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소설
작가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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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943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헤세가 1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1942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1943년 스위스에서 출간되었다. 헤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며 헤세 문학의 총결산이라 할 만한 대작이다. 소설은 2200년경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보다도 더 후대의 역사가가 과거의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의 중심 내용은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이며, 그에 앞서 크네히트의 삶을 이해하는 데 전제가 되는 유리알 유희의 본질과 역사가 서술되고, 크네히트의 전기 뒤에는 크네히트가 남긴 시 작품과 그가 자신의 삶을 과거 여러 시대의 다양한 문화권에 투영하여 쓴 반(半)허구적인 세 편의 자서전이 덧붙여져 있다. 유리알 유희는 “저널리즘의 시대”(헤세에 따르면 19세기와 20세기)가 초래한 정신과 문화의 파괴를 극복하려는 일군의 양심적 학자와 음악학자, “동방순례자 연맹”이라 불리는 경건한 공동체의 금욕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운동이 발전하여 소설의 중심 배경이 되는 카스탈리엔 수도원이 성립한다. 카스탈리엔은 세속적 현실이나 정치의 영향이 차단된 자율적 교육 지구로서 인류의 모든 학문과 예술을 완전한 조화 속에 통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젊은이들을 교육한다. 고도로 제의적인 성격을 지니는 유리알 유희는 “우리 문화의 내용과 가치 전체를 가지고 하는 놀이”이며 바로 카스탈리엔 수도원이 추구하는 문화의 완전한 미적 종합이라는 목적에 기여한다. 카스탈리엔의 문화가 전성기에 이른 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요제프 크네히트는 특히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며 최고 엘리트로 성장하며 결국 수도원 최고의 지위인 유희의 명장 Magister Ludi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현실이 완전히 차단된 채 순수한 정신적 세계에만 갇혀 있는 수도원의 삶에 점점 회의를 느끼고 자기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는 친구 데시뇨리의 청에 응해 수도원을 떠난다. 그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수도원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사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질 뿐이어서 현실로의 복귀는 미완의 시도로 남겨진다. 헤세는 나치 독일에 의한 상상을 초월한 문화 파괴의 시대에 정신의 저항을 그리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지만, 외부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추구되는 카스탈리엔의 문화적 이상도 근본적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독일에서는 2차 대전이 끝난 뒤 1946년에야 출간되었으며, 곧 김나지움의 필독서로 자리 잡을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어판은 1958년 지정의 편역이 나온 후 1961년 박종서에 의해 처음으로 완역 출판되었다(을유문화사).
초판 정보
Hesse, Hermann(1943): Das Glasperlenspiel. Versuch einer Lebensbeschreibung des Magister Ludi Josef Knecht samt Knechts hinterlassenen Schriften 1-2. Zürich: Fretz & Wasmuth.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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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세 이력서 | 세 이력서 | 위성문고 61 | 헤르만 헤세 | 지정 | 1958 | 法文社 | 3-134 | 편역 | 편역 | 역자가 유리알 유희에서 특정 부분만 발췌해서 번역했음을 해설에서 먼저 밝힘 |
유리알 遊戱 | 유리알 유희 | 世界文學全集 10 | 헬만 헷세 | 朴鍾緖(박종서) | 1961 | 乙酉文化社 | 21-457 | 완역 | 완역 | ||
3 | 유리알 遊戱 | 헤르만 헷세 全集 5 | 헤르만 헷세 全集 5 | 헤르만 헷세 | 손재준 | 1968 | 藝文館 | 17-432 | 완역 | 완역 | |
4 | 순수 존재의 形成 | (세계의 문예사조를 바꾼 문제 序文集, 新로맨티시즘 文學을 완성한 '유리알 遊戱'의 序文) 순수 존재의 形成 | 文學思想 | 헬만 헤세 | 朴鍾緖(박종서) | 1975년 3월호 | 文學思想社 | 324-327 | 편역 | 편역 | 잡지. 역자가 유리알 유희의 서문만 발췌역했다고 밝힘, 제목도 역자가 임의로 붙임 |
5 | 유리알 遊戱 | 유리알 遊戲 | 世界文學全集 54 | 헤세 | 朴鍾緖(박종서) | 1979 | 乙酉文化社 | 21-457 | 완역 | 완역 | 신장판 |
6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헬만 헷세 | 박영식 | 1980 | 白眉社 | 11-350 | 편역 | 편역 |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만 실림 |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 강주환 | 1985 | 을지출판사 | 4-341 | 편역 | 편역 |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만 실림 |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3 | 헤르만 헤세 | 박환덕 | 1986 | 汎友社 | 7-487 | 완역 | 완역 | ||
9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헤세 전집 5 | 헤르만 헤세 | 손재준 | 1986 | 성창출판사 | 17-432 | 완역 | 완역 | |
10 | 유리알 遊戱 | 유리알 遊戱 | 헤르만 헤세 | 朴鍾緖(박종서) | 1988 | 乙酉文化社 | 7-502 | 완역 | 완역 | 61, 79년판에 이은 개정판 | |
11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헷세 | 함희준 | 1988 | 배재서관 | 7-445 | 완역 | 완역 | ||
12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 홍석연 | 1988 | 文志社 | 11-430 | 편역 | 편역 | 1992년 3판이라 표기되어 있지만 3쇄로 짐작됨,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만 실림 | |
13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1 | 헤세 전집 3 | 헤르만 헤세 | 손재준 | 1988 | 성창출판사 | 9-378 | 편역 | 완역 | 1986년판과 다른 규격으로 출판됨, 해당 번역서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해당 도서의 1986년도 판에 역자가 손재준으로 표기되어 있기에 이에 따름 |
14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2, 싯다르타 | 헤세 전집 4 | 헤르만 헤세 | 손재준 | 1988 | 성창출판사 | 9-247 | 편역 | 완역 | 1986년판과 다른 규격으로 출판됨, 해당 번역서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해당 도서의 1986년도 판에 역자가 손재준으로 표기되어 있기에 이에 따름 |
15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선영헤세전집 8 | 헤르만 헤세 | 김기태 | 1989 | 선영사 | 11-336 | 편역 | 편역 | 1993년 중판,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와 유고시만 실림 |
16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 한기찬 | 1989 | 청하 | 13-515 | 완역 | 완역 | ||
17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삼성기획신서 12 | 헤르만 헤세 | 김광요 | 1990 | 삼성기획 | 5-373 | 편역 | 편역 |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와 유고만 실림 |
18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靑木 精選 世界文學 47 | 헤르만 헤세 | 박성환 | 1990 | 靑木 | 5-468 | 편역 | 편역 |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와 유고만 실림 |
19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하서세계문학 21 | 헤르만 헤세 | 윤순호 | 1991 | 하서출판사 | 9-520 | 완역 | 완역 | 1992년판 판권기에 따르면 3판이라 표기되어 있음. 그러나 이후의 판본들에 따르면 1991년 초판에 새로운 쇄로만 출판됨. (후자에 따라 1991년 초판 표기) |
20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 박경준 | 1992 | 예지원 | 11-274 | 편역 | 편역 |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만 실림 | |
21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Hongshin elite books 78 | 헤르만 헤세 | 박혜령 | 1994 | 홍신문화사 | 11-548 | 완역 | 완역 | |
22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을지세계문학선 3 | 헤르만 헤세 | 강주환 | 1994 | 을지출판사 | 5-441 | 편역 | 편역 | 2판,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만 실림 |
23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혜원세계문학 80 | 헤르만 헤세 | 남순우 | 1995 | 혜원출판사 | 7-534 | 완역 | 완역 | 표제면에는 역자가 김재경으로 표기되어 있고 이에 따라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역자가 김재경으로 등록되어 있음. 그러나 표지와 책날개의 역자 소개, 판권기에는 남순우로 표기되어 있기에 이에 따라 역자를 '남순우'로 표기함 |
24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High class book 13 | 헤르만 헤세 | 김광요 | 1995 | 육문사 | 5-374 | 편역 | 편역 |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와 유고시만 실림 |
25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World literature 35 | 헤르만 헤세 | 노태한 | 1996 | 백양출판사 | 9-612 | 완역 | 완역 | |
26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9 | 헤르만 헤세 | 박환덕 | 1999 | 범우사 | 11-493 | 완역 | 완역 | 2판 |
27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한아름문고 40 | 헤르만 헤세 | 최달식 | 2000 | 교육문화연구회 | 7-362 | 편역 | 편역 | 크네히트의 전기 1장부터 12장까지와 유고시만 실림 |
28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하서세계문학 21 | 헤르만 헤세 | 윤순호 | 2004 | 하서출판사 | 9-520 | 완역 | 완역 |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1 | 세계문학전집 273 | 헤르만 헤세 | 이영임 | 2011 | 민음사 | 9-420 | 편역 | 완역 | ||
30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2 | 세계문학전집 274 | 헤르만 헤세 | 이영임 | 2011 | 민음사 | 7-336 | 편역 | 완역 | |
유리알 유희 |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선집 11 | 헤르만 헤세 | 박계수 | 2013 | 현대문학 | 7-766 | 완역 | 완역 | 작품과 관련된 헤세의 서신들도 함께 실려 있음 | |
32 | 유리알 유희 | 유리알유희 | Olje classics 37 | 헤르만 헤세 | 노태한 | 2014 | Olje(올재) | 28-617 | 완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헤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헤세문학의 총결산인 <유리알 유희>(1943)의 국내 첫 번역은 1961년 박종서의 <유리알 遊戲>(을유문화사)다. 그 후 1968년에 손재준의 번역이 있었고, 다시 10년의 공백 뒤 1978년에 이가형의 <유리알 유희>(양지당)가 뒤따랐다.
이 작품의 번역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80년대와 1990년대로서, 80년대에는 함희준, 홍석연, 박영식, 한기찬, 김기태, 강주환, 박환덕의 번역이 등장했고, 90년대에는 남순우, 김광요, 박혜령, 윤순호, 박성환, 노태환, 박경준의 번역이 더 보태어졌다. 그 후 2000년대에는 최달식이, 그리고 2010년대에는 이영임과 박계수가 새로운 번역자로 나타났다. 1961년 박종서로부터 2013년 박계수에 이르기까지 50여 년 동안 <유리알 유희>의 국내 번역자는 총 20인으로 집계된다. 동일 번역자의 동일 번역이 출판연도와 출판사를 달리하며 중복 출판되는 등 이전의 다소 복잡한 출판 관행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20종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다고 할 수 있다.[1]
이 작품의 국내 번역의 역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초창기부터 상당 기간 텍스트 전체를 번역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어느 부분을 번역에서 제외하는가는 단지 감량의 문제만이 아니고,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전달하고자 하는지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원작은 다소 복잡한 인상을 주는 다층적 구조로서, 번역자들은 어떤 층위의 텍스트를 빠뜨릴지를 선택, 결정했다.
소설은 25세기 초 중유럽에 위치한 소규모 이상향, 일종의 교육 자치국인 카스탈리엔에 속하는 화자가 2세기 전, 즉 23세기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유리알 유희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Joseph Knecht)에 대해 쓴 전기로서, 주인공의 삶의 주요 대목을 총 12장에 걸쳐 그리고 있다. 전기에 앞서 화자는 에세이 형식의 서문에서 유리알 유희에 관해 설명하는데, 일종의 문화사적 역사철학적 고찰이다. 전기는 주인공 크네히트가 음악 영재로 발탁되는 과정, 카스탈리엔의 전설적인 유리알 유희 명인으로 임명되는 과정, 그리고 뜻하지 않은 그의 이탈과 죽음의 순간을 서술한다. 서문과 전기 외에도 크네히트의 자필 유고도 전체 작품에 포함되는데, 주인공이 유년기와 학창 시절에 쓴 시詩와 세 편의 가상 이력서다. 이렇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텍스트는 그 분량으로 보면 - 주르캄프 문고판 기준으로 - 대략 서문이 50페이지, 전기가 600페이지, 그리고 총 20페이지 정도가 되는 12수의 시와 마지막으로 총 180페이지 분량의 가상 이력서, 즉 3편의 상상의 자서전들로 이루어지며, 이 모두를 합하면 총 800페이지에 이른다.
<유리알 유희>는 이렇게 장편에다, 또 구성도 워낙 복잡해서인지, 국내 번역 역사의 일정 단계 이전까지 번역자마다 이 혹은 저 텍스트를 누락시키며 불완전한 번역을 내놓았다. 서문을 빼거나 유고를 빼거나, 아니면 둘 다를 빼거나, 혹은 유고 중 시작품은 싣고 이력서는 빼는 등 크고 작은 ‘편집자’적 선택이 만연했다. 그러다가 전체 텍스트의 누락 없는 충실한 번역이 안착하는 것은 1986년 박환덕의 번역(범우비평판세계문학, 범우사)에서부터인 것으로 확인된다.
본 번역 비평에서는 1961년의 박종서, 1978년의 이가형, 1985년의 강주환, 1986년의 박환덕, 2011년의 이영임, 2013년의 박계수에 이르기까지 총 6종의 번역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최초의 번역서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다양하게 여러 번역본이 선보인 80년대, 그리고 하나의 변곡점으로서의 박환덕의 번역과 그간의 작업을 수렴하고 완성한 2010년대의 번역적 성과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번역 비교 분석
1958년에 지정의 <세 이력서>(법문사 위성문고 61권)가 출판되었다. 이는 최초의 국내 번역인 박종서의 <유리알 유희>(을유문화사)보다 3년 앞선 것으로서, 제목이 말해주듯이, 원작의 몸통이라 할 전기 대신 세 편의 가상 이력서만 번역한 것이다. 박종서는 지정의 이러한 지극히 협소한 편역과는 달리 원작 전체를 번역하였고, 이로써 국내 최초의 완역이기도 했다.
박종서는 번역서 앞의 해설에서 작품의 핵심, 즉 주인공의 돌연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논의했고, 해설 말미에는 자신이 두 일본 번역서를 참고했으며, 이들에게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14)고 밝혔다.
박종서의 번역에서는 군데군데 의미가 모호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의 번역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단순한 착각에 따른 단어의 오역에서부터,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문맥에 맞는 대응어를 선택하지 않거나, 원문이 말하는 것과 무관한 추가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용어를 선택하는 식이다. 아래에 그 각각의 예를 들어 본다.
Und dieses Prinzip ist denn auch in langer Tradition so weit verwirklicht worden,(9)[2]
게다가 이 원칙은 오랜 전설 가운데서 매우 광범위하게 현실화되었기 때문에(23)
Mit seiner Aufnahme in die Elite war Knechts Leben auf eine andre Ebene verpflanzt,(82) 영재들 가운데 끼게 되면서부터 크네히트의 생활은 다른 평지로 옮아지고,(74)
[...] besaß in ihr eine Brücke zur Außenwelt und ihren mit Rätseln beladenen Leben.(508) 그것을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는 외부 속세의 생활과 통하는 구름다리로 삼았다.(282)
크네히트의 전기의 중요한 대목, 즉 그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그리고 있는 대목은 어떠한가. 명인의 직위를 스스로 내려다 놓은 크네히트는 어린 제자 티토의 진정한 스승이 되고자 하던 순간에 황망한 죽음을 맞게 된다. 크네히트는 죽음으로서 티토라는 다음 세대를 흔들어 일깨웠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일종의 희생제물이 된 것이다.
Und indem er sich, trotz allen Einwänden, an des Meisters Tod mitschuldig fühlte, überkam ihn mit heiligem Schauer die Ahnung, daß diese Schuld ihn selbst und sein Leben umgestalten und viel Größeres von ihm fordern werde, als er bisher je von sich verlangt hatte.(657) 아무리 항변을 해도 명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기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이 책임이 자기 자신과 자기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며, 지금까지 자기가 자기한테 요구한 것보다 더욱 위대한 것을 요구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히자, 곧 그는 신성한 몸서리를 느꼈다.(356)
티토는 스승의 죽음에 대한 자책과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 져야 할 큰 책임을 예감한다. 그 예감은 ‘신성한 몸서리’를 티토에게 일으키는데, 번역문의 구성은 티토의 예감 보다 그 예감이 동반하는 신체적 반응에 독자를 더 주목하게 만든다.
박종서의 번역은 이렇다 할 수정 없이 1988년에 다시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책 뒤 해설에서, <유리알 유희>를 처음부터 읽는 독자라면 “다시 한 번 읽을 것을 결심하고 읽기 시작하거나”, 혹은 “맨 끝머리에 들어 있는 주인공의 유고(遺稿) 가운데서 <세 가지 이력서>를 먼저 읽고, 다음 본문 제 1장 소명(召命)에서부터 몇 장을 읽고 나서, 처음 서문을 읽은 후에 본문의 남은 것을 읽으면 이해가 빠를 것”(1988, 503)이라는 번역자의 권유가 눈에 띈다.
2) 이가형 역의 <유리알 유희>(1978)
일본 동경제국대학 문학부와 미국 윌리엄스대학을 수료한 영문학자 이가형의 번역은 크네히트의 전기를 집필하는 역사가의 서문과 유고 없이 전기만을 소개한다. 그런 만큼 카스탈리엔이 유럽 문명의 자기 극복으로서 20세기에 설립되었고, 크네히트는 23세기의 그 지도자이며, 25세기를 사는 어느 역사가가 크네히트의 수수께끼 같은 운명을 조명한다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역사적 프레임은 처음부터 탈각되어 있다. 크네히트의 현생과 동심원적으로 연결되는 3개의 자서 전생록도 빠져 있다. 이가형의 번역은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전기만 번역함으로써 원작이 보여주는 문화사적 문명사적 종횡무진의 성찰이 안겨주는 부담과 혼란을 독자에게 덜어준다는 장점이 분명 있다. 빠진 것은 서문과 유고뿐 아니다. 전기 텍스트 내 단락과 문장도 왕왕 누락된다.
크네히트는 원래 카스탈리엔이나 중요한 종교단체나 교육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태어났으며, 미리 결정된 것 같은 그러한 행복된 사람들 가운데 속하는 사람이었다. 요오제프 크네히트의 인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끈 것은 사실 이러한 비극 자체가 아니라, 도리어 그가 자기 운명이나 타고난 재주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고요하고 명랑하며, 더구나 빛나는 그의 천성이었다.(11)
위 단락의 두 문장 사이에는 원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장이 있었으나 번역에서는 누락되었다.
und wenn ihm auch die Problematik des geistigen Lebens keineswegs unbekannt geblieben ist, so war es ihm doch gegeben, die jedem geistgeweihten Leben eingeborene Tragik ohne persönliche Bitterkeit zu erleben.(000)
이를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비록 그에게도 정신생활의 문제가 전혀 낯설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정신에 바쳐진 모든 삶에 내재된 비극을 개인적 쓰라림 없이 체험하는 것이 운명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빠지는 바람에, “행복된 사람 크네히트”에 대한 언급에서 갑자기 “이러한 비극 자체”로 흐르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혼란과 함께 단순 오역도 자주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가형의 번역이 최초 번역인 박종서의 번역을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도, 군데군데 차별성을 두려 애쓴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간간이 문장과 단락들을 고의로 빠뜨리거나, 다소 무리하게 다른 단어로 대체하면서 결과적으로 오역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예컨대 전기의 첫 문장을 보자.
Über Josef Knechts Herkunft ist uns nichts bekanngeworden.(61) 우리는 요오제프 크네히트의 유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박종서, 63) 우리는 요오제프 크네히트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이가형, 11)
크네히트의 가정적 가문적 배경이라는 의미의 Herkunft가 ‘정체’로 번역되어, 느닷없이 크네히트가 의혹스러운 존재로 기울어지고 있다.
또한 이가형은 봘트첼을 떠나면서 데시뇨리가 크네히트에게 남기는 긴 고백, 그리고 이를 음악적으로 비유하는 페로몬테의 편지가 나오는 2장의 뒷부분을 전적으로 누락하고 있다. 이 대목은 데시뇨리와 크네히트의 대립과 접근이 정신계와 속세 사이 불가분의 상호접근과 애틋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화자가 처음으로, 그것도 페르몬테라는 제삼자의 시각으로 드러내 말해주는 대목인 만큼 작품 이해상 비중 있는 부분이다.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 역시 Herkunft와 같이 박종서 번역에 의존하면서도 그와의 차별화를 꾀하느라 ‘신성한 몸서리’를 ‘신성한 흥분’으로 대체하고 있다.
아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자기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는 깜짝 놀랐다. 이미 끝까지 싸우며 항거할 필요가 없는 지금에야 비로소 놀란 마음의 비애 속에서 자기가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 이 책임이 자기 자신과 자기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며 지금까지 자기가 자기에게 요구한 것보다, 더욱 위대한 것을 요구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히자 곧 그는 신성한 흥분을 느끼는 것이었다.(349)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이가형 외에도 같은 영문학자 박영식의 <유리알 유희>(1980/86, 백미사)가 출판되었는데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독문학자 강주환의 번역은 책 표지에 ‘완역판’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가형, 박영식과 마찬가지로 서문, 유고가 없고, 번역된 전기 내에서도 부분적인 누락이 일어난다. 강주환은 2장에서 데시뇨리의 고백은 번역했으나, 페로몬테의 등장은 누락시킨다. 강주환은 박종서의 번역에 일방적으로 기대지 않고, 그럼으로써 이를 감추고자 하는 강박적 변주의 번역 대신 비교적 ‘자연스럽게 다른’ 번역을 제시한다. 예컨대 전기의 맨 앞머리는 원작의 문장을 설명적으로 풀어 놓고 있으며, Herkunft를 태생으로 옮기고 있다.
Über Josef Knechts Herkunft ist uns nichts bekanngeworden.(61) 요오제프 크네히트. 우리는 지금부터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태생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어 다만 추측을 해볼 뿐이다.(11)
크네히트의 죽음을 그리는 마지막 대목에서 강주환은 박종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아무리 항변해도 명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기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이 책임이 자기 자신과 자기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며, 지금까지 자기가 자기한테 요구한 것보다 더욱 위대한 것을 요구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히자, 곧 그는 신성한 몸서리를 느꼈다.(341)
1986년과 1999년에 범우사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3, 29로 출간된 박환덕의 번역은 박종서 이후 25년 만에 이루어진 진정한 완역본이다. 박환덕의 번역은 원작의 제목과 부제목을 그대로 따르는 <유리알 유희. 유희명인遊戲名人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傳記 시작試作. 크네히트의 유고遺稿 포함>을 통해서도 전체 작품을 온전히 소개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이뿐 아니라, 가독성에 있어서나 맥락의 선명성에 있어서 이전보다 확연히 개선되었음을 볼 수 있다. 앞서 다른 번역본에서 살펴본 대목들이 박환덕의 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요제프 크네히트의 집안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하기야 그라고 해서 정신 생활에 대한 아무런 의혹 없이 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록 정신에 바쳐진 생활 특유의 비극을 체험하기는 하였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고통을 맛보지 않을 수가 있었다.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격에 대하여 파고들어 고찰을 하도록 우리를 이끈 것은 아마 이 비극 자체가 아니라 그가 운명이나 천분이나 사명을 실현시킨, 조용하고 밝은, 빛나는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42)
크네히트와 데시뇨리 사이의 역동적인 우정의 본질은 페로몬테에 의해 진단되었다. 박환덕의 번역에서 페로몬테의 이 평가가 “크네히트 자신의 말”로 옮겨져 있어, 이 작품 전체의 핵심이라 할 당사자 두 사람의 섬세하고도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한 페로몬테의 제 3자적 시각의 비중과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페로몬테가 스스로 “정당하게 평가한 것”은 아니라고 시인하는 대상 역시 플리니오의 고백이 아니라, 크네히트를 사이에 둔 자신의 연적과 같은 존재인 플리니오다.
크네히트는 깊은 감동을 가지고 플리니오의 이 고백을 친구 페로몬테에게 전했다. 페로몬테는 위의 편지에다 다음과 같은 크네히트의 말을 덧붙였다. “플리니오의 이 고백을 나는 꼭 정당하게 평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음악가인 나로서는 음악적인 체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속과 정신, 플리니오와 요제프라는 대립이 내 눈앞에서 서로를 용납지 않는 두 원리의 싸움에서 승화되어 하나의 협주곡이 된 것이다.”(95)
아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거다, 하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지기 싫은 마음을 고집할 필요도 없어져 버린 지금 처음으로 놀란 마음의 슬픔 속에서 자기가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느꼈다. 아무리 항변해도 명인의 죽음에는 자기도 책임이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 이 책임이 자기와 자기의 생활을 변화시켜, 지금까지 자기가 자신에게 요구하던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을 요구하리라는 예감에 휩싸여 그는 신성한 전율을 느꼈다.(372)
크네히트의 죽음의 대목과 관련해서는, 앞서 살펴보았던 번역들, 즉 “예감에 사로잡히자, 곧 그는 신성한 몸서리를 느꼈다.”(박종서), “예감에 사로잡히자 곧 그는 신성한 흥분을 느끼는 것이었다.”(이가형), “예감에 사로잡히자, 곧 그는 신성한 몸서리를 느꼈다”(강주환)과 비교해 보면, 박환덕의 “예감에 휩싸여 그는 신성한 전율을 느꼈다”는 확실히 ‘전율’(몸서리)에 대한 강조가 덜하긴 하나 예감보다는 전율, 몸서리에 방점이 있는 것은 여전하다.
박환덕에서 나타났던 비약적인 도약은 2011년 민음사에서 나온 이영임의 번역으로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이영임의 번역은 지금까지의 국내 번역을 총망라하여 이 작품에 대한 국내 학계의 심화한 이해와 그 바탕 위에서 일반 독자를 위한 매끄러운 소개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예의 그 페르몬테의 평가 대목을 보자.
크네히트는 깊은 감동을 숨기지 않은 채 플리니오의 이 고백을 친구 페로몬테에게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페로몬테는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에 대해 내가 늘 공정한 평가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플리니오의 이 고백은 음악가인 내게는 마치 하나의 음악적 체험과도 같았어. 세계와 정신이라는 대립 혹은 플리니오와 요제프라는 대립이 내 눈앞에서 서로 용납하지 않는 두 원칙의 투쟁을 통해 하나의 협주곡으로 승화하는 것이었네.”(I, 141)
페르몬테 스스로 데시뇨리에 대한 껄끄러운 자의식을 인정하면서, 크네히트와 데시뇨리의 관계는 협주곡의 역동성에, 자신의 우정의 몫은 감동적 음악적 체험에 비유하고 있다. 크네히트와 데시뇨리 사이의 상호침투와 병행은 이 작품의 핵심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페르몬테는 이 사건을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다. 앞서의 번역들과는 달리 이영임의 번역은 세 인물의 이러한 관계를 온전히 드러내 주고 있다.
크네히트의 죽음 장면에서도 이영임은 이전 번역들과 구문적으로 차별화된 번역을 제시하고 있다. 박종서 이래로 줄곧 대세를 이루었던 것은, 티토가 가지게 된 예감의 내용을 앞 문장에 배치하고, 신성한 몸서리, 흥분, 전율 등으로 번역문을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모든 번역자가 die Ahnung을 dass 부문장의 위상에 맞추어 번역함으로써, 주어 die Ahnung의 의미와 비중을 살리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부사구 mit heiligem Schauer를 부각해왔다. 그러나 이영임은 신성한 전율을 먼저 처리한 뒤, 미래 예감을 새로운 문장으로 구사한다.
Und indem er sich, trotz allen Einwänden, an des Meisters Tod mitschuldig fühlte, überkam ihn mit heiligem Schauer die Ahnung, daß diese Schuld ihn selbst und sein Leben umgestalten und viel Größeres von ihm fordern werde, als er bisher je von sich verlangt hatte.(657)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명인의 죽음에는 자기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티토는 신성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이 빛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이제껏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밀려왔던 것이다.(II, 152)
이영임의 번역으로 독자는 몸서리나 전율 대신 - 헤세의 원문에서처럼 – 티토와 함께 열리는 (아직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예감으로 독서를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박계수의 <유리알 유희>는 현재로서는 가장 최근의 번역본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직전까지의 발전단계를 반드시 넘어선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그간에 뿌리내렸다 할 번역 저본 출처 제시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세부적인 번역 문제도 눈에 띈다. 전기에 앞서 책의 맨 앞에 수록된, 유리알 유희에 대한 알베르투스 세쿤두스의 라틴어 원문을 크네히트가 번역한 단문에서 박계수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denn mögen auch in gewisser Hinsicht und für leichtfertige Menschen die nicht existierenden Dinge leichter und verantwortungloser durch Worte darzustellen sein als die seienden,(6) ...어떤 면에서 경박한 인간들에게는 존재하는 사물보다 존재하지 않은 사물들을 묘사하는 것이 더 쉽고 책임감을 덜 느끼는 일인지도 모른다.(8)
‘어떤 면에서는, 그리고 경박한 인간들에게는’이 ‘어떤 면에서 경박한 인간들’로 번역되어 있다. 나아가 개인과 이상적 인물, 특히 고대 그리스의 고전적 이상형을 논하는 대목에서 박계수는 “klassische Vertreter von Typen”(11)을 ‘유형적 인물들의 고전적 대표자’ 대신 “유형들의 고전적인 대변자”(11)로 번역하여 의미의 명료성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페르몬테가 데시뇨리와 크네히트의 관계를 평가하는 대목에서 박계수는 “하나의 콘서트로 승화되는 것”으로 번역하여, 협주곡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화해, 갈등 해소의 음악 형식의 의미가 약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크네히트의 죽음을 바라보는 티토의 충격은 어떻게 번역되고 있을까.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명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자 이런 죄책감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신성한 전율과 함께 그를 사로잡았다.(595)
박계수는 이영임보다 die Ahnung, mit heiligem Schauer, überkam을 더 원문의 형식과 배치에 맞추어 번역하고 있다. 이로써 박종서의 첫 번역서 이래 <유리알 유희> 번역본들에서 고정적으로 나타나던 기괴한 마지막 문장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3. 평가와 전망
<유리알 유희>는 그 이전의 작품들을 통하여 국내 독서 대중 사이에 두껍게 쌓여있던 헤세의 인지도,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명성 때문에 비교적 일찍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이 가진 예술 철학적, 역사철학적 사변성과 이를 담기 위해 작가가 동원하는 다층적 구성 형식은 번역자에게 만만치 않은 과제를 던져주었다. 많은 번역본이 양적으로나 담론적으로 부담을 덜어내는 편역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졌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정필태의 <유리알 유희.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시작試作>(1987, 청목/민일사)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1980년대 후반부터는 완역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본 번역 비평은 텍스트의 복합적 성격과 결부된 다양한 편역적 결정들, 선행 번역의 영향, 그리고 부문장 및 부사구 처리가 작품의 마지막 문장 번역에서 일으키는 문제를 중심으로 <유리알 유희>의 번역본들을 비교해 보았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종서(1961): 유리알 遊戲. 을유문화사.
박종서(1988): 유리알 유희. 을유문화사.
이가형(1978): 유리알 유희. 양지당.
강주환(1985): 유리알 유희. 을지문화사
박환덕(1986): 유리알 유희. 범우사.
이영임(2011): 유리알 유희 I, II. 민음사.
박계수(2013): 유리알 유희. ㈜현대문학.
- 각주
- ↑ 일반적인 ‘복잡한 출판 관행’을 넘어서는 예도 있는데, 1987년 이성우의 <유리알 유희>(동문출판사)는 책 표지를 넘기면, 속표지에는 박영식이 번역자로 찍혀있다. 1980년 백미사에서 나온 박영식의 번역서 <유리알 유희>와 쪽수에서부터 글자 한 자 다르지 않으며, 맨 뒤의 번역자 이력 역시 박영식의 이력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니까 오직 겉표지만이 이성우가 번역한 동문출판사의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 ↑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Hesse, Hermann(1943, 2020): Das Glasperlenspiel. Versuch einer Lebensbeschreibung des Magister Ludi Josef Knecht samt Knechts hinterlassenen Schriften. Berlin: Suhrkamp Taschenbuch Verlag.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