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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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시집

두이노의 비가 (Rainer Maria Rilke)
작가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초판 발행1923
장르시집


작품소개

1912년에서 시작해서 1922년에 완결한 릴케의 비가 연작시집이다. 총 10편으로, 각 편은 완결된 구조를 보여주고 고유의 주제를 담는다. 시집의 제목은 1912년 작가가 머문 트리에스트의 두이노 성에서 유래한다. 비가는 가수의 독백 형식을 지니고, 사랑과 같은 행복한 순간의 묘사와 인간 의식이 안고 있는 보편적 문제들에 대한 비탄 사이를 오가는 내용을 지닌다. 3, 6, 8번째 비가를 제외한 나머지 비가에 천사가 등장한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변용을 이미 성취하여 세계의 내면 공간에 자리 잡은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그 자체가 법칙이고 질서인 완벽한 존재이다. 이에 반해 인간은 분열과 대립의 의식 구조에 갇힌 무상한 존재이다.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은 천사를 동경하고 천사에게 구애하지만 천사는 인간의 부름에 냉담하다. 비가는 아름다운 존재이자 무서운 존재라는 양면성을 지닌 천사와의 극명한 대립과 그에 대한 비탄으로 시작하고 천사와의 대립은 마지막 비가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간 의식의 모순들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천사와 동물이 그려지고, 아이, 영웅, 일찍 죽은 자, 연인 등은 경계에 선 인간으로 그려진다. 인간 의식은 분열되어 있는데 한편에서는 기억과 시간의 소멸에 대한 의식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관계로 인한 것이다. 사랑의 관계는 대표적인 예이다. 제10 비가에 이르면 인간은 천사와의 차이를 통감하고 스스로 한계를 인식하면서 천사에 대한 구애를 포기한다. 인간의 구애에 응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인 천사에 대한 거부는 진정한 변용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된다. 인간은 대립된 의식의 굴레를 벗고 인간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 내면 공간에 이를 때 비로소 천사와의 대립을 극복하고 변용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비가는 비탄과 찬사를 교체하면서 세상에 대한 긴장에 찬 관계를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는 1982년 한기찬에 의해 처음 완역되었다(한울림).


초판 정보

Rilke, Rainer Maria(1923): Duineser Elegien. Leipzig: Insel.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두이노의 비가 꿈꾸는 사람 普盛詩選集 3 R. M. 릴케 구기성 1989 普盛出版社 111-130 편역 편역 제1비가와 제5비가만 수록
2 悲歌 오렌지를 춤추어라 을지선서 6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송유진 1989 을지출판사 216-257 편역 편역 제1, 3, 5, 6, 8, 9, 10비가 수록
3 제9비가, <두이노의 비가> 이 출발점에 다시 서서 知文 촛불에세이 4 R. M. 릴케 최혁순 1989 知文社 212-217 편역 편역 제9비가만 수록
4 두이노의 悲歌 두이노의 悲歌 外 세계문제시인선집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한기찬 1990 청하 17-59 편역 완역 <두이노의 비가(제1비가~제10비가)> 완역
5 두이노의 비가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문영 1991 文學과 知性社 8-68 편역 완역
6 두이노 비가 릴케 시선 을유 라이브러리 32 R. M. 릴케 구기성 1995 을유문화사 141-155 편역 편역 제1비가와 제5비가만 수록
7 두이노의 비가 내 존재의 어두운 시간 시가 있는 마을 4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박석우 1999 세손출판회사 96-107 편역 완역 제1비가와 제9비가만 수록
8 두이노의 비가 릴케 전집 2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재혁 2000 책세상 441-488 완역 완역
9 두이노의 열 번째 비가의 초고 릴케 전집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원; 김정란 2000 책세상 78-83 완역 완역 제10비가의 초고
10 두이노의 비가 두이노의 비가 외 릴케 문학선 4 라이너 마리아 릴케 구기성 2001 민음사 13-63 편역 완역
11 두이노의 비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서양문학의 향기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재혁 2003 고려대학교출판부 157-212 편역 완역
12 두이노의 비가 (릴케) 두이노의 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정순 2006 현암사 45-201 완역 완역 독어 원문과 함께 수록
13 두이노의 비가 두이노의 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정순 2006 현암사 46-201 완역; 대역본 완역; 대역본
14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World book 208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백정승 2014 동서문화사 187-229 편역 완역 릴케 작품집; 제1비가~제10비가 모두 수록
15 두이노의 비가 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228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손재준 2014 열린책들 399-463 편역 완역 시집, 두이노의 비가 수록
16 제1비가 (두이노의 비가)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릴케 시 여행 정현종 문학 에디션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정현종 2015 문학판 144-149 편역 편역 제1비가만 수록
17 두이노의 비가 릴케 후기 시집 R. M. 릴케 송영택 2015 문예출판사 115-127 편역 편역 제1비가와 제6비가만 수록
18 두이노 비가 두이노 비가 괄호 시리즈 4 라이너 마리아 릴케 최성웅 옮김 2016 읻다 8-123 완역; 대역본 완역; 대역본
19 두이노 성(城) 비가 독일시집 릴케 김정환 2019 자음과모음 52-292 편역 완역 "<두이노의 비가>의 10편이 흩어져서 수록됨. 제목은 <두이노 성(城) 비가 첫 번째>와 같은 형식임.
1비가: 52-58쪽 / 2비가: 89-95쪽 / 3비가: 123-129쪽 / 4비가: 140-145쪽 / 5비가: 180-187쪽 / 6비가: 207-210쪽 / 7비가: 231-238쪽 / 8비가: 252-256쪽 / 9비가: 269-275쪽 / 10비가: 284-292쪽"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두이노의 비가>의 국내 번역 역사는 1960년에 교양문화사의 세계시인전집 8권으로 출간된 <릴케 시집>에서 시작된다. 역자인 구기성은 총 10편으로 이루어진 <두이노의 비가> 가운데 제1비가와 제5비가를 번역하여 이 책에 수록하였다. <두이노의 비가>의 한국어 초역(初譯)은 초역(抄譯)이었고, 이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전작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완역을 기준으로 하면 <두이노의 비가>의 번역은 1982년에야 처음 출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이 펴낸 <주여 지금 홀로 있는 이들을 기억하소서>(청하, 1982)는 릴케 평전과 릴케의 서정시선, 두이노의 비가 전편(全篇), 서한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한기찬의 번역으로 소개되어 있다. 국문학자이자 시인인 이승훈이 릴케에 관한 책을 펴내고, 이 책에 수록된 <두이노의 비가>의 역자 한기찬 역시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으로 등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그것은 릴케가 한국문학, 특히 한국 시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음을 방증한다. 한기찬은 1986년에 역시 청하에서 자신의 번역을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이후 독문학자들의 번역이 뒤따른다. 완역의 대열에 이름을 올린 역자들은 안문영(1991), 김재혁(2000), 구기성(2001), 이정순(2006), 손재준(2014), 최성웅(2016), 김정환(2019), 염승섭(2022)이다.

<두이노의 비가>가 부분적으로나마 처음 소개된 뒤에 완역이 늦어진 것은 작품이 매우 난해하고 대단히 독특한 문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번역에 많은 난관이 따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자들은 번역의 어려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다음에서는 제1비가를 중심으로 주요 역자의 번역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 한기찬 역의 <두이노의 비가>(1986)

<두이노의 비가>는 한 시행이 문장의 중간에서 끝나고 그 문장이 월행하여(Enjambement) 이어지다가 다음 시행의 중간에서 끝난 뒤 새로운 문장이 같은 시행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갈고리 양식(Hakenstil)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시행의 끝이 문장의 마침표와 일치하는 경우가 오히려 예외적이며, 이는 하나의 단락이 끝났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제1비가의 첫 부분부터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und gesetzt selbst, es nähme
einer mich plötzlich ans Herz: ich verginge von seinem
stärkeren Dasein. Denn 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 den wir noch grade ertragen,
und wir bewundern es so, weil es gelassen verschmäht,
uns zu zerstören. Ein jeder Engel ist schrecklich.

위의 예문에서 시행 중간의 밑줄 친 부분, 즉 마침표와 이어지는 대문자(D, E)가 갈고리 양식의 표지다. 문장과 문장이 갈고리에 걸린 듯이 쉼 없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문장(Ein jeder Engel ist schrecklich.)이 시행과 함께 끝남으로써 하나의 단락이 맺어진다.

첫 행부터 <두이노의 비가>가 보여주는 또 다른 문체적 특징이 나타난다. 정규적인 문장 어순에서의 일탈이 그것이다. 본래는 가정절인 “wenn ich schrie”가 문두에 나와야 하겠지만 릴케는 이 절을 “누가 들을 것인가 Wer hörte”의 중간에 삽입하고 맨 앞에 온 단어 “wer”를 모두 대문자로 적음으로써 강조 표시를 하고 있다. 릴케는 일상 언어적 관점에서 자연스러운 독서의 흐름을 끊는 이러한 변칙적 삽입과 도치를 빈번히 사용한다.

이러한 독특한 배치를 어떻게 반영하는가는 역자가 릴케의 시를 번역하는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제1비가 첫 7행을 한기찬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列)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힘찬 존재 때문에
나는 사라지고 말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무서운 존재.

이 번역에서는 원시가 가지는 월행과 갈고리 양식의 특징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어의 어순과 독일어의 어순이 현격한 차이가 있기에 독일어에서 문장이 시행의 끝에서 중단되는 지점까지 한국어 번역에서 그대로 유지하지는 못했다. 다만 문장이 시행을 경계로 끊어지는 지점을 양적으로 원시에 거의 준하게 만듦으로써 원시가 가지는 리듬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원시의 첫 문장이 두 번째 행에 와서 “Ordnungen”이라는 한 단어로 끝난다면, 한국어 번역에서도 두 번째 행의 첫 한 단어 “들어주랴”가 위에서부터 이어지는 문장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아쉬운 점이라면 4번째 행에서 5행으로의 이행 부분이다. 릴케가 4행의 마지막을 쉼표로 마무리하고 5행을 ‘그리고 und’라는 접속사로 시작함으로써 월행과 갈고리양식의 원리를 계속 따르는 데 반해, 한기찬의 번역에서는 4행이 마침표를 통해 문장을 끝내고 5행은 새로운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에 따라 원시에는 7행에서야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장-시행 종결의 의미도 반감되고 만다(4행 끝의 쉼표를 마침표로 대체한 것은 한기찬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모든 번역본이 여기에서 의견 일치를 이룬다).

릴케의 변칙적인 단어나 구의 배치가 한기찬의 번역에서는 보다 자연스러운, 그래서 의미 파악이 더 용이한 어순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도 눈에 띈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들어주랴”라는 문장에는 일상적 어순에서의 이탈을 찾아볼 수 없다. 이와 함께 릴케가 시행 첫머리에 강조하여 배치한 “누가”라는 단어가 번역에서는 시행의 끝자리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이는 역자가 원문의 실험성 내지 시적 자유와 자연스럽게 읽힐 수 있는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서 어떤 타협적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한기찬의 번역은 원시의 문체적 특징과 표현 방식에의 충실성과 어느 정도 가독성 있게 읽히는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이라는 두 요구 사이에서 비교적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한국어로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찾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예컨대 “Ordnungen”을 단순히 ‘열’이라고 번역한 것도 그러한 태도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der Engel Ordnungen”을 천사들의 무엇이라고 번역할 것인가는 릴케가 말하는 ‘천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도 관련된 어려운 문제이고 이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한기찬은 이를 ‘열’이라고 번역하여 자연스럽게 들리는, 그러나 가장 평범한 대안을 택한다. 인간과 천사가 근본적으로 다른 계에 속한 존재라는 암시가 여기서는 사라진다. 같은 태도는 인간과 천사 사이의 격차를 나타내는 비교급 형용사가 들어 있는 표현(“von seinem stärkeren Dasein” - ‘그의 더 강한 존재로 인해’)을 단순히 “그 힘찬 존재 때문에”라고 번역한 데서도 드러난다. 여기서도 표현의 자연스러움이 원시에의 충실함보다 우선시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기찬은 내용적인 면에서 원시가 말하는 바를 큰 변형이나 과장 없이 충실하게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원시의 의미가 복잡하고 난해해지는 부분에서 상당히 큰 해석적 개입을 하기도 한다. 위의 예문에서는 6행과 7행에 걸쳐 있는 문장이 그러하다.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재현해본다면, 아름다움이 태연하게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우리를 파괴하기를 거절한다는 것이다. 동사 verschmähen은 상대방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더하여 상대방을 무시하고 경멸하기 때문에 거절한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 한기찬은 이 동사에서 경멸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문장의 구문을 변형시켜서 “파멸하리만큼/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고 옮겼다. 이때 파멸하기를 거부한다는 부정의 의미가 사라져서 오역에 가까운 번역이 되었지만, 그러한 번역은 그 자체로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소설가 은희경이 <두이노의 비가>의 이 부분에 착안하여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라는 제목의 소설을 쓴 것이 그 예이다. 한기찬의 특수한 번역의 기원은 어쩌면 풀린(A. Poulin)의 1975년 영역본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풀린 역시 이 구절을 비교적 자유롭게 “because of the serene scorn it could kill us with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을 평온한 멸시 때문)”이라고 옮기고 있으며, 이는 의미상으로 한기찬의 번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제1비가에서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하나가 사랑인데, 릴케는 이와 관련하여 두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die Liebenden”(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처럼 능동적 주체로서 연인과 “eine Geliebte” “der Geliebte”와 같이 사랑받는다는 수동적 의미에서 연인이 그것이다. 릴케에게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능력이 더 중요시되기 때문에 두 표현을 정확히 구별하여 번역하지 않으면 시 이해에 의미상의 혼란이 생겨날 수 있다. 한기찬은 전자를 연인으로, 후자를 사랑하는 이로 옮겨 개념적 구별은 하고 있으나, 이러한 용어 구분이 한국어로 읽는 독자에게 원시의 의미론적 함의를 짐작하게 해줄지는 의문이다. ‘연인’에도 ‘사랑하는 이’에도 능동, 수동의 의미가 혼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대안도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시의 이해와 관련하여 쟁점이 될 수 있는 것은 2인칭 대명사 ‘du’를 어떻게 번역하는가의 문제이다. 한기찬은 시적 문체에 어울리게 ‘그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원시에서는 ‘du’가 첫 행부터 등장하는 1인칭 대명사 ‘ich’와 과연 구별되는 타인을 가리키는 것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ich’와 ‘du’가 혼용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때 ‘du’는 시인이 자기 자신을 부르는 대명사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한 독해가 정당하다면 ‘du’는 ‘너’라고 옮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대’는 ‘나’와 더 거리가 큰 타인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이하에서 안문영, 구기성은 ‘그대’를, 김재혁, 손재준 등은 ‘너’를 택하고 있다.)


2) 안문영 역의 <두이노의 비가>(1991)

안문영은 1991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두이노의 비가>를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와 함께 번역 출간하였다. 안문영 역 <두이노의 비가>의 가장 큰 특징은 원시에의 충실성이라는 원칙을 내용 차원에서 표현 차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추구한 점에 있다. 역시 첫 7행의 번역을 통해 이를 확인해본다.

뉘라서,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랴, 천사들의 
질서로부터? 그리고 어느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해도, 나는 사라지고 말걸, 
보다 강한 그의 현존재로 말미암아. 아름다움이란
아직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디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기에.
아름다움을 우리가 그토록 놀라워함은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기를 의젓이 물리치기 때문. 모든 천사는 무섭다. 

첫 행을 한기찬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다. 안문영은 릴케가 한 것처럼 가정절인 “내 울부짖은들”을 “뉘라서”와 “들어주랴” 사이에 삽입하여 원시가 보이는 다소 혼란스러운 발화의 리듬을 그대로 재현한다. 월행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들어주랴, 천사들의/질서로부터”와 같은 도치 구문도 실은 “천사들의 der Engel”와 “질서 Ordnungen” 사이에서 행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원시의 양상을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행과 4행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도치구문 “나는 사라지고 말걸,/보다 강한 그의 현존재로 말미암아” 역시 원시의 상응하는 구절 “ich verginge von seinem/stärkeren Dasein”과 월행의 지점을 거의 일치시키는 효과를 낸다. 안문영은 이처럼 번역시가 유창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읽히는 것보다는 원시의 구절과 어휘 배열 순서를 재현하며 원시의 머뭇거리거나 혼란스러운 리듬을 살리는 데 더 유의한다.

잦은 월행으로 인해 한 문장이 여러 시행에 걸쳐 있는 <두이노의 비가>와 같은 독일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두 언어의 문법적 차이에 따른 어순 변화로 인해 이를테면 1행의 내용이 2행으로 가고 반대로 2행의 내용이 1행으로 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그러나 안문영의 번역 방식은 원시 1행의 내용을 1행에, 2행의 내용을 2행에 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록 이 원칙의 완벽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안문영 번역 전체에서 원시의 시행에서 이탈하여 다른 시행에 등장하는 표현을 꼽아보면, 그 빈도수가 다른 번역에 비해 현저하게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어 구문을 도치해서라도 원시에의 충실성을 지키려 노력한 결과다.

다만 위의 인용문에서는 한기찬과 마찬가지로 3행의 끝에 문장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원시가 가지는 갈고리 양식의 특징을 완화하고 있음은, 안문영 번역의 전반적 기조와 어긋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안문영이 한국어다움, 한국어로서의 유창함보다 독일어 표현의 정확한 재현을 중시했다는 것은 “천사(들)도 안 되고, 사람들도 안 된다”(10행)나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간들을 향해”(24행) 등에서 보듯이 독일어의 복수형을 번역할 때 다른 역자들과는 달리 ‘-들’이라는 접미사를 거의 예외 없이 사용한다(10행에서 천사 뒤의 ‘들’에 괄호를 사용한 것은 독일어 Engel이 단수인지 복수인지 애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미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안문영은 전반적으로 역자의 개입을 자제하면서 원시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충실히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독일어의 표현이 한국어에서 너무 복잡해 보이거나 자연스럽지 않거나 시적으로 느껴지지 않더라도 이를 좀처럼 다른 말로 대체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위의 예문에서도 2행의 “Ordnungen”을 그대로 “질서”로 옮긴다거나, “Dasein”을 다른 대부분의 역자들이 하듯이 단순히 “존재”로 번역하지 않고 “현존재”라는 철학 용어를 사용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천사들의/질서로부터”라는 번역은 천사와 인간의 영역 사이의 어떤 질적 격차를 생각하게 해주고, 이러한 역자의 파악은 다시 원시의 비교급 형용사를 그대로 살린 “보다 강한 그의 현존재”라는 번역에도 반영된다. 한기찬이 “스스로 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날아가려고 힘을 모으며/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라고 번역한 52행/53행이 여기서는 “마치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힘을 모아 날아가면서/자기 자신보다 더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로 바뀌어 있는 것도 안문영이 자연스러움이나 가독성보다 원시의 표현과 의미(“mehr zu sein als er selbst”)를 더 충실히 전달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6행과 7행에서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기를 의젓이 물리치기 때문”이라는 번역 역시 한기찬과 같은 역자의 해석적 개입을 자제한 결과이다. 다만 ‘verschmähen’을 단순히 ‘물리치다’로 옮겨서 그 속에 포함된 경멸의 의미가 묻힌 것은 아쉬워 보인다. 어떤 대목에서 완전하게 원시에 충실한 번역은 산문적인 느슨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영원한 물줄기가/두 영역에 걸쳐 모든 세대를/언제나 함께 휩쓸고 가면서 두 영역 안의 그들보다 크게 울리고 있다” 83행-85행).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차이는 안문영 번역에서도 문제가 되는데, 역자는 전자를 연인으로, 후자를 애인으로 구별하여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이 두 단어가 유사하게 혼용되기 때문에, 이 구별이 일반 독자에게 의미 있게 전달될지는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정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저 버림받은 자들을 그대는/만족한 자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는가”(38-39행)에서 “훨씬 더 사랑스럽게”라고 옮긴 부분은 “viel liebender”로서 “훨씬 더 사랑한다고”라는 능동의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안문영은 각주를 통해 필요한 부분에 해설을 제공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원시에서 강조 표시된 부분이 번역에서는 강조 표시가 일부 누락된 것, 54행에서 연 구분을 위한 한 행 띄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등의 편집상의 실수가 눈에 띈다.

3) 김재혁 역의 <두이노의 비가>(2000)

김재혁이 번역한 <두이노의 비가>는 1990년에 출간된 책세상 릴케 전집 2권에 수록되어 있다. 역시 제1비가 첫 부분을 통해 김재혁 번역의 특징을 파악해보자.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첫 행은 김재혁의 번역자로서의 입장이 안문영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재혁은 원시의 삽입절을 앞으로 당겨 배치하고 시행 앞에 강조된 “WER”를 시행 마지막(“그 누가”)으로 보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이해 가능한 글의 흐름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mich”라는 1인칭 대명사의 목적격을 “나를”로 번역하지 않고 “내 목소리를”이라고 옮긴 것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앞의 두 역자, 한기찬과 안문영은 이 대명사를 생략해도 의미가 충분히 통한다고 본 반면(“뉘라서,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랴” 안문영), 김재혁은 생략 대신에 “목소리”라는 원문에 없는 단어를 추가함으로써 원활한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나를 듣다 vs 내 목소리를 듣다). 6행-7행의 번역에서 김재혁은 한편으로는 ‘-따윈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표현으로 원문에서 사용된‘verschmähen’의 함의를 잘 살려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gelassen’이라는 표현을 아예 생략해 버림으로써 어떻게 옮기더라도 어감이 잘 살지도 않고 유창한 시의 흐름에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표현이라면 (안문영은 이를 ‘의젓이’라고 옮긴다) 과감히 버릴 수도 있다는 입장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7행의 “모든 천사는 무섭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8행에서 독일어 ‘so’(그리하여)를 ‘이러한 심정으로’라고 옮긴 것 역시 역자의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개입에 대한 선호를 방증한다. 그리고 정서적인 주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번역에서도 확인된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밤, 쓸쓸한 이의 가슴 앞에 힘겹게 서 있는(20행)

원문의 “dem einzelnen Herzen”이 “쓸쓸한 이의 가슴”으로 번역된 것이다. 이 대목을 다른 역자들은 대체로 “모두의 가슴”(손재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구기성)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쓸쓸한 이의 가슴”이라는 표현은 “홀로의 마음”(안문영)이나 “외로운 마음”(한기찬)보다도 감정적인 면을 더 강화한 번역이다.

김재혁의 번역은 이러한 개입으로 인해 시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매우 유려하게 읽힌다. 번역문 특유의 어색함 같은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역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변형은 시행의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김재혁은 기본적으로 잦은 월행과 갈고리 양식의 특성을 번역 속에서 어느 정도 보존하기는 하나, 다음에서는 행의 구성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영리한 짐승들은 해석된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마음 편치 않음을 벌써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산등성이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어 날마다 볼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건 어제의 거리와, 우리가 좋아하는
습관의 뒤틀린 맹종, 그것은 남아 떠나지 않았다.
 

이 부분을 안문영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리고 눈치빠른 짐승들은 벌써 알아채고 있다
해석된 세계 안에서는 우리가 집안에서처럼
마음 놓고 있지 못함을.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비탈길의 어느 나무 한 그루이련가, 우리가 날마다
다시 보게 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제의 거리
그리고 어느 습관의 잘못된 충실함이니
우리 곁이 마음에 들어 머물러 떠나지 않는 습관.(11행-17행)

안문영의 번역이 2행이 더 많은데, 이는 김재혁이 원시의 시행 수를 이 대목에서 2행이나 줄였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마도 김재혁이 말의 군더더기를 제거하면서 시적이고 압축적인 번역을 시도한 데 따른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시적으로 유려하고 흐름이 좋은 번역에는 그 나름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의 난해함과 변칙성은 깎이고 다듬어져 그 자체로 잘 읽히고 번역처럼 느껴지지 않는 새로운 시로 탄생하는데, 그것의 미덕은 원시에서의 멀어짐을 대가로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김재혁이 사랑하다와 사랑받다의 대립을 여기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는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표현을 문맥에 따라 “사랑하는 이들”, “사랑의 여인들” 등으로 옮기고 있다. 반면에 수동적으로 사랑받는 사람 역시 “애인”, “사랑하는 남자”, “연인”으로 그때그때 다르게 번역한다. 김재혁 역시 ‘사랑하는 자’의 주체적 능동성을 부각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점은 39행의 “viel liebender 훨씬 더 많이 사랑하는”를 역시 “훨씬 더 사랑스러움”으로 번역한 데서도 확인된다.

김재혁의 번역에서 ‘du’는 ‘너’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대’보다 더 합당한 번역임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4) 구기성 역의 <두이노의 비가>(2001)

1960년에 처음으로 제1비가와 제5비가를 선보인 구기성은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전작 번역을 출간한다. 그런데 2001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이 <두이노의 비가>는 시 번역으로서 다른 번역본에서 잘 볼 수 없는 문제점을 노정한다. 시작 부분을 읽어보자.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만일 천사가 하나
갑자기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딜 수 있는 무서운 일의 시초에 불과하기에.
우리가 그것을 그토록 찬탄하는 것은 우리를 멸망시킴을 잠잠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모두 무서운 존재. 

이 번역에서는 원시의 시행 구조가 흐트러져 있다. 처음부터 두 행을 한 행으로 합쳐놓은 듯 길게 이어지다가 원시의 2행 끝부분에서 새로운 시행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원시에서 3행에서 5행까지의 내용이 한 행으로 처리된다. 마지막으로 6행과 7행이 다시 한 행이 된다. 모두 시의 한 행이라 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책에서는 각 행이 모두 두세 줄을 차지한다. 심지어 원시에서 31행에서 37행까지는 시행 구분 없이 계속 이어져 있다. 원시의 월행이나 갈고리 양식이 번역에서 얼마나 고려되었는지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러한 자의적 시행 구조의 파괴가 역자의 의도인지, 어떤 편집상의 실수인지도 알 수 없다. 역자 서문이 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시행이 리듬의 기본적 단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시 번역은 시를 산문화하는 번역으로서 기초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번역은 원시의 표현적 특성을 살리기보다는 더욱 자연스럽게 의미를 전달해주는 표현에 기울어져 있다.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로 시작되는 첫 행의 번역이 이미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라는 번역은 다른 번역보다 자연스럽게 읽히지만 “aus den Ordnungen”의 전치사 “aus (어딘가에서 밖을 향해)”가 가진 방향성을 누락시킨다.

역자는 시의 내용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문장과 문장이 더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문장 구조를 재구성하고 변형시키는데, 이는 원시의 모호성과 불연속성, 혼란을 정돈해주지만, 그 대가로 다층적인 의미 잠재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다음 예를 보자.

그러나 그리움에 못견디겠거든 사랑하는 여인들을 노래하라. 그 사랑이 잘 알려져 있긴 해도 영원하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이 여인들을.
그대가 거의 부러워했던 저 버림받은 여인들, 사랑에 충족된 여인들보다 사랑이 훨씬 더 크다고 여겨진 여인들을. 

역자는 여기서 ‘사랑하는 여인들’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몇 구절을 모두 ‘노래하라’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되도록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시에서는 그렇게 시행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한기찬이 원시 구조에 상당히 가깝게 번역하고 있다.

하나 그래도 갈망할 양이면 연인들을 노래하라. 오래된
그 유명한 감정도 불멸의 것이 되기엔 아직 충분치 않다.
그들, 그대 거의 시샘할 정도인 버림받은 이들, 그대가
사랑에 만족한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본 그들. 결코

이 두 번역의 비교를 통해서 구기성이 다소 비약적으로 느껴지는 원문의 흐름을 동일한 구문의 반복으로 엮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역자의 해석이 많이 들어간 번역으로서, 원시에서 분리되어 있는 두 문장, 즉 ‘연인들을 노래하라’라는 명령문과 ‘그 유명한 감정도 불멸의 것이 되기엔 아직 충분치 않다’라는 문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른 해석 가능성을 차단한다. 또한 온전한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외떨어져 있는 긴 명사구(‘그들, 그대 거의 시샘할 정도인 버림받은 이들, 그대가/사랑에 만족한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본 그들’) 역시 남김없이 명령문 속에 통합되어 버린다.

이에 비해 구기성의 1960년 번역은 옛말투가 낯설긴 해도 이보다는 원시에 더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번역은 많이 다듬어졌지만 원시의 리듬과 의미론적 모호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허나 그리움에 못견딜 양이면, 사랑하는 임네들을 노래하여라. 예부터
그 영예로운 감정이 불멸이기엔 상기 족하진 못해라.
그대는 오히려 이들을 질투하노라, 저 버림받은 여인들, 마음 흡족한
여인들보다 그대 그리도 귀히 여기는 여인들을. 언제나

여기서는 2001년의 번역에서 일어난 시행의 해체는 전혀 예감할 수 없고, 구문의 근본적 재구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번역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독자에게 더 잘 전달한다는 방향으로의 변화인데, 이를 위해서 시는 시의 고유성이라는 면에서 상당한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새로운 번역에서 의미 파악의 정확도가 높아진 부분도 눈에 띈다. 1960년의 번역에서 ‘그대 그리도 귀히 여기는 여인들’은 2001년에 ‘사랑이 훨씬 더 크다고 여겨진 여인들’이라고 바뀌어 있는데, 두 번째가 원의에 가깝고, 첫 번째 번역은 오역이다.

구기성의 번역에서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은 어떻게 구별되어 있는가? 구기성은 사랑받는 자는 연인, 애인 등으로 옮기고 사랑하는 자는 일관되게 ‘사랑하는 여인’으로 옮기고 있다. 원시에서 ‘사랑하는 자’는 성이 특정되지 않은 복수형이지만, 문맥상 여성으로 보고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능동과 수동의 대립적 의미를 뚜렷이 살린 것은 아니지만 양자를 뒤섞고 혼동하지는 않았고, “die Liebenden 사랑하는 이들”의 능동적 의미를 명확히 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구기성 번역에서 다음 대목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아, 우리는 누구를 부릴 수 있는가? 천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여기서 다소 문제적으로 보이는 것은 ‘부리다’라는 동사다. 이에 해당하는 독일어 동사는 brauchen으로서, ‘필요로 하다’, ‘사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같은 동사가 이 시의 다른 구절에서는 ‘필요로 하다’로 옮겨져 있다.

그렇다. 봄이 분명 그대를 필요로 하리라. 

‘brauchen’이 첫 번째 구절에서 ‘필요로 하다’로 번역되지 않은 것은 이 동사가 ‘-할 수 있다 vermögen’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요로 할 수 있다, 필요로 할 능력이 있다’라는 말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보고 역자는 여기서 ‘사용하다’라는 의미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김재혁은 ‘필요로 하다’라는 번역을 택하면서 이와 어울리기 어려운 vermögen을 누락시킨다: “아 대체 우리는 그 누구를/필요로 하는가?”) 다만 사용의 대상이 천사, 인간인 까닭에 ‘사용하다’ 대신 ‘부리다’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천사를 더 강하고 무서운 자로 묘사한 이 시의 문맥을 볼 때 비록 부정문이긴 하나 ‘나는 천사를 부릴 수 없다’라는 문장이 성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구기성은 1960년의 번역에서 이미 ‘부리다’라는 동사를 사용했고(“오호라, 그 뉘를 우리사/부릴 수 있음인가?”), 이 번역은 이후에 다양한 번역본에 승계되었다(한기찬, 안문영, 이정순). 최초의 번역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일례라고 여겨진다.

5) 이정순 역의 <두이노의 비가>(2006)

이정순은 2006년에 현암사에서 <두이노의 비가> 완역본을 출간하였는데, 이 번역의 특징적인 점은 한독 대역이라는 것이다. 독자가 한국어 번역과 독일어 원시를 한 눈에 보고 비교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기에, 역자가 원문에의 충실성을 지향하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 점은 서두에서 확인된다.

그 뉘라,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나를
들어주랴? 설령 어느 천사 하나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품어준다 한들, 그의 강렬한, 강렬한
현존에 나 스러지고 말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아직은 간신히 견디고 있는 가공할 것의 시작일 뿐이므로.
그 아름다움 우리가 이토록 경탄함은 그것이 우리를 파괴시키는 일 따윈 차라리 유유히
경멸하기 때문이다. 천사치고 무섭지 않은 천사는 없느니. 

첫머리를 “그 뉘라”로 시작하고, “내 울부짖은들”이라는 구절을 삽입구로 중간에 넣은 것에서 역자가 원시의 배치를 가능한 한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어다우면서 시적으로 고조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번역어와 음조를 찾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예컨대 ‘그 아름다움 우리가 이토록 경탄함은’에서 보듯 조사를 생략하는 어법도 시적 분위기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며, 평범하게 번역한다면 ‘모든 천사는 무섭다’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이 김정순의 번역에서는 “천사치고 무섭지 않은 천사는 없느니”로 바뀐다.

이러한 노력이 과해지면 원시의 의미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 3행-4행의 “그의 강렬한, 강렬한 현존”과 같은 번역에서 김정순은 원문의 비교급 형용사(stärker 더 강한)를 시적 반복을 통한 강조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 듯하다. 그러나 천사와 나 사이의 힘의 격차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강렬한’이라는 번역어도 적절하지 않고, 비교의 표현을 반복법으로 바꾼 것도 수사법을 위해 본질적 의미를 희생시키는 게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역자도 번역의 자의성을 의식하여, 미주를 통해 원문과 다소 다르게 번역했음을 독자에게 알리고 있다.

그 외에도 김정순은 감정적 고조와 시적 효과의 증대를 기대하는 듯, 원문에 강한 주관적 색조를 입히거나 원문에 없는 표현을 추가하기도 한다. “von Erwartung zerstreut(기대에 정신이 팔려)”를 “기대감으로 (...) 마음 설레이지 않았던가”라고 한다든지 “Sehnt es dich aber 그래도 그리웁다면”을 “그래도 못내 그리울 양이면”이라고 한다든지, “erschöpfte Natur 지친 자연”을 “지칠대로 지친 자연”이라고 번역하여 의미를 강화하기도 한다. 이때 특히 흥미로운 것은 59행의 “das Wehende”의 번역이다. 불어오는 소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를 김정순은 “나부낌”이라고 하고, 이어지는 60행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저 고요로 이루어진 끊임없이 나부끼는 소식

여기서 김정순은 앞 행의 “나부낌”을 받아서 원문에 없는 “나부끼는”이라는 말을 추가하였다. 원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부분 역자들의 번역을 살펴보면 김정순의 번역이 매우 독특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적 속에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메시지를(김재혁)
고요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소식을(안문영)
정적에서 생겨나는 이 끊임없는 소식을(구기성) 
침묵에서 이루어져 나온 끊임없는 소식에(한기찬) 

김정순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심상에서 무언가 나부끼는 것을 연상하고 불어오는 것을 나부끼는 것으로 대체한다. 게다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적으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소식”이라는 구절을 “저 고요로 이루어진 끊임없이 나부끼는 소식”이라고 번역하여 나부낌을 고요와 함께 이 구절의 중심적인 심상으로 만들었다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유치환의 시 <깃발>의 영향이 번역 과정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작용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정순은 유치환의 시를 통해 릴케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사랑받는>의 대립과 관련하여 김정순의 번역은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여준다. 능동적 사랑의 주체를 나타내는 “die Liebenden”은 사랑의 여인들, 사랑했던 여인들, 연인 등으로 다양하게 옮겨지고 수동형인 “eine Geliebte”도 “사랑하는 이”라고 되어 있어서, 사랑하는 자가 릴케에서 가지는 의미가 다소 흐려져 있다.

김정순은 첫 번째 연(25행까지)에서는 ‘du’를 ‘그대’라고 번역하다가 두 번째 연에서부터(26행 이하) ‘너’로 번역한다. 역자가 첫 연의 ‘du’와 두 번째 연 이하의 ‘du’를 다르게 파악한 것인지, 어떤 실수인지는 알 수 없다. 특별히 달리 번역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너’로 통일함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편집상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김정순 번역본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자 한다. <두이노의 비가>만을 수록한 이 책은 한독 대역임에도 단행본으로서는 비교적 짧은 분량이기에 작은 판형의 책으로 편집되었는데, 책의 글자 크기는 상당히 크다. 그 결과 한 시행이 두 줄에 걸쳐 계속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두이노의 비가>가 한 시행이 상당히 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시행을 한 줄로 편집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의 시행이 두 줄로 편집된다면 시행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러한 편집으로 인해 원시의 구조를 재현하기 위해 고심하여 번역한 역자 노고의 의미가 반감된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6) 손재준 역의 <두이노의 비가>(2014)

손재준의 <두이노의 비가> 번역은 2014년에 출간되었다. 역서의 제목은 “두이노의 비가”지만 <기도 시집>에서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망라하는 릴케 시 선집이며, <두이노의 비가>가 릴케 시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인식에서 선집의 제목도 그것으로 정한 것이다.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 주랴? 설혹 어느 천사 하나 있어 
나를 불현듯 안아 준다 하여도 나는 그의 보다 강력한 
존재에 소멸하리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아직은 견뎌 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우리가 그처럼 찬탄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 따위는 멸시하는 까닭이다. 모든 천사는 두렵다. 

손재준의 번역은 원시의 첫 마디 “그 누가”를 맨 끝으로 보낸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의미를 원활하게 전달하는 것을 중시하는 번역이다. 하지만 월행도 가능하면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의 보다 강력한/존재에 소멸하리라) 원시의 형식도 일정한 범위에서 존중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김정순의 번역과 비교해본다면 시적인 음조를 강조하는 번역은 아니다. 오히려 비교적 차분하게 원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옮기겠다는 자세가 두드러진다. “아름다움이란/우리가 아직은 견뎌 내는 두려움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대목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논의되는 모든 다른 역자들 가운데 이 문장을 ‘-이다’라는 종결 어미로 끝낸 것은 손재준뿐이며(다른 역자들은 대체로 ‘-이므로’, ‘-이기에’와 같은 식으로 여운을 남긴다), 전반적으로도 손재준의 번역에서 ‘-이다’ ‘-한다’ 식의 종결형이 다른 번역에 비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소 건조한 산문투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손재준은 곳곳에서 자신의 해석을 집어넣어 원문에서 다소 변형된 표현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구기성과 많은 역자들이 “부리다”로 옮긴 ‘brauchen’이 손재준의 번역에서는 ‘의지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아, 우리는/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손재준은 아마도 ‘brauchen’의 의미를 일단 ‘필요로 하다’라고 보고 이를 좀 더 자연스럽게 ‘의지하다’로 대체한 듯하다. 그것이 아마도 시의 원뜻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vermögen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라고 옮긴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die Liebenden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살다 간 여인들”로 옮긴 것도 릴케의 의도를 선명히 드러내고자 한 역자의 해석적 개입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들”보다도 사랑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면모를 더 부각시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랑받는 자라는 의미의 ‘Geliebte(r)’는 단순히 ‘연인’으로 번역된다.) 그러한 인식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지친 자연은, 두 번 다시 그러한 사랑을 생산할 
힘이 없는 듯, 사랑으로 살다 간 여인들을 자신의 안으로
다시 거두어 들인다. 너는 가스파라 스탐파를

여기서 손재준이 “사랑을 생산할 힘”이라고 옮긴 것은 원시에서는 “die Kräfte, dieses zu leisten 이 일을 해낼 힘”이다. 그는 ‘이 일을 해내는 것’이 ‘사랑을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문맥에 따라서 해석한다면 ‘사랑을 또 한 번 할 힘은 없다는 듯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손재준은 사랑 주체의 능동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듯이 ‘생산’이라는 말을 집어넣었다. 역자 자신의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는 대목으로서 흥미롭지만, 이러한 경향은 때로 자의적 번역으로 흐를 위험도 안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11행에서 17행에 이르는 부분이 김재혁의 번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총 5행으로 번역되어 있다. 다만 두 번역은 아주 다르기에 어떤 영향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런 정도의 시행 변화는 시 번역에서 중대한 결함이 된다.

마지막으로 일찍 죽은 자들을 노래하는 부분에서 “Freilich ist es seltsam”(69행)을 “참으로 이상하다”라고 옮긴 것에 대해 비판적 언급을 덧붙이고자 한다. 손재준 외에도 김정순, 김재혁 등이 “freilich”를 “참으로”라고 옮기고 있는데, 본래 의미대로 “물론”이라고 번역함이 좋을 것이다(안문영, 구기성, 최성욱). 왜냐하면 이 부사는 80행의 “aber 그러나”와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여러 상황이 물론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aber) 산 사람들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를 너무 강하게 구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전체의 내용적 흐름이다. 69행을 “참으로 이상하다”(손재준, 김재혁) “참으로 묘하기도 해서”(김정순)라고 번역하면 그러한 흐름이 흐려진다. 시 번역에서도 어떤 논리적 연결을 나타내는 표현을 정확히 번역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7) 최성웅 역의 <두이노의 비가>(2016)

김정순의 번역본과 반대로 독한 대역으로 편집된 최성웅의 번역본은 여기서 비교되는 번역본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이다. 그리고 역자도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한다. 앞에서 검토한 번역에서 가장 젊은 번역자가 김재혁으로 60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2016년 당시 30대 초반인 최성웅의 릴케 번역은 이전 번역과 어떤 현저한 차별성을 드러내지 않을까 기대하게 한다. “두이노 비가”라는 색다른 제목 번역도 그러한 기대를 강화한다. 그러면 역시 첫 7행을 읽어보자.

누구냐, 나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 그 누가
내 울음에 귀 기울여준단 말이냐? 심지어 그중 한 천사가 
순간 나를 가슴에 품더라도, 보다 강한 존재로 인하여 
나 사라질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내는
저 끔찍한 것의 시작일 따름이기에.
놀라운 점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
냉담하다는 것이다,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 

우선 첫 행에서 이전까지의 모든 번역과 변별되는 몇 가지 차이점이 드러난다. 우선 원시에서처럼 문두에 “wer”가 나오고(“누구냐) “wenn ich schriee”를 삽입구로 (“나 울부짖은들”) 처리한 것은 안문영, 김정순 등의 번역과 같다. 그러나 “뉘라서”(안문영), “그 뉘라”(김정순)와 같은 다소 고풍스럽고 ‘시적’인 표현 대신 일상적이고 직설적으로 느껴지는 “누구냐”로 옮긴 것이 특징적이다. 또 하나의 차별성은 시행의 끝에 “그 누가”라는 말을 더 넣어준 데 있다. 그렇게 원문에 없는 말을 추가해서 의미가 좀더 잘 전달되도록 했다. “누구냐”로 시작하는 원문의 구조를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한국어의 특성에 맞는 어순(“천사의 대열에서 그 누가”)에 대한 요구와도 타협을 한 것이다. 이는 역자가 시 번역의 두 가지 요구, 즉 언어 자체의 전달과 의미의 전달 사이의 딜레마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행 “누구냐”의 어미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시 번역 방식에서의 이탈은 이어지는 두 번째 행의 ‘말이냐’에서 재확인되고, 제4행의 “나 사라질 것이다” 역시 역자가 비교적 평범하고 직설적인 표현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비교: “스러지고 말리라”, 김정순).

그런데 장식적인 요소를 걷어내는 듯한 번역 경향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도 나타난다.

놀라운 점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
냉담하다는 것이다.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

문장은 매우 간결해졌다. 다소 가량맞고 서투른 느낌을 주기까지 하는 다음과 같은 김정순의 번역과 비교해보라.

그 아름다움 우리가 이토록 경탄함은 그것이 우리를 파괴시키는 일 따윈 차라리 유유히
경멸하기 때문이다. 천사치고 무섭지 않은 천사는 없느니. 

최성욱은 여기서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는 내용을 빼버리고, 그저 “아름다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 냉담하다는 것”이 놀랍다고 번역한다. “우리를 파괴하는 데 있어 냉담하다”는 것도 “우리를 파괴시키는 일 따윈 차라리 유유히 경멸”한다는 번역보다 깔끔해 보이지만, 파괴한다는 것인지 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이러한 번역은 원문의 의미와 크게 어긋난다는 점에서 역자의 해석적 개입의 허용 한계를 넘어선 오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새로운 번역자가 기존의 번역을 답습하지 않고 정말 새로운 번역을 하고자 애쓰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전에 다른 역자들이 범하지 않은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문제가 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본 것처럼 최성욱의 새로운 번역은 어떤 부분에서 참신하고 바람직한 개선이 있지만, 기존 번역 성과에서 자의적으로 이탈하여 오역이 되어버린 부분도 많이 있다. 이는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최성욱은 시에서 사랑함/사랑받음의 대립이 문제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 “die Liebenden”은 “사랑하는 여인들”로, 많은 다른 역자들이 연인, 혹은 애인으로 번역한 “eine Geliebte”는 “사랑받을 한 여인”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역시 모든 다른 역자들이 “애인” 혹은 “사랑하는 남자” 등으로 옮긴 다음 구절의 번역도 주목할 만하다.

(...) 이제는 우리가 사랑함으로써 
사랑받음으로부터 해방되어, 떨면서 견뎌낼 시간이 아니겠는가?

최성욱은 “uns vom Geliebten befreien”을 사랑받음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음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이 연결되어 있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vom Geliebten”을 ‘사랑받는 남자 der Geliebte’가 아니라 ‘사랑받는 것 das Geliebte’이라고 읽은 것인데 독일어 문법상 그런 식의 독해가 가능할지는 다소 의문이긴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남자) 애인에게서 해방된다는 번역보다 더 릴케의 태도를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색다른 번역 시도에 속하는 것은 “감히, 그 누구를/필요로 하겠는가”(9-10행)와 같은 문장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필요로 하다’와 ‘할 수 있다’가 의미상 결합되기 어렵다고 본 많은 역자들이 ‘brauchen’ 동사를 ‘부리다’로 번역하였고, ‘필요로 하다’라는 뜻을 택한 역자들도 같은 이유에서 ‘할 수 있다’라는 의미를 누락시키고 번역하였다(김재혁). 그런데 최성웅은 ‘필요로 하다’를 택하면서도 ‘감히’라는 부사어를 사용하여 ‘vermögen’의 뜻을 살리려 하였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필요로 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한다. 식물이 물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물을 흡수하여 성장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천사를 필요로 한다면, 천사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럴 수 없다면 천사가 필요하다고 ‘감히’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전 역자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고요로부터 빚어진 소식이 끊임없이 나부끼고 있지 않은가”(60행)라는 번역은 김정순의 선행 번역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이 불다라는 동사(wehen)를 나부끼다(flattern)로 대체하는 착오가 두 역자에게서 독립적으로 동시에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3. 평가와 전망

비교적 늦게 완역된 <두이노의 비가>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다양한 한국어 번역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다루지는 못했으나 2022년 3월에는 고 염승섭 교수의 유작 번역이 부북스에서 출간되었다. 많은 수수께끼와 다의적인 어휘를 포함한 릴케의 난해한 장시를 한국어로 온전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일 것이다. 릴케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형식과 내용, 비약과 논리, 불가해한 수수께끼와 이해 가능한 해답 사이에서 끊임없는 저울질을 하는 과정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번역, 그래도 그 시도가 앞으로도 새로운 세대에서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한기찬(1986): 두이노의 비가. 청하.
안문영(1991): 두이노의 비가. 문학과지성사.
김재혁(1991): 두이노의 비가. 책세상.
구기성(2001): 두이노의 비가. 민음사.
김정순(2006): 두이노의 비가. 현암사.
손재준(2014): 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최성웅(2016): 두이노 비가. 읻다.


5. 참고 문헌

구기성(1960): 릴케 시집. 교양문화사. 이승훈(1983): 주여 지금 홀로 있는 이들을 기억하소서. 청하. A. Poulin Jr(1975): Duino Elegies and The Sonnets to Orpheus. Houghton Mifflin Company Boston.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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