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Wander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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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소설

방랑 (Wanderung)
작가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초판 발행1920
장르소설

작품소개

헤르만 헤세가 13편의 소제목이 있는 에세이 형식의 산문과 10편의 시 그리고 14점의 수채화를 묶어 <방랑>이란 제목으로 1920년에 출간했으며, ‘작가의 컬러 그림이 포함된 비망록’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에 실린 산문은 헤세가 1918-19년 스위스 테신 지방을 도보여행하면서 사색하고 메모하고 그림을 그렸던 체험을 여정에 따라 가공한 산문이다. 삽입된 시들은 1911년에서 1920년 사이에 창작된 것이며, 수채화는 로카르노 인근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첫째 글 <농가>에서 화자는 북쪽의 독일에서 국경을 넘어 남쪽을 향해 가는 자신을 정착생활을 하는 농부가 아니라 방랑하는 노마드라고 규정한다. 마지막 산문 <빨간 집>에서 방랑하는 노마드의 궁극적 목적지가 모든 대립과 양극성이 소멸되는 상태인 니르바나임이 암시된다. 따라서 화자가 걷는 길과 여정은 인생길로 읽힐 수 있으며, 도중에서 만나는 갈망, 충동, 우울, 절망, 충족감, 환멸 등은 니르바나, 즉 자기 안에 있는 고향에 다다르기 위한 우회로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작품은 헤세의 가장 아름다운 글 중의 하나로 평가되어왔으며, 이 글에 나타난 주제의식은 이후에 발표된 <싯다르타>나 <황야의 이리> 등의 작품에서도 라이트모티프로 작용한다. 국내 초역은 1958년 윤순호가 번역한 <放浪>이다(신양사).


초판 정보

Hesse, Hermann(1920): Wanderung. Aufzeichnungen mit farbigen Bildern vom Verfasser. Berlin: S. Fischer.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放浪 放浪 헤르만 헷세 윤순호 1948 新楊社 확인불가-확인불가 확인불가 확인불가 원문 입수 불가: 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 소장, 상호대차 및 원문복사 불가
2 放浪 佛蘭西短篇選集.放浪. 眞珠 헤르만 헷세 尹順豪 1965 新楊社 7-75 편역 완역 <방랑>외 <안과 밖> 수록
3 放浪 헷세 短篇集  헷세 최현 1972 尙書閣 269-316 편역 완역 중판, 1970년 초판, <7월>, <약혼>, <연애하는 청년>, <폭풍>, <소년시절>, <크눌프> 수록. 국립중앙도서관 소장(URI리소스 없음)
4 放浪 放浪, 外 世宗文庫 3 헤르만 헷세 鄭庚錫 1974 世宗出版公社 9-54 편역 완역 <방랑> 중 수필만 수록, <라틴어학교 학생>, <이야기꾼> 수록
5 放浪 放浪 헤르만 헷세 尹順豪 1974 靑林社 5-123 완역 완역
放浪 放浪 汎友에세이選 29 헤르만 헷세 洪京鎬 1976 汎友社 21-77 편역 완역 <방랑> 외 <잠 못이루는 밤들>, <말없는 사람과의 대화>, <게루트루트 부인에게> 수록
7 放浪 放浪 文藝思想新書 9 헤르만 헤세 尹順豪 1976 家庭文庫社 7-75 편역 완역 <방랑>외 <안과 밖> 수록
8 방랑 放浪 헤르만 헤세 金昌活 1977 太宗出版社 7-142 완역 완역
9 방랑 (헤르만 헤세 시집)방랑, 크눌프를 생각하며 헤르만 헤세 미상 1987 白象 129-150 편역 완역 <방랑> 중 시 9편 수록.
10 방랑 붓꽃, 방랑 헤르만 헤세 김우강 1987 예일문학사 138-177 편역 완역 <메르헨 Märchen>,<그림책 Bilderbuch>, <고찰 Betrachtungen>수록
11 방랑 노래의 날개 위에.방랑 Dianna poetry, 다이애너 詩選 11 헤르만 헤세 申台東 1988 동신출판사 192-262 편역 완역 <방랑> 중 시 9편 수록.
12 방랑 (헤세의)방랑 헤르만 헤세의 소설선 헤르만 헤세 최혁순 1991 한소리 7-45 편역 완역 <방랑> 외 <성자와 빵>, <바보 한스>, <세 그루의 보리수>, <7월>, <폭풍>, <사랑의 상처>, <난쟁이>, <이야기꾼>, <연애하는 청년>, <프레셀의 움집에서>, <두 사람의 죄인> 수록
13 放浪 放浪 敎養新書 27 헤르만 헷세 尹順豪 단기4291[1958] 新楊社 7-75 편역 완역 <방랑>외 <안과 밖> 수록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헤세의 〈방랑〉은 몇몇 신문과 잡지에 일부 출판된 뒤 1920년 작가 자신의 수채화를 덧붙인 13편의 산문과 10편의 시로 구성된 단행본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1927년에 절판된 후 1949년에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새로 출간된다. 국내 초역으로 알려진 것은 윤순호가 1948년에 신양사 교양신서 시리즈를 통해 선보인 번역인데, 1958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재출간된 판본과 1976년에 가정문고사에서 나온 판본이 있다. 지금까지 〈방랑〉을 완역한 번역자로는 윤순호 외에 정경석(〈영원한 향수〉, 삼중당 1962), 홍경호(〈방랑〉, 범우사 1976), 최현(〈헤세 단편집〉, 상서각 1972), 김창활(〈방랑〉, 대종출판사 1977), 최혁순(〈헤르만 헤세의 소설선〉, 한소리 1991), 김현진(<요양객>, 을유문화사 2009) 등을 들 수 있다. 1980년대에는 김주연이 펴낸 헤세 명상록 <날아올라라 떠도는 영혼이여>(1984)에 <방랑> 중 네 편의 산문(〈농부의 집〉, 〈신부의 집〉, 〈호수‧나무‧산〉, 〈나무〉)이 실렸다. 또한 1986년에는 홍경호의 번역이 <빨간 지붕의 집>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자유문학사에서 재출간된다. 〈방랑〉의 번역 횟수는 헤세 수용사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고 팔린 <데미안>의 번역 편수 250여 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윤순호와 정경석의 번역은 해방 이후 독일문학 수용사와 번역사에서 초기에 속하는데, 어휘나 통사구조의 번역에 있어 유사한 경향을 보여준다. 1970년대에 나온 홍경호의 번역은 한자 세대에서 한글세대로 번역 주체가 이동하면서 번역 상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최근의 번역으로서 김현진의 번역은 작품의 언어적, 문체적 측면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요구에 비추어 검토할만하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윤순호 역의 <방랑>(1976)

1958년의 번역본을 1976년에 나온 번역본과 비교하면 판본 구성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1976년 번역본은 1958년 신양사 번역본에서 책 맨 뒤에 붙인 해설을 맨 앞에 두고 해설에 나오는 한자어를 모두 한글로 바꾸고 있다. 윤순호의 번역본은 해설 외에 후기를 싣고 있는데 두 판본에서 모두 후기는 책 뒤에 나온다. 후기에서 윤순호는 자연의 시인, 방랑 시인으로서의 헤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 〈방랑〉을 번역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해방 이후 주로 헤세의 시나 소설이 소개되던 시기에 윤순호가 〈방랑〉을 번역한 것은, 헤세의 정신세계와 문학적 성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동경, 향수 등과 함께 방랑 모티프가 지닌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했기 때문이다.

어휘의 층위에서 윤순호의 번역(1976년 판본)을 보면, 부자연스러운 단어 결합이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사소한 나그네”(윤순호 24) (“kleine[r] Wanderer”[1] ), “죽음이 사는 것보다 더 훌륭해진다.”(윤순호 65) (“Sterben ist besser als Leben.”166)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한자어의 어색한 합성도 부자연스럽다. “초속인적 경쾌한 심경”(윤순호 18) (“Bewußtheit dieses glänzendsten <u?Antiphilisters 139). 작가의 독창적인 표현일 때 번역은 더욱 어려움에 부딪힌다.


Er sah einen Falter fliegen, gelb und süß, freudiggelb im blauen Himmel.(163)

그는 한 마리의 노랗고 예쁜 나비가 푸른 하늘에 즐겁게 노랗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윤순호 59)


윤순호는 gelb와 süß를 주어를 꾸미는 관형사로 번역하고, freudiggelb는 두 단어로 나누어서 각각 ‘즐겁게’와 ‘노랗게’라는 부사로 번역한다. 원문에서 freudiggelb는 앞에 나오는 gelb를 부연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윤순호는 한번은 관형사로, 한번은 부사로 번역한다. ‘gelb’를 부사로 번역한 ‘노랗게 날아간다’는 의미상 불분명하고 어색한 의미 연관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다른 번역자들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정경석은 “그는 한 마리의 나비가 푸른 하늘을 노랗게, 즐겁고 기쁘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정경석 47)로, 홍경호는 “그는 한 마리의 나비가 푸른창공으로 노랗고 달콤하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홍경호 65)로 번역한다. 김현진은 “소년은 나비 한 마리가 푸른 하늘로 노란 빛을 띠고 달콤하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김현진 45)로 번역함으로써 좀 더 자연스러운 번역을 제시하지만, 단어 ‘freudig-’를 누락하고 있다.

〈방랑〉에서 종종 보이는 공감각적 표현이 어떻게 옮겨졌는가도 번역 비평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공감각적 표현으로 눈에 띄는 단어 중 하나는 ‘klingen’이다. ‘소리 나다, 소리를 울리게 하다’는 뜻을 가진 klingen은 청각적 인상을 전달하는 단어인데 헤세는 공감각적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종종 이를 시각적 인상을 나타내는 어휘와 함께 사용한다. 윤순호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은 것 같다.


“Grün klingt auf aus neubegorener Quelle.”(153)

"새로 솟아나는 샘에서 푸르름이 움돋고”(윤순호 43)


윤순호는 ‘울리다’를 ‘움돋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는데, 다른 번역들(“새로 태어난 샘에서 녹색이 울려 나오고”. 홍경호 51; “새로 솟아난 샘에서는 초록이 울려나오네”. 김현진 34)과 달리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공명을 전달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 대신 싹이 땅 위로 올라오는 이미지를 담은 표현을 선택함으로써 ‘auf’(위쪽으로)의 의미를 살린 창의적인 번역을 보여준다.

통사적인 차원에서 윤순호의 번역은 원문의 문장 구조를 변형시키기보다는 가능한 그대로 옮겨오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통사적인 등가성을 추구하다 보면 종종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어색한 번역이 나온다.


Es wäre mir ganz unmöglich zu sagen, ob dieser bewölkte, still in sich bewegte, vielfädige Himmel sich in meiner Seele spiegelt oder umgekehrt, ob ich von diesem Himmel mir das Bild meines Inneren ablese.(168)

외부에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는 줄기가 여러 개 있는 이 구름 낀 하늘이 내 마음 속에 반영된 것인지 혹은 그 반대로 이 하늘에서 마음 속의 그림을 내가 읽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서 나타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윤순호 67)


윤순호의 이 번역은 독일어 통사구조를 그대로 따르는 바람에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문제점을 정경석의 번역(“이 구름 낀 고요히 움직이는 줄기찬 하늘”. 정경석 54)과 공유한다. 의미 전달과 가독성을 위해 문장 구조를 어떻게 변형시킬 수 있는지는 홍경호의 번역 (“구름이 낀 하늘, 내부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이 하늘”. 홍경호 71)에서 볼 수 있다. 통사적 차원에서 윤순호의 번역은 다른 번역본에 비해 원문의 문장을 임의로 나누는 경향도 눈에 띈다. “나의 자리다. 나는...”(윤순호 54), “지나지 않다. 그 뒤에는”(54), “기교가 없었다. 그것은 미풍”(60)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원문에는 없는 이러한 문장 나눔은 텍스트의 의미 전달에는 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외래어 표기법 관련해서 윤순호는 초콜렛을 ‘쪼코렡’으로, 독일 낭만주의 작가 아이헨도르프를 ‘아이헨돌푸’, 멜랑콜리를 ‘매란코리’ 등으로 번역하는데, 번역본 중 현재의 외래어 표기법과 가장 거리가 멀다. 윤순호는 소시지를 “순대”라고 번역하면서 다른 번역가들이 소시지나 쏘세지라고 옮긴 것과는 대비되는데 굳이 이러한 토착화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2) 정경석 역의 <방랑>(1962)

정경석의 번역은 1962년에 삼중당에서 〈영원한 향수〉라는 제목의 번역서로 처음 소개되었다. 이 번역서는 〈방랑〉을 1부는 시, 2부는 수필로 분리하여 수록하고 있다. 1974년에 세종출판공사에서 <放浪 外>라는 제목의 번역서로 재출간되는데 <라틴어 학교 학생>과 함께 실려 있다. 역자의 해설은 빠져 있기에 작가와 해당 작품들에 대한 번역자의 해석 관점은 알 수 없다. 1974년 번역본을 보면 <방랑>에 들어있는 시가 빠져 있고, 〈우천〉의 첫 문단이 빠지는 등 원문 대조 상 누락된 부분이 많은 편이다. 또한 ‘~하다’ 체를 쓰는 다른 번역가들과 달리 ‘~읍니다’ 체를 사용하고, “파풍”(10), “욕수와 미수”(22) 등 잘 쓰지 않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예도 많다. “행복자”(36), “정화자”(36) 등의 어색한 번역어도 눈에 띈다.

어휘의 층위에서 정경석의 번역도 윤순호의 경우처럼 단어의 부자연스러운 연결이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어 “stattliche Irrtümer”(157)를 “훌륭한 우둔”(정경석 37)으로 옮기거나, “Wie falsch und blechern spiegelt das fade Licht im See!”(156)를 “어쩌면 저렇게 흐린 햇살이 게을리 희미하게 비치고 있읍니까!”(37)로 옮길 때 의미 연관이 부자연스럽다. ‘stattlich’의 경우에는 사전적 의미 중 ‘훌륭한’이 아니라 ‘상당한’이 문맥에 적합하고, ‘그릇된, 틀린, 허위의’ 등의 의미를 지닌 falsch를 ‘게을리’로 번역한 것은 원문의 의미를 잘못 전달한 의역이다. 정경석의 번역은 원문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따르는 경향에 있어 윤순호의 번역과 공통점을 갖는다.


“jede Erfüllung wurde schnell zur Sättigung”(170)

“모든 실현은 이내 포만이 되었습니다.”(정경석 43)

“모든 실현은 곧 포만해졌고”(윤순호 71)


홍경호의 번역(“그런 것이 이루어지면 이내 만족되었으나”. 홍경호 74)과 김현진의 번역(“그런데 소원이 이루어질 때마다 금방 포만감이 생겨났다.” 김현진 53)에서 보듯이, 주어에 위치한 명사형을 서술형으로 바꾸어 문장 구조를 복문으로 변형시키면, 의미 전달이 보다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번역과 비교해서 정경석의 번역이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는 경우는 다음 예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Ach, ich würde mit tiefer Teilnahme jedem Wanderer nachblicken, der an meinem stillen Haus vorüberzöge”(146)

“나는 조용한 내 집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쳐다볼 것입니다.”(정경석 24)


원문의 밑줄 친 부분에서 ‘Teilnahme’는 ‘참여, 관심’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인데 정경석 외에 다른 번역자들은 모두 ‘동정심’으로 번역한다. 왜 정경석을 제외하고 다른 번역자들이 동일한 의역을 결정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역은, 설령 목사가 되더라도 자신은 방랑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가질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놓치는 오역이다.


3) 홍경호 역의 <방랑>(1976)

홍경호의 번역은 1976년 범우사에서 나온 〈범우 에세이 선(選)〉 제27권 〈방랑〉으로 발표된다. 홍경호는 작가 소개를 넘어 작품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주(定住)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언제나 낯선 세계와 자연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꿈을 그려본 작품이다. 이는 인간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헤세는 거기다 아름다운 무늬와 색깔을 물들여 우리들의 눈앞에 재현시켜 본 것이다.” 정경석이나 윤순호의 번역에 비해 홍경호의 번역은 매끄러운 편이고,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풀어서 번역하는 경우도 많다. ‘seßhaft’의 명사형 ‘Seßhaftigkeit’를 ‘정주’나 ‘안주’ 대신 “한 곳에 뿌리를 박는 것”이라고 번역한 것이 그 예이다. 홍경호는 원문에서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의역을 선택하기도 한다.


Ich halte das, was wir lieben, immer nur für ein Gleichnis.(134)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을 나는 언제고 덧없는 것으로 여겼으나(홍경호 22)


‘비유’를 뜻하는 ‘Gleichnis’를 ‘덧없는 것’으로 번역한 이유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문맥에 맞는 잠재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다음 예문에 나오는 ‘Freudigkeit’를 ‘만족’이라고 번역한 것 역시 잠재적 의미에 부합하는 단어를 선택한 경우이다. 이는 다른 번역자들이 사전적 의미에 따라 ‘Freudigkeit’를 ‘기쁨’(정경석, 김현진) 혹은 ‘즐거움’(윤순호)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Aber wenn wir gelernt haben, die Bäume anzuhören, dann gewinnt gerade die Kürze und Schnelligkeit und Kinderhast unserer Gedanken eine Freudigkeit ohnegleichen.(132-133) 우리들이 나무의 속삭임을 알아듣게 되면 우리들의 사념의 모자람과 졸속도 무엇에고 비할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된다.(홍경호 50)


다음 예문에 나오는 “über erblassende Schneeberge”의 번역은, 원문의 잠재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적 의역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원본의 낯섦을 그대로 살리는 직역이 도착어의 문화적 지평을 넓히는 데 더 나은 번역인지를 따져보게 한다.


Reiserausch meiner ersten Südenfahrt, trunkenes Einatmen der üppigen Gartenluft an den blauen Seen, abendliches Hinüberlauschen über erblassende Schneeberge in die ferne Heimat.(136-137)

힐깃힐깃한 저 눈 더미 그 너머(윤순호 14)

녹아가는 설산 너머(정경석 14).

눈에 덮여 희끗희끗한 산길을 넘던(홍경호 27)

창백해지는 설산 위로(김현진 14)


위 번역 중 ‘erblassen’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살린 것은 김현진의 번역이다. ‘흘깃’이라는 부사를 ‘힐깃’으로 잘못 표기한 홍경호의 번역, ‘녹아가는’이라는 정경석의 번역, ‘눈에 덮여 희끗희끗한’이라는 홍경호의 번역 모두 의역에 속한다. 이러한 의역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번역자에 의한 해석의 결과를 나타낸다. 눈이 창백해 보이는 이유는, 눈 덮인 산을 흘깃 보기 때문이고(윤순호), 눈이 녹아가기 때문이며(정경석), 잔설이 남아 희끗희끗해 보이기 때문이다(홍경호). 윤순호나 정경석의 의역보다 홍경호의 의역이 원문에의 충실성을 더 고민한 번역으로 보인다. 김현진은 직역을 함으로써 원문의 새로운 표현이 주는 낯섦을 순화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데, 번역을 통한 자국 문학과 문화의 지평 확대라는 측면에서 직역이 더 나을 수 있다.


4) 김현진 역의 <방랑>(2009)

김현진의 번역은 〈요양객〉, 〈뉘른베르크 여행〉과 함께 <요양객>이라는 단행본에 실려 있다. 김현진 역시 홍경호와 마찬가지로 〈방랑〉이 지닌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가이엔호펜과 베른에서의 시민적 삶을 떠나 남부 스위스 테신의 자연적 삶으로 옮겨가는 자신의 방랑 여정을 묘사한 이 여행 노트는 북방적인 것, 시민적인 것으로부터 남방적인 것, 예술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그린 것이다.”

김현진의 번역은 기존 번역의 어색한 표현을 다듬으면서 좀 더 매끄러운 우리말 표현을 구사하는 편이다. 이는 어휘 선택에서도 그렇고, 통사구조에서도 그렇다. 과거분사형 수식구를 서술형으로 옮겨 번역하는 것도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번역 기술에 속한다. 김현진의 번역을 다른 번역들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schmale Jahre und üppige Jahre, überstandene Angriffe, überdauerte Stürme(151)

궁핍했던 날들과 풍성했던 날, 공격을 이겨내고 폭풍우를 견뎌 낸 일(김현진 31)

고생스러웠던 해와 무성하게 자라던 해, 그리고 잘도 견뎌냈던 공격과 참아냈던 폭풍(홍경호 48)

조금 자란 해, 많이 자란 해, 승리한 공격, 견뎌낸 폭풍우(정경석 30)

여위웠던 해와 살쪘던 해 견디어 나온 공격과 이겨 나온 폭풍들(윤순호 38)


김현진은 원문에의 충실성에 있어서도 기존 번역을 개선하고자 한다. 김현진은 시 〈무상〉에 나오는 “Ihr spielender Finger schreibt”(159)의 번역에서 ‘spielen’의 의미를 살려낸다. 다른 번역자들이 “어머니의 움직이는 손가락” 혹은 “어머니의 움직이는 손”이라고 번역하면서 ‘spielen 유희하다’의 의미를 누락한 반면, 김현진은 “그녀의 손가락이 유희하며”(김현진 41)라고 번역함으로써 원문에 보다 충실하고자 한다. 그러나 과거 번역에 비해 후퇴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Gruß der Fremde”(137)를 “낯선 이들의 인사”(김현진 14)라고 옮긴 부분이 그렇다.

가장 최근의 번역자로서 기존 번역을 참조할 수 있는데 김현진은 정경석, 윤순호보다는 홍경호의 번역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보인다. 김현진과 홍경호 번역을 비교하면 유사한 번역이 눈에 많이 띈다. 물론 김현진은 홍경호의 번역을 보다 매끄럽게 고치고자 노력하거나 오역을 바로잡기도 하지만, 문장 구조나 어휘 등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어휘의 예를 들자면, 김현진은 “Alle Farben gefälscht.”(155)를 홍경호와 동일하게 “색이란 색은 모두 잘못되었다.”(김현진 35)로 옮기고 있다. 이 번역은 “색갈은 다 혼탁해졌다.”(윤순호 45), “모든 색채는 변색하여 있습니다.”(정경석 34)라고 한 다른 번역들과 차이를 보여주는데, 홍경호와의 일치는 우연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현진의 번역 중 결정적인 오역은 예술가와 시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다음 구절에서 나타난다. 이 부분의 번역에서 김현진은 홍경호와는 다른 번역을 시도하면서 오히려 원문의 의도와 어긋난 번역을 제시한다.


Du kannst nicht ein Vagabund und Künstler, und daneben auch noch ein Bürger und wohlanständiger Gesunder sein.(155) 너는 방랑객도 예술가도 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시민이나 건전한 상식인이 될 수도 없다.(김현진 36)


위에서 인용한 원문 첫 문장에서 부정어 nicht는 “A und daneben auch B”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야 하는데, 김현진은 이를 ‘nicht A’와 ‘nicht B’로 읽는 바람에 A와 B의 모순 관계를 놓치고 만다. 다시 말해 예술가와 건전한 상식인의 모순 관계가 번역에 담기지 못한다. 이러한 실수도 있지만, 과거의 번역에 비해 김현진의 번역은 언어적 측면에서 작품을 특징짓는 공감각적 이미지에 주목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Überrall blaut zwischen Gewächs und Gestein der See herauf.(148)

어디에서나 초록과 자갈 사이로 호수의 푸름이 올라온다.(김현진 28)


‘blauen’은 ‘푸르게 되다’ 혹은 ‘푸르게 물들이다’는 뜻을 가진 동사이고 ‘herauf’는 ‘위쪽으로’라는 뜻을 지닌 부사이다. 원문에는 없지만 ‘heraufkommen’은 ‘다가오다’라는 뜻을 지닌다. 헤세는 blauen과 herauf[kommen]의 조합을 통해 수풀과 바위 사이로 보이는 호수의 푸른빛이 관찰자 앞에 다가오는 듯한 인상을 전달하고자 한다. 김현진의 번역 외에 다른 번역들(“나무나 수풀 사이에든 돌 틈에든 어디에서든 호수가 파랗게 바라보인다.” 홍경호 44; “어디서든지 풀과 풀 사이로 푸르게 뵌다.” 윤순호 34; “어디서나 나무와 바위 사이로 호수가 파아랗게 보입니다.” 정경석 28)에서 이러한 인상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이에 반해 김현진의 번역은 정적인 이미지와 동적인 이미지를 결합한 원문의 의도를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평가와 전망

윤순호와 정경석의 번역에 비해 홍경호와 김현진의 번역은 우리말 구사에서 매끄러운 편인데, 이는 어휘뿐 아니라 구문에서도 볼 수 있다. 구문에서 우리말과 확연히 다른 독일어 문장을 옮길 때 문장 구조의 유연한 변형이 필요하다는 관점은 이미 홍경호의 번역에서 확인된다. 홍경호의 선구적인 번역 전략은 김현진의 번역 전략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2009년에 나온 김현진의 번역은 1970년대에 비해 한층 발전된 번역문화를 배경으로 할 뿐 아니라 그때와는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지닌다. 예전에는 예술가나 낭만주의적인 기질의 특별한 사람들이 따르는 삶의 유형으로 이해되던 ‘방랑’이 오늘날에는 노매드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캐나다 미디어학자 마셜 매클루언은 이미 오래전에 첨단의 소통 미디어를 통해 일반 사람들의 삶은 더 이상 정주가 아니라 유목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를 배경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번역본에서 작품 제목으로 쓴 ‘방랑’이 최적의 번역어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방랑’이라는 우리말은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을 의미하는데, ‘여행, 이동, 이주’를 의미하는 독일어 Wanderung 보다 무계획적이고 일탈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윤순호(1976): 방랑. 가정문고사.
정경석(1962): 방랑. 삼중당.
홍경호(1976): 방랑. 범우사.
김현진(2009): 방랑. 을유문화사.

윤미애
  • 각주
  1. 이하에서 인용된 원문 텍스트의 출처는 Hermann Hesse(1987): Gesammelte Werke in zwölf Bänden, Bd. 6, Frankfurt a. M.: Suhrkamp이다. 이하 본문에서 원문 인용 시에는 괄호 안에 숫자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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