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 (Der Bajazzo)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소설
작가 | 토마스 만(Thomas 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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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 1897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토마스 만이 189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4대에 걸쳐 내려오는 재력과 명망이 있는 상인 가문의 후손인 자칭 어릿광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회사를 청산하여 현금화해서 고향을 떠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을 여행한 후 그는 독일로 돌아와서 어느 중소도시에 정착하게 되는데, 아무런 직업 없이 자신이 받은 유산의 이자로 생활한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으면서 산책과 문학작품 독서, 극장이나 음악회 방문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예술가적 자질은 어느 정도 있으나 천재적인 창작력은 없기에 그는 자신의 어릿광대 기질이 쓸모없다며 자신을 “불행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라고 자책한다. 삶에서 이탈한 20대 후반의 아웃사이더는 좋아했던 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약혼한다는 소식에 자살까지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릿광대에게는 영웅 같은 짓일 거라며 자신에 대한 구토로 글을 마친다. 이 작품은 젊은 토마스 만의 자전적 소설이자 자기 비판적 소설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는 1983년 홍경호에 의해 처음 번역 출판되었다(금성출판사).
초판 정보
Mann, Thomas(1897): Der Bajazzo. In: Neue Deutsche Rundschau 8, 930-950. <단행본 초판> Mann, Thomas(1898): Der kleine Herr Friedemann. Berlin: S. Fischer, 115-178.
번역서지 목록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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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어릿광대 | 魔의 山 (Ⅱ), 短篇選 |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 96 | 만 | 洪京鎬(홍경호) | 1983 | 금성출판사 | 362-390 | 편역 | 완역 | 2권에는 단편선이 함께 수록되어 있음 |
어릿광대 | 魔의 山 Ⅱ, 短篇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82 | 토마스 만 | 洪京鎬(홍경호) | 1990 | 金星出版社 | 407-439 | 편역 | 완역 | 초판, 1993년 중판 | |
어릿광대 |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 세계문학전집 8 | 토마스 만 | 한성자 | 1998 | 민음사 | 303-348 | 편역 | 완역 | 1998년도 초판 1쇄 발행 당시에는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대략 2003년부터는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제목이 변경된 것으로 보임. 그 이후로는 이 제목으로 고정된 채 쇄를 거듭했기에 1쇄 당시의 제목이 아닌 본 제목으로 기록함 | |
4 | 어릿광대 |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 토마스 만 | 윤순식 | 2009 | 누멘 | 89-90 | 편역 | 편역 | ||
어릿광대 | 토마스 만 | 세계문학 단편선 3 | 토마스 만 | 박종대 | 2013 | 현대문학 | 333-372 | 편역 | 완역 | ||
어릿광대 | 토마스 만 단편 전집1 | 부클래식 82 | 토마스 만 | 김륜옥 | 2020 | 부북스 | 185-243 | 편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토마스 만의 초기 단편소설 <어릿광대>는 홍경호에 의해 번역되어 1983년 금성출판사 <(애장판)세계문학대전집> 96권을 통해 처음 출판되었다. 이는 만의 다른 초기 단편과 비교하면 비교적 늦게 번역된 편이다. 만은 22세이던 1897년 피셔출판사가 간행하는 문학잡지 <노이에 도이체 룬트샤우>에 이 작품을 처음 발표하고 이듬해 1898년 단편집 <키 작은 신사 프리데만>에 포함시켜 단행본으로 내놓았는데, 이 단편집에 실린 6편 중에 <어릿광대>가 가장 늦게 번역되었다. 표제작인 <키 작은 신사 프리데만>과 <죽음>, <환멸>, <토비아스 민더니켈>은 1959년에,[1] <행복에의 의지>는 1958년에 처음 번역되는[2] 등 <어릿광대>를 제외한 다섯 작품은 모두 1950년대 후반에 초역되었다. 이 작품은 83년에 초역되었으니, 약 사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번역된 것이다.
홍경호의 번역은 1990년에 같은 출판사의 <(금성판)세계문학대전집> 82권을 통해 한 번 더 출판되었다. 이후 1998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한성자의 번역이 나왔고, 2013년에는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을 통해 박종대의 번역이, 2020년에는 부북스의 <토마스 만 단편 전집1>을 통해 김륜옥의 번역이 나왔다. 이 작품이 단편인지라 단독으로 출판된 적은 없고, 모두 어떤 전집의 작품집 속에 포함되어 소개되었다. 이 단편의 번역 현황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윤순식이 발췌 번역해서 펴낸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누멘 2009)에 <어릿광대>의 문장이 다수 포함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토마스 만의 명언이 21쪽에 걸쳐 소개되는데, 그중에 두 쪽이 <어릿광대>에서 뽑은 문장들이다.
이 소설은 예술가와 시민, 예술과 삶 사이에서 고뇌하던 젊은 토마스 만의 자전적 요소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토마스 만이 처해 있던 딜레마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 시민적 직업윤리를 지닌 예술가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상대적으로 늦게 번역되기 시작했고, 번역의 종수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초기 토마스 만의 작가적 고뇌를 이해하기에 좋은 작품이라 비평의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하에서는 완역본 4종에 대해 개별적으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홍경호는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마의 산>을 두 권으로 나누어 출판하면서 <어릿광대>를 비롯한 만의 단편 4편도 번역하여 2권에 실었다. 그는 <마의 산>과 작가의 초기작품 전반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는데, 초기작품 전체의 주제를 “‘예술 대 인생’, ‘예술가 대 시민’ 혹은 ‘범속한 인간 대 아웃사이더’”(527)라고 소개한다. <어릿광대>에서도 일인칭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자칭 어릿광대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그는 공감 능력은 뛰어나지만,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능력은 적은 딜레탕트적 인물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느낀다는 고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Nach allem zum Schluß und als würdiger Ausgang, in der Tat, alles dessen ist es nun der Ekel, den mir das Leben – mein Leben -, den mir >alles das< und >das Ganze< einflößt, dieser Ekel, der mich würgt, mich aufjagt, mich schüttelt und wieder niederwirft und den mir vielleicht über kurz oder lang einmal die notwendige Schwungkraft geben wird, die ganze lächerliche und nichtswürdige Angelegenheit überm Knie zu zerbrechen und mich auf und davon zu machen.”[3]
토마스 만다운 이 긴 문장에서 서술자는 “Schluß, Ausgang 결말, 끝”이라는 단어와 “Ekel 혐오감/구역질”, “Leben 삶”이라는 단어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장 구조로 볼 때 Ekel이라는 단어가 중간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형성하고 있으며, 문장 후반부에서는 관계절을 통해 혐오감/구역질에 대해 부연해서 설명된다. 소설의 이 첫 문장은 무엇보다도 서술자의 파토스, 즉 그가 삶에서 느끼는 혐오감이라는 감정이 강하게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홍경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일체의 결말로서, 또한 훌륭한 대단원으로서, 아니 그 일의 전체로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생활 ―나의 생활― 이 ‘그 일체’, ‘그 전체’가 나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혐오감뿐이다. 그것은 내 목을 조르고, 나를 몰아세우고, 나를 뒤흔들어놓고는 내팽개쳐버리는 그런 혐오감이다. 나에게 이 어리석고 시시한 용건을 지체없이 모조리 처리해버리고 달아나버릴 만한 동력(動力)을 아마도 조만간 가져다 줄 그런 혐오감이다.”(407)
우선 원문의 사고선과 강조 표시를 살려서 번역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한성자나 박종대의 번역과 구별되는 점이다. 홍경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면서 내용 전달이 잘 되는 편이며 어휘도 현대적이어서 요즘 독자가 읽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 콤마를 이용해 감정의 분출을 병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서술자의 솟구치는 듯한 심정 토로가 잘 느껴지는 번역문장을 제공한 점이 돋보인다. 다만 마지막에 문장을 ‘혐오감이다.’라고 끝맺는 서술형 방식을 택함으로써 서술자의 파토스가 조금 반감되는 측면이 있다.
홍경호는 토마스 만의 장문을 단문으로 끊어서 번역하는가 하면 한국식 표현으로 자국화하는 번역을 통해 독서의 속도감과 맛을 느끼게 해준다. 가령 “Ich las viel, las alles, was mir erreichbar war, und meine Eindrucksfähigkeit war groß.”(114)를 “나는 독서광이었다. 닥치는 대로 뭐든지 다 읽었다. 게다가 나의 감수성은 풍부했다.”(415)로 번역한 것이 그 한 예라 하겠다. 특히 ‘Ich las viel’을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로 문자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나는 독서광이었다’로 번역한 점에서 좋은 우리말 표현을 찾아 번역하려고 노력한 역자의 면모가 느껴졌다.
<어릿광대>는 도입부와 14개의 장, 결말부로 구성되어 있다. 홍경호는 번호에 의한 장 구분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는데, 장 번호 없이 한 줄 비워놓는 것으로 장 구분을 대신한 예도 있고 그것마저 하지 않은 예도 있다. 종종 과거시제를 현재시제로 번역하는가 하면 작은 오역으로 인해 내용 전개가 어색한 경우도 간혹 발견된다. 가령 Unterscheidung(구별/구분)을 Unterschied(차이)로 착각하여 “die Unterscheidung zwischen innerem und äußerem Glück”(125)을 “내적 행복과 외적 행복의 차이”(425)로 번역한 것, 결말부에서 어릿광대가 자살로 삶에 종지부를 찍을까 고민하면서 “Ein Ende machen”(140)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결말을 짓는다.”(439)라고 번역함으로써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홍경호의 번역은 국내 초역이라는 점과 98년에 한성자의 번역이 나오기까지 약 10년 동안 홀로 이 작품의 국내 수용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원문의 장 번호에 의한 구분을 간과한 점, 시제 번역 및 사소한 오역으로 인해 간혹 의미 전달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이런 오역들은 이후의 번역자들에 의해 대부분 개선되었다.
한성자의 번역은 토마스 만의 단편 여덟 작품이 실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권을 통해 출판되었다. 단편선 편집자 안삼환의 “<길 잃은 시민> 토마스 만의 고뇌”라는 제목의 작품 해설에 <어릿광대>에 대한 해설도 곁들여 있어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는데, 역자가 여럿인 단편집이라 역자 본인의 번역에 대한 변(辯)을 들을 수 없는 점은 아쉽다. 한성자 번역의 특징은 독일식 표현방식을 살리는 번역, 즉 직역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소설 곳곳에서 그런 면모가 드러나는데, 먼저 소설의 맨 마지막 장면을 살펴보자.
“Ich höre auf zu schreiben, ich werfe die Feder fort, - voll Ekel, voll Ekel! - Ein Ende machen: aber wäre das nicht beinahe zu heldenhaft für einen >Bajazzo<?”(140)
소설의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결말부에서도 서술자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대해 말하는데, 그런 혐오감으로 인해 이제 글쓰기를 멈추고 자살할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또 그것은 어릿광대로서는 너무 영웅적인 행동일 거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한성자와 박종대의 번역을 비교해보자.
“이제 쓰는 걸 멈추겠다. 나는 펜을 던져버린다. 완전한 구토, 구토다! 끝을 낸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어릿광대>에게는 거의 영웅 같은 짓이 아닐까?”(한성자, 346) “나는 이제 펜을 던지고 글쓰기를 끝낸다. 역겹고 구역질 난다.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은 어릿광대에겐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박종대, 372)
한성자는 ‘voll Ekel, voll Ekel!’을 가능한 문자 그대로 ‘완전한 구토, 구토다!’로 번역했고 박종대는 ‘역겹고 구역질 난다’라고 풀어서 번역했다. ‘Ein Ende machen’도 한성자는 ‘끝을 낸다는 것’으로 직역했는데, 박종대는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으로 의역했다. 문장 초반부 번역에서도 한성자는 원문 순서에 따라 번역했고, 박종대는 ‘펜을 던지고 글쓰기를 끝낸다’로 문장 순서를 바꾸어서 번역했다. ‘heldenhaft’를 둘러싼 문장의 후반부에 대한 번역에서도 한성자는 ‘영웅 같은 짓이 아닐까?’라고 번역한 반면, 박종대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로 번역했다. 전반적으로 박종대는 가독성에 중점을 두면서 의역을 추구했다면, 한성자는 원문을 중시하며 직역을 추구했다고 하겠다.
번역상의 이런 차이는 어릿광대가 아무런 직업 없이 자신이 받은 유산의 이자로 생활하면서 산책과 문학작품 독서, 극장이나 음악회 방문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자기 삶의 방식에 의문을 품으면서 자신이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무위도식하면서 시간만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젊은 토마스 만 자신의 고민이기도 하다.) “Wieder einmal ein Tag zu Ende, ein Tag, dem nicht abzusprechen ist, Gott sei Dank, daß er Inhalt hatte”(124)를 한성자는 “또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알찬 내용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었다.”(327)로 독일어 단어 및 어법을 살려 번역했다면, 박종대는 “또 하루가 갔다. 다행히 알차지 않은 날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날이었다.”(354)로 한국어 표현방식에 중점을 두면서 번역했다.
한편 이 소설에서는 내면 독백 또는 내적 독백의 서술기법이 종종 사용된다. 내면 독백은 “인물의 의식상태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서술기법”[4]으로 일인칭 형식과 현재시제를 사용하며 인물의 의식을 직접 재현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어릿광대는 여러 나라를 여행한 후 독일의 중소도시에 정착하여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산에 의지하여 시민적인 직업생활을 멀리 한 채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일인칭 서술자는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여러 주, 여러 달이 지나갔다고 과거시제로 서술하다가, 서술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 사고선이 나오는데, “Langeweile? 지루함?”이라는 아주 짤막한 질문을 던진 후에는 그곳에서의 자기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현재시제로 회상한다.
“[...] du sitzest am Fenster, rauchst Zigaretten, und unwiderstehlich beschleicht dich ein Gefühl der Abneigung von aller Welt und dir selbst; die Ängstlichkeit befällt dich wieder, die übelbekannte Ängstlichkeit, und du springst auf und machst dich davon, um dir auf der Straße mit dem heiteren Achselzucken des Glücklichen die Berufs- und Arbeitsleute zu betrachten, die geistig und materiell zu unbegabt sind für Muße und Genuß.”(122)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일도 있으며 세상 전체와 너 자신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혐오감이 네 마음을 파고들 때도 있다. 불안이, 그 고약한 불안이 다시 너에게 엄습해 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너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 거리의 직장인들과 노동자들을 쳐다보며 행복한 자로서 경쾌하게 어깨를 으쓱거려 보는 것이다. 그들은 여가와 향유를 즐기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324)
내면 독백의 경우 보통 일인칭 형식을 취하는데 여기서는 이인칭 형식(du)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인칭은 일인칭 화자가 자신을 상대화한 것일 뿐 일인칭 화자다. 결국 일인칭 ‘나’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것이다. 한성자는 내면 독백의 기능, 즉 독백하는 이의 의식을 직접 재현한다는 서술 취지를 살려 현재형과 이인칭으로 번역했다. 박종대가 내면 독백을 의식하지 못한 듯 이 부분을 과거시제로 번역하고 이인칭 대명사를 일인칭으로 번역한 점[5]과 비교할 때 한성자의 작품 이해가 돋보인다. 다만 여기서 마지막 두 문장을 ‘것이다’라는 종결형으로 끝맺고 있는데, 전달의 직접성 면에서 볼 때 ‘~한다’가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성자는 11장 초반부에서 어릿광대가 4개월 전에 있었던 뜻하지 않은 이상한 날에 대해 회상하는 내면 독백 장면에서는 ‘~한다’체로 번역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푸르게 빛나는 가느다란 선이 창문의 커튼 사이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어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된다. 깜짝 놀란 네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떨리는 햇빛의 파도가 너를 향해 밀려오고 동시에 너는 거리의 온갖 소음들 사이로 새들이 수다스럽게 활발히 지저귀는 것을 듣는다.”(330-331)
한성자의 번역은 토마스 만의 문학에 대한 높은 이해도에 근거한 원문에 충실한 직역의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겠다.
박종대는 <어릿광대>를 포함하여 토마스 만의 단편 12편을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 3권 <토마스 만>을 통해 발표했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오랫동안 번역을 업 삼아 오면서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고 있”(421)다고 말하는데, 번역에서 완벽성을 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자와 시대에 따른 번역의 변화와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고 흥미로운 작업이라 생각된다. 앞에서 한성자 번역과의 비교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박종대 번역의 특징은 가독성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의 번역은 가독성이 높아 내용 전달이 잘 되는 장점이 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시민적 행동력 및 권력을 상징하는 아버지와 예술적이고 감각적 삶을 추구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부닥쳤을 때 자신의 시선이 어머니 쪽을 향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또 “Nicht daß ich in meinem äußeren Wesen ihr gleich gewesen wäre”라고 말하는데, 박종대는 이를 “그렇다고 내 외적 성향이 어머니와 비슷하지는 않았다.”(336)로 번역했다. 이는 “그렇다고 해서 외적인 생활에 있어서 나라는 존재가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한성자, 307)라는 한성자의 번역이나 “나는 외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어머니를 꼭 닮은 것은 아니었다.”(김륜옥, 190)는 김륜옥의 번역과 비교해 볼 때 내용이 깔끔하게 잘 전달된다 하겠다.
그런데 박종대는 가독성과 내용 전달의 수월성을 위해 때론 문장을 단순화하여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 홍경호의 번역에서 살펴본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한 박종대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다 지나 놓고 나서 품위 있게 결론 내리자면, 나는 내 인생과 그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구역질 나는 혐오감이 목을 조르고, 나를 몰아 대고, 나를 흔들더니 다시 내팽개친다. 물론 어쩌면 이 가소롭고 하찮은 일을 조만간 서둘러 해결한 뒤 재빨리 도망치는 데 필요한 원심력도 이 구역질이 제공할지 모른다.”(333)
원문에서 서술자는 삶/인생과 혐오감에 대해 이런저런 부가적인 표현들을 동원하여 자못 격정적으로 풀어놓고 있는데, 박종대는 분위기와 내용 전달에 필요한 부분만 남겨 놓고 다른 것들은 가지를 쳐내는 식으로 번역했다. 한글 파일의 문서정보 기능을 이용하여 조회해 보면 박종대의 경우 공백 포함 글자 수가 171자이고, 홍경호, 한성자, 김륜옥은 각각 231자, 218자, 315자이다. 박종대 번역의 분량이 다른 역자들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김륜옥 번역본과는 글자 수 차이가 무려 144자나 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번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 원문과 각 역자의 번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Mein Gott, wer hätte es gedacht, wer hätte es denken können, daß es ein solches Verhängnis und Unglück ist, als ein >Bajazzo< geboren zu werden!...”(140)
홍경호: “정말 ‘어릿광대’로 태어나는 것이 이런 숙명, 이런 불행일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439) 한성자: “맙소사, 누가 이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어릿광대>로 태어난 것이 이처럼 절망적인 숙명이며 불행이라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347) 박종대: “빌어먹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어릿광대로 태어난다는 것이 이런 액운과 불행일지 말이다.”(372) 김륜옥: “맙소사, ‘어릿광대’로 태어나는 것이 이처럼 치명적인 운명이며 불행인 줄 누가 생각했겠으며,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243)
원문의 ‘gedacht’와 ‘denken können’을 다른 역자들은 다 살려서 번역했고, 박종대는 그 둘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이나 했을까’로 번역했다.
박종대의 가독성 추구는 한편 좋은 번역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다른 한편 종종 원문의 단순화 내지는 축소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김륜옥의 번역은 토마스만독회에서 펴낸 <토마스 만 단편 전집1>을 통해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만의 단편 1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토마스만독회는 앞으로 총 5권 분량으로 만의 단편들을 다 출판할 계획임을 대표 역자인 안삼환은 밝히고 있다. 박종대는 가독성을 중시하여 간혹 문장을 단순화하여 번역했다면 김륜옥은 반대로 원문에 없는 말들도 넣어가면서 내용을 풀어서 번역했다. 그 결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 첫 문장에 대한 박종대의 번역은 글자 수가 171자인데, 김륜옥의 번역은 315자이다. 이제 김륜옥의 번역을 살펴보자.
“지나간 모든 세월을 뒤돌아보며 마지막으로 그리고 품위 있는 결론으로 말하건대, 사실 그 모든 세월이 이젠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삶이, ― 아니, 내 삶이 ― 나 자신에게 불러일으키는 혐오감, ‘그 모든 것’, ‘그 전체’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이 혐오감 말이다. 구토가 날만큼 나를 역겹게 하고, 놀라 펄쩍 뛰어 일어서게 하고, 역겨워 온 몸을 떨게 하다가 다시 매몰차게 내동댕이치며 마냥 비참하게 만드는 혐오감. 어쩌면 조만간 한번 내가 그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걱정거리들을 서둘러 끝내버리고, 그냥 도망쳐버리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도약의 힘을 가져다줄 혐오감.”(185)
‘지나간 모들 세월을 뒤돌아보며’나 ‘구토가 날만큼’, ‘역겨워’, ‘매몰차게’, ‘비참하게’ 같은 표현들은 원문에 없는 것들이다. 역자가 작품을 깊이 이해한 결과 행간에 들어있는 내용까지 넣어서 번역한 것으로 이해된다. 추가적인 내용들로 인해 분량이 늘어나면서 서술자의 파토스가 경감될 듯도 한데, 오히려 추가된 형용사들이 그 반대의 결과를 유발한다. 그리고 문장 후반부의 Ekel을 부연하여 설명하는 부분에서 김륜옥은 두 문장을 연속적으로 ‘혐오감.’으로 끝냄으로써 원문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내면 독백 장면에 대한 번역에서도 김륜옥은 작품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여준다. 한성자의 번역에서 언급했던 11장 초반부에서 어릿광대가 어느 이상한 날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에 대한 원문과 김륜옥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 eines Morgens aber beim Erwachen bemerkst du mit ungläubigen Augen, daß ein schmaler Strief von leuchtendem Blau zwischen den Fenstervorhängen hindurch in dein Zimmer blitzt. Ganz erstaunt springst du aus dem Bette, du öffnest das Fenster, eine Woge von zitterndem Sonnenlicht strömt dir entgegen, und zugleich vernimmst du durch alles Straßengeräusch hindurch ein geschwätziges und munteres Vogelgezwitscher, [...]”(127)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두 눈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 푸르게 빛나는 가느다란 줄무늬가 창문의 커튼 사이를 뚫고 방 안으로 반짝이며 들어온다.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떨리는 햇빛의 파도가 밀려들어오고, 동시에 거리의 온갖 소음들 사이로 새들이 수다를 떨며 활기차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221)
김륜옥은 내면 독백의 서술기법에 걸맞게 현재형으로 그리고 ‘~한다’체로 번역함으로써 인물의 내면을 잘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원문의 이인칭 대명사들인 du와 dir를 아예 번역하지 않았는데, 그로 인해 내면 전달의 직접성이 더욱 살아난다. 독자는 어릿광대가 보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대로 똑같이 보고 생각하게 된다.
김륜옥의 번역에서는 토마스만독회 회원으로서 장기간 작가를 연구한 연구자다운 면모가 돋보이는데, 다른 한편 원문의 행간에 들어있는 내용까지 번역에 넣는 번역방식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의구심을 낳기도 한다.
3. 평가와 전망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어릿광대>에 대한 4편의 번역본은 제각각 분명한 특징을 보여준다. 같은 소설에 대한 다양한 번역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는 흥미로운 사례라 할 만하다. 다음에 나올 번역은 어떤 특징을 보여줄지 자못 기대가 된다.
끝으로 이 단편에 대한 해설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단편에서는 자신이 어릿광대일 수 있다는 젊은 토마스 만의 은밀한 두려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목표와 사랑, 정열과 일이 없는 인간의 단순히 유미주의적인 삶이 불러일으키는 공허함이라는 초기 토마스 만의 문제의식이 강하게 제시된다. 토마스 만은 어릿광대라는 유미주의자의 관점에서 시민 세계에 대해 비판하는가 하면(앞에 본문 인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어릿광대는 직장인들과 노동자들이 일하느라 여가를 즐길 능력과 힘이 없는데, 자신은 그럴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의 관점에서 유미주의자를 비판한다(어릿광대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보며 어릿광대 기질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자신을 비난한다). 이로 인해 작품의 이로니적 구조가 만들어지며, 예술과 시민적 삶에 대한 비판이 서로를 상대화한다. 어릿광대에게는 이런 딜레마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가 없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혐오감으로 글을 시작하고 혐오감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공허한 절망에 처해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자신을 어릿광대에 비추어 성찰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시민적 직업윤리를 지닌 작가가 된다. 바로 여기에 이 단편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홍경호(1990): 어릿광대. 금성출판사.
한성자(1998): 어릿광대. 민음사.
박종대(2013): 어릿광대. 현대문학.
김륜옥(2020): 어릿광대. 부북스.
- 각주
- ↑ 네 작품의 역자(출판연도), 번역서명, 출판사는 다음과 같다. <키 작은 신사 프리데만> 박찬기(1959), 환멸의 여인, 대동당; <환멸> 강두식(1959), 펠릭스 크룰의 고백, 환멸, 토니오 크뢰거, 마리오와 마술사, 동아출판사; <죽음> 정경석(1959), 토마스 만 단편집, 법문사; <토비아스 민더니켈> 정경석(1959), 토마스 만 단편집, 법문사.
- ↑ <행복에의 의지> 유영태(1958), (세계)현대문학걸작선집, 신태양사.
- ↑ Thomas Mann(1990): Der Bajazzo. In: Thomas Mann. Gesammelte Werke in dreizehn Bänden. Vol. 8. Frankfurt a. M.: Fischer Taschenbuch Verlag, 106. 이하에서는 본문에 쪽수를 표시한다.
- ↑ 재단법인 한독문학번역연구소 김병옥/안삼환/안문영(2001): 도이치문학용어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301.
- ↑ 박종대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온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 들어와 가슴을 후벼 팠다. 불안이 다시 엄습했다. 내가 예전에 알았던 그 고약한 느낌의 불안이었다. 그럴 경우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서 거리를 오가는 직장인들과 노동자들을 바라보며, 행복한 자의 우쭐한 미소로 어깨를 으쓱했다. 정신적으로건 물질적으로건 여유롭고 한가한 삶을 즐길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351-352)
바깥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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