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의 의지 (Der Wille zum Glück)"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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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종서(1976)| 박종서 역의 <선택된 인간>(1976)]]<span id="박종서(1976)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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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찬기(1960)| 박찬기 역의 <행복으로의 의지>(1960)]]<span id="박찬기(1960)R" />'''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 52권을 통해 <선택된 인간>을 다시 발표하면서 박종서는 번역 텍스트로 S. 피셔 출판사의 1956년 판을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저본 정보를 밝힌 것으로, 이 점에서는 박종서가 이 소설의 번역자 중 유일하다. 번역자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그의 책임감과 열정이 느껴지는 면모이다. 그는 역자 해설에서 이 소설이 “이미 出刊된 바 있으나 이번에 改譯하였음도 아울러 밝히는 바”(535)라고 말하는데, 인명을 비롯하여 어휘를 현대식으로 바꾸고 표현도 가독성을 높이는 쪽으로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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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태의 번역보다 2년 뒤에 발표된 박찬기의 번역은 양문문고에서 <행복으로의 의지>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 외에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다수 담고 있으며 역자는 토마스 만 작품 세계에 관한 길고 상세한 해설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와 작품 해설은 작품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역자는 전체적 설명에 이어 수록된 작품들을 하나하나 간략하게 해설해 준다. 작품은 첫 번째 작품으로 편입되어 있으며 해설 부분에서 역자는 소설의 배경이나 인물 구성, 성격 등에서 작가의 자전적 색채가 짙음을 지적하고, “목적을 달성한 정신과 육체는 그날로 파멸되어서, 일종 그로테스크한 신비성까지 엿보이기는 하지만, 역시 저자의 정관점(靜觀點)이며 냉담한 이로니(諷刺)가 작품에 침착성과 품위를 부여한다”(8)고 설명한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할머니 “Baduhenna”는 “바아두헤나”에서 “바두헤나”로, “페에터”는 “베드로”로 “로오마”는 “로마”로, “크리스트”는 “그리스도”로 바뀌는 등 현대식 표기법이 적용되었다. “나전어”도 “라틴어”로, “교회의 추장(酋長)” 같은 표현도 “교회의 대표자”로 바뀌었다. 한편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어머니 지빌라가 서로의 관계를 모른 채 사랑하는 감정을 느껴 키스하는 장면의 묘사에서, 초판은 “입술을 서로 물고 오랜 침묵이 흘렀다”(151)라고 했는데, 개정판에서는 “입술을 서로 맞대고 오랜 침묵이 흘렀”(431)다고 나온다. 입술을 물었다는 표현은 자칫 입맞춤으로 연상되지 못할 여지가 있었는데, 맞댄다는 표현으로 수정되면서 그런 점이 개선되었다. 지빌라의 태몽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도 개정이 일어난다. 이 꿈은 앞으로의 내용 전개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바, 아들 그레고리우스가 태어나자마자 떠남으로써 그녀에게 아픔을 주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더 큰 아픔을 준다는 내용, 즉 오빠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들 그레고리우스가 버려졌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그녀의 남편이 되는 이중 근친상간을 예시하는 내용이다. 초판에서는 이 “schweren Traum”이 “우울한 꿈”(52)으로 번역됐다가 개정판에서는 “좋지 못한 꿈”(330)으로 바뀌었다. 당사자를 짓누르는 꿈의 성격을 생각할 때 후자가 나은 번역이라 하겠다. 그레고리우스가 교황으로 로마에 입성할 때 축하의 종들이 울릴 때도, 원문의 “von selber”를 종이 “자연히”(14) 울리기 시작했다는 초역이 개정판에서는 종이 “저절로”(292) 울리기 시작했다로 수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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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박찬기의 번역은 유영태의 번역본보다 훨씬 독일어 원본에 가까운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유영태 번역본에 있는 자잘한 오류들이 상당 부분 수정되고 있으며, 특히 주인공 파올로의 성격 특징을 설명하거나 작품에 간간이 등장하는 발화자의 교양과 신분을 암시하는 외국어를 옮기는 부분에서 세심함이 돋보인다. 그리고 많은 점에서 오늘날의 번역본들과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품 말미에 화자가 파올로의 삶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큰 차이를 보여주며, 이는 죽음을 바라보는 역자 관점의 차이로도 확대해 볼 수 있다. 박찬기는 “그렇게 된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의지(意志) - 오직 행복에의 의지, 그것을 품고 그는 오랫동안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행복에의 의지가 채워졌을 때 그는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투쟁도 반항도 없이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이상 살아갈 구실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235) 원문의 “den Tod bezwingen”을 대체로 역자들이 파올로가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의 의지로 죽음을 이겨온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박찬기는 이와 달리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옮기고 있다.  
  
  
3) '''[[#이정태(1990)| 이정태 역의 <선택된 인간>(1990)]]<span id="이정태(1990)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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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현(1971)| 최현 역의 <행복에의 의지>(1971)]]<span id="최현(1971)R" />'''
  
이정태의 번역은 1981년 금성출판사의 <(애장판) 세계문학대전집>을 통해, 1990년에는 같은 출판사의 <(금성판) 세계문학대전집>을 통해 출간되었다. 그의 번역에서 먼저 눈에 띄는 점은 각 장의 제목에 대한 번역 방식이다. 가령 독일어 제목 “Die Aussetzung”을 “아이를 버리다”로, “Die Entdeckung”을 “탄로가 나다”로 번역했다. 독일어의 명사적 표현을 동사적 표현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다. 유럽어는 어떤 복잡한 개념이나 사건을 하나의 명사나 명사구로 압축해서 표현하는 법이 발달한 명사 중심 언어이지만, 한국어는 동사 중심 언어라 동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정태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번역한 것 같다. Die Aussetzung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버리는 사실을 지칭하고, Die Entdeckung은 그레고리우스가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박종서는 이를 각각 “버림 받은 아이”, “누설된 비밀”로 번역했다. 이보다는 이정태의 번역이 단어의 함의를 보다 잘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역자들도 대부분 이정태와 같은 방식을 택한 경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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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나온 최현의 번역 <幸福에의 意志>는 상서각 <세계단편문학대계><토마스 만 단편집>에 포함되어 출판되었고 이중 첫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전반적으로 최현의 번역은 원문과 거리가 크며 주인공의 이름도 파오르로 되어 있고, 많은 부분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번역문들이 보인다. 특히 주인공의 예술성과 사랑이 어두운 병색과 결합되어 있음을 묘사하는 부분들에서 이러한 양가적인 측면이 빠져 열정만 강조하고 우울함은 드러나지 않고(219쪽), 작품 전체의 해석에서도 역자의 자의성이 지나치게 발휘되어 원본에의 충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정태 번역본의 또 다른 특징은 번역이 매끄럽고 가독성이 좋다는 점이다. 특히 토마스 만의 유려한 장문의 문체를 살려서 번역한 것이 돋보인다.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를 끝내고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서술자 클레멘스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이와 같이 오랜 전설을 끝까지 이끌어온 나 클레멘스는, 독자 여러분이 주의를 다해 귀를 기울여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나 스스로 기울인 수고에 대해 여러분이 주시는 감사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겠다.”(283) “이와 같이 충고를 하고 경고를 한 보답으로서 나는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 가운데 나 자신도 포함시켜서, 우리들 모두가 언젠가는 한 번 내가 이야기한 사람들과 함께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빌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284) 아주 긴 문장은 아니지만 한 문장으로 된 원문을 똑같이 한 문장으로 번역했는데, 가독성도 좋아 토마스 만적 문체가 느껴지면서 동시에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도 맛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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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희영(1971)| 강희영 역의 <행복에의 의지>(1971)]]<span id="강희영(1971)R" />'''
  
이정태는 “토마스 만의 생애와 작품”이라는 긴 해설을 통해 이전의 역자들보다는 한 걸음 나아간 작품 이해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전의 역자들은 이중의 근친상간에 중점을 두며 줄거리 위주로 소개했는데, 이정태는 이 소설을 “원죄와 은총의 이야기”(449)로 소개하면서, 서술자에 대한 해설도 덧붙인다. 그는 서술자를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언어의 인간인 토마스 만에게 있어서의 문학 정신”(450)이라고 설명하는데, 그의 이런 작품 이해가 서술자의 자유로운 서술 태도에 대한 번역에서도 잘 반영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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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영은 <독일단편문학대계, 현대편2>에 수십 편의 독일 단편 작품을 편입시키고 있으며, 이중 맨 앞에 이 작품을 위치시키고 있다. 간결한 우리말로 옮겨져 있고 한자를 적게 사용해서 당대의 독자들이 더욱 쉽게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작품 말미의 주인공 파올로가 죽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에 대한 화자의 설명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때 역자는 원문에서보다 ‘의지’를 훨씬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오래도록 죽음을 억눌러 온 것은, 다만 그 의지(意志)로의 의지 – 행복으로의 의지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행복으로의 의지가 충족되었을 때에,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투쟁도 반항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한 아무런 구실도 이제는 가지지 않았으니 말이다.”(36)  
  
4) '''[[#김남경(1995)| 김남경 역의 <선택된 인간>(1995)]]<span id="김남경(1995)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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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영은 때로 역자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번역을 하고 있는데 화자나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강조할 때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파올로의 사랑에 대한 화자의 태도에서 그러하다. 역자는 이 구문을 “때로는 내게는 참말로 불쾌하게 보이는 격정”(15)으로 옮기고 있으며 파올로가 아다의 아버지에게 대답할 때도 “나는 그것을 듣고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19), 혹은 파올로가 연락 없이 뮌헨을 떠난 것을 “그럼 완전히 기분 잡친 일이군요”(20)라고 작품 전체에서 감정과 관련된 해석을 많이 하고 있다. 아다 가족을 “유쾌한” 가족이라고 반복하여 소개한다든지, 날씨 묘사에서도 “불쾌한 잿빛의 뜨거운 초가을의 어느 날”(25)로 옮겨 인물들의 감정과 관련한 번역을 지속하고 있다.
  
1세대 독문학자라 할 수 있는 박종서와 이정태의 번역 이후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지 않던 차에 1995년 <하서세계문학> 54권을 통해 김남경의 번역본이 발표되었다. 기존 세계문학전집의 장정에서 느껴지던 무거운 느낌이 아닌 분홍색의 밝고 예쁜 표지에 이 소설을 타이틀로 한 단독작품의 형태로 출간되었다. 2020년 김현진의 번역이 나오기 전까지 25년 동안, 약 반년 늦게 나온 최호의 번역과 함께 이 소설의 국내 수용에 있어서 큰 역할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남경 번역의 특징은 이전 번역들보다 표현이 좀 더 현대적이고 매끄러워서 동시대 독자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어린 양의 계시에 놀란 프로부스가 말하는 장면에서 “der Stuhl der Welt”를 박종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이정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번역했는데, 김남경은 “세계의 성좌”(262)로 번역했는바, 직역의 방식을 취하면서 원문의 의미를 깔끔하게 전달하였다. 같은 장면에서 어린 양이 프로부스에게 “Euer Gebet ist erhört und die Wahl geschehen.”이라고 말한 것도 박종서는 “당신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닿아서 선출된 것입니다.”로, 이정태는 “당신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셔서 선택된 것입니다.”(218)로 번역했지만, 김남경은 “당신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져 선출이 이루어졌습니다.”(263) 라고 번역했다. 여기서도 원문을 단어 그대로 보충 설명 없이 매끄럽게 번역한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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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정태(1971)| 이정태 역의 <행복에의 의지>(1971)]]<span id="이정태(1971)R" />'''
  
그런데 김남경의 직역 방식은 단점도 드러낸다. 가령 앞에서 언급했던 장의 제목인 Die Entdeckung을 “폭로”라고 번역했는데, ‘탄로가 나다’로 번역한 이정태의 의역에 비해 내용 전달 면에서 불명확하다. 명사가 문장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독일어와 달리 우리 말에서는 동사가 문장의 핵심적 역할을 하기에 ‘폭로’라고 명사만 제시하면 의미가 너무 막연하게 다가온다. Die Aussetzung의 경우에는 김남경도 박종서와 같이 ‘아이를 버리다’로 의역했다. 또 다른 장의 제목인 “Die schlimmen Kinder”를 김남경은 “가련한 아이들”로 번역했는데, 아버지 그리말트 공이 돌아가신 날 남매가 동침하는 것 때문에 붙여진 제목임을 생각할 때 “나쁜 아이들”(박종서)이나 “못된 아이들”(김현진)이 적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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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태의 번역은 박문사 <세계단편문학대계> 중 자연주의 문학 편에 편입되어 있다. 유럽 문학의 여러 단편이 소개되는 가운데 <幸福에의 意志>는 두 번째 독일 작품으로 들어가 있고 “감명깊은 작품”(42)이라고 짤막하게 소개된다. 작품 제목 옆에 전체 제목이 아니라 ‘행복 Glück”이라는 단어 하나가 같이 명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으며 때로 역주를 사용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아직 토마스 만 단편소설에 일관되게 흐르는 단어의 반복이라든가 어휘의 일관성은 이후의 번역본에서처럼 표시 나게 옮겨지지는 않고 있다. 아다를 만나기 전의 파올로를 “힘차고 긴장한 냉정을 유지”(206)하고 있다거나 “야릇하게 긴장한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다고 묘사한다. 남작의 영양을 만날 때는 “기분 나쁜 침착성”(208)을 유지하고 있다고 옮겨 명사나 형용사 사용에서 일관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다의 부탁을 전달할 때도 이어지는 대화이고 동일인을 지칭하는 데도 “부인”, “처녀”로 다르게 옮기고 있다. 아다 아버지에 대한 묘사에서 “금력귀족”(205)으로서 “갑자기 심각했기 때문에 [...]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205)라고 애매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좀 특이한 번역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의지 – 오직 행복에의 의지, 그것을 안고 그는 오랫동안 죽음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행복에의 의지가 이루어졌을 때, 그는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215)라고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서로 억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시에 염원하고 있었다고 옮기고 있어 박찬기와 같은 흐름에 서 있다.  
  
독일어과를 졸업한 번역문학가라는 정보 외에 자세한 역자 정보가 없어서 토마스 만 전공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토마스 만의 생애와 문학”이라는 제법 긴 해설과 상세한 작가 연보를 제공하는 반면에 이 소설을 위한 전문적인 해설은 없었다. 국내 독문학계의 토마스 만 연구를 반영하지 않은 채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번역문학가’라는 역자 소개와 달리 번역 원칙이나 역자의 말은 찾을 수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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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성자(1998)| 한성자 역의 <행복에의 의지>(1998)]]<span id="한성자(1998)R" />'''
  
5) '''[[#김현진(2020)| 김현진 역의 <선택받은 사람>(2020)]]<span id="김현진(2020)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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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자의 번역은 이전의 번역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한글세대가 읽기 쉽도록 가로쓰기를 하고 있으며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인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안에 들어있다. 번역본은 역자의 일관된 문체로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쓰였다. 토마스 만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어휘들을 살려서 번역했으며, 특히 파올로의 사랑이 신체가 병적으로 허약한데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예술적 열정과 동시에 동물적인 열정도 같이 강력하게 담고 있음을 수미일관 분명하게 보여준다. 첫사랑에 대해서는 “뜨겁게 불타는 우울한 마음”(237)으로, 아다에 대한 사랑은 “아주 강력한, 팽팽히 긴장된 차분함”(241)으로, 그리고 화자가 아다의 전갈을 전해주었을 때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가 보여주는, 강력한 경련을 일으킬 만큼 팽팽하게 긴장된 차분감”(252)을 보여주었다고 옮겨 어휘와 문체에서도 파올로 사랑의 특징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파올로가 학교를 옮기는 계기가 된, 종교 시간에 몰래 그린 그림에 대한 설명은 독특한 해석을 보여준다. 이전의 해석이나 이후의 해석들이 그렇듯이 “bis auf einen linken Fuss”를 왼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려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나 한성자는 드물게 “거기에는 왼쪽 발까지 완성된 아주 여자답게 생긴 아름다운 여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람들의 시선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238)라고 옮겨 보다 에로틱한 면을 강조한다. 떠나기 전날 파올로는 트레비 호수에서 “초조해서”(258) 컵을 깨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화자가 보기에는 파올로의 행복에의 의지가 이제까지 “죽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259)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살 구실이 더는 없었다고 옮기고 있다.
  
김현진 역의 <선택받은 사람>은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12권으로 출간되었다. 토마스 만의 “섬세하고 치밀하면서도 매력적인 산문을 어떻게 국내의 독자들에게 전달할지 고민”했으며,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자”(6) 노력했다고 역자는 번역에 임하는 자세를 밝히고 있다. 그의 번역본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토마스 만 전공자에 의한 것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가 번역 및 작품해설에 반영되어서 이전의 번역본들보다 한 단계 나아갔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der Geist der Erzählung을 김현진은 전설이 아닌 이야기의 정령으로 번역했는데, 이 소설의 이야기/서사적 특징에 주목한 점이 다른 번역자들과 특히 구분된다. 이 소설에서는 이중의 근친상간과 속죄, 구원이라는 심각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독자는 읽으면서 자주 웃게 된다. 그것은 이야기의 정령, 즉 서술자 클레멘스가 보여주는 독특한 서술 방식에 의한 것으로, “토마스 만이 만년에 보여준 해학적 글쓰기와 세계관에서 나온 독자적 효과”(420)이다. 서술자는 중요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을 구분하여 보고함으로써 자못 심각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웃음으로 종결짓곤 한다. 항해 중이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와 그 일행이 어느 항구 도시에 접근하다 전투가 벌어져 선원 중 몇 명이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는데, 서술자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Doch waren sie ja nur Nebenpersonen.” 이에 대한 번역자들의 번역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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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박종대(2013)| 박종대 역의 <행복에의 의지>(2013)]]<span id="박종대(2013)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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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대의 번역은 <토마스 만>이라는 제명의 소설 모음집에서 두 번째로 편입되어 있다. 이 번역은 현대의 한국어로 유려하게 번역되어 있고 독자로서는 거의 아무 어려움 없이, 난해하다고 소문난 토마스 만의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 관계, 성격 묘사 등의 까다로운 어휘나 문장들을 현대의 한국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에서 온다. 파올로의 특징을 설명하는 부분 중 “거리두기의 파토스”(44), “강제로 만들어낸 긴장된 차분함”(49) 등이 예라고 할 수 있다. “Pathos der Distanz”는 제목과 마찬가지로 니체와 연결될 수 있는 부분으로 이전에는 “거리의 감정”(박찬기), “소원에의 열정”(이정태), “거리감”(강희영), “거리두기라는 격정”(한성자) 등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외래어로 옮겨 보다 분명하게 철학적, 시대적 연결 가능성을 보여준다. 파올로의 사랑을 설명하는 부분도 “우수에 젖은 열정”(45),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열정”(45), “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관능적인 열정”(55) 등으로 일관성 있게 옮기고 있다. 이러한 역자의 어휘 선택은 예술가 파올로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행복으로의 과도한 의지와 직접 연관됨이 잘 드러나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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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 그러나 그네들은 그리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1976, 392)
 
이정태: 그러나 두 사람은 그리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127)
 
김남경: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조연에 불과했던 것이다.(153)
 
김현진: 그러나 그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한 인물들일 뿐이었다.(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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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기에 큰 차이가 안 느껴질 수도 있지만, 김현진은 ja라는 부사를 살려서 ‘뿐이었다’라고 번역함으로써 이전 세 사람의 건조한 사실 보고식 번역과 결을 달리한다. 여기서 ja는 자신이 말하는 사실에 대한 강조의 의미를 지니는데, 다친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할 뿐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며, 주인공이 항구에 무사히 도착한 사실에 주목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김현진의 번역에서는 서술자의 독특한 태도가 느껴지기에 독자는 미소를 짓게 된다. 이런 식의 해학적 글쓰기 태도가 소설 곳곳에서 나타나는바, 김현진은 그런 뉘앙스를 잘 살려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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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인 부분으로는 아다의 아버지가 빈에서 갑자기 몰락하고 뮌헨으로 온 계기를 “갑자기 퇴폐주의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48)라고 번역한 부분을 들 수 있는데, 원문의 “in Décadence geraten”을 이렇게 옮겼다. 이제까지 이 부분은 대체로 경기가 나빠졌든 혹은 남작의 실패든 경제적인 몰락으로 해석되어 왔고 강희영만이 “타락”(17)했다고 해석했다. 또한 아다 아버지에 대한 파올로의 이 설명만 듣고 화자가 이 가족이 유대인인가를 물어보기 때문에 이 설명 부분은 작가의 반유대적 성향과 연결지어 해석되는 중요한 대화로 여겨진다. 그러나 박종대의 해석은 아다의 아버지가 물질적으로 부유할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조예가 깊어 세기말의 흐름인 데카당스에 빠졌음과 연결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그가 파올로의 예술을 잘 이해하고 있고 딸의 “지속적인 행복”(62)을 위해 처음에는 결혼에 반대하다가 5년 뒤 이를 번복한 배경에 대한 부가적 설명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혹은 후반부에서 화자가 로마에서 아다의 약조를 파올로에게 전해주었을 때 보통 그 말을 간직하거나 새겨두겠다고 번역하는 것과 달리 적극적으로 “나는 그 약속을 지키겠어.”(58)라고 강하게 번역한 부분이나, 5년 만에 만나 아다의 전갈을 전해준 뒤 “그의 무덤덤한 어조”(58)라고 원문에 없는 형용어 설명을 덧붙이거나, 트레비 분수에서 컵을 깼을 때 보통은 예민해서나 신경이 날카로워서라고 번역하는 부분을 “마음이 부산하니까”(64)라고 옮긴 부분들은 역자의 독특한 해석 특징을 보여준다.  
  
각 장의 제목 번역에서도 역자는 의역을 추구하는데, 이는 원문의 내용에 충실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Die Aussetzung은 “아이를 내버리다”로, Die Entdeckung은 “비밀을 알게 되다”로, Die schlimmen Kinder는 “못된 아이들”로 번역함으로써 그 장의 주요 내용이 잘 전달된다. 김현진 번역의 이런 특징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서술자는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eine zugleich entsetzliche und hocherbauliche Geschichte”로 지칭한다. 이는 이중의 근친상간이 벌어지지만 철저한 속죄를 통해 신에 의해 교황으로 선택받는다는 이 소설의 핵심 내용을 지칭한다. 박종서는 “무지막지하고 매우 교훈이 될 수 있는 전설”(1990, 295)로, 이정태는 “매우 두렵고도 교훈이 될 수 있는 전설”(10)로, 김남경은 “정말 무섭고도 동시에 지극히 교화(敎化)적인 전설”(10)로 번역했다. 하지만 김현진은 “경악할 만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교훈적인 이야기”(17)라고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더 소개하자면, 이야기를 다 마친 서술자는 독자가 소설의 이런 내용에서 “es sei zuletzt mit der Sünde ein leichtes Ding”이라고 잘못된 교훈을 끌어낼까 봐 염려한다. 김현진은 이 말을 “죄라는 것은 결국 별것 아니라고”(413)로 번역했다. 반면 박종서는 “죄라는 것은 결국 험한 것이라고”(1976, 523), 이정태는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 편리한 것이라고”(283), 김남경은 “죄라는 것은 결국 가벼운 것이다”(341)로 번역했다.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볼 때 죄가 ‘험한 것’이나 ‘편리한 것’은 아닐 것이고 ‘가벼운 것’일 수도 있겠으나 ‘별것’ 아닌 것이 의미상 가장 정확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현진 번역본의 학술적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 두 가지 발견된다. 하나는 대화가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원문과 달리 행을 바꾸어서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본 정보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토마스 만의 경우 S. 피셔 출판사의 판본만 존재하기에 다른 작가들과 달리 어느 판본을 저본으로 이용했는지 여부가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존과는 다른 번역 제목을 제시했고 원문의 내용을 충실히 전하려 노력한 점, 연구가 병행된 번역이라는 점 등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의 번역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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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현진(2020)| 김현진 역의 <행복을 향한 의지>(2020)]]<span id="김현진(2020)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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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은 <토마스 만 단편 전집 1>의 세 번째 소설로 이 소설을 편입시키고 있다. 김현진의 번역 역시 자연스럽고 잘 읽히며 마찬가지로 이는 토마스 만의 깊은 이해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번역의 특징은 섬세한 설명에 있는데 해석을 풀어서 혹은 새로이 곁들여 접붙이는 데 있다. 이러한 번역행위는 작품이 잘 읽히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파올로가 새 학교에 적응해야 할 때 저항을 하지 않는 태도가 이제껏 “소극적인 태도”(이정태), “피동적인 태도”(강희영, 14), “아주 수동적 태도”(한성자, 236)로 번역되었다면 김현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79)로 옮기고 있고, 부모를 따라 학교를 옮기지 않을 때 “학교를 바꾸면 안 된다고 해서”(81)로 옮기고 있다. 혹은 아다의 아버지 묘사에서도 “그러다가 갑자기 몰락하게 되었대”라고 번역하고 이어 “이제는 곤경에서 벗어나”(84)라고 원문에는 없는 상황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다른 한편 파올로의 연애에 대한 긴장된 태도를 적극적으로 강조해 옮기고 있다. 예를 들어 아다를 화자에게 처음 소개하러 갈 때 보여준 파올로의 “숨막힐 듯이 긴장된 정적”(86)이 아다의 말을 전달했을 때 파올로가 보인 태도에도 똑같은 어휘로 반복된다(99). 김현진은 또한 프로이트에게서 강조된, 세기말의 화두어이자 핵심어 가운데 하나인 “unheimlich”를 화자와 주인공의 관계에 일관된 어휘로 옮긴다. 이 어휘는 최근에 “친근한낯선”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실제 토마스 만의 작품에서도 화자가 주인공과 이제까지의 가까운 관계에서 낯섬을 느끼는 관계에 사용되고 있다. 역자는 이를 잘 드러낸다. 화자가 첫사랑에 빠진 파올로를 “매우 섬뜩하게”(80) 바라보고, 아다와의 연애에 집중하는 주인공 파올로를 볼 때 느끼는 “섬뜩함”(89), “섬뜩한 정적의 분위기”(91)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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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전공자인 역자는 후기에서 “보잘 것 없는 에피소드를 끌고 나가면서 한 예술가 기질의 인간의 집념과 그의 죽음과의 투쟁을 형상화내고 있는 작가의 역량”(378)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래의 번역문은 작품의 말미 부분에 해당이 되는데 주인공 파올로의 죽음의 성격을 정리하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박종대와 김현진은 모두 원문을 살리면서 각자의 개성이 담긴 언어로 번역해내고 있다. 김현진은 죽을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좀더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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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예정된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오래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의지, 즉 행복에의 의지가 아니었던가? 행복에의 의지가 충족되자 그는 투쟁이나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다. 더는 살아야 할 구실이 없었던 것이다.(박종대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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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죽음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의지, 오직 행복을 향한 그 의지가 아니었던가? 행복을 향한 자신의 의지가 충족되자, 그는 어떠한 투쟁도 저항도 할 수 없이 죽어야만 했다. 그에게는 살기 위한 구실이 더는 없었던 것이다.(김현진 108-109)
  
 
'''3. 평가와 전망'''
 
'''3. 평가와 전망'''
  
토마스 만의 이 소설은 박종서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래 여러 번역자를 거치면서 번역의 정확도가 많이 개선되었다. 특히 최근에 나온 김현진의 번역본은 ‘한국토마스만학회’의 독회를 통한 공동연구 및 작품 이해가 뒷받침되어 나온 것으로, 질 좋은 번역을 위한 새로운 방식 및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어떤 번역에도 오역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 및 해석이 나오면 그에 발맞추어 번역도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는 평범한 사실을 되새겨보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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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토마스 만이 본격적으로 번역되던 50년대 말부터 번역이 시작되어 이후에도 자주 번역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말 이후 독문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번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때, 다른 번역본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독일어 원전에서 옮겨지지는 않았다.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로 한 중역본의 시기를 거쳐 독일어 원전에서 한국어로 직접 번역하는 시기로 이행되었다. 앞으로 3개 국어가 가능한 비평가가 나와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하는 것도 번역 비평과 관련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어느 나라든지 번역사의 초창기에는 중역의 시기를 거친 경우가 많기에 이에 대한 일방적 비판을 하기보다는 특정 시기의 번역행태와 양식, 문화로서 인정하고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70년대 이후 한글세대가 등장하면서 우리말이 자연스러운 번역이 시작되었다. 특히 한성자 이후로 한국 독자들이 작품의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해도가 높고 가독성도 높은 번역본들이 복수로 나왔다. 박종대, 김현진의 번역본은 상당히 완결성이 높은 번역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번역본들이 세심한 부분들에서 혹은 문체상의 차이로 주로 구분이 된다면, 앞으로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려면 보다 새로운 해석에 기반한, 혹은 새로운 독자층을 염두로 두고 새로운 언어로 옮겨진, 보다 차별성을 염두에 둔 번역이 나와야 할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종서(1969): 선택된 인간. 정음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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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태(1958): 행복의 의지. 신태양사.<br>
박종서(1976): 선택된 인간. 삼성출판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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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기(1960): 행복으로의 의지. 양문사.<br>
이정태(1990): 선택된 인간. 금성출판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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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1971): 행복에의 의지. 상서각.<br>
김남경(1995): 선택된 인간. 하서출판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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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영(1971): 행복에의 의지. 일지사.<br>
김현진(2020): 선택받은 사람. 나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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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태(1971): 행복에의 의지. 박문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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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자(1998): 행복에의 의지. 민음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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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대(2013): 행복에의 의지. 현대문학.<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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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2020): 행복을 향한 의지. 부북스.<br>
  
<div style="text-align: right">권선형</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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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최윤영</div>
  
  

2023년 6월 22일 (목) 08:42 판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소설


작품소개

1896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이다. 남미 출신의 화가 파올로는 뮌헨에서 한 남작의 딸 아다에게 청혼을 하나 그의 유약한 건강 상태를 이유로 아다의 부모에게 거절당한다. 그는 이후 여전히 건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아다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지키고 자신의 행복에의 의지를 밀고 나간다. 5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 정열적 사랑에 매달리는 딸에게 굴복하여 남작은 결국 결혼을 허락하고 파올로는 뮌헨으로 돌아와 아다와 결혼하지만 그 다음 날 사망한다. 친구인 화자는 행복에의 의지가 이제까지 그를 지탱해 주었지만 이제 이것이 이루어지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서술한다. 토마스 만의 초기 작품으로서 에로스와 타나토스, 예술가, 병, 이국성과 시민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1960년에 박찬기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양문사).


초판 정보

Mann, Thomas(1896): Der Wille zum Glück. In: Simplicissimus 1(21-23). <단행본 초판> Mann, Thomas(1898): Der Wille zum Glück. In: Der kleine Herr Friedemann. Novellen. Berln: S. Fischer, 67-100.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幸福의 意志 (世界)現大文學傑作選集 토-마스 만 兪榮太(유영태) 1958 新太陽社 16-28 편역 완역 잡지를 단행본 형태로 출판한 것으로 추정됨
2 幸福으로의 意志 幸福으로의 意志 陽文文庫 82 토오마스 만 朴贊機(박찬기) 1960 陽文社 15-36 편역 완역
3 幸福에의 意志 토마스 만 短篇集 世界短篇文學大系 15 토마스 만 崔鉉(최현) 1971 尙書閣 207-236 편역 완역
4 幸福에의 意志 獨逸短篇文學大系, 現代篇 2 獨逸短篇文學大系 3 토마스 만 姜熙英(강희영) 1971 一志社 14-28 편역 완역
5 幸福에의 意志 (컬러版)世界短篇文學大系 5 自然主義文學 (컬러版)世界短篇文學大系 5 토마스 만 李鼎泰(이정태) 1971 博文社 203-215 편역 완역
6 幸福으로의 意志 베니스에서의 죽음 瑞文文庫 34 토마스 만 朴贊機(박찬기) 1972 瑞文堂 15-36 편역 완역
7 幸福에의 意志 토마스 만 短篇集 世界短篇文學全 12 Thomas Mann 池明烈; 李甲圭(지명렬; 이갑규) 1974 汎潮社 276-301 편역 완역 초판
8 幸福에의 意志 토마스 만 短篇集 世界短篇文學全集 12 Thomas Mann 池明烈; 李甲圭(지명렬; 이갑규) 1975 汎潮社 276-301 편역 완역 중판, 실린 작품 증가
9 幸福에의 意志 世界短篇文學大全集 5 世界短篇文學大全集. 自然主義文學 5 토마스 만 李鼎泰(이정태) 1975 大榮出版社 171-183 편역 완역
10 辛福에의 意志 豫言者의 집에서 汎友小說文庫 16 토마스 만 朴煥德(박환덕) 1976 汎友社 62-89 편역 완역 초판
11 幸福에의 意志 世界代表短篇文學全集 9 世界代表短篇文學全集 9 토마스 만 李鼎泰(이정태) 1976 正韓出版社 213-232 편역 완역
12 幸福에의 意志 世界短篇文學大全集, 5. 自然主義文學 世界短篇文學大全集 5 토마스 만 확인불가 1979 庚美文化社 151-163 편역 완역
13 幸福에의 意志 토마스 만 短篇集 世界短篇文學大系 15 토마스 만 崔鉉(최현) 1980 尙書閣 207-236 편역 완역 작품(프리데만)과 연보가 추가된 중판
14 행복으로의 의지 토마스 만 단편집 서문문고 34 토마스 만 박찬기 1997 서문당 17-46 편역 완역 개정판
15 행복에의 의지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한성자 1998 민음사 235-260 편역 완역 1998년도 초판 1쇄 발행 당시에는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대략 2003년부터는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제목이 변경된 것으로 보임. 그 이후로는 이 제목으로 고정된 채 쇄를 거듭했기에 1쇄 당시의 제목이 아닌 본 제목으로 기록함
16 행복에의 의지 작은이의 사랑이야기 토마스 만 차은숙 1998 푸른샘 215-245 편역 완역 목차에 해당 작품의 표기 누락
17 행복에의 의지 예언자의 집에서 범우문고 184 토마스 만 박환덕 2003 범우사 65-96 편역 완역 2판
18 행복을 향한 의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단편소설 2 토마스 만 최은선 2004 일송미디어 8-38 편역 완역
19 행복에의 의지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토마스 만 윤순식 2009 누멘 88-88 편역 편역
20 행복하고 싶은 마음 토니오 크뢰거 외 위즈퍼니 세계 문학 3 토마스 만 이지혜; 박성원 2009 교원 169-198 편역 완역 아동청소년문학
21 행복에의 의지 토마스 만 세계문학 단편선 3 토마스 만 박종대 2013 현대문학 43-65 편역 완역
22 행복을 향한 의지 토마스 만 단편 전집1 부클래식 82 토마스 만 김현진 2020 부북스 78-109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토마스 만이 1896년에 <짐플리치시무스>에 처음 발표한 <행복에의 의지>는 초기 단편소설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1958년에 유영태가 처음으로 <행복의 의지>란 제목으로 번역하였고(신태양사), 뒤이어 1960년에 박찬기가 번역하였다. 이후 1971년에 최현, 강희영, 이정태가, 1974년에 지명렬이, 1976년에 박환덕이 번역해 이 작품은 7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번역된 토마스 만의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한동안 번역이 뜸하다가 90년대 말에 다시 활발하게 출판이 되었는데, 1997년 박찬기의 재판 출판을 계기로 1998년에 한성자와 차은숙이 새로 번역하였고, 2000년대에 최은선(2004), 윤순식(2009), 이지혜(2009), 박종대(2013), 김현진(2019)이 번역하여 맥을 잇고 있다. 1958년경 토마스 만의 작품이 본격 번역되는 시작기에 진즉 포함되어 최근까지 열다섯 명에 육박하는 역자가 번역을 시도할 정도로 토마스 만의 초기 작품 중에서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행복의 의지’로 최초로 번역된 후,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상기시키는 ‘행복에의 의지’, 혹은 ‘행복으로의 의지’ 등으로 번역되어 전치사를 통해 명사와 명사가 연결된 형태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다가, 가장 최근의 번역은 ‘행복하고 싶은 마음’, ‘행복을 향한 의지’로 보다 한국어에 자연스러운 형용어적 제명을 취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제목뿐 아니라 번역 텍스트에서도 현대 한국어에 잘 적응된, 잘 읽히는 번역본들이 나왔다. 이는 그간의 토마스 만 독서와 학술 연구를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동시에 전문 번역가들이 등장한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

이 작품은 1960년에 박찬기의 번역본 표제로서 책 제목으로 출판된 예는 한 번 있지만, 이때에도 독립된 단행본이 아니라 다른 소설들과 같이 엮어 출판되었다(박찬기의 번역이 1972년에 서문당으로 출판사를 바꾸어 출판되었을 때는 표제작이 <행복에의 의지>에서 <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변경되었다). 보통 다른 작품들과 같이 묶여 세계문학이나 독일문학의 단편 모음집 안에 포함되어 출판되다가 최근에는 범위를 더 좁혀 토마스 만의 단편 소설집 안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세계현대문학걸작선집>이나 <세계문학대계> 등에 소개될 때도 많은 경우 첫 번째 작품으로 번역이 되거나 독일을 대표하는 단편소설로 번역되는 등 큰 주목을 받아왔었다. 토마스 만의 단편집에 포함되어 번역될 때는 출판연도순으로 작품 순서를 정하는 경우가 많아 중간에 삽입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다른 작품이 표제작으로 선정되어 주목을 과거보다 덜 받고 있다. 아직 이 작품에 대한 단독 연구논문은 나오지 않았고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들과 같이 해설되었다.


2. 개별 번역본 고찰

토마스 만 단편집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전체 해설(1998)을 맡은 안삼환이 밝히듯 <행복에의 의지>는 무명의 토마스 만을 일약 문단의 인정을 받게 만든 작품이지만 토마스 만의 작품치고는 가볍게 읽힌다. 그리고 다른 토마스 만 작품들에 비하여 주제적으로나 내용상 특별히 번역에 까다로움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즉 다른 작품들처럼 중의적, 다의적 어휘가 많거나 혹은 복잡하거나 긴 장문들이 두드러지거나 사상의 전개나 소설의 구성 혹은 상호텍스트성 등이 특별한 난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은 화자가 친구의 시선으로 파올로의 삶과 사랑, 예술과 죽음을 묘사하고 있으며, 크게 독일 북부의 학창 시절, 남부 도시 뮌헨 시절 그리고 로마 시절로 나뉘어 있다.


1) 유영태 역의 <행복의 의지>(1958)

이 작품은 1958년에 초역이 출판되었다. 유영태의 번역은 <幸福의 意志>란 제목을 달고 있으며 역자는 번역의 초두에 “戀人의 幸福만을 꿈꾸던 藝術家, 그는 婚禮의 밤에 조용히 죽어 갔다.”라고 작품을 요약하고 있다. 즉 주인공이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연인의 행복을 꿈꾸던 예술가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의 번역들과는 차이를 보여준다. 유영태의 번역은 많은 측면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 독자를 위해 원문에 많은 변형을 가하고 있다. 즉 이 번역은 한국 최초의 번역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고 작품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며, 부분적으로 혹은 세세한 부분에서는 원문과 거리가 상당히 벌어진다. 특히 인물 묘사에서나 상황 혹은 배경 묘사에서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 자주 보인다. 화자가 전하는 마지막 부분의 말은 다음처럼 번역되어 작품의 전체적 의미를 당대의 문체로 설명해준다.

그렇게 되지 않고는 안될 것이었다. 그가 오랜 동안 죽음에 이겨온 것은 의지(意志)로, 한마디로 말하며는, 행복에의 의지가 아니었던가. 그 행복에의 의지가 이루어졌을 때, 그는 죽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싸움도 저항도 없어져서 죽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는 살아갈 이유를 벌써 잃어버렸던 것이다.(28) 


2) 박찬기 역의 <행복으로의 의지>(1960)

유영태의 번역보다 2년 뒤에 발표된 박찬기의 번역은 양문문고에서 <행복으로의 의지>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 외에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다수 담고 있으며 역자는 토마스 만 작품 세계에 관한 길고 상세한 해설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와 작품 해설은 작품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역자는 전체적 설명에 이어 수록된 작품들을 하나하나 간략하게 해설해 준다. 이 작품은 첫 번째 작품으로 편입되어 있으며 해설 부분에서 역자는 소설의 배경이나 인물 구성, 성격 등에서 작가의 자전적 색채가 짙음을 지적하고, “목적을 달성한 정신과 육체는 그날로 파멸되어서, 일종 그로테스크한 신비성까지 엿보이기는 하지만, 역시 저자의 정관점(靜觀點)이며 냉담한 이로니(諷刺)가 작품에 침착성과 품위를 부여한다”(8)고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박찬기의 번역은 유영태의 번역본보다 훨씬 독일어 원본에 가까운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유영태 번역본에 있는 자잘한 오류들이 상당 부분 수정되고 있으며, 특히 주인공 파올로의 성격 특징을 설명하거나 작품에 간간이 등장하는 발화자의 교양과 신분을 암시하는 외국어를 옮기는 부분에서 세심함이 돋보인다. 그리고 많은 점에서 오늘날의 번역본들과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품 말미에 화자가 파올로의 삶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큰 차이를 보여주며, 이는 죽음을 바라보는 역자 관점의 차이로도 확대해 볼 수 있다. 박찬기는 “그렇게 된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의지(意志) - 오직 행복에의 의지, 그것을 품고 그는 오랫동안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행복에의 의지가 채워졌을 때 그는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투쟁도 반항도 없이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이상 살아갈 구실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235) 원문의 “den Tod bezwingen”을 대체로 역자들이 파올로가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의 의지로 죽음을 이겨온 것으로 해석하는 반면, 박찬기는 이와 달리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옮기고 있다.


3) 최현 역의 <행복에의 의지>(1971)

1971년에 나온 최현의 번역 <幸福에의 意志>는 상서각 <세계단편문학대계>의 <토마스 만 단편집>에 포함되어 출판되었고 이중 첫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전반적으로 최현의 번역은 원문과 거리가 크며 주인공의 이름도 파오르로 되어 있고, 많은 부분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번역문들이 보인다. 특히 주인공의 예술성과 사랑이 어두운 병색과 결합되어 있음을 묘사하는 부분들에서 이러한 양가적인 측면이 빠져 열정만 강조하고 우울함은 드러나지 않고(219쪽), 작품 전체의 해석에서도 역자의 자의성이 지나치게 발휘되어 원본에의 충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4) 강희영 역의 <행복에의 의지>(1971)

강희영은 <독일단편문학대계, 현대편2>에 수십 편의 독일 단편 작품을 편입시키고 있으며, 이중 맨 앞에 이 작품을 위치시키고 있다. 간결한 우리말로 옮겨져 있고 한자를 적게 사용해서 당대의 독자들이 더욱 쉽게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작품 말미의 주인공 파올로가 죽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에 대한 화자의 설명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때 역자는 원문에서보다 ‘의지’를 훨씬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오래도록 죽음을 억눌러 온 것은, 다만 그 의지(意志)로의 의지 – 행복으로의 의지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행복으로의 의지가 충족되었을 때에,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투쟁도 반항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한 아무런 구실도 이제는 가지지 않았으니 말이다.”(36)

강희영은 때로 역자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번역을 하고 있는데 화자나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강조할 때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파올로의 사랑에 대한 화자의 태도에서 그러하다. 역자는 이 구문을 “때로는 내게는 참말로 불쾌하게 보이는 격정”(15)으로 옮기고 있으며 파올로가 아다의 아버지에게 대답할 때도 “나는 그것을 듣고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19), 혹은 파올로가 연락 없이 뮌헨을 떠난 것을 “그럼 완전히 기분 잡친 일이군요”(20)라고 작품 전체에서 감정과 관련된 해석을 많이 하고 있다. 아다 가족을 “유쾌한” 가족이라고 반복하여 소개한다든지, 날씨 묘사에서도 “불쾌한 잿빛의 뜨거운 초가을의 어느 날”(25)로 옮겨 인물들의 감정과 관련한 번역을 지속하고 있다.


5) 이정태 역의 <행복에의 의지>(1971)

이정태의 번역은 박문사 <세계단편문학대계> 중 자연주의 문학 편에 편입되어 있다. 유럽 문학의 여러 단편이 소개되는 가운데 <幸福에의 意志>는 두 번째 독일 작품으로 들어가 있고 “감명깊은 작품”(42)이라고 짤막하게 소개된다. 작품 제목 옆에 전체 제목이 아니라 ‘행복 Glück”이라는 단어 하나가 같이 명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으며 때로 역주를 사용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아직 토마스 만 단편소설에 일관되게 흐르는 단어의 반복이라든가 어휘의 일관성은 이후의 번역본에서처럼 표시 나게 옮겨지지는 않고 있다. 아다를 만나기 전의 파올로를 “힘차고 긴장한 냉정을 유지”(206)하고 있다거나 “야릇하게 긴장한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다고 묘사한다. 남작의 영양을 만날 때는 “기분 나쁜 침착성”(208)을 유지하고 있다고 옮겨 명사나 형용사 사용에서 일관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다의 부탁을 전달할 때도 이어지는 대화이고 동일인을 지칭하는 데도 “부인”, “처녀”로 다르게 옮기고 있다. 아다 아버지에 대한 묘사에서 “금력귀족”(205)으로서 “갑자기 심각했기 때문에 [...]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205)라고 애매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좀 특이한 번역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의지 – 오직 행복에의 의지, 그것을 안고 그는 오랫동안 죽음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행복에의 의지가 이루어졌을 때, 그는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215)라고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서로 억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시에 염원하고 있었다고 옮기고 있어 박찬기와 같은 흐름에 서 있다.


6) 한성자 역의 <행복에의 의지>(1998)

한성자의 번역은 이전의 번역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한글세대가 읽기 쉽도록 가로쓰기를 하고 있으며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인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 안에 들어있다. 번역본은 역자의 일관된 문체로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쓰였다. 토마스 만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어휘들을 살려서 번역했으며, 특히 파올로의 사랑이 신체가 병적으로 허약한데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예술적 열정과 동시에 동물적인 열정도 같이 강력하게 담고 있음을 수미일관 분명하게 보여준다. 첫사랑에 대해서는 “뜨겁게 불타는 우울한 마음”(237)으로, 아다에 대한 사랑은 “아주 강력한, 팽팽히 긴장된 차분함”(241)으로, 그리고 화자가 아다의 전갈을 전해주었을 때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가 보여주는, 강력한 경련을 일으킬 만큼 팽팽하게 긴장된 차분감”(252)을 보여주었다고 옮겨 어휘와 문체에서도 파올로 사랑의 특징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파올로가 학교를 옮기는 계기가 된, 종교 시간에 몰래 그린 그림에 대한 설명은 독특한 해석을 보여준다. 이전의 해석이나 이후의 해석들이 그렇듯이 “bis auf einen linken Fuss”를 왼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려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나 한성자는 드물게 “거기에는 왼쪽 발까지 완성된 아주 여자답게 생긴 아름다운 여성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람들의 시선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238)라고 옮겨 보다 에로틱한 면을 강조한다. 떠나기 전날 파올로는 트레비 호수에서 “초조해서”(258) 컵을 깨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화자가 보기에는 파올로의 행복에의 의지가 이제까지 “죽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259)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살 구실이 더는 없었다고 옮기고 있다.


7) 박종대 역의 <행복에의 의지>(2013)

박종대의 번역은 <토마스 만>이라는 제명의 소설 모음집에서 두 번째로 편입되어 있다. 이 번역은 현대의 한국어로 유려하게 번역되어 있고 독자로서는 거의 아무 어려움 없이, 난해하다고 소문난 토마스 만의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 관계, 성격 묘사 등의 까다로운 어휘나 문장들을 현대의 한국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에서 온다. 파올로의 특징을 설명하는 부분 중 “거리두기의 파토스”(44), “강제로 만들어낸 긴장된 차분함”(49)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Pathos der Distanz”는 제목과 마찬가지로 니체와 연결될 수 있는 부분으로 이전에는 “거리의 감정”(박찬기), “소원에의 열정”(이정태), “거리감”(강희영), “거리두기라는 격정”(한성자) 등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외래어로 옮겨 보다 분명하게 철학적, 시대적 연결 가능성을 보여준다. 파올로의 사랑을 설명하는 부분도 “우수에 젖은 열정”(45),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열정”(45), “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관능적인 열정”(55) 등으로 일관성 있게 옮기고 있다. 이러한 역자의 어휘 선택은 예술가 파올로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행복으로의 과도한 의지와 직접 연관됨이 잘 드러나도록 해준다.

특징적인 부분으로는 아다의 아버지가 빈에서 갑자기 몰락하고 뮌헨으로 온 계기를 “갑자기 퇴폐주의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48)라고 번역한 부분을 들 수 있는데, 원문의 “in Décadence geraten”을 이렇게 옮겼다. 이제까지 이 부분은 대체로 경기가 나빠졌든 혹은 남작의 실패든 경제적인 몰락으로 해석되어 왔고 강희영만이 “타락”(17)했다고 해석했다. 또한 아다 아버지에 대한 파올로의 이 설명만 듣고 화자가 이 가족이 유대인인가를 물어보기 때문에 이 설명 부분은 작가의 반유대적 성향과 연결지어 해석되는 중요한 대화로 여겨진다. 그러나 박종대의 해석은 아다의 아버지가 물질적으로 부유할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조예가 깊어 세기말의 흐름인 데카당스에 빠졌음과 연결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그가 파올로의 예술을 잘 이해하고 있고 딸의 “지속적인 행복”(62)을 위해 처음에는 결혼에 반대하다가 5년 뒤 이를 번복한 배경에 대한 부가적 설명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혹은 후반부에서 화자가 로마에서 아다의 약조를 파올로에게 전해주었을 때 보통 그 말을 간직하거나 새겨두겠다고 번역하는 것과 달리 적극적으로 “나는 그 약속을 지키겠어.”(58)라고 강하게 번역한 부분이나, 5년 만에 만나 아다의 전갈을 전해준 뒤 “그의 무덤덤한 어조”(58)라고 원문에 없는 형용어 설명을 덧붙이거나, 트레비 분수에서 컵을 깼을 때 보통은 예민해서나 신경이 날카로워서라고 번역하는 부분을 “마음이 부산하니까”(64)라고 옮긴 부분들은 역자의 독특한 해석 특징을 보여준다.


8) 김현진 역의 <행복을 향한 의지>(2020)

김현진은 <토마스 만 단편 전집 1>의 세 번째 소설로 이 소설을 편입시키고 있다. 김현진의 번역 역시 자연스럽고 잘 읽히며 마찬가지로 이는 토마스 만의 깊은 이해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번역의 특징은 섬세한 설명에 있는데 해석을 풀어서 혹은 새로이 곁들여 접붙이는 데 있다. 이러한 번역행위는 작품이 잘 읽히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파올로가 새 학교에 적응해야 할 때 저항을 하지 않는 태도가 이제껏 “소극적인 태도”(이정태), “피동적인 태도”(강희영, 14), “아주 수동적 태도”(한성자, 236)로 번역되었다면 김현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79)로 옮기고 있고, 부모를 따라 학교를 옮기지 않을 때 “학교를 바꾸면 안 된다고 해서”(81)로 옮기고 있다. 혹은 아다의 아버지 묘사에서도 “그러다가 갑자기 몰락하게 되었대”라고 번역하고 이어 “이제는 곤경에서 벗어나”(84)라고 원문에는 없는 상황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다른 한편 파올로의 연애에 대한 긴장된 태도를 적극적으로 강조해 옮기고 있다. 예를 들어 아다를 화자에게 처음 소개하러 갈 때 보여준 파올로의 “숨막힐 듯이 긴장된 정적”(86)이 아다의 말을 전달했을 때 파올로가 보인 태도에도 똑같은 어휘로 반복된다(99). 김현진은 또한 프로이트에게서 강조된, 세기말의 화두어이자 핵심어 가운데 하나인 “unheimlich”를 화자와 주인공의 관계에 일관된 어휘로 옮긴다. 이 어휘는 최근에 “친근한낯선”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실제 토마스 만의 작품에서도 화자가 주인공과 이제까지의 가까운 관계에서 낯섬을 느끼는 관계에 사용되고 있다. 역자는 이를 잘 드러낸다. 화자가 첫사랑에 빠진 파올로를 “매우 섬뜩하게”(80) 바라보고, 아다와의 연애에 집중하는 주인공 파올로를 볼 때 느끼는 “섬뜩함”(89), “섬뜩한 정적의 분위기”(91)로 말이다. 토마스 만 전공자인 역자는 후기에서 “보잘 것 없는 에피소드를 끌고 나가면서 한 예술가 기질의 인간의 집념과 그의 죽음과의 투쟁을 형상화내고 있는 작가의 역량”(378)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래의 번역문은 작품의 말미 부분에 해당이 되는데 주인공 파올로의 죽음의 성격을 정리하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박종대와 김현진은 모두 원문을 살리면서 각자의 개성이 담긴 언어로 번역해내고 있다. 김현진은 죽을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좀더 강조하고 있다.


그건 예정된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오래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의지, 즉 행복에의 의지가 아니었던가? 행복에의 의지가 충족되자 그는 투쟁이나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다. 더는 살아야 할 구실이 없었던 것이다.(박종대 65)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죽음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의지, 오직 행복을 향한 그 의지가 아니었던가? 행복을 향한 자신의 의지가 충족되자, 그는 어떠한 투쟁도 저항도 할 수 없이 죽어야만 했다. 그에게는 살기 위한 구실이 더는 없었던 것이다.(김현진 108-109)

3. 평가와 전망

이 소설은 토마스 만이 본격적으로 번역되던 50년대 말부터 번역이 시작되어 이후에도 자주 번역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말 이후 독문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번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때, 다른 번역본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독일어 원전에서 옮겨지지는 않았다.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로 한 중역본의 시기를 거쳐 독일어 원전에서 한국어로 직접 번역하는 시기로 이행되었다. 앞으로 3개 국어가 가능한 비평가가 나와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하는 것도 번역 비평과 관련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어느 나라든지 번역사의 초창기에는 중역의 시기를 거친 경우가 많기에 이에 대한 일방적 비판을 하기보다는 특정 시기의 번역행태와 양식, 문화로서 인정하고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70년대 이후 한글세대가 등장하면서 우리말이 자연스러운 번역이 시작되었다. 특히 한성자 이후로 한국 독자들이 작품의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해도가 높고 가독성도 높은 번역본들이 복수로 나왔다. 박종대, 김현진의 두 번역본은 상당히 완결성이 높은 번역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번역본들이 세심한 부분들에서 혹은 문체상의 차이로 주로 구분이 된다면, 앞으로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려면 보다 새로운 해석에 기반한, 혹은 새로운 독자층을 염두로 두고 새로운 언어로 옮겨진, 보다 차별성을 염두에 둔 번역이 나와야 할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유영태(1958): 행복의 의지. 신태양사.
박찬기(1960): 행복으로의 의지. 양문사.
최현(1971): 행복에의 의지. 상서각.
강희영(1971): 행복에의 의지. 일지사.
이정태(1971): 행복에의 의지. 박문사.
한성자(1998): 행복에의 의지. 민음사.
박종대(2013): 행복에의 의지. 현대문학.
김현진(2020): 행복을 향한 의지. 부북스.

최윤영


바깥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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