähnen packte!
⑥ Weg mit einer Gesellschaft, die der toten Aristokratie die Kleider ausgezogen und ihren Aussatz geerbt hat!(25-26. Ⅰ/6,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로베스피에르: (혼자서) 갈 테면 가라지! 저 친구는 혁명의 말(馬)을 사창가에 매어두려는 거야. 마치 마부가 잘 길든 노새를 매어 두듯 말이야. ① 하지만 혁명의 말들에겐 저자를 혁명광장으로 끌고 갈 힘이 충분해.
내 발꿈치를 밟는다고! 내 생각대로라면이라고!
잠깐! 가만있자! 정말일까? 사람들은 말할지도 몰라.
“저자의 거대한 모습이 너무 큰 그림자를 내게 드리워서, 내가 저자에게 태양을 가리지 말라고 일렀을지도 모른다.”라고.
혹시 그들의 말이 옳은 게 아닐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래, 그래! 공화국을 위해서야! ② 저자는 없어져야 해. 이것 참 우습군. 내 생각이 왜 이리 갈팡질팡할까.
③ 저자는 없어져야 해. 앞으로 몰려가는 군중 속에서 멈춰 서는 자는 흐름을 거스르는 거고 저항하는 거나 다름없지. ④ 그런 자는 짓밟히기 마련이야.
우리는 혁명의 배가 저런 자들의 얕은 계산이나 진흙투성이 둑에 좌초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 항해를 감히 막으려는 자들의 ⑤ 손을 잘라 버려야 해. 배를 이로 아무리 꽉 물고 있다 하더라도!
죽은 귀족의 옷을 벗겨서 입고 다니다 그들의 문둥병을 물려받은 자들은 ⑥ 없애 버려야 해!(홍성광, 119-120,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이 독백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생각은 변증법적인 내적 갈등을 거치면서 상승 강화(Eskalation)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이것은 볼드체와 밑줄로 강조된 5개의 문장을 통해 확인된다. 시각적으로도 로베스피에르의 고민과 갈등 중간중간 마치 후렴구처럼 ‘당통의 처형’에 관한 문장이 삽입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②, ③, ④, ⑤, ⑥). 그리고 이 후렴구는 독백이 지속될수록 더 강력한 어조로 변해간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 문단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을 인식한 뒤, 당통의 쾌락주의를 비난하고, 혁명의 이름으로 그를 단두대(‘혁명 광장’)로 끌고 갈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①, 여기서 그를 단두대로 끌고 가는 주체는 ‘혁명의 말’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은 결정과 행위로 나아가려는 그의 생각을 붙잡는다. 타인의 이목, 즉 사람들이 당통의 숙청이 당통의 존재감을 두려워하고 질투하는 로베스피에르의 사심의 발로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다시 이 망설임을 떨치기 위해 다음 문장에서 그는 ‘공화국’이라는 명분을 끌어온다. 공화국을 위해서는 ‘당통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생각은 ④ 문장을 기점으로 단호한 결정의 단계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지점까지는 ‘당통의 처치’를 표현하는 문장에서 ‘er’, 즉 당통을 주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주저함을 털어 내고, 확신에 다다르는 다음 문장에서 ‘wir’를 주어로 삼아 ‘손을 자른다’와 같은 강경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전의 ②, ③, ④ 문장에서 ‘er’를 주어로 삼거나 수동태를 활용하여 표현한 것은 로베스피에르의 주저하는 내적 갈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7] 아울러 로베스피에르가 인간을 몽유병자로, 현실을 ‘꿈’처럼 느끼고 있음을 고백하는 이 독백의 마지막 대사는 냉혈한 단두대 형리의 이미지로만 각인된 로베스피에르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er muss weg’(②, ③)과 ‘er wird zertreten’(④)에 자신을 주어/주체로 삼지 않으려는 로베스피에르의 의도와 그 뉘앙스는 반영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8]


로베스피에르: (혼자 남아) 그래, 갈 테면 가! 저 친구는 혁명의 말들을 유곽에 세워 두려고 해. 마치 마부가 잘 훈련받은 말들을 거기다 묶어 두듯이. ① 하지만 혁명의 말들은 저 친구를 혁명 광장으로 끌고 갈 힘이 아직 충분해.
뭐? 내 신발 뒤꿈치를 밟았다고? 내 생각대로라면이라고? 잠깐, 잠깐! 혹시 그게 사실일까? 사람들은 저 친구의 거대한 모습이 내게 너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그래서 내가 그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할까?
그들의 말이 맞다면?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냐, 아냐! 모두 공화국을 위해서야! ② 저 친구는 없애 버려야 해. 내 생각이 왜 이렇게 한심하게 자꾸 갈팡질팡하지? ③ 그래도 저 친구는 없애야 해. 앞으로 밀고 나가는 군중 속에서 걸음을 멈추는 자는 군중의 전진을 가로막는 반란군이나 다름없어. ④ 짓밟아 버려야 해! 혁명의 배가 그런 얕은 생각이나 그런 자들의 진흙 더미에 부딪혀 좌초해서는 안 돼. 배의 진로를 가로막고, 이를 악문 채 배를 붙잡는 자들은 ⑤ 그 손모가지를 잘라버려야 돼! 죽은 귀족들의 옷을 벗겨서 입고 다니다 귀족의 문둥병에 전염된 놈들은  ⑥ 깡그리 없애 버려야 해!(박종대, 47-48,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다른 번역자들과 달리 박종대는 당위성과 다짐을 위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이 문장을 일관되게 로베스피에르를 주어로 삼아 번역한다(②, ③ 문장의 ‘저 친구는’은 의미적으로는 목적어이다). 이 번역은 홍성광의 번역과 의미의 차이는 없으며, 이런 맥락에서 오역은 아니다. 그러나 이 단호한 표현의 반복으로 인해 이 문장들 사이에 틈입해 있는 로베스피에르의 갈등과 주저함은 상쇄되어 버린다. 무엇보다 이 독백에서 중요한 ‘Eskalation’, 즉 갈등과 주저함으로부터 결심과 단호함으로 나아가는 로베스피에르의 심적 변화 과정도 잘 드러나지 않고, 그의 인간적 면모와 고뇌를 형상화하고 있는 독백의 뉘앙스도 반감되는 아쉬움을 남긴다.

박종대가 이렇게 번역하는 이유는 전집 마지막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의 핵심은 혁명 지도자이자 동지였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갈등”이라고 진단한 뒤 당통은 “개인적인 삶을 존중하고 개별적 행복을 찾는” 사람으로, 로베스피에르는 “피의 메시아”로 규정한 것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번역자는 이 작품을 ‘당통의 비극’으로, 따라서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파멸을 초래한 적대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을 비극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비극일 수는 없다는 점은 번역자가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당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하마르티아를 범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기엔 당통의 죄는 너무나 크고 또 고의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혁명의 중심에서 귀족을 몰아내고, 학살을 주도했으나, 그 자신은 귀족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무력감과 허무주의를 표방한다. 이런 맥락에서 당통은 시대를 앞서 등장한 ‘반주인공 Antiheld’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을 선하고, 진실된 영웅으로 부각하기 위해 주인공의 적대자를 악의 화신으로 구현하는 이분법적 도식은 이 작품에는 적용될 수도 또 적용될 필요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 번역에서의 ‘로베스피에르’의 강경한 어조는 원문의 의도를 넘어서는 과장된 해석으로 판단된다.


3. 평가와 전망

박종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필자들은 이 작품이 역사적 텍스트를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역사서,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 등이 주로 인용되었는데, 이는 전체 텍스트 분량의 6분의 1에 달한다고 한다. 바로 이런 연유로 작품이 당대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뷔히너가 1833년 자유주의 탄압이라는 시대에 역행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주제를 소환하고, 이 대혁명의 주역들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그들의 연설문을 인용하는 동시에, 그러면서도 뷔히너 당대 헤센 지방의 민요들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은 이 공연을 보게 될 당대 사람들 앞에 역사를 생생하게 ‘현재화 Aktualisierung’하기 위한 전략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의 상호텍스트성이 어떤 식으로든 번역서에 드러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앞으로는 기존 번역의 개성과 장점을 다 포섭하면서도 여기서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담고 있는 그런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임호일(1987): 당통의 죽음. 한마당.
임호일(1997): 당통의 죽음. 한마당.
임호일(2008): 당통의 죽음. 지만지.
최병준(2003): 당통의 죽음. 공연예술서전문출판 예니.
홍성광(2013): 당통의 죽음. 민음사.
박종대(2020): 당통의 죽음. 뷔히너 전집. 열린책들.


5. 참고문헌

Borgards, Roland(2009): Büchner-Handbuch. Leben - Werk – Wirkung. Stuttgart: Metzler.
김종은(2008):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에 나타난 연극 모티브와 이데올로기 비판. 뷔히너와 현대문학(30), 5-39.
류종영(1988): G. Büchner의 희곡에서의 꼭둑각시 인물형상 연구 - 『당통의 죽음 Dantons Tod』을 중심으로. 뷔히너와 현대문학(1), 81-97.
송전(2014): 『어느 혁명가의 죽음』 연출방안 소고(小考) - 『당통의 죽음』 개작(改作) 과정을 중심으로. 뷔히너와 현대문학(42), 5-34.

양시내
  • 각주
  1. ‘한국뷔히너학회’의 전신은 ‘뷔히너와 현대문학사연구회’로, 그 출발점은 1985년 11월로 기록되어 있다.
  2. 이 책에는 <당통의 죽음>의 원문 텍스트 외에 ‘Briefe’, ‘Der hessische Landbote’, ‘당통의 죽음 육필 원고’, 관련 사진 자료 등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는데, 대학에서의 뷔히너 강의, 또는 독학 교재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서적의 출간 사실도 뷔히너에 대한 당시의 관심의 척도가 될 수 있다.
  3. 당통이 전통적인 비극의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후자의 입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작품에 그려진 당통은 9월 혁명에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혁명이 시민들의 삶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는 것에 절망하여 무기력과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하면서, 혁명 세력이 타파하고자 했던 귀족처럼 향락과 쾌락만 좇는다. 이것은 당통을 일종의 선취된 ‘반주인공’으로 해석하는 입장과도 상통한다. 반면 <헤센 지방의 전량>이나 사적 편지를 전거 삼아 뷔히너의 정치관을 재구성해보면, 혁명에 대한 그의 입장은 오히려 로베스피에르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공포 정치를 통해 혁명의 ‘도덕’성을 지키려는 냉혈한 로베스피에르의 내면적 갈등을 그리는 1막 6장은 이런 맥락에서 고려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4. 물론 이 단어는 Ⓐ를 구성하는 두 문장의 인과적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역할도 한다.
  5. 이 문장에서 원문의 ‘mit’는 모든 번역서에서 ‘~와 함께’의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앞의 문맥(벽이 수다를 떨고, 내가 그 때문에 두려움에 떤다)을 고려할 때, 당통의 생각이 ‘벽들의 입술로(수단의 mit) 말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됨이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6. 레클람 기준, 임호일이 저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비평본은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음.
  7. 로베스피에르의 생각이 상승되고 강화되는 ⓹번에서 홍성광이 명령형처럼 쓰인 weg을 로베스피에르를 (생략된) 주어 삼아 번역하는 것은 독백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승과 강화의 리듬을 살리기 위한 시도라고 할 것이다.
  8. 여기 인용된 홍성광의 번역처럼 임호일, 최병준도 해당 문장을 원문의 통사적 구조에 상응하도록 ‘저자는 없어져야 해’’(②, ③), ‘그런 자는 짓밟히기 마련이야’(④)라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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